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7화 (7/29)

#7.

안토니아는 이스베르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도회 때까지 티 파티에 얼굴을 더 비추지 않기로 했다.

아니, 이스베르가의 조언이 없었더라도 나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지난주 렘버트 부인의 그 1화가 나간 뒤로, 크롬프트 상단이나 세르히 백작가 쪽으로 문의가 잔뜩 들어왔으니까.

‘마기나를 믿지만, 처음엔 좀 도와줘야 하니까.’

아, 물론 루퍼스를 놀리는 것도 안토니아는 잊지 않았다.

루퍼스는 잡지를 반쯤 읽다가 도무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덮어 버렸다.

당연히 순진한 소년의 얼굴이 붉은 사과처럼 어여뻐진 것도 덤이었고 말이다.

‘나 이제 밖에 못 나가!’

루퍼스는 당당하게 칩거 선언을 했다.

‘뭐, 덕분에 제작이 쭉쭉 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물론 상단 일만으로 바쁜 건 아니었다. 며칠에 한 번씩 이스베르가와 만나 사교계 예절 교육을 들어야만 했다.

이미 회귀 전 들을 만큼 들은 거라 익숙했으나 안토니아는 하나도 모르는 척하며 수업에 임했다.

거기까지만이라면 그럭저럭 티 파티에 얼굴 비출 시간 정도야 낼 수 있었겠으나, 또 한 가지 안토니아에겐 일이 있었다.

‘소백작,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리카르도와 외출하는 게 좋겠어요.’

‘대공 전하와요?’

‘에스코트에 익숙해지는 게 좋으니까요, 데뷔탕트 무도회 때 파트너를 정하건 안 정하건 그건 소백작의 자유지만 아예 춤을 추지 않을 생각은 아니잖아요?’

아예 춤을 추지 않긴.

당연히 안토니아는 그날 춤을 출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영지에 내려가기 전에 쓸만한 정보도 얻고 얼굴도 많이 알려 둬야 그다음이 편하지.’

안토니아는 돈벌이에 매우 진심이었다.

황제는 훌륭한 세수원이 되는 지방 영주에게는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수탈하는 걸 봐준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일주일 중 4일은 대공저에 가 춤 연습과 예절교육을, 주말에는 리카르도와 외출에 나서느라 티 타임에 나설 시간이라곤 없었다.

“아휴…….”

“왜 또 한숨이셔요? 대공 전하와 데이트시잖아요?”

“그게 좀 껄끄러워서…….”

리카르도와 바깥에서 만나는 건 열흘만이었다.

물론 대공저에서 춤 연습을 할 때 종종 얼굴을 마주치긴 했으나, 영 껄쩍지근했다.

‘유글란스 백작은 그냥 맘 편하게 선물을 받으라고 했지만…….’

리카르도는 이상하게 자신과 만나는 날마다 꽃을 보내곤 했다.

이스베르가는 오랜 관습 중에 그런 게 있다곤 말했지만…….

‘그래도 그냥 누나의 후견인한테 하는 행동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나?’

게다가 매번 자신을 볼 때마다 뭔가 불편한 얼굴이라 더 좀 그랬다.

‘오늘은 아예 붙잡고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라도 봐야 하나.’

안토니아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을 쯤, 폴리가 마지막 리본을 묶었다.

“자, 다 되었어요! 오늘도 대공 전하가 타운하우스로 마중 나오기로 했다면서요?”

“응……. 그냥 상점가 입구에서 봐도 된다고 했는데.”

“다 우리 아가씨가 예뻐서죠!”

폴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뿌듯하다는 듯 굴었다.

마침 그때 타이밍 좋게도 현관 종소리가 울렸다.

안토니아는 힘없이 보닛을 매며 아래층으로 발을 옮겼다.

* * *

“초면이네, 세르히 소백작.”

그러나 문 앞에 도착한 건 리카르도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리카르도라면 뺨에 키스를 할 정도로 반겨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전 남편이자, 막내 황자인 제레미야 안세르 솔리스였으니까.

아직 인사도 나누지 않은 사이라 집 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한 건지, 그도 아니면 본인이 들어오기엔 누추하다고 생각한 건지.

제레미야는 집 바로 앞 대로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자신이 왔다고 광고하듯 화려한 황실 전용 마차를 세워 놓고 말이다.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안토니아는 지금은 자신의 표정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니었다면 대번에 아는 얼굴을 하고 말았을 테니까.

‘결혼한 여자가 어디서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는가!’

‘누굴 유혹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 머리 꼴은 뭐야!’

자신이 나름대로 괜찮은 옷을 입고, 폴리가 아침나절 열심히 만져 준 머리 모양이라서일까.

마치 트라우마처럼 과거 제레미야가 떠들던 말들이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말하던 제레미야 본인은 최소 마기나가 고급품으로 만든 정장이나, 하녀가 한두 시간은 꼬박 정성 들인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가 아니야, 나는 열여덟 살의 세르히 소백작이고 쟤도 열여섯의 막내 황자일 뿐.’

아직 인생 어디에도 서로 엮인 적이 없었다.

물론 저 빌어먹을 인간이 엮이려고 찾아왔지만.

안토니아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제레미야의 옛 목소리들을 애써 누르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귀하는…….”

그 말에 제레미야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쯧, 하긴 수도에 처음 왔으니 당연한가.”

제레미야의 옆에 있던 시종이 허리를 숙이며 대신 말했다.

“제국의 4황자, 제레미야 안세르 솔리스 님이십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미친 놈 같으니, 예전부터 예의, 예의 운운은 엄청 했었지.’

또 거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 수도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 줄 알아? 세르히 백작령이 가난해서 내 옷 한 벌 제대로 못 맞추는 거 아니냐고 그러더군!’

세수가 모자라다며 그의 형인 황태자가 타박이라도 한 건지, 그는 입이 불퉁 튀어나온 얼굴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내 체면에 먹칠할 셈이야?! 귀한 몸을 데려왔으면 일을 똑바로 하란 말이야!’

누가 자기랑 결혼하고 싶어서 결혼한 줄 아나, 명령이니 했지.

아무튼 덕분에 안토니아는 뼈 빠지게 일해야만 했었다.

눈 아래의 거뭇거뭇한 흔적이 없어지긴커녕 나날이 색을 더해갈 정도로 말이다.

안토니아는 울분을 한 번 더 억눌렸다.

내일 조간신문에 황자 폭행 사건으로 이름을 올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인사 올립니다. 황자님. 세르히 백작가의 안토니아입니다.”

“흠, 흠. 나쁘지 않군.”

그는 마치 안토니아를 품평하듯 바라보더니 황공해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기뻐하게, 소백작. 이 내가 그대에게 영광된 제안을 하려고 하니까.”

‘보통은 영광 운운은 받는 쪽에서 하는 거거든.’

안토니아는 혹시나 속내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갈까 조심하며 묵묵히 그 손만 바라보았다.

“이번 황실 무도회에서 그대가 사교계 첫인사를 올린다지?”

“그렇습니다.”

“나 또한 그 무도회에서 처음 선을 보이게 되었네, 우연 한 번 대단하고 영광스럽지 않은가?”

안토니아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할까 고민했다.

“비록 내가 조금 어리지만, 워낙 특별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 부황께서 특별히 허락해 주셨거든.”

‘특별 좋아하네, 황태자에게 떼써서 겨우 나가게 된 거였으면서. 하긴, 워낙 난봉꾼 짓을 좋아하니까.’

그래, 자신이 죽던 그 날 밤도 말이다.

‘아이참, 주인님. 이러다 마님이 오시면 어떻게 해요.’

‘걱정하지 마, 내일 밤이나 되어야 돌아온다 했으니. 뜸은 그만 들이고 냉큼 안기래도.’

둘이서 좋다고 속살거리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회귀한 지도 벌써 6년이나 되었는데 말이다.

제레미야는 그사이 계속해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더니, 이윽고 정말로 안토니아의 귀를 의심케 만드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말이야, 요즘 그대를 부황께서도 칭찬하시고 사교계에서도 제법 이름이 나지 않았는가.”

좀 불안해졌다.

안토니아는 한껏 미간을 찌푸려 헛소리 그만하고 꺼지란 얼굴을 보이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생각했다네, 그런 소백작이라면 에스코트 하는 사람도 특별해야 하지 않겠나 하고 말이야!”

제레미야는 안토니아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대의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 주려 하네, 어떤가! 기쁘지 않은가.”

그는 얼른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안토니아에게 눈치 주었다.

그러나 정작 안토니아는 그가 다가올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뭐라고 쏘아 줘야 하는데, 하도 오랜만에 저 재수 없는 얼굴을 보아서일까 머리 회전이 잘되지 않았다.

‘심장이……. 목이…… 아파.’

6년간 꾹꾹 눌러 왔던 기억이 제레미야가 한마디씩 할 때마다 새어 나오듯 흘렀다.

‘목석같은 데다 칙칙한 여자를 무슨 재미로 안아?’

‘이혼, 이혼이라고? 어디 주제도 모르고 그런 말을 내뱉어!’

‘내가 왜 다른 여자를 찾았겠어, 안토니아 당신한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안 돼, 난 이혼 못 해 줘! 안 돼!’

그날 밤, 자신을 난도질하듯 소리치다 끝내 제 목을 졸랐던 그 손이라는 생각에 몸이 흔들렸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나쁘지 않으니 상처가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그는 제 안에서 예리한 칼을 들고서 난도질하려 숨죽였던가 보다.

‘제대로 거절, 거절해야 해.’

혼탁한 머릿속으로 안토니아는 말을 찾았다.

저거 때문에 자신이 지금껏 공들여 쌓아 온 걸 와르르 무너트릴 수는 없었으니까.

“계속 날 기다리게 할 셈인가? 수줍은 건 알겠지만.”

그러고서 히죽 웃는 얼굴에 안토니아는 목구멍이 정말로 콱 막히는 걸 느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안토니아가 주먹을 꽉 쥔 그 순간.

“소백작이 뭘 기다리게 했단 말이지, 조카님?”

왱알거리던 제레미야와 달리 이상하게 포근한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울렸다.

그는 간신히 서 있던 안토니아의 몸을 당기듯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소백작?”

리카르도 트라체스 대공이었다.

‘……어?’

분명 리카르도라고 인지했는데.

순간적으로 또 다른 과거의 감각이 떠올랐다.

동부 대신관에게 쫓겨 숲을 뛰어다니던 새벽의 그 든든한 가슴팍이.

‘말도 안 돼, 전혀 다른 사람인걸.’

순간적으로 그 아름답던 소년 리샤르를 떠올렸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리카르도는 너무도 대단하여 얼핏 오만할 정도로 보였으니까. 아예 카테고리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안토니아는 천천히 주먹을 풀고서 리카르도를 보았다.

그가 마치 걱정 말라는 듯 옅은 미소를 보였다.

“제가 늦었습니다. 소백작.”

“……아니에요, 대공 전하.”

리카르도는 그대로 안토니아와 친근하게 서 제레미야에게 말했다.

“흠, 수, 숙부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조카님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쪽의 소백작과 선약이 있거든.”

그 말에 제레미야의 얼굴이 단숨에 불퉁해졌다.

안토니아도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을 한 날이면 집에 돌아와서 날 엄청 괴롭혔거든.’

온갖 꼬투리를 잡으면서 말이다. 당장 그의 옆에 있는 시종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만 봐도 알 만했다.

‘뭐, 동정할 만한 남자는 아니지만.’

저 시종도 제레미야가 자신과 결혼했을 때 따라왔었다.

그는 원래 황태자의 사람으로 온갖 감언이설과 유언비어 등으로 자신과 제레미야 사이를 이간질했다.

아니, 그뿐만이면 다행이지, 마치 안토니아의 기를 살려 줘선 안 된다는 듯 제레미야를 부추겼던 자이기도 했다.

‘쟤만 없었어도 저 인간은 단순하고 바보라서 다룰 구석이 있었는데.’

제레미야가 좀 좋게 생각할 만하면 마구 들쑤셔서 불을 붙여 놨으니까.

“흠, 거기까진 몰랐습니다. 수도에 갓 올라왔으니 시간이 많을 줄로만 알았거든요.”

“그래서 조카님, 아직 용건이 더 남았는가?”

“네, 그럼요. 소백작이 무례하게도 제가 답을 기다리게 하여 지체한 것뿐입니다.”

“답이라고?”

제레미야를 향할 때는 한없이 따갑던 자안이 고개를 돌려 안토니아를 볼 때는 마치 봄볕처럼 따사로워졌다.

“소백작, 얼른 답변을 주고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래야지요.”

안토니아는 배에 힘을 주었다. 리카르도가 끼어들어 준 덕인지, 아니면 리샤르의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좀 마음이 편해졌다.

