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5화 (5/29)

#5.

탕-!

날아간 탄환이 나무 위 표시한 중앙에 정확히 적중했다.

“정말로 많이 늘었는걸.”

“그렇지?”

뿌듯해하는 안토니아의 얼굴에 리샤르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올로의 재판이 끝난 지도 사흘이 지났다.

바올로는 약 5년 반가량의 징역을 살게 되었고, 일주일 뒤 제국 서쪽 끝으로 압송될 예정이었다.

“그보다 정말 드비 경에게 부탁드려도 괜찮은 거였을까?”

“직접 하겠다고 한 거니까 괜찮아.”

“그럼 다행이지만, 덕분에 리샤르도 좀 더 머무를 수 있게 됐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드비 경이지만 먼저 나서서 해 주겠다고 하니 무척 고마웠다.

솔직한 안토니아의 말에 리샤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소백작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 영광인걸. 오히려 내가 고마울 지경이야. 드비 경에게 그런 의뢰를 준 덕에 시간이 생겼으니까.”

“리샤르가 먼저 말해 줘서 다행이었어. 라미나 경을 수도로 보내야 하나 고민했거든.”

다름이 아니라 안토니아는 대신관의 보증을 첨부하여, 바올로 세르히의 후견인 신분을 박탈해 달라는 청을 보냈다.

예전에 한 번 백작가에서 쫓겨났던 바올로는 어린 안토니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서명한 후견인 서류 덕에 성을 회복했었다.

덕분에 다시 그에게서 세르히라는 성을 삭제하는 데도 황제의 허가가 필요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대신관님의 보증도 있고 잘 해결될 거야.”

“응.”

“그보다.”

“응?”

리샤르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안토니아의 이마에 조심스레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역시 열이 있구나, 어제까지도 앓았다고 들었는데 왜 속인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폴리랑 로레나도 몰랐는데.”

“모르긴, 하도 아가씨가 나가고 싶다고 조르니까 들어준 것 같은데.”

리샤르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몸 위로 자신의 외투를 벗어 둘러주었다.

“괜찮아, 이럼 리샤르가 춥잖아. 나는 이미 빵빵하게 입어서 더울 지경인걸.”

“괜찮지 않아요, 아가씨. 아직도 이렇게 작고 말라서 안쓰러운데.”

리샤르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의 손에 쥐어진 권총을 슬며시 빼내 안전장치를 걸어 버렸다.

“이 정도면 종종 연습하는 걸로 충분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안토니아. 재판에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몸이 지친 모양이니까.”

“…….”

안토니아는 그 말에 리샤르를 빤히 보았다.

“왜?”

“그때, 늑대 말이야.”

“응.”

“왜 마물이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

그 말에 리샤르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시선을 피했다.

안토니아도 루퍼스가 말하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마물 중에서도 하급 마물들은 짐승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까.

“마물이면 사례금도 겨우 그걸론 안 되는 거잖아.”

“괜찮아, 드비 경도 그냥 짐승하고 다를 바 없다고 했고.”

“그래도…….”

“무서워할까 그랬어.”

리샤르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 말했다.

“집 근처였잖아, 그런 데서 마물이 나왔다고 하면 보통 어린아이들은 겁에 질린다고.”

“리샤르는 괜찮고?”

“나? 나야…….”

“나나 리샤르나 비슷한 또래잖아. 리샤르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을 거야.”

사실 안토니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좀 겸연쩍었다.

몸이 어려지고 주변 사람들이 하도 어린 아가씨 취급을 해서 자신도 모르게 어린애처럼 구는 거지, 실제론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표정이 묘해진 건 리샤르 쪽이었다.

“비슷한 또래라니, 날 몇 살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열넷이나 열다섯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 말에 리샤르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안토니아는 자신과 리샤르가 기껏해야 두어 살 정도 차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치고 좀 키가 큰가 싶긴 했지만 얼굴이나 목소리 모두 아직 성장기를 맞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거고.’

좀 더 컸으면 분명 어른이란 느낌이 들기 시작해 사교계 예절 같은 걸 떠올려야만 했을 거였다.

“나는…….”

“리샤르는?”

안토니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리샤르를 바라보았다.

실은 그것보다 더 나이가 많은 걸까.

‘그렇다고 해도 잘 쳐줘 봐야 열여섯쯤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대충 비슷한 또래 범주는 되지 않을까.

물론 이 때는 한두 살이 크게 느껴진다지만 말이다.

그러나 리샤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얼버무렸다.

“방까지 데려다줄게.”

“……응? 응.”

안토니아는 그 한숨의 의미를 묻고 싶었으나 얼버무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더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직 어린 소년인 리샤르가 속상해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면 너무 미안하니까.

* * *

안토니아를 데려다주고 방으로 돌아온 리샤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드비가 있었다면 분명히 놀려 댔겠군.’

어떻게 말할지 대충 짐작이 갔다.

“열네다섯이요? 열네다섯?! 야, 우리 전하는 참 얼굴도 어려 보이고 예쁘고 좋으시겠어요!”

물론 말을 끝맺기 전에 자신이 그의 정강이를 후려 찼겠지만.

“하…….”

그럼에도 안토니아의 오해를 풀 수 없던 건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밝혔다간 단번에 멀어질 것 같아서였다.

이제 겨우 열셋 된 아가씨면서 어쩐지 몸가짐이 예절에 매우 익숙한 티가 났으니까.

‘내가 다섯 살이나 위라는 걸 알면 분명히 친구처럼 대하지 않을 거야.’

자신을 어리게 취급하는 걸 늘 질색하던 리샤르지만 지금만큼은 좀 고마웠다.

좀처럼 오지 않는 자신의 성장기도 말이다.

‘괜찮아, 원래 우리 집안은 다들 늦게 큰다고 했어.’

누나인 이스베르가도 데뷔탕트 해에 이르러서야 훌쩍 컸다고 했으니까.

‘……이게 무슨 소소한 고민이람.’

매일같이 자신을 괴롭히던 제 주변의 상황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정말로 큰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는데.

‘어차피 지금뿐일 시간이 아쉬워서……?’

안토니아에게 리샤르로 불릴 수 있는 게 이 계절뿐이라서 더 아깝게 느껴지는 걸까.

그 어린 소녀는 이미 짐작한 것 같았다.

이 겨울이 모두 지난 뒤에는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란 걸 말이다.

‘떠돌이 기사의 견습기사니까 그럴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지난 신년 연회 때 리샤르는 황제로부터 이런저런 책임을 부여받았으니까.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황제에게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만이 아니라, 누님의 안위도 달려 있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동부에서 얼쩡거리는 이유가 ‘부패한 신관’의 조사가 아니란 걸 눈치채는 게 더 두려웠다.

황제의 자식과 비슷한 또래의 이복형제라는 건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신관 일을 제외하곤 더는 안토니아에게 도움 주긴 어려워.’

그러니까 그 예쁜 소녀에게 손을 무턱대고 내밀 수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진창에 무심코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괜찮아, 이번 일은 누님의 이름을 빌렸으니까.’

안토니아가 바올로를 후견인에서 내치고, 가문에서 이름을 지우려면 대신관의 보증만으로는 확실치 않았다.

‘그것도 부정 의혹이 있는 대신관이라면 더욱…….’

참 도움이 안 되는 자였다. 보통이라면 그 정도로 해결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리샤르는 이스베르가에게 진작 사정을 이야기했다.

새해에 황제가 동부에서 너무 미적거린다며 추궁했을 때도 그렇게 둘러댔고 말이다.

‘폐하, 아시지 않습니까. 누님께서는 늘 부모 잃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지요.’

‘그래서 네가 동부로 갔다 이 말이냐.’

‘누님께서 결혼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접 조사하기가 어렵다며 말씀하셔서 한가한 제가 간 것뿐입니다.’

‘동부의 부패, 그리고 그 아가씨를 보살피려 하다 보니 오래 걸린다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트라체스 대공령과 가까운 곳이니 더 신경 써야지요.’

황제는 그 말에 대충이나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세르히 백작가가 단 한 번도 중앙에 고개 내민 적 없는 성실한 지방 귀족이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안토니아, 이번 계절의 나는 네 생각대로 그냥 열다섯의 리샤르로 있을게.’

황실과 조금이라도 엮였다간 귀찮고 힘들어지기만 할 것이다.

어린 소녀가 노력하여 겨우 가진 평온을 앗을 순 없었다.

어느 것 하나 진실된 것 없었지만, 거짓으로 꾸며진 존재라도 연달아 불행만 겪은 아가씨에게 위안이 된다면 나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간질간질함은 아마도, 아마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 * *

“참으로 정성이시군요, 세르히 소백작.”

“대신관님.”

“아니, 아니. 일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서둘러 일어서려는 안토니아를 대신관은 흐뭇한 얼굴로 보며 말했다.

“이제는 친척도 아닌 자 때문에 그리 주신께 기도를 드리다니요.”

“비록 아니라 해도, 잘못을 저지른 게 제 작은아버지라는 게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또…….”

“또?”

