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것들, 내 인생에서 삭제합니다-2화 (2/29)

#2.

밀즈 부인이 떠난 뒤, 안토니아는 대대적으로 저택 정비에 나섰다.

‘사용인들을 이대로 둘 수는 없어.’

큰 골칫거리던 도라나 밀즈 부인은 내쫓았지만, 지금 남은 자 중에서도 바올로에게로 기운 하인들이 많았다.

‘도라만큼은 아니어도 나쁜 짓 한 애들도 많고.’

회귀 전 자신을 무시하고 빈정대던 사용인들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바올로가 돌아오면 정리하기가 더 버거워질 테니 그 전에 싹 끝내둬야 했다.

물론 직접 행동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안토니아가 몇 가지 언질과 권한을 준 것만으로도 마틴이 행동에 나서줬으니까.

저택 동쪽 출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제복을 압수당해 각양각색의 사복을 입은 사용인들이 마틴에게 사정했다.

“주방장님,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마틴은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저택에서 나가라는 말에도 그들은 하루 이상 버텼다.

물론 이해는 갔다.

세르히 백작령에 사는 이상, 저들이 이 이상 급료가 좋은 곳을 찾기란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최근에 안토니아가 사용인들을 위해 준비한 겨울 방한용품의 질이 상상 이상이었다.

이미 실물을 본 상태이니 앞으로 저택에서 일하며 부수적으로 받을 걸 생각하면 아쉬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마틴은 이들을 봐줄 생각이 없었지만.

“참 뻔뻔하구나! 도라나 너희들이나 아가씨 물건을 탐내고 멋대로 써놓고 어디서 봐달란 거야!”

“주방장님! 저희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다 시켜서, 시켜서 한 거예요.”

“흥, 우리 주방 애들이나, 묵묵히 허드렛일 하던 애들은 다 멍청해서 안 한 거라던?”

그 말에 모인 사용인들이 입을 삐죽거렸다.

마틴은 그들의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너, 너는 반년 전, 새로 맞춘 아가씨의 드레스를 멋대로 입고 외출했지?”

“그, 그건 아가씨께서 괜찮다고…….”

“어디서 거짓말이냐! 아가씨께서는 말 한마디 못 하셨는데. 그리고 내가 그것도 확인하지 않은 줄 아느냐.”

그 말에 하녀는 변명을 찾지 못한 채 입만 삐죽였다.

“그리고 너, 전당포에 멋대로 아가씨의 귀걸이를 맡겨?!”

“어쩔 수 없었어요! 동생이, 동생이 아팠단 말이에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말거라! 전당포에 맡기자마자 홀랑 도박장에 가서 탕진한 걸 모를 줄 알고?”

지적당한 하인은 그대로 고개만 푹 숙였다.

대부분 억울하다 하긴 했으나 변명을 찾기 어려웠다.

그럴싸한 핑계를 둘러대도 어떻게 알았는지 마틴이 바로바로 지적했으니까.

“그간 부당하게 취한 이득을 압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지!”

“하지만……!”

“하지만, 뭐! 지금까지 아가씨를 무시할 대로 무시해놓고선 어디 충성스러운 척하려 해!”

마틴은 그들을 얼른 내쫓으라는 듯 주방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당연히 주방 일에 익숙해 완력이며 요령까지 뛰어난 그들에게 버틸 수 있는 사용인들은 없었다.

그들은 각자 트렁크에 소지품 몇 가지와 남은 급료만 가지고서 세르히 백작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 *

물론 사용인 정리만 한 건 아니었다.

밀즈 부인과 도라가 이 저택에서 패악질을 부린 건 불과 2년여인데, 그들이 남겨둔 것이 참 많았으니까.

“정말 대단했구나, 두 사람도 그렇고……. 다른 하인들도.”

안토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밀즈 부인의 금고에서는 무료 5골드나 나왔고 다른 하인 중 하나의 방에서는 없어졌던 선대 백작 부인의 유품까지 나왔다.

‘도라만 손댄 줄 알았더니…….’

아주 작당하고 훔친 모양이었다.

‘이러니 그렇게 찾았는데도 없었지.’

유품 중 일부는 예전 삶에서 끝까지 못 찾은 것도 있었다.

20여 년 만에 다시 보게 된 모습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 외에도 상당한 양의 돈과 잃어버린 귀중품을 찾을 수 있었다.

마틴은 크게 안도하며 말했다.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아가씨의 건강이 제때 회복되어서요.”

“마틴.”

“하마터면 마님의 물건을 영영 잃어버릴 뻔하지 않았습니까.”

마틴은 가지런히 정리된 백작 부인의 유품을 보며 감상에 젖은 얼굴이 되었다.

“모두, 마님께서 아가씨가 장성하시면 물려주고 싶다 하신 것들인데…….”

그 얼굴을 보니 어쩐지 사과하고 싶어졌다.

자신은 이전 삶에서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으니까.

‘아니, 설사 내 손에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오래가지 못했겠지.’