리샤르는 회귀하면서 아예 새롭게 맺은 인연이었으니까.

‘회귀했다고 똑같이 흘러가진 않아. 평범한 것 하나도 모두 바꿀 수 있어.’

그러나 제레미야는 안토니아가 답하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며 제멋대로 말했다.

“그래, 수줍어서 답하기가 어렵겠지. 다 이해하네, 소백작. 그것만으로도 답변은 충분해.”

“네……?”

“내가 파트너가 된다는 게 감격스러워서 네라고 답하는 것조차 가슴 떨리는 모양인데, 다 이해해. 긍정으로 알아들으면 되겠지.”

‘쟤가 무슨 헛소리야.’

감격스러워서 가슴이 떨리긴, 죽이고 싶어서 속이 답답해졌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황자님.”

“뭐?”

반사적으로 부정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적절한 이유를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리카르도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맞아, 소백작의 말이 맞다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님.”

“이미 소백작의 파트너는 나로 정해졌거든, 조카님.”

“네?!”

제레미야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안토니아를 향해 삿대질했다.

“말도 안 됩니다. 소백작이 분명 숙부님이 파트너가 아니라고……!”

“그건 일주일도 더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사교계에서 첫 번째 청은 거절하는 게 보편적이지.”

리카르도는 조심스레 안토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마치 누가 보면 안토니아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일 법한 눈이었다.

“제가 굼뜨게 행동해, 그대에게 두 번째 청을 더디게 했더니 다들 소식이 느린가 봅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리카르도는 자신에게 파트너 청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제레미야랑 손 잡느니 이쪽이 훨씬 낫지.’

대공에게 좀 뾰족하게 남아 있던 못된 감정이 슬쩍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저야말로 요즘 무도회 준비로 바빠 다른 분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 보니 정정하지 못했어요.”

“어디 소백작의 잘못이겠습니까. 제가 좀 더 티 내고 다녔어야 할 일이지요.”

제레미야는 두 사람의 더없이 부드럽고 어쩐지 간질간질한 대화에 더욱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말도, 말도 안 돼요! 거짓말이야!”

“뭐가 거짓말이란 말이냐, 조카님. 네 ‘형님’이 아시면 퍽이나 좋아하겠구나.”

“…….”

제레미야는 급작스레 나온 황태자 이야기에 입을 꾹 다물더니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곤 황실 마차 때문에 은근히 구경하던 귀족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황실의 일을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건 불경죄라는 걸 잊지 말아!”

쾅-! 소리를 내며 황실 마차의 문이 닫혔다.

서둘러 출발하는 모양새가 마치 도망치는 것 같았다.

* * *

“괜찮습니까, 소백작?”

제레미야가 자리에서 없어진 뒤, 긴장이 풀려선지 안토니아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정말로 예전처럼 의식을 잃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고 일시적이었음에도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에게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안토니아의 손을 단단히 잡고서 그녀를 응접실 안 소파까지 부축했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현기증 같은 것도 없는걸요.”

“오늘 일정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니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페라는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습니다. 소백작이 원한다면 대관이라도 하지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오히려 아연해졌다.

“아니요, 아니요. 전하. 절대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안토니아는 양손을 뻗어 그를 제지하듯 말하다, 앞선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전하, 황자님을 막아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파트너는…….”

다른 귀족들에 의하면 리카르도 또한 이번 무도회가 사교계에 제대로 얼굴을 비추는 첫 자리인 모양이었다.

비록 이스베르가가 자신의 사교계 후견인이라고 하지만 그가 그런 희생을 할 필요는 없었다.

“더 좋은 분이 있지 않겠어요?”

“……누구 말입니까?”

리카르도가 어쩐지 정색했다.

‘왜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지?’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말이다.

객관적으로 자신은 뒷받침해 줄 부모조차 없는 지방 귀족 영애가 아닌가.

“후작가 영애 중에서도 비슷한 또래가 계시고, 아, 그리고 황후 폐하의 질녀도…….”

실제로 리카르도가 예전 삶에서 파트너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소백작이 싫은 게 아니라면 저는 당신이 가장 좋습니다.”

“……네?”

순간 고백하는 줄 알았다.

‘파트너지, 파트너 이야기지.’

이 사람은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예전에는 그토록 거만하게 보였던 사람이 왜 이렇게 깍듯한 데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심처럼 들리는 걸까.

‘내가 정이 고픈가.’

예전 삶보다 좋은 사람으로 넘쳐나는 데도 오히려 욕심쟁이가 되어 버린 걸까.

안토니아는 차분하게 숨을 내쉬며 그에게 답했다.

“싫지는 않아요, 오히려 감사하죠, 저는 수도에 연고도 없으니까요.”

“……그럼 다행입니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말에 정말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착각하지 말자.’

안토니아는 저 얼굴을 계속 보고 있다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공 전하는 그냥 이스베르가 님 때문에 돌봐 주시는 것뿐이야.’

착각해 봐야 나중에 고생하는 건 자신일 테니까.

게다가 그는 황족이지 않은가. 오래 엮여 좋을 게 하나 없었다.

다만.

‘오늘 제레미야가 나타난 걸 보면, 황태자 쪽에서 뭔가 오해하고 있거나 알아차린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게 찾아올 리가 없었다.

제레미야의 성격을 미루어 보면 자신은 촌스럽고 격 떨어지는 지방 귀족일 거라, 백번 생각해도 파트너 신청을 할 이유가 없었다.

‘어느 쪽이건, 나에게 간섭한다고 하면 가만히 피하기만 하진 않을 거야.’

자신이 왜 지금껏 이미지 관리를 했는데.

괜히 순진하고 착한 아가씨인 척 대화를 해 온 게 아니었다.

‘오늘도 제레미야를 얼마든지 쳐낼 수 있었어. 정신 차리자. 또 내 삶에 손 닿지 않게 하려면.’

안토니아는 그걸 위해서라면 리카르도의 호의를 좀 더 이용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 * *

챙-!

검과 창이 부딪쳤다.

몇 번째 겨룬 것일까, 대공저에서 체력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드비조차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듯 창을 내려놓았다.

“못하겠습니다! 전하!”

당당하게 손들며 외치는 그 모습에 리카르도는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드비 외에도 널브러진 다른 기사들을 보며 되었다는 듯 검을 다른 하인에게 던져 주었다.

드비와 다른 기사들은 그 모습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대공 전하의 컨디션이 좋아도 너무 좋았으니 말이다.

드비는 쉬라고 짧게 말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리카르도를 졸졸 따라붙었다.

“닷새 전만 해도 죽을상을 하시더니,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그 말에 리카르도는 입 닫으라는 듯 드비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크롬프트인가 하는 소백작님의 소꿉친구 이야기 들었을 때는 어깨가 완전 축 처져 있지 않으셨습니까.”

“조용히 해.”

“에이.”

그러나 드비는 어떻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냐는 듯 킥킥 웃었다.

그 소설 같던 렘버트 부인의 1화가 나왔을 때 리카르도 또한 그 내용을 읽었었다.

그날부터 그가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곁에서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으니까.

한창 서류 작업을 하다가도 벌떡 일어서서 방 안을 몇 번이나 서성거리거나, 자신과 대련하다가도 리카르도답지 않게 검을 놓치기까지 했다.

‘루퍼스 크롬프트에 대해 조사해 봐.’

심지어 대공가 정보부에 정보 상단주를 조사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더 가관인 건 안토니아가 왔을 때였다.

이스베르가, 아니 그건 겉으로만 드러난 구실이었고 실제로는 본인이 원해서 안토니아의 춤 연습 상대가 되었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가 대공저에 온 날이면 늘 고민하곤 했다.

‘지금이라도 밝힐까.’

‘그러시든가요. 악! 왜 때리셔요.’

‘네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아니, 전 5년 전부터 대공 전하라고 밝히는 게 좋겠다고 했거든요?!’

이 화제로 몇 번쯤 얻어맞은 드비는 리카르도의 연애사에 조금은 덜 참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놀릴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리카르도는 말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마다 안토니아의 타운하우스로 꽃을 보내라고 이야기했다.

‘……적어도 내가 호감이 있다는 건 알아주면 좋겠는데.’

드비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소백작 아가씨는 누가 봐도 확실하지 않은 일엔 어림짐작 안 할 것 같은 타입이던데.’

특히나 안 그래도 모험할 일 많아서 어쩔 수 없을 거라고 한 건 리카르도 본인이지 않던가.

‘왜 파트너 신청은 안 하셔요? 그러다 홀랑 빼앗기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안토니아가 아직도 날 낯설게만 보는데 어떻게 해……. 게다가.’

리카르도는 다른 일엔 안 그러면서 유독 안토니아에게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조금만 잘못했다간 상처받을까 고민하는 듯했다. 고작 파트너 신청일뿐인데 말이다.

‘날 여전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드비, 넌 보통 데이트 신청 어떻게 해?’

심지어 평소의 리카르도라면 절대 묻지 않을 질문까지 했다.

‘‘진짜로 예쁘시네요! 저에게 시간 내줄 생각 있으시면 대공저로 연락 주세요! 하는데요…….’

솔직히 드비는 너무도 놀라 얼결에 진심을 담아 조언을 해버렸다.

은근히 성공확률이 높은 방법이기도 했고!

물론 두어 번 만난 뒤에 차일 때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기껏 진심을 담은 게 보람 없게 리카르도는 따가운 시선만 보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나한테서 듣는 연애담만큼 영양가 없다고 한 건 대공 전하셨으면서. 왜 물어보신 건지.’

뭐, 그래도 리카르도가 그렇게 안달 내는 모습을 보는 건 5년 전 이후 처음이라 즐거웠다.

오히려 지금이 더 못 봐 줄 지경이었다.

‘그러게 왜 막내 황자님은 대공 전하께 기회를 주셔 가지고.’

그날, 매번 망설이고 고민하던 리카르도는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여유롭게 안토니아의 파트너가 자신이라고 이야기했다.

다행히 그 눈치 빠른 아가씨는 장단을 잘 맞춰 주었고 말이다.

‘불쌍한 대공 전하, 좀만 어릴 때 얼굴을 보전하고 자라셨으면 그 소백작님은 눈치가 빨라서 분명히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솔직히 자신도 옆에서 같이 자라온 게 아니었다면 알아볼 자신 없을 정도로 너무 다른 방향으로 커 버렸다.

물론 덕분에 어릴 때 그렇게 듣기 싫어하던 예쁘단 소리는 안 듣게 되었지만.

‘예뻐지려면 어떻게 하지.’

‘……네?’

안토니아와 재회한 뒤 종종 저렇게 소름 끼치는 소리를 할 때마다 무서웠다.

도대체 리카르도가 안토니아를 얼마나 좋아하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게다가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드비는 그날, 리카르도의 명령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정말 우연히 마주친 대화긴 했지만.

‘대공 전하, 제게 지나치게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지나친 예의라니요?’

‘다른 분들께는 하대하시면서 제게만 어째서 그렇게 공대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리카르도의 표정을 누군가가 찍어서 기록해 뒀어야 했는데.

드비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의 얼굴이 당연히 ‘안토니아 너니까.’라고 외치는 듯했으니까.

물론 아직 리카르도와 많이 만나지 못한 안토니아가 그걸 알아차리는 건 무리였지만.

‘그건 소백작이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큼이나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소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름대로 이치에 맞는 답을 말했다.

‘이스베르가 님이 절 돌봐 주시기 때문이란 건가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도 됩니다.’

바보 같은 우리 대공 전하. 드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럴 때, 그게 아니라 당신이 특별하다고 말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뭐, 자신의 똑똑지 못한 머리로도 이해는 갔다.

리카르도는 5년 전에 신분을 숨겼었단 사실을 밝히면 안토니아에게 정말 미움받을지도 모른다고 어째선지 생각하는 듯했으니까.

‘왜 미움받는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안토니아는 그렇게 쩨쩨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옆에서 킥킥거리던 드비의 표정이 쉴 새 없이 바뀌는 걸 본 리카르도는 괜히 짜증이 나 드비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악! 전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네 얼굴이 시끄러워.”

“네?!”

드비는 황당해하며 외쳤으나 매정한 자신의 주인 리카르도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홱 돌려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드비는 괜히 부루퉁한 얼굴을 했으나, 이내 실실거렸다.

‘소백작님이 오래오래 전하 마음 몰라주시면 좋겠네.’

리카르도의 고통은 곧 드비 자신의 즐거움이었다.

그는 리카르도의 목욕 시중을 준비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정말로 요즘만큼 쭉 인생이 재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무도회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흘렀다.

안토니아는 그사이 리카르도와 두어 번 외출을 했고 이스베르가의 예절 교육이나, 춤 연습도 괜찮게 해냈다.

‘정말 금방 늘어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

‘모두 이스베르가 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이에요.’

