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6화 (6/29)

#6.

“이거면 충분해.”

팔찌를 하나 더 걸려는 하녀를 보며 안토니아는 보석함을 닫으라는 듯 손짓했다.

“어디 티 타임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번거롭기만 할 뿐이야. 수도까지는 제대로 된 숙소도 없는걸.”

“하지만 아가씨…….”

“괜찮아, 로레나여도 그걸로 충분하다고 할 테니까.”

그 말에 앳된 얼굴의 하녀는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이었다. 올해도 세르히 백작령은 어디 흉작 든 곳 없이 평화로웠다.

안토니아는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장부에 서명한 뒤 기다리던 하녀에게 건넸다.

“마틴에게 전해 줘.”

“네, 아가씨.”

안토니아는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보다 더 단순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수도로 떠나는 날이었으니까.

회귀하여 눈을 뜬 날로부터 6년이 지났다.

안토니아도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어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고자 수도로 걸음할 나이였다.

바올로를 제명한 그해 봄으로부터 5년간 안토니아는 예전 삶과 달리 스스로 바쁘게 움직였다.

바올로 때문에 제 방에 유품을 끌어안고 박혀 지내던 때보다 몸은 바빴으나 마음은 훨씬 행복했다.

체력도 꽤 붙어 픽픽 쓰러지진 않을 정도는 되었고 말이다.

‘적어도 이제 말라서 안쓰럽단 소리는 안 들으니 말이야.’

안토니아는 다른 하녀가 건네는 보닛을 머리에 쓰며 방에서 나섰다.

계단을 걸어 엔트런스 홀로 내려오자 폴리가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실으라고 한 거 다 실었어요! 수도로 같이 갈 하인들도 다 준비되었고요.”

“로레나도 확인했어?”

“그럼요! 힝, 아가씨, 저만 확인하면 못 믿으시는 거예요?!”

폴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귀여운 성격이었다.

그 목소리에 곁에 온 마틴이 그녀의 등짝을 찰싹 치며 이야기했다.

“너만 확인하더냐, 아가씨는 중요한 건 모두 두 번씩, 세 번씩 서로 확인하라고 당부하셨잖아.”

“이잉,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아가씨에게 투정 부려요. 주방장님은 너무해요!”

그 모습을 보며 안토니아는 속으로 웃었다.

두 사람은 참 친모녀지간 같았다.

마틴은 여전히 주방장과 가정부를 같이 겸하고 있었다.

집사는 일부러 뽑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가씨, 말씀하신 내역 여기 있어요.”

길었던 머리를 단발로 깔끔하게 싹둑 자른 로레나가 장부를 가지고 와 안토니아에게 보여 줬다.

안토니아는 장부를 세세히 훑어보고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에도 정확한걸.”

“휴, 다행이에요. 수도에 가면 마틴 씨가 절 도와줄 수 없잖아요.”

다름 아니라 로레나를 지난 몇 년간 꾸준히 가르쳤으니까.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마틴도 침착하고 꼼꼼한 로레나의 성격에 의욕 있게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아직은 좀 서툰 구석이 있다곤 해도 어지간한 집안의 집사보다는 훨 나았다.

뭐, 남자 하인 중에서는 좀 투덜거리는 자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까지 점검을 마친 안토니아는 저택 문을 열고 나섰다.

엔트런스 홀부터 입구까지 백작저 하인들이 열을 맞춰 안토니아를 배웅했다.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주인님이 되어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에 안토니아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드리웠다.

비록 거의 변화가 없어, 지척에서 그녀를 모신 사람이나 알아볼 법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 * *

“크롬프트 씨도 일주일 뒤에 출발한다고 그랬어요.”

“새로운 카메라 제작도 순조롭대?”

“네, 어제 혹시 몰라 마담 마기나와 함께 체크했는데 괜찮았어요.”

“그래.”

안토니아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5년간, 안토니아는 아주 공격적으로 사업에 나서진 않았다.

우선은 세르히 백작가의 내실을 다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거둘 수 있었으니까.

‘사치하지 않는 남의 편이 없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재산이 착착 잘 쌓이던지.’

굳이 특별한 걸 할 필요도 없이 원칙에 따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백작가 소유의 상단은 쑥쑥 잘 컸다.

무엇보다 나날이 루퍼스의 정보 수집 능력이 좋아졌으니까. 덕분에 손해는 피하고 이득은 챙길 수 있었다.

백작령 내 일부 가신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손을 봐 줬다.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본격적으로 움직일 순 없었으나, 방법이야 여럿 있었으니까.

아무튼 제법 긴 5년이었다.

그사이 공개한 루퍼스의 발명품은 고작 카메라 하나였다. 그것도 원래 그가 만든 것보다 훨씬 기능을 낮출 걸 요구했다.

물론 루퍼스는 입이 댓발쯤 튀어나와 불평했었지만.

‘루페, 사람들이 갑자기 좋아지면 다 환호할 것 같지? 그렇지 않아. 아무리 기술이 좋다고 해도 시기를 잘 맞춰야 해.’

‘이해가 안 가는데, 당연히 좀 더 좋은 걸 원하는 거 아니야?’

‘그건 너처럼 기계에 좀 돌아 버려야 그런 거고.’

안토니아는 몇 년 전 루퍼스를 설득하던 때를 떠올렸다.

루퍼스가 카메라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 게 아니었다. 드물긴 했어도 마법기계공학자는 있었고 최초 발명자도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진 한 장을 찍으려면 그 앞에서 30분은 꼼짝없이 서 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그렇게 인화해도 색 없는 사진이었고.

그러나 루퍼스의 카메라는 채광량이 충분하단 조건하에 1초면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궁정 화가가 그린 것처럼 생생한 색을 가진 데다, 크기도 훨씬 작았다.

‘그것도 요즘은 속도도 더 빨라지고 더 선명한 색이 나올 수 있게 개선했지만.’

아무튼 물론 나오면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능이 좋다 보니 그만큼 비용도 높아졌다.

‘판매 대상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야.’

‘그래서 내가 만든 이 아름다운 기계를 시판하는 허섭스레기들하고 비슷한 레벨로 맞추라니!’

‘누가 완전히 비슷하게 맞추래?’

어느 정도의 센세이션은 필요했다. 단, 세르히 백작가나 루퍼스 본인에게 지나친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5년 전만 해도 두 사람 모두 어려서 괜히 쓸데없는 자들이 관심을 가지면 불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과 루퍼스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루퍼스는 투덜거렸지만 촬영 시간을 30분에서 10분만으로 단축시킨 것만으로도 필요한 만큼의 화제성과 수익을 벌어다 주었다.

게다가 그 정도는 루퍼스의 기술로 꽤 저렴하게 제작이 가능해, 그전까지만 해도 지나친 고가품으로 여겨지던 카메라였지만 이제는 중산층까지도 무리 없이 살 수 있었다.

평범한 노동 계층도 돈을 모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고 말이다.

‘원래 모든 물건은 보급품과 고급품을 나눠 파는 게 더 이득인 법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5년, 조잡한 카피품을 파는 자들도 생겼으나 오리지널의 위용이 있어 아주 큰 타격은 되지 못했다.

대부분은 루퍼스의 기술력을 따라잡지 못해 대단한 가격경쟁력도 갖추지 못했고.

‘이제는 고급품이 필요한 때지.’

돈은 있는 사람에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촬영 시간을 기존 10분에서 5분 이하로 줄이고, 아주 깔끔하진 않아도 컬러로 인화되는 카메라를 루퍼스에게 요구했다.

물론 루퍼스는 그 말에도 엄청 투덜거렸지만.

‘도대체 언제쯤 되어야 제대로 된 걸 생산할 수 있게 해 줄 건데!’

‘이 고급 기종이 완전히 자리 잡으면?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정도로 팔아야지, 지나치게 단계를 뛰어넘으면 쓰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한 물건이 되기 마련이야.’

안토니아도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과거 루퍼스의 좋은 카메라들은 지나치게 빨리 나온 덕에 조잡한 카피품으로 익숙해진 뒤에야 손대기 시작했으니까.

그때도 여전히 황실이나 돈이 남아도는 사람이나 쓸 정도의 고급품이라는 인식은 남아 있었고.

이제 자신도 사교계에 얼굴을 비출 테니 카메라에 대해 사람들에게 흘리기도 딱 좋을 것이다.

물론 사실 안토니아의 진짜 걱정거리는 카메라 사업이 아니었지만.

수도에 가면 자신의 인생을 꼬아 버린 자들이 지금껏 이상으로 잔뜩 있지 않은가.

‘그것도 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기까지 하고.’

안토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곁에서 로레나가 쿠션과 담요를 준비했다.

“한숨 주무시는 게 어떠셔요? 수도까지는 길도 꽤 멀잖아요. 라미나 경도 아가씨가 지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어요.”

“응? 아니야, 아직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

쾅-!

그 순간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며 마차를 끌던 말이 놀라 멈춰 서며 울었다.

폴리와 로레나는 빠르게 안토니아를 보호하듯 달라붙었다.

“나오지 마십시오!”

바깥에서 라미나가 소리쳤다. 안토니아는 폴리와 로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이윽고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기사나 하인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그게 그쳤을 때는 언젠가 들어본 기이한 적막이 깔렸다.

안토니아는 이 적막을 알고 있었다.

덜컹-!

마차 문이 열리고 낯익은 화려한 붉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다. 그렇지, 아가씨?”

“……테넌.”

동부 암살자 길드장 테넌이 문을 활짝 열며 얼굴을 내밀었다.

“미안, 우리 사이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알다시피 우리는 의뢰로 움직이는 사이잖아?”

그리고 이어서 한층 더 두툼해진 익숙한 사람이 낑낑거리며 마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름 아닌.

“그간 잘 지냈느냐, 내 사랑스러운, 아니.”

그자는 아주 두툼하게 갈라진 이중턱에 손을 댄 채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내 깜찍하고 배은망덕한 조카, 안토니아야.”

그는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얼굴로 허리를 쭈욱 폈다.

화창한 가을날, 바올로는 세르히 백작가의 마차를 습격했다.

폴리와 로레나는 안토니아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바올로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 백작가의 일원도 아닌 사람이 무슨 일인가요!”

로레나는 당당한 얼굴로 바올로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짝-!

“이 건방진 것이 어디서 감히 주인에게 대드느냐!”

그러나 로레나는 예전처럼 겁먹거나 기죽지 않았다.

5년간, 그녀는 세르히 백작가의 집사가 되기 위해 많은 교육을 받았으니까.

당연히 집사로서의 태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제 주인님은 오로지 소백작님뿐입니다.”

퍽-!

바올로는 로레나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당장 닥치거라,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니까!”

바올로는 로레나의 팔을 잡고서 강하게 끌어낸 다음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여전히 표정 하나 없어 영 찝찝한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안토니아, 내 조카야. 내 말을 얌전히 따르면 네 하녀들을 더 괴롭히지 않을 생각이야, 어떠냐. 이만하면 너그럽지 않으냐.”

“헛소리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절대 못 보내요!”

그러나 안토니아가 답하기도 전에 폴리가 나서며 외쳤다.

“이것이 어디 윗사람이 말하는데 건방지게!!”

바올로가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손이 내려치기 전에 안토니아가 외쳤다.

“작은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대로 할게요.”

“……아가씨!”

“괜찮아, 폴리. 작은아버지는 그냥 좀 화가 나신 것뿐이잖아.”

안토니아는 예전처럼 고분고분한 척하며 바올로에게 말했다.

“착한 척하지 말거라, 내 조카야. 내가 아직도 널 순진하다고 생각할 것 같으냐.”

바올로는 이를 으드득 갈며 안토니아의 팔목을 끌어당겼다.

마차에서 끌려 내려오자 백작가 기사들이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바올로는 반항은 무의미하다는 듯 옆쪽으로 눈짓했다.

그곳에는 창 하나 내지 않은 고동색의 작은 마차가 있었다.

얼핏 상인의 짐마차처럼 보여, 올라타면 안에 설마 귀족 후계자가 납치당해 타고 있다고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은 외향이었다.

“절 따라가게 해 주세요!”

“맞아요, 저희는 계속 아가씨를 모셔 왔다고요!”

폴리와 로레나가 외쳤으나 바올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흥,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희같이 건방진 것들은 여기서 그 숨통을 끊어 놓는 게 제일 편한 일인데!”

“작은아버지.”

“넌 입 다물어! 어디 또 몇 마디 말로 내 귀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게야! 듣지 않을 거다.”

“폴리와 로레나는 제게 가장 가까운 아이들이에요, 시중하녀를 죽였단 소리를 들으면-.”

“뭐, 내 명예가 땅에라도 떨어질 거라고?”

바올로는 그쯤은 알고 있었다는 듯 코웃음쳤다.

“너만 똑똑한 줄 아느냐? 5년 전에 그만큼 당해 치욕적인 꼴을 당해놓고도 내가 그대로 멍청한 줄 알아?!”

바올로는 안토니아의 머리채를 쥔 채 그대로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나머지는 맡기겠네, 적막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처리해 주겠지?”

“물론이야, 우린 받은 의뢰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니까.”

테넌의 붉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며 바올로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는 직접 마차를 몰았다.

이런 일에 목격자가 많아서 좋을 것 없으니까.

‘어차피 암살자 놈들은 돈 받은 이상 절대 입 열지 않을 테고……. 게다가 그 길드장도 안토니아에게 매번 이용만 당해 원한이 있다고 했으니.’

이번 계획만큼은 완벽했다.

* * *

바올로는 이틀을 꼬박 달렸다.

그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인근 남작령이었다.

그곳에는 부유하고 나이 들어 첫 부인과 사별한 남작이 있었다.

이미 후계자도 장성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정정했고 예쁘고 어린 아내감을 찾고 있었다.

그것도 귀족 영애로 말이다.

‘안토니아에 대해 이야기하니 아주 좋아했지.’

바올로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지난 5년, 바올로는 서쪽 끝에 위치한 감옥에서 죽도록 일하며 지내야 했다.

덕분에 자신의 늠름하고 풍채 좋던 몸은 이상한 곳만 살이 불어 영 볼품없어졌다.

‘모두, 모두 저 건방진 것 때문이야.’

게다가 귀족 신분까지 박탈당해 누구도 바올로를 존중하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 미천한 것들과 자신은 격이 달랐는데도 말이다!

바올로는 그 속에서 자신의 투옥 기간만 끝나면 안토니아를 잘 구슬려 신분을 모두 회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 약한 아이니, 혈육의 정을 절대 무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그런데 1년 전,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 도라가 도둑질하다 서쪽 감옥에 투옥되었다.

도라는 바올로를 보자마자 울며 이야기했다.

‘모두 아가씨에게 속은 거예요, 바올로 님!’

‘뭐? 그게 무슨 말이냐.’

도라는 안토니아가 순진한 척을 하던 거라며 사정을 줄줄 이야기했다.

자신이 모르던 밀즈 부인이나 포미스 때의 이야기도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바올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그렇게 순진하게 굴며, 감쪽같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니!

바올로는 안토니아에 대한 원망으로 형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몰래 숨겨 놓은 보석을 털어 암살자 길드에 안토니아의 납치를 의뢰했다.

‘하필 암살자 길드에 원한을 사다니, 멍청한 것.’