예전 삶에서 제 것이 얼마나 있던가.

다른 사람의 뒤치다꺼리만 하다 보니 남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결혼 초에는 바올로와 밀즈 부인이 엉망으로 만든 백작가 복구에 보태느라 손에 쥔 것도 팔아야 했고, 그 뒤에는 남의 편이 사치하느라 허리가 휘었다.

“마틴.”

“네, 아가씨. 아이고. 제가 주책맞게…….”

“아니야,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네?”

“작은아버지가 내게 예산을 관리하라고 했다지만, 사실 난 잘 모르잖아.”

속은 도가 튼 스물여덟이라지만, 겉모습은 열두 살 어린 영애니까.

“마틴이 도와주면 좋겠어.”

“제가요……?”

“응. 예전에 어머니가 그랬어.”

안토니아는 한 번 짧게 숨을 고른 뒤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마틴이 주걱과 국자를 장부보다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가정부로 두었을 거라고 말이야.”

안토니아는 마틴의 소맷자락을 꼭 쥐며 이야기했다.

“나중에는 집사나 정식 가정부를 들여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니고…….”

“아가씨…….”

“마틴이 가정부도 같이 해 주면 안 돼?”

안토니아의 물빛 눈이 초롱초롱하게 그녀를 향했다.

어쩜 저렇게 백작 부인과 똑 닮은 눈일까.

마틴의 생각보다 빠르게 입이 움직였다.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아가씨! 폴리가 말하지 않던가요?”

“응?”

“저는 못되고 딱딱한 역할에는 아주 도가 튼 사람이랍니다!”

그 말에 안토니아가 활짝-실은 간신히 평범한 미소 수준이었지만-웃었다.

“고마워, 고마워! 마틴! 사실 되게 고민하고 있었어!”

그 사랑스러움에 마틴은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숫자와 주판의 귀찮음을 나중으로 미룰 정도로 말이다.

* * *

가장 신경 쓰이던 것도 마틴에게 넘겼는데도 안토니아는 편안하게 있질 못했다.

끝내 로레나는 걱정하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셔요, 아가씨?”

“응?”

“요즘 한숨이 느셨어요, 혹시 잘 못 주무셔요? 아니면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시거나-.”

“아냐, 아냐.”

안토니아의 부정에 폴리도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진짜요? 어제는 아가씨가 디저트를 남기셨다고 주방장님이 엄청 걱정하셨거든요. 제가 또 사고 친 거 아니냐고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참 별것도 다 걱정이었다.

식사로 배를 가득 채운 상태에서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프렌치토스트를 5조각이나 해치우는 건 힘든 법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 것과는 달리 안토니아는 사실 좀 초조한 상태였다.

약 두어 달 전 안토니아는 바올로에게만 몰래 편지를 보낸 게 아니었다.

‘혹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제대로 백작가의 인장까지 찍어 보냈다.

‘당연하지, 상대가 상대인걸!’

안토니아가 편지를 보낸 상대는 다름 아닌 트라체스 대공이었으니까.

바로 바올로가 훔친 목걸이의 주인 말이다.

트라체스 대공, 리카르도. 안토니아보다 다섯 살 위로 황제의 이복동생이었다.

안토니아가 전 남의 편과 결혼이 확정됐을 때, 바올로는 세르히 백작에게는 자신이 어울린다며 황제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실제로 그간의 사례 등이 있어 백작 위를 빼앗길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트라체스 대공이 바올로를 고발했다.

‘어디서 죄인이 백작 위를 노리는가!’

그전에도 바올로를 몇 번 보았음에도 잠자코 있던 그는 어째서인지 최종 재판에서 증인을 서주었다.

‘그날, 그 눈이 되게 안 잊혀졌는데.’

짙은 흑발, 커다란 키. 날렵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에 강인한 턱선의 소유자라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날 대공의 푸른빛이 섞인 자안이 강렬하게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호의적인 감정이라곤 없었을 텐데도 리카르도 트라체스는 자신이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실은 트라체스 대공가에 편지를 보낼 때, 필요하단 걸 알면서도 손이 머뭇거렸으니까.

‘그러다 겨우 보낸 건데, 왜 답이 없는 거람. 지금 잡으면 본인도 나도 편할 텐데.’

안토니아는 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자 폴리와 로레나가 웃으며 안토니아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응, 왜? 나 또 한숨 쉬었어?”

“네!”

“그러니까 나가요!”

어느새 준비한 건지 두 사람이 소풍 바구니를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 * *

어느덧 11월 초입이었다.

두 사람의 걱정에 따뜻하게 옷을 껴입고서야 호숫가에 나올 수가 있었다.

“나오니까 좋으시죠, 아가씨?”

“그러게. 진작 나올걸.”

“그럼요, 주방장님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도 챙겨주신걸요.”

그렇게 신나고 먹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배가 더부룩해졌다.

‘좀 걷다 올까, 이 근처를 산책한 것도 되게 오래됐으니까.’