‘네 겸손한 모습이 귀엽긴 하지만, 다른 귀족들 앞에서는 조금 거만하다 싶을 정도로 행동하는 게 좋단다.’

몇 주간 교육을 하며 친해진 덕에 이스베르가는 이제 안토니아에게 지나치게 예의 차리지 않았다.

오히려 친언니처럼 대해 주어 안토니아도 편했다.

실제로 이스베르가도 그런 말을 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안토니아에게서 언니란 소리를 듣고 싶네.’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왜 안 돼? 내가 괜찮다는데.’

‘……지금은 좀 조심스러워요.’

‘이해는 해, 내가 사교계에 얼굴을 자주 비출 때도 유글란스 백작을 제외하곤 다 나를 어려워했거든. 그래도…….’

‘네?’

‘계기가 생기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굳이 꼬아서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스베르가 님은 나와 이번 무도회가 끝난 뒤에도 계속 교류할 생각이신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이스베르가의 딸과도 친해졌다.

여섯 살 귀여운 어린이는 이스베르가의 딸이라서 그런지 말도 참 똑똑하게 하고 싹싹했다.

마치 조카가 생긴 것 같아, 그 때문에라도 이스베르가와는 인연을 유지하고 싶었다.

‘꼭 안토니아 이모 영지에도 여행 갈게요. 약속?’

‘좋아요.’

‘신난다! 엄마한테 꼭 가자고 할 거예요.’

단순히 작위 승계만 생각하고 접근한 이스베르가였는데, 어쩐지 그간 모자라던 가족의 경험도 함께 채워진 기분이었다.

물론 여전히 리카르도와는 좀 데면데면한 느낌이었지만.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오히려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이스베르가가 오랜만에 맡은 후견인이라 그런 건지 리카르도는 늘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조심스레 대했으니까.

심지어 춤 연습을 하다 자신의 실수로 발을 밟았을 때는 아무렇지 않아 했으면서, 그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정말 대역죄를 지은 사람처럼 사과하곤 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제게 좋은 찰과상 치료제가 있습니다. 제게 부딪히신 거니 멍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그냥 구두가 살짝 스친 것뿐인걸요.’

‘하지만…….’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대공 전하. 이렇게 호들갑 떨 정도가 아니에요. 전하는 도와주시려 하는 건데 이러면 오히려 제가 민망해요.’

‘……죄송합니다.’

도대체 왜 사과를 하는 건지. 늘 별것 아닌 일에도 툭하면 미안함을 표현하곤 해 마음이 복잡해졌다.

‘잠깐만 참으면 돼. 대공 전하는 바쁘신 분이니 이번 무도회가 끝나면 자주 볼 일 없을 테고.’

이번에 파트너가 된 것도 단순히 전 남의 편 때문이었고.

‘대공 전하가 황태자 쪽과 사이가 안 좋아서 정말 다행이지 뭐야.’

그러지 않았다면 리카르도가 자신을 그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줄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 * *

아무튼 그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어느새 무도회 날이 되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아가씨.”

“맞아요, 저희가 매번 이런 드레스 입자고 해도 싫어하시더니! 대공 전하께 감사드려야겠어요.”

유글란스 백작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폴리와 로레나가 연신 감탄했다.

안토니아의 눈 색과 맞춘 물빛 실크를 기반으로 잔잔한 레이스 원단이 어깨를 덮었다.

허리와 팔등 등 포인트가 될 부분은 다이아몬드와 유색 보석 몇 가지를 어우러지게 장식해 굉장히 화려했다.

물론 오늘 착용한 보석 또한 리카르도가 맞춰서 선물한 것이었다.

리카르도는 이 드레스에 어울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4벌의 드레스에도 맞춰서 보석을 잔뜩 선물했다.

‘이스베르가 님도 괜찮으니 받으라고 해서 받긴 했지만.’

역시 영 찝찝했다.

폴리와 로레나가 공들여 말고 땋고 올려 준 머리 모양도 매우 아름다웠다.

준비가 모두 끝났을 무렵, 이제는 놀랍지도 않게 리카르도가 방문했다고 하인이 알려 왔다.

* * *

“당신을 기다릴 수가 없어, 이곳까지 마중 나온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소백작.”

누군가가 들으면 설렐 것이 분명한 말에도 안토니아는 여전히 뭔가 자신이 놓친 게 있는 것처럼 찝찝했다.

게다가.

‘역시 몇 번을 들어도 안 어울려.’

회귀 전 원래 자신이 알던 리카르도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늘 날 보면서 차갑고 딱하다는 듯 보았는데.’

게다가 몇 마디 말을 했을 때도 차갑기 짝이 없었고 말이다.

‘뭐, 황태자와 적대하는 관계였으니 당연하겠지만.’

자신의 전 남의 편인 제레미야는 황태자가 손수 돌보는 막냇동생이었고, 우군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찬찬히 걸어 내려가며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오실 거라고 예상하지 못해 기다리시게 한 건 아닐까 모르겠네요, 대공 전하.”

매우 의례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어쩐지 리카르도는 무어라고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셔요, 대공 전하?”

“…….”

생각보다 긴 침묵이 자리했다. 리카르도는 한참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로 첫눈에 반한 남자처럼.

‘연출……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냥 내가 마음 편하고 싶어서 판단을 미루는 게 아닐까?’

꽤 긴 침묵에 안토니아는 몸이 배배 꼬일 것만 같았다.

그는 고문 아닌 고문 끝에서야 겨우 입을 열었는데, 그 말 또한 가관이었다.

“그날 함께 본 디자인화의 드레스라곤 믿기지 않는군요.”

“네……?”

“소백작이 입으니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드레스가 축복받은 기분입니다.”

이 남자, 정말 미친 것 아닐까.

리카르도와 함께 올라탄 마차 안에서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손부채질을 했다.

‘난 결혼까지 했었는데 말이야.’

너무나도 낯부끄러웠다.

하긴 결혼하긴 했어도 이렇게 달달한 대사를 들어 본 적이 있었어야지.

이쯤 되니 어째선지 자신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리카르도는 어쩌면 자신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아니, 근데 도대체 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리카르도쯤 되면 자신보다 더 아름답고 집안도 훌륭한 여성과도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인가 말이다.

‘설사 좋아한다고 해도 내가 장단 맞추는 건 피하자.’

사교계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리카르도는 지난 4년간 황제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일만 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 그냥 단순히 여성에 대한 면역이 없는 걸 수도 있어.’

그러던 중, 이스베르가가 자신을 돌보며 잘 대해 주라고 하니 경험 없는 그에게 풋감정이 든 걸지도 몰랐다.

‘면역 없는 대공 전하라니, 너무 안 어울리는 말이야.’

과거에는 그토록 오점을 찾기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면역이 없다면 없을 텐데.’

가족 같은 애정에는 마틴이나 폴리, 로레나 등 백작저 하인들 덕에 좀 익숙해졌다.

하지만 저렇게 연인 같은 말이라니.

지난 5년간 또래 남성이라고 해 봐야 귀여운 남동생 같은 루퍼스뿐이었다.

회귀 전에는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레미야의 상대로 맺어졌으니.

무도회에서 그 흔한 ‘같이 춤추시겠습니까.’ 같은 말조차 들어본 일이 거의 없었다.

‘진짜 기분이 이상해.’

회귀 전엔 접점도 없던 상대에게서 저렇게 거창한 소리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안토니아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리카르도는 참 기민하게도 그걸 눈치채고 물었다.

“걱정되는 것이 있으십니까?”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가 당신을 도울 테니까요.”

‘아니요, 당신이 더 걱정인데요.’

그나마 저는 회귀 전 세르히 백작이자 황자비였던 탓에 무도회 경험이라도 많았지.

어찌된 일인지 지금의 리카르도 트라체스는 자신이 보기엔 딱 사교계 초심자였다.

거기에 이성에게 면역까지 없는 상태라니.

‘이스베르가님의 동생이시니 망신당하게 둘 수도 없고……!’

안토니아의 마음속에 굳건한 의무감이 생겼다.

* * *

“트라체스 대공 전하와 세르히 소백작이 드십니다.”

시종의 힘찬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나도 다른 귀족처럼 조용히 들어오고 싶었는데.’

당초 목표는 그랬다. 그래서 적당한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었고.

‘그런데 어째선지 껄떡댈 법도 한 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단 말이야.’

루퍼스에게 알아보라고 하고 싶은 충동은 들었으나, 너무 사소한 일이기도 해서 관뒀다.

고민하던 차에 제레미야 때문에 리카르도가 자신의 파트너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당황하지 않으시는군요.”

“네?”

“보통은 이렇게 호명되어 들어오면 확 시선이 쏠리니 당황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당황할 리가, 회귀 전에 수도 없이 받았던 시선이었다.

물론 리카르도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수도에 와서 여러 일이 있었잖아요. 저는 많은 분들의 관심에 여전히 조심스럽긴 하지만 몇 번 티 파티에서 겪다 보니 괜찮아졌어요. 이스베르가 님이 미리 알려 주시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안토니아는 잔잔히 웃는 리카르도를 보며 당신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놀랄 기운을 다 빼 버린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물론 리카르도는 다른 의미로 매우 흡족해하고 있었지만.

‘역시 안토니아야, 똑똑하고 현명한 안토니아라면 당연히 대비하고 있을 줄 알았어.’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름 아닌 오늘 예정된 황제와의 대면 때문이었다.

“누님께 들었겠지만, 폐하께서 도착하시면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네, 괜찮아요.”

리카르도가 생각한 것보다 더 안토니아는 침착했다.

‘아니야, 안토니아는 겉으로는 불안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잖아.’

리카르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밤, 안토니아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참 빠르게도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빈께서 도착하신 모양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 전하. 제가 세르히 소백작인 이상 이르건 늦건 만나 뵐 분이잖아요.”

의연한 그 모습에 리카르도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자신의 손에 비하면 여리고 작은 안토니아의 손을 꼭 잡고서 만만치 않은 황제와 황태자가 선 홀 중앙으로 찬찬히 발을 옮겼다.

* * *

“먼저 와 있었구나, 리카르도.”

“어떻게 폐하를 기다리시게 하겠습니까.”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보던 황제는 안토니아에게는 단 한 번 시선을 두었다가, 곧장 리카르도에게 말했다.

‘내게 흥미가 있단 거야.’

겨우 잠깐이었으나 가슴에 콱 박힐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으니까.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넉살 좋게 리카르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짐이 그리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리카르도는 그 말에 옅은 미소를 보였다.

황제는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매정한 녀석 같으니, 그보다 언제까지 짐을 기다리게 할 생각이냐. 요즘 수도를 떠들썩하게 한 사람을 줄곧 독차지하려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리카르도는 고개를 젓고 안토니아를 향해 손짓했다.

“폐하, 이쪽이 누님께서 후견인을 맡은 안토니아 세르히 소백작입니다. 소백작, 인사하세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곧장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그것도 평범한 게 아니라 무릎을 정중히 굽히고 허리를 함께 숙이는, 오로지 황제께만 올릴 수 있는 가장 정중한 방식으로 말이다.

“폐하의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흐음.”

황제의 눈이 대번에 달라졌다.

그는 기대한 대로 ‘이스베르가가 재밌는 걸 준비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황제뿐만이 아니라 홀 안에 모인 귀족이나 곁에 있던 황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겠지, 이 인사법은 이제 잊은 사람도 많으니까.’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무릎을 굽히는 속도나 허리의 각도 등이 중요했다.

“일어나게, 소백작.”

근엄한 황제의 말투 속에서 흥미로움과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는 안토니아가 일어서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이 인사법은 일어나는 것까지 정확해야 완성되니까.

마치 짧은 독무를 추는 것처럼 우아하고 완벽한 몸짓에 황제가 걸작이라는 듯 박수를 쳤다.

그러자 홀 내가 금세 박수 소리로 가득해졌다. 황제가 칭찬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 어린 소백작이 연회 시작을 참 즐겁게 만들어 주는구나!”

안토니아는 그 만족스러운 목소리에 그저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표정 없는 것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그 모습 또한 황제에게는 재미있게 보였을 것이다.

이 모습까지 계산한 것처럼 보여서 말이다.

‘폐하께서는 영리한 사람을 매우 좋아하시니까.’

안토니아는 처음부터 황제를 마냥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 리카르도가 자신의 파트너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 결정했다.

‘폐하 또한 내 편으로 만들겠다고 말이야.’

만약 제레미야가 그날 제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 남의 편이 한번 관심을 둔 이상, 도망치는 건 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남의 편과의 관계는 최악이었지만 폐하와는 아니었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 연회 첫 대면을 준비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황실 막내며느리였으니까.

* * *

황제는 첫인사 후에도 안토니아를 바로 놓아주지 않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구나.”

“괜찮습니다. 모두 지난 일이지 않습니까.”