바올로는 천천히 마차를 멈췄다. 슬슬 해가 져, 불을 피우고 쉴 필요가 있었으니까.

마차 문을 여니 힘없이 저를 바라보는 안토니아가 있었다.

요 이틀간 안토니아는 부단히도 자신을 설득하려 들었다.

‘모두 오해예요, 작은아버지.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도라가 다 이야기했다! 도라는 널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이였어, 그 아이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냐!’

‘도라는 거짓말을 하다 쫓겨났다는 걸 정말 모르셔요? 그때도-’

‘도라와 너, 둘 중 누가 더 거짓말에 능할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바올로는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을 자신 있었다.

“뭘 그리 보느냐, 물이라도 간절해서?”

바올로는 이틀간 안토니아에게 물 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5년간 튼튼해졌다곤 해도 원래가 약한 조카는 금세 말하는 것도 힘겨워했다.

어디선가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바올로는 픽 웃으며 마차 근처에 불을 피워 저 혼자 고기를 구웠다.

“이제 그만 포기하거라, 안토니아. 곧 남작저에 도착하니까.”

“작은아버지는……. 세르히 백작가를 멸문시킬 생각인가요?”

“멸문? 그게 무슨 소리냐, 이 내가 있는데.”

바올로는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안토니아는 이제 아무것도 못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네가 남작과 결혼하면 자동적으로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한다고 나도 안 될 거라 생각하느냐?”

“작은아버지는 이미…….”

“쯧, 그러니 네가 어린 게지. 황실은 귀찮은 걸 제일 싫어해.”

바올로는 두툼한 고기를 잘 잘라 꼬챙이에 끼운 뒤 불에 다시 올렸다.

역시 한 덩이로는 영 배가 차지 않았다.

이내 고기는 맛있는 냄새를 흘리며 육즙을 뚝뚝 흘렸다.

바올로는 군침을 다시며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아무도 남지 않았으나, 나는 있다. 적당히 자리를 채울 사람은 필요하고 이미 나는 형기를 마친 몸. 황실에선 간단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겠느냐.”

“……제가 끝까지 결혼 서약을 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아요.”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느냐?”

바올로는 크게 웃었다.

그는 꼬챙이에 꿰어진 고기를 한 번 돌려주며 안토니아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그럼 널 죽이면 돼.”

“……네?”

“내가 못할 것 같으냐? 아니, 생각해보니 그게 더 쉽겠구나.”

바올로는 안토니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 없애 버리는 게 더 쉬운 법인데.

‘그래, 애초에 8년 전에 이 아이도 없애 버리려 했었는데…….’

그날의 마차 사고에서 하필 운 좋게도 이 어린 조카는 살아남았다.

이용 가치가 있어 보여 살려 두었을 뿐이었다.

“두 명에 하나를 더 더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게 있겠느냐.”

“……네?”

“하하하하, 멍청한 조카야, 날 따라? 내가 소중하고 믿을 수 있어?! 이 상황이 되어도 너는 여전히 네 부모를 죽인 게 누구인지를 모르나 보구나.”

안토니아가 그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물빛 눈, 저 눈이 너무 싫었다.

빛깔은 달랐으나 자신의 형을 닮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닮았다.

자신을 쓸모없는 것 취급하던 때와 똑같은 눈이었다.

바올로는 그대로 안토니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목이 잡혔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절대 죽이지 못할 거라는 것처럼.

대신.

“역시, 그런 거였네요.”

“뭐?”

탕-!

다음 순간 안토니아가 재빠르게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총? 어디서 이런 걸……!”

바올로는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참 제 조카는 끝까지 멍청했다. 쏠 거라면 공중이 아니라, 제 이마를 겨눴어야지.

“멍청한 조카야, 사람을 죽일 각오는 없었나 보구나!”

바올로는 다른 손으로 안토니아의 손에서 총을 쳐 날리며 목을 졸랐다.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위협하려 한 거였는데, 조카가 쓸데없는 짓을 하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곳은 깊은 산중, 안토니아를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윽……, 흡.”

안토니아의 목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금방 죽어 버릴 것처럼 숨이 넘어가던 그 순간.

“……어?”

바올로는 팔에서 힘이, 아니……. 팔 한쪽에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으아아악! 내, 내 팔……!”

순식간에 안토니아의 목을 조르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아가씨! 무사하셔요?!”

폴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새카맣던 숲속이 삽시간에 횃불로 밝아졌다.

세르히 백작가 기사단의 깃발과 수도 경비대의 깃발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바올로, 그대를 귀족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한다!”

선두에 선 경비대장이 우렁차게 외쳤다.

바올로는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안토니아는 곧장 그를 데려가려는 경비대장을 붙잡아 요청했다.

“마지막 인사는 하게 해 주세요.”

“참 소백작님도 다정하십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자에게.”

“그래도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니까요.”

그 상냥한 말에 경비대장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단단히 몸을 묶어 포박한 뒤, 안토니아의 앞에 무릎 꿇려 주었다.

바올로는 팔이 잘린 충격과 생각지 못한 상황에 황망한 얼굴이었다.

참 친절하게도 경비대가 그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제거해 준 덕에 대화는 나눌 수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도라가 돈값은 한 모양이네요.”

“뭐?!”

안토니아는 바올로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사실은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작은아버지 하나 처리하는 데 굳이 이렇게 무대를 마련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바올로는 제 조카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뻐끔거렸다.

자신에게 요 이틀간 제법 본성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모습은 전혀 달랐다.

“날, 날 속였다고……?”

“아참, 조금 전 작은아버지의 팔을 자른 것도 테넌이에요.”

“……암살자 길드장이?”

“작은아버지의 의뢰를 받아서 수행하는 척해 달라는 게 제 의뢰였답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짓을! 죽을 생각이 아니고서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바올로를 비웃었다.

자신은 그렇게 허술하게 굴지 않았다.

요 이틀간, 안토니아는 일부러 바올로를 자극하고 부모님을 떠올릴 만한 행동을 했다.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바올로가 마차를 세웠을 때 들린 부엉이 소리는 다름 아닌 테넌 쪽에서 준 신호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판을 벌이라는.

지난 5년간, 백작가를 돌보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줄곧 간직하던 의문이 떠올랐다.

‘정말로 부모님은 단순한 사고로 돌아가셨던 걸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여름도 겨울도 아니었다. 산사태 같은 게 날 법한 날씨도 아니었다.

안토니아는 루퍼스를 닦달하여 그때의 기록을 찾았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렇다면 의심되는 자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도라에게 그러셨다지요, 8년 전에 백작가에 발을 들일 수 있던 건 모두 자신이 노력한 결과라고요.”

얼핏 안토니아를 구슬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전 생각했어요, 마차 사고는 역시 작은아버지가 일으킨 거겠구나. 하고. 그래도 답이 미적지근한 건 싫잖아요.”

“……안토니아, 정말로……. 정말로 네가 안토니아가 맞단 말이냐?”

“네, 그럼요.”

바올로 때문에 한 번 엉망진창인 인생을 살았던 틀림없는 안토니아 세르히였다.

“마음 같아서는…….”

안토니아는 천천히 이마 위에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

조금 떨어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조카가 작은아버지의 얼굴에 손을 대는 걸로만 보일 것이다.

바올로의 눈이 겁먹은 듯 잘게 떨렸다.

“부모님의 원수를 이 손으로 갚고 싶어요. 아주 간단할 거예요. 그냥 방아쇠를 당기면 되니까요.”

“아, 아, 안토니아.”

“하지만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것보다도 더 나은 방법이 있는걸요.”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당당히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는 게 더 괴롭고 어울릴 테니까.

“그러니, 안녕치 못하게 가세요. 작은아버지. 주신께서 영원히 작은아버지를 품어 주시지 않길 바라요.”

안토니아는 이마에 두었던 총을 거두며 바올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무릎 꿇은 바올로의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 * *

수도 경비대는 수도까지 호위해 주겠다고 했으나, 안토니아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기사단만으로 충분하기도 했고 바올로의 수도 압송을 지체시키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이번 일로 백작가의 피해는 마차의 파손 정도로 금방 수리 가능한 거기도 했고 말이다.

혹시라도 말이 샐까 라미나를 제외한 기사들에겐 사정을 알려 주지 않았으나, 테넌이 미리 치사한 수를 써 준 덕이었다.

“참 아가씨도 매번 사람 부리는 게 험하다니까.”

“우리 기사들에게 마비독을 걸었으면서 할 소리야?”

“덕분에 아무도 안 다쳤잖아? 아가씨네 라미나 경은 기사들을 더 훈련시켜야겠다고 하던걸.”

마지막까지 마비독에 안 걸린 사람이 몇 없었다며 말이다.

테넌은 다음에도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며 가벼운 얼굴로 휙 사라졌다.

그로부터 꼬박 일주일을 더 간 뒤에야 비로소 제국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회귀 전 일 덕분에 안토니아에게는 퍽 낯익은 도시였으나 폴리와 로레나는 초면이었다.

“와, 성벽이 무척 높아요! 동부에서는 이렇게 높고 깨끗한 성벽을 본 적이 없었는데.”

“길거리가 무척 깔끔하네요. 아가씨가 저번에 백작령 도로를 정비해야겠다고 한 게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두 사람은 각자 마차 밖을 보며 감상을 쏟아냈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 삶에서는 이렇게 수도 풍경을 감상할 틈도 없었는데.’

바올로는 마치 도둑처럼 수도 안으로 입성했다.

마차 창 커튼을 길게 내린 탓에 안토니아는 타운하우스 내 자신의 방에 들어서서야 겨우 수도 거리를 볼 수 있었다.

뭐, 즐거운 기분은 아니고 그저 수도에 왔구나 하는 감상 정도긴 했지만.

세르히 백작가 타운하우스는 수도에서도 살짝 동쪽으로 치우쳐진 거리에 위치했다.

중앙귀족보다는 주로 세르히 백작가처럼 특별한 일이나 사교계 시즌에나 얼굴을 수도에 얼굴을 비추는 지방 귀족가가 많이 머무르는 거리였다.

“와, 영지 하우스보다는 작아도 너무 예쁘네요.”

폴리는 먼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안토니아의 손을 잡아 주며 이야기했다.

“수도잖아, 우리만 작은 것도 아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걸.”

폴리는 로레나의 말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타운하우스는 반지하층을 포함해 총 4층짜리 건물로 입구 쪽 정면 폭은 좁으나 뒤로 길쭉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앞뒤로 자그마한 정원도 있었고 말이다.

로레나가 담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하인들이 안토니아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모두들 소문을 듣고 무척 걱정했답니다.”

“바올로 님께 납치당해서 큰일을 당할 뻔하셨다니요.”

타운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걱정의 말에 안토니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경비대의 호의를 거절하고 미리 바올로를 압송한 보람이 있었다.

* * *

타운하우스에 도착한 다음 날, 로레나는 지난 일주일간 발행된 잡지와 신문을 모아다 주었다.

안토니아는 은은한 홍차 향을 즐기며 잠옷 위에 가운만 걸친 채 기사들을 체크했다.

[세르히 소백작 강제 결혼 위기에서 구출! 용감한 수도 경비대!]

[가련한 백작영애, 악독한 숙부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다!]

[노남작에게 조카를 팔아치우려던 파렴치한 숙부!]

기사마다 어조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하는 이야기는 비슷했다.

어려서 조실부모한 세르히 백작 영애가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기 위해 수도로 올라오다 납치당해 죽을 뻔했단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작은아버지를 욕하고, 난 정말로 가련하고 불쌍하게 써 두었네.’

기사의 어조에서 동정심이 그득히 느껴졌다.

심지어 좀 정보 빠른 기자 중 하나는 어릴 적 부모님을 잃은 것도 바올로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며 추측성 기사를 쓰기까지 했다.

‘좋아, 딱 좋아.’

보통 사교계에서 동정심은 그리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그게 필요했다.

백작위를 무사히 받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바로 결혼하지 않더라도 여성 귀족이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으니까.’

바로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말이다.

예전 삶에서도 어떤 귀족이 그런 식으로 데뷔탕트를 치르자마자 작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여성 귀족도 친척들에게 핍박받은 게 드러나 사교계의 동정심을 샀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그런 가십거리가 되었단 사실에 속상해 얼굴도 잘 내비치지 않았지만.

‘가십거리쯤이야, 별것 아니야.’

어차피 소문은 가라앉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안토니아는 바올로의 일을 굳이 수도 경비대를 끌어들여 해결했다.

그래야 자신이 수도에 도착했을 즘 소문이 쫙 퍼져 있을 테니까.

“아가씨, 오늘까지 온 티 파티 초대장이에요.”

로레나가 열 통쯤은 되는 초대장을 가지고 와 내려놓았다.

이것도 예상대로였다.

‘예전에 수도에 왔을 때는 겨우 두어 통, 그것도 부모님과 친분이 있던 귀족 가문에서 의례적으로 온 게 다였는데 말이야.’

수도에 들어오고 일주일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겨우 도착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하나같이 고급인 편지 봉투를 보며 흡족해했다.

이 정도면 동정심도 제법 나쁘지 않게 값을 치른 듯했다.

“말한 사람은 있었어?”

“네, 여기요.”

로레나는 따로 빼 두었던 초대장을 안토니아에게 건넸다.

매와 검이 그려진 화려한 인장, 그리고 겉봉에 씌여진 수려한 필체.

발신인은 다름 아닌 레이디 트라체스였다.

‘예전 그 귀족도 레이디 트라체스가 도와주어 작위를 우선 승계받을 수 있었으니까.’

5년 전, 트라체스 대공은 답장 한 번 하지 않았으나 지금의 레이디 트라체스는 이렇게 감사하게도 반응을 해 주었다.

* * *

“뭐? 왜 그걸 이제야 말해.”

“그거야 저도 이제 들었으니까 그렇지요.”

억울하다는 듯 붉은 머리의 청년, 드비가 말했다.

“안토니아가 납치당해서 죽을 뻔했다니.”

수려한 외모에 큰 키, 짙은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흘 전만 해도 제국 바깥에 있다 내도록 달려 수도에 도착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괜시리 속이 탔다.

“그러게 누가 전령이 따라잡을 속도까지 무시하고 서두르라니.”

남자가 엔트런스 홀로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외모의 여성이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렴, 리카르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누님.”

“딱딱하긴, 그리고 너무 드비를 괴롭히지 말렴.”

레이디 트라체스, 이스베르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에게 말했다.

“이미 너의 아가씨에겐 내가 초대장을 보내 두었으니까.”

“이야, 역시 레이디 트라체스! 이스베르가 님이십니다! 아얏!”

드비는 촐싹거리며 이야기하다 익숙하게 정강이를 맞았다.

“누님께 경망스럽게 굴지 마, 드비.”

“상관없어, 리카르도. 어릴 때부터 본 애라 쟤도 동생 같은걸.”

리카르도는 그 말에 눈을 조금 찡그렸다.

“귀엽지 않은 얼굴을 하는구나.”

“귀엽단 소리를 들을 시기는 이미 지난 듯합니다.”

“그래? 하지만 네 아가씨에게는 아니잖니.”

리카르도는 그 말에 복잡한 얼굴을 했다.