대신관은 편히 말하라는 듯 안토니아와 조금 떨어져 곁에 앉으며 말했다.

누군가가 보면 자애로운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할 만한 얼굴이었다.

“주신께서 혹시라도……. 노여워하시며 세르히 백작가를 돌봐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진지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대신관은 잠시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직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군.’

재판 때 워낙 의젓하게 굴어 대신관도 내심 좀 긴장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바올로는 제 배를 채우는 데는 쓸만한 자였으니까.

그런데 안토니아가 워낙 침착하게 백작가를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 앞으로 안토니아를 구슬려 제 배를 채우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하필 백작령에서 마물의 보고가……. 수도 쪽에서 먼저 눈치채지 않았던가.’

사실 그 때문에 바올로를 더 단호하게 내친 거기도 했다.

그가 미적거리지만 않고 숲을 없애 버리거나 해 증거만 없앴어도 자신의 출셋길이 막히지 않았을 테니까!

그것도 모르고 바올로는 자신에게 그 숲의 조건까지 내세워 거래하려 들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토록 안토니아가 어린아이처럼 겁이 많다면 이용할 구석이 아직 남아 있을 터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백작. 대신관인 제가 소백작을 위해 기도할 테니까요.”

이 어린 소녀는 틀림없이 의지할 곳이 필요할 것이다.

대신관은 그렇게 확신했다.

* * *

기도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지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씨, 여기요. 따뜻한 차요.”

“고마워, 폴리. 혹시 소식 들어온 건 없어?”

“아니요, 크롬프트 씨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다곤 했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루퍼스도 나름대로 열심히 찾고 있는데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제 배를 채웠다곤 해도 대신관쯤 된 사람은 기껏해야 좌천 정도로 그칠 게 분명했으니까.

‘신관인 이상, 좌천당한다고 해도 교황의 의사에 따라서 얼마든지 수도로 불려갈 수도 있고.’

그걸로는 모자랐다. 안토니아는 기왕이면 그가 파문까지 당하길 바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평생 신관으로 살아온 자에게 파문은 사형 이상의 고통과 치욕을 안겨 줄 테니까.

‘작은아버지가 내 유년 시절을 망가트렸다면 대신관은 그 협조자였으니까, 아니……. 대신관은 유년 시절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전 남의 편과 결혼하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비록 간접적인 영향이라곤 해도 말이다.

바올로와 대신관, 아니 당시 수도 중앙신전 수석신관이었던 그자는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안토니아의 값어치를 최대한 후려치려고 했다.

물론 현재 대신관이 안토니아에게 유감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바올로가 제시한 재물이 탐스러웠을 뿐.

하지만 두 사람이 부린 수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덕분에 내 인생은 꼬일 대로 꼬였고.’

그들에게는 불운이었고 안토니아에게는 하나의 행운과 열의 불행을 불러다 주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수작질할 생각으로 가득한 모양이고.’

안토니아가 슬쩍 미끼를 던진 것만으로도 대신관은 자신의 속셈을 비추었다.

아니, 정확히는 감춘 적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미끼를 아무리 뿌린다고 해도 제대로 물어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냐.’

지금 맞닥뜨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상대여서일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일이 조금 어렵게 흘러갈 모양이었다.

게다가 제 배만이 아니라 측근의 배도 잘 채워주어 충성심 높게도 비밀을 꼭꼭 잘 숨기기도 했다.

그 루퍼스 크롬프트가 알아내는 데 고전할 정도로 말이다.

‘아직 그도 어려서일까, 예전에 수도에서 들었을 때는 뭐든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안토니아는 귀여운 분홍 솜사탕 머리의 소년을 떠올리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가씨는 날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며칠 전 그가 보낸 쪽지의 첫머리가 그랬다.

그러더니, 또 그게 자존심 상했는지 펜으로 북북 취소선을 마구 그어두었다.

[아니지, 난 만능이야. 아가씨가 그냥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라구! 내가 못 찾는 게 아니니까.

두고 봐, 꼭 찾아내고 말 테니까.]

그냥 지우고 새로 써도 될 걸, 굳이 취소선 친 내용을 그냥 보냈단 건 한편으로는 알아 주길 바란단 뜻이었다.

그래, 좀 지금 서툴 수도 있지. 아직 어리잖아.

그때였다.

“아가씨, 찾았어요! 알아냈어요!”

“뭘?!”

로레나는 그녀답지 않게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대, 대신관님의 약점이요!”

“진짜, 정말로?”

로레나는 그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머뭇거렸다.

“아, 하지만 틀릴 수도 있어요.”

“뭔데? 일단 이야기해 봐.”

“제가 요 일주일 정도 신전 사람들을 열심히 도와드렸잖아요.”

“응.”

원래 신전에서 허드렛일하던 로레나는 신전의 기사나 다른 신관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그녀는 안토니아는 시중들 것이 적어 시간이 남는다며 사람들의 일을 도왔다.

물론 절대로 대신관님이 어떠시냐거나 하는 식으로 캐묻는 행동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녀는 그저 저택에서와 같이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을 도우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물론 대신관의 식사나 행동도 열심히 관찰하며 말이다.

“아마, 아마도요. 대신관님은 성력이 거의 없으신 것 같아요.”

“……정말로?”

정말이라면 어마어마한 약점이었다. 로레나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더 낮추며 소곤거렸다.

“예전에 신전에서 일할 때, 성력이 완전히 사라져 쫓겨난 신관님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응.”

“그분이 매번 아침 식사 때마다 새벽이슬을 받아 섞은 소금을 달라고 했거든요.”

“새벽이슬을 받아 섞은 소금?”

“네! 주신 파벨라의 힘이 가장 강한 게 새벽 때잖아요? 그래서 새벽이슬로 모아다 차를 우리면 신관님들이 아주 좋아하셨거든요.”

이건 안토니아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귀족 가문에서도 새벽이슬을 꼬박꼬박 받기도 했으니까.

“나중에 들은 건데, 그 소금으로 손을 문지르면 일시적으로 성력이 깃든다고 하더라고요.”

“손에?”

로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보통 신관님들은 그럴 이유가 없대요, 차로 마시는 게 훨씬 효과가 좋으니까요.”

한마디로 원래 성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방법이었다.

‘성력이 없어졌다고…….’

안토니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물론 성력이 없어져도 신관직을 박탈당하는 것뿐 파문당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대신관 같은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로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로운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계속 뭔가가 찝찝했다.

왜냐하면 대신관은 회귀 전, 자신이 열여덟 무렵에 무사히 수석신관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으니까.

‘아무리 그때는 작은아버지가 숲을 없애서 마물의 등장을 잘 숨겼다고 해도…….’

성력이 없어진 상태로 보통 수석신관 자리에 오르긴 어려웠다.

뭔가 석연찮았다. 로레나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왜 그러셔요, 아가씨?”

“로레나, 그 사실을 보통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로레나는 예전 일을 떠올리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찬찬히 이야기했다.

“그때는 제가 어렸잖아요? 겨우 일고여덟 살 때였으니까. 몸집이 작아서 천장 쪽을 지름길로 썼거든요.”

“처, 천장 쪽?”

“보통 지붕 아래에 다락방이 없는 경우에는 공간이 있어서 어린아이들이 몸을 낮추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됐거든요.”

이건 또 새로운 사실이었다.

‘혹시 모르니 백작저도 조사는 해볼까…….’

뭔가 비밀의 통로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그때도 다른 방 청소를 하려고 천장 쪽으로 살금살금 걷다가 대신관님이 다른 상급신관님과 말하던 걸 훔쳐 들은 거였어요.”

로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한마디로 보통은 자신이나 로레나처럼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들을 일 없는 정보란 소리였다.

‘그렇다면 중앙신전까지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눈치챌 가능성은 낮단 소리겠지…….’

로레나가 일주일이 넘게 공을 들여 겨우 관찰한 정도면 하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아는 사실일 테고.

“고마워, 로레나. 고생했어.”

“아니에요, 신전에서 떠날 때까지는 계속 다른 것도 찾아볼게요.”

“절대로 위험한 짓은 하면 안 돼. 알았지?”

* * *

로레나에게서 대신관의 약점을 쥔 뒤에도 안토니아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로레나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뭔가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에 대신관과는 직접 내가 말을 했던 게 아니라 그런가.’

직접 얼굴을 보기 전에는 그가 자신을 해하려던 사람이란 걸 눈치채지 못하기도 했고 말이다.

‘신관들은 대외적으로 이름을 고정해 두고 쓰질 않으니까…….’

직급이 바뀌면 불리는 이름도 바뀌었다.

열둘의 수석신관은 더 그랬다.

몇 번째 수석신관이냐에 따라서 부르는 명칭이 달라졌다.

얼굴을 기억하는 게 아니면 어지간히 신전에 신실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모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상하게 마음이 급했다.

‘분명히, 분명히……. 성력 잃은 신관이라는 소리에서 떠오르는 게 있었는데.’

하필 그때 자신도 남의 편과 결혼 준비로 바쁘던 때라서 기억이 깔끔하지 못했다.

‘정말로 인생에 도움이라곤 안 돼.’