“흐음, 철이 일찍 든 모습이라 짐이 좀 마음이 아프구나, 그런 것 모두 보살펴 줬어야 하는 것인데.”

황제의 말에 안토니아는 속으로 웃었다.

8년의 며느리 경력으로 안토니아는 아주 잘 알았다.

황제는 절대 먼저 손 내밀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귀족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독할 정도의 실력주의자였다.

‘폐하께서는 자신의 동복형제를 모두 죽이고 제위에 오르신 분이니까.’

심지어 지금의 제위 경쟁도 말이다.

회귀 전, 황태자는 늘 안달복달했었다. 황제는 그를 황태자로 임명해줬음에도 확신을 주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안토니아는 황제의 저 말에 냉큼 매달릴 생각이라곤 없었다.

“이미 저는 황제 폐하께 많은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짐에게 보살핌을 받았다고?”

“폐하께서 굳건히 버텨 주시어 제국 내가 혼란스럽지 않았지요. 덕분에 저는 어릴 때도 영지를 잘 돌볼 수 있었습니다.”

황제의 눈꼬리가 재밌다는 듯 휘어졌다.

“또한 수도 경비대가 성실히 일하여, 제가 작은아버지에게서 위협받을 때 빠르게 구하러 와 주었으니 그 또한 폐하께서 베푸신 것이지요.”

“그리고 또 있느냐?”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황실 무도회를 열어 절 불러 주셨으니, 그 또한 제게 보살핌을 내어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황제가 크게 웃었다.

좀처럼 공식 석상에선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기에 연회장 내의 많은 중앙 귀족들이 긴장했다.

황제가 저렇게 웃음을 터트린 건 12년 전, 레이디 트라체스 이스베르가의 데뷔탕트 무도회 이래로 처음이었다.

‘이스베르가 님이 후견인을 맡았다더니.’

‘신문에서 본 거랑 인상이 너무 다르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 지방 귀족 정도로 생각했는데.’

‘몰라서 용감한 것인가. 아니, 황제 폐하의 위압감 앞에서 저렇게 의연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귀족들이 당황하는 사이, 그들의 갖가지 생각에 도장을 찍듯 황제가 말했다.

“짐을 참 기쁘게 하는구나, 세르히 소백작 아니, 안토니아야.”

이름으로 부른 그 말에 귀족 모두가 놀라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안토니아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다른 귀족들이 한 번 더 숨을 죽였다.

아니, 지금 가장 긴장한 건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짐 앞에서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않아 다행이구나.”

황제는 둘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안토니아에게 속삭였다.

“저는 누군가를 속이려 한 적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 편견을 갖고서 곡해하여 보는 걸 제가 어떻게 모두 바로잡을 수 있겠어요. 혜안을 가진 폐하께서는 이토록 제대로 봐 주시는 게 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황제의 눈가가 슬그머니 휘어졌다.

안토니아는 들뜨지 않고 그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 또한 맞는 말이다. 다들 너와 달리 짐 앞에선 벌벌 떨며 할 말도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서 있는 힘껏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옅은 미소가 제대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폐하께서는 좀 짓궂으셔서 자신에게 주눅이 들수록 더 괴롭히시거든.’

그나마 트라체스 남매는 의연하게 행동하는 데는 능해서 황제의 먹잇감이 되지 않는 편이었다.

반대로…….

‘시, 싫어! 나 열난다고 해!’

‘하지만 폐하께서…….’

‘아바마마는 널 예뻐하시잖아! 네가 가!’

안토니아가 황제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던 건 모두 전 남의 편 덕이었다.

그가 황제와 독대할 때만 되면 꾀병이나 갖가지 핑계를 대며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그럴 때마다 황제는 재밌어했지만.

‘앞으로도 제레미야 그 못난 것이 도망치거든 굳이 잡아 올 필요 없다.’

‘하지만 폐하…….’

‘넌 황자비 중에서 가장 침착하고 똑똑하지, 짐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네가 한 가지 실수한 게 있다면.’

안토니아는 그날의 말을 죽는 날까지도 줄곧 기억했다.

애초에 그게 황제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황족 중 가장 멍청한 것을 선택했다는 것 정도겠구나, 아니.’

‘…….’

‘네가 선택한 게 아니던가?’

안토니아가 아무 말 하지 않자, 황제는 그날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단 말을 하지 않느냐?’

‘그때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만약 다시 선택할 수 있다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안토니아는 그날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모두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그걸 지금의 황제에게 실행했다.

“세르히 소백작의 이름으로 도착한 것, 모두 잘 보았단다.”

“미숙한 것들이라 눈에 차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미숙하다 하면 짐은 영주 중 반가량의 작위는 박탈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제레미야가 자신을 찾아온 날, 안토니아는 혹시 몰라 준비한 추후 영지 경영 계획서와 그간의 관리 내역을 정리해 황제께 올렸다.

‘이스베르가 님이 도와주셔서 다행이었어.’

그녀가 듣더니 재밌겠다며 모두 모아서 황제에게 직접 가져다주었으니까.

“원하는 것을 얻고자 입만 벌리고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것이지, 짐은 욕망을 향해 손 뻗는 자들을 매우 예뻐한단다.”

황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안토니아의 어깨를 꽤 너그럽게 두드렸다.

“짐이 그런 황제라 네게는 참 다행이구나, 그렇지 않으냐. 안토니아.”

“그 또한 폐하의 많은 보살핌 중 하나이지요.”

“하하하, 그래, 그 또한 그렇구나. 그러니 네가 마음에 둔 것, 가져가게 해 주마.”

황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안토니아를 놓아준 뒤, 곧장 시종장에게 명했다.

“짐의 검을 가져오거라.”

“네?”

“오늘 밤, 짐이 너무 기분이 좋아 소백작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 말엔 안토니아조차 놀랐다.

‘이 자리에서 작위를 내리시겠다고?’

이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토니아와 비슷한 처지의 남성 작위 후계자들조차도 무도회가 모두 끝난 뒤 따로 날을 잡아 황제 대리인을 통해 작위를 수여되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너무 폐하의 관심을 끌었나?’

뭐, 그래도 안심이었다. 따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자신은 앞으로 세르히 백작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수도에서 곧장 도망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이미 홀 내가 소란으로 가득했으니까.

귀족들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게 수군거리는 게 귓가에 들려왔다.

‘신문에서 본 거랑 너무 다르지 않나요?’

‘지금 다른 게 중요합니까. 고작 지방 귀족, 그것도 겨우 열여덟 살짜리가 폐하의 눈에 저렇게 들었는데.’

‘좀 곱게 봐 줬더니, 모두 중앙 귀족이 되려고 한 짓들이었나 봅니다.’

‘흥, 누가 호락호락하게 자리를 내어 준답니까.’

특히 최근 십 년간 실적이 없어 자기 자리가 위태로운 귀족들이 더 그랬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은 급할 게 하나 없었으니까.

“……폐하께서 그대를 곤란하게 만드셨습니다.”

리카르도가 염려하듯 건넨 말에 안토니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장 원하는 걸 얻었으니, 몇 가지쯤 놓아주었다 해서 그게 손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역시 당신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적 한둘쯤 생긴 건 별것 아니야.’

이 영향으로 잠깐 크롬프트 상단이나 백작가 소유 상단에 어깃장 놓으려 드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만만하게 본 탓에 호의를 가진 자들도 꽤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무섭지 않았다.

‘우리 루페의 실력을 믿는걸, 무엇보다 적의는 일시적일 거고.’

셈이 빠른 자들은 금방 무엇이 더 이득인지를 눈치챌 테니까.

* * *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이 황제의 검을 가지고 왔다.

안토니아가 회귀 전 받은 것은 가늘고 가벼운 장식용 레이피어였다.

검대에 루비를 장식해 관상용으론 참 좋고 실용도는 완전 꽝이었다.

‘뭐, 황태자 나름대로 신경 써 준 거긴 했지만.’

반대로 황제가 준비한 건 묵직하고 투박하다 싶은 정도의 한손검이었다.

“저건…….”

“아는 검이셔요?”

안토니아는 솔직히 말해 검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리카르도에게 물었다.

그러나 리카르도가 답해 주기도 전에 황제의 준비가 끝났다.

“세르히 소백작은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시종장의 말에 안토니아는 황제 앞에 몸을 낮춰 자세를 잡았다.

“안토니아 세르히, 그대는 어린 몸으로 영지를 안정시켜 미래의 가능성을 짐에게 보여 주었다. 재능 있는 자의 앞길을 열어 주는 것 또한 황제인 짐의 의무.”

황제는 그대로 안토니아의 양어깨를 검으로 살포시 톡톡 두드렸다.

“따라서 그대에게 세르히 백작위를 내린다. 앞으로도 제국과 그대의 영지를 위해 오늘을 기억하고 힘써 주길 바란다.”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폐하.”

“또한.”

안토니아는 그다음 말에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꼈다.

‘설마?’

황제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안토니아의 손 위에 검을 얹으며 물었다.

“짐은 그대를 수도에서 자주 보고 싶다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중앙 귀족의 지위를 얻겠느냐 하는 물음이었다.

중앙 귀족이 되면 편한 점도 있긴 했다.

대리인을 세워 영지 관리를 할 수도 있었고 영지에서의 4개월 체류 의무 또한 대체할 방법이 생겼다.

‘하지만 난 그걸 원하는 게 아니야.’

기대 이상으로 불어온 바람에 흥에 겨워 올라타면 나중에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일만 생길 뿐이었다.

“폐하께서 절 기꺼워하시니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자주 뵙는 것에 형식은 중요치 않습니다. 제가 폐하를 존경하니 그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하, 좋다. 그렇게 하마. 세르히 백작, 안토니아.”

비로소 황제는 안토니아의 손에 검을 온전히 안겨 주었다.

한차례 넘은 고비에 안토니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그러니까 이게 건국 황제의 검 중 하나라고요?”

“그렇습니다.”

백작위에 임명된 안토니아가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건 무려 다섯 곡을 연달아 춘 뒤였다.

황제는 무도회의 즐거움은 춤에 있다며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음악을 연주하게 했으니까.

안토니아는 첫 춤을 리카르도와 춘 뒤, 차례차례 유명 중앙 귀족의 춤 신청을 받았다.

당연히 그녀는 모두 거절하지 않았다.

이렇게 귀족들과 우호적으로 안면 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으니.

그 탓에 다섯 번째 춤이 끝났을 때는 발이 아파서 도저히 걷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리카르도는 자신을 계속 지켜봤던 것인지 다섯 번째 춤이 끝나자마자 다가와 테라스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말도 안 돼요, 보통은…….”

“보통은 새로 만들었거나 장식용인 검을 내리는 게 보통이지요. 각 가문에 가보로 간직한 검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맞아요……. 왜 그렇게 다들 저에게 춤 신청을 하려고 노리시나 했건만.”

그 말에 리카르도의 표정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백작이 많이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

안토니아는 잠시 침묵했다. 뭐가 더 황제의 흥미를 끈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적었다.

‘내가 폐하를 뵈었던 건 황자비이기도 했던 때라, 더 가늠을 못 했나?’

하지만 이스베르가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는데.

안토니아가 침묵하는 사이 리카르도가 테라스에 비치된 작은 의자에 앉히며 이야기했다.

“마실 걸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전하. 그런 건 제가-.”

“이런 일은 여력이 있는 쪽이 하는 법입니다. 잠시 쉬고 계십시오.”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드레스 자락에 감춰진 안토니아의 발 쪽을 슬쩍 보았다.

틀림없이 많이 아플 것이다. 솔직히 세 곡쯤 끝났을 때 데리러 가고 싶었으니까.

물론 그 마음에 질투심이 없었다면 그게 거짓말이겠지만, 이스베르가가 당부한 것도 있어 꾹 참았을 뿐이었다.

“테라스 커튼을 내려 두었으니 누구도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라도 좀 편하게 쉬고 계세요. 아직 귀가할 생각은 없지 않습니까.”

“배려 감사합니다.”

안토니아는 이번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고마웠으니까.

어쩐지 리카르도가 복잡한 듯 멋쩍게 미소 지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안토니아는 그가 나선 뒤, 곧장 구두를 벗었다.

맨발이 바닥에 닿자 찬 기운이 올라와 좀 살 것 같았다.

‘전하가 보내 준 거라서 정말 좋은 구두였는데도 아픈 건 어쩔 수 없구나.’

회귀 전엔 이것보다 훨씬 불편한 구두를 신고도 꼼짝없이 참아야 할 때가 많았는데.

물론 제레미야는 늘 아주 좋은 것만 골라 신었지만 말이다.