트라체스 대공, 리카르도는 지난 5년간 매우 훌륭하게 자랐다.

키는 예전과 비교하면 한 뼘 이상 훌쩍 자랐다.

조금 말라 딱 소년 같던 몸도 지금은 넓은 어깨에 두꺼운 흉통, 고르게 잘 잡힌 근육으로 누가 보아도 잘 단련된 절제미가 있다고 할 법했다.

수도에서 이름난 조각가가 트라체스 대공을 모델로 조각을 하길 원했다고 소문 난 게 몇 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에게 있어 불운이 있다면 이제는 누가 봐도 예쁘단 소리를 들을 얼굴은 아니란 점일까.

누가 봐도 수려한 외모긴 했지만 말이다.

“네 아가씨가 리샤르가 너라는 걸 못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쑥 자랐을 뿐, 가족 중에서 저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지 않았던가.

그 확언에 이스베르가만이 재밌다는 듯 웃었을 뿐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그 무뚝뚝한 입매라도 어떻게 해 보렴, 드비가 그러던걸. 네가 아가씨 앞에서는 반짝반짝하게 웃었다고.”

‘나중에 손을 봐줘야겠군.’

그 촐싹이는 항상 이스베르가에게 말이 많은 게 탈이었다.

“이틀 뒤란다, 리카르도.”

“네?”

“그리고 그날 누나는 바쁠 예정이야.”

다들 멋지다느니 카리스마가 있다느니 해도 이스베르가에게는 귀여운 동생이었다.

이스베르가는 5년 전, 비장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오던 날부터 요 사랑스러운 동생을 응원해 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재밌을 것 같아서도 크지만.’

드비를 재촉해 사정을 안 뒤로부터 이날이 오길 이스베르가는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그 소백작님은 리카르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만만치 않은 아가씨일 것 같거든.’

* * *

“엄청 크네요…….”

폴리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했다.

“대공가는 수도에서 머무를 때가 많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로레나는 어지간한 영지 저택보다도 더 큰 대공가의 수도 저택을 보며 덩달아 감탄했다.

수도에 들어온 지 나흘째가 되는 날, 안토니아는 첫 티 파티, 아니 가벼운 티 타임으로 레이디 트라체스의 초대를 선택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부디 소백작에게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직 어리고 알려 줄 사람도 없었을 테니 수도 사교계가 낯설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이 티 타임엔 저와 아주 친한 사람만 초대할 생각이니까요.

부디 절 믿고 참석해 주면 좋겠어요.]

화려한 필체로 쓰인 정중한 내용이었다.

회귀 전 트라체스 대공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대공가의 귀족인 만큼 좀 더 오만한 느낌이 들 줄 알았는데 말이다.

‘사교계 활동도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다곤 했지.’

6년 전, 타국 귀족과 결혼했던 이스베르가는 지난해 남편과 사별 후 다시 대공가로 돌아와 성을 회복했다.

그녀는 올해로 6살이 된 딸이 하나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결혼했던 집안에서도 딸에게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제국으로 돌아온 뒤 이스베르가는 자선활동에 관심을 쏟으며 딸을 돌보는 느긋한 생활을 원한다고 대외적으로 밝혔다.

‘덕분에 레이디 트라체스와 이렇게 만날 기회도 생겼으니 나한테는 다행이지.’

그녀가 무엇보다 신경 쓰는 게 안토니아와 같은 처지의 여성 귀족들이었으니까.

안토니아가 두 하녀들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로 보이는 노신사가 맞이했다.

“대공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세르히 소백작님.”

집사는 안토니아를 엔트런스 홀로 안내하며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만, 소백작님.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급작스레 이스베르가 님께서 사정이 생기셨습니다.”

“사정?”

“네, 갑자기 따님의 열이 올라…….”

이해가 가는 사정이었다. 아이들은 급작스레 아픈 법이었으니까.

“괜찮네, 그럼 다음에 따로 날을 청해…….”

“아닙니다. 아닙니다, 소백작님. 이리 오셨는데, 차 한잔 대접하지 않을 순 없지요. 그리고 다른 분은 오실 테니까요.”

이미 준비는 다 해 두었다며, 집사는 안토니아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아직 손님이 없어 세 사람은 응접실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와, 이렇게 준비했는데 그냥 물리면 확실히 아깝겠어요.”

폴리가 테이블 셋팅을 보며 감탄했다.

딱 세 명 정도와 단촐하게 즐기려고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테이블이었다.

“이런 것도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마틴 씨와 아가씨가 알려 주신 것만 보았으니까요.”

“그렇지? 다른 사람의 솜씨를 보면 여러 가지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로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꼼꼼하게 응접실 내 셋팅을 확인했다.

테이블 위 꽃장식이나, 평소 어땠을까를 떠올리며 열심히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안토니아는 그 사이 좀 더 느긋하게 응접실을 구경했다.

장식물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모두가 하나같이 고급품이었다.

특히 절제된 디자인임에도 한눈에 아름답다고 여기게 되는 점이 대단했다.

오래 대공가의 작위를 유지한 가문인 만큼 많은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는 것 같아 조금 부럽기도 하고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백작가 정비를 하면서 내부 인테리어에도 꽤 신경 썼는데, 비교할 엄두도 나질 않네.’

회귀 전보다야 훨씬 나았지만, 바올로나 밀즈 부인이 빼돌린 것도 제법 되어 백작저 내부는 그럭저럭 고상한 느낌만 남아 있었다.

타운하우스는 안토니아가 모르는 사이 바올로가 더 털어먹어 꽃과 적당한 것들로 채워야만 했고 말이다.

수 분 정도 되었을까, 다른 쪽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주었던 안토니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실례하겠습니다. 누님이 갑작스레 자리를 비워 제가 소백작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인사하지 않았더라도 안토니아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을 것이다.

‘트라체스 대공……!’

이미 아는 얼굴인데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을 것 같았다.

아이올라이트 보석을 닮은 푸른빛이 도는 자안, 모든 빛을 다 잡아먹을 것 같이 새카만 머리카락.

공들여 조각한 것 같은 턱선 위로 그 이상 완벽할 수 없을 것처럼 이목구비가 자리했다.

괜히 많은 여성 귀족들이 그를 보며 마음 앓이 하는 게 아닐 정도로 수려한 외모였다.

‘그래, 분명 레이디 트라체스는 친한 사람을 부르겠다고 했지.’

리카르도 트라체스는 그녀의 동생인 만큼 어떤 의미로 신경 쓴 걸지도 몰랐다.

회귀 전과 달리, 첫 인삿말도 오만하지 않고 정중했고 말이다.

심지어 회귀 전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은은한 미소까지 함께였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그의 저 아름다운 외모와 정중한 태도에도 영 마음이 딱딱했다.

‘……내 편지를 몇 번이나 무시했으면서!’

심지어 저렇게 인사하는 걸 보면 자신이 예전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단 사실은 까마득히 잊은 듯했다.

‘하긴, 트라체스 대공에게 나는 그냥 흔한 지방 귀족일 뿐일 테니까.’

안토니아는 평소보다 더 입가가 굳어지는 걸 느끼며 최대한 의례적으로 그에게 답했다.

“이리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전하, 미처 전하께서 오실 거라 생각지 못해 당황한 모습을 보였으니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완벽하게 예를 갖춘 인사였다.

그러나 어째선지 트라체스 대공의 표정이 굳어졌다.

얼굴에 확 드러나진 않았으나 몹시 당황한 것처럼 말이다.

* * *

“도대체 타이 하나 고르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쓰시는 겁니까?”

“입 다물어. 드비.”

리카르도는 아침부터 고민에 또 고민을 거듭했다.

머리 모양도, 입을 옷도, 넥타이 핀 하나까지도.

5년 만에 안토니아와 재회하는 것이니, 예전보다 더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게다가 자신이 트라체스 대공이라는 걸 처음 알리는 자리이지 않은가.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여 안토니아에게 예전에 자신의 신분을 속인 걸 용서받고 싶었다.

‘둘 다 비밀이 있단 건 알았으니, 이유를 설명하면 분명 안토니아는 끝까지 들어줄 거야.’

용서는 그녀의 마음에 달린 것이었지만.

리카르도는 5년 전 그때, 안토니아가 특별한 가호를 지녀 언젠가 수도에서 황족과 엮일 수밖에 없단 걸 안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5년 동안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그녀에게 힘이 필요할 때, 그때처럼 에둘러서가 아니라 제대로 힘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덕분에 황태자에게는 제대로 견제당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그런 건 다 사소한 거야.’

그러니까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때와 달리 훌쩍 큰 자신을 보며 안토니아가 어떤 얼굴을 할지도 궁금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예상외였다.

‘안토니아가…….’

자신을 향해 딱딱하게 예를 차렸다.

물론 원래도 표정은 없는 소녀긴 했다.

그래도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건 단순히 어리던 소녀가 훌쩍 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라서 안쓰럽던 5년 전에 비해 하얗고 투명한 피부 아래로 혈색이 돌아 건강해 보였다.

물빛 눈은 그때보다도 더 영롱하고, 백금발은 달빛을 섞어 담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딱 하나, 저 냉랭한 기운만 빼놓고 말이다.

‘처음 뵙겠다니, 설마, 설마 날 못 알아보는 건가?’

리카르도는 혼란에 빠졌다.

그간 사교계에서 의례적으로 나눴던 말만을 겨우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 * *

트라체스 대공은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어쩐지 기계적인 답변뿐이긴 했지만 안토니아에게 예를 다하려 노력한다는 건 느껴졌으니까.

‘……레이디 트라체스의 손님이라서겠지.’

과거에도 그가 이스베르가에게 정성을 다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스물이 넘도록 약혼 상대 하나 만들지 않는 건, 이스베르가를 보고 자라 그렇단 소리도 있을 정도였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실제로 내가 죽기 전까지 트라체스 대공은 결혼은커녕 약혼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지.’

물론 안토니아는 단순히 그게 이스베르가 때문만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황태자와 비슷한 연령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구석이 많았겠지.

실제로 자신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와 대공이 여러모로 흉흉하게 대립했고.

‘그때 황제 폐하가 편찮으셨다 보니…….’

아무튼 트라체스 대공은 마지막까지 안토니아에게 정중했다.

“누님께서 이른 시일 내에 소백작에게 다시 약속을 청할 거라 했습니다.”

“그렇군요,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제가 다시 레이디 트라체스를 뵈러 와도 되니까요.”

“아닙니다. 꼭, 누님께서 뵙고 싶어 합니다.”

그는 강조하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안토니아를 배웅할 때, 그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얼굴로 입을 뗐다.

“소백작, 5년 전…….”

그가 망설이듯 입을 달싹이는 걸 보며 안토니아는 내용을 짐작했다.

‘그때 답장하지 않은 걸 떠올리기라도 한 모양이지.’

물론 그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레이디 트라체스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자신에게 나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대공 전하.”

“……네?”

“5년 전에 바쁘셨겠지요, 면식 없는 어린 귀족의 청에 어떻게 일일이 다 신경 쓰실 수 있겠어요.”

트라체스 대공의 낯빛이 어쩐지 더 딱딱해졌다.

안토니아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예의 바르게 답했다.

“많은 귀족의 편지를 받으실 텐데요. 모두 이해하니 괘념치 마세요. 전하. 잘 해결되기도 했답니다.”

“……그렇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뭔가 결심한 듯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그래도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소백작도 많이 고민하여 보낸 청일 텐데. 부디 제가 사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정말 뜻밖의 행동이었다.

대공씩이나 되는 자가 지방 귀족에게 사과를 건넨 것도 신기했는데, 사죄할 기회까지 달라니.

“정말로 저는 괜찮아요, 전하. 바쁘신 분을 번거롭게 할 수는 없지요.”

“아닙니다. 바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트라체스 대공이라는 이름이 영 거슬려서 대충 흘려 넘겼지만, 기사만 봐도 그가 하는 일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안토니아가 그걸 떠올리며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밀어붙이듯 말했다.

“다음 주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네?”

“소백작께서는 한 달 뒤, 황실에서 여는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가한다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부디 제가 소백작의 무도회 준비를 도울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안토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도대체 왜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하지만 화제성에는 도움이 되겠지.’

지금은 기껏해야 동정심을 사는 귀족 영애일 뿐이다.

하지만 트라체스 대공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면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좀 더 주목도는 올라갈 게 분명했다.

‘그럼 루페의 카메라를 홍보할 때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안토니아는 의례적으로 한 번 거절한 다음, 리카르도의 청을 받아들였다..

* * *

“힉, 큭, 큽, 하하하하하.”

안토니아의 배웅이 끝난 뒤 몇 번이고 꾹 참던 드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처, 처음 뵙겠대요. 이제 어쩐대요? 그러게 답장은 좀 하시지, 아악!”

그러나 드비는 한 대 걷어차였음에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였다.

“아니, 그러게 저도 그렇고 이스베르가 님도 그렇고 말은 했지 않습니까. 못 알아볼 것 같다고!”

드비는 겨우 웃음을 그친 뒤 익숙하게 정강이를 문지르며 이야기했다.

“누가 엿보래.”

“에이, 그럼 어떻게 안 봅니까. 저도 오랜만에 소백작님 얼굴 좀, 헉. 안 때리셔요?”

정강이를 사렸던 드비는 잠잠한 리카르도의 반응에 되물었다, 기어코 옆구리를 한대 얻어맞았다.

“그렇게 많이 달라졌나? 못 알아볼 정도로…….”

자신은 단번에 알아봤는데, 이름을 몰랐다고 해도 분명 첫눈에 안토니아라고 깨달았을 것이다.

어린 날의 소녀는 제 마음속에서도 매년 자랐으니까.

5년 뒤에 이런 느낌일까 하고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5년 전이라고 해도 전하는 열일곱이었고 소백작님은 열둘이었잖아요.”

“그게 왜?”

“어릴 때 기억은 좀 잘 사라지지 않나요, 전 열두 살에 고백했던 무구점 누님 얼굴도 흐릿한데요.”

“네 멍청한 머리랑 같다고 생각하지 마.”

“에이, 뭐. 하긴 이번엔 소백작님이 나쁜 건 아닌 거 같긴 해요.”

그러더니 드비는 흠, 흠 하고 짐짓 분석하는 듯한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도는 눈만 찡그린 채 드비의 행동을 일단 내버려 두었다.

본인도 답을 알고 싶었으니까.

“역시 너무 멋져지신 게 문제인 것 같은데.”

“뭐?”

“그러게 누가 멋지게만 자라랍니까, 예쁜 구석도 남겨 놓으시지.”

드비는 그렇게 말하며 리카르도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입은 멈추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만 맞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윽, 이스베르가 님!”

드비는 뒤에서 나타난 이스베르가에게 등짝을 찰싹 얻어맞고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어떻게 됐는지 나한테 말하러 오랬더니 여기서 리카르도나 놀리고 있는 거니, 드비.”

“아이고, 제가 절대 잊은 게 아니라.”

“놀릴 거면 같이 놀려야지.”

“누님!”

이스베르가의 말에 리카르도는 무뚝뚝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스베르가는 작게 웃으며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을 놀리며 말했다.

“그러게, 왜 어릴 때 폼은 잡고 그랬니.”

“하지만…….”