안토니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참 타이밍 좋게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오르골 상자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루퍼스의 편지 상자였다.

[기사가 보석상으로 찾아와서 손님들이 무슨 일 난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무장한 기사를 그렇게 급박하게 보내다니!

아가씨, 내 장사를 망칠 셈이야?]

얼마 전 루퍼스는 저렇게 화를 내며 기사의 손에 이 편지 상자를 들려 보냈다.

앞으로 연락은 이쪽으로 해 달라고 하며 말이다.

‘처음부터 줬으면 더 편했을 걸.’

전통적인 편지 전달 방식을 원한 건 루퍼스 크롬프트지 않은가.

아무튼 안토니아는 서둘러 루퍼스가 막 보낸 편지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석연찮음을 해결할 정보가 있길 바라면서.

[이유까지는 못 알아냈어, 지금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가씨가 급한 것 같으니까 비록 완벽하지 못한 정보라도 적어 보내.

동부 대신관이 최근 들어 하급신관이 될 만한 아이들을 계속 모집하나 봐.]

안토니아는 그 내용에 의아한 듯 턱을 괴었다.

대신관의 업무 중 하나긴 했으니까.

[평범한 걸 뭐 이렇게 급하게 보내냐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가씨?

이 루퍼스 크롬프트가 설마 자존심 때문에 아무 말이나 써 보내겠어? 절대 아니라고!]

마치 안토니아의 마음을 읽은 듯한 내용이 이어졌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어쩐지 루퍼스에게 미안해져서 속으로도 웃음을 지웠다.

[중요한 건 수와 시기의 문제야.

보통 하급신관을 뽑는 건 봄의 중간쯤이야, 근데 아직 겨울이잖아? 게다가 평소 뽑는 양보다도 더 많아.

상당한 수의 아이들을 동부를 들쑤셔서 데려가는데도 모자라다며 신관들을 닦달하는 것 같아.

아가씨는 지금 대신전에 있잖아.

아휴, 나는 진짜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지 않는 주의지만 한마디 더 덧붙일게.

초봄에는 보통 신관들이 주신께 성력을 바치는 행사를 해. 뭔가 미심쩍지 않아?]

거기까지 읽은 안토니아는 비로소 회귀 전, 스쳐 지나가듯 읽은 신문 속 헤드라인을 떠올렸다.

[하급신관 돌연사의 범인은 다섯 번째 수석신관이었다!]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자신의 마음이 급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석연찮았는지도 전부.

바빠서 기사를 모두 읽지는 못했으나 헤드라인을 떠올리자 내용도 대강이나마 떠올랐다.

‘성력을 잃은 신관이 어린 신관들의 성력을 빼앗고, 몇 년간 자신의 성력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행동했단 내용이었지.’

처음에는 그 수가 아주 많지는 않았다.

애초에 신관이 될 수는 없지만 성력이 있는 아이들에게서 조금씩 흡수해 가져왔다고 했으니까.

‘그때는 죽는 아이까진 나오지 않았고.’

아마도 동부에 있을 때의 이야기일 터였다.

그러니 지금도 아이들을 많이 데려오라고 닦달하는 터일 테고.

그러나 수도로 올라가며 사정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조바심이 난 대신관은 신관들에게 손을 댔다.

상급신관도 아니고 하급신관 몇몇이 성력을 잃고 쫓겨나자 누군가 의심은 했으나 확증은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6년여가 흘러서야 대신관의 꼬리가 잡혔다.

욕심을 내 흡수한 성력에 신관 다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까.

‘……서둘러야 해.’

대신관이 소금을 가져오라고 하고 아이들을 더 데려오라고 닦달한다는 건 모자라단 뜻이었으니까.

‘죽지는 않는다지만 원래 있던 성력을 잃으면 평생 병에 시달릴 테니까.’

자신과 비록 면식조차 없는 아이들이라도 안토니아는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동부의 아이들이라면, 자신이 주인인 세르히 백작령의 아이들도 포함되지 않는가.

안토니아는 잠시 고민하다 펜을 들었다.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있었다.

* * *

“오늘도 이게 전부냐?”

“죄,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내가 그리 급하다고 말했거늘! 어찌 일을 이렇게 해.”

“그, 그것이…….”

이른 새벽, 성력이 있는 아이들을 마차에 대여섯 정도 싣고 데려온 중급신관은 고개를 숙였다.

“주신에 대한 마음이 고작 이 정도인 것이냐!”

“그렇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게…….”

중급신관은 떠올리는 것도 두렵다는 듯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 이 동부에서?”

대신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동부는 제국에서도 상당히 안전한 지역이었으니까.

“정말입니다. 갑자기 도적 같은 무리가 덮쳐서……!”

중급신관은 더듬더듬 그 도적이 했던 말을 이야기했다.

‘우리 예쁜 아가씨가 사람 쓰는 게 좀 험하더라고, 어쩌겠어. 죽이진 않을 테니까 날 원망하지 마. 알겠지?’

대신관은 그 말에 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아가씨가 누구란 말이냐! 도적이라니, 그래서 아이들을 다 빼앗겼다는 것이냐?”

“네, 순식간에……. 엄청, 엄청 조용했는데……. 눈을 떠 보니 남은 건 제가 감싸고 있던 얘들뿐이었습니다.”

“이런! 주신께서 탄식할 일이로다.”

대신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아직도 두려움에 덜덜 떠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거라, 너희는 이미 주신의 품에 들어왔으니.”

아이들은 그 말에도 그저 무서운 듯 눈만 깜박였다.

대신관은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다독였다.

그가 아이들을 쓰다듬을 때마다 평소 끼지 않던 검은 묵주에서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 * *

[깜찍한 꼬마 아가씨, 말한 대로 아무도 안 죽이고 처리했어.

대여섯 정도 흘렸다고 날 탓하지 말라고, 죽이지 말라고 말한 건 아가씨잖아?

난 전지전능한 주신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렇지?

그러니까 약속한 건 꼭 지켜 주기야, 알았지?]

안토니아는 이른 아침 창가에 꽂혀 있던 편지를 보며 안도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동부 암살자 길드장 테넌이었다.

루퍼스에게 테넌의 약점은 잔뜩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부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즐기나?’

루퍼스에게 자신의 정보를 팔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테넌은 그러지 않았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덕분에 급한 불은 껐어.’

루퍼스에게 신관들의 행적을 확보해 달라고 한 다음 암살자 길드에 뒤처리를 맡겼으니까.

‘임시수단이긴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사실 증거를 확보하자면 아이들을 대신관에게 보내 성력이 없어진 뒤 보호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

대신관을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누군가를 희생시켜 가며 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그 순간 안토니아는 자신의 손에서 또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깨닫고 눈을 찡그렸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너무 안달 내도 좋지 않으니까.’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가 나쁜 사람인 이상 처리할 방법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안토니아는 평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신전 내 미사홀로 향했다.

바올로가 떠나기까지 앞으로 나흘.

그러니, 자신이 신전을 떠날 때까지도 대충 그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안토니아는 평소처럼 미사홀에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

‘당신께서 정말로 절 보살피고 계시다면, 제가 이 일을 막을 수 있게 해주세요.’

당신은 그럴 책임이 있잖아요.

안토니아는 조용히 주신 파벨라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자신이 고생만 하도록 하고, 또 한 번의 삶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는 돌아보거나 하지 않은 채 좀 더 간절히 기도에 집중했다.

“정말 소백작은 매일같이 참으로 열심입니다.”

예상한 대로 대신관이었다. 그는 안토니아에게 바올로를 대신하길 원하며 매일같이 얼굴을 비추었다.

사실을 알고 나니 그를 보는 게 더 고역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말이다.

그는 평소와 다른 검은 묵주를 끼고 있었다.

‘요 며칠은 계속 내가 준 아쿠아마린 묵주를 끼고 있었는데……?’

예전 삶에서 신관들과 아주 친한 건 아니었으나, 저런 색 묵주는 처음 보았다.

그러나 안토니아가 관찰하기도 전에 대신관은 평소처럼 팔을 돌려 안토니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어린 몸으로 대단합니다. 하급신관들도 주신께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할 때가 있는데 말입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해야 주신께서 제 진심을 알아 주시지 않겠어요.”

평소라면 의례적인 말이 바로 이어져야 할 터였다.

그러나 대신관은 무언가를 본 듯 잠시 침묵했다.

“대신관님……?”

“아, 실례했습니다. 소백작이 너무도 대견하다 보니 잠시 감격하느라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곤 대신관은 소매로 자신의 묵주를 가리며 손을 모았다.

그 모습이 워낙 일상적이라 안토니아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주신께서도 분명 알아 주실 겁니다. 소백작의 이런 정성을요.”

“항상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이렇게 신관에 오래 머무르며 신세를 지는데도 배려해 주시고요.”

그 말에 신관은 입꼬리를 당겨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미소를 보였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소백작이라면…….”

그의 눈에서 평소와 다른 이채가 감돌았다.

“세르히 씨의 배웅이 끝나더라도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얼마든지 신전에 머물러도 괜찮으니까요.”

