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4화 (4/29)

#4-(1).

바올로 세르히가 요란스럽게 귀환했다.

그래도 한 달은 버텼다. 안토니아는 그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갖기로 했다.

포미스 번트를 처리한 뒤 원래의 바올로라면 틀림없이 곧장 영지로 왔을 테니까.

안토니아는 잠옷 위에 서둘러 낡은 외투를 걸쳐 위장하고 엔트런스 홀로 내려갔다.

여전히 겁 많고 순진한 조카의 얼굴로 말이다.

“오셨어요……. 작은아버지.”

“왜 그러느냐, 안토니아. 얼른 뛰어오지 않고.”

“죄, 죄송해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폴리와 로레나의 손을 꼭 잡고 찬찬히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회복이 덜 되어 걷는 게 더딘 것처럼 보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다행히도 바올로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는 안토니아가 보이는 약한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잘 지낸 모양이구나, 흠. 조금 살이 올라붙은 거 같기도 한데.”

“죄, 죄송해요.”

“아니야, 아파서 부은 거겠지. 설마 내 사랑스러운 조카가 이 작은아버지의 말을 어겼을까.”

바올로는 호탕하게 웃으며 안토니아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쥐듯 잡았다.

“그래, 좀 찐 것 같긴 하구나. 주방장!”

“네, 바올로 님.”

마틴은 영 반갑지 않은 얼굴로 바올로에게 답했다.

“내가 그리 신신당부하지 않았는가! 원, 이래서야. 밀즈 부인이 있을 때는 안토니아의 식단 관리 하나는 제대로 했건만.”

“아가씨는 아직-.”

“아, 됐네, 됐어. 고작 주방장인 그대가 뭘 알아!”

바올로는 단번에 마틴의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말했다.

“귀족도 아니고, 알겠는가? 다 이게 내가 안토니아가 잘되라고 하는 거야. 내일부터 소나, 돼지고기는 줄이고 최대한 지방이 없는 퍽퍽한 부위를 딱 이만큼만 줘야 하네.”

그렇게 말하며 보인 크기는 겨우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였다.

“아직 아가씨는 성장기입니다. 바올로 님.”

“성장기니까, 더 신경 써야지! 나중에 커서 퉁퉁한 체질이 되면 누가 귀족 영애라고 생각하겠어!”

바올로는 그러면서 안토니아에게 이야기했다.

“안토니아, 너는 작은아버지의 말만 잘 들으면 된단다. 산책도 일주일에 딱 한 번이면 돼! 괜히 근육이라도 생겼다가는 큰일이란다. 자고로 귀족 영애는 매끈하고 말랑해서 쥐었을 때 뼈가 딱 잡히는 게 좋단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헛소리라며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그래, 지금보다 더 잘 걸을 필요도 없어! 무도회장에서 연약해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면 대부분의 신사들은 가련하고 아름답다며 널 칭송할 거란다. 네가 다행히도 예쁜 미모만은 잘 물려받지 않았니.”

바올로는 또 한 번 호방하게 웃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마른 게 좋겠구나, 지난번에 보았을 때가 딱 좋았는데. 밀즈 부인이 그런 헛짓만 안 했어도…….”

바올로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내가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걱정하는 널 보러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잖니, 절대로 널 걱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란다. 안토니아.”

“알고 있어요, 작은아버지.”

“그렇지?”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원하는 말을 기꺼이 읊어주었다.

“그럼요, 작은아버지만큼 절 생각하는 분도, 걱정하는 분도 없잖아요. 제가 친척인 작은아버지 외에 누굴 믿겠어요.”

“암, 암. 내 사랑스러운 조카는 이렇게 잘 아는데 말이야!”

바올로는 마틴을 향해 따가운 눈초리로 쏘아붙였다.

“가끔 주제넘는 것들이 있지 않으냐, 되었다. 다 되었어. 모처럼 돌아왔으니 굳이 기분 나쁜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가 뭐 있겠느냐.”

바올로는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하인을 향해 말했다.

“피곤하구나, 내 방은 당연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겠지? 뜨거운 물도 욕조에 잔뜩 채워 두고, 아. 그전에 식사부터 해야겠다. 주방장, 당장 준비하게.”

지시를 쏟아내는 바올로의 말에 하인들은 불만을 누르며 바로 움직였다.

마틴은 바올로를 향해 눈썹을 찡그리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바올로 님, 완벽한 식사를 내어오지요.”

“그래, 그렇지 않으면 주방장에 둔 이유가 없지 않은가! 흥.”

바올로는 그러면서 안토니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럼 조금 있다 식사할 때 다시 보자꾸나, 설마 작은아버지가 식사하는데 옆을 비우겠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갈 거예요.”

“그래! 그래야 착한 내 조카지.”

바올로는 제 세상인 것처럼 웃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물론 불편한 심기를 온전히 숨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고작 몇 달 사이에 저택 내에 그가 고용한 하인이 모두 사라져 있었으니까.

* * *

안토니아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바올로는 자신을 기다리게 한다는 걸 곧 무시하는 거라고 받아들였으니까.

오랜만에 돌아온 것이라 그런지 바올로의 목욕 시간은 꽤 길었다. 안토니아는 그 사이 마틴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작은아버지의 말이 많이 기분 나빴지?”

그러나 마틴은 고개를 내젓고는 활짝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바올로 앞에서 시종일관 딱딱했던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저는 아가씨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답니다.”

“마틴…….”

“정말이에요. 게다가 아가씨가 말씀 주신 것도 있잖아요?”

마틴은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안토니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십수 분이 지나고서야 바올로가 겨우 식당 안으로 느릿하게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일어서서 맞는 안토니아를 보며 떨떠름했다.

‘저것이 왜 저렇게 눈치 빠르게 행동하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의외였는데, 들어오자마자 냉큼 일어서는 것도 그랬다.

‘버릇없다고 단단히 혼내서 길을 들여둘 생각이었는데.’

지금까지야 말도 못 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방에 박혀 지내 그냥 두었다지만 앞으로는 다르지 않은가.

아직 어리고 뭣 모르니 단단히 혼내서 기를 확 죽인 다음 안토니아를 멋대로 휘두를 생각이었는데.

“많이 시장하시지요, 작은아버지.”

심지어 첫 마디조차도 예의 발랐다. 기분이 묘하긴 했으나 막상 저렇게 깍듯한 걸 보니 마냥 나쁘진 않았다.

‘그래, 길들이고 기죽이지 않아도 알아서 나한테 따른다면 더 좋은 거지.’

누구에게나 사이좋고 서로 생각해주는 조카와 작은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편할 테고 말이다.

여차하면 나중에 일이 터지더라도 안토니아가 눈물로 호소하게 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쉬울 수도 있었다.

바올로는 그래서 제법 흡족하게 자리에 앉았다.

심지어 안토니아는 전채 요리가 나올 때 곁에서 물이 더 필요하지 않냐거나, 냅킨이 더 필요하지 않냐며 소소하게 챙겨주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메인 요리가 나온 순간, 바올로의 기분은 손쉽게 진창으로 처박혔다.

“……이걸, 이걸 나한테 먹으라고 내놓은 것인가, 주방장!!”

바올로는 노성을 지르며 마틴을 노려보았다.

메인 요리는 닭가슴살 스테이크였다. 아니, 말이 스테이크지 겨우 익힌 것에 가까웠다.

“고작 이 한두 입 거리로 누구 배를 채우려고 내놓았단 말인가!”

“그야, 바올로 님이시지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겐가!”

“아닙니다. 바올로 님, 저는 바올로 님이 지시한 대로 열심히 따랐을 뿐입니다. 게다가 양이 모자란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올로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닭가슴살 약간에, 곁들인 채소가 잔뜩이었다. 여길 봐도 풀, 저길 봐도 풀.

하필 눈까지 내려 그걸 다 헤치고 오느라 진을 쏙 뺀 바올로에게는 참으로 단출한 메뉴였다.

그는 저택에 돌아가면 적어도 맛있고 제대로 된 식사를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니까.

‘신전에서도 나한테까지 검소한 식사를 강요해 허리가 1인치는 줄었는데!’

물론 바올로의 허리는 여전히 두툼한 데다, 확실한 D라인을 자랑했지만 말이다.

‘저들은 뒤로 몰래몰래 좋은 걸 다 먹고, 나한테만……. 하!’

거기서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굽실거리느라 기분이 좋을 날이 없었는데 ‘자신의’ 저택에서 확실한 아랫것인 ‘자신의’ 하인조차 저렇게 구는 꼴을 보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지금 말 몇 마디로 날 놀리는 겐가?! 어?! 그 꼴을 보니, 그간 얼마나 방자하게 굴었는지 눈에 훤하군! 주방장, 너 같은 것은-!”

당장 나가, 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밀즈 부인이 있을 때부터 눈엣가시였던 마틴이었으니까.

그러나, 하필 그 타이밍에 안토니아가 자신의 옷을 잡아당겼다.

“작은아버지.”

“넌 또 뭐야! 어디서 어른이 말하는 데 끼어들어!”

그 말에 안토니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잔뜩 무서워했다. 표정이 워낙 드러나지 않아 좀 기분은 꺼림칙했지만.

“끼, 끼어들려는 게 아니라…….”

“이게 끼어들기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마틴에게 치솟았던 화가 이번에는 안토니아에게로 옮겨갔다.

솔직히 말해 바올로는 지금 누구라도 제 분풀이 대상이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마, 마틴은 그냥……. 작은아버지를 생각해서 그런 거가 아닐까요?”

“뭐? 그게 무슨, 안토니아! 내 바보 같은 조카야, 이 작은아버지의 접시 꼴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오느냐?!”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올로는 그 모습에 오히려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지금 이 작은아버지를 놀리는 게냐? 그게 맞다니!”

역시 밀즈 부인 때도 포미스 때도 좀 이상하단 생각은 했었다. 바올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토니아가 한 말에 바올로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 요리는 작은아버지가 절 위해 준비하라 일렀던 것과 똑같잖아요……? 작은아버지는 절 늘 아끼시고 생각해 주시니까……. 마틴도 그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 걸 거예요.”

바올로는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뻐끔거렸다.

그사이 안토니아가 재빠르게 마틴에게 말했다.

“그렇지, 마틴?”

“……그렇습니다. 아가씨.”

마틴은 그러더니 바올로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저도 바올로 님의 첫 식사인 만큼 깊게 고민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최고급 소고기를 굽고 와인으로 소스를 만들어 메인 요리를 꾸몄을 겁니다.”

그 말에 바올로는 저도 모르게 입 안에서 군침이 도는 걸 느꼈다.

저택을 떠나기 전에 마틴이 솜씨를 발휘해 만든 스테이크를 몇 번 먹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 맛이 워낙 탁월해 마틴이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주방장 자리에 내버려 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시다시피 저는 원래 바올로 님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 지금 나랑 싸우-!”

“하지만!”

마틴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늘 말씀하시더군요, 마님과 주인님이 돌아가신 뒤 바올로 님이 없었다면 괴로웠을 거라고 말입니다.”

바올로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어린 조카는 여전히 자신의 옷깃을 구명줄인 것처럼 꼭 쥐고 있었다.

거짓말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간 정성을 다해 자신을 생각해주던 그 많은 편지며, 게다가 엔트런스 홀에서나 지금 식당에서의 태도.

어떻게 생각해도 조카가 자신을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것과 지금 이 접시 상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아가씨께 그토록 소중하고 잘하시는 분이니, 하시는 말씀은 모두 옳지 않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거고!”

바올로는 괜히 켕겨서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바올로 님이 아가씨를 생각해 말씀하시는 메뉴가 가장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마틴은 뿌듯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바올로의 입이 또다시 뻐끔거렸다.

그는 접시와 마틴, 안토니아를 번갈아 보다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 그건 안토니아가 소중해서 한 말이네, 나까지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마틴, 주방장으로서 선대 마님께 맹세했습니다. 아가씨를 늘 정성으로 모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럼 안토니아만 챙기면 될 것 아닌가……!”

“아니요, 그럴 수는 없지요! 아가씨께서 소중히 생각하는 분이라면 제게도 또 한 분의 주인님! 당연히 모심에 한 톨의 허술함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거기까지 나오자 바올로도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접시에 깨작깨작 포크질을 하더니 홱 일어서버렸다.

물론 두 입짜리 닭가슴살만큼은 모두 먹었고 말이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안토니아를 향해 말했다.

“흠, 흠. 사랑스러운 내 조카 안토니아야.”

“네, 작은아버지.”

안토니아는 조금 전보다도 더 주눅 든 모습이었다.

양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고개까지 축 늘어트린 채였으니까.

바올로는 그 모습과 좀 살이 붙긴 했어도-어디까지나 바올로 기준에서였지만-마른 조카의 모습을 보며 뼈를 깎는 심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어 이 작은 아버지가 잘못 본 것 같구나.”

“……네?”

“어린아이가 이렇게 말라서 되겠느냐. 주방장.”

“네, 바올로 님.”

바올로의 부름에 마틴은 충실한 모습으로 답했다.

그 모습이 바올로는 퍽 마음에 들어 조금쯤 기분이 누그러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후작가 출신의 제법 능력 있는 하인이 저를 깍듯이 대한다는 건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직 내 조카는 성장기지 않은가. 흠, 흠. 역시 영양을 고려해서 식사를 챙겨주는 게 좋겠네.”

“그럼 오후 티 타임에 간식도 챙기는 게 좋겠지요?”

마틴은 냉큼 자신의 희망 사항을 끼워 넣었다.

바올로는 그 말에 고민했다.

분명히 안된다고 하면 자신의 티 타임도 제대로 챙기지 않을 테니까.