그는 본인이 불편하지 않으면 남도 불편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연회나 무도회에서 술까지 들어가면 분위기를 타서 안토니아가 쉴 틈을 만들어 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잠시 주먹을 쥐며, 몸을 돌려 테라스 너머 황실 정원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정원은 자신이 예상한 것만큼 끔찍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달빛 아래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감상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잠시 겨울 정원을 즐기는 사이, 뒤쪽에서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는 예상보다 빠른 도착에 놀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셨어…….”

그러나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안토니아는 평정을 잃지 않고자 노력해야만 했다.

그 자리에는 다름 아닌.

“여기 있었군. 오랜만이야 소백작 아니, 아니지. 세르히 백작.”

오늘도 껍데기만 멀쩡한 전 남의 편이 서 있었다.

제레미야는 은근히 멋있는 척 미소 지으며 안토니아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내가 좀 늦게 도착해서 말이야, 백작의 기쁜 소식을 듣고 서둘러 찾았지.”

‘흥, 폐하께서 일찍 퇴장하시길 기다렸던 거였으면서.’

제레미야는 황제를 특히 무서워했으니까 말이다.

아마 아무리 기다려도 황제가 돌아갈 기색 없어 보이니 포기하고 온 걸 테고.

어쩌면 그 약삭빠른 시종이 알려 준 내용을 듣고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얼른 받지 않고 뭐 하는가, 백작?”

제레미야는 안토니아의 모습을 쓱 훑어보더니 히죽거리며 말했다.

“혹시 드레스가 꽉 죄기라도 하는가?”

“……네?”

“내가 편하게 해 줄 수도 있는데, 숙부님은 영 그런 걸 신경 써 주시지 않나 봐.”

그 음흉한 얼굴에 안토니아는 기가 차 그를 바라보았다.

‘쟤 지금 아직 열여섯일 텐데.’

이 무렵에는 형식상 약혼만 해 두고 만나질 않아서 좀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게 억울해졌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글렀다니, 참…….

심지어 그의 숙부인 리카르도를 숙맥 취급하기까지 했다.

‘회귀해서 저 작자의 나쁜 짓은 사라졌으니, 피하기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좀 고민했는데.’

적어도 지금까지 안토니아가 복수한 상대들은 다 이번 삶에서도 그런 이유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제레미야가 알아서 제게 또 구실을 만들어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안토니아는 제게 다가오려는 제레미야를 보며 제지하듯 손을 뻗었다.

“괜찮습니다, 황자님.”

“정말로?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바깥에 있어 오래 있어 추운 탓에 반응이 느렸던 것뿐이에요.”

“아, 그런가? 그럼 내 재킷이라도-.”

“곧 대공 전하가 오실 테니 괜찮습니다.”

안토니아는 웃으면서 답했다. 지금 커튼 내려진 테라스 안에 들어왔다는 걸 인지하라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제레미야는 그런 것쯤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 전에만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흠, 아바마마께서 칭찬하셨다기에 좀 기대했는데.”

제레미야는 또 기분 더럽게 안토니아를 훑어보았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면 수도에서 인기 얻기 어려울 거야.”

“걱정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흥, 딱딱하긴. 백작이어도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결혼도 해야 할 텐데 좀 고분고분하게- 아, 아, 그렇지.”

입을 열 때마다 쓰레기만 쏟아내던 제레미야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백작, 아바마마께 보여 준 걸 나도 보고 싶네!”

“……네?”

“그런 이유가 있어 찾아온 거라고. 나만 못 봤다고 생각하니 억울하지 않은가.”

“그저 황제 폐하께 올릴 예를 올린 것뿐입니다.”

“한 번 더 보여 주는 것도 어렵지 않지 않은가, 어차피 테라스 문도 닫혀 있고 여긴 나와 그대뿐인데.”

제레미야는 자신만 보지 못하고 넘어갈 순 없다는 듯 주장하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쭉 펴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도 황자이지 않은가! 뭐, 가끔 대리하는 경우도 없진 않고. 그 왜, 신문에도 나지 않았는가.”

“……네?”

“내가 아바마마의 이름을 대신해 자선 행사에도 나서고, 그랬다고. 그대의 기사가 실린 신문에 실렸으니 봤을 텐데.”

안토니아는 제레미야의 말에 어이가 없어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도 그 예를 보여 주는 식으로 한번 올리는 것쯤이야 괜찮지 않은가.”

제레미야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은 대범한 사람이라는 듯 이야기했다.

‘지금 쟤가 헛소리를 몇 절이나 하는 거야.’

여기가 테라스가 아니라 연회 홀이었다면, 혹은 듣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대번에 불경죄로 끌려갈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죄송합니다만, 황자님.”

“응?”

“그 인사법은 황제 폐하께만 올리는 예인데, 정녕 황자님께서 받으셔도 괜찮으실지요?”

“……왜 안 되지?”

제레미야는 인정하기 싫다는 듯 말했다.

자신의 호기심이 더 크다는 듯.

“말했듯, 어차피 이곳엔 백작과 나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백작은 아직 내게 인사도 하지 않았어.”

허리에 손을 얹은 그는 영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설마 백작은 조신하지 못하게 이런 이야기를 바깥에서 떠들고 다닐 텐가?”

‘조신은 무슨, 쟤는 꼭 저런 단어 갖다 붙이는 거 좋아하더라.’

예전부터 자신을 타박할 때면 하던 단골 단어에 안토니아는 속으로 부루퉁해했다.

‘조신, 정숙, 얌전……. 참나, 진짜 그런 단어가 필요한 게 누군데.’

역시 전 남의 편다웠다.

말 한마디를 해도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데 도가 텄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이제 전처럼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기만 할 생각은 없어.’

지난번 첫 재회 때처럼 얼어 있을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우아하고 귀족답게 무릎만 살짝 굽히며 그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테라스에 누군가 들어올 거라 생각지 못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거참, 그게 아니라니까. 백작은 두 번 인사하는 걸 좋아하는가?”

“저는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한테 예를 올리는 게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건가? 너무 까다롭게 구는군. 고작 한번 해 보라는 것 가지고.”

“황실의 황자님으로서 체통을 지키시지요.”

“……뭐?”

제레미야의 눈이 깜박거렸다.

지금 자신이 뭘 들었나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체통을 지키시라 이야기했어요.”

“지금 고작 백작 따위가 감히 내게 훈계한 것인가?”

“훈계라니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씀을 올리겠어요.”

“백작의 말대로 나는 황자다. 그런 내게 예를 올리기 싫다고 지금 항명하는 것 아닌가!”

제레미야의 언성이 확 높아졌다.

‘역시 바보야.’

분명 저 목소리는 바로 테라스 근처까지 들렸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인간과 무려 8년의 부부 생활을 했다.

어떻게 건드려야 제레미야가 성질을 있는 대로 낼지는 너무 잘 알았다.

그는 타고나기를 거만해, 누군가 입바른 말을 일러 주면 그대로 따르기를 굉장히 싫어했다.

‘설마 황족모독죄가 되려나.’

하긴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갈 사람이었으면 자신의 삶이 좀 편했을 테지.

고작 제레미야였다.

황태자도 황제도 아닌, 제대로 된 황실 작위도 받지 못해 ‘전하’ 소리도 못 듣는 제레미야.

무엇보다 자신은 황제를 따르는 귀족으로서 마땅히 할 말을 했을 뿐이었다.

안토니아는 한 번 더 제레미야의 화를 돋웠다.

한 단계 더 커진 언성으로 연회장 모두가 그의 망언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항명이라니요, 저는 황실을 존경하는 세르히 백작으로서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시끄럽다! 어디서 무례하게!”

‘역시 참을성이라곤 없지.’

생각한 것보다 더 화르륵 열 올리는 모습에 안토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열 살은 어리니까. 아, 덜 음흉하단 점에선 지금이 나을지도.’

안토니아는 문득 회귀 전의 그를 생각하며 비교했다.

“늦게 인사 올린 것은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늦은 인사라도 예를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디 그것으로 넘어가 주셨으면 해요, 황자님.”

“하. 좋게좋게 이야기하니, 끝까지 혼자 옳다며 감히 날 가르치려 들어?! 갓 작위를 받은 백작 주제에 건방져!”

제레미야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하, 하지만 황자님이 바라시는 건 황제 폐하께만 올리는 인사법이지 않습니까. 저는……!”

안토니아도 침착한 어조로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슬슬 궁금해서 테라스로 모여들었을 사람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어리고 미숙한 황자님께서 정말로 그런 예를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고작 백작이지만, 황자님은 그런 소박한 작위도 없으시잖아요.”

대신 이 말은 제레미야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물론 직설적인 만큼 자격지심 있던 제레미야를 긁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그 입 닥쳐! 그만 떠들고 내게 공손하게 예를 올리라고! 나는 이 나라의 황자야, 그대가 공손하게 경배드릴 자격은 충분하다고!”

쾅-!

그 순간 테라스 문이 활짝 열렸다.

촤르륵, 하고 젖혀지는 커튼 소리에 제레미야는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

제레미야는 눈앞에 보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는 리카르도가 있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재밌는 짓을 벌였다는 듯한 얼굴의 황제와, 인상을 잔뜩 찌푸린 황태자가 있었다.

물론 황족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하나같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냐는 듯 모여들어 있었다.

“그, 저……. 아, 아니야, 아닙니다!”

제레미야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우선 부정부터 했다.

먼저 움직인 건 리카르도였다.

그는 안토니아를 위해 준비한 듯한 다기 트레이를 들고서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조카님, 지금.”

리카르도의 시선이 잠시 제레미야 뒤에 떠밀린 안토니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난간에 바싹 붙어 누가 봐도 황자에게 협박받아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안토니아가 겨우 제레미야 따위에게 겁먹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 무서운 일을 겪으면서도 의연했던 그녀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만에 하나의 경우가 걸렸다.

가슴 속에서 화가 확 솟구쳤다.

리카르도는 차갑고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에게 무얼 요구한 것인가?”

생각지도 못한 위압감, 그리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제레미야의 얼굴이 당황으로 뒤덮였다.

제레미야는 태어나서 난생처음 쏟아지는 자신을 향한 따가운 눈빛들에 당황스러웠다.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건 간에 자신이 황자인 이상, 면전에서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은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는 당황하여 제게 말을 건 리카르도에게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그, 어, 어쩐 일이십니까. 숙부님.”

“내 파트너를 데리러 온 게 문제인가?”

리카르도는 한겨울 찬바람보다도 더 날카로운 말투로 답했다.

“어쩐 일이냐는 말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리카르도는 천천히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조카님은 테라스 앞에 커튼이 내려진 것도 보지 못했는가?”

그 말에는 제레미야도 할 말이 없는지 입만 뻐끔거렸다.

“그도 아니면, 역시 아직 무도회에 나오기에는 너무 어려서 커튼의 의미를 모르는가?”

그 말에 제레미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황자님도 아니고 조카님이라는 호칭 자체가 자신을 아래로 깔아뭉개는 말이었다.

게다가 내용 하나하나가 모두 비꼬는 내용이었다.

특히 테라스의 커튼 말이다. 어딜 가건 이런 사교계 자리는 보통 몇 시간씩 이어지며 휴게실도 준비되는 게 보통이었다.

다만 휴게실까진 거리도 있고, 어지간한 곳은 성별로 나뉜 경우도 많아 지금처럼 짧은 휴식이 필요할 때는 테라스를 편히 이용하곤 했다.

따라서 테라스의 커튼은 누군가 사용 중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로 사교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모르기 어려운 아주 기초적인 에티켓이었다.

당연히 황태자를 졸라서 빨리 사교계에 나선 제레미야로서는 모른다고 하면 오히려 더욱 수치스러운 행동일 수밖에 없고 말이다.

“저도, 저도 클 만큼 컸습니다!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요!”

제레미야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항변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듣고 싶던 답도 아니라는 듯 안토니아에게 다가가 먼저 그녀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전하…….”

안토니아는 겁에 질린 듯 몸을 떨며 리카르도의 소매만 겨우 잡았다.

“죄송해요, 제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살짝 내리까는 모습을 보자, 리카르도는 더욱 마음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맞아, 아무리 안토니아가 의연하다고 해도 이제 겨우 열여덟인데.’

그것도 처음 와 보는 무도회장에 제레미야는 무려 황자이기까지 했다.

오늘 백작위가 수여되고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안토니아니 얼마나 긴장되었겠는가.

그런 와중에 제레미야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길길이 날뛰었으니.

“당신이 사과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자리를 비운 제 탓입니다.”

차 따위 밖에서 한가롭게 궁중 시녀와 시시덕거리는 드비에게 시키면 되었을 것을.

‘자리 지키라고 했건만, 낯간지러운 소리 하실 거라면서 도망친 드비 잘못이지!’

드비만 똑바로 테라스 근처를 지켰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돌아가면 응징해야겠다고 리카르도는 결심했다.