* * *

미사홀에서 나온 대신관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참기가 어려웠다.

‘바올로 세르히, 그자가 끝까지 내게 쓸모있는 짓을 해 줬구나!’

차라리 이걸 빨리 자신에게 알려 줬다면 재판 결과가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

대신관은 자신의 방에 돌아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크게 웃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소금도 확 밀어 버렸다.

“이런 쩨쩨한 것, 이제 더는 필요 없겠구나!”

대신관은 묵주 팔찌를 벗어 내려놓았다.

검은 묵주에서는 오늘 새벽 아이들을 쓰다듬었을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토니아에게서 손을 떼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이거면, 이거면……. 다 해결될 것이다.”

굳이 잔챙이들을 모아 조금씩 흡수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소백작은 부모도 없는 지방 귀족이지 않은가. 게다가 원래 몸이 안 좋기까지 하지.’

친척이던 바올로 세르히 쪽에서 직접 안토니아가 영영 회복 불가능할 거라는 선언을 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으니까.

‘바보 같은 바올로 세르히. 처음부터 저 아가씨를 내게 데려왔다면 모든 게 쉬웠을 것을!’

그 작고 어린 아가씨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성력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순도가 높아 수석신관, 아니 교황과 비견될 정도의 양이었다.

잠재 성력을 측정하는 묵주가 빛나다 못해 금이 갈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가씨를 유인하지?’

신전 안에서 할 수는 없었다.

되도록이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덮치는 게 좋을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쁜 일에는 빠른 회전을 자랑하는 대신관의 두뇌가 수월하게도 방법을 만들어 냈다.

* * *

탕-! 탕-!

빠른 속도로 탄환이 발사되었다.

바올로가 떠나기까지 앞으로 이틀.

내일이면 드비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안토니아는 마지막으로 리샤르와 사격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젠 권총을 다루는 건 안토니아가 나보다 더 낫겠어.”

“몇 년이나 총을 만진 리샤르보다 낫다니, 아무리 칭찬이 좋다지만 과장이라는 걸 아주 잘 알겠어.”

“정말인데.”

“네, 네. 고마워요. 리샤르 군.”

그 말에 리샤르가 살짝 허리를 굽혀 안토니아와 눈을 맞추었다.

“리샤르?”

“정말이야, 어떻게 하면 내가 진심이라는 걸 믿게 할 수 있지?”

그러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비겁해라, 어떻게 알았지?’

자신이 어느덧 이 예쁜 미소에 약해졌다는 걸 말이다.

덕분에 오히려 진정성은 떨어진 역효과를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비겁한 수를 쓰면 더 못 믿겠어.”

“정말인데, 억울해.”

소년은 정말로 억울한 듯 부루퉁한 얼굴을 보였다.

“그런 걸로 해 둘게.”

“난 안토니아에게 진실만을 말하고 있어.”

“정말?”

“정말로.”

안토니아는 그것도 그런 걸로 해두기로 했다.

말하지 않는 걸 거짓이라고 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신전에 도착한 뒤로 리샤르와 둘이서 지낸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어렴풋이 깨달았다.

리샤르에게는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캐묻고 싶진 않았다. 예쁜 추억은 예쁜 그대로 두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단 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조금 더-.”

“안 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안토니아는 무리하지 말아야 해.”

“나 이제 열도 안 나는데?”

“그래도 안 돼. 지난번에 사격 연습 후에 열이 더 올라서 네 하녀들이 얼마나 잔소리한 줄 알아?”

“리샤르는 폴리랑 로레나가 무섭구나.”

그 말에 리샤르는 그저 눈을 찡그리면서도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조금 먼 곳에서 잰걸음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는 서둘러 총을 숨겼다.

“여기 계셨군요, 소백작님.”

“무슨 일인가요?”

하급신관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이야기했다.

“대신관님께서 전하시라 했습니다. 세르히 씨가 일전 신물 하나를 저쪽 동굴에 두었는데 가져다주실 수 있냐고요.”

“제가요……?”

그 말에 하급신관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히 씨가 백작가의 이름을 가졌을 때 한 일이니 소백작님이 직접 되돌려주시는 게 후에 탈이 없을 거라 했습니다.”

‘정말로 작은아버지는 도움이라곤 안 되는구나.’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좀 어둑한 숲길을 지나가야 하긴 했지만 아직 해가 진 것도 아닌 데다 원래 어린 신관들이 수련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쓰기도 하는 동굴이라고 했으니까.

“알겠어요, 저녁까지 미사홀에 가져다 둘게요.”

“감사합니다. 소백작님, 주신께서 분명 그 정성을 알아 주실 거예요.”

잰 걸음으로 돌아가는 하급신관을 보며 안토니아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저 큰 품의 옷을 보니 막 신전에 들어온 자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대신관에게 희생당하진 않았다는 소리구나.’

하긴 다른 아이들도 무사하단 이야기를 들었다.

안토니아는 괜히 마음이 쓰여서 폴리와 로레나에게 막 들어온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해 달라고 했었다.

“같이 가 줄게.”

“리샤르가? 아니야, 잠시 다녀오는 거니까.”

“할 일도 없는걸. 드비 경이 떠나면서 사고 치지 말고 안토니아나 잘 지켜 주라고 했거든.”

“그래서 호위해 주겠다고 하는 거야?”

“응, 당연히 무료야.”

리샤르의 말에 안토니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동굴에 다녀오는 것 정도인데 말이다.

리샤르가 먼저 가며 우거진 수풀을 정리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좀 듬직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리샤르는 정말로 나이에 비해서는 어른스럽구나.’

게다가 어쩐지 배려도 몸에 배어있었다.

기사라기보다는 어떤 의미로는 사교계 예절에 익숙한 신사 같기도 했다.

물론 그때처럼 크고 흉악한 장총을 다룰 땐 기사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오늘은 메고 있지 않았으니까.

“좀 이상하네.”

“응, 뭐가?”

“신전에서 여기까지 그렇게 먼 곳도 아닌데…….”

리샤르는 중얼거리듯 이야기하더니 안토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실례인 건 알지만 내 손을 잡는 게 낫겠어.”

“길이 험한 것 같진 않은데.”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리샤르의 손을 잡았다.

‘손이 크네…….’

아직 체구는 작았는데도 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어지간한 신사들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래 총이나 칼을 잡은 것인지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져서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길이 문제가 아니라…….”

리샤르가 설명하려던 그 순간.

“그르르르…….”

언젠가 한 번은 들었던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 * *

‘역시.’

리샤르는 서둘러 안토니아의 몸을 당겨 안았다.

먼저 길을 잡으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신전에서 이 동굴까지 멀지 않은 데다, 바올로가 신물을 가져다 두었다고 했는데.

‘몇 년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느낌이었으니까.’

이쪽이 보통 쓰는 길이 아니거나,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디선가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절대로 아무 소리도 내지 마.”

리샤르는 안토니아의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

품 안의 작은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 아니, 이건 마물의 살기였다.

마물은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모습을 숨기고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리샤르와 안토니아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된 거로군.’

조금 전 찾아온 어리숙한 하급신관, 동부에 뜬금없이 나타나던 마물. 그리고 이 명령을 지시한 대신관.

리샤르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했다.

‘대신관이 일부러 안토니아를 함정에 빠트린 거야.’

그것도 이 철저한 어린 아가씨가 방심할 만한 일을 골라서.

‘나도 그 사기꾼이라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좀 방심했다. 하나는 자신이 함께 있는데 대신관이 수를 쓰지 않을 거란 생각.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안토니아에 대한 모르던 사실.

‘설마 안토니아를 먹잇감으로 삼으려 들 줄은 몰랐는데.’

기껏해야 재산이나 노릴 줄 알았는데. 겉보기에 안토니아에게 성력이 있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대신관이 금술을 쓴다는 건 확실해졌군.’

리샤르는 어린 소녀의 어깨를 꽉 감싼 채 한 손으로 권총을 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총도 가지고 올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와 함께.

“크르르…….”

마물 둘, 아니 넷 이상이었다.

그들의 목표가 뚜렷하게 자신들 쪽으로 향했다.

‘아니, 당연하겠지. 대신관이 먹잇감으로 삼을 정도의 성력 소유자라면.’

마물들이 탐내지 않을 리가 없다.

리샤르는 권총을 손에 쥔 채 품 안의 소녀를 잡아당겼다.

“뛸 수 있겠어?”

안토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너무 많아, 여기선 한 번에 몰려들면 꼼짝없이 당해야 해.”

안토니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르는 그대로 안토니아의 손을 잡고 달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마물 하나가 어둠 속에서 휙 튀어나와 두 사람을 덮쳤다.

탕-!

그러나 두 사람을 덮치는 것보다 빠르게 리샤르가 마물의 급소를 노려 쐈다.

이번에는 단순한 수면탄이 아니라 정말 살상력을 가진 실탄이었다.

탕-! 탕-!

커다란 마물은 권총 한 발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리샤르는 안토니아를 앞서 달리게 하며 마물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리, 리샤르……!”