‘안 그래도 형님과 형수님을 잘 닮아서 예쁘장한 아이인데…….’

그나마 지금 비쩍 말라 그나마 티가 덜 날 뿐이었다.

심지어 몸가짐도 자신이 지금껏 겪은 다른 귀족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 조카였다.

바올로는 갈등했다. 이대로 잘 챙겨 먹어 살이 조금 붙고 잘 큰다면 분명히 사교계에서 안토니아에게 눈길을 주는 귀족들이 많을 테니까.

‘그러다 제대로 된 귀족이라도 붙으면…….’

분명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중에서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안토니아를 도우려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후작 영애였던 안토니아의 어머니도 젊은 시절 수많은 구애를 받았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당장 눈앞의 디저트였다.

후작가 출신의 마틴은 원래 시중하녀였던 주제에 지나치게 솜씨가 좋았다.

수도에 있는 어지간한 레스토랑이나 디저트 가게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바올로 세르히는 약 이십여 년 전, 큰 사고를 치고 백작가에서 쫓겨난 신분이었다.

그나마 부친이었던 선선대 세르히 백작이 가문의 오점이라며 바올로의 잘못을 묻어주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

만약 안토니아의 부모가 살아 있었다면 백작가로 절대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귀족으로 태어나 백작 영식으로 모자람 없이 생활하던 바올로에게 떠돌이 생활은 궁핍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늘 낮잡아 보던 평민들과 같은 처지라는 게 그를 더 괴롭게 했다.

본격적으로 돈을 쥐기 전이던 초반 몇 년은 맛 좋은 디저트는커녕, 배를 채우기라도 하면 다행일 지경이었으니까.

그래서 바올로는 귀족으로서 누리던 것에 대한 강한 열망과 충동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풍족하고 고급스러운 식재료를 쓴 요리와 예쁘게 모양을 잡아낸 디저트는 대부호나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바올로는 마침 주방 하인이 바올로의 몫으로 준비해 가져오던 디저트를 보며 침을 삼켰다.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주 잘 알지만.

‘방법이 안토니아를 비쩍 마르게 하고 건강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 외에도 여러 방법이 있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바올로는 사람을 무너트리는 많은 나쁜 짓들을 익혔으니까.

“그래, 주방장, 그대의 생각이 좋네!”

끝내 바올로는 눈앞의 유혹에 지고 말았다.

* * *

“정말 우리 아가씨는 어쩜 이렇게 똑똑하신지!”

바올로가 식당에서 나간 뒤, 마틴은 안토니아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장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마틴이 작은아버지께 잘 말해준 덕이지.”

“그게 어디 제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랍니까! 아가씨께서 말씀하실 때만 해도 조금 걱정이었는데.”

마틴은 괜한 걱정이었다는 듯 어깨를 쭉 폈다.

“바올로 님은 병적으로 아가씨의 입에 맛있는 걸 넣는 걸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아가씨는 길어야 두어 달이라고는 했지만.”

마틴은 그것도 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기껏 좀 건강해진 몸이 다 허사가 될 것 아닙니까!”

“정말로 모두 마틴 덕이야. 작은아버지가 당장 나가라고도 할 법한 일이었는데.”

“그게 어디 무섭겠습니까! 이렇게 아가씨가 영민하신데, 분명 어떻게든 절 구해 주셨을 겁니다.”

마틴이 웃으며 하는 말에 안토니아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간 안토니아가 공을 들이고, 마틴이 감쪽같이 연기해준 덕에 먹는 것은 해결할 수 있었다.

“식사도 이리 잘 해결되었으니, 다른 것도 다 무난히 풀리면 좋겠습니다만…….”

“그러게.”

하지만 안토니아는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바올로가 돌아온 이상, 그는 백작가의 재산이며 장부를 제 손에 쥐려 할 테니까.

‘두 달, 두 달만 참으면 돼.’

안토니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운신 폭은 좁아지겠지만 견딜 자신 있었다. 자신은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아봤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안토니아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떠 어떻게든 잠을 깨려 노력하고 있었다.

“미지근한 거 말고, 이거보다 차가운 물이 좋겠어.”

안토니아는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과 싸우며 로레나에게 어물어물 이야기했다.

“그랬다간 피부가 아플 거예요, 아가씨.”

“괜찮아, 잠부터 얼른 깨야 해.”

분명히 바올로는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쳐서 귀족 영애의 몸가짐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 게 분명했다.

‘예전 삶에서도 지독하게 당했었고.’

회귀 전에도 바올로는 꼭 예고 없이 들이닥치곤 했다.

어제 자신에게 분풀이를 하긴커녕, 말려서 당하기만 했으니 꼬투리를 잡으려 애쓸 것이다.

‘어린애 몸이라 이게 안 좋네.’

열두 살, 이제 곧 열세 살이 될 이 몸은 한창 성장기라 잠이 많았다.

회귀 전에는 늘 피로와 싸우면서도 잠을 줄이곤 했는데, 아무래도 돌아오고 난 뒤에는 주변이 너무 편한 모양이었다.

어제 그렇게 일찍 잠들었는데도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게 이토록 힘든 걸 보면 말이다.

“여기요, 아가씨.”

“고마워, 로레나.”

안토니아는 아주 조금 차가워진 물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말한 거였는데, 도저히 그런 걸 가져다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안토니아는 로레나를 다시 한번 조르는 대신 의지를 다졌다.

눈가에서 서둘러 잠을 날리고 머리를 빗었다.

화장수는 향이 강하지 않은 것을 쓰고 옷장에서 최대한 수수한 옷을 찾아 걸쳤다.

서둘러 머리 리본을 묶을 즈음.

“안토니아-! 내 사랑스러운 조카, 설마 아직-!”

노크도 없이 벌컥, 방문이 열리며 바올로가 들어왔다.

그는 틀림없이 자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큰소리로 외친 바올로는 눈에 들어온 광경에 그만 말문이 또 막히고 말았다.

저택에 돌아오고 몇 번째인가 보는 바올로의 드러운 뻐끔뻐끔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작은아버지.”

안토니아가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공손하게 말했다.

안토니아를 아침부터 혼내고 하인들 앞에서 망신 줄 생각에 신났던 바올로는 겸연쩍은 얼굴로 입맛을 다시듯 쩝쩝거리며 답했다.

“그, 그래. 일찍 일어났구나.”

“네, 작은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선지 눈이 일찍 떠졌어요.”

그러곤 안토니아는 서둘러 바올로에게 말했다.

“서둘러 준비하고 제가 먼저 작은아버지를 찾아가 인사드릴 생각이었는데, 죄송해요……. 어른인 작은아버지를 번거롭게 굴고 말았어요.”

“……아, 아니다. 흠, 흠. 안토니아야.”

“네?”

바올로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아직 한창 클 나이가 아니냐,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 좋지 않아.”

그러고는 로레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너는 도대체 뭘 한 것이냐! 아가씨를 똑바로 모시지도 않고, 흥. 이래서야 집안 꼴이 알 만하구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라왔는데 누구에게도 잘난 체하지 못하는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화내지 마셔요, 작은아버지. 로레나는 제가 일찍 일어나겠다고 하여 준비를 도운 것뿐인걸요.”

“안토니아, 내 사랑스러운 조카야, 그렇게 아랫것에게 오냐오냐해선 안 되는 법이다! 어디 주인의 잠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 것에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틴에게는 스스로 말하게 했다지만, 로레나에게는 그렇게 시킬 수 없었다.

마틴에게는 솜씨란 무기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바올로가 자르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럼, 작은아버지 앞으로는 꼬박꼬박 늦잠을 자는 것이 좋을까요?”

“으, 응?”

“저는 작은아버지께서 하라고 하면 그대로 따를 거예요!”

안토니아는 최대한 간절해 보이길 바라면서 바올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표정이 없긴 해도 자신이 가슴, 아니 목에 가깝게 모은 두 손을 꼭 봐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작은아버지가 제게 시키는 것 중 나쁜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작은아버지가 없던 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바올로는 그 말에 다시 헛기침했다.

정말 고르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 하녀들을 혼낸 게 웃긴 게 되었고, 꼬박꼬박 늦잠을 자라고 하면 앞으로 아침 기습을 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바올로 세르히는 기껏 세운 자존심을 스스로 무너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흠, 흠. 그래, 성장기, 성장기지 않느냐! 이 작은아버지가 돌아왔으니 너는 마음 푹 놓고 잘 자라기만 하면 된다!”

“그럼, 꼬박꼬박 늦게까지 자라는 이야기시지요?”

“그래! 명심하거라, 안토니아. 아침 식사 시간 전까지만 일어나면 된단다.”

그 말에 안토니아는 역시 대단한 작은아버지라는 듯 손을 더 꼭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작은아버지셔요, 밀즈 부인이나 포미스 선생님은 제게 늦게 일어난다며 타박하곤 했는데…….”

“흠, 흠. 그 나쁜 것들을 굳이 왜 떠올리느냐! 내가 왔는데.”

“맞아요, 맞는 말씀이셔요! 작은아버지와 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지요! 정말 다행이에요.”

안토니아는 역겨움을 꾹 참고 바올로에게 한 걸음 다가가 말했다.

“작은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이제 쭉 저택에 계실 것이지요?”

“그, 글쎄다.”

“네……?”

안토니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충격받은 목소리로 바올로에게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구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그렇지요……, 작은아버지는 바쁜 분이고 절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실 곳이 많으시니까…….”

그 말에 바올로는 이상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간 안토니아의 지나치게 공손한 편지와 밀즈 부인이나 포미스 건으로 움튼 의심이 어쩐지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는 안토니아에게 다가가 자그마한 어깨를 툭툭 쓰다듬었다.

“너무 그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안토니아. 내 너를 보아서라도 자주 집에 있도록 할 테니 말이다.”

바올로가 자못 인자한 듯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새해를 맞아 신전에서 서둘러 돌아오며 느꼈던 막막함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안토니아만 잘 구슬리면……. 신전 일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후견인이라고 해서 백작가 재산 전부에 손대진 못했다.

안토니아가 동의하지 않으면 재산 중 절반은 누구도 손댈 수 없었으니까.

‘하필 이럴 때 정신을 차리다니.’

바올로는 여전히 표정이라곤 없는 조카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조금만 더 공을 들이면 신전에선 안토니아의 병을 치유할 수 없다고 할 참이었는데.

그래도 이토록 자신을 따르니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이 표정 없는 병이라도 이용해 조카에게 흠집 낼 생각이었으니까.

* * *

바올로는 안토니아의 방에서 무려 30분이 넘도록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좋은 귀족 영애는 어떤 것인지부터 시작해, 자신이 그간 안토니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줄줄 늘어놓았다.

‘그러니 자신에게 감사하란 듯 말이야.’

물론 안토니아도 열심히 맞장구쳐주며 바올로의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바올로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얼른 들어와, 폴리.”

“시, 심장이 떨려 죽겠어요.”

“자, 여기 차라도 마셔.”

안토니아는 자기 몫으로 우려둔 차를 폴리에게 건넸다.

평소라면 극구 사양했을 폴리도 이번에는 곧바로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켁, 켁, 에취, 에취.”

사레가 들릴 정도로 말이다. 로레나는 서둘러 폴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허어어, 고마워, 로레나. 감사해요, 아가씨.”

폴리는 크게 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진짜, 진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고생했어, 폴리.”

“이, 이거 맞지요? 아가씨가 말씀하신 거요!”

안토니아는 종이 뭉치를 서둘러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장쯤 되는 종이 뭉치에는 바올로의 필체로 어지럽게 숫자며 글씨가 적혀있었다.

“이거, 이거 너무 신기해요.”

“그러게.”

폴리는 그렇게 말하며 길쭉한 봉 같은 걸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며칠 전 루퍼스가 주고 간 물건이었다.

‘아쉽게도 증거는 직접 찾아야 해, 아가씨.’

‘직접 찾아야 한다고?’

안토니아는 정보상도 못 찾는 증거일 정도로 어려운 거냔 듯 물었다.

그때, 루퍼스가 자존심이 상한 듯 꺼낸 물건이 다름 아닌 저 기다란 봉이었다.

‘이걸 가져다 대면 종이에 옮겨 적거나 그릴 수 있는 건 뭐든지 복사가 돼.’

‘……정말?’

‘진짜야, 아가씨 드레스에 있는 자수라도 베껴볼까?’

물론 안토니아는 굳이 그걸 확인하지 않아도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회귀 전, 제대로 된 기반이 없던 루퍼스가 어떻게 자리 잡았겠는가.

그의 손에 막대한 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 정도는 정보상으로 번 돈이었으나, 절반 정도는 바로 저 기술로 번 돈이었다.

복사기뿐만이 아니라 여러 희한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는 뛰어난 마법기계 공학자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걸로 세르히 씨의 장부를 복사해.’

‘거기에 신전의 고발자가 원하는 증거가 있단 소리지.’

‘맞아! 아, 장부를 분석할 자신이 없다면 보석상으로 보내. 서비스해 줄 테니까요, 아가씨.’

루퍼스는 그러면서 선심 썼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럴 생각이라곤 없었다. 장부에 한해서는 자신이 루퍼스보다 훨씬 잘 볼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남의 편이 각종 방법으로 단련시켜줬으니까.’

덕분에 안토니아는 장부를 조작하는 많은 방법에 대해 아주 잘 익힐 수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안토니아는 오늘 아침, 바올로가 제 방에 올 거란 걸 알고 새벽부터 더 서둘렀다.

몰래 바올로 방에 들어가 장부를 복사해와야 했으니까.