“원래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그때는 이런저런 멋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겠지. 우리 리카르도는 성장기가 늦게 왔으니까.”

이스베르가는 즐거워 죽겠단 얼굴로 이야기했다.

“소백작 탓이 아니야, 애초에 5년 전의 귀엽고 예쁘던 리샤르가 지금의 리카르도 트라체스 대공일 거라고 생각할 만한 흔적이 없잖아.”

“누님까지…….”

“이름도 어릴 적 어머니나 부르던 애칭을 알려 줬지, 우리 집은 안 그래도 클수록 머리 색이나 눈 색도 바뀌어서 인상이 바뀌는데, 넌 얼굴도 어릴 때와 많이 달라졌잖아.”

이스베르가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래도 곧장 사과한 건 다행이구나. 거기서 사과도 하지 않았으면 더 일이 꼬였을 테니까.”

리카르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체스 대공에게 거북함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부터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안토니아가 이미 날 5년 전 상대도 안 했던 트라체스 대공이라고 생각한 이상, 거기부터 찬찬히 풀어나가야지.’

리카르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토니아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었다.

이스베르가는 한없이 진지한 동생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어쩜 내 동생은 저렇게 돌아가는 선택지만 밟아 댈까.’

그냥 단순하게 5년 전에 자신이 리샤르였고 직접 도와서 답장하지 않았단 걸 잊었다고, 예쁜 미소라도 지으면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실타래를 풀기는 더 나았을 텐데.

‘불쌍한 리카르도, 마음의 무게가 너무 다르니 이런 일이 생기지.’

자신이 보기에 그 소백작은 5년 전 리샤르를 그저 추억 속 친구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5년 사이 리샤르를 적극적으로 찾거나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

반대로 리카르도는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마음이 진심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우선 기반을 준비하고 5년 뒤에 짠 하고 재회한단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릴 때 만든 계획은 원래 그게 이미 마음속에서 정답으로 굳어져 수정하기 어려운 법이다.

‘혹시라도 소백작에게 거부당할까 봐, 최대한 안전한 쪽을 고른 거지.’

뭐, 그나마 다음 약속이라도 잡았으니 다행이었다.

물론 이스베르가는 상황을 대충 꿰뚫어 보았음에도 리카르도에게 조언할 생각은 없었다.

제 동생은 다른 부분에선 실수나 판단 미스가 거의 없어 좀 재미가 없었으니까.

‘뭐, 정말 상황이 꼬일 것 같으면 그때나 나서 줘야지.’

레이디 트라체스라고 불리며 많은 사람에게 존중받는 그녀도 동생의 고통이 즐거운 한 명의 누나였다.

* * *

안토니아가 수도에 온 지 5일째 날, 외곽 처형장에서 바올로의 형이 집행되었다.

안토니아는 다소 창백하게 보이도록 화장하고서 형장으로 직접 발을 옮겼다.

일부러 망토를 써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듯 굴되, 눈썰미 좋은 사람은 금세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차림새를 하고서 말이다.

“세르히 소백작, 소백작 맞지요?”

“……저를 아시나요?”

안토니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 남성 귀족을 보았다.

그는 흥미가 섞인 모습으로 안토니아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불쌍하고 안타까운 아가씨라고 써 붙인 것 같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사교계에서 떠들고 다닐 가십거리를 제공해 주길 바라는 게 보여 참 재밌었다.

“그럼요, 기사를 보고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답니다. 아, 안타까운 소백작.”

그 남성이 호들갑을 떤 탓에 다른 귀족들 중 몇도 수군거리며 안토니아 쪽을 바라보았다.

안토니아는 그제야 자신이 부끄러운 듯 쓴 망토로 얼굴을 가리려 했다.

“곤란하시겠군요, 소백작. 친척의 마지막 길이니 나와 보지 않을 수도 없을 테고.”

“……마지막만이라도 평안하시길 주신께 비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점점 모습을 숨기려 했다.

누가 봐도 타지에서 올라와 물정 모르고 처세술 모자란 귀족 영애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어쩜 이리도 다정할 수가,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자라고 들었는데.”

“마음이 많이 아프지요, 세르히 소백작? 그래도 꿋꿋이 버텨야 해요.”

마음씨 좋은 노귀족들은 안토니아의 손을 잡고서 토닥거려 주기도 했다.

호기심 가득한 자들을 쫓아 주기도 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이 모든 상황이 흡족했다.

‘이럼 분명, 자신의 넓은 아량을 뽐내려는 사람이 나에 대해 더 잘 알려 줄 테니까.’

바올로의 처형은 안토니아에게 아무런 감상도 남기질 못했다.

그나마 좀 고마운 점이 있다면.

“배은망덕한 것! 어디 유일한 혈육인 날 구하려 들지도 않는단 말이냐!”

마지막까지도 안토니아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러 동정 여론을 더해 줬다는 걸까.

“작위를 욕심내서 이 나를!! 나를 버리다니!! 어쩜 그리 탐욕스러울 수 있단 말이냐!!!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 줄 생각이었는데!!!”

끝이라고 생각해선지 바올로는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수도 귀족들에게 그런 고리타분한 말이 정말 호의로 느껴질 리 없었다.

“쯧, 원래 작위는 소백작이 가질 것인데 누가 누구보고 탐욕스럽대요?”

“돈 많은 늙은이한테 시집보내려는 게 언제부터 좋은 혼처라 했답니까. 저희 할머님도 헛소리라고 하실 것 같네요.”

안토니아는 그저 조용히 몸을 떠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덧붙여 지나치게 사람들에게 무례하거나 벽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굴었다.

“다들 감사드려요, 저는 괜찮습니다.”

미리 넣어둔 안약이 뺨을 따라 굴러떨어졌다.

안토니아는 부끄러운 듯 눈물을 훔치며 고개 숙여 이야기했다.

“이렇게 친절하게 제 일에 관심 가져 주실 줄은 몰라……. 어떻게 제가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보답은, 무슨 소립니까. 소백작.”

“맞아요, 걱정 말아요. 조만간 제가 초대장을 보내지요. 모르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평소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귀족들은 직접 안토니아에게 도움 주려 했고, 아닌 사람들도 은근히 자신의 자애로움을 과시할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그 관심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간단했다.

“아가씨!”

“괜찮아, 폴리. 그냥 다리에 힘이 좀 풀린 것뿐이야.”

바올로가 처형당하는 순간 안토니아는 크게 충격받은 것처럼 몸을 휘청였다.

“이런, 아직 어린 소백작에겐 충격이 크겠지. 얼른 모셔가거라.”

“감사해요, 조만간 제가 꼭 감사 인사를…….”

“아니에요, 소백작. 얼른 돌아가 쉬는 게 좋겠습니다.”

모두가 창백해 보이는 안토니아의 모습에 귀가를 재촉했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딱 적당하게 얻을 것만 얻고 처형장이 세워진 거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

리카르도는 숨을 죽인 채 찻잔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수도에 복귀하고 며칠째 황제에게 그간의 업무 보고를 하고자 궁에 붙들려 있었다.

그것도 어느새 마지막이라 오늘은 기필코 귀가하겠다고 마음 먹은 때, 하필 시종이 황제에게 보고하고자 들어왔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리카르도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서 시종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나, 간간이 들리는 낯익은 단어에 리카르도는 긴장했다.

“알겠네, 나가 보게. 아직 트라체스 대공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시종은 그 말에 리카르도에게도 예를 갖춘 뒤, 방에서 물러섰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시종 느긋한 태도로 찻잔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세르히 백작가.”

그 말에 리카르도는 간신히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아가씨도 참 안 됐지, 쯧.”

“……누님께서 신경 쓰고 계셨습니다.”

“오, 우리 이스베르가, 그 아이는 참 마음이 약해서 탈이지.”

황제는 그러면서도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너는?”

“네?”

“시치미 떼지 말거라, 동부에서 본 적은 있을 것 아니냐.”

리카르도는 그 말에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듯, 황제가 괜한 호기심을 가지면 안토니아만 괴로울 뿐이었다.

“몇 년 지난 일이라, 잠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린 녀석이 벌써 그래서 어쩔꼬, 짐은 잘만 기억하는데.”

황제는 그러면서 허허 웃더니 두어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았다.

“예쁘지 않았나 보군.”

“…….”

정말 위험했다. 리카르도는 반사적으로 황제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다 겨우 목구멍에서 말을 붙잡을 수 있었다.

“뭐, 흔한 이야기야. 이 아가씨는 운이 좋은 편이지, 이런 못된 것들이 어디 한두 군데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짐의 눈이 모두 닿을 수 없으니, 부단히 살아남아 이 아가씨처럼 짐의 손이 닿는 곳에 오는 수밖에 없지.”

리카르도는 그 말에 묵묵히 차만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는 훌륭한 황제였으나 자애롭지는 않았다.

‘가치 없는 것에는 힘 쏟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폐하께서는…….’

안토니아가 벌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일부러’임을 짐작할 것이다.

‘알고 있을까, 안토니아는 황제는 가치 없는 것엔 힘써 주지 않는다는 걸.’

우연이건 노린 것이건, 여기까지 안토니아는 훌륭히 버텨 냈다.

“시답잖은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써 버렸구나, 이상하게 계속 걸려서 말이다.”

“어떤 게 말입니까.”

“네가 5년 전 동부에 갔을 때 말이다. 사술을 쓴 대신관을 수도로 압송해 왔을 때쯤.”

“네.”

“신전 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거든, 주신의 가호가 보였다느니, 하는 그런 말 말이다.”

리카르도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5년 전과 똑같이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답할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흥, 재미없는 녀석. 되었다. 정말로 가져야 할 보석이라면 짐이 직접 거둘 방법이야 많으니까.”

황제는 크게 웃으며 리카르도에게 물러나도 좋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리카르도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와 해맑은 드비를 보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안토니아.’

황제가 알기 전에 자신도 더 대비해 둬야 했다.

* * *

[눈물 흘리는 가련한 열여덟 소녀!]

[예의 바른 소백작, 가슴 아플 순간에도 귀족으로서 품위를 지키다!]

[마지막까지 비수 꽂는 무뢰배, 후견인 제도의 그늘?]

안토니아가 형장에 다녀온 다음 날 조간신문, 그리고 며칠 뒤 발행된 주간지.

모두 지면의 일부를 할애해 안타까운 세르히 소백작에 대해 보도했다.

“참, 수도 사람들은 지루한가 봐.”

이스베르가는 잡지와 신문들을 체크하며 혀를 찼다.

“이렇게 동정심으로 사교계를 시작하면, 이상한 것들이 많이 붙어서 소백작이 힘들 텐데.”

이스베르가는 그렇게 말하며 얼핏 무심해 보이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며칠 만에 황궁에서 풀려난 리카르도는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 작업에 시달리고 있었다.

“요 며칠, 세르히 소백작의 타운하우스로 꽃이며 위로 편지가 많이 들어간 모양이야.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니?”

물론 이스베르가도 답을 몰라 묻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동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을 뿐.

“글쎄요, 안토니아라면 아마 지금 상황에 만족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 내가 보기에는 그저 순진한 아가씨 같은데.”

리카르도는 그 말에 손을 멈췄다.

“왜 아시는 걸 굳이 제 입으로 확인하려 하십니까.”

“똑똑한 아이인지, 순진한 아이인지에 따라서 내가 도와줄 방향이 달라지니까. 아, 물론 널 도와줄 거란 소리는 아니란다.”

“……압니다.”

리카르도는 복잡한 표정으로 다시 서류로 눈을 향했다.

지금 꼬여 버린 안토니아와의 관계는 명확한 판단을 하지 못했지만, 상황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있었다.

5년 전, 안토니아의 행동을 늘 떠올리던 리카르도였으니까.

그때 조금 헷갈렸던 행동들도 지금 와선 대부분 어떤 의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잃은 소백작이라는 건 솔직히 꽤 흔한 이야기니까요.”

“일부러 이목을 끌려고 동정심을 이용했단 소리니?”

“그래야 누님이 나설 명분도 더 뚜렷해지겠지요. 황제 폐하의 마음을 움직이기도요.”

“흠, 거기까지 그 아가씨가 생각했다고?”

“황궁에서 나오기 전, 폐하께서 세르히 소백작을 언급하더군요.”

“……그게 정말이면 그 아가씨도 참 위험한 짓을 하는구나.”

이스베르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정말로 아직 데뷔탕트 무도회도 치르지 않은 아가씨가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도대체 얼마나 어린 시절이 팍팍했던 건지.’

이스베르가는 진심으로 안토니아를 동정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리카르도는 찬찬히 또, 한 가지 더 말을 꺼냈다.

“게다가 제게 가능하면 약속을 이틀 뒤로 미루길 바란다고 편지를 보냈더군요.”

“원래는 내일이었지?”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무룩한 것처럼 눈썹이 좀 처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스베르가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 계획이 있는 거겠지요, 약속을 미뤄야만 하는.”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너와 약혼하면 간단하게 백작위 승계가 가능한데, 하는 한숨이니?”

“그게 아니라…….”

“그럼?”

리카르도는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으로 생각이 복잡했다.

황제의 호기심도 걱정거리였지만 가장 겁이 나는 건.

“아예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지우고 있을까, 좀 겁이 났을 뿐입니다.”

“아, 하긴 그런 방법도 있긴 하지.”

보통은 선택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특별 승계를 받은 경우, 결혼 외에도 작위를 유지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했다.

바로 결혼을 약속한 나이까지 후계자를 만들면 되었다.

“보통은 선택하지 않을 방법인데.”

“5년 전에도 보통 어린 아가씨라면 하지 않을 수단을 썼으니까요.”

암살자 길드를 끌어들인다거나, 장부를 뒤져 증거를 만들어 낸다거나.

보통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수를 태연하게 선택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최선의 선택이란 건 알지만.

‘안토니아는 그때도 남의 손을 빌리기보다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자신이 답장하지 않은 걸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냐, 내가 잘못한 거지. 무시당하는 건 누구라도 기분 상할 일이니까.’

리카르도는 만일의 가능성도 대비하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이스베르가는 그저 속으로 웃었다.

‘우리 동생은 정말로 그 아가씨가 너무 좋은가 보네.’

물론 리카르도나 드비가 말하는 것만 들어도 저런 걱정을 할 법한 아가씨라는 건 짐작이 갔지만.

‘왜 정작 다른 남자가 접근할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거지?’

다른 남자는 꺾을 수 있단 자신감이 있는 걸까.

물론 누나인 자신이 봐도 리카르도는 꽤 괜찮은 아이긴 했다.

‘뭐, 내가 이렇게 볼 정도니 타인 눈에는 더 그렇게 보이긴 하겠지만.’

보통 혈육은 좀 안 좋게 보이는 법이었으니까.

‘어떤 의미로는 소백작을 믿는 건지. 참.’

하긴, 저런 수단을 쓴다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안토니아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걸 보면 제 동생도 참 제 동생이었다.

이스베르가는 재밌어하며, 안토니아의 작위 승계를 위해 어떻게 황제를 움직일지를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 * *

비슷한 무렵, 안토니아도 잡지와 신문을 체크 중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을 확인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좋아, 이번에도 문제없어.’

역시 호기심을 좇는 자들다웠다. 안토니아는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팔락팔락 가볍게 훑었다.