리카르도는 안토니아를 제 몸으로 감싸 주며 이야기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지켜 드릴 테니까요.”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무도회장에 오면서 다짐했었는데.’

리카르도는 정말 겁먹은 것인지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기대는 안토니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 *

참으로 명백한 그림이었다.

여러 안타까운 사정이 있는 아가씨가 겨우 백작위를 받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수도에서 철없기로 유명한 막내 황자에게 걸리지 않았는가.

오늘 백작위를 받은 것을 은근히 질투하고 나쁘게 보던 귀족들도 동정심을 느꼈다.

특히 단련하여 체격이 건장한 리카르도에 비해 안토니아는 아담한데다 심지어 겁먹기까지 해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세르히 백작이 많이 놀란 모양이에요.”

“그럴 만도 하지요, 생각해 보세요. 오늘 내내 의연하게 굴긴 했지만 놀랄 일투성이지 않았어요?”

안토니아에게 좀 호의적인 귀족들이 넌지시 말하자, 다들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도 처음이었지요, 백작은.”

“맞아요, 애초에 이렇게 귀족들을 많이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일 것 아니에요. 부모님을 일찍 잃어 영지만 어떻게든 지탱하려고 애썼잖아요.”

“맞아요, 맞아요. 그래서 폐하께서도 특별히 예쁘게 봐주신 건데.”

리카르도는 그사이 안토니아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걸쳐 주었다.

그 모습에 귀족들이 감탄했다.

“그 대공 전하도 저렇게 존중하시는데.”

“안 그렇겠어요? 이스베르가 님이 마음에 들어 해서 후견인까지 되셨잖아요.”

“하긴, 이스베르가 님의 마음이 이해되더군요. 폐하 앞에서 얼마나 우아하고 정중했어요.”

“그뿐만인가요, 조금 전 저희 아들이 같이 춤추는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기품 있다고 칭찬하더라고요!”

누가 봐도 안토니아가 피해자인 게 명백한 데다, 그녀에게는 안쓰러운 사연까지 있었다.

거기에 조금 전 발을 혹사시킨 보람이 있었다.

안토니아가 무려 다섯 곡을 추며 호감을 샀던 귀족들이 좋게 말해준 것인지, 다들 호의적으로 장단을 맞췄다.

물론 이 대화들은 모두 황제가 오늘 안토니아를 마음에 들어 했기에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는 소근거림이었지만 말이다.

‘좋아, 내가 열심히 춤추고 공들여서 인사한 게 헛수고는 아니네.’

리카르도의 품속에서 얼굴을 가렸던 안토니아는 만족해했다.

‘전하께서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장단을 잘 맞춰 주시고 말이야.’

뭐, 리카르도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지만.

이스베르가의 동생이고 자신에게 정중하게 대하던 리카르도니, 이렇게 반응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귀족들이 그렇게 수군거렸으니 대화 내용까진 아니어도, 곱지 않은 시선은 제레미야에게 또렷하게 전해졌다.

제레미야가 무례하다고 외치기 전에 리카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굴었기에 이렇게 백작이 놀랐는가? 폐하 앞에서도 예의 바르고 정중하여 기품을 잃지 않던 백작인데.”

매서운 목소리에 제레미야는 우물쭈물했다.

‘보통 생각이 있으면 여기서 곧장 사과하고 피하는 게 낫단 걸 알겠지만.’

그러나 제레미야에게는 그런 머리가 없었다.

‘그래도 폐하 앞이라고 좀 참으려는 모양이긴 하지만.’

안토니아는 속으로 수를 셌다.

셋, 둘, 하나.

마지막 수를 세기가 무섭게 제레미야가 소리쳤다.

“수, 숙부님의 파트너고! 아바마마께서 좋아하셨다길래 그냥 보러 와 본 건데 그게 그리 잘못인가요?!”

“뭐라고?”

황당한 소리였다. 리카르도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며 제레미야에게 말했다.

“백작이 이곳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만약 다른 귀족이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

“그럴 리가 있나요! 들어가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제레미야의 말에 황태자가 이마를 짚었다.

“지금 나와 백작을 감시했다고 하는 것인가?”

“네? 아니, 왜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그저 반가운 마음에…….”

제레미야는 구해 달라는 듯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끼어들면 함께 진흙탕을 덮어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외면했다.

“제레미야 조카님, 다 컸다고 말한 것치곤 기본적인 에티켓을 너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네?”

“설사 나와 백작이 함께 들어가는 걸 봤다 한들, 왜 내가 없을 때를 노려 들어온 것인가?”

“그, 그건…….”

“심지어 영애에게 허락을 구하고 들어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 하지만 저는 황자이지 않습니까! 일전에 한 번 봤던 백작에게 그저 인사를 하려던 것뿐인데 허락까지 구해야 합니까?”

그 말에 장내에 얕은 한숨이 퍼졌다.

다들 저도 모르게 내뱉은 것이었다.

“황자면 예절을 어겨도 된다고 지금 폐하께서 계신 자리에서 말하는 것인가?”

제레미야는 그 말에 주먹을 꽉 쥐고 소리쳤다.

“세르히 백작! 그렇게 비겁하게 숙부님 뒤에만 있을 건가?!”

자기 혼자 당하다니 억울하지 않은가. 게다가 예의를 어긴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맹랑하게 말대꾸하더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아무리 오늘 수여된 거라고 해도 그녀는 백작이야. 맹랑하다니!”

“왜 숙부님은 제게만 그러십니까! 세르히 백작은 황자인 제게 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단 말입니다! 저보고 어리고 미숙한 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말에 귀족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수군거렸다.

“세르히 백작이요?”

“그럴 리가요.”

“전 티 파티에서 백작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한결같이 예의 발랐는걸요?”

“맞아요. 심지어 초대에 응할 수 없다는 거절 편지도 정성스러워서 놀랐는데. 에이, 설마요.”

안토니아는 수도에 올라온 뒤 오늘 무도회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예의 바른 행보를 보였다.

심지어 카메라로 화제에 올랐을 때도 우쭐거리는 것 하나 없었다.

백작위가 수여되고도 이어지는 춤 신청을 거절하지 못해 내도록 춤추다가 리카르도 덕에 겨우 자리를 피한 게 안토니아 아니던가.

반면 제레미야는 요즘 들어서야 겨우 좀 착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전까지는 철없기로 유명했고 말이다.

“게다가 저희는 테라스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잖아요.”

“맞아요, 황자님이 예를 올리라고 소리친 건 잘 들렸지만요.”

“게다가 황제 폐하께만 올리는 예니, 백작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요.”

“맞아요, 오히려 황자님께 그렇게 인사를 올리면 오히려…….”

그다음부터는 귀족들도 말을 아꼈다.

잠자코 지켜보던 황제의 눈빛이 매서워졌으니 말이다.

“이제 거짓말까지 하는가, 조카님? 이렇게 증인이 많은데 말이다!”

“말도, 말도 안 돼요. 어째서, 분명히 백작도 그랬는데, 왜, 왜 나만…….”

제레미야는 이렇게 사람 많은 자리, 그것도 자신의 첫 무도회에서 창피당한 게 속상한지 이제 울먹거리기까지 시작했다.

‘그러게 누가 평소에 사고만 치고 다니래.’

기존 행실이 나쁜 스스로를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어떻게 전 남의 편이겠는가.

“백작, 사실을 말해. 말하라고! 혼자 그렇게 계속 착한 척만 할 생각인가?!”

제레미야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라는 듯 안토니아에게 외쳤다.

그럴 의무가 안토니아에게 있다는 듯 말이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럴 생각 없었지만 말이다.

“황자님, 저는……. 황제 폐하께 올릴 예이기에 그럴 수 없다고 했을 뿐이에요. 오히려 왜 계속 제게 그러시는지 여쭙고 싶어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떨며 말하는 목소리에 귀족들이 탄식했다.

첫 무도회에서 너무 곤욕을 치른다며 말이다.

그러자 제레미야는 한 번 더 폭발했다.

“진짜, 계속 그럴 건가, 세르히 백작!”

그러나 그 순간.

“그만.”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황제의 목소리가 무도회장에 내려앉았다.

제레미야는 정말 대단했다.

이런 와중에도 상황 파악하지 못하고 황제가 제 구명줄인 것처럼 입을 열었으니까.

“아바마마, 저 여자가……!”

황제는 그 목소리를 더 듣기 싫다는 듯 황태자에게 눈짓했다.

황태자는 어두운 얼굴로 시종들에게 명했다.

“끌고 가라.”

그나마 기사에게 명한 게 아니라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 아바마마……!”

제레미야는 깜짝 놀라 시종들에게 자신을 놓으라며 버둥거렸다.

그러자 황제는 시종에게 붙들린 제레미야에게 다가가 머리를 톡, 톡 쓰다듬었다.

“제레미야야, 내 막내야.”

“아, 아바마마…….”

“네가 이제 짐을 무시하려 드느냐? 황태자가 참으로 널 잘 가르쳤나 보구나.”

“허, 헉……. 아, 아니, 아니에요! 아, 아바마마……! 혀, 혀, 형님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제레미야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쉿, 짐의 말도 이제 듣지 않겠다고 하진 않겠지?”

“…….”

“그래, 그래야지. 입 다물지 않았다면 짐은 참 슬프게도.”

황제는 천천히 제레미야에게서 손을 떼며 말했다.

“우리 막내가 짐에게 도전하려 든다고 오해할 뻔하지 않았느냐. 안 그러냐.”

그 말에 황태자는 어두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레미야는 그저 어려서 호기심이 컸을 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황제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당겨 웃었다.

“모처럼 짐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즐거운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야 쓰겠느냐.”

그 외의 답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와 함께 모두 깨달았다.

‘폐하께서 오늘 정말 기분이 좋으시구나.’

평소라면 단박에 감옥에 끌고 가라 명해도 모자라지 않을 막내 황자의 행동을 이 정도 선에서 정리하시다니 말이다.

제레미야는 몰랐지만 모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제레미야가 오늘 일로 큰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건 모두 폐하께서 새로운 사람인 안토니아로 인해 즐거웠던 덕이라고 말이다.

* * *

‘역시 자식은 어쩔 수 없나.’

안토니아는 조금 아쉬웠다.

이 일로 제레미야가 좀 더 큰 벌을 받길 바랐으니까.

게다가 가볍게 넘어간 게 자신 덕이라니, 더욱 속이 쓰렸다.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로 만족하자.’

어떤 의미로 황제는 안토니아 자신도 봐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제레미야가 시종들에게 붙잡혀 퇴장한 뒤, 상황을 마저 정리한 것 또한 황제였다.

그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황태자에게 말했다.

“역시 막내는 아직 어린 모양이다. 황태자로서 판단이 미숙했던 모양이구나.”

“……송구합니다, 아바마마.”

“그래, 송구할 일이지. 오늘 일은 짐이 너그러이 덮어 주었음을 명심하거라.”

테라스에서 리카르도에게 가려진 덕에 귀로만 들었음에도 등이 오싹했다.

한마디로 황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식 후계자인 황태자에게 일 처리에 있어 신중을 요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또한 황제는 귀족들에게 흩어지란 듯 손짓한 뒤, 리카르도와 안토니아를 불렀다.

“유감이구나.”

황제가 가볍게 내뱉은 그 말에 두 사람 모두 얼어붙었다.

본래 황제는 함부로 사과하지 않는 법이라, 이 말 한마디만으로도 내일 언론지면이 들썩거릴 만한 내용이었다.

안토니아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셔요.”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황제가 잔잔한 눈길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정수리의 머리털이 쭈뼛 솟는 것만 같았다.

‘……역시 눈치채신 모양이야.’

완전히 추측한 건 아니더라도, 제레미야 혼자서 여기까지 일을 만들지 않았을 거란 걸 말이다.

황제는 안토니아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짐은 똑똑한 아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도 요구할 텐데, 더 눈에 들고 싶으냐?”

붉은빛이 강한 자주색 눈동자에 안토니아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다행히도 황제는 안토니아를 금방 놓아준 다음,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참 재밌더구나, 리카르도.”

“……누님께서 보살피는 아가씨지 않습니까.”

“그런 걸로 해 주마.”

안토니아는 그 소리에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가 눈치챘으니 폐하도 당연히 눈치챘겠지.’

리카르도는 제레미야를 상대로 아주 잘해 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지나치게 과했다는 걸까.

황제는 참 배려 깊게도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백작이 많이 놀랐을 테니, 좀 쉬다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거라.”

리카르도에게 독차지하지 말라는 듯 농담 섞은 말까지 굳이 덧붙이며 말이다.

* * *

다시 테라스에 단둘이 남자, 안토니아는 리카르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참 아까웠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연애에 숙맥이라니.

‘사실 나도 나였지만, 대공 전하 때문에 더 주목받기도 했는걸.’