‘작은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하인들을 내보내서 다행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제 편인 하인을 바올로 방의 청소 담당으로 둘 수 없었을 테고, 아침의 그 짧은 시간 동안 폴리가 장부를 복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혹시 모르니, 방에 누가 오는지 잘 살펴봐 줘.”

“맡겨만 주세요, 아가씨!”

하인들이 힘내줬으니, 남은 건 제 몫이었다.

안토니아는 서랍 속에서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가 된 주판을 꺼냈다.

회귀 전에도 잘 썼던 어머니의 물건이었다.

비록 회귀 전처럼 제 손에 길들여지진 않았으나 익숙한 감촉이었다.

촤르륵, 탁-!

감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안토니아는 서둘러 기분을 털어버리고 장부를 보려다가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아 참, 마틴한테도 비밀로 해줘야 해?”

두 사람은 몰라도 마틴은 이게 예사 솜씨가 아니라는 걸 금방 눈치챌 테니까.

그 부탁에 로레나와 폴리는 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아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장부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내 힘으로 꼭! 작은아버지를 투옥시킬 거야.’

방 안에 탁탁거리며 주판알이 이리저리 튕겨지고, 움직이는 소리와 안토니아의 빠른 메모 소리만 울렸다.

지켜보던 하녀들이 겨우겨우 감탄을 삼켰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하고 말이다.

‘아가씨는 아직 어리신데, 어떻게 저렇게 장부를 빨리 볼 수 있으신 거지…….’

‘주방장님보다도 더 잘하시는 거 같아! 우리 아가씨 진짜 대단하다!! 나중에 아가씨한테 배우면 주방장님한테 으쓱거릴 수 있겠지?’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감탄과 맹신의 빛이 떠올랐다.

안토니아만 따르면 뭐든지 다 잘 될 거라는 그런 믿음의 반짝임이었다.

* * *

“그만 포기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대공 전하.”

드비의 말에 리샤르는 조용히 읊조리듯 답했다.

“약속은 어기는 거 아니라고 배웠어.”

“아니요, 근데 그래도 12일이 그 소백작님 생일이라면서요. 오늘이 며칠인지는 아십니까?”

“1월 7일.”

“그리고 지금 저희는 황궁에 가고 있고요, 그렇지요?”

리샤르는 따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이야말로 동부로 출발할 거니까, 돌아가자마자 짐이나 잘 챙겨.”

“그 말도 벌써 사흘째입니다. 전하. 오늘 밤에 출발해도 12일에 도착하기 어렵다고요, 알고 계시지요?”

리샤르는 그 말에 드비의 발을 콱 밟았다.

“아악, 그러니까 말로, 말로 하시라니까요!”

“닥치라고 몇 번쯤 속으로 말했다.”

“입으로 말하시라고요! 전하가 다시 동부로 돌아간다고 해서 들어온 데이트 신청도 다 거절했는데 이러다 인기가 다 떨어질 겁니다.”

“애초에 거짓말로 만든 인기는 오래 안 간다. 드비.”

“네, 네, 아직도 성장기가 안 와서 관심 밖인 전하가 제가 부러워서 하시는 말, 아악!”

기어코 정강이를 얻어맞은 드비는 옆에서 꿍얼거리며 리샤르에게 불평했다.

그런 게 익숙한 리샤르는 한 귀로 흘려 넘기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늘도 자신의 이복형인 황제에게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아 보였으니까.

‘……혼자서 괜찮을까.’

제게 보냈던 편지나, 직접 보고 겪은 것만으로도 그 소녀가 꽤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계속 마음이 쓰였다.

그는 창가 너머로 보이는 황궁을 보면서도 자신보다 안토니아를 먼저 염려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 *

‘젠장!’

바올로는 제게 온 편지를 거칠게 구겨 버렸다.

‘어떻게 안 거지?’

발신지는 다름 아닌 자신이 공들이는 동부 대신전이었다.

바올로는 지난 2년간 동부 대신전의 사업을 대리하고 증축에도 관여하며 천천히 신뢰를 쌓아 왔다.

대부분은 바올로를 그래도 괜찮게 생각했으나, 일부 떨떠름하게 구는 자들이 있었다.

‘청렴한 척하는 놈들 말이야!’

신관 중 대부분이 뇌물을 받아 챙겼다. 그러나 동부 대신전의 유독 몇몇은 뇌물을 주려 해도 정색하며 거절하곤 했다.

‘젠장!’

그런 와중에 하필 신전의 돈으로 진행한 사업 중 하나에서 큰 적자를 보았다.

바올로는 신전에서 잘 신경 쓰지 않는 보물 중 몇 가지를 급히 이용해 다른 데서 자금을 융통해 썼었다.

‘안토니아만, 안토니아만 나한테 좀 협조해 줬어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쾅-!

바올로는 거칠게 탁자를 내리치며 입으로 욕을 내뱉었다.

저택에 돌아오고 열흘가량 지난 참이었다.

분명, 초반 며칠만 해도 바올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었다.

조카는 온순하게만 보였고 예전에는 저를 무시하거나 벌레 보듯 보던 하인들도 고분고분하게 받들어 줬으니까.

솔직히 말해 열흘이 지난 지금도 그 태도가 바뀐 건 아니었다.

문제는…….

‘뭐에 홀린 것도 아니고, 도대체 대화만 하면 왜 안토니아에게 아무것도 못 얻어내냔 말이야!’

조카는 여전히 순진하고 멍청하게 저를 생각하며 말할 뿐이었는데, 이상하게 쉽게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당장 이틀 전, 정말로 급해져서 사업에 관해 말했을 때도 정작 자신의 약점만 찔리지 않았던가.

* * *

“이게 무엇인가요, 작은아버지?”

바올로가 안토니아를 찾았을 때, 아이는 얌전하게도 제 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었다.

자주 연습을 한 것인지 꽤 빼어난 솜씨라 흡족했다.

‘그렇지, 이렇게 얌전한 취미나 가지고 있어야 내가 편하지.’

많이 배우지 못하고 자신의 말만 들어야 딱 멍청하고 약하게 자라 줄 테니까.

그럼 적당히 재산만 많거나 이름뿐인 귀족에게 팔아치우듯 시집보내기도 편할 것이다.

그랬기에 바올로는 제 조카가 간단하게 자신이 내민 서류에 서명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름이 아니라 세르히 백작가가 가지고 있는 상단의 매각 계약서였다.

“상단의 매각 계약서란다.”

“매각 계약서요?”

안토니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래, 이 작은아버지가 알아보니 이 상단이 아주 질이 나쁘더구나.”

바올로는 당당하게 그간 조작된 상단 장부를 가지고 왔다.

이 상단은 바올로가 손댈 수 없는 절반의 재산 중 하나로 선대 백작 부부가 신임할 수 있는 상인을 책임자로 둔 곳이었다.

당연히 꼬박꼬박 깔끔하게 자금을 운영하고 있었고.

‘앞으로 계속 두면 돈을 제법 벌어 오겠지만…….’

신전에서 구멍 난 금액을 메우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내가 크게 한탕 해서 새로운 상단을 만들면 돼! 신전과 관계가 좋아지면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될 테고.’

앞으로 자신의 것이 될 세르히 백작가였다. 바올로도 무턱대고 일을 진행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안토니아는 뭘 알기라도 하는 건지 자신이 내민 장부며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걱정 말거라, 안토니아. 이 작은아버지가 꼼꼼하게 확인했단다.”

“그럼요, 믿어요. 작은아버지. 그런데…….”

“그런데?”

바올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상단을 판다니 혹시라도 제게 반항이라도 하려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조카가 한 것은 예상 외의 행동이었다.

“흠, 흠.”

“갑자기 왜 종이 냄새는 맡고 그러느냐?”

“시트러스 향이 나서요.”

“시트러스 향?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이냐, 겨울이니 그런 과일은 저택 어디서든 볼 수 있지 않으냐.”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안토니아는 주변을 둘러보다 곁에 피워둔 향초를 들어 올렸다.

“포, 포미스 선생님은……. 나쁜 분이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안토니아의 목소리에 두려움의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꾹 참는 듯 향초를 계약서 아래에 조심스레 대었다.

“지금 뭐하는 것이냐! 서류를 태우려 하다니!”

바올로는 서둘러 계약서를 낚아챘다.

“태우려 한 게 아니에요……! 종이 위를 보셔요!”

그 말에 바올로는 흠칫하며 계약서를 보았다. 안토니아가 초를 가져다 댄 부분 위로 숨겨졌던 글씨가 드러났다.

“포미스 선생님이 알려 주셨거든요, 편지를 보낼 때 이런 식으로 숨겨서 말을 쓸 수도 있고……. 가끔 나쁜 사람은 이런 장난을 치기도 한다고요.”

‘포미스, 그 개자식!’

바올로는 속으로 욕을 했다. 하필 그걸 안토니아에게 가르쳐줄 게 무엇이란 말인가.

‘꺼진 뒤에도 나한테 도움이라곤 안 되는 놈이군.’

신전과 연결해 준 건 괜찮았는데 말이다. 바올로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 불쾌한 기분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 그렇구나.”

안토니아에게 이 사실을 얼버무려야만 했으니까.

아무리 멍청한 제 조카라고 해도 자신이 이렇게 화들짝 놀라 반응했으니, 제가 꾸민 거라고 의심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버무릴 말을 찾기도 전에.

“작은아버지와 계약하기로 한 사람들이 나쁜가 봐요!”

“응……?”

“작은아버지를 속이려고 했잖아요, 그렇지요?”

“맞다! 안토니아, 네 말대로란다!”

“정말로 작은아버지 말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봐요, 작은아버지까지 이렇게 속이려 들다니…….”

안토니아는 마치 세상이 너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안토니아. 작은아버지도 앞으로 더 신경 쓰마. 너만큼은 꼭 지켜 줄 테니까.”

“……감사해요, 작은아버지. 제가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무슨 소리야! 지금도 쓸데없는 걸 알아서 도움이 안 되는데.’

바올로는 진심으로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으나 이미 시작해 버린 ‘좋은 작은아버지’ 역할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괜찮다, 안토니아. 너는 아직 어리잖니.”

“감사해요……. 아!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내가?”

“실은 포미스 선생님이 있을 때 작은아버지께 보내는 편지에 아주 짧게 얼른 돌아와 달라고 썼었거든요. 간절하게…….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숨긴 글씨를 보지 못하시니…….”

안토니아는 괜히 작은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줄 알고 서운해했다며 말했다.

바올로는 어쩐지 자신이 무시당하는 기분에 떨떠름하면서도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포미스 그 사기꾼 같은 녀석이 아는 수법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니.”

“맞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나쁜 사람이 쓴 계약서도 못 알아보신 거지요.”

안토니아는 모두 이해한다는 듯 자못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바올로는 정말로 엿 같은 기분을 느꼈으나 무엇에 화를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심지어 돌아와 확인하니 안토니아의 말대로 예전에 보냈던 편지에는 숨겨진 글씨가 있었다.

돌아와 달라거나, 도와달라는 간절하고 짤막한 문구가 말이다.

생각해 보면 편지에서는 늘 부드러운 꽃향기와 함께 새콤한 냄새가 섞여 나곤 했다.

‘그냥 향수 냄새거나 일부러 배이게 한 향인 줄 알았지!’

안토니아는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지엔 늘 여러 향을 담아 보내곤 했으니까.

그것도 그저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라며 웃어넘겼는데.

‘젠장, 좀 더 확실하게 말할 것이지!’

이때 미리 알아차렸다면 포미스의 덜미를 자신이 잡아 그를 쫓는 귀족 가문에라도 넘기고 포상금을 받았을 텐데.

바올로는 아쉬움에 발을 쾅쾅 굴렀다. 정말로 고작 12살, 아니 13살짜리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게 어찌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바올로는 다시 편지를 확인했다.

내용은 간략했다.

[신전의 보물을 팔아치운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르히 씨, 일주일 안에 돌아와 해명하지 않으면 당신을 고발할 겁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관의 고발은 나라에서도 중요하고 빠르게 해결해 주곤 했으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내가 위장해서 벌인 일까지 들킬지도 몰라!’

다른 건 몰라도 수도에 있는 트라체스 대공이 눈치채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갈등하던 바올로는 결심했다.

‘……그래, 차라리 신전을 한 번 더 속이면 될 일이야!’

사실 바올로가 택한 방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들킬 확률도 있는 데다, 지금 그저 얌전히 자수하면 3~4년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신물도 아니고 보물 몇 가지를 팔아치운 거였으니까.

그러나 또 한 번 속이려다 들키면 괘씸죄로 형이 더 커질 것이다.

그럼에도.

‘시도해 보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

신전의 재촉에 마음이 급해진 바올로는 서둘러 위조 계약서를 써 내려갔다.

* * *

“안토니아, 걱정하지 말거라! 이 작은아버지가 금방 돌아올 테니까.”

“정말이시지요……?”

“그래, 정말이란다! 하지만…….”

바올로는 조금 고민이 된다는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토니아는 서둘러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무엇인가요?”

“만약 이 작은아버지가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동부 대신전으로 와 주겠니?”

잠시 안토니아가 머뭇거렸다. 바올로는 그 모습에 초조해졌다.

‘냉큼 오겠다고 답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만약의 경우 자신이 신전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면 안토니아라도 와야 달아날 여지가 있었으니까.

“제가, 제가 가도 괜찮은가요?”

“그럼, 당연하지!”

“작은아버지가 그동안 제게 외출을 삼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그 말을 어기고 포미스 선생님과 외출했다가 그런 일이 있어서…….”

바올로는 그 말에 이 어리고 약한 조카의 마음을 단번에 이해했다.