어떤 사건이 있는지 챙겨는 둬야 하니까.

‘윽.’

안토니아의 손이 특정 페이지에서 멈췄다.

헤드라인과 흑백 사진에 꼴 보기 싫은 자의 모습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삶을 망가트렸던 전 남의 편 말이다.

[막내황자님, 선행 행보 이어져……. 작년까지의 철없던 모습은 잊어 달라.]

‘이 인간은 왜 꼭 잊을 만하면 보이나 몰라.’

참, 언론사도 고생이었다.

저 천방지축 난봉꾼을 저렇게 잘 포장하느라 말이다.

안토니아는 이를 꽉 물었다.

이 자와 엮이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작위 승계를 받고, 누군가가 자신의 가호에 대해 알아차리기 전 영지로 물러나는 게 옳았다.

‘그러려면 황제께서도 인정할 만한 능력을 우선 보여야지.’

호기심은 갖되, 작위 승계를 흔쾌히 허락할 정도로 말이다.

안토니아가 다음 계획에 대해 고려하던 차,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바로 다음 계획을 위해 꼭 필요한 천재 마법기계공학자 루퍼스 크롬프트 말이다.

* * *

“꽃값은 아끼겠네.”

응접실 가득 도착한 갖가지 꽃들을 보며 안토니아가 내뱉은 감상에 루퍼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세르히 소백작이란 사람이 하기엔 너무 쩨쩨한 소리 아니야?”

“뭐가? 저택을 꽃으로 장식하는 것도 꽤 돈이 든다고. 절약은 좋은 거지, 무엇보다 내게 꽃을 보낸 사람들도 만족할 테고.”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바올로의 처형장에 다녀오고 나흘 뒤, 루퍼스와 마담 마기나가 수도에 뒤이어 도착했다.

“아가씨도 정말 지독한 사람이야.”

“칭찬 고마워, 루페.”

가뿐한 그 대답에 루퍼스는 한 번 더 눈을 찌푸렸고 마기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사무실은 확인했어?”

안토니아의 물음에 마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자리도 적당히 괜찮았고 깔끔해서 좋던걸요.”

“아가씨, 진짜 돈 너무 아끼는 거 아니야? 지난 5년간 번 돈이 얼마인데. 왜 그런…….”

만족스러워 보이는 마기나와 달리 루퍼스는 입을 삐죽였다.

안토니아가 마기나와 루퍼스를 위해 준비한 사무실 겸 숙소는 수도 중앙 상점 거리에서 살짝 떨어진 2층짜리 크지 않은 건물이었다.

처음 지을 때 예산이 좀 부족했던 건지, 목조와 벽돌을 조금씩 섞어 지은 건물은 연식이 든 흔적이 보여 언뜻 영세해 보였다.

물론 위치도 위치였고 말이다.

수도 건물인 만큼 저렴하다곤 할 수 없었으나, 루퍼스의 말대로 안토니아가 중앙 상점 거리에 사무실을 얻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역시 루페야, 마기나는 바로 알아차린 것 같은데.”

“뭐? 진짜로? 그냥 안토니아 앞이라서 예의 차린 게 아니라?”

루퍼스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마기나를 바라보았다.

“호호, 저희 상단주가 일만 열심히 하고 경영은 모두 제게 맡겨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가씨.”

“그러게 말이야. 나도 마기나가 우리 쪽 판매를 맡은 상단주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윽.”

루퍼스는 입을 삐죽이며 차를 들이마셨다.

물론 아직 뜨겁다는 걸 까먹어 당황하는 것도 루퍼스다웠고.

예전처럼 퐁실퐁실하진 않았지만 조금 길러 뒤로 묶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춤추듯 움직였다.

“아가씨께서 카메라를 티 파티에서 선보이는 순간, 지금 집중된 이목만큼 저희 상단과 상단주께도 관심이 쏠리겠지요.”

“맞아, 뭐, 아주 화려한 모양새여도 나쁘진 않겠지만. 지갑을 내어줄 귀족들이 바라는 모양새는 아니겠지.”

그들은 지금 가득 찬 동정심을 어디든 베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럴 만한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모두 있었으니까.

갓 상경한 순진한 귀족 아가씨와 아직 영세해 보이는 상단.

분명히 이 안쓰럽고 아직 걸음마 단계처럼 보이는 자들에게 그들은 좀 더 부드러운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런 수작 안 부려도, 내 카메라는 훌륭해!”

“응, 물건은 훌륭하지. 하지만 루페, 넌 단순히 물건만 팔고 싶은 게 아니라 자리 잡고 싶은 거잖아? 정보 상단주로서도 말이야.”

루퍼스는 그 말에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중앙은 중앙 나름대로 물이 고여있었으니까, 당연히 텃세가 있다는 소리야.”

귀족 사회에도, 상인 사회에도 말이다.

동정심과 불쌍함은 그들보다 모자라게 보여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만만해 보여서도 안 되지만.’

이게 바로 사교계 진입 때 동정심이 독인 이유였다.

만만하게 보이면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려들었다.

마치 바올로처럼.

‘뭐, 그것도 다 생각은 있으니까.’

딱 좋은 이용대상도 있고 말이다.

잠자코 듣던 루퍼스는 문득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지난 5년간, 일부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용히 지냈잖아? 근데 왜 지금은…….”

“이제 성인이니까?”

안토니아의 말에 루퍼스는 자신을 놀리냐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진짜야,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기 전엔 할 수 있는 게 너무 작은 걸, 작위 승계를 받기도 어렵고.”

“날 바보로 아는 거지?”

루퍼스는 빨리 진짜 이유를 말하라는 듯 안토니아를 닦달했다.

“5년 전에 약속했잖아, 네 꿈을 이뤄 주겠다고.”

“그거랑 지금 아가씨가 이러는 게 무슨 관계야? 나만 먹잇감으로 던져 줘도 되는 거 아니야?”

덤덤히 자신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듯 말하는 루퍼스를 보며 안토니아는 속으로 웃었다.

“난 이미 너랑 아는 사이고, 누군가는 그걸 알게 될 텐데. 그러긴 어려워.”

“왜? 나 비밀 잘 지킬 수 있어!”

루퍼스의 말에 안토니아는 뭘 모른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정보상이면서 그런 소릴 하다니, 역시 루페다워.”

“너무한 거 아니야? 정보상이니까 잘 통제할 수 있단 소린데!”

안토니아는 속으로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힘쓸 일이 아니란 소리야, 그러니 어차피 주목받을 운명이라면 휩쓸리기 전에 차라리 이쪽에서 키를 쥐는 게 낫단 거고.”

“무슨 말인지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겠어.”

루퍼스는 질린다는 듯 꿍얼거리며 이야기했다.

지난 5년간 솔직히 말해 누구보다도 안토니아의 진짜 모습을 가장 많이 접한 게 루퍼스였으니까.

안토니아는 애초에 루퍼스에게는 처음부터 속일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회귀했을 거라고는 보통 생각하지 않으니, 그저 또래보다 똑똑한 귀족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았지만.

“그럼, 마기나. 루페를 잘 부탁해.”

“그럼요, 걱정 놓으셔요. 아가씨. 함부로 접객시키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 또 둘이서 날 바보 취급하는 거지? 그렇지?!”

두 사람은 똑똑하게 눈치 챈 루퍼스를 보며 시치미를 뚝 뗐다.

* * *

“어서 와요, 소백작. 모두 기다리고 있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렘버트 자작부인.”

안토니아의 말에 그녀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안으로 안내했다.

안토니아가 티 파티에 나선 건 바올로가 처형당하고 닷새째가 되는 날이었다.

나흘 사이에 있던 티 파티 일정에는 공손하게 거절 답변을 보냈다.

아직 충격에서 회복되지 않아, 바깥에 나설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니 오늘도 지나치게 밝아 보여선 곤란했다.

자작부인이 빌린 연회 홀 내에는 스물은 넘는 귀족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안토니아를 기다렸다.

‘참 배려라곤 없는 인선이네.’

안타까운 일을 당한 어린 아가씨를 초대할 만한 자리는 아니란 소리였다.

‘뭐, 이럴 줄 알고 일부러 렘버트 자작부인의 초대장을 고른 거지만.’

안토니아는 슬그머니 렘버트 자작부인을 보았다.

다소 작은 키에 위축된 어깨, 다소 흐릿한 인상의 얼굴에서 그녀가 무리한다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사교계에서 그녀를 부를 때 자작부인이라고 똑바로 불러 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회귀 전에도 대부분은 그저 렘버트 부인이라고 키득거리며 부르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6년쯤 전, 렘버트 자작과 결혼했는데 원래는 가정교사 출신인지라 그녀의 성공 스토리를 온갖 잡지에서 앞다투어 예쁜 로맨스 스토리처럼 게재하곤 했다.

‘밀즈 부인도 그래서 롤모델로 삼았던 사람이고.’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자작은 그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었고 작위를 받기 위해 억지로 떠맡은 죽은 형의 아이, 즉 조카를 기를 사람이 필요했다.

심지어 와전되어 혼외자라고 소문이 나기까지 하다 보니, 어지간한 귀족 영애는 그와 결혼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와중 눈에 들어온 게 지금의 렘버트 자작부인이었다.

자작은 그래도 나름 학자 집안 출신인 조카의 가정교사에게 결혼을 제안했고 지금의 자작부인은 그걸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입지가 꽤 애매했다.

사교계에서 그녀와 어울리는 귀족은 중앙귀족이 되려 애쓰는 남작이거나 기사, 그게 아니라면 흥밋거리가 필요한 시간 많은 사람 정도였으니까.

누군가에게 동정을 베풀고 보살피는 건 귀족의 의무이자 반쯤 특권처럼 여겨지곤 했다.

렘버트 자작부인 입장에서 안토니아만큼 최적의 대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온다는 소식에 드물게 관심 보인 귀족들에게 오란 식으로 굴었을 거고.’

그래서 완성된 게 이 연회 홀을 가득 채운 귀족들의 면면이었다.

‘호기심 많고 흥밋거리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지.’

회귀 전 자신을 물어뜯던 사람들도 좀 보였다.

‘그런 만큼 내 안타까운 사정도, 우리 루페의 카메라를 홍보하기에도 딱 좋고 말이야.’

안토니아는 아주 무대를 잘 마련해 준 렘버트 부인에게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내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더없이 순진하고 물정 몰라 뒤통수 맞은 친척의 죽음에도 마음 아파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말이다.

티 타임에 모인 사람 중에서 안토니아를 소백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세르히 양, 마음고생이 심했지요? 다 이해한답니다. 저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어찌나 슬프던지.”

“저도 고모님이 한동안 후견인이었던 적이 있었지요. 깐깐하기 짝이 없어서 모자 하나 사는 것까지 허락받으라고 했다니까요?”

물론 안토니아를 동정하며 떠들어 대는 내용 또한 그리 영양가 있진 않았다.

그들은 안토니아에게 최대한 비슷한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공감하는 척 굴었다.

물론 개중에서는 어이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만약 그뿐만이었다면 안토니아는 좀 더 편했겠지만.

“아직 수도 거리를 구경하지 못했지요? 세르히 양만 괜찮다면 제 아들에게 에스코트 하라고 하지요.”

“호호, 무슨 말씀이에요. 부인, 그 댁 아드님은 수도에 작년에 처음 와봤잖아요. 들어 보세요, 세르히 양. 저희 아이는 날 때부터 수도에서 쭉 살았답니다.”

가십거리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음험한 마음으로 제 아들을 들이대는 건 상상 이상으로 귀찮았다.

바로 남작이나, 자작이어서 백작위 이상의 작위를 노리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결혼하지 않은 차남이나 삼남이 있는 귀족이 그랬다.

그들은 서로 날을 세우며 대놓고 견제하기까지 했다.

“하긴 기사 집안이니 백작가 영애인, 세르히 양이 불편함 없도록 시중들며 모시기에는 딱이겠지요.”

“그건 시중이 아니라 매너라고 하는 거지요, 하긴 나기를 오만한 도련님은 평생 모르겠지만요.”

안토니아가 제대로 답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불꽃이 튀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분명 저 중에선 3년쯤 뒤에 난봉꾼으로 이름 날리는 사람도 있었지,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안토니아는 난봉꾼의 부모님을 향해 거기까지만 이해했다. 그런 자를 붙이려 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뭐,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백작가 이상의 작위 후계자가 이렇게 후견인도 없고 물정도 없이 시장에 덜렁 나오는 경우가 워낙 드물었으니까.

특히나 안토니아는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는가. 그래서 조금만 괜찮게 대해 줘도 금방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 귀족의 작위 승계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자신의 작위보다 아래 신분인 사람과 결혼할 경우, 자동적으로 남편에게 작위가 넘어간다.

‘보편적으로야 어차피 아이에게 줄 작위니 그렇게 되는 거라곤 하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지 않은가. 작위의 주인은 여성인데 결혼한 남성이란 이유만으로 주인 소리는 남편이 듣게 되다니 말이다.

‘내가 법을 바꿀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우선은 이 틀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안토니아는 서로 노려보는 남작부인과 기사를 보며 조용히 렘버튼 자작부인 쪽을 보았다.

원래는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를 자작부인이 중재해야 하는 법이었는데, 정작 자작부인은…….

“매너 있는 분과 오만하단 느낌이 들 정도로 귀족적인 분! 모두 멋있겠어요, 고민이 많이 되시겠네요. 소백작.”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안토니아를 시야 속으로 넣어 버리곤 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하긴 선택권은 세르히 양에게 있는 법이지요!”

“누굴 선택하시겠어요, 세르히 양?”

‘누구도 선택하기 싫어요.’

안토니아는 속으로 그 시커먼 속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싶단 충동을 느꼈으나, 얌전히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제가 어떻게 함부로 고를 수 있겠어요, 권유는 감사하지만……. 제가 아직은 외출에 조금 조심스러워서요.”

그 말에 두 귀부인은 잠깐 서로를 보더니 헛기침하며 물러났다.

‘다행이야, 더 들러붙지 않아서.’

눈치 없는 사람들은 이게 거절의 말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더 달라붙을 테니까 말이다.

‘뭐, 곧 트라체스 대공과 의상실에 가기로 하긴 했지만.’

그건 소문이 난 뒤에나 알게 될 테니,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 * *

간신히 주선 자리에서 벗어나도 안토니아가 관심 밖으로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따뜻함을 과시하고자 이 자리에 나선 사람들도 있으니까.

게다가 사교계 시즌의 시작이었다.

안토니아가 주선 자리를 침착하게 잘 해결하고 나자, 다른 방향으로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앞으로 힘들겠지만 꼬박꼬박 사교계에 얼굴을 비춰야 하는 것 알지요?”

“어려움이 있을 텐데, 너무 어려워 말고 절 의지해도 된답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위해 사교계 후견인이 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제대로 된 작위가 있는 사람들로 그들은 안토니아의 영지를 탐낼 정도로 품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미래의 백작, 또는 백작 부인을 키워 냈다는 명성을 얻고 싶은 모양이었다.

안토니아의 침착함을 보아 사교계에서도 꽤 자리매김할 거라고 그들은 어림짐작하고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호의니까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혹시 영지 관리가 힘들진 않은가요? 제가 조언도 좀 해 줄 수 있는데.”