안토니아는 외투를 꿰입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택으로 돌아가시게요?”

“아니, 조금만 산책하고 올게.”

“그럼 저희도-”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려는 두 사람을 보며 안토니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잠시 혼자서 저~기까지만 다녀올게!”

안토니아는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오솔길로 들어섰다.

혼자서 좀 생각하고픈 게 있었으니까.

‘이렇게 느긋하게 여길 산책한 게 얼마 만이더라.’

호숫가 근처에는 자그마한 숲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 안토니아는 이 길을 부모님과 함께 걷곤 했다.

하지만 열 살 이후엔 그럴 기회가 없었다.

돌아가신 직후에는 처음에는 슬퍼서, 나중에는…….

‘작은아버지가 숲을 베어버려서 볼 기회가 없었지.’

이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는 백작 부부가 안토니아를 위해 지어준 자그마한 오두막도 있었다.

나온 김에 거길 보고 싶었다. 이미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인정했다지만 정말이란 증거가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저 제 남은 행복 중 어느 것도 아직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곧 작은아버지가 그자를 보낼 테니까.’

물론 바올로와의 편지는 매우 온화했다. 안토니아는 여전히 순진한 조카인 척했고 바올로도 작은아버지로서 너그럽게 굴려 했다.

‘하지만 날 순순히 믿을 리가 없지.’

밀즈 부인이라는 좋은 감시역이 없어진 이상, 바올로가 새로운 사람을 보내지 않을 리가 없다.

트라체스 대공가 때문에라도 영지에 당장 들어올 엄두는 나지 않을 테니까.

안토니아는 바올로가 보낼 ‘추잡한 자’에 대한 생각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상대할 방법은 물론 생각해두긴 했지만-

그때였다.

갑자기 회색의 커다란 것이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

몸이 그대로 떠밀렸다.

늑대였다. 눈앞에서 앞섶을 장식한 리본이 뜯겨 휘날리듯 날아갔다.

늑대는 앞발로 안토니아를 누른 채 ‘크르릉-’거리며 당장에라도 날카로운 이빨로 제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굴었다.

‘……마, 말도 안 돼.’

이렇게 또 어처구니없이 죽게 된다고?

한 번 죽음을 경험해서일까, 아니면 현실감각이 없어서일까.

두려움 대신 억울한 감정이 먼저 솟았다.

그러나.

탕-!

어디선가 난 총소리와 함께 늑대가 픽 옆으로 쓰러졌다.

어깨 근처를 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뒤따르듯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총소리? 누가…….’

안토니아는 혼란 속에서도 총소리가 난 곳을 찾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흉악할 정도로 커다란 장총과 어울리지 않는 더없이 아름다운 외모의 소년이 서 있었다.

만약 늑대가 여전히 제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면, 분명 저 소년이 자신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저세상으로 데려갈 신의 사도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안토니아는 일어날 생각도 못 한 채 소년을 바라만 보았다.

소년은 장총을 맨 채 천천히 곁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 현실감 없는 외모라고 생각했다.

짙은 갈색빛의 머리카락은 보들보들하게 흔들렸고 짙은 푸른빛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허름한 차림새만 아니었다면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얼굴에서 귀티가 흘렀다.

정말로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조금 딱딱한 무표정만 빼면 말이다.

“손을 빌려줘야 하나?”

소년은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안토니아에게 손부터 내밀었다.

주춤거리며 손을 잡자, 소년은 보기와는 다르게 강한 힘으로 안토니아를 일으켜 세웠다.

“옷이 엉망이 됐네.”

“……그, 어…….”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치 회귀한 직후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고이기까지 했다.

‘왜?’

진짜 죽은 것도 아닌데.

너무 이상했다.

지난 삶까지 통틀어 표정 없는 병이라고 남의 편이 말할 정도로 그녀의 감정변화는 적은 편이었으니까.

소년도 자신도 손을 꼭 잡은 채 얼어붙었다. 덕분에 고맙다는 말 대신 사과부터 먼저 입에 담았다.

“미, 미안…….”

“……아니, 괜찮, 괜찮아.”

소년은 당황한 얼굴 그대로 손을 잡고 있어 주었다. 그러기를 수 분, 안토니아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회귀 직후, 죽었단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남의 편에 대해서도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시작했으니 괜찮다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까워졌나 봐.’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머릿속으로 백작저의 다른 사람들이 주르륵 생각났으니까.

남편 손에 목이 졸릴 때는 그저 화가 나고 억울하단 생각만 들었는데.

“여기.”

안토니아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나자, 소년이 사탕을 내밀었다.

“좀 진정이 될 거야.”

“고마워…….”

안토니아가 껍질을 까 입 안에 넣자 소년도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마치 여름날 장미처럼 화사해서 안토니아는 제 눈을 문지르고 싶었다.

열다섯 정도 되었을까, 소년은 딱 자신보다 두셋 정도 많아 보였다. 게다가 낯선 얼굴이었다. 적어도 회귀 전에는 보지 못했다.