어린 소녀는 비명을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토니아의 앞쪽으로 조금 전보다 좀 작은 마물이 튀어나왔다.

리샤르는 그대로 안토니아의 몸을 제 품속으로 돌려 안고 시야를 가린 뒤 나타난 마물을 향해 총을 쐈다.

탕-! 탕-!

두 발을 급소에 맞았음에도 마물의 숨은 단번에 끊어지지 않았다.

리샤르는 혀를 차며 총으로 눈을 노려 맞춘 뒤, 접근하는 마물을 발로 강하게 찼다.

“큽…….”

이쪽은 가볍고 작고, 저쪽은 큰 탓에 반동으로 근처 나무로 몸이 떠밀렸지만.

등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리샤르!”

어린 소녀는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그것도 어떻게든 꾹 눌러 참은 목소리였다.

워낙 표정 없는 소녀지만 그 눈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

리샤르는 저도 모르게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고 싶단 생각을 했다. 급작스러운 전투에 감정이 요동친 탓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래야 했다.

“괜찮아.”

리샤르는 재빠르게 탄창을 갈며 바로 꿈틀거리는 마물을 향해 쐈다.

‘일단 느껴지는 건 앞으로 셋.’

도대체 대신관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니, 견습기사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기에 이런 상황을 만든 걸까.

‘어떻게든 내가 안토니아를 지키다 죽으면 그때 나타나서 구해줄 생각이었겠지.’

자신은 방해물이었을 테니까.

리샤르는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하며 안토니아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괜찮아?”

“응.”

소곤거리듯 묻는 말에 리샤르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 통증 따위 별것도 아니었다.

* * *

‘저, 저게 뭐야!’

상황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숨어서 지켜보던 대신관은 경악했다.

평범한 견습기사라면 첫 번째 마물이 덮쳤을 때 죽었어야 했다.

남을 지키며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안토니아처럼 작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소녀라면 걸림돌이 될 뿐, 그러니 기껏해야 몸으로 막고 죽는 게 최선이 될 거라 생각했다.

‘도대체 소백작도…….’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하는 게 당연할 유약한 소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소녀는 힘내서 뛰고 심지어 다른 마물이 보이면 견습기사에게 알려 주기까지 했다.

‘젠장……!’

대신관은 초조해져서 입술을 짓씹었다.

원래는 저 견습기사가 죽자마자 자신이 나타나 마물들을 싹 정화시키고 구해줄 생각이었다.

그럼 소백작은 단번에 자신에게 고마워할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아이 몇의 성력을 흡수한 상태였는데…….

‘아니야……. 아직, 아직 마물은 셋이나 남았고.’

그는 어떻게든 차분하려 애쓰며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의 뒤로 곤히 잠든 아이들이 있었다.

* *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안토니아는 힘들다거나 못 뛰겠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고 어떻게든 리샤르를 따라가려 노력했다.

이미 다리가 후들거린 지 오래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중간중간 잠시 몸을 숨길 틈이 있어 버틸 만은 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리샤르만큼은 아니야.’

첫 번째와 두 번째 마물까지는 그래도 총 몇 발로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부터는 마물의 가죽도 단단해지고 끈질김이 완전히 달라졌다.

안토니아는 리샤르를 바라보았다.

고운 얼굴의 소년은 이마가 땀으로 젖어 머리칼이 이리저리 흐트러진 채였다.

안토니아보다는 호흡이 고르지만 그도 힘겹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

“미안, 힘들지. 안토니아.”

그는 숨을 몰아쉬며 안토니아의 등을 토닥였다.

“이게 마지막인 것 같으니까.”

“그보다 리샤르는…….”

“난 괜찮아, 이럴 줄 알았으면 장총을 가지고 올걸 그랬단 생각을 할 뿐.”

리샤르는 그렇게 말하며 한 번 더 탄창을 갈았다.

이번이 마지막 탄창이었다. 안토니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리샤르가 말한 대로 바위에 기대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지금 도움은커녕, 걸림돌만 된다는 건 너무 잘 알았으니까.

눈앞의 마물은 이미 여러 발, 리샤르의 총을 맞았음에도 크르릉 거리며 끈질기게 굴었다.

철컹.

리샤르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마물이 새카만 발톱을 세우고서 리샤르에게 달려들었다.

탕-!

“크르릉!”

탕-! 탕-!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마물은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그나마 이게 마지막 마물이라 리샤르가 자신을 감싸며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도 차라리 같이 싸우고 싶은데.’

이미 중간에 리샤르에게 제지당했다.

안토니아가 가진 권총은 크기가 작기도 하고, 든 것도 수면탄이라 저 정도 마물에겐 통하지 않을 거라 했으니까.

게다가 반동 때문에 몸이 더 힘들어질 거라고 상냥한 소년은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본인은 팔뚝이 찢어지기까지 했으면서…….’

탕-!

몇 발째인가의 총성이 울렸다.

끈질기던 마물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리샤르는 혹시 몰라 마지막 총알을 마물의 급소에 박아넣어 숨통을 확실히 끊어놓은 뒤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안토-.”

그러나 이제 괜찮다는 듯 미소 짓던 소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리로 와, 안토니아!”

소년은 강하게 소리치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안토니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달렸다.

귓가에 또.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가 가까이 오자 리샤르는 곧장 팔을 당겨 자신의 뒤로 보내며 달려드는 마물을 검으로 막아냈다.

“칫……!”

안토니아는 그의 뒤에서 징그러운 마물들을 보며 초조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리샤르가 또래보다 강하다고 해도, 이건……. 무리야.’

전투에 대해 모르지만 그건 알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평소 총을 주무기로 삼는 기사였다.

그러나 가지고 있던 총알은 이미 다 쓴 상황이었다.

‘리샤르도 아직 어리잖아.’

성인 기사들에 비해 완력이 모자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건 나 때문에 벌어진 거야.’

안토니아는 대신관이 이런 짓을 벌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떻게 마물을 출현시킨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신관이 성력의 제물로 자신을 탐냈다는 건 깨달았다.

‘……어떻게 안 거지.’

자신의 힘은 회귀 전에도 중앙 신전의 교황 외에는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안토니아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배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생각보다도 더 먼저.

‘이거저거 재고 따질 때가 아니야.’

리샤르를 구해야 했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소년의 어깻죽지에 마물의 발톱이 파고들었다.

소년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으며 마물 둘을 상대했다.

대단한 몸놀림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넋 놓고 감상하고 말았을 것이다.

소년은 둘을 한 번에 상대하면서 절대 안토니아에게 발톱이 닿지 않도록 재주 좋게 베어냈다.

‘할 수 있어.’

안토니아는 배에 힘을 주었다. 몇 번쯤 손에만 맺혔던 뜨거운 기운이 전신으로 확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가진 힘은 무언가를 파괴하거나 무찌를 순 없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보호가 가능했다.

힘을 한 번 쓸 때마다 딱 한 번에 한해서긴 하지만.

‘힘을 여러 번 쓰면 되니까.’

그에 따른 무리, 자신의 몸 상태 그런 건 모두 나중으로 두기로 했다.

“리샤르!”

“괜찮아, 안토니아. 금방…….”

리샤르는 마물들을 한 번 더 튕겨내 물러서게 하며 말했다.

그러나 뒤돌아본 순간 리샤르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햇살을 받은 새벽이슬처럼 여러 빛깔의 빛무리가 안토니아를 감싸고 있었다.

“난 절대로 다치지 않아, 죽지도 않아. 그러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싸워도 돼. 그러니까, 이건…….”

안토니아는 리샤르의 등에 손을 대어 찬찬히 그에게도 힘을 씌워 주며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

리샤르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곧장 망설임 없이 하나의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다른 마물은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안토니아에게 달려들었다.

“흡.”

안토니아는 기도하듯 무릎 꿇은 채 덮쳐오는 마물을 그대로 두었다.

달려들 순 있어도 절대 자신을 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영롱한 빛무리는 마물의 이빨에 찢어지기 무섭게 다시 그 자리를 메웠다.

* * *

‘저건……!’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대신관은 눈을 크게 떴다.

저 영롱한 빛무리, 신관이라면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수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주신의 힘 ‘가호’였으니까!

‘그래서였군! 그냥 단순한 성력이 아니었어……!’

입가에서 미소가 흘렀다.

아무래도 오늘 계획은 실패인 것 같았다.

‘그래, 성력? 그게 중요한가. 성력을 꾸며 내는 것쯤이야……. 잔챙이들로도 충분하지.’

자신이 보기에 소백작은 힘을 갓 각성한 것 같았다. 그럼 뭐가 뭔지 모를 것이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소백작에게 하나하나 자신이 알려 주면 마음대로 다루기 쉬울 것이다.

‘그래, 소백작의 절대적인 보호자가 되는 걸로 충분해……!’

대신관은 이곳이 발각될 위험만 아니라면 크게 소리 내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가호 소유자의 보호자이자 발견자! 중앙 신전에서도 절대 날 무시하지 못할걸.’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기쁨에 취해 지나치게 잘 싸우는 견습기사의 존재에 대해서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 * *

리샤르는 총만이 아니라 검도 굉장히 잘 다뤘다.