“세르히 백작가에는 상단이며 광산도 있다지요? 제가 그쪽도 좀 안답니다. 특히 국외의…….”

당연히 바올로와 비슷하게 재산을 벗겨 먹으려 하는 자들도 있었다.

‘작은아버지에게도 오래 속았단 식으로 기사가 나갔으니 당연하겠지.’

보통 한 번 당한 사람은 두 번 당할 가능성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마지막으로 제게 말을 건 사람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2년 뒤에 도박으로 가산을 다 탕진하고, 백작위까지 팔게 되는 사람인데.’

티 파티 참가자들과 한 번씩 말을 다 섞어 보니, 새삼 렘버트 자작부인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생각을 했을까.

안토니아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자, 자작부인은 애써 고상한 척 미소지었다.

‘……밀즈 부인이 롤모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따라했네.’

살짝 어색한 점까지 딱 밀즈 부인이 흉내내던 그대로였다.

그녀는 안토니아에게 다가와 능숙한 솜씨로 차를 따라 주었는데, 어지간한 시중하녀들보다도 능숙하고 깍듯했다.

렘버트 자작부인이 다가와 대화하기 시작하자, 몇 번쯤 자작부인의 눈치 없음에 피로해진 귀족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개의치도 않고 안토니아에게 조금 쉬라는 듯 말했다.

“정신이 없지요?”

“조금 그렇네요.”

“이해해요, 저도 결혼하고 첫 티 파티 때는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음.”

그녀는 좀 겸연쩍은 얼굴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원래 뻣뻣한 직모인 것인지, 덜 말린 머리카락이 몇 가닥 새어 나와 있었다.

“나름대로는 좀 편한 파티이길 바라긴 했답니다.”

‘이런 사람을 모아두고?’

저게 진심이라면 참 맹한 사람이었다.

자작과 결혼한 지도 6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안토니아는 새어 나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리해 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다들 따뜻한 마음씨로 절 보아주셔서 기쁘답니다. 안 그래도…….”

안토니아는 천천히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가 전 배운 것도 없어 사교계에서 비웃음이나 살 거라며 바깥출입을 금지하셨거든요. 자작부인 덕에 제가 많이 배우네요.”

자리를 피했음에도 귀는 활짝 열어 둔 다른 귀족들은 그 말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차분하면서 무슨 소리람. 역시 겉보기보다는 만만찮은 아가씨네.’

솔직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귀족 중 몇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으니까.

‘겨우 열여덟에 사교계 후견인도 없는 아가씨가 저렇게 실수 안 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보통 긴장해서 말실수라도 하는 게 보통인데, 조금 전 아들들을 들이미는 자리에서도 까딱 잘못하면 코가 꿰일 뻔도 했고 말이야.’

일부 귀족은 그 사실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자연스레 구해 주며, 안토니아의 사교계 후견인이 될 기회를 노렸으니까.

‘저렇게 처음부터 차분하게 해나가는 아가씨라니 더 아까워, 아깝네.’

자신의 명성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보험 하나도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정도면 작위 승계 후에도 분명 잘할 텐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르히 백작가는 동부에서 나름 부유한 백작가였고, 후견인 같은 자리를 꿰차면 여차할 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렘버트 자작부인은 역시 맹한 사람이었다.

안토니아가 겸손을 떨며 의례적으로 한 말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앞으로 제가 도와드렸다고 말해도 될까요?”

눈을 반짝이는 렘버트 자작부인의 모습에 귀족 중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풋’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렘버트 자작부인은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은 처음 소백작의 기사를 볼 때부터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소백작이 사막 속 이슬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막 속 이슬, 귀족 대부분은 렘버트 자작부인의 맹함에 혀를 차면서도 안토니아와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 어린 아가씨는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맞는 말이에요, 어쩐지 금세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반가워서 손 내밀고 싶어지지요.”

“맞아요, 게다가 이슬은 주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데, 어쩐지 저 세르히 양이 신전 한편에서 앉아 기도드리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거든요.”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부인!”

“그러게요, 보통 이런 낯부끄러운 말은 못 하는데. 렘버트 자작부인 때문인가 봐요.”

“하긴, 그 렘버트 부인이시잖아요. 파티 내내 예쁜 말을 늘어놓는 걸 듣다 보니 옮아 버렸나 보네요.”

귓가에 들려온 소곤거리는 소리에 안토니아는 비로소 속으로 미소지을 수 있었다.

‘역시, 렘버트 자작부인에게 빚을 만들어 둘 생각하길 잘했어.’

안토니아가 지금껏 이 피로함을 이기면서까지 렘버트 자작부인의 면을 망가트리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저 표현력이 갖고 싶었다.

‘지난 6년 동안 글 하나로 렘버트 자작가의 재산을 두 배로 불린 사람이니까!’

다름 아니라 그녀는 어떤 것이건 글로서 표현하는 데 신묘한 재주를 가진 포장의 귀재였다.

솔직히 말해 중앙 귀족 중에서는 드물다지만 지방에서는 기사나 평범한 학자 및 교육자 집안과 하급 귀족 간의 결혼이 종종 있는 일이었다.

유독 렘버트 부인이 신분 상승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진 데는 다름 아닌 스스로 쓴 체험기 때문이었다.

잡지에 게재된 내용 중 다른 사람이 편집한 것도 있었으나, 수도에서 가장 많이 보는 가십지에는 그녀가 매주 직접 쓴 체험기가 실렸다.

‘초반에는 가정교사의 수도 적응기 정도였지만.’

렘버트 부인은 처음에는 가명으로, 결혼 후에는 자신이 렘버트 자작부인이 되었다는 걸 알리며 단숨에 사교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실 자작가에서 그나마 렘버트 부인이 버틴 게 그 원고료와 그로 인한 부가 수입 덕이란 소리도 있었으니.’

실제로 지난 6년간, 렘버트 부인의 일기는 책으로 묶여 꽤 팔렸다.

대부분은 일기라기보다는 자전적 소설로서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왜냐하면.

[자작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셀린, 그대는 내게 달빛 같은 존재요, 내 외로운 밤을 비추고 이끌어 줄 수 있는 게 그대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소.

그때의 내 마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자작님께서 내게 쥐여 준 문스톤은 마치 여름밤 요정 여왕이 달빛을 모아 빚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그걸 어떻게 가공할까 오래도록 고민했다. ……중략…… 사슬을 꼬아 레이스처럼 세공한 은줄에 문스톤을 걸어 만든 팔찌에 자작님은 감탄하셨다. 그러곤 또…….]

이렇게 평범한 상황도 유려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곤 했으니까.

‘렘버트 자작은 무뚝뚝한 사람이라 아예 그런 글을 읽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뭐, 실제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떤지는 몰라도 사교계 귀족 중 렘버트 자작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확신했다.

렘버트 자작이 그렇게 훌륭한 언변을 가졌을 리 없다고.

물론 안토니아가 주목한 건 그 자전적 소설에 가까운 일기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시즌 문스톤의 가격이 확 올랐거든.’

렘버트 자작이 그녀에게 문스톤을 준 것 또한 당시 자작가가 소유한 광산에서 문스톤이 나, 저렴하게 때울 수 있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그걸 렘버트 자작부인이 가공하고, 또 글에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지, 그리고 자작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기고한 덕에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지.’

중류층과 일부 귀족층에게 약혼 전 가벼운 커플 아이템처럼 말이다.

당연히 문스톤 광산을 가지고 있던 렘버트 자작이 꽤 짭짤한 이득을 봤고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렘버트 부인은 회귀 전에도 단 한 번도 유명세를 잃은 적이 없었다.

무려 십수 년이 넘도록 말이다!

‘꾸준히 글을 기고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글에 사용한 아이템은 이상하리만큼 물욕을 일으켰으니까.’

그래서 안토니아는 다른 점잖고 사교계 영향력 있는 후작, 백작가가 아닌 렘버트 자작부인을 택해 티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가 파할 무렵, 안토니아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이 파티에 온 진짜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니까.

“부끄럽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무엇인가요?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리지요.”

“암, 그럼요. 모두 세르히 양을 도와 주려 온 것인데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폴리에게 눈짓했다.

대기하던 폴리가 금세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기존 시중에서 사용하던 것보다도 훨씬 크기도 작았다.

“어머, 카메라인가요? 좀 작은 것 같은데.”

“맞아요, 실례라는 건 알지만 저는 이렇게 다른 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즐긴 게 처음이라……. 사진으로 남겨 두고 싶었답니다.”

“사진으로요?”

개중에서는 은근히 꺼리는 사람도 있었다. 안토니아는 실례라는 걸 안다면서 읊조리듯 이야기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남은 건 초상화 몇 점뿐이었어요. 그리울 때마다 초상화를 품에 끌어안긴 했으나, 그걸로는 너무 쓸쓸했어요.”

“아, 어쩜 안쓰러워라.”

“그러다 보니 기쁜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요. 지난 뒤에는 늦어 버리니까요.”

부모님 잃은 아가씨의 말에는 호소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람 중에 이런 걸 잘 만드는 아이가 있어, 절 위해 이렇게 작게 만들어 줬답니다.”

“흠, 하지만 세르히 양. 저는 10분씩이나 가만히 있을 자신이 없어요.”

누군가 한 말에 안토니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괜찮아요. 이 카메라는 딱 3분이면 되니까요.”

“3분이요?”

다들 놀란 눈으로 폴리가 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정말 놀랍네요, 10분 만에 저희 모습과 똑같은 게 나오는 것도 놀라웠는데.”

“맞아요,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건 꼭 초상화가를 불러야 하지만요. 사진은 우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나 눈 색을 표현할 수 없잖아요?”

귀족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다.

안토니아는 굳이 이 자리에서 흑백이 아니라 컬러로 인화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건 직접 봐야 더 임팩트가 클 테니까.

“사진이 나오면 제가 한 장씩 인화하여 보내드릴게요.”

무엇보다도.

‘더 잘 표현해 줄 적임자가 있잖아?’

맹한 얼굴로 방긋방긋 웃는 렘버트 자작부인을 보며 안토니아는 속으로 기원했다.

‘부디 루페의 카메라를 잘 부탁해요, 자작부인.’

은밀히 크롬프트 상단과 세르히 백작가의 관계에 대해 흘려 주면 분명 셀린 렘버트 자작부인은 예쁘게 포장해 줄 것이다.

어릴 적부터의 신분 차를 뛰어넘은 우정과 안토니아의 선견지명 등에 대해 말이다.

* * *

렘버트 자작부인의 티 파티에 참석한 뒤, 예상대로 안토니아의 집에는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심지어 속이 훤히 보이는 이름만 자선단체의 기부금 요청까지도 말이다.

‘여기는 실제로 자기 배만 채우는 주제에 귀족들한테 뻔질나게 기부금을 달라며 우는소리를 했지.’

안토니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렘버트 자작부인의 티 파티에 참석할 정도니, 쉽게 보고 편하게 찔러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번 주 내로 금세 잦아들 게 분명했다.

‘오늘 방패가 될 사람이랑 만날 거니까.’

다름 아닌 트라체스 대공 말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대공에게 약속 연기까지 요청했는데도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반쯤은 그냥 약속이 흐지부지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낸 거였지만.

‘바빠 보였는데, 생각보다 한가한 걸까…….’

그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족이긴 했으니, 어쩌면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언론으로만 바쁜 내색을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안토니아는 그런 사람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전 남의 편 말이야!’

덕분에 회귀 전에 더 고생했고 말이다. 왠지 그렇게 생각하니 트라체스 대공에 대한 호감도가 더 깎여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야, 괜한 억측하지 말자.’

전 남의 편과 똑같이 황족 남자라고 생각하니 괜히 겹쳐 보는 것이다.

“아가씨, 장부 보면서 다른 생각까지 하시면 너무 머리가 바쁘지 않으셔요?”

“티 났어?”

“그럼요, 자, 장부는 제가 오늘 중에 봐 둘 테니 아가씨는 잠시 거울 좀 봐 주시겠어요? 다른 분도 아니고 대공 전하와 데이트잖아요.”

짙은 남색 베스트에 일자로 떨어지는 롱스커트를 입은 로레나는 안토니아의 머리 땋는 데 집중하며 보석을 고르라는 듯 눈짓했다.

“평소대로 해도 괜찮다니까, 티 파티 때도 아무렇지도 않았는걸.”

“안 돼요, 마틴 씨가 그랬단 말이에요. 아가씨가 수도 거리를 걸을 일이 생기면 다른 곳에 갈 때보다 더 신경 써야 한다고요.”

“마틴도 참.”

“그리고 아가씨도 그랬잖아요, 만만하게 보이는 건 지난번 티 파티 때 한 번으로 끝이라고요.”

“응.”

하긴 그렇긴 했다. 하지만 회귀 전까지 포함하여 깔끔하기만 한 차림새로 산 게 워낙 길다 보니, 오히려 평범하게 꾸미는 게 오히려 불편했다.

그때, 바깥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 아, 아가씨!”

“왜 그래, 폴리?”

“그, 상점 거리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신 거 아니에요?!”

“대공 전하? 맞는데.”

“오셨어요.”

“누가?”

“대공 전하가요! 1층에요! 어, 어떻게 해요?!”

폴리는 애써 아래층에 소리가 들리지 않게 말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 * *

“참, 우리 전하는 성격도 급하셔.”

드비는 하품을 하며 리카르도에게 핀잔을 줬다.

“요즘 후회되시죠? 5년 전에 질투하지 말고 절 백작님과 만나게 했으면 하고 말이에요.”

장난기 가득히 키득거리는 드비를 보며 리카르도는 그저 눈만 흘겼다.

물론 드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상황을 그저 재미있게 즐겼지만.

원래는 상점 거리에서 한 시간 뒤에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다만, 리카르도가 참지 못했다.

“이건 이거대로 실례인 거 아시죠, 대공 전하?”

“알아.”

하지만 수도에 있다는 걸 알고 일주일씩이나 얼굴을 보지 못했더니 애가 탔다.

“어떻게 5년씩이나 참으셨담. 뭐, 이스베르가 님이 원래 이게 오래된 예의라고 하시긴 했지만요.”

사교계 데뷔를 앞둔 아가씨가 처음 가족이 아닌 이성과 데이트를 할 때는 집까지 찾아가 에스코트하는 게 귀족 층에 남은 관습이었다.

요즘은 거의 지키는 사람이 없기에 리카르도에게는 단순한 핑계였지만.

백작가 하인들은 다소 당황한 것 같아 보이긴 했으나, 금세 리카르도와 드비를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근데 있잖아요, 전하.”

“왜.”

“조금 전에 안내해 준 그 집사님. 멋있지 않았어요?”

“……뭐?”

리카르도는 미심쩍은 눈으로 드비를 바라보았다.

“전 그런 사람 처음 봤어요. 지금까지 다른 하인들은 전하 얼굴만 봐도 굳어서 막 떨고 그랬는데.”

리카르도는 그 말에야 좀 안심이 된다는 듯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제 시종하인이자 기사인 드비는 금방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었으니까.

“소백작이 잘 가르쳤나 보지.”

리카르도의 그 말을 들으며 드비는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제 주인인 대공 전하의 마음이 중증이었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길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아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카르도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서 안토니아에게 허리를 숙였다.