‘이렇게 예쁜 얼굴, 한 번이라도 봤으면 절대로 까먹지 못했을걸.’

나름 회귀 전에 외모로 유명한 사람들을 보지 못한 게 아닌데도 말이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아니야, 그냥 지나가는 길에. 그보다 얼른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응?”

소년은 늑대의 근처를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죽은 게 아니야, 그냥 서너 시간 정도 잠들 게 한 거지.”

“……아.”

안토니아는 그제야 소년을 다시 보았다. 겨우 열다섯, 생각해 보면 어지간히 특출난 실력이 아니고서는 기사 서임을 받지 못했을 나이였다.

‘견습기사구나.’

보통 견습기사들은 실탄 대신 수면탄을 가지고 다니니까.

“그, 그럼 이 늑대는 어떻게 해?”

“우선은 피해야지. 그 뒤에 정식으로 기사를 보내거나-.”

“네가 모시는 기사님은?”

“응?”

안토니아의 말에 소년이 되물었다.

“견습기사 아니야? 내가 착각했어?”

견습기사가 아니면 누가 저 커다란 장총에 수면탄을 가지고 다닌단 말일까.

게다가 소년이 입은 차림새도 딱 그랬다. 비록 예쁜 얼굴이라 어지간한 귀족과 비견해도 고급스러운 차림새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긴 했지만.

소년은 잠시 안토니아를 보며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그럼, 그 실례가 안 된다면 네가 모시는 기사님께 부탁 하나 해도 괜찮을까?”

“늑대를 토벌해달라고?”

“응, 이대로 두면 분명 다치는 사람이 나올 테니까.”

소년은 그 말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 건 보통 영주님이 의뢰할 일인데.”

“지금은 내가 해야 해.”

“……네가?”

“내가 세르히 소백작이니까.”

지금은 백작 영애라고 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효과적일 터였다.

안토니아의 말에 소년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당황한 걸까?’

지금까지 소년은 친구 대하듯 안토니아에게 말했으니까.

“그렇구나, 네가……. 아니, 아가씨나 소백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소년은 어쩐지 익숙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은 그런 건 상관없어. 기사님에게 부탁해줄 수 있어?”

“아, 그럼, 물론이지, 아니 물론이에요.”

어쩐지 소년은 높임말이 익숙지 않아 보였다. 귀족을 만나보지 않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높임말을 쓸 환경이 아니었던 걸까.

“그런데 소백작님이면 영지 내 기사단을 움직여도 될 텐데.”

“지금은 없어.”

“지금은?”

안토니아는 그 말에 대답 대신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작은아버지와 밀즈 부인이 돈벌이용으로 다른 곳으로 다 돌려버린걸.’

솔직히 세르히 백작령은 어지간해서는 평화롭기 그지없어서 원래도 기사단 규모가 크지 않았으니까.

‘혹시 예전에 작은아버지가 숲을 베어버린 거, 늑대 때문에 죽을 뻔하기라도 했던 걸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무튼 바올로는 기사단이 그저 백작령에 상주하며 급여를 타가는 걸 못 견뎌 했다.

그래서 마물이나 짐승이 출몰하는 다른 영지에 용병으로 보내 돈을 벌도록 했다.

“보수는 신경 써서 준비할게. 혹시 원하는 게 있으면-.”

“그럼 부탁할, 아니 부탁드릴 게 있긴 해요.”

“어떤 건데?”

“실은 겨울 동안 머무를 곳이 필요한데.”

안토니아는 그 말에 좀 고민했다. 백작저에 들이기는 애매했다.

‘그랬다가는 바올로가 그 추잡한 자를 보냈을 때, 좀 귀찮아질 것 같아.’

분명히 왜 기사를 불렀냐고 물을 테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하면 이 추억 가득한 숲을 없애버릴 것만 같았다.

‘추억……?’

안토니아는 그제야 왜 자신이 이 오솔길에 들어왔는지를 깨달았다.

“이 앞에 오두막이 있어.”

안토니아는 즉시 발을 옮겼다. 오솔길을 10분 정도 걸어가자 끝에 아담한 오두막이 있었다.

‘정말로 있어.’

시야에 오두막이 들어오자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안토니아는 걸고 있던 로켓 속에서 자그마한 열쇠를 꺼내 오두막 문을 열었다.

2년 정도 비워두긴 했지만 먼지가 좀 쌓인 것 외에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방도 두 개 있고 부엌, 욕실도 있어. 나무를 해다 불을 때야 하지만, 아. 하인을 보내줄게.”

안토니아의 말에 소년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하인까지는 필요 없어.”

“……그래?”

“응.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그럼 음식 재료만 주기적으로 가져다주면 될까?”

“응, 물론이지. 겨우 늑대 처리 정도인데, 뭘.”

소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기사님이 의뢰를 받아준다는 뜻이지?”

“아, 응. 아니, 맞아요.”