자신의 가호가 완전히 부서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리샤르가 움직이는 걸 감상했다.

마치 춤을 추듯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정말로 견습기사라고……?’

아니, 자신이 그저 넘겨짚은 것뿐이었다.

리샤르는 정정하지 않고 두었을 뿐. 도대체 그는 뭘 숨기고 있는 걸까.

‘하긴, 나도……. 이 힘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잠자코 리샤르에게 기대기만 했으니까.’

어린 시절을 망가트린 게 바올로라면, 데뷔탕트 이후의 삶은 이 힘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으니까.

커다란 힘은 이목을 끄는 법이었다.

무엇이든 지켜 준다는 주신의 가호는 자신의 삶은 그러질 못했다.

리샤르가 상대하던 마물이 털썩 쓰러졌다. 마지막엔 울음 한 번 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곧이어 리샤르는 안토니아가 막던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허엉!”

조금 전 마물보다 작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

안토니아는 그걸 보고서야 겨우 숨을 편히 내쉴 수 있었다.

“다……. 끝이야?”

“아니.”

리샤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힘을 과도하게 써 덜덜 떨리는 안토니아의 손을 잡았다.

“대신관이 있어.”

“……여기에?”

“조금 멀리, 하지만. 잡을 수 있어.”

리샤르의 말에 안토니아는 품속에서 권총을 쥐었다.

“안토니아의 뒤쪽으로 떨어진 언덕, 아직 우리를 보고 있어.”

“응.”

“내가 도와줄게, 저자를 놓치면 둘 다…….”

리샤르는 뒷말을 아꼈다.

안토니아는 숨은 말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권총을 똑바로 쥐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 너무……. 잃기만 하는 거니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건 모두 다 드러내고, 수확도 없다니.

그대로 리샤르가 자신의 몸을 뒤돌려 주었다.

총구를 그대로 언덕으로 겨누자, 언덕 위에 웅크렸던 흰옷이 당황한 듯 펄럭였다.

망설임은 크지 않았다. 리샤르가 그간 가르쳐준 대로 숨을 참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신호를 주지 않았는데도 리샤르는 자신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손을 도와주었다.

탕-!

펄럭이던 흰옷이 언덕 위에 풀썩 쓰러지는 게 보였다.

‘진짜 이걸로 끝…….’

그리고 동시에.

안토니아도 시야가 까맣게 점멸하는 걸 느꼈다.

‘……아직, 정리할 게 있는데.’

그러나 제 뜻과 달리 지나치게 무리한 몸은 버티지 못했다.

* * *

풀썩 쓰러지는 안토니아의 몸을 리샤르는 가볍게 받아냈다.

어린 소녀의 몸은 지나칠 정도로 가벼웠다.

원래도 그리 튼튼하지 못한 데다, 지난 저녁부터 새벽까지 마물들에게 쫓기느라 고생했으니까.

‘고생했어, 안토니아.’

게다가 마지막에 쓴 가호도 충분히 소녀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책으로만 읽었지만, 가호를 쓸 때마다 체력을 쓴다고 했으니까.’

좀 복잡한 기분이었다. 안토니아가 힘을 쓴 순간 리샤르는 알아차렸다.

그녀가 수백 년에 한 번 나온다는 주신의 가호의 소유자라는 걸.

‘……왜 내 주변 레이디들은 이토록 힘든 운명인 건지.’

안토니아는 이미 이 힘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막 발현한 거라면 그렇게 침착하게 쓸 수 없었다.

‘네가 뭘 각오한 건지, 난 모르지 않아.’

자신의 삶이 엉망진창이 될 걸 각오하며 자신에게 이 힘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드비.”

“헉, 언제 아셨습니까?!”

“마지막 마물 처리할 때. 네 촐싹이는 기척이 느껴져서.”

“넵! 오자마자 찾았는데, 어제 나가신 뒤로 보이지 않는다며 이 소백작님네가 완전 난리가 났지 뭡니까.”

그럴 만도 했다. 저녁쯤 돌아왔어야 할 아가씨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으니까.

마물에 쫓겨 달아나다 보니 어느새 신전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와 버렸고.

“전하랑 같이 나가셨다길래 기척을 더듬어 왔는데, 소백작님과 같이 있지 뭡니까! 그래서 잽싸게 얼굴 가리고 숨어 있었지요!”

드비는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태평한 모습에 리샤르는 한숨이 나왔다.

“핫, 근데 설마 다치신 겁니까? 다치셨어요?”

“그럼 안 다친 걸로 보이냐?”

“헐, 왜요? 왜 전하가……! 지금까지 검 하나 달랑 들고 마물 우글우글한 데 들어가도 상처 하나 없던 전하가!”

“……내가 안토니아보다 용기가 없었거든.”

“네?”

비밀을 숨긴 건 안토니아뿐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혹시라도 들킬까 봐 힘을 아끼며 싸웠다.

마스터는 그냥 단순히 실력이 좋단 이유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힘을 숨기고 있었기에 리샤르는 정식으로는 마스터의 칭호도 달지 않은 채였다.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사용자라 드비가 그렇게 부르는 것뿐.

‘그리고 난……. 없이도 마물은 처리 가능한 범주라 끝까지 숨겼어.’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을 지키고자 모두 드러내었는데.

‘네게 빚이 생겼어, 안토니아.’

그것도 인생을 걸고 갚아야 할 빚이.

그 정도의 무게라는 걸 리샤르는 잘 알고 있었다.

“흑흑흑흑, 왜 다치신 겁니까. 수도에 가면 저만 잔소리를 폭탄같이 듣지 않겠습니까.”

“하…….”

그리고 드비는 그런 감상에 잠깐이라도 빠지지 않게 하는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리샤르는 안토니아를 안고 일어서며 드비에게 말했다.

“됐으니까, 뒤처리나 해. 대신관의 덜미를 제대로 잡았으니까.”

“넵. 아, 그보다 소백작님 제가 들까요? 전하는 팔도 다쳤고.”

“내가 해.”

리샤르의 모습에 드비가 히죽히죽 웃었다.

금방이라도 ‘질투……’ 하고 말할 것 같은 모습에 리샤르는 그의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찼다.

* * *

몸이 타는 것 같다가도 또 차가워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엉엉 우는 목소리가.

“……그만 울어.”

안토니아는 눈을 뜨기도 전에 따가운 목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아가씨! 아가씨……!”

“……그만 울어, 폴리. ……로레나도 울고 있네?”

눈을 뜨자 보인 건 두 하녀의 엉망이 된 얼굴이었다.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다. 그리고 왜 자신이 쓰러졌는지도 퍼뜩 떠올랐다.

안토니아는 폴리가 가져다준 물을 마신 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억지로 일으켰다.

“……대신관님은?”

어떻게든 버텨서 대신관의 고발까지 했어야 했는데.

자는 사이에 모두 허사가 되었을까 봐 무서웠다.

“일어나시자마자 그게 걱정이셔요?!”

폴리는 잉잉거리며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리샤르도 크게 다쳤는데 정작 대신관 님을 못 잡으면…….”

안토니아의 말에 로레나가 괜찮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세숫물을 가져다주며 이야기했다.

“리샤르 군도 상처는 별것 아니라고 아가씨께 전해 달라 했어요. 그리고 대신관 님도 드비 경이 맡아 주시겠다고 했고요.”

“드비 경이?”

“네, 보자마자 급하게 출발한 건지 또 드비 경은 못 봤지만……. 신전이 난리가 난 걸 보면 틀림없는 것 같아요.”

“그래…….”

차라리 잘됐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은 지체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아참, 그리고 리샤르 군이 이걸 아가씨께 전해 달라고 했어요.”

“어?”

그 말에 안토니아는 순간적으로 등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혹시 자신이 너무 오래 쓰러져 있어서 리샤르가 편지만 남기고 떠난 걸까.

‘아무리 이 일이 끝나면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지만……. 편지로만 작별하는 건 좀 슬픈데.’

안토니아는 좀 씁쓸한 기분으로 로레나에게서 편지 봉투를 받아 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용물은 작별 인사가 아니었다.

발신지는 다름 아닌 수도 황궁이었으니까.

[……세르히 소백작의 합당한 청에 따라 아래 내용을 승인합니다.

- 바올로 세르히를 백작가 명부에서 제명한다.

- 바올로 세르히의 후견인 자격을 박탈한다.]

앞뒤로 의례적인 미사여구가 꽤 붙어 있었으나, 눈에 또렷하게 들어온 건 이 내용뿐이었다.

안토니아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나 며칠이나 잤어?”

“이틀이에요.”

“그럼 작은아버지는?”

“어제 예정대로 압송당했어요! 안 그래도 바올로 님이 길길이 날뛰지 뭐예요!”

폴리가 끼어들어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감히 배웅도 안 나온다며, 자기가 나온 뒤에 두고 보자고 말씀하셨어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미 세르히 백작가에 작은아버지의 자리는 없어진 걸.”

“정말이에요?”