트라체스 대공저에서 처음 다시 보았을 때도 감탄했던 외모였다.

주신께서 세상에 내보낼 적에 온갖 공을 다 들여 만든 게 분명한 얼굴, 게다가 푸른빛이 묘하게 도는 자안에 저게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나 싶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정말로 뭐 하나 꼬투리 잡을 만한 구석이 없는 외견인데 오늘은 그에게도 첫 무도회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신경 쓴 게 티가 났다.

‘이스베르가 님께서도 아마 신경 써 주셨겠지.’

하나뿐인 동생이 그간 나가지 않던 무도회를 나가는 거니 말이다.

그가 오늘 입은 정장 또한 유글란스 백작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과연 명장이었다. 옷에 붙은 장식물은 매우 심플한데, 완벽한 재단으로 리카르도의 기품을 확연히 돋보이게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피부에서는 아주 윤이 흘렀다.

좀 의아한 건 머리 스타일이 멋있게 보이는 게 아니라 어쩐지…….

‘예쁜 느낌이라고 하면 실례인가.’

평소에는 싹 쓸어 넘긴 형태였는데, 오늘은 살짝 흘러내리도록 만들어서 어쩐지 청초해 보였다.

‘미인이라고 하면 미인이긴 한데, 저 잘생긴 얼굴에 청초하단 수식어를 붙여도 되나.’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더 확신이 섰다.

회귀 전 그렇게 오만하고 위압감 넘치던 그 트라체스 대공이 아니, 조금 전 제레미야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했던 그였는데.

‘내가 이렇게 오래 보는데도 싫단 소리 없이 얌전히 있다니.’

겸연쩍은 듯 살짝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안토니아는 문득 물어보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이성이 그녀의 호기심을 간신히 붙잡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되도록 황족 남성과는 안 엮이는 게 상책이었다.

심지어 백작위를 받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 * *

리카르도는 자신을 바라보는 안토니아의 물빛 눈을 보며 5년 전을 떠올렸다.

호기심 많던 소녀는 표정은 없었나 눈빛만으로 감정을 참 잘도 전하곤 했다.

‘또 뭐가 궁금한 걸까.’

예전을 떠올리자 가슴이 또 설렜다. 그 시절은 리카르도에게 있어서 가장 예쁜 기억이었으니까.

‘저런 걸 보면 제레미야 때문에 많이 놀라진 않은 모양이야.’

다행이었다. 안토니아가 겨우 철없는 조카 때문에 오래 놀라 오늘 밤을 나쁘게만 기억하면 왠지 싫을 것 같았다.

물론 오늘 무도회 내내 많은 일이 있었지만, 하나하나 리카르도에게는 모두 기억할 만한 일이었으니까.

자신과 안토니아 두 사람 모두에게 첫 무도회였으며 첫 춤도 함께였다.

‘연습하면서 몇 번쯤 맞춰 본 적은 있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고운 손을 잡고서 함께했으니까.

너무 설레서였을까, 안토니아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한 건 아쉬웠다.

어떻게 보면 그 자리가 자신이 리샤르라는 걸 밝힐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냐, 괜히 그랬다가 안토니아가 당황해서 스텝이라도 꼬였다면 그게 더 큰일이었을 거야.’

게다가 말하지 않은 덕에 좋은 것도 있었다.

진지한 안토니아의 얼굴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한 번씩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안토니아는 눈을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맞추었다.

종종 그 물빛 눈이 무도회장을 둘러보아 아깝다는 생각이 든 건 차마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이야기였지만.

물론 그렇게 가슴 떨리고 기뻤음에도 두 번째 춤부터는 줄줄이 다른 상대에게 그 손을 내줘야만 했다.

그래도 리카르도는 잘 참을 수 있었다.

‘저 같으면 미리 춤추면서 다음 춤도 같이 추자고 말했을 텐데 말이에요.’

드비가 자신을 모자란 사람 취급해서 좀 짜증은 났지만, 그러지 않은 것도 모두 안토니아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오늘 무도회에서 단순히 사교계 첫선을 보이려 한 게 아니지 않은가.

‘도움은 못 줄지언정 안토니아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

리카르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안토니아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기회가 아닐까?

테라스는 조용했고,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지 않는가.

여기서 고백하더라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귀 때문에 곤란해질 일은 없을 터였다.

많이 놀랄 수는 있겠지만 또 수습할 만한 여유도 남아 있었다.

‘오늘 무도회를 준비하면서 예뻐 보일 수 있도록 여러모로 많이 고민했으니까.’

이스베르가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같이 이리저리 머리 모양을 고민해 줬었다.

그러니 안토니아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비록 내가 얼굴도 많이 바뀌고, 이름도 속이고, 나이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었지만……!’

안토니아는 차분히 설명하면 분명 들어 줄 터였다.

간절한 희망을 담아 생각했다.

결과는 오로지 안토니아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세르히 백작.”

“네?”

아니, 이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세르히 백작이라고 불렀으나, 5년 전 일을 고백할 생각이라면 호칭부터 바꿔야 했다.

리카르도는 주먹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하며 망설이다, 겨우 그 이름의 첫머리만 운을 떼었다.

“안-”

그러나.

“데뷔탕트 축복 의식이 곧 시작됩니다!”

참, 야속하게도 타이밍은 리카르도의 편이 아니었다.

그를 향했던 물빛 눈이 순식간에 테라스 너머로 옮겨 갔다.

데뷔탕트 축복 의식.

‘축복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레 나타난 제레미야 때문에 자신답지 않게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어떻게 이걸 놓칠 수가 있지.’

회귀 전, 제 인생을 완전히 비틀어 버린 사건이 다름 아닌 이 무도회, 그것도 축복 의식에서 벌어졌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백작위를 받아서 그만 긴장이 풀렸어.’

게다가 제레미야에게도 더는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을 놔 버렸다.

‘대공 전하의 얼굴이나 감상하다니…….’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저 잘생긴 얼굴로 어쩐지 허술하게 구는 리카르도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괜히 들었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돌아가면 돼. 아직 의식 준비 중이란 소리니 교황 성하나 신관들이 들진 않았을 거야.’

아직은 만회할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참 야속하게도 테라스 저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시종이었다.

“예정된 데뷔탕트 인사도 폐하께서 모두 받으셨으니, 이제 나와 축복 의식을 받으시지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숨을 한 번 삼키고 겨우 갈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폐하께서도 더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시니 얼른 나오십시오.”

시종의 말에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굳어졌다.

‘……도망칠 구석이 없어졌구나.’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한 이상, 자신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도가 없을 터였다.

매년 사교 시즌 첫 황실 무도회에서 데뷔탕트 인사를 황제께 올린 뒤엔 축복 의식이 뒤따랐다.

한 해의 고생과 부정한 것을 쫓고 새로운 데뷔탕트를 반기며 보통 교황에게서 축복을 받는 게 관례였으니까.

‘축복은 나중에 따로 신전을 찾아 받아도 되니 빨리 자리를 뜰 생각이었는데.’

손과 발이 절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 * *

회귀 전, 이날. 안토니아는 지독한 열에 시달렸다.

원인은 다름 아닌 무도회 직전 바올로가 준 포도주였다.

‘수석 신관께서 축성까지 한 포도주이니, 오늘 밤 널 보호할 것이다.’

당시 안토니아에게 그걸 마시지 않는단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동부 대신관이 수작질을 부려 둔 포도주는 원래는 안토니아를 무기력하게 만들고자 준비된 것이었다.

‘폐하 앞에서 내가 백작위를 포기하고 작은아버지에게 넘기겠단 소리를 하도록 말이야…….’

나중에 알아보니 남편이 될 사람까지 모두 준비해 두지 않았던가.

그러나 밀즈 부인의 시기심으로 크게 앓았던 안토니아에게 그 포도주는 독으로 작용했다.

잠들어 있던 가호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뜬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축복 의식을 위해 모두가 홀에 모여 있었다.

황제도, 교황도, 그리고 많은 귀족들도.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했을 때 안토니아의 몸은 영롱한 빛으로 물들었다.

교황의 눈이 가장 빨랐다.

‘주신의 가호가 깃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빠르지 못했다.

‘주신께서 보낸 성녀시다! 극진히 모셔라!’

황태자는 빛과 같은 반사 속도로 시녀들로 하여금 안토니아를 부축하게 했다.

제게는 무려 16년 전의 일인데, 황태자가 외치던 그 목소리가 어제 들은 것처럼 귓가에 선했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은 더 이상 지방 귀족 세르히 백작가의 영애가 아니었다.

주신의 가호를 가진 성녀였을 뿐.

제위 싸움, 신전과 황실의 관계,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에 안토니아는 던져졌다.

그리고 안토니아에게 가장 달콤한 사과를 선보인 건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세르히 백작이 되고 싶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알아보니 그대의 작은아버지가 심한 짓을 했더군. 내 힘이라면 도와줄 수 있어. 어떤가.’

회귀 전, 열여덟의 안토니아 세르히는 바올로에게 철저하게 통제당해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다.

당장 눈앞의 달콤함에 손을 뻗을 정도로.

황태자가 내민 사과를 잡은 그녀는 세르히 백작이 되었다.

대신, 평생 막내 황자의 아내로서 자유도 희망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며 살아야 했다.

* * *

‘괜찮아, 그때처럼 모두의 앞에서 밝혀지진 않을 테니까.’

이미 자신의 가호는 각성 상태였다.

그때 교황이 다급하게 외친 건 신전이 안토니아를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오직 본인만 알아차린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거야.’

교황에게 들켰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것이 없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백작위는 이미 제 손에 있었다.

작위를 지키고자 또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진 않아도 될 터였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자 술렁이던 가슴 속이 좀 나아졌다.

안토니아는 차분하게 숨을 가라앉힌 뒤, 고개를 돌렸다.

아직 리카르도와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대공 전하,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셨어요?”

그러나 돌아본 순간 안토니아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런 표정이지……?’

그의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심각했다.

그의 말을 무시했다고 여기는 그런 불쾌감이 서린 게 아니라, 무언가 굉장히 염려하고 걱정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걱정하시는 거지? 역시 내가 갓 데뷔탕트를 맞이한 어리숙한 영애라서?’

곧 그는 생각 정리를 한 것인지 천천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교황이 온다는 게, 안토니아에게 그리 반가운 상황이 아니겠지.’

리카르도는 테라스 너머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 깃든 감정을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그는 아마도 안토니아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일 테니까.

‘이런 상황에 어떻게 그녀에게 걱정을 얹어 줄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겠어.’

어린 안토니아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아마도 황족이나 중앙과 연이 없을 견습 기사 ‘리샤르’라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제 비밀을 밝혔다.

하지만 그게 실은 트라체스 대공이라면?

어릴 적에 신뢰를 주었다고 해서 지금도 마찬가지란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과 어린 안토니아의 관계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동요할지도 몰라,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심지어 이곳은 세르히 백작령도 아니고 그녀에게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자들만 가득한 황궁이며, 수도였다.

‘내가 알던 그 나이답지 않게 방법을 찾아내던 아가씨라면, 분명히 이 무도회에 대해서도 대비를 했을 거야.’

그게 밝히는 것이든, 빠져나가는 것이든.

괜히 자신이 그녀에게 변수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이성을 잡는 듯한 저 얼굴을 보면 미력한 도움의 손길이나마 내밀고 싶어졌지만.

그래서 리카르도는 구실 좋게도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어 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테라스에 바람이 계속 불더니, 백작의 머리카락 위에 꽃잎이 붙었군요.”

“아, 감사해요.”

“가만히 계십시오.”

얼굴은 무표정한데 눈빛이 테라스 너머를 볼 때와 다른 의미로 살짝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리 반갑지는 않은 기색이었지만.

‘역시…….’

안토니아가 자신을 경계한다는 게 느껴졌다.

리카르도는 더 깊게 참견해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에둘러 미약하게 권유했다.

“피곤하시진 않습니까? 원하시면 타운하우스까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랬다간 황제에게 좀 잔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는 안토니아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곤란해지는 것쯤은 얼마든지 괜찮았다.

교황과 마주해 안토니아가 곤란해지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 리카르도가 유일한 맹세를 건넨 아가씨는 정말 대단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어느새 침착해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폐하께서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럴 수는 없죠.”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편하게 넘길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 텐데.

그러나 리카르도는 그 말을 그저 속으로 삼켰다.

“다리도 이제 아프지 않으니까요.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답니다.”

자신이 반한 상대의 눈엔 이미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제 리카르도가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팔을 내미는 것뿐이었다.

“그럼 제가 오늘 무도회 마지막까지 당신을 에스코트하지요, 그래도 될까요?”

약간의 긴장을 담은 말에 안토니아의 손이 자연스레 그의 팔 위에 얹어졌다.