어느새 반말로 돌아갔던 소년이 다시 어색하게 높임말을 썼다.

안토니아는 재밌어하며 소년에게 말했다.

“그냥 편하게 말해.”

어차피 이번 겨울에만 볼 상대인데, 게다가 또래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그러고 싶었다.

이렇게 어릴 때가 아니라면 편하게 지낼 상대를 찾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자신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란 생각에 마음이 더 편해진 걸지도 몰랐다.

“그럼 보수로는 1골드 정도면 될까?”

“응? 아니야, 머물 곳도 준비해주는데-”

“겨울 동안 여기 지낼 거라고 했잖아? 백작령에는 기사님이 할만한 일이 적은데…….”

자신에게라도 넉넉히 받아야 겨울을 나고 떠날 때 여유가 있을 것이다. 도움 주는 사람에게 인색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1골드가 적은 게 아니라면 하인을 시켜서 보낼게.”

“그래.”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겸연쩍은 미소를 보였다. 순간적으로 그 얼굴이 어디선가 본 것 같았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왜?”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소년에게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어, 내 이름?”

“응.”

“릿-.”

“릿?”

반사적으로 말하려던 소년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곧 한 번 목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리샤르.”

“리샤르?”

“그래, 리샤르.”

소년은 눈을 슬쩍 찡그리며 이야기했다. 분명 본인 이름일 텐데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그러나 안토니아는 그와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보들보들한 솜털 같았으니까.

리샤르는 장총을 고쳐 매며 말했다.

“데려다줄게.”

“괜찮아, 이 길만 빠져나가면 하녀들이 기다리니까.”

“길 중간에 아직 늑대가 자고 있는데?”

그 말에 안토니아는 더 거절하지 않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잠들었다곤 해도 그 길을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 또 몸이 떨릴 것만 같았으니까.

뜬금없이 나타난 리샤르의 존재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였으나 배려 깊게도 깊게 묻진 않았다.

그러나 소중한 아가씨의 일엔 전혀 달랐다.

“아가씨! 넘어지시기라도 한 거예요?!”

“늘 조심히 다니셔서 한 번도 이렇게 드레스가 더러워진 적이 없었는데.”

“어디, 어디 다치셨어요! 얼른 보여 주세요!”

리샤르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호들갑 떤 탓에 안토니아는 홧홧하게 속 안에서 열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 * *

탕-!

슥-.

짙은 밤, 백작저 근처 자그마한 숲속에서는 숨죽인 듯한 총소리와 칼날을 휘두르는 소리가 퍼졌다.

“크르릉-!”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을 위협하듯 드러내며 소년을 위협했다.

그러나 소년은 냉랭한 얼굴로 짐승의 턱 아래로 총구를 박아넣었다.

지난 오후, 어린 소녀에게 보여줬던 해사한 얼굴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탕-!

또 한 번의 총성과 함께 짙은 갈색 머리카락 소년의 얼굴 위로 피가 후두둑 튀었다.

소년은 소매로 얼굴을 슥 닦으며 곁에서 다른 늑대, 아니 늑대 모습을 한 마물을 상대하던 남자에게 장총을 던졌다.

“그만 끝내, 드비.”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달빛이 소년의 얼굴을 희게 비췄다.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안토니아는 마틴에게 바로 붙잡혔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가씨! 너희들은 도대체 뭘 했어!”

안토니아는 뜻밖에 혼나게 된 폴리와 로레나를 보호하고자 서둘러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세상에! 늑대한테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요?!”

마틴이 기겁하며 안토니아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피해라곤 그냥 드레스가 좀 더러워진 정도인데.’

새 드레스라 엄청 아깝긴 하지만.

안토니아는 마틴을 진정시키듯 입을 열었다.

“그냥 좀……. 긁히거나 한 곳도 없어.”

예상한 것보다 더 소란스럽게 반응하는 마틴의 모습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로 걱정할 줄은 몰랐는데.’

안토니아의 말에 놀란 건 폴리와 로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저희한텐 그냥 또래 친구랑 놀다 살짝 넘어진 거라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저희는 그냥 아가씨가 예쁜 또래 친구를 사귄 거라고만 생각했다고요!”

폴리와 로레나도 서운한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그러나 마틴이 왜 갑자기 오두막에 사람, 그것도 남자, 정확히는 기사를 들였냐고 마치 어머니처럼 물은 탓에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틴은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걱정스러운 한탄과 함께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고, 아가씨. 주신께서 아가씨를 그래도 살피셨나 봅니다. 아가씨가 돌아가셨다면 저는 탁, 숨을 끊어버렸을 거예요.”

“마틴, 그러면 안 돼.”

“그러니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 어디 가실 때도 꼭 저 둘을 데리고 다니시고요!”

“알았어, 알았어.”

“이래서 기사들을 다 내보내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밀즈 부인과 바올로 님에게 말했는데!”

마틴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러곤 실례했다는 듯 안토니아의 몸을 풀어주며 이야기했다.