“응.”

안토니아가 재차 긍정하자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좀 아쉽긴 하네, 떠나기 전에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래야 바올로가 더 절망할 테니까.

아무튼 자신이 자는 사이에 상황이 싹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훌륭하게.

폴리는 기쁜 것인지 신난 말투로 재잘거렸다.

“아무튼, 이번 일 때문에 주방장님이 얼른 돌아오라고 성화셔요. 마물이 나타났으니 조심, 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럼, 가야지. 여기서 볼 일도 다 끝났고 나도 얼른 마틴의 요리가 먹고 싶은걸. 그보다…….”

안토니아는 조심스럽게 폴리와 로레나를 살폈다.

눈이 뜬 뒤 의아한 게 있었다.

‘왜 두 사람만 여기 있는 거지?’

리샤르나 대신관 중 누군가가 그날 본 가호에 대해 말했다면, 자신이 이렇게 평온하게 아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가 없을 텐데.

회귀 전만 해도 모르는 얼굴로 침대 곁이 드글드글하지 않았던가.

‘리샤르는 숨겨 줬다고 해도, 대신관의 입은 어떻게 막은 거지……?’

안토니아는 아리송한 마음으로 그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리샤르는 지금 어디에 있어?”

* * *

방 안에 들어온 소년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깨끗한 셔츠에 말끔한 얼굴, 상처라고는 손등에 난 긁힌 자국 정도가 그나마 티 날 뿐이었다.

“정말로 괜찮아?”

“여긴 대신전이잖아, 여기서 안 괜찮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다행이야. 나 때문에 리샤르가 팔이라도 못 쓰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어.”

심각한 얼굴을 보며 리샤르는 작게 웃었다.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 게다가…….”

리샤르는 조심스레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안토니아가 지켜 줬잖아.”

“…….”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리샤르는 안 거지?”

“응.”

리샤르는 얼버무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모르는 척하는 게 오히려 안토니아의 입을 막는 꼴이 되니까.

“주신의 힘이라는 건 알아. 그런 빛무리는……. 신관 중에서도 높은 분들에게서나 보이잖아.”

대신 정확히 그게 뭔지 안다는 사실은 숨겼다. 괜히 소중한 소녀의 마음에 심란함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리샤르의 답에 안토니아는 잠시 속으로 망설였다.

‘리샤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해. 하지만……’

그간 리샤르와 편히 지낼 수 있던 건 서로 이 시기가 지나면 볼 일 없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아는 침착하게 물었다.

“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말하길 원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걱정 마, 대신관도 말하지 못할 테니까.”

“……응?”

“드비 경의 약을 몰래 빼다 썼거든. 왠지 안토니아가 알려지길 바라지 않을 것 같아서.”

그 말에 안토니아는 안도했다. 아마도 입을 막는 약 같은 걸 테니까.

이미 리샤르의 실력을 본 이상,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드비 경도 정말 평범한 기사인가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덕분에.’

아직은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한 지방 귀족 영애인 척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안토니아는 리샤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름다운 소년이었으나, 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불쑥 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리샤르는 더 묻지 않을 거야?”

“안토니아에 대해서?”

“응.”

그 말에 리샤르는 겸연쩍은 듯 뺨을 긁적이더니 앞에 마련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신전 특유의 무늬 없는 다기가 왠지 이상하게 소년과 이질감이 들었다.

“그럴 생각이야.”

“왜?”

“알면서 묻는 거지?”

그 말에 안토니아도 그저 조용히 찻잔을 쥐었다.

백 마디 말보다도 그 답 하나로 명확해졌다.

마음 한구석이 왠지 아릿했다.

‘……나도 마찬가지면서.’

리샤르도 자신이 감춘 걸 말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안토니아의 속사정도 묻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당연했고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각오도 준비도 두 사람 모두에게 부족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래서 그의 쌉싸름한 감정을 덮어 두며 대신관의 일도, 어제 마물과의 사투도 모두 모르던 열셋의 소녀이자 그의 친구로 말했다.

“마틴이 리샤르를 한 번쯤 더 초대해 달라고 했는데, 아쉬워.”

“그러게, 백작저의 음식은 아쉬워서 한 번씩 생각이 나는데.”

두 사람은 눈앞으로 다가온 어린 인연의 작별을 참으로 또래답지 않게 주고받았다.

* * *

“네? 그냥 떠나시겠다고요?”

안토니아가 깨어나기 하루 전, 드비는 수도로 떠날 짐을 챙기다 말고 깜짝 놀라 리샤르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했어.”

“왜요? 왜? 어째서?!”

“준비가 필요하니까.”

“네?!”

드비는 참 세상 어렵게 산다는 듯한 눈으로 리샤르를 바라보았다.

“아니, 무슨 준비랍니까. 내가 트라체스 대공이다! 하는 게 그렇게 준비까지 필요한 일입니까?”

“겨우 그거면 굳이 고민하지도 않지.”

“아니, 그럼 뭔데요. 신분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전하가 재력이 딸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성격은, 악!”

리샤르는 드비의 정강이를 걷어찬 다음 한숨을 내쉬며 드비에게 다 작성한 편지를 툭 던졌다.

“해결이나 잘해.”

“암요, 그리고 전하도 너무 지체하지 말고 올라오셔야 합니다. 잠시 병이 나서 뒤따라온다고 전할 테니까요.”

“그래, 되도록 폐하 말고 적당히 재상이나 붙잡아 처리해.”

“넵, 당연하지요! 저도 폐하는 무섭습니다!”

당당한 드비의 말에 리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멍청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토니아가 가호를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태평하게 저런 소리나 할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안토니아도 언제까지 숨기진 못할 거야.’

중앙귀족이 아닐 뿐, 백작가의 후계자였다. 그녀는 데뷔탕트를 맞이할 때 꼭 수도에 와야만 했다.

그리고 수도에는 동부 대신관 같은 얼뜨기가 아니라 제대로 된 신관이 많았다.

그 강한 힘을 감지해 낼 신관이 몇 명은 있단 소리였다.

‘그러니……. 나도 준비를 해 두자.’

아무리 그 어린 소녀가 안타깝고 마음이 쓰여도 모두 묻고 잊을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거짓된 모래 위에 쌓인 이 관계로 예뻤노라 마음속에 간직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도 그 진흙탕에 발을 들여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그저 덮어 두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야만 할 때, 진흙탕이 적어도 깨끗한 벽돌길이 될 수 있도록 자신도 각오를 다지고 힘을 키워야 했다.

* * *

안토니아가 깨어나고 다음 날 새벽, 안토니아는 리샤르를 배웅했다.

“백작저까지라도 호위해 주고 싶었는데.”

“오늘까지 기다린 것도 드비 경의 배려였다며, 괜찮아.”

리샤르는 그 모습에 말 위에 오르지 않고 고삐만 쥔 채 잠시 고민했다.

그는 곧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곧 기사 서임을 받을 거야.”

“리샤르 정도의 실력이라면 당연하지, 축하해.”

“그러니까.”

리샤르는 안토니아의 앞에 몸을 낮추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았다.

“리샤르……?”

“나는 떠돌이 기사잖아?”

“……그랬지.”

서로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그러니 내 서약은 너에게 남겨 두고 싶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그 모습에 폴리와 로레나가 서로의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안토니아 또한 곧장 답하기가 힘들었다.

회귀 전 백작이 된 뒤, 많은 어린 기사들의 서약을 받았었다.

그러니 익숙하다면 익숙한 일이었는데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술렁였다.

“나여도 돼?”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

리샤르는 치사하게도 근사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안토니아는 소년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등 위로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 떨어졌다. 맹세의 키스에 혹시라도 안토니아가 다치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나의 아가씨, 기사로서의 첫 맹세는 당신의 것이에요.”

그리고 유일한 맹세예요. 리샤르는 그 말을 예쁜 미소 속에 숨겼다.

어린 인연의 작별 인사였다.

* * *

“나, 날 이렇게 가두는 건 실수하는 겁니다!”

수도로 압송당한 동부 대신관은 고작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수석신관 앞에서 소리쳤다.

“열두 번째 수석신관님, 당신도 내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날 도와주십시오!”

동부 대신관의 신문을 맡은 건 다름 아닌 갓 수석신관이 된 소년이었다.

태양 빛을 한껏 머금어 붉은 기가 도는 허니블론드에 짙은 남색빛 눈.

소년의 얼굴은 더없이 다정하고 유순해 보였다.

그래서 동부 대신관은 그가 자신의 신문 담당이라고 들어왔을 때 쾌재를 불렀다.

‘그래, 주신께서는 날 버리지 않으셨어! 그저, 그저 하나의 시련을 주신 것뿐이야.’

그게 아니라면 왜 수백 년에 한 번쯤 나타난다는 가호 소유자를 자신이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가호 이야기를 하려고만 하면 입이 움직이지 않는단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 기사 놈. 트라체스 대공의 측근이라고 하더니 이런 이상한 짓을……!’

기사가 마법을 쓴다는 소리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제게 걸린 사술만 풀어 주시면……!”