“괜찮단다, 안토니아!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어떻게요?”

안토니아의 말투는 여전히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다는 듯 순진하기만 했다.

“백작가에도 기사단이 있지 않으니, 마침 그들이 맡은 임무가 다 끝났다고 들었단다.”

“아…….”

“그러니 그들을 백작령으로 다시 부르는 게 좋겠구나, 그럼 신전으로 올 때 호위로 그들을 세울 수 있으니 너도 덜 무섭고 좋지 않겠니.”

“작은아버지, 괜찮으셔요? 기사단에 들어가는 돈이 많아 임무라도 맡겨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괜찮다! 이 작은아버지가 지난 2년간 열심히 해서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바올로는 어깨를 쭉 펴며 이야기했다. 사실 기본적으로 세르히 백작령은 넉넉한 편이라 기사단 운영쯤이야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애초에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감사해요, 작은아버지. 이렇게 늘 저를 생각해 주시는데……. 저는 해 드릴 것도 없고…….”

“아니야, 아니란다. 안토니아야. 나는 너 같은 조카가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든든하단다.”

“감사해요, 정말로……. 그럼, 그럼 일주일 뒤에 꼭 갈게요!”

바올로는 그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작은아버지도 그 전에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마.”

바올로는 그렇게 말하고 세르히 백작저를 황급히 나갔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안토니아는 진심으로 기꺼워했다.

‘고마운 생일 선물이에요, 작은아버지.’

지난 2주간 손가락 끝에 멍이 들도록 주판을 만지고 눈 아프게 장부와 씨름한 보람이 있었다.

기사단도 무사히 백작령으로 귀환시킬 수 있었으니까.

1월 12일, 안토니아의 생일날 아침이었다.

* * *

바올로가 저택을 나선 뒤, 백작저 하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주가량 솔직히 말해 굉장히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으니까.

폴리는 안토니아의 머리를 빗으며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바올로 님이 눈치를 줘서 저희는 매일 딱딱한 빵 조금에 건더기 적은 수프, 저렴한 채소와 과일을 소스도 없이 먹어야 했거든요!”

“……정말?”

자신에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기에 안토니아는 경악하며 폴리에게 되물었다.

“진짜예요! 주방장님이 그나마 처음 며칠은 남은 식재료로 챙겨 주셨는데, 아가씨와 바올로 님이 드실 게 아니면 왜 구입했냐고 장부를 보며 하나하나 따지시잖아요.”

“작은아버지도 정말 대단하네…….”

“자, 다 됐어요. 아가씨 얼른 식당으로 내려가셔요!”

“으, 응?”

안토니아는 의아한 말투로 폴리에게 말했다. 좀 더 작은아버지의 악행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더 다양한데.’

청소 담당 하인에게 매일같이 시트가 평소와 똑같지 않고 아주 조금 흐트러졌다고 야단을 떠는 건 예사였다.

복도며 계단이 모두 반질반질하게 윤이 흐르도록 깨끗하면.

‘지금 내가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라도 바라는 건가?!’

이런 식으로 화를 냈고, 그래서 깨끗은 하되 덜 미끄러지도록 마무리를 해 놓으면.

‘어디 백작저 하인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혹시라도 손님이 방문하면 우리 백작저의 품위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이렇게 매일같이 달라진 감상을 주었다. 윤은 나되, 자신에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광택이어야 하고 걸음을 옮길 때는 어떻게 걸어도 ‘절대’ 미끄러질 일 없는 복도여야 한다니.

퍽퍽하게 마른 흙길에서도 아차 하면 넘어질 수 있는 법이었는데 말이다.

‘그냥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이 정도였으니, 다른 건 더 했을 텐데.’

그런 데도 다른 하인들도 그저 바올로가 떠났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 안토니아에게 하소연을 마구 쏟아내지는 않았다.

안토니아는 그 배려를 염려하며 폴리에게 끌려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게 다 뭐야?”

안토니아는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무엇이긴요, 아가씨의 생일이니 제가 힘을 좀 써 보았답니다!”

마틴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했다. 그녀는 얼른 앉으라는 듯 안토니아를 재촉했다.

‘어쩐지, 폴리가 옷을 갈아입자고 조르더니.’

덕분에 바올로가 나간 뒤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일어나 앉아야 했으니까.

심지어 왜 갑자기 그러냐고 묻지도 못하게 바올로의 쩨쩨함을 마구 쏟아내는 건 덤이었고.

어안이 벙벙해 식당을 둘러보던 안토니아는 폴리의 재촉과 마틴의 기대 섞인 눈빛에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바올로가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식탁 풍경이었다.

“너무 예뻐, 마틴. 어떻게 이렇게 음식만 가지고 예쁘게 만들 수 있는 거야?”

생일상이라 더 신경을 쓴 건지 아니면 바올로가 없어져서 신이 난 건지 음식의 배치나 곁들인 장식도 상상 이상이었다.

‘회귀 전에 황실에서 봤던 것보다 더 예쁜 것 같아.’

역시 마틴은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울 하인이었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손댔다가 이 예쁜 게 무너지는 게 아쉬운걸.”

“그래서야 되나요, 매년 생일마다 기대가 되시도록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 맛있게 드셔 주셔요!”

마틴은 뿌듯한 얼굴로 안토니아의 손에 포크와 스푼을 쥐여 주었다.

“아무리 예뻐도 드셨으면 해서 만든 음식인데, 눈으로만 감상해서야 제가 아쉽지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조심스레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뽀얗고 매끄러운 표면에 눈꽃처럼 뿌려진 밤 가루가 예뻤다.

입 안에 수프를 넣은 순간 안토니아는 절로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밤을 베이스로 만든 수프는 담백한데 맛이 아주 깊게 느껴졌다. 은은하게 단 밤의 맛이 입맛을 돋우는 건 덤이었고.

“그런 감상을 듣지 못한다면 아가씨의 주방장을 할 자격이 없지요.”

마틴의 말에 안토니아는 기분이 묘해졌다. 자신의 주방장.

회귀 전에는 영영 갖지 못했던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안토니아는 스푼을 꼭 쥐고 밤으로 만든 수프를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것 외에도 준비한 음식들을 하나하나 입에 넣을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하나같이 맛이 과하지 않은데 깊고 진했다.

‘담백한데 진하단 느낌이라니, 너무 신기해.’

전 남의 편이 데려온 주방장도 실력으로는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고마워, 마틴.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

감동한 듯 말하는 안토니아에 폴리가 다급한 얼굴을 했다.

“앗!”

“왜 그래, 폴리?”

“저도 아가씨 선물을 준비했는데, 벌써 최고의 생일 선물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셔요.”

폴리의 동글동글한 얼굴 위로 눈썹이 아래로 직선을 그리며 축 처졌다.

그 모습에 안토니아는 재밌다는 말투로 폴리를 놀리듯 이야기했다.

“왜 안 돼? 폴리는 폴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일 텐데!”

그 말에 폴리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폈다. 그 솔직한 반응에 식당 안에 웃음이 쏟아졌다.

안토니아는 그 행복한 광경 속에서 기뻐하는 한편, 일주일 뒤를 머릿속으로 대비하며 그렸다.

* * *

“폴리는 먼저 잠들었어?”

안토니아의 물음에 로레나가 조심히 방문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아가씨 시중을 혼자 드느라 분주했으니까요.”

“그렇겠지.”

로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에게 한 통의 봉투와 자그마한 상자도 함께 건넸다.

“이건?”

“저만 빼놓고 받으실 생각이셨어요? 아가씨 생일인데.”

로레나의 말에 안토니아는 봉투보다도 빨리 그녀의 선물부터 열었다.

“연고? 크림?”

“주판이며 펜을 쓰시느라 아가씨 손에 멍이 들었잖아요, 그게 좀 신경이 쓰여서.”

로레나답게 배려심이 묻어나는 선물이었다.

안토니아는 얼른 멍이 든 자리에 크림을 조금씩 펴 발랐다.

“시원해.”

“……부끄럽지만 나간 김에 크롬프트 씨에게도 도움을 받았어요.”

“정말?”

안토니아는 그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나중에 대단한 정보상이 되는 루퍼스 크롬프트에게 멍에 좋은 연고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하다니.

“분명 표정이 복잡해졌겠는걸.”

“맞아요, 아, 그래도 아가씨 생일이라고 했더니 자기가 도와줬다는 걸 꼭 이야기하라면서 들어주더라고요.”

“그게 내 생일 선물 대신인 셈이래?”

“아, 생일 선물은 거기에 보너스로 챙겨 넣었대요.”

“보너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서둘러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안토니아가 부탁한 신전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대신관이나 현재 신전에 머무르는 상급 신관들의 성격이나 약점도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색의 편지지를 쓴 곳에는 의외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회귀 전에 숲이 없어졌던 이유를, 이런 데서 실마리를 잡을 줄이야.’

대단한 생일 선물이었다.

편지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편지를 다 본 뒤,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로레나는 안토니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깨가 평소보다 조금 더 아래로 늘어트려졌으니까.

그러나 그 걱정에도 안토니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로레나도 오늘 마을까지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거 아니야.”

“저는 괜찮아요, 조금 더.”

“아니야, 나도 일찍 잘래. 작은아버지를 마중하느라 피곤해.”

그렇게 말하며 로레나를 내보낸 것과 달리, 안토니아는 바깥이 완전히 고요해질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마하니, 바올로를 찾다 예전 제 삶에 어깃장을 놓은 또 다른 자를 함께 알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루퍼스가 보낸 내용 중, 동부 대신전에서 세르히 백작령에서 마물이 나타났다는 걸 눈치챘단 내용이 있었다.

마물의 출현을 신전이 알아차리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원래 신전이 해야 할 일이니까.’

주기적으로 관할지역을 돌아보며 정화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북부나 서부야 워낙 마물의 힘이 강해 정화를 해도 해도 나온다지만, 동부는 수도나 남부 다음으로 주신의 힘이 강한 지역이었다.

당연히 마물이 나왔다는 게 수도 중앙신전에 알려졌다가는 크게 질책당할 일이었다.

‘특히 대신관은 책임을 피하기 어렵겠지.’

그래서 예전 삶에서 바올로를 시켜 아예 증거 인멸을 해 버린 걸지도 몰랐다.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회귀 전, 숲이 없어진 건 지금보다 좀 더 뒤의 일이었기에 이게 이런 식으로 튀어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리샤르가 마물을 확실히 없앴다고 말했으니까.

‘회귀해서 내가 달라지고, 상황을 바꿔도 나쁜 짓 하는 자들은 정말 바뀌질 않는구나.’

회귀 전보다 신전이 더 빨리 눈치챈 게 의외였지만.

안토니아는 자신의 손을 꼭 쥐었다. 손안에서 일렁거리며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듯했다.

복잡한 마음에 안토니아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고자 눈을 꼭 감았다.

그때.

톡, 토톡, 톡, 톡.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아는 화들짝 놀라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얀 달빛 아래, 푸른빛과 보랏빛 깃털이 섞인 새가 창을 열어 달라는 듯 창을 톡톡 두드렸다.

너무 작고 아름다운 새였다.

안토니아는 무섭다거나 신기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맨발로 달려가 창을 열었다.

새는 기다렸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포르르 날아와 빙그르르 춤을 췄다.

“새야, 무슨 일이니?”

작은 새는 포롱포롱 노래하며 안토니아의 앞에서 날갯짓을 했다.

새의 다리에 자그마한 상자와 편지가 걸려 있었다.

“어머…….”

이런 걸 자신에게 보낼 사람이 없는데.

동그랗게 말린 편지 옆면에는 ‘리샤르’라고 적혀 있었다.

“리샤르……?”

안토니아는 뜻밖의 발신인에 놀라 서둘러 편지를 펴 보았다.

요 작은 새에게 보내야 해서 그런지 내용은 짤막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안토니아.

나와 달리 예쁘고 귀여운 새를 대신 보내.

생일 축하해.

추신. 부디 선물도 마음에 들길 바라. 드비 경이 날 놀렸거든.]

‘리샤르도 아주 예쁜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안토니아는 서둘러 자그마한 상자를 열었다.

그 내용물에.

“풋.”

입꼬리는 그저 움찔거렸을 뿐이지만,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상자 속에 있던 건 브로치였다. 그것도 크리스탈을 탄환 모양으로 깎아 제법 예쁘게 만든 브로치.

‘드비 경은 어른일 테니까…….’

틀림없이 놀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13살 귀족 아가씨 선물로 탄환 브로치를 선물하는 건 보통은 센스 없단 소리를 들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마음에 들어, 리샤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리샤르가 총을 가르쳐 준 것도 그런 의미였으니까.

안토니아는 잠시 자그마한 새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날아온 걸까.’

어디서 왔건 간에 꽤 힘들었을 것이다.

안토니아는 서둘러 물과 빵 조금을 찢어 준 다음, 비슷한 크기의 편지지를 찾았다.

“한 번만 더 수고해 주렴, 작은 새야.”

선물을 받았는데,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 리샤르.

드비 경이 나도 놀릴 것 같지만, 난 꼭 마음에 들어.

무사히 의뢰를 마치고 한 번쯤 얼굴을 비추길 바랄게.]

안토니아는 종이를 말아 다시 새에게 끼워 줬다.

담아 준 물을 반쯤 마신 새는 포롱포롱 울며 안토니아 곁을 한 번 더 춤추더니 금세 창밖으로 날아갔다.

‘리샤르는 겨울까지만 여기서 지낸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이번 의뢰가 길어지면 그대로 떠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정말로 생일을 챙겨 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아니, 이건 반은 거짓말이었다.