“미리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대공 전하. 이른 아침부터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는 안토니아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움직인 걸 느꼈다.

누가 보아도 무표정이라고 할 얼굴이었으나, 그에게는 그게 환한 미소처럼 느껴졌다.

물론 의례적인 것에 가까웠으나 그는 오래전 소녀의 맑던 얼굴을 여전히 기억했다. 똑같이 무표정이어도 분명 달랐으니까.

‘여전히 안토니아는.’

아름답고 맑았다.

리카르도는 부드럽게 만 안토니아의 머리카락이나, 언뜻 심플해 보이나 우아한 그녀의 드레스를 보며 일일이 속으로 감탄하다 멈추고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백작.”

“아니에요,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전하.”

고운 손이 얹어진 순간 리카르도는 꽉 쥐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마차에 올라탄 뒤 안토니아는 한 번 더 리카르도에게 감사를 전했다.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바쁘실 텐데요.”

“아닙니다. 소백작에게는…….”

“네?”

안토니아의 얼굴에 리카르도는 잠시 말을 흐렸다, 이내 답했다.

“……마땅히 냈어야 할 시간입니다.”

“5년 전 일로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번에도 의상실만 알려 주셨어도 괜찮았는걸요.”

“그렇게 넘길 수는 없지요, 마땅히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하니 부디 편하게 생각해 주세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맙다는 듯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안토니아는 원래는 마기나가 만든 드레스를 입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기나는 정말로 프로였다. 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 5년간, 제가 의상을 계속 만든 건 사실이나 상단 관리나 정보상단 일 등으로 최선을 다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마기나의 옷도 충분히…….’

‘안 돼요, 아가씨께서 영지에서 평소 입는 일상복이라면 몰라도 사교계 시즌에는 그에 걸맞는 의상이 필요한 법이랍니다.’

오히려 리카르도의 제안을 마기나는 뛸 듯 기뻐했다.

‘분명 대공 전하라면 고급 의상실에 안내해 주실 거예요. 안 그래도 여기저기 알아는 봐 뒀지만 대부분 소개가 필요한 곳이라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좀 떨떠름하던 대공과의 의상실 방문을 반갑게 여기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이미 연회용 드레스를 주문했는데 저 때문에 바꾸게 된 것은 아닙니까?”

“아니에요, 대공 전하. 아시다시피 전 수도가 처음이잖아요.”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며칠 전 사교계 티 파티에서 들었다는 듯 이야기했다.

“데뷔탕트 드레스를 몇 달 전부터 준비한다는 걸 며칠 전 들어 깜짝 놀랐답니다. 이번 주부터 준비해도 늦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3주가량 남았으니 넉넉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건 안토니아의 판단 미스였다.

‘회귀 전에도 내가 입던 드레스 중에서 그렇게 공들인 건 없었거든…….’

남의 편이 의상에 얼마나 공들이는지를 떠올렸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는 혹시라도 중요한 무도회가 있으면 꼭 2달 전부터 주문해 제작하곤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선물할 테니까요.”

어쩐지 그에게서 지나칠 정도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 * *

의상실에 들어선 안토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여기는.’

아주 잘 아는 곳이었다. 남의 편이 가지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던 의상실이었으니까.

황실과 최소 후작 이상의 의상만 맡아 제작한다는 유명한 의상실이었다.

참고로 남의 편은 기어코 1년에 한 번은 꼭 이곳에 와 의상을 주문하곤 했다. 덕분에 백작가 예산엔 구멍이 송송 나곤 했지만.

‘그걸 메꾸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런 곳에 자신이 드레스를 맞추러 오다니.

안토니아는 겸연쩍어하며 리카르도에게 사양했다.

“전하, 여기는 제가 옷을 맞추기에는 너무 과분한 것 같아요.”

“어째서입니까……?”

리카르도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수도 사정에 어둡긴 했지만, 며칠 전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 몇 가지 있답니다.”

“이곳에 대해서도 말입니까?”

“네, 제가 알기로 이곳 의상실의 주인은 후작가 이상의 옷만 제작한다고 들은걸요. 다른 분들께서도 여기서 한 벌 맞추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요.”

“그래서 소백작께서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요, 저는 중앙귀족도 아니고 그저 지방 영지에서 머물던 백작 영애인걸요.”

“그렇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타이밍 좋게도 바른 걸음으로 나온 의상실 주인을 향해 리카르도가 물었다.

“대공 전하께서 모셔온 분이라면 자격이야 충분하지요.”

“오랜만이네, 유글란스 백작.”

그 말에 백작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에 괜히 긴장되고 가슴이 떨리는 걸 느꼈다.

다름 아니라 그녀는 그 어려운 여성 작위 승계를 이뤄낸 사람이었으니까!

‘나보다 빨리 꿈을 이룬 사람이라 그런 걸까.’

그것도 자신처럼 뒤에서 손을 쓰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승계를 받았다.

백작 이상의 여성이 작위를 승계 받으려면 남편의 신분 또한 백작 이상이어야 하며, 1년 중 4달은 영지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물론 1년 중 4달이라는 조건은 남성 승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말씀해 주셔서 잘 기억하고 있어.’

안토니아의 어머니는 후작가의 장녀로 가끔 아버지와 결혼하여 남동생에게 작위를 줄 수밖에 없었던 걸 아쉬워하곤 했었다.

‘물론 안토니아, 네 아버지를 사랑하니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애초에 후작가와 동일하거나 이상의 남편감을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1년 중 4달을 다른 영지에서 보내는 걸 동의하는 사람도 드물었으니까.

‘유글란스 백작의 남편은 그렇게 해 줬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사이가 매우 좋아 주로 유글란스 백작령에서 머무르며 그녀의 작위를 지켜 준 덕에 당시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현재는 후계자들의 나이도 찬 덕에 유글란스 백작은 거의 수도에서만 지낼 수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어릴 적 꿈이라던 의상실까지 차렸지.’

안토니아 입장에서는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작위 승계에 자아실현까지, 그녀가 하고 싶은 모든 걸 미리 해 본 사람이지 않은가.

심지어 의상실이라는 말에 누군가가 귀족이 하기엔 부끄럽다며 힐난까지 했는데도 개의치 않고 유명 의상실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했다.

유글란스 백작의 드레스는 워낙 아름다워 모두가 입고 싶어 했다.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어 후작 이상의 주문만 받겠다고 하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의상실에는 일감이 넘쳐났다.

‘예전에도 참 부럽다고만 느꼈는데.’

지금은 동경의 마음이 더 컸다.

물론 여전히 찝찝한 부끄러움은 남아 있었지만.

왜냐하면 그녀와 만날 때는 어김없이, 남의 편이 말도 않고 주문을 넣었을 때였으니까.

‘세르히 백작, 원한다면 제가 부군의 주문을 거절하지요.’

만날 때마다 황망한 얼굴을 하는 안토니아를 향해 그녀는 참 친절한 제안을 곁들었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 끄덕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 망나니가 나뿐만이 아니라 유글란스 백작까지 들들 볶았을 테니까!’

전 남의 편은 그 정도로 쓰레기 같은 종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백작의 드레스를 맞추러 오다니.’

트라우마가 좀 있었다. 트라체스 대공이 사 주겠다고 하는 데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구멍이 송송 났던 장부가 떠오르는데 어떻게 해.’

안토니아가 속으로 궁상맞은 생각을 하는 사이, 유글란스 백작이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이번 황실 무도회 마지막 주문을 대공 전하와 파트너인 세르히 소백작이 해 주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파트너?’

안토니아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파트너라니요, 아니에요.”

“네, 그런가요?”

유글란스 백작은 깜짝 놀라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글란스 백작은 겸연쩍어하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멋대로 지레짐작하였군요, 대공 전하께서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는 아가씨를 데려온다기에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디자인화를 내어왔다.

유글란스 백작의 의상실은 철저한 주문제작제인 데다, 한 번 제작한 옷은 다시 제작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디자인들도 모두 전부 새것이란 소리였다.

안토니아는 연회장에서 다른 귀족들이 입은 걸로만 본 화려한 드레스를 보며 신기해했다.

‘내가 이런 걸 입을 수 있을까?’

5년 전 저택 정리를 한 뒤, 예전처럼 수수한 옷만 입은 건 아니라지만 이 정도로 화려한 걸 입은 적은 없었다.

마기나는 클라이언트의 취향과 거북함을 고려하여 디자인해 주었으니까.

‘자신이 없는데…….’

안토니아는 망설이듯 디자인화의 종이 끝만을 매만졌다.

“대공 전하께서 미리 어떤 분이 오실지 알려 주셔서, 제가 급히 고심하여 만들어 보았답니다.”

‘전부 날 위해서 한 디자인이라고?’

놀라서 리카르도를 바라보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유글란스 백작. 요즘 내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인지라 특별한 걸 원했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만 조금씩 수정은 해야겠단 생각은 드네요, 기사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아름다운 분이니까요!”

유글란스 백작도 상인은 상인이었다.

‘어쩜 저렇게 물 흐르듯 입에 발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안토니아가 감탄하는 사이, 리카르도는 그 말이 당연하다는 듯 감흥 없이 서 있었다.

그는 디자인화를 언뜻 보다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마음에 드시는 건 있으십니까?”

“전부 아름다워서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안토니아는 그 어느 것 하나 입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 소리였다.

‘나한테는 다 너무 과한 것 같은걸.’

하지만 리카르도는 정반대로 해석했다.

‘다 마음에 든다는 소리라면…….’

그럼 어려울 게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안토니아가 입은 걸 모두 보고 싶었다.

“그럼 전부 구매하겠습니다. 소백작에겐 분명 무엇이든 어울릴 테니까요.”

그는 태연하게 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안토니아는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했다.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지요? 안토니아는 자신의 표정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그랬다면 얼굴만으로도 당신이 무슨 의도인지 의심스러워요를 드러내 줬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폭탄 같은 말을 내뱉은 장본인, 리카르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전부 구매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소백작이 겨우 이런 걸로 고민하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 봐야.”

리카르도는 유글란스 백작이 내민 디자인화 다섯 점을 슥 확인하며 말했다.

“겨우 다섯 벌이지 않습니까.”

‘겨우 다섯 벌이라니!’

안토니아는 괜히 속으로 화를 냈다.

전 남의 편이 1년에 한두 벌씩 사고 치듯 산 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 드레스 한 벌이 어지간한 귀족 가문 한 달 치 저택관리 예산쯤은 되는데.’

괜히 유글란스 백작이 후작 이상급만 주문을 받는다고 해 상당수의 귀족들이 가슴 쓸어내린 게 아니었으니까.

어지간한 귀족 가문은 이 옷의 가격을 감당키 어려웠다.

‘그나마 우리 백작령이 부유한 편이라, 내가 어떻게든 아둥바둥 막을 수 있던 건데.’

저 여유로운 얼굴이 괜히 얄미웠다.

물론 아무리 리카르도라고 해도 변화 없는 안토니아에게서 그런 기색을 읽어내는 건 무리였다.

그는 내심 뿌듯하게 유글란스 백작에게 확인했다.

“가능한가, 백작?”

“한두 벌 정도라면 무도회 기간까지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리카르도는 은은한 미소로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무슨 색을 좋아하십니까?”

“네?”

“모두 아름답다고 해도, 그중에서 제일인 것은 있겠지요. 소백작의 중요한 데뷔탕트 무도회니 가장 좋아하는 색의 드레스를 입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안토니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 돈은 아니야, 내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필요치 않은 돈을 쓰는 건 왠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건 데뷔탕트 용 드레스 단 한 벌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트라체스 대공에게 빚을 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나랑 금전 감각이 다르다고 해도 그렇지, 겨우 5년 전에 답장 한 번 안 한 걸로 이건 너무 과하잖아.’

안토니아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하며 리카르도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전하.”

“네?”

“저는 한 벌로도 충분하답니다. 무엇보다……. 전하께서 제게 그렇게 많은 드레스를 선물할 이유가 없잖아요.”

간신히 예의를 지킬 수 있었다.

안토니아의 머릿속에서는 몇 달 치 예산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아름다웠고 대공가의 재산을 생각하면 별것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지만!

안토니아는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손으로만 디자인화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는 이것 하나로 충분해요, 전하.”

“어째서지요?”

“……네?”

그러자 정작 마음이 급한 건 리카르도 쪽이었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너그러운 소백작이니, 한 벌만으로도 괜찮다고 해 주시는 거겠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리카르도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그는 간절히 원했으니까.

‘분명 하나하나 다 어울릴 텐데, 다 보고 싶은데…….’

게다가 조금이라도 안토니아에게 호감을 사고 싶었다. 무척이나!

그러나 안토니아는 참 매정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대공 전하. 염려하지 마세요, 정말로 더 그 일을 마음에 품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의상실에 데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호의고 영광이랍니다.”

그 말에 리카르도는 잠시 망설이다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유글란스 백작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베르가 님에게 꼭 이야기해 줘야겠네!’

그녀는 이스베르가와 오랜 친구 사이였다.

* * *

일주일 뒤, 안토니아는 두 가지 이유로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하나는 다름 아닌 리카르도와 의상실 방문 다음 날 난 기사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원래 친분 있던 귀족가의 티 파티에 참석한 안토니아는 당연히 질문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트라체스 대공 전하가 소백작에게 관심을 가진단 소리가 사실인가요?”

“의상실에 원단을 납품하는 상단에서 먼저 이야기가 돌았다고 하더라고요, 대공 전하가 소백작을 파트너로 삼으려고 한다고 말이에요.”

안토니아는 그 질문들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대공 전하의 친절을 다들 너무 과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과하다니요, 대공 전하는 지금껏 사교계 시즌이 되면 매번 바깥으로 나돌기 바쁘셨는걸요!”

“맞아요, 데뷔탕트를 치르고 지난 4년간 사교계 시즌에 얼굴 한 번 비추신 적이 없답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좀 의아해졌다. 자신의 기억과 달랐으니까.

‘대공 전하는 사교계 시즌에 의례적으로 한두 번은 참석하셨는데, 물론 파트너는 매번 바뀌었지만.’

신문이나 잡지에서 거기까진 보도하지 않으니 몰랐다.

애초에 트라체스 대공의 사교계 참석 여부는 안토니아에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왜 다들 이렇게 난리가 났나 했더니.’

안토니아는 침착하게 해명했다.

“5년 전에 제가 작은아버지 일로 대공저에 도움을 청한 적이 있어요.”

“어머어머, 그렇게 예전부터 인연이 있던 사이로군요!”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며 미리 앞서나갔다.

외친 사람의 잇몸이 어쩐지 만개하듯 드러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냥 어리고 뭣 몰라 대공씩이나 되는 분이면 도와주실 거라 믿고 보냈던 거라서요.”

안토니아는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뺨을 한쪽 손으로 감쌌다.

“전하께서는 공사다망한 분이다 보니, 제 요청에 답장을 주시지 못했어요.”

“그걸 5년씩이나 기억하고 계셨단 게 특별하단 증거 아닌가요?!”

또 다른 사람이 신난 듯 외쳤다.

어쩐지 볼록 솟은 그 사람의 광대를 보며 손으로 톡톡 두드려 넣어 주고 싶어졌다.