“동부 대신관님이라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수석신관님.”

“사도님께서 어찌 그러셨을까요?”

“……네?”

“분명 조심스러운 분이신데.”

소년은 곰곰이 고민하더니, 되었다는 듯 대신관의 이마에 손가락을 얹었다.

“마음이 복잡한 듯하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허, 헉!”

소년의 손끝에서 영롱한 빛깔이 흘러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신관이 잠들었다.

소년은 잠든 그를 보며 온화한 미소를 유지했다.

“무슨 생각이신지 몰라도, 사도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다 뜻이 있으시겠지요. 주신께서 선택한 분이니.”

그러니 그저 기다리고 그녀가 바라는 평온을 간직하게 도와줄 뿐.

소년은 잔잔한 발걸음으로 잠든 대신관을 뒤로했다.

* * *

[금술을 손댄 타락한 신관! 신전의 용인이 있었나?]

안토니아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고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금술이라니,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요!”

“신전에서 아무리 앞으로 보살펴 준대도 너무 안됐어요, 일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앞으로 평생 허약한 몸으로 살아야 한다니요…….”

폴리와 로레나의 말에 안토니아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에서 마물이 나타나던 것도 모두 동부 대신관이 금술로 성력을 흡수한 탓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목숨을 모두 부지한 것 같았고 신전의 보살핌이 있을 테니 회귀 전보다는 나을 터였다.

‘대신관이 설마 날 노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탓이야.’

안토니아는 조금 자책했다. 어쩔 수 없던 일이란 걸 알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기사 어느 곳이나, 중앙 신전, 수도의 여론 어디에서도 안토니아의 가호를 알아차린 흔적은 없었다.

비로소 안토니아는 안도할 수 있었다.

“왜 그러셔요, 그렇게 진이 빠진 얼굴을 하시고?”

“이제야 다 끝난 기분이라서.”

“아가씨도 참, 벌써 한 달이 지났잖아요.”

로레나의 말대로 어느새 겨울은 다 지나 봄이 되었다.

리샤르가 떠난 것도 그쯤 되었단 소리였다.

“정말로 편지 한 통 없네요.”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

안토니아의 말에 정작 폴리와 로레나가 서운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멋진 장면을 보여 줘 놓고요?”

“저는 심장이 두근거려서 덤벙거리다 주방장님께 혼났는데!”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안토니아는 소리 내 웃고 싶었다.

하지만 아마도 정말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둘 다 자신의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다음에 만약 만난다면 리샤르는 분명히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있겠지.’

막 성장기인 것 같으니 분명 키도 훌쩍 클 터였다.

어쩌면 그 아름다운 얼굴로 유명해질지도 몰랐다. 미성에 가까웠던 목소리는 어떻게 변할까.

안토니아는 회귀 전 리샤르라는 기사를 몰랐단 사실이 좀 아쉬웠다.

‘귀족 중에서도 없었는데…….’

어쩌면 과거에는 안토니아가 모르는 곳에서 위험한 일을 겪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안토니아는 절로 기도하게 되었다.

‘부디 리샤르가 안전하기를.’

성인이 되어 자신이 세르히 백작이 되면 분명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이 설마 흔적도 없어지진 않겠지.

리샤르에 대한 묘한 희망사항으로 생각이 가득 찼다.

노크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아가씨, 크롬프트 씨가 오셨습니다.”

“응, 금방 내려갈게. 오늘도 응접실 근처는 다 물려주고.”

안토니아는 보던 신문을 접어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기사는 딱히 읽을 필요가 없어 보였으니까.

‘트라체스 대공이 황제에게 명을 받아 잠시 멀리 떠날 거란 이야기가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는 끝까지 답장을 하지 않았다.

* * *

“어서 와, 루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마기나가 그렇게 부르던걸, 왜 나는 안 돼?”

“윽, 그럼 나도 너, 널……!”

“널, 뭐? 루페 군은 이미 나에게 매우 무례하게 대하고 있는데요?”

그 말에 루퍼스 크롬프트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저택 안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멋진 청년이었던 그는 응접실에 들어오면 위장을 휙 지워 버리곤 했다.

요 한 달 사이, 세르히 백작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올로가 제명당한 뒤, 잠자코 있던 하인들도 마저 정리했으며 새로 사람들도 뽑았다.

그 과정에서 루퍼스 크롬프트는 매우 좋은 인재였다.

덕분에 저택 내도 훨씬 쾌적해졌다. 성실하고 입 무거운 사람들을 골라 뽑을 수 있었으니까.

제게 악행을 저질렀던 포미스, 바올로, 동부 대신관 등으로 가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에게도 일자리를 주거나, 도움을 주었고 말이다.

“아가씨가 마음대로 해도 된댔는데, 마기나는 왜 나한테만…….”

“내가 마기나의 고용주라서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또 놀라운 건 자신이 손대지 못하던 상단의 상단주가 마기나였단 사실이었다.

지난 삶에는 바올로가 이미 장난질을 쳐 상단이 사라졌던지라 영영 몰랐다.

‘어쩐지 회귀 전에 마기나가 날 보면 늘 찝찝한 얼굴을 하더라니.’

아무튼 덕분에 맘 놓고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마기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오늘 루퍼스를 부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루퍼스는 투덜거리면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그렇게 치면 나는 마기나의 상관인데?”

“말은 바로 해야지, 상관이긴 해도 마기나에게 보살핌 받잖아. 마기나 없이 너 생활은 할 수 있어?”

“왜 못해! 내가 만든 기계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이 3주 전에 밥 먹는 것도 까먹고 박혀서 일하느라 배고파서 쓰러져?”

루퍼스는 그 말에 또 말문이 막힌 듯 꿍얼거렸다.

이렇게 놀릴 때마다 표정이 고대로 드러나는 데다 솜사탕 같은 분홍 머리가 포실포실 움직여 보는 재미가 있었다.

마치 어린 남동생이 하나 생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난 놀리려고 부른 거야?”

“아니, 일하려고 불렀지.”

“그럼 용건부터 빨리 이야기해! 나도 바쁜 사람이란 말이야.”

“그래? 그럼 안 되겠네. 오늘도 사교계 예절 수업 마저 하려고 했는데.”

“아가씨이!”

제 얼굴 근육이 움직였다면 분명 지금쯤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루퍼스는 사교계에서 보기 드문 참 재밌는 인재였다.

“그만 놀릴게.”

“제발 그래 주세요. 왠지 날 보면 매번 괴롭히려고만 하는 것 같아.”

이렇게 귀여운 소년이 몇 년 뒤에는 그렇게 유명한 정보상이 된다니.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 하긴, 그때도 얼굴을 비춰야 하는 곳에는 대리자를 많이 내세우긴 한 모양이다.

자신이 아는 루퍼스 크롬프트의 인상착의와도 꽤 달랐으니까.

물론 그가 모습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안토니아는 루퍼스에게서 정보를 얻는 대가로 사교계 예절을 시간이 날 때마다 가르쳐 주었다.

귀여운 얼굴이니 분명 잘 자라면 사교계 활동에 나서는 게 그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앞으로 날 지키려면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해.’

권력을 기르거나 야심을 드러내는 건 좋은 방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장 세르히 백작가에 이목을 집중시킬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루퍼스는 세간의 관심이 필요했다. 그는 정보상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싶어 했으니까.

“루페.”

“응?”

루퍼스는 마틴이 새로 만든 디저트에 열중하며 물었다.

단맛이 나는 꽃잎을 설탕으로 코팅하여 타르트 위에 올렸는데, 모양을 유지하며 먹으려면 집중이 필요했으니까.

“네 기계들 말이야.”

“응. 뭐 필요한 거 있어?”

“응, 한 몇백 개씩?”

“몇백 개……. 뭐, 몇백 개?!”

“응. 너도 사업하고 싶다고 했잖아.”

“아니, 그렇지만…….”

“내가 도와줄게. 아, 대신 단번에 여러 종류를 우르르 내보낼 생각은 하지 말고.”

과거 루퍼스 크롬프트는 자신의 발명품들을 단기간에 공개했다.

분명 수익은 되었겠지만, 덕분에 그의 발명가로서의 주목도는 잠깐에 그쳤고 정보상만으로 이름이 남았다.

게다가 뜯어보고 조잡한 카피품을 파는 자들도 생겼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이번 삶에서 그렇게 루퍼스의 상품들이 팔려나가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왜 도와주려고……?”

“나도 돈이 필요해서.”

“뭐?! 세르히 백작가의 재산만으로 모자라단 말이야?”

“돈은 넉넉하면 좋은 거란다, 루페 군.”

안토니아의 말에 루퍼스는 입을 삐죽였다.

무엇보다 루퍼스 크롬프트가 잘 커 줘야 자신도 편해졌다.

지난 삶 주신의 가호는 제 삶의 족쇄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다면.

‘가호도 내 무기가 될 수 있어.’

안토니아는 어렵게 되찾은 어린 시절을 헛되이 보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생각, 있지?”

안토니아가 재차 묻자 루퍼스는 포크를 입에 문 채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5년간 할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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