혹시 몰라 폴리와 로레나에게 종종 오두막에 사람이 돌아왔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으니까.

처음으로 친구에게 받은 생일 선물에 무척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루퍼스의 정보에 심란했던 마음이 단숨에 날아갔다.

* * *

“헐, 말도 안 돼. 진짜 마음에 든다고 했다고요? 저한테 거짓말 하시는 거지요?”

드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리샤르에게 편지를 보여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물론 리샤르는 그 손을 가뿐히 내쳐 버렸고.

수도에서 꼬박 3주를 꽉 채워 잡혀 있던 리샤르와 드비는 드디어 동부로 발을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야.”

리샤르가 탄 말 머리 위에서 포롱포롱 노래하던 새는 손짓 한 번에 스르륵 리샤르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허, 참. 그 아가씨도 이상하네요. 탄환 모양 브로치라니, 어디 하고 나갈 곳도 없을 텐데.”

“말에 거꾸로 매달려 가고 싶기라도 해, 드비?”

“아니요, 아니요. 잘못했습니다. 대공 전하.”

드비는 금세 똑바로 자세를 바로 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대륙 동부, 세르히 백작령이 아니었다.

“백작령에 가서 바로 그 소백작님부터 뵐 줄 알았더니.”

“대신전 쪽으로 가는 게 나아, 백작령으로 갔다간 엇갈릴 거야.”

원래는 안토니아의 생일 전에 가서 은근히 이것저것 힌트를 흘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힌트 없이도 잘도 알아낸 데다, 그 사기꾼까지 잘도 내쫓았을 줄이야.’

이것도 기대 이상이었다.

리샤르는 안토니아를 돕고자 직접 바올로를 고발하는 것 대신, 신전에 마물 출현에 대한 압박을 넣었다.

물론 그 와중에 대신관과 의견이 다른 상급 신관 쪽으로 바올로의 비리 정보도 은근슬쩍 흘렸고.

‘다만 증거를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아서 더 걱정한 거였는데.’

그 어린 아가씨는 무슨 수를 쓴 건지, 훌륭하게 바올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대신관 쪽은……. 내가 손을 써야겠지.’

애초에 안토니아가 손 쓸 이유가 있는 자도 아닐 테니까.

리샤르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드비에게 말했다.

“신전에 얼굴을 비추는 건 네가 해, 드비.”

“네? 제가요?”

“네가 잘하는 거 있잖아. 무게 잡고 트라체스 대공 이름 내세워서 압박 주는 거.”

“헐, 언제 제가 그런 쓰레기 짓을 했다고!”

“내가 쓰레기 짓 시키는 거니까 해.”

“넵, 알겠습니다. 전하의 악명을 더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요.”

그 말에 드비는 바로 옆에서 날아오는 마법탄을 피해야만 했다.

동부 대신전까지, 사흘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 * *

1월의 중순, 동부 대신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저 겉에서 보면 말이다.

바올로 세르히는 동부 대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대신관을 찾아 넙죽 엎드려야 했다.

‘일주일은 기다려 준다고 하더니!’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신관은 짜증 나게도 그새 대신관에게 고발한 모양이었다.

대신관은 평소보다도 더 거만한 얼굴로 마치 황제처럼 의자에 앉아 바올로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실망입니다. 세르히 씨, 당신을 믿고 그간 많은 일을 맡겼는데.”

“대신관님, 오해, 오해이십니다.”

“오해라고요, 흐음. 주신께 맹세코 말입니까?”

주신의 말에 바올로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냐, 지금은 거짓이어도 어떻게든 안토니아를 구슬리면 사실이 되는 거잖아.’

바올로는 달달 떨리는 몸을 애써 숨기며 급히 준비한 위조 계약서를 대신관에게 넘겼다.

“제가, 제가 손해를 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두 방법이 있어 그런 겁니다! 이걸 봐 주십시오.”

안토니아가 동의를 해야 빼낼 수 있는 재산의 사용 허가서였다.

어마어마한 액수이니 대신관도 보면 틀림없이 눈이 돌아갈 거란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팔아치운 보석쯤이야 간단하게 되찾아올 수 있었고 말이다.

실제로 처음에는 떨떠름해하던 대신관도 내용을 보더니 점차 표정이 누그러졌다.

‘됐다, 이제 괜찮아!’

나머지는 다시 백작저에 돌아가 어떻게든 안토니아를 구슬리면 됐다.

다른 건 몰라도 후계자 인장은 안토니아 본인이 아니면 찍을 수가 없었으니까.

‘괜찮아, 내 말이면 껌뻑 죽는걸.’

그러나.

“대신관님, 잘 보십시오.”

“무엇을 말인가.”

“보통 작위 보유자나, 후계자가 쓰는 인장 색과 묘하게 다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세르히 백작가의 문장의 각도와도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대신관의 곁에 있던 신관 하나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바올로는 그 말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다 된 일에 저 신관이 뭐라고 지금 재를 뿌리냔 말이다!

단번에 대신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기존 세르히 백작가의 인장이 찍힌 다른 문서를 가져오도록 해 확인하더니 바올로를 향해 소리쳤다.

“감히, 감히……! 지금 주신의 앞에서 거짓을 말했단 말이오!!”

말은 어떻게든 대신관의 품위를 지켰다지만, 눈은 바올로를 향해 쌍욕을 내뱉고 있었다.

“어떻게, 내 신뢰를……! 주신께 바치는 신성한 맹세를……! 파문감이라는 걸 아시오, 바올로 세르히!”

대신관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그는 실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소리쳤다.

“……그, 그게……. 제 조카, 조카가 바빠서 못 찍은 거지 알면 분명, 분명히…….”

“변명하지 마시오! 그럼 왜 세르히 백작저에서 돌아오며 동의서를 못 받아왔단 말이오! 난 못 믿겠습니다. 세르히 씨.”

바올로는 몸이 달달 떨리는 걸 느꼈다.

다 저 같잖은 상급신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자신의 일에 어깃장을 놓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무리 그가 분해한들, 이미 물은 엎어진 뒤였다.

대신관은 대로하여 외쳤다.

“당장 바올로 세르히를 감금하게! 일주일 뒤 종교재판을 열 것이니!”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기, 기다려 주십시오! 제게, 제게 시간을……! 대신관님!!”

그러나 바올로가 아무리 소리쳐도 대신관은 고개를 홱 돌린 채 보지 않았다.

바올로는 꼼짝없이 붙잡혀 사지를 버둥버둥거리며 끌려가야만 했다.

* * *

세르히 백작저에 두 가지가 찾아왔다.

하나는 바올로가 자신의 구명을 바란다며 절절하게 애원하는 편지였다.

나머지 하나는 바올로의 편지와 달리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안토니아는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달리듯 걸으며 소리쳤다.

“라미나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2년씩이나 밖으로 돌던 세르히 백작가 기사단이 돌아왔으니까.

“고생 많았지.”

“아니요, 고생이라니요. 마땅히 할 임무를 한 것뿐입니다.”

듬직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안토니아는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회귀 전에도 고생만 하다 백작가를 떠나야만 했는데.’

아니, 정확히는 안토니아가 떠나보낸 거였다.

남의 편이 데려온 기사단과 알력 싸움으로 백작가 기사들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자신 때문에 꾹 참는 모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제 계속 곁에 있게 할 거야.”

라미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께 도움이 된다면 어디에라도 갈 수 있습니다.”

“라미나 경도 참, 아. 하지만 미안하게도 정말로 어디 가긴 해야 해.”

“어디입니까?”

라미나는 어떤 임무라도 자신 있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녀를 따르는 다른 기사들도 오래 밖으로만 돌아 지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말이다.

“동부 대신전. 내일 바로 출발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바깥도 아니고 저택에서 하루를 푹 쉴 수 있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안토니아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백작가에는 다들 좋은 사람들 뿐이었다.

‘부모님이 남겨 준 내 사람들인데.’

회귀 전에는 주변에 휘둘려 모두 떠나보내야만 했다니, 다시 생각해도 모두 아깝게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난 내게 어깃장 놓은 것들은 다 치워 버릴 거야.’

* * *

사흘 뒤, 안토니아는 동부 대신전에 도착했다.

바올로가 떠난 지 딱 열하루째가 되는 날이었다.

세르히 백작 영애의 방문 소식에 당연히 동부 대신전은 그리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동부의 큰 귀족 가문의 후계자는 후계자.

안토니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상급신관 몇과 대신관이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동부 대신전을 방문한 걸 환영합니다. 세르히 백작 영애.”

“처음 뵙겠습니다. 대신관님.”

얼핏 평범하고 의례적 인삿말 속에서 냉랭한 기운이 오갔다.

대신관은 안토니아가 바올로를 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안토니아는 그가 예전 삶, 제 인생에 상당하게 나쁜 쪽으로 관여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어.’

바보처럼 왜 몰랐을까.

안토니아는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저택에서였다.

바로 바올로가 데려와 안토니아의 회복 불가를 선언한 게 저 대신관이었다.

‘그래, 당연히 연관되었겠지.’

그리고 그가 대신관이 아니라 다른 직급일 때도 본 적이 있었다.

‘숲을 밀어 버리라고 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상급신관들이 모인 이 앞에서 그의 악행이나 비리를 줄줄 읊어 버리고 싶었다.

귀족가의 하인 중 몇도 와 있는 것 같으니, 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잠깐 속만 시원하겠지.’

그래서는 대신관을 확실하게 치워 버릴 수 없었다. 손을 쓸 거면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안토니아는 우선, 바올로의 앞에서처럼 순진하고 착한 귀족 영애로 가장하기로 했다.

대신관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순진하게 움직여야 그가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당장 경계를 사 신전에서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면 그게 더 손해였다.

바올로는 여기까지는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자신을 구해 달라고 한 거겠지만.

“매번 영지 내에 있는 신전만 방문해 보아, 이렇게 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안토니아는 대신전의 건물을 한 번 둘러보며 감탄하는 척했다.

사실 그녀는 수도 중앙신전도 본 적이 있어 이런 규모에 놀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대신관님을 뵙는 것도 처음에요. 제가 잘못한 게 생겨 주신께 미움이라도 받게 되면 어떻게 하지요?”

어린아이답게 대신관의 위엄에 놀라는 척하자, 대신관의 입매가 좀 누그러졌다.

“걱정 마십시오, 백작 영애가 제게 무리한 부탁을 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역시 대신관은 대신관이었다. 괜히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게 아니었다.

‘단번에 작은아버지를 용서해 달라 억지 부리지 말라고 선 그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알 바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사교계 회화에 익숙한 스물여덟 안토니아 세르히 백작이 아니라, 갓 열세 살이 된 어리숙한 백작 영애였으니까.

무엇보다 여기서는 바올로를 구해달라고 소리쳐 봐야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바올로가 자신에게 구명 편지를 보냈다는 걸 알아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그냥 작은아버지를 가두기만 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이 대신관에게도 볼 일이 생겼지 않은가.

안토니아는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작은아버지가 너무 안 돌아오셔서 무서워서 찾아온 것뿐이에요. 설마 이런 걸로 주신이 절 미워하시진 않겠죠?”

어린아이는 눈치 없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법이었다.

대신관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확연히 드러나는 불편한 심기에 안토니아는 놀란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대신관님.”

“……뭐가 말입니까?”

“작은아버지가 당부하셨거든요, 어린아이처럼 찾아오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런데, 흑…….”

“여, 영애?”

안토니아는 그대로 양손에 고개를 묻고 훌쩍였다.

“저는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작은아버지가 잠깐, 흑. 오셨다 가셨는데……. 금방, 온다고 하셨는데. 흑.”

안토니아는 본격적으로 우는 척을 했다. 굳이 크게 울 필요도 없었다.

‘도라가 이런 건 하도 잘해서.’

요령을 익히기에 좋았다. 그저 울음을 참는 척 숨을 참으며 몸만 들썩여도 대부분은 정말로 운다고 착각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것도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아가씨, 울지 마세요.”

“맞아요, 자애로운 대신관님이 이런 일로 아가씨를 혼내실 리가 없잖아요.”

폴리와 로레나도 서둘러 안토니아를 다독거리며 그녀를 대신관의 눈에서 슬쩍 가려 주었다.

안토니아는 재빨리 안약을 흘려 넣은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럼요, 한 번 물어보세요.”

“대신관님, 정말로 화 안 내실 거예요?”

타이밍 좋게도 딱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대신관은 그 모습에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세르히 백작 영애,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대신관씩이나 되는 제가 화를 낼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러지 말고 얼른 들어오십시오.”

“작은아버지를 뵐 수 있어요?”

“네, 뵙게 해 드리지요, 우선은 맛있는 과자와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아니, 따뜻한 우유가 좋을까요.”

어린아이의 눈물에 대신관은 서둘러 달래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이래저래 모양새가 너무 좋지 않았다.

마치 그가 친척이 보고 싶다 우는 어린아이를 박대한 것 같지 않은가.

심지어 안토니아는 또래보다 체구가 작아 더 안쓰러워 보였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큰 실랑이 없이 신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 * *

동부 대신전은 세워진 지 제법 오래되었으나 신관들이 열심히 관리하여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신전은 안토니아 일행에게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 방을 내어주었다.

안토니아의 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응접실과 욕실이 갖춰져 있어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시중하녀 두 사람도 바로 옆방으로 붙여 주었고 말이다.

안토니아는 로레나가 내어준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당장은 대신관보다 작은아버지가 먼저야.’

한번에 두 사람을 묶어 처리하려다가 둘 다 어정쩡해질 수도 있었다.