“레이디 트라체스께서 제게 관심을 보여 주시니, 대공 전하께서도 친절을 베푸신 것뿐이에요.”

“그럼 레이디 트라체스가 소백작을 보살펴 주려 하니, 대공 전하도 같이 챙겨 준 것뿐이다 그건가요?”

이 목소리는 앞선 기대와 호의 섞인 것과 달리 뾰족한 느낌이었다.

안토니아는 자신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은 여성을 향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여러분이 제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과 다른 게 없지요.”

결정적인 말이었다.

다들 이해가 확 되었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누군가는 실망했으나, 또 누군가는 안도했다.

‘정말 수도 사람들은 가십을 사랑한다니까.’

그래도 덕분에 안토니아는 자신의 평안한 평판도 유지하고 어느 정도 어중이떠중이들도 떨쳐낼 수 있었다.

적어도 ‘레이디 트라체스’가 나서기로 했는데 작위를 탐내며 아들을 붙이려 들 정도로 다들 눈치 없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다들 이제 세르히 양이 아니라 소백작이라고 불러 주고.’

한마디로 그들도 안토니아가 어지간하면 백작위를 승계할 거라고 짐작한단 의미였다.

* * *

그로부터 사흘 뒤, 처음 기사가 난 건 주간잡지였다.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이 빚어낸 3분의 마법, 한때를 기록하는 기적.]

작성자는 다름 아닌 셀린 렘버트 자작부인이었다.

특유의 꿈꾸는 듯한 제목으로 시작한 기고문, 아니 연재 소설의 1화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그것은 그날 잡지 모두를 매진시키는 사례를 만들었다.

‘그녀를 끌어들인 건 대성공이야!’

카메라도, 세르히 백작가나 크롬프트 상단도 이름값이 확 뛸 게 분명했다.

[세르히 소백작은 침착함 속에 이슬 같은 반짝임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는 파티 내에서 시종 차분하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름다운 물빛 눈으로 응시했다. ……중략……

그녀가 처음 카메라를 꺼냈을 때만 해도 맹세컨대, 그녀와 친구의 우정을 엿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도착한 사진을 본 순간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겨우 3분, 고작 3분이었다.

이 글을 본 사람들은 이 사진이 뭐가 대단한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물을 보면 감상이 달라질 것이다.

최소 10실버 이상은 주어야 나올법한 색채를 선명하게 띠고 있었으니까.

나는 어떻게 이런 마법 같은 물건을 만들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중략……

루퍼스 크롬프트는 정교한 솜씨로 카메라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말은 퉁명스러웠으나,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안토니아 아가씨 덕이에요, 그분이 어릴 적부터 제 재주를 알아봐 주고 친구로 응원해 주었거든요.’

그래서 나 셀린 렘버트는 두 사람의 우정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물론 그걸 처음 본 안토니아는.

‘어떻게 이렇게 낯부끄러운 내용을 쓸 수 있지? 루페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오겠는걸.’

특히 루퍼스의 대사를 재구성한 것들이 하나같이 대단했다.

‘아가씨, 어째서 저에게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 거예요?’

‘아무리 제 손끝이 대단하다 해도 아가씨의 아름다운 마음씨만 못할 거예요.’

안토니아는 숨죽인 채 어깨를 떨었다.

‘우리 루페 어쩜 좋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셀린 렘버트도 정말 대단했다.

‘슬쩍 세르히 백작가 출신이란 식으로 정보원 하나를 붙여 흘린 그 얄팍한 내용으로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꼭 이 잡지를 루페에게 보여 줘야지.

안토니아는 이 순간, 셀린 렘버트가 작성한 단 하나뿐이고 아름다운 우정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루퍼스 크롬프트를 놀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 * *

하지만 안토니아의 즐거움은 그 다음 날 아침, 다른 의미로 부서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 세르히 소백작.”

유글란스 백작이 가봉을 위해 직접 타운하우스를 방문했다.

그것도 한 벌이 아니라, 다섯 벌의 주문확인서를 들고서 말이다.

‘미친 거 아니야, 리카르도 트라체스?!’

자신이 그렇게 괜찮다고 이야기했는데!

안토니아는 유글란스 백작이 내민 주문확인서를 몇 번이고 살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백작님.”

“그럴 리가요, 모두 소백작을 위한 게 맞답니다.”

안토니아는 좀 울고 싶어졌다.

‘대공의 관심은 필요 없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트라체스 대공은 황제의 이복동생인 황족이었다.

이스베르가가 안토니아에게 관심을 두는 정도면야 황제는 또 그녀가 제 버릇 못 버렸구나 하겠지만, 트라체스 대공은 달랐다.

‘게다가 예전처럼 의례적으로 다른 아가씨들이랑 만나는 것도 아니면…….’

안토니아가 리카르도의 제안을 완전히 거절하지 않은 건 회귀 전 기억 때문이었다.

그는 파트너가 되는 아가씨에게 마치 수고비처럼 보석이나 드레스를 사 주곤 했었다.

그러니 자신도 트라체스 대공의 스쳐 가는 인연 정도로 금방 관심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사교계에 지난 4년간 사교계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니, 그러니까 지난번 의상실에 갔을 때 대공의 파트너 운운 소리가 나왔지…….’

자신의 실책이었다. 괜히 황제가 이 일로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졌다간 곤란했다.

황제와 교황에 은근히 대립한다곤 해도 겉으로는 친근한 사이니 어쩌면 꼬리가 밟힐지도 몰랐다.

‘……리샤르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수도에 와서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자신의 어린 친구는 신의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얼어버린 안토니아를 보며 유글란스 백작은 안심하라는 듯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소백작.”

“네?”

“이스베르가 님이 그러시더군요, 소백작은 아직 사교계가 낯설 테니 대공 전하가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벌 선물한 건 비밀로 해 달라고 말이에요.”

“……정말요?”

안토니아의 말투에 다행이라는 듯한 기색이 확 실렸다.

유글란스 백작은 안토니아가 표정은 없어도 목소리와 말투만으로도 자신의 감정을 참 잘 표현한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럼요, 이스베르가 님이 소백작의 사교계를 보살펴 줄 생각인가 본데, 당연히 저도 협조해야지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을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이었다.

‘레이디 트라체스가 보낸 편지에 빨리 답하길 잘했어.’

그녀는 다른 일이 있어 곧장 티 타임 초대를 할 수 없다며 트라체스 대공과 의상실에 다녀온 다음 날 편지를 보냈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안토니아의 사교계 후견인이 되어도 괜찮겠냐는 이야기였다.

‘법적으로 묶이는 것도 아니고, 레이디 트라체스쯤 되면 날 돌보는 걸로 인한 명예는 필요 없을 정도니까.’

이미 결혼 전 그녀가 쌓아 둔 선행과 사교계 내에서의 입지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였다.

안토니아는 곧장 꼭 그렇게 해 달라는 말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

“감사해요, 유글란스 백작님.”

“별말씀을요. 그러니 소백작, 트라체스 대공가에서 보내는 선물은 사양할 필요 없답니다.”

‘왜 레이디 트라체스가 아니라 트라체스 대공가지?’

리카르도가 하는 것들도 이스베르가의 의사가 반영되어 있단 소리인 걸까.

‘그럴지도 몰라, 트라체스 남매는 사이좋기로 유명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렇게 납득하고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으로 유글란스 백작의 주문확인서를 겨우 받아들였다.

* * *

“오랜만에 입궁해서 한다는 소리가 그것이냐, 이스베르가. 짐은 참 서운하구나.”

황제는 전혀 서운하지 않은 얼굴로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이스베르가는 입꼬리를 당겼다. 당연히 제 이복오빠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란 건 알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해 줄 가능성이 더 크겠네.’

리카르도가 안토니아와 의상실에 다녀오고 일주일째가 되던 날, 이스베르가는 서둘러서 입궁했다.

실은 좀 더 일찍 오고 싶었으나 황제가 미루고 미룬 탓이었다.

조금 전까지 깍듯하게 굴던 이스베르가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재차 청했다.

“오라버니. 제가 오랜만에 드리는 청이에요, 6년 만이잖아요. 그 아가씨가 안돼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며칠을 고민했답니다.”

“흥, 아이를 낳더니 전보다 더 머리만 빨리 돌리는구나.”

“어제저녁 발매된 잡지를 읽었기에 이 못난 여동생을 들어오라고 하신 것 아닌가요, 오라버니?”

이스베르가가 방긋방긋 웃으며 하는 소리에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제는 자신의 유일한 여동생에게도, 저 얼굴에도 약했다.

그는 남매의 어머니인 트라체스 선황후에게 빚이 있었으니 말이다.

“약은 것, 답을 알고 짐을 놀렸구나.”

“제가 어떻게 오라버니를 놀릴 수 있겠어요. 그저 자애로운 제 오라버니이자, 눈에 보인 이상 넘어가지 않을 성군이시라는 걸 믿을 뿐이지요.”

다른 사람은 함부로 입에 올리지도 못할 말을 이스베르가는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황제는 잠시 제 여동생을 보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 리카르도가 좋아하느냐?”

“글쎄요, 제가 남동생의 마음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이스베르가는 친혈육의 연애 사정 따위 알고 싶지도 않은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 아가씨를 데리고 의상실에 갔다고 하던데? 유글란스 백작은 이미 접수를 끝냈다고 해 우리 집 막내가 한껏 난동을 부린 참이다.”

“오라버니, 유글란스 백작은 제 친구인데 어떻게 리카르도가 움직였겠어요. 리카르도가 소백작을 의상실에 데려간 것도 모두 제가 시킨 것뿐이에요.”

“네가 시켰다고?”

“수도에 와서 처음 드레스를 맞추러 가는 건데 기왕이면 데이트가 낫지 않겠어요? 리카르도가 모자라긴 하지만 겉만큼은 멀끔하잖아요.”

“흐음.”

“특히 소백작을 만만하게 보는 자들도 워낙 많았고요.”

비스듬히 기대앉아 턱을 괴고서 생각하는 황제를 보며 이스베르가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이번 사교계 시즌, 제가 소백작의 후견인이 되기로 한걸요. 당연히 신경 쓰이지 않겠어요?”

“네가?”

황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스베르가를 바라보았다.

이스베르가는 그 순간 크게 긴장했다.

몇 번을 보아도 해석하기 힘든 황제의 눈빛이었다.

차라리 황족인 이스베르가가 안토니아의 후견인이 되는 게 과하다고 생각하는 정도면 다행이겠지만.

‘리카르도가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좀 곤란할 거야. 폐하는 틀림없이 일을 꼬아 버릴 테니까.’

그것도 분명히 안토니아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참 길게만 느껴졌던 잠깐의 생각을 마치고 황제가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루퍼스 크롬프트는 제법 쓸만하겠더구나, 우정이란 미적지근한 걸로 그를 붙들어 놓은 게 좀 불안 사항이긴 하다만.”

황제는 오늘 아침 조간에 실린 안토니아의 사진을 보며 비죽이 웃었다.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동부는 사고도 없고 평화로운 지역이니. 짐이 너그럽게 특혜를 준다면 이 ‘순진한’ 아가씨는 뼈 빠지게 일해서 국고를 좀 채워 주겠지.”

이스베르가는 등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역시 황제도 안토니아가 이 모든 화제성을 의도했다는 것쯤 눈치챘단 소리였다.

그녀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럴 거예요, 제가 잘 가르칠게요.”

“데뷔탕트 무도회가 기대되는구나.”

이스베르가는 그 말에 있는 힘껏 미소를 지었다.

데뷔탕트 무도회 때 안토니아를 완벽하게 준비시키라는 황제의 말이었다.

* * *

“안 먹어! 안 먹는다고!!”

비슷한 시각, 막내 황자궁에서는 시종이 한창 진땀을 빼고 있었다.

“다 형님 때문이야! 착하게 보여야 된다느니 뭐니 해서 원래 지난달에 유글란스 백작 의상실에 가려고 했는데 그걸 막았잖아!”

“황자님, 쉿, 쉿……. 목소리를 낮추세요.”

“내가 왜 목소리를 낮춰야 해! 다 형님 때문인데. 내 옷을 맞춰 준다고 하기 전까지는 굶을 거야!”

“그래도 지금 황자님의 교육담당이자 후견인은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아무리 황태자 전하께서 예뻐하신다고 해도 이런 게 바깥에 나가면 혼나는 건 황자님이셔요.”

“…….”

“그리고 전하께서 황제 폐하께 말씀 올려 준 덕에 이번 시즌부터 사교계에 나설 수 있게 되셨잖아요, 기쁘지 않으셔요?”

“기뻐! 기쁘지만……, 그러니까 더 유글란스 백작의 의상이어야 했다고!”

“황자님이 두 달 전에 의상실에 가 주문했다면 절대 폐하께선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시종은 은근히 우쭐거리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자선활동도 다니고 의젓하게 공부하라고 해 준 덕에 허락하신 거잖아요.”

시종의 맞는 말에 막내 황자 제레미야의 입이 불퉁 튀어나왔다.

“자, 얼른 드세요.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심기가 영 좋지 않으니 조심하시고요.”

“형님의 기분이 왜 나쁜데?”

“그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다음 정책 사안으로 고민하던 걸 홀랑 대공가에 빼앗기셨으니까요.”

“마법기계인가 뭔가 하는 거 말이야?”

“네, 물론 대외적으로는 세르히 소백작의 이름을 빌린 것 같지만요, 레이디 트라체스가 후견인이 된다니 틀림없지요.”

시종은 그렇게 말하며 어렵게 구한 주간잡지를 제레미야에게 내밀었다.

“심지어 대공 전하께서 유글란스 백작의 의상실에도 데려가 드레스를 맞췄대요.”

“뭐?!”

제레미야는 바로 잡지를 열었다.

충실한 시종은 그가 보기 편하도록 바로 펼쳐 잡지에 표시까지 해 두었다.

“흥, 그래 봐야 촌구석에서 온 영애잖아. 이런 걸 데리고 고모님이나 숙부님이나 무슨 생각이시래?”

“글쎄요, 하지만 지난 5년간 대공 전하께서 몇 번 어깃장을 놓으셨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다 짜고 이렇게 만든 게 아닌가 하고 그러시더라고요.”

“흐음, 하긴 촌구석 계집애가 뭘 알겠어. 근데…….”

제레미야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기사에 실린 안토니아의 사진을 보고 히죽 웃었다.

“촌구석에서 온 것치곤 예쁘게 생겼네.”

“그런가요?”

“있지, 그냥 고모님이 후견인인 거고, 얘 황실 무도회 파트너 있단 소리는 없지?”

“트라체스 대공 전하신가 하는 소문은 있었는데, 소백작이 직접 아니라고 했다고 하던걸요.”

“그래? 그럼 내가 얘랑 파트너 해도 되겠네?”

“황자님……?”

제레미야는 못된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시종의 트레이에서 빵을 집어 입에 넣었다.

예쁘고 순진한 여자애들을 놀리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으니까.

게다가 자신에게도 중요한 황실 무도회였다.

공식적으로 처음 나서는 무도회인 만큼 자신을 돋보이게 할 정도로 적당히 예쁘고 순진하고 덜떨어진 게 딱 좋았다.

‘덤으로 숙부님네랑 이간질 시키면 형님도 분명 기뻐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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