* * *

안토니아는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서 테라스 너머로 발을 옮겼다.

이윽고 홀을 채우던 음악 소리가 멈췄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고요한 발걸음뿐.

대비책을 생각해 뒀음에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여신의 가호는 신전이 관리해야 합니다!’

과거와 비슷한 풍경이라서일까, 마치 오버랩하듯 그날 교황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괜찮아, 그날이 아니야. 황태자는 내게 손댈 수 없어.’

의미 없는 희망이긴 하나, 교황이 못 알아볼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

신관들이 연주하는 영롱한 종소리가 들리자 절로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참 씁쓸하게도 손을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리카르도가 마치 괜찮다는 듯 제게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 착각이겠지.’

표정은 여전히 고장 난 채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제 감정을 알아챌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저 평범한 데뷔탕트 축복 의식일 뿐이니까.

그저 불안해서 의지할 구석을 찾고 싶은 게 분명했다.

안토니아는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되건 간에 책임질 자신 있었다.

정갈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제 곁을 스치듯 청량한 향이 풍겨온 순간, 안토니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째서?’

조금 전까진 회귀 전과 완벽히 같은 장면이었다.

그랬는데.

“새로운 분들께 주신의 은총이 가득하길.”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듯한 맑은 음색이 홀에 잔물결을 일으키듯 울렸다.

그녀가 잘 아는 얼굴의 교황이 아니었다.

겹쳐졌던 풍경이 부서졌다.

지금이 현실임을 의심케 하는 아름다운 얼굴의 미인은 해사한 표정으로 안토니아를 포함한 모두의 앞에 서 있었다.

햇살 같은 허니 블론드, 깊은 호수처럼 짙은 남색의 눈동자.

마치 자연을 한 몸에 두른 듯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미소를 보이자 곁으로 새벽빛이 깔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가 원래라면 교황이 있을 자리에 서 있어서일까, 안토니아는 지금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이 지나치게 긴장해 백일몽을 꾸는지도 몰랐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교황이 바뀌었나?’

안토니아는 어안이 벙벙해 말도 안 되는 가정부터 떠올렸다.

동부 대신관을 수도로 압송한 다음부터 신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것도 아녔는데 말이다.

“주신의 아홉 번째 종이 교황 성하를 대신하여 여러분께 인사를 전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호기심은 금방 해결되었다.

‘아홉 번째 수석 신관.’

너무도 놀라웠다. 수석 신관쯤 되면 대부분 백발이 성성한 중년 이상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무엇보다.

‘……회귀 전엔 보지 못한 사람이야.’

가호 때문에 교황이나 어지간한 수석 신관들은 다 한 번쯤 봤었는데 말이다.

‘내 기억 착오일 가능성도 없어.’

얼굴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연령대를 착각하긴 어려웠으니까.

그녀가 본 신관 중, 이토록 젊은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잘 쳐 줘도 자신보다 조금 연상의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홉 번째 수석 신관은 젊은 나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게 축복 의식을 진행했다.

모든 의식이 끝마쳐졌을 때 안토니아는 또 한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성하께 빠른 쾌차를 바란다고 전해 주게, 노웸 신관.”

“폐하의 마음을 성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이 귀중한 자리를 제가 대신함을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토니아는 그 대화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전에도 수석 신관 중에서 힘을 알아본 사람은 반 정도였으니까.’

교황이 아파서 자리하지 못했다니, 의아하긴 했으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황제에게 인사 올리며 물러나려 하자 어깨에서 힘이 빠질 정도였다.

이 뒤에 또 황제와 대화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어?’

잠깐이었지만 아홉 번째 수석 신관과 시선이 닿았다.

우연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마치 그녀를 보아 다행이라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으니까.

* * *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 뒤 무도회에서 많은 사람과 어떻게 대화했는지조차 아득할 정도로.

‘그나마 대공 전하가 끝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포기해서 다행이지.’

새삼 생각하니 아주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오늘 무도회에서 그 단단한 팔이 이상하리만큼 자신을 받쳐 주는 기분이 들었었으니까.

그럼에도 자신이 거절하자 그는 산뜻하게 물러서 주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숨기지 못하고 새어 나온 서운함이 떠오른 얼굴이 괜히 눈에 아른거렸지만.

‘아냐, 마음 약해지면 안 돼. 황실이랑 엮여서 그렇게 데어 봐 놓곤.’

무척 고맙긴 했다. 하지만 자신은 감당할 자신이, 아니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에게 백작위 특별 승계를 인정받고 몇 마디 말을 나눈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여기서 더 엮이다니.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덕분에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안토니아는 의자에 똑바로 앉을 기력조차 없었다.

내내 긴장하는 와중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많이 힘드셨나 봐요, 아가씨.”

폴리와 로레나는 무거운 장신구나 머리 장식들을 재빠르게 풀어 주며 부채질을 해 주었다.

“응…….”

안토니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홉 번째…… 노웸 수석 신관.’

지금까지 6년간, 당연히 안토니아는 회귀 전과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그러니 주변 상황이 바뀌는 것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가 생각한 범위 내였는데.’

생각한 것보다 쉽게 풀리긴 했으나, 백작위 특별 승계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마 거기서 교황이 등장하지 않을 줄이야.’

마음 졸이며 대책을 세운 게 모두 허무할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가 걱정된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노웸 신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게다가 그가 마지막에 보인 미소도 마음에 걸렸다.

그 표정에 안토니아는 지난 6년간 찝찝해하면서도 묻어 두었던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동부 대신관 사건.’

물론 그를 처리할 때 리샤르가 도와줬고, 그가 입막음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쓰는 약이 영원할 리가 없었다.

안토니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긴커녕, 동부 대신관이 소리소문없이 제거됐었지.’

루퍼스를 통해 조사하긴 했으나, 다른 곳도 아니고 중앙 신전의 일이라서일까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동부 대신관의 죄가 크긴 해도 그래도 신관인 이상, 그런 식으로 세상에 없던 사람인 것처럼 지워 버리진 않을 텐데…….

‘다시 알아봐야 해.’

노웸 신관이 자신에게 보인 표정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확인하고 안심한 얼굴이었지.’

그러니 더욱 알아봐야 했다. 그 사건 직후엔 아직 루퍼스도 어렸고, 자신 또한 섣불리 스스로를 드러내기 어려워 적당한 선에서 조사를 그쳤지만.

‘적어도 노웸 신관이 동부 대신관 사건에 관여했는지라도 알아내야 해.’

손 놓고 있다 휩쓸리듯 살아가는 인생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아무래도 영지에 돌아가는 게 늦어지겠어.”

백작위 승계를 받는다는 목표는 달성했으나, 또 다른 미심쩍은 문제가 생겨 버렸으니까.

안토니아는 머리 아파하며 한숨 쉬듯 말했으나, 어쩐지 폴리와 로레나는 눈을 반짝였다.

“앗, 그럼 주방장님께 편지 써야겠네요! 더 늦게 돌아간다고 말이에요.”

“오래 머무실 것 같으면 마틴 씨를 수도에 오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즐거워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목소리에 안토니아는 의아해졌다.

“두 사람은 얼른 영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에이, 아니죠! 백작저 제 방이 얼마나 그리운데요. 로레나와 예쁘게 꾸며 둔 저희의 스위트 룸이 울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걸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웃었다.

타운하우스는 아무래도 작아서 하인 숙소도 영지 저택처럼 크지 않았으니까.

침대와 옷장을 두면 자그마한 티 테이블을 놓기에도 협소한 크기였다.

“그런데 마틴까지 부르겠다고?”

“그거야 아가씨께서 수도에서 약혼식이나 그런 걸 치르실지도 모르잖아요.”

“……응?”

평소 진중한 로레나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와 안토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약혼식이라니?”

“작위 승계를 유지하려면 결혼도 해야 한다고 아가씨, 아니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요. 게다가…….”

“게다가?”

“트라체스 대공 전하께서 어떻게 봐도 아가씨께 정성이시잖아요.”

로레나의 말에 폴리도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예기치 못한 노웸 신관 일로 긴장했던 기분이 단숨에 날아갔다.

‘……어쩌면 좋지, 트라체스 대공 전하.’

본인은 알고 있을까.

모두가 이렇게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아차린다는 걸.

‘……물론 난 트라체스 대공과 더 엮일 생각이 없지만.’

목적을 이뤘으니 되도록 발을 빼는 게 최선이었다.

안토니아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에게 쐐기 박듯 말했다.

“트라체스 대공 전하는 그냥 파트너라서 신경 써 주신 것뿐이야.”

비록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건 안토니아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폴리와 로레나의 눈이 단번에 안토니아답지 않다는 듯 의아해졌다.

자신들이 아는 아가씨는 눈치가 없지 않았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며 말을 돌렸다.

“게다가 결혼하긴 해야 해도 당장은 아니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럼…….”

“수도에서 해결할 일이 생겨서일 뿐이야.”

그 단호한 말에 폴리와 로레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곧 두 사람에게서 동정의 빛이 보였다.

당연히 대상은 리카르도 트라체스였다.

* * *

황실 무도회에서 돌아온 밤, 리카르도 트라체스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 하루를 저도 모르게 곱씹게 되었으니까.

분명 그의 충직한 시종인 드비가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 질색하는 얼굴을 할 게 분명했다.

사춘기 청소년도 아닌데, 이상하게 입가가 말랑말랑해졌다.

‘비록 안토니아를 독점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눈에 빛나는 건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눈에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5년간 그토록 그려 왔던 제 아가씨는 더 아름답게 빛이 났다.

그 완고한 황제조차도 그렇게 부드럽게 대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곧 리카르도의 입가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 수고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대공 전하.’

마치 제게 선을 긋듯 답하던 거절의 말이 떠올랐으니까.

그렇게 과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도회 에스코트 상대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안토니아는 회장에서 나오자마자 리카르도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말했다.

‘……조심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아.’

그런데도 조바심이 났다.

간신히 안토니아를 배웅할 때까지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뒤에는 드비가 알 정도로 낙심하고 말았다.

‘에이, 살다 보면 차일 수도 있는 거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전하. 저는 지금껏 손으로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차여 본걸요!’

위로랍시고 건넨 게 그딴 소리긴 했지만.

그저 한 번 무뚝뚝하게 쳐다보는 걸로 그치자 드비는 진지하게 걱정하며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아니, 진짜로 차인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냥 데이트 거절?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겨우 집에 데려다주는 걸 거절한 것뿐이라고요.’

‘…….’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도 드비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진짜 다신 보지 말자는 소리도 지금껏 일곱 번은 들었는데요! 전하는 그 소리는, 악!’

기어코 한 대를 얻어맞고서야 드비는 안심이 된다는 듯 실실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오히려 기분 나빠서 마차에 있던 쿠션을 한 번 더 던졌다.

‘안토니아가 집까지의 에스코트조차 거절할 정도로 경계할 줄이야.’

어린 시절과 너무 달라졌다는 게 확 느껴졌다.

이미 자신이 지난 수년간 꿈꾸고 그려 오던 감격스러운 재회는 물 건너간 지 한참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아의 태도를 보니 리샤르가 자신이라고 밝히는 건 아무래도 힘들 듯했다.

‘축복 의식 이후에…….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는 게 느껴졌으니까.’

교황이 없어서, 가호가 밝혀지지 않아서 오히려 안심할 줄 알았다.

‘가호와 관련해선 오히려 예상하지 않은 변수가 더 부담스러운 걸지도 몰라.’

한숨이 나왔다.

축복 의식 이후로도 리카르도의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로 쏠려 있었다.

안토니아는 흐트러짐 없이 의연하게 굴었으나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표정이 없었음에도 리카르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축복 의식 이후, 황제나 귀족들과 대화할 때 입으로는 멀쩡하게 말했지만, 자신의 팔 위에 얹어졌던 손이 몇 번이나 움찔거렸다.

물론 리카르도는 안토니아가 자신의 팔을 주무르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오히려 좋았다.

자신에게는 아주 조금은 마음을 푸는 게 아닐까 해서.

그렇다면 빠른 시일 내에 안토니아에게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착각이었지.’

오히려 그런 무례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단 소리였다.

게다가 안토니아는 여러 귀족들과 대화하면서도 리카르도 쪽으로는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를 걱정하며 청한-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심이 더 컸던- 마지막 배웅까지 그렇게 칼같이 선을 긋듯 거절하다니…….

‘……설마 앞으로는 더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심지어 앞으로는 안토니아를 만날 만한 뚜렷한 구실조차 없었다.

‘아냐, 괜한 생각일 거야. 내가 걱정돼서 쓸데없이 추측하는 거겠지.’

그래야만 했다. 아니, 틀리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트라체스 대공으로서 그녀와의 신뢰 쌓기가 무척 어려워질 테니 말이다.

그는 유일한 맹세를 건넨 자신의 아가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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