우선은 바올로의 재판을 끝내고, 그다음 차근차근 대신관을 파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안토니아는 조급함을 누르며 로레나에게 말했다.

“로레나, 신전에 익숙하다고 그랬지.”

“백작저에 오기 전에 일했으니까요. 이렇게 큰 신전은 아니었지만요.”

“그럼 신전에 머무는 동안 다른 신관들과 친분을 좀 쌓아 두면 좋겠는데.”

“알겠어요, 아가씨.”

“이유는 안 물어봐?”

안토니아의 말에 로레나는 왜 그런 게 필요하냐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아가씨, 아가씨. 저도요! 저도 친해지는 건 자신 있어요!”

폴리도 손을 번쩍 들고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는 그 든든함에 웃었다.

우선은 신전 동향을 직접 확인하며 바올로의 재판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바올로의 투옥은 사실상 확정이라지만 마음 푹 놓다가 뒤통수를 맞는 법이었다.

안토니아는 품속에 넣어 둔 리카르도의 총을 조심스레 쥐었다.

‘절대 끝까지, 마음 놓지 말자.’

안토니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려면.

“작은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어.”

바올로가 대신관과 거래할 여지도 확 잘라 버려야 했다.

[다음 권에 계속.]

#4-(2).

“작은아버지!”

“안토니아야, 내 조카. 어찌 이제야 오느냐!”

안토니아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생각보다도 신전에서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바올로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자신들의 안내를 담당한 신관은 대번에 떨떠름해했다.

그는 넌지시 충고하듯 안토니아에게 말을 건넸다.

‘대신관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백작 영애께는 안된 말씀이지만, 뭔가 하려고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냥 작은아버지가 괜찮으신지, 그것만 알고 싶은 거예요……. 전 작은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걸요.’

그 말에 신관의 기색이 좀 누그러졌다.

그는 안토니아에게 좀 기다리라고 한 다음 대신관의 허가를 받아다 주었다.

‘대신관님께 감사하세요, 원래는 안 되는 일입니다만……. 백작 영애께서 너무 어리고 안돼서 눈 감아 주시는 거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신관님!’

안토니아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신관에게 감사를 표한 다음, 로레나에게 고급 차를 가져다주라고 했다.

뇌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사의 의미라는 걸 강조하도록 해서 말이다.

신관인 이상 공식적인 후원금이 아닌 개인적인 선물을 받는 건 영 찝찝할 테니까.

실제로 신관은 몇 번이나 거절하다 로레나가 잘 말해 겨우 받아줬다고 했다.

아무튼 대신관이 대로했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당장 지금 이 방만 봐도 말이다.

바올로는 신전 내 지하 객실에 반 감금되어 있었다.

안토니아가 안내받은 방과는 달리 햇빛도 거의 들지 않고 겨울임에도 축축해 습한 냄새가 나기까지 했다.

“왜 작은아버지가 이런 곳에 계신 거예요?”

솔직한 심정으론 속이 좀 시원했다.

회귀 전 바올로는 조금만 잘못해도 이런 지하창고에 자신을 가두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안토니아는 걱정 가득한 말투를 꾸며 이야기했다.

“작은아버지는 늘 신전을 돕고 주신께 감사하라고 하셨잖아요, 어째서…….”

“안토니아야……!”

늦게 온 사실에 역정을 내려던 바올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고개를 숙인 조카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건 안토니아뿐이었으니까.

‘젠장, 완벽한 서류였는데 하필…….’

인장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릴 게 뭐란 말인가.

대신관만이었다면 둔하기 짝이 없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텐데…….

바올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말했다.

“대신관님께서 작은아버지에 대해 오해를 하셨단다.”

“오해요……?”

“그래, 대신관님이 네게 무섭게 굴지 않더냐?”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게는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철없이 작은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왔는데도 과자와 따뜻한 우유까지 내어주셨는걸요.”

“그, 그게 정말이냐?”

당연히 자신의 조카인 안토니아를 박대했을 거라 생각한 바올로는 그 말에 희망을 보았다.

“정말이에요! 작은아버지와 만나도 좋다고 대신관님이 허락까지 해 주셨는걸요.”

“그렇단 말이지…….”

바올로는 몇 번 목을 가다듬더니 안토니아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

‘그래, 내 조카는 쓸만하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토니아는 세르히 백작가의 공식적인 후계자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동부 대신관인 이상 세르히 백작가를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안토니아는 자신을 걱정하며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가.

‘아무렴, 피가 이어진 혈육만한 게 있겠는가.’

어려서인지 안토니아는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려 했다.

애초에 제 일에 어깃장을 놓은 것도 모두 걱정하다 그렇게 된 것 아니던가.

심지어 자신을 의심할 법한 일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없었다.

‘안토니아에게 내 운명을 걸어보자.’

바올로는 안토니아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안토니아, 이 작은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제, 제가요? 저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아니야, 너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대신관님은 주신 파벨라를 모시는 자애로운 분이다. 착한 네 말이라면 분명 들어주실 것이다.”

바올로는 품속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게 뭔가요……?”

“대신관님께 전하면 된단다. 그러고 이렇게 말하렴.”

편지 속에는 대신관이 원하는 내용이 모두 적혀 있었다.

자신이 위조한 서류에 적혀 있던 재산의 양도 내용이었다.

그걸 안토니아가 직접 전한다면 제대로 찍힌 세르히 백작가 인장 이상의 효력이 있을 테니까.

‘그럼 대신관님도 믿지 않을 수 없겠지.’

자신이 거짓말한 게 아니란 걸 말이다.

그래, 처음부터 대신관이 아니라 이 어린 조카를 속였어야 했다.

바올로는 최대한 자상하고 사람 좋은 작은아버지인 양 가장하며 말했다.

“작은아버지가 여기 적힌 약속을 지킬 것이며, 네가 증인이 될 거라고.”

“제가, 증인을 어떻게…….”

“안토니아!”

“꺅!”

갑작스럽게 커진 목소리에 안토니아가 놀란 듯 비명을 질렀다.

바올로는 다시 목을 가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내 조카, 이 작은아버지가 말한 대로 해 주겠지?”

“이, 이게 뭔데요……?”

“아직 어린 너는 몰라도 되는 거란다. 언제 내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니.”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순진하고 맑은 푸른 눈이었다.

바올로는 흡족해하며 안토니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사랑스러운 조카, 안토니아야. 꼭 오늘 중으로 대신관님께 그 서신을 전하렴. 절대로 보지는 말고.”

그랬다가는 아무리 저 멍청하고 순진한 조카라도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안토니아는 그 말에 최대한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바올로와 면담을 끝낸 안토니아는 당연히 그 서류를 들고 대신관을 찾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서류를 이용했으면 했지 말이다.

‘후견인이 피후견인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도 죄가 되니까.’

징역 기간에 큰 영향은 주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의 후견인 자격만큼은 확실히 박탈할 수 있을 것이다.

씰로 단단히 봉해 두었지만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폴리가 한 번 더 방을 점검했으니까.’

그 문서들을 확인했을 때 정말 어이가 없었다.

바올로가 제법 정밀한 세르히 백작가의 인장을 위조해 가지고 있는 것도, 당연한 듯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도 말이다.

“잠깐 산책 좀 하다 들어갈게.”

“그럼 저희도 같이 있을게요, 아가씨.”

“괜찮아, 혼자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안토니아의 말에도 폴리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예전에 늑대를 만나신 적도 있었고……. 주방장님이 아가씨를 혼자 두지 말라고 신신당부한걸요.”

“괜찮아, 폴리. 여긴 대신전 안뜰인걸. 마물이 나타나도 신관님들이 금방 짠 하고 구해 주실걸?”

“그래도…….”

“금방 들어갈게, 아직 해도 완전히 지지 않은걸.”

그 말에 폴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안뜰에 드문드문하게 지키는 기사들도 몇 있기도 했고, 신관들도 종종 지나다녔으니까.

폴리를 돌려보낸 뒤 안토니아는 안뜰을 찬찬히 걸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로 예전에는 내 주변에 이용하려던 사람만 가득했구나.’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바올로가 저런 이상, 어쩔 수 없던 일인지도 몰랐다.

안토니아는 괜히 계속 짜증이 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부리를 발로 소심하게 툭툭 건드렸다.

그래서 몰랐다.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툭, 하고 부딪친 감촉에 안토니아는 깜짝 놀라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조심해야지, 안토니아.”

그는 안토니아가 놀라 뒤로 물러서다 넘어지지 않도록 서둘러 붙잡아 주며 말했다.

“넘어지겠어.”

“……리샤르?!”

겨울이라 낮이 짧아 금방 다가온 저녁노을 사이로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었다.

“왜 여기 있어?”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뜻밖의 만남에 당황하는 안토니아를 보며 리샤르가 작게 웃었다.

‘한 달 만인데 어쩐지 눈높이가 좀 달라진 것 같아.’

조금 키가 큰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무언가 좀 더 묘한 매력이 섞여든 것 같았다.

“의뢰는 다 끝난 거야?”

“응, 마침 의뢰처가 여기 근처였어. 드비 경이 백작령까지는 거리가 있으니 여기서 쉬어 가자고 하시더라고.”

“그럼 백작령으로는 안 돌아오는 거야?”

안토니아의 물음에 리샤르는 조금 미안한 듯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아. 드비 경이 또 의뢰가 들어왔다고 그랬거든. 거기는 여기서도 좀 멀어서…….”

“그렇구나…….”

안토니아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좋았는데.’

지금껏 리샤르처럼 격식이나 다른 것들 신경 안 쓰고 자신을 대해 준 사람이 적었으니까.

“안토니아, 여기서 얼마나 있을 거야?”

“응?”

“드비 경이 여기서 며칠은 머무른다고 해서……. 혹시 그냥 기도만 드리려고 온 거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며칠은 머무르겠다고 한 말에 어쩐지 기뻐졌다.

“아니야, 나도 며칠은 있을 거야.”

“그럼 종종 시간을 내줘, 총을 다루는 법도 마저 가르쳐 줄 테니까.”

“응, 그 뒤에도 혼자서 나름대로 연습하긴 했어.”

“그래? 기대해야겠네.”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지금 못 믿는 거야?”

“아니야, 믿어. 그냥 기뻐서.”

“기뻐?”

“안토니아가 내 생일 선물도 좋다고 해 줬고, 총도 계속 만져 줬다고 하니까.”

리샤르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리샤르는 정말 말을 예쁘게 한단 말이야.’

덕분에 대신관, 바올로 때문에 어둑해졌던 마음에도 해가 깃드는 것 같았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안토니아.”

“난 처음부터 괜찮다고 한걸.”

“그러니까 더 미안한걸. 안토니아가 생일을 기대하고 기다렸을 줄 알았단 말이야. 아니야?”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리샤르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기대했어. 폴리랑 로레나에게 오두막을 확인해 보라고 하기도 하고.”

“그랬구나.”

“만약 돌아왔다고 해도 작은아버지가 온 걸 보고 리샤르가 알려도 되나 고민했을 수도 있잖아. 그냥, 그래서…….”

리샤르에게 정확한 사정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는 늘 눈치 빠르게 행동하곤 했으니까.

게다가 떠돌이 기사를 따라다니는 견습기사는 자고로 눈치가 좋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었다.

어떤 지역을 가더라도 그렇지 않으면 의뢰를 따 오기 힘들었으니까.

사정 없는 귀족가문은 매우 드문 법이었다.

“그랬구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기다려 줬구나.”

“리샤르!”

겸연쩍어서 소리치자 리샤르가 맑게 웃었다.

“나도 그래서 그래. 보고 싶었으니까.”

“……날?”

“응, 이렇게 견습기사에게 편하게 대해 주는 소백작님은 드문걸, 그리고 나는…….”

“리샤르는?”

소년은 그 말에 답 대신 그냥 미소로 얼버무렸다.

안토니아는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물어선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서로 친구로 편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둘 다 알고는 있었으니까.

이럴 수 있는 시간은 그저 이번 겨울뿐일 거란 걸.

리샤르는 견습기사였고 이번 겨울이 지나면 스승인 드비 경을 따라 어디로 갈지 몰랐다.

안토니아가 그에게 편하게 대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직 어린아이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리샤르와 많이 대화해 본 건 아니지만 알 것 같은걸.’

리샤르는 절대로 자신의 의무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토니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토록 맑고 찬란하게 있을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안토니아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안토니아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화답하듯 미소로 안심시켜 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리샤르에게 충분히 고마워.’

자신에게 영영 없었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그가 돌려주었다.

* * *

“꽤 마음에 드셨지요?”

대신관과 만난 뒤, 돌아오자마자 이죽거리며 말하는 드비의 말에 리샤르는 입을 다물었다.

“에이, 다 봤는데. 안뜰에서 장난치고 노는 게 꼭.”

“꼭 뭐.”

“어린 동물들이 장난치면서 노는 것 같던데요.”

드비는 그 말을 한 뒤 정강이건 어디건 통증이 이어질 걸 각오했다.

그러나 리샤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경악하며 리샤르를 바라보았다.

“헐, 대공 전하. 진심이세요? 정말로? 말도 안 돼.”

“몰라.”

“네에에에?! 모른다고요?! 아악!”

이번에는 정강이로 발이 날아들었다. 물론 평소보다 훨씬 약했지만.

“그냥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야. 안토니아는…….”

“그 소백작님이 왜요?”

“누님을 좀 닮은 것 같아.”

“……네?”

그 말에 드비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어리고 순진하게 생긴 아가씨가요? 얼굴이고 어디고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데…….”

드비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제가 기억하기로 누님이신 레이디 트라체스 이스베르가 님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작고 귀여웠던 시절이, 아악!”