“제가 너무 놀라서 아가씨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만.”

“아니야, 어릴 때는 마틴이 많이 안아줬었잖아. 다 기억하는걸.”

“어쩜, 우리 아가씨. 똑똑하시기도 하지.”

“나는 좋아. 마틴이 꼭 안아주는 거.”

그 말에 폴리가 불쑥 손을 들고 이야기했다.

“아가씨, 저는요? 저도 여동생이랑 꼭 끌어안는 걸 희망하고 있답니다!”

“이 버릇없는 것!”

“이잉, 아가씨, 저도요, 저도요오!”

마틴의 질책에도 폴리는 안토니아에게 잔뜩 애교 섞인 얼굴로 손을 몇 번이고 들며 애원했다.

“두 사람도 괜찮아, 나한테는 가족 같은 사람이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폴리는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속에서는 어쩐지 햇빛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냉큼 끌어안은 폴리와 달리 로레나는 조금 주춤거렸다.

싫은 기색은 아니었으나 조금 겸연쩍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뭔가 아까워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안토니아는 로레나에게는 직접 다가갔다.

“아, 아가씨.”

“싫어? 싫으면 떨어질게.”

“아니에요, 그냥 좀 어색해서 그래요.”

말은 그러면서도 로레나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어쩐지 로레나에게서 감정이 과도하게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 * *

마틴은 안토니아에게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준비를 마치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안토니아 아가씨를 구해준 분들이니 똑바로 신경 써야지, 암.’

마틴의 인생에서 현재 안토니아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지난 2년간 오두막을 방치하기만 한 건 아니라지만 겨울을 나려면 여기저기 정비할 곳이 필요할 터였다.

게다가 안토니아가 ‘예쁜 또래 친구’를 사귀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백작 부부가 죽고 난 뒤 처음 사귄 아가씨의 친구가 정리도 안 된 오두막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마틴은 비장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곧 오두막 안에서 일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세르히 백작저에서 왔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기사로 보이는 붉은 머리의 사내가 정중한 태도로 마틴을 안으로 안내했다.

마틴은 안으로 들어서며 오랜 경력을 살려 집 안 상태를 점검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러나 걱정한 것과 달리 고작 하루 새에 오두막은 깔끔하게 정돈이 끝나 있었다.

그뿐만인가 한쪽 벽에는 커다란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회색 가죽이 잘 손질되어 걸려 있기까지 했다.

‘2년을 여기서 지낸 것처럼…….’

마틴은 당황을 감추며 우선 기사에게 감사 인사부터 했다.

“세르히 백작저, 가정부를 맡은 마틴이라고 합니다. 마틴 씨나 마틴 부인 중 편한 쪽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저는 드비라고 합니다.”

“드비 경, 저희 아가씨를 구해 주셨다지요,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틴은 허리를 숙이며 드비에게 예를 차렸다. 그러자 드비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제 아가씨를 구한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한쪽 방에서 짙은 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마틴 씨.”

“……그럼 우리 아가씨를 구한 게.”

“네, 이쪽에 있는 제, 그러니까. 견습기사 리샤르입니다.”

드비는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리샤르를 소개했다.

마틴은 속으로 경악했다. 리샤르가 늑대를 쓰러트렸다기에는 어려 보여서도 있었지만.

‘예쁜 친구라고 해서 영락없이 여자앤 줄로만 알았는데.’

안토니아도 그렇고 두 하녀도 제일 중요한 걸 홀랑 빼놓고 소개하질 않았는가!

‘여벌 옷도 그래서 죄 드레스로 챙겨왔는데.’

물론 예쁘긴 예뻤다. 왜 세 명이 모두 예뻤다고만 이야기한 건지 이해가 갈 정도로.

마틴은 30년 제 사용인 경력을 걸고서 침착하려 애썼다.

“하인은 필요 없다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혹 필요한 게 있다면 우편함에 넣어두세요. 이틀에 한 번 하인을 보내 확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는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곧 마틴은 데려온 하인에게 음식 재료와 머무르는 데 도움이 될만한 각종 도구를 내리라 일렀다.

그러고는 두 사람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아가씨께서 전하라 하신 겁니다. 보수의 반과 정식 의뢰서가 들어 있습니다.”

드비는 봉투를 정중하게 받아 가볍게 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리샤르는 마틴에게 물었다.

“소백작님이 많이 놀란 것 같았는데 괜찮은가요?”

그 말에 마틴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아가씨가 아니라 소백작이라고 부르다니, 이 예쁘고 어린 소년에게 묘한 호감이 들었다.

‘그렇고 말고, 아가씨는 명실상부한 세르히 소백작님이지.’

안토니아 말고 누가 백작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남자아이라는 걸 깨닫고 경계했던 마틴은 조금 누그러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또 기회가 되면 아가씨와 어울려 주세요.”

“저야말로 부탁드리고 싶어요.”

리샤르는 눈을 사르르 접으며 부드러운 얼굴로 마틴에게 말했다.