또 한 번 얻어맞은 드비는 옆에서 우는 소리를 냈다.

“전하는 다른 부하들한테는 안 그러면서 저만 맨날 때리시죠?”

“네가 맞을 소리를 하니까.”

“아무튼 제가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요? 이스베르가 님은 그야말로 사교계의 군주셨는걸요. 그래서 작년에 결혼하며 떠나실 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울었는데요.”

“너도 울었냐?”

“하하, 저는 이스베르가 님을 무서워하고요. 으, 대공 전하랑 친하게 지내다가 혼난 적이 몇 번인데!”

드비는 떠올리기만 해도 무섭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황제 폐하께서도 그래서 지금 전하를 봐주시는 것 아닙니까. 이스베르가 님이 없으니까요.”

그 말이 맞았다.

안토니아의 편지에 굳이 동부까지 내려와 이 귀찮은 짓을 하게 된 것도 모두 이스베르가의 결혼 때문이었다.

수도를 떠날 구실이 필요했다고나 할까.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골라 결혼을 했으니까.

드비가 말한 대로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대를 골라잡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넌 아마 영영 이해하지 못할 거란다. 너에게 간단한 것이 나에겐 너무 어려워. 어머니가 트라체스 대공가를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듯 나도 최선을 찾은 것뿐이야.’

결혼 전, 이스베르가의 말을 리샤르는 겨우 반만 이해할 수 있었다.

반쯤은 자신이 어려서 그저 그녀의 도움만 받는다고 생각했을 뿐.

그래서 필사적으로 제게 편지를 쓴 안토니아를 만나 보고 싶었다.

왠지 이스베르가가 말도 안 되는 혼처를 찾아 결혼한 것과 어쩐지 비슷한 간절함이 느껴졌으니까.

‘안토니아는 정말로 누님과 닮았어, 그런 부분이.’

그래서 자신답지 않은 짓을 계속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아마 호기심과 그보다 좀 더 깊숙한 감정이었다.

처음 마물에게 위협당하면서도 가까워진 죽음보다, 오히려 다른 간절함을 찾던 그 모습을 본 순간부터 말이다.

안토니아는 오직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스스로인 것처럼 그 예쁜 얼굴 아래에 많은 걸 감추고 있었다.

친구라고 불렀지만 사실 자신만큼이나 안토니아도 많은 걸 숨겨 두었다.

리샤르는 그 사실이 실망스럽진 않았다.

‘나나 안토니아나 어린아이로 있을 수 없는 처지이니.’

그 벽을 넘고자 한다면 자신도 안토니아도 그 나름대로 각오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 정도로 괜찮았다.

“전하, 뭘 그리 어려운 얼굴 하십니까.”

“뭐?”

“에이, 다 압니다. 그 소백작님이 많이 마음에 든 거지요? 저한테도 매번 안 보여 주려고 따돌리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뭐.”

“뭐긴 뭡니까. 간단하지 않습니까. 트라체스 대공이라고 밝히고 약혼이라도 하자고 하면 되지요.”

“……뭐?”

리샤르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드비는 이런 쪽으로는 쓸모가 없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데이트를 어떻게 한 거야.’

역시 괜히 데이트 두어 번에 차이던 게 아니었다.

껍데기와 허우대만 멀쩡하고 내용물이 이 모양이니…….

“폐하께서도 반대하진 않으실걸요? 오히려 기특하게 여기실 수도 있지요! 유력한 중앙 귀족도 아니고 영지 잘 다스리고 잡음 한 번 없던 오랜 귀족 가문의 후계자 아닙니까.”

“입 다물어.”

“에이, 전하. 잘 생각해 보세요. 그 소백작님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걸요. 어차피 백작가를 계승하려면 결혼은-.”

쾅-!

리샤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 말에 드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아주아주 잘못한 건 잘 알 것 같았다.

“소백작님께 사죄하겠습니다!”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옙!”

적어도 드비는 자신이 기어야 할 때는 아주 잘 알았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리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작위 승계.’

그랬다. 제국법상 여성 귀족이 힘든 이유.

미혼의 신분으로 간단히 트라체스 대공 작위를 받은 자신과 달리, 여성 귀족 후계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꼭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 상대에 대해서도 제약이 잔뜩 붙어 있었다.

자신은 그저 누나인 이스베르가가 결혼하는 걸로 간단히 트라체스 대공이 될 수 있었는데.

‘안토니아는, 거기까지도…….’

리샤르는 금세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아마 생각하고 있겠지.

자신의 누나도, 어머니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훨씬 더 먼 곳을 보고 있었으니까.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자.’

그게 지금은 최선이었다.

드비의 말대로 자신이 대공인 걸 밝히고 다가가 봐야 안토니아는 경계하고 달아날 테니까.

* * *

안토니아가 대신전에 도착하고 이틀 뒤, 바올로 세르히의 죄를 묻는 재판이 열렸다.

바올로는 자신을 위해 안토니아의 출석을 요청했고, 신전은 그 사실에 혀를 차면서도 받아들였다.

‘참, 영애도 안되셨습니다. 아직 어린데 친척이 이런 나쁜 일에…….’

안토니아 일행의 안내를 담당한 신관은 혀를 차며 말했다.

물론 안토니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바올로가 당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마음껏 볼 기회였으니까.

재판이 시작되기 전 안토니아는 조금 이르게 나와 바올로를 먼저 만났다.

이번 재판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는 바올로를 방심시켜야 했으니까.

안토니아는 차분한 톤의 푸른 드레스를 입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사각거리는 타프타 실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프릴, 레이스, 보석은 얼마 없더라도 만듦새만으로 우아한 느낌이 든다는 것도 그리고, 이 모습을 본 바올로가 불쾌해한다는 것도 말이다.

귀족 상대로 사기 치며 살아온 그는 고급품을 알아보는 눈 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왔느냐, 안토니아.”

바올로는 심드렁한 태도로 안토니아에게 짜증을 담아 말했다.

절박한 순간임에도 바올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안토니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차림새는 못마땅해도 태도는 공손했고 말이다.

의심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바올로는 그렇게 확신하며 생각했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작은아버지. 줄곧 뵙고 싶다고 말씀드렸지만 허락해 주시지 않아서…….”

안토니아는 바올로에게 다가가 모르는 척 순진한 조카의 얼굴을 했다.

“흥, 고생을 아는 것이 그렇게 비싼 옷을 입고 와?”

“네? 하지만 이 드레스는…….”

“됐다. 오늘 재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제대로 이야기하는 게 낫겠구나.”

어차피 안토니아가 할 일은 다 했다고 푹 안심한 바올로는 대번에 툴툴거렸다.

‘대신관에게 주기로 한 건 모두 내가 손대지 못하는 세르히 백작가의 재산, 그게 없는 이상 안토니아는 앞으로 내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저택에 있을 때는 늘 수수한 드레스만 입고 있어 분수에 맞는 옷만 갖춘 줄 알았다.

그런데 저 재단이나 드레스의 우아함, 모두 어지간한 레이스를 잔뜩 붙인 드레스보다도 오히려 품이 더 든 게 틀림없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야지, 대신관도 그걸 받은 이상 내 부탁을 안 들어줄 리도 없고.’

저택에 돌아갔을 때 하도 안토니아가 이런저런 말로 어깃장을 놓아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신전으로 불러 간단해졌다.

‘많이 건강해졌다곤 해도 여전히 멍청한 구석이 남은 애니, 평생 남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고 대신관이 한마디만 해 주면.’

바올로는 그 생각에 입꼬리를 히죽히죽거렸다. 절로 웃음이 나왔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같잖은 모습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참 빨리도 다 해결됐다고 확신하네, 나라면 대신관에게 잘 전달했냐고 그것부터 확인했을 텐데.’

하긴 바올로가 저렇게 착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대신관에게 손을 썼으니까 말이다.

* * *

바올로와 만난 그날 저녁, 안토니아는 대신관을 찾아가긴 했었다.

루퍼스가 미리 내어준 정보에 따라 그가 좋아한다는 아쿠아마린으로 만든 묵주에 한 병에 3골드가 넘는 와인을 가지고서 말이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세르히 백작 영애. 이렇게 한다고 해도 그대의 작은아버지의 죄는-.”

“용서를 청하러 온 게 아니에요, 대신관님.”

“그럼…….”

대신관은 안토니아가 가져온 것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 눈짓에는 ‘겨우 이걸로 구명하려 하는가.’하는 의미도 있긴 했지만 갖고 싶은 욕망도 분명 존재했다.

“오늘 작은아버지를 뵈었더니, 머무시는 곳이 너무 좋지 않아서요.”

“흠?”

“……저는 작은아버지가 뭘 하셨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도, 그래도 제 작은아버지인걸요. 그렇게 좋지 않은 곳에서 견디시지 못할 거예요.”

안토니아는 최대한 안타까움을 쥐어짜며 대신관에게 이야기했다.

바올로를 불쌍히 여기는 건 연기지만 참 못할 짓이었으니까.

“그럼 그건 세르히 씨를 좋은 방에 두어 달라는 부탁을 하려 가지고 온 것인가?”

“그렇답니다. 대신관님. 작은아버지가 부탁을 할 때는 성의를 표해야 하는 거라고 알려 주셨거든요. 혹시 제가 또 뭘 몰라……. 실수했나요?”

청렴한 신관이라면 당연히 이 말에 아연실색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신관은 만면에 기특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백작 영애, 두고 가시지요. 저 또한 주신 파벨라를 모시는 몸, 그 정도의 배려는 당연히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인가요?”

“주신께 올리는 와인으로 한 병은 너무 적은 것 같군요.”

정말 돈독 오른 신관이었다.

“그런가요?! 제가 뭘 몰라서…….”

안토니아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신관에게 말했다.

“백작저 하인에게 말해 같은 것을 한 병 더 가져오라 할게요! 주신께 올리는 건데 뭐가 아깝겠어요.”

“흠, 흠. 과연 세르히 백작가의 후계자라 그런지……. 참 착한 영애로군요. 좋습니다. 원래는 안 되지만…….”

대신관은 잠시 고민하는 체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성의를 보아 세르히 씨에게 편의를 봐주겠습니다.”

* * *

실제로 그날 바올로는 습기 가득한 지하 창고방에서 1층의 괜찮은 방으로 옮겨졌다.

그뿐만인가, 로레나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식사도 질 좋은 것으로 나갔다고 했다.

그것도 바올로가 평소 신전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좋은 걸로 말이다.

‘대신관님이 일을 아주 잘해 주셨네.’

속여 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자신의 선물이 매우 만족스러웠던 거겠지.

아무튼 그러니 바올로는 분명 대신관이 자신의 거래 조건을 흡족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방과 식사만 좋아졌지, 어딘가 출입할 수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재판을 앞둔 이상, 대신관님과 직접 만날 수도 없었을 테고.’

안토니아는 거들먹거리는 바올로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신에게 마련된 참관석에 앉았다.

‘그래, 실컷 지금을 즐겨 보세요. 곧 그 얼굴이 무너질 테니까요.’

참관석에서 애써 슬퍼하는 척하는 자신을 폴리가 달래듯 토닥였다.

곧 대신관과 신관 여럿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신관은 긴장의 기색이라곤 없이, 아니 오히려 자신을 향해 히죽히죽 웃는 바올로를 불쾌하게 보며 외쳤다.

“지금부터 바올로 세르히의 죄를 묻는 재판을 시작한다!”

* * *

재판이 시작됐음에도 바올로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끝날 일이었으니까.

바올로는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대신관에게 빌었다.

“모두, 모두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신관님! 그러니 제발 파문만큼은 면해 주십시오!”

말은 제법 그럴싸했으나 간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태도에 대신관의 심사가 더욱 비틀렸다.

“지금 저와 장난치는 겁니까, 바올로 세르히 씨!”

“……네?”

당연히 몇 마디 질책이나 하고 너그럽게 넘어갈 거라 생각한 바올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자, 장난이라니요. 대신관님! 저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가 제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잘못했다며 입을 여는 겁니까!”

바올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안토니아와 대신관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그냥 반성하고 있냐, 몇 마디 하면 내가 넙죽 잘못했다고 하고, 그냥 반성의 기색이 보이니 이번 일은 넘어가자 하면 끝날 일 아냐?’

바올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좀 더 몸을 숙였다.

‘흥, 저렇게 윽박지르면 더 내놓을 게 있는 줄 알고?’

탐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르히 백작가의 재산 중 상당량을 주겠다 했는데도 그걸로 모자라단 소리가 아닌가.

“잘못했습니다. 대신관님, 그, 그러지 마시고 제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따악-.”

쿵!

그 말에 대신관이 불쾌하다는 듯 훌장을 바닥에 크게 내리찍었다. 그리 넓지 않은 내부가 공명하듯 울렸다.

바올로는 깜짝 놀라 한쪽 귀를 막으며 눈을 찡그렸다.

“지금 저와 흥정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바올로 세르히 씨. 뭘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 허, 참.”

대신관은 크게 혀를 찼다.

“제가 그래도 나름대로 정중하게 대해 준 건 모두 당신의 어린 조카 때문이거늘!”

대신관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 참관석에서 고개 숙인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가 어깨도 축 늘어트린 채 면목 없이 앉아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잊었습니까? 여기는 당신의 죄를 신의 이름으로 묻는 곳이에요! 그런데 지금 뭘 딱, 딱이요?”

바올로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이었다.

‘안토니아가 틀림없이 그걸 전했을 텐데, 왜 저렇게 화를 내냔 말인가.’

혹시 다른 신관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야 해서 그러는 걸까.