그 모습이 정말로 예쁘고 화사하게 보였으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드비가 내용을 확인하고 답했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비 경.”

“네, 맡겨만 주세요.”

마틴은 한 번 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오두막에서 나섰다.

드비는 한참을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마틴과 그 하인의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제가 본 건 뭐랍니까?”

“뭐가.”

조금 전까지 마틴에게 화사하고 공손하게 굴던 얼굴은 싹 사라진 채 리샤르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드비에게 대꾸했다.

“전하는 예쁘단 소리 나올 법한 얼굴 하는 거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응.”

“그런데 도대체……?”

드비의 질렸다는 듯한 얼굴을 무시한 채 리샤르는 그의 손에 있던 안토니아의 의뢰서를 낚아챘다.

“정말 전하의 생각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세르히 백작령에 오자고 하질 않으시나, 안 어울리게 이런 작은 오두막에 머무를 거라고 하질 않나. 거기에 이제 전하가 견습기사고 제가 스승인 정식기사요?”

“기사 맞잖아.”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리샤르를 보며 드비는 혀를 찼다.

“그렇지요, 저는 기사고, 전하는 그 나이에 마스터시, 악!”

“한 번만 더 마스터란 소릴 입에 올렸다간 혀가 잘릴 줄 알아.”

“전하!”

“괜히 수도 누군가의 귀에라도 들어갔다간 네 혀가 잘리는 걸로 끝나지도 않겠지만.”

드비는 그 말에 제 입을 합 하고 양손으로 가렸다.

리샤르는 눈을 찡그리며 품 안에서 고급 종이를 사용해 쓰인 편지를 꺼내 의뢰서와 비교했다.

그는 곧 예상대로라는 듯 무심하게 말을 툭 내뱉었다.

“정말이었군.”

“네? 뭐가 정말입니까.”

“정말로 세르히 백작 영애였다고.”

“네? 아니, 그럼 진짜지. 가짜겠습니까? 저렇게 가정부까지 직접 찾아와 인사하는데.”

리샤르는 그 말에 드비의 허벅지를 가볍게 후려쳤다.

“앗, 아악. 아픕니다.”

“넌 좀 진중해질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들 앞에 있는 거의 반만큼이라도 좀 내 앞에서도 진지해져.”

“네? 그게 급료라도 올려준답니까.”

“이번에 잘하면 진짜 올려주지.”

“하겠습니다. 전하.”

그제야 조용해진 드비의 태도에 만족하며 리샤르, 다른 이름 트라체스 대공 리카르도는 안토니아의 필체를 바라보았다.

다시 보아도 놀라웠다.

‘아무리 봐도 겨우 열두 살 어린 소녀가 쓸 만한 필체가 아니라는 게.’

물론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울리지도 않게 견습기사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저, 아마도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겨울 호수 같은 그 눈이 이상하게 박히는 기분이라서.’

어린 소녀인데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마치 스스로 연마해 빛날 것 같은 보석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긴 해도 그전까지는 평범했을 귀족 영애에게 어째서 그런 감각이 느껴진 건지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감상에 잠긴 리샤르와 달리 안타깝게도 드비의 진중함은 채 3분을 가지 못했다.

그는 리샤르에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여기서 겨울을 나실 겁니까?”

“그래, 나야지. 이 편지도 편지지만.”

제 손아귀에서 어디까지 도망치나 두고 보았던 목걸이 도둑의 위치를 제보한 걸 보면 안토니아에게 곤란한 일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지간하면 나타날 일 없는 이 동부에 마물이 보인다는 건, 일해야 할 놈들이 놀고 있단 소리니까.”

소년의 눈동자에서 포식자의 이채가 감돌았다.

늘 그렇듯 불행은 예고 없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법이었다.

하필 평소보다 일찍 일과를 시작한 게 문제였을까.

산책을 나서려던 안토니아는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급작스레 들이닥친 방문자를 맞아야만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토니아 아가씨. 포미스 번트라고 합니다.”

남자는 정중하게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댄 채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했다.

그는 포마드 형태로 싹 밀어 넘긴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눈은 가로로 길고 살짝 찢어진 듯한 형태였다.

눈꼬리가 조금 올라가 얼핏 사납고 비열해 보일 수 있는 인상이었으나 작고 동그란 알의 안경을 끼고 있어 처음 보는 사람이 그걸 눈치채기란 어려웠다.

키와 체격 모두 평균에 가까웠으나 신기할 정도로 옷맵시가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안토니아의 곁에서 마틴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보통 껍데기만 저렇게 번지르르한 놈 치고 제대로 된 자가 없었으니까.

“번트 씨?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 이런. 세르히 씨가 당연히 연락을 드렸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번드르르한 자세로 마틴에게 봉투를 건넸다. 미덥지 못한 얼굴로 봉투를 받아 든 마틴은 확인 후 눈을 찡그렸다.

정말로 바올로 세르히의 서명이 적혀 있었으니까.