바올로는 며칠 너무 안심해 둔해진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보려고 하며 일단 더 머리부터 숙였다.

“저, 저는……. 제가 잘못한 것 같아, 어떻게든……. 용서를 빌려고 한 것입니다. 대신관님.”

“지금 이 자리는 주신께 죄를 비는 자리입니다! 용서를 빌려 한다 해도 제가 아니라 주신께 빌어야지요!”

“얼마든지, 얼마든지 빌겠습니다!”

“신실함이라곤 없는 그 용서를 주신께서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심지어 요 며칠 제가 지켜보기 위해 가두었더니 불평불만만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것은…….”

“지하 방이 습하고 괴로웠겠지요! 하지만 세르히 씨, 그 또한 당신에게 부여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방이 나쁘다, 식사가 나쁘다 투덜거리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바올로는 그 말에 속으로만 불만하고 입은 꾹 다물었다.

아무리 상황이 요상하다 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으니까.

“게다가,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대신관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단상을 탕탕 두드렸다.

“얼마나 불만을 토했으면 당신의 어린 조카가 제게 찾아와 좋은 방으로 바꿔 달라 이야기하겠습니까!”

“……네?”

바올로는 순식간에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대신관한테 가서 방을 바꿔 달라고 했다고?’

아니, 겸사겸사 한 부탁이겠지. 바올로는 열심히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래, 안토니아는 내가 힘든 걸 못 보는 아이지 않은가. 당연히 걱정이 됐겠지.’

그러니 그 서류를 주며 증명하겠다 하고 덧붙여 부탁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대신관은 지금 그럴싸한 연극을 하는 것이다.

바올로는 그렇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러니 조금만 이 수모를 참으면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죄인 바올로 세르히는 감히 주신의 뜻을 거역하고 신전의 물건에 손을 댔으며, 감당키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노라 말하였으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

대신관은 바올로가 잘못을 다시 한번 청하기도 전에 판결을 읊기 시작했다.

‘이, 이게 아닌데?’

바올로는 극히 당황했으나,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대신관이 주신의 이름을 빌려 판결을 내리는데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처벌만 더 무거워질 것이다.

‘안토니아는, 안토니아는 지금 뭘 하는 거지!’

당장 이 작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안토니아는 그저 참관석에서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작은아버지를 둔 조카의 모습이 아니라, 사고 친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모습과 흡사해 바올로의 기분은 더 나빠졌다.

바올로가 시답잖은 제 기분에 집중하는 사이 대신관은 바올로의 죄를 계속해서 읊었다.

“심지어 잠깐의 죄를 피하고자 감히 대신관과 신전의 눈을 속이려 했으며, 그에게 어려운 환경을 주자 불평불만만 하며 뉘우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관은 엄숙한 얼굴로 훌장을 꽉 쥐고서 바올로를 향해 외쳤다.

“동부 대신전의 대신관인 나는 이 불경한 자를 둘 수 없기에 파문에 처한다 해도 모자란다 생각한다!”

파문, 파문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사, 상관없어! 까짓것 바다라도 건너 다른 대륙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이 대륙이나 주신 파벨라를 믿는다고 들었으니까.

바다를 건너 어떤 섬에는 주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혀를 차며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재산만 삼키고 지금 날 파문으로 협박하겠다 이건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바올로는 부들부들 떨렸다. 연달아 욕심 많은 자의 머리가 돌았다.

‘하, 그렇군! 그런 거였어!’

대신관은 틀림없이 깨달은 것이다.

안토니아가 조금만 잘 대해 줘도 금방 사람에게 정을 주는 아이란 걸 말이다.

‘나 없이 안토니아만 가지고 노는 게 더 쉬울 거다, 그렇게 생각하나 본데.’

파문을 당한다고 해도 안토니아가 서명한 이상 백작가의 후견인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후견인 자리를 내려놓지 않거나, 다른 사유가 있어 후견인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백작가 재산 모두를 집어삼킬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정말 파문당한다고 해도! 대신관이 어떻게 황실이 주관하는 귀족 관리에 손을 대겠는가.

바올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 빠져나갈 방법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바올로는 최대한 침착하게 기다렸다. 아직 진짜 판결이 남았으니까.

대신관은 곧 진짜 판결을 읊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주신께서는 자애로운 분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자, 시련을 부여하려 한다. 바올로 세르히에게는 5년의-.”

그때였다.

“잠시만요, 대신관님.”

조용히 앉아 있던 안토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바올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대신관이 아무리 구슬려 봐야 나는 안토니아의 진짜 혈육이다 이 말이야!’

안토니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관님, 판결을 내리시기 전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백작 영애.”

안토니아는 그 말에 천천히 걸어가 대신관에게 바올로가 이틀 전 자신에게 준 걸 건넸다.

“대신관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실 수 있을까요.”

“증인……?”

대신관은 어쩐지 낯이 익다는 얼굴로 씰로 단단히 봉인된 그 편지를 받았다.

바올로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똑똑한 내 조카, 이 자리에서 저걸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해 줄 모양이로구나!’

그래, 대신관을 따로 찾아가 부탁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확실했다.

여기에는 증인도 있는 데다 이곳에서 나온 말은 중앙 신전에까지 올라가는 엄숙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 그래서 저렇게 나름 신경 써서 차려입고 온 것이로구나!’

평소처럼 수수한, 아니 솔직히 말해 지나치게 저렴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면 모양이 빠졌을 테니까.

그러나 바올로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신께 맹세해요. 저는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을 거예요. 대신관님.”

“말해 보시오, 영애. 이걸 왜 내게 주고 증인이 되어 달라 하는지.”

안토니아는 원래의 차분한 말투로 대신관에게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어린애다움이 아니라 오랜 백작가의 후계자다움이니까.

“이 서류는 작은아버지께서 이틀 전 제게 주신 거예요.”

대신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자신이 찢어 버린 것과 똑같았으니까.

그도 한편으로는 안토니아가 이 서류를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럼 바올로도 세르히 백작가도 마음껏 좌지우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저는 세르히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백작가를 지킬 의무가 있어요. 당연히 작은아버지께서 그러시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안토니아는 한 번 작게 숨을 내뱉으며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여기에 작은아버지께서 자신을 위해 백작가에 위해를 가하는 내용이 있다면 저는 따를 수 없어요.”

“안토니아!”

그 말에 바올로가 소리쳤다.

‘저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갑자기……!’

안토니아는 천천히 바올로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물론, 물론 작은아버지께서 불쾌하실 만한 말이라는 걸 알아요. 늘 저를 생각해 준 분이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안토니아는 슬픔에 겨워하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당부하셨는 걸요, 언제나 확인하고, 또……. 또 확인하는 게 세르히 소백작인 저의 책임이라고요.”

안토니아는 입술을 한 번 꾹 깨물며 다시 돌아서 대신관에게 말했다.

“그러니, 대신관님. 그런 내용이 아니라면 저는 작은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증명할 거예요. 이 봉인된 인장을 뜯기 전에 제가 그리 말했다고 증인이 되어 주시겠어요?”

대신관은 그 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신관들의 눈이 너무 많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마땅히 지금은 대신관의 품위를 지켜야 할 자리였다.

“물론입니다. 백작 영애, 친척이 그런 짓을 벌인다 생각하면 무서운 게 당연한 법이지요.”

그러더니 대신관은 조금 궁금하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소백작, 만약 이 내용이 염려하는 내용이라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어느새 영애가 아니라, 정말 백작가 후계자로 대하듯 호칭까지 바꿔서 말이다.

“……그걸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안토니아는 우물쭈물거렸다. 바올로의 눈치를 보듯 말이다.

“괜찮습니다. 소백작. 이곳은 동부 대신전. 제가 그대의 보호자가 될 거예요. 주신께 맹세하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세르히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작은아버지와 절연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절연…… 말입니까?”

생각보다 강한 발언에 대신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가문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 신신당부하며 가르치신걸요.”

어떻게든 의젓해 보이려 하는 모습에 다른 신관들이 탄식했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된다, 안토니아!”

바올로는 당장에라도 뛰쳐나와 안토니아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재빠르게 다른 사람들이 바올로의 몸을 붙잡았다.

대신관은 훌장을 탕탕 내리치더니, 혀를 차며 바올로에게 말했다.

“세르히 씨, 어디 신성한 자리에서 소란을 피운단 말입니까!”

“하지만 제 조카가……! 저를 모욕하지 않습니까!”

“모욕이라니요, 제가 보기에 소백작은 당연한 확인 절차를 거치는 것 같습니다만.”

대신관은 목을 가다듬으며 짐짓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애초에 세르히 씨, 그대가 떳떳하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

“소백작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백작가에 위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세르히 씨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바올로가 입을 뻐끔뻐끔거렸다.

“그……, 하, 아…….”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떠오르지 않아 이상한 소리만 내뱉으며 말이다.

“그럼, 소백작. 제가 이것을 확인하지요. 만약 그대가 염려한 내용이 들어 있다면 마땅히 증인도 되어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안토니아는 의젓하게 무릎을 굽혀 대신관에게 예를 표했다.

대신관은 평소보다 더 힘주어 허리와 목을 꼿꼿하게 세운 뒤 서류를 펼쳤다.

이미 내용을 앎에도 그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미간을 찡그리며 놀란 내색을 보였다.

“아니, 아니……. 이럴 수가.”

“왜 그러셔요, 대신관님?”

“차마……. 차마 어린 소백작에게 보여 주기가 민망한 내용입니다.”

“……괜찮아요, 마땅히 제가 확인해야 할 내용인걸요.”

대신관은 조금의 민망함과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부디 소백작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세르히 씨에게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당부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아들였다.

익히 아는 내용이었다.

세르히 백작가의 재산 중 상당량을 신전에 바칠 것이며, 주신을 위해 앞으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란 내용이었다.

이대로 진행했다가는 세르히 백작가가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그런 내용.

‘또 봐도 어이가 없어.’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안토니아는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어린 소녀가 못 박힌 듯 서류만 보는 모습에 다들 내용을 짐작하고 안쓰러워했다.

“쯧, 어린 아가씨가…….”

“참 안됐습니다. 부모님을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세르히 씨에게 의지하려 한 모양인데…….”

바올로는 수군거리는 그들을 따갑게 째려보더니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거, 걱정하지 마라. 안토니아! 절대로 백작가에 손해가 될 일은 아니야!”

“…….”

“이 작은아버지를 믿는다 하지 않았느냐! 다른 것도 아니고 주신께 바치는 거다!”

바올로는 애써 민망함을 떨치며 오히려 소리를 높였다.

“이런 정성을 보이는데 당연히 주신께서도 백작가를 보살피시지 않겠느냐! 이 작은아버지가 말이다, 앞으로 그 재산을 복구, 아니 그 배 이상으로 벌-.”

“그만, 그만 하세요!”

어린 소녀는 쥐어짜 낸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모님께서는 저를 한 번씩 곁에 두고 말씀하셨어요, 백작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아니 된다고요.”

“아, 안토니아……?”

바올로는 갑작스레 똑똑해진 듯한 조카의 모습에 놀라 바라보았다.

‘젠장, 도대체 형님과 형수님은 어린애한테 뭐 저렇게 빨리 가르쳤단 말이야!’

안토니아가 부모님을 잃었을 때는 고작 10살이었다.

자신이 그 나이 때는 겨우 글이나 읽을 줄 알아 시답잖은 가십 잡지나 뒤적거렸다.

당연히 저런 걸 배운 적도, 아니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작은아버지, 어째서 확실한 걸 두고 가능성에 투자하려 하시나요?”

“가, 가능성이라니……. 너, 너 지금 주신께 드리는 것인데 감히 그렇게 말하는 게냐!”

바올로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냉큼 반박했다.

“주신의 은혜를 우습게 보는 게야? 대신관님, 이런데도 제 조카의 말을 계속 들어주실 겁니까?”

그러나 안토니아는 당황하지 않은 채 찬찬히 말했다.

“주신께서도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죄를 감추고자 하는 헌금은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대신관님.”

대신관은 잠시 뜸을 들였다.

재물만 놓고 보았을 때, 심정적으로 바올로의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물론 작은아버지는 제 친척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여 주신께 잘못된 모습을 보여 드렸으니 마땅히 새해 헌금은 크게 하겠지만요…….”

“소백작,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헌금이란 말에 대신관이 냉큼 안토니아의 편을 들었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바올로의 편을 들어주기는 글렀다.

‘소백작의 말대로 확실한 걸 두고 가능성에 걸 필요는 없지.’

명분도 이치도 모두 안토니아에게 있었다.

대신관은 훌장을 한 번 ‘쿵’ 하고 내리찍은 뒤 찬찬히 입을 열었다.

“바올로 세르히 씨, 더는 그대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대, 대신관님!”

“소백작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대가 가족을 잃게 만드는 결과가 나와 참으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슬픔을 삼키듯 고개를 떨구며 이야기했다.

“괜찮습니다. 대신관님……. 저는……. 저는 견딜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말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렸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런, 아직 어린 소백작에게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던 듯합니다. 뒤는 제게 맡기고 얼른 돌아가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안토니아는 폴리의 부축을 받아 마지막으로 예를 갖췄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기 전 한 번 바올로를 보았다.

그는 안토니아를 향해 무어라 욕을 지껄였다. 원망하고 가당찮다는 듯.

“이걸로, 이걸로 다 끝난 줄 아느냐?! 그래봐야 고작 5년이다! 5년, 5년이 지난 뒤에 내가 이 억울함을 황제 폐하께 고해서-!”

그러나 그 말들은 안토니아에게 그 어떤 위협도 주지 못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속박을 제 손으로 끊어 냈다는 후련함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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