그러나 안토니아는 소개장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바올로가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 낯짝을 또 보게 되다니.’

얼굴을 본 순간부터 안토니아는 속으로 욕을 수백, 수천 번 하고 있었다.

포미스 번트.

솔직하게 말해 또 보고 싶은 이름이 아니었다.

‘밀즈 부인을 내쫓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더 빠른데.’

적어도 해는 넘기고 올 줄 알았다. 예전에는 열네 살이 넘어서야 왔으니까.

지금 안토니아는 고작 열두 살이었으며, 몇 달 후에야 열세 살이 될 예정이었는데 말이다.

안토니아는 예의상 마틴에게서 건네받은 소개장을 열어 확인했다.

예상대로 소개장 안에는 그를 ‘가정교사’로 보냈단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정교사는 무슨, 잘 쳐줘야 사기꾼에 난봉꾼이지.’

애초에 예전에 영지에 왔던 것도 바올로와 함께 작당을 벌이다 걸려 쫓기듯 영지로 숨어든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겉껍데기만은 멀쩡한지라 지난 삶, 백작저에서 벌인 염문도 수십이 넘어갔다.

몇 번쯤 도가 지나쳐 그 밀즈 부인까지도 한 소리 할라치면.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여성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입니까. 그럼 밀즈 부인께 앞으로 툴툴거리며 대하면 될지요?”

화려한 미소까지 보이며 입을 막아버리곤 했다. 밀즈 부인은 돈을 정말 사랑했지만 껍데기에도 약한 사람이었으니까.

하도 벌인 일이 많아서 자동적으로 머릿속에서 각종 일화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그를 내쫓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랬다가 바올로가 영지에라도 쫓아오면 그게 더 손해였으니까.

“선생님?”

“그렇습니다. 아가씨.”

안토니아가 역함을 참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부른 그 호칭에 포미스의 입꼬리가 높게 솟았다.

그는 턱을 치켜들며 멋들어지게 맨 자신의 리본 타이를 양옆으로 매만졌다.

“앞으로 제가 아가씨께 많은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포미스 선생님.”

안토니아는 역한 마음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그와 첫인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엔트런스 홀로 내려오던 로레나가 사색이 되어 몸을 떨던 것을.

* * *

포미스는 당장에라도 첫 수업을 진행하고 싶어했으나, 안토니아는 그를 배려하는 척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이곳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시잖아요?”

“이리 오시지요, 번트 씨. 머무실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포미스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마틴은 눈치 빠르게도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포미스는 영 아쉬운 눈초리였으나, 더 우기지 않고 얌전히 마틴을 따라나섰다.

안토니아는 그 길로 정원이 아니라, 아예 호숫가 산책을 나왔다.

놀라고 역한 제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으니까.

‘내 인생에 그나마 도움이 좀 된 사람이긴 하지만.’

아주, 아주 티끌만큼은 고마운 마음도 있기는 했다. 그는 실제로 가정교사의 역할을 하긴 했으니까.

‘비록 그게 잘 쳐줘야 상인, 까놓고 보면 사기꾼에게나 이로울 지식이긴 했어도 말이야.’

뭐 덕분에 지난 삶에서 적어도 바올로에게서는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대신 그는 안토니아가 성인이 되기 전에 쫓겨나야만 했지만.

‘그래, 한번은 봤어야 할 사람이야.’

포미스는 바올로의 약점을 가진 것 같았으니까.

무엇보다 그가 오는 게 빨라졌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잘하고 있단 증거이기도 했다.

자신이 알던 것과 달라진 상황에도 안토니아는 크게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다 들이닥치면 돌파구가 생기는 법이니까. 제 목을 조를 남의 편만 없다면 말이다!

지난 삶 덕에 안토니아는 어지간한 고생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입으로 나오는 한숨까지 막을 방도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때.

“아가씨…….”

“응? 어?! 로레나?? 왜 그래?!”

무심코 돌아섰던 안토니아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로레나를 깜짝 놀란 얼굴로 보았다.

“번트 씨를 내쫓으면 안 될까요? 네?”

“갑자기 왜 그래?”

“저는, 저는……. 흡.”

평소 차분하던 로레나가 급기야 울음까지 터트렸다.

안토니아는 폴리가 눈치 빠르게 깐 자리 위로 로레나를 끌어 앉히며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왜? 이야기해 봐, 포미스 선생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덜컥 든 생각은 혹시라도 포미스가 옛날에 로레나에게 손이라도 댔을까 하는 거였다.

아직 로레나는 너무 어렸으니까. 만약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포미스와 만났다고 생각하면 잘 쳐줘야 겨우 열 살 근처였을 거다.

“저는, 저는……. 아가씨를 잃고 싶지 않아요.”

“나? 나를 왜 잃어.”

“하, 하지만……. 번트 씨는, 제, 제 동생을…….”

“뭐?!”

로레나가 아니라 로레나의 동생에게 손을 댔단 말이야?!

‘미친 변태 새끼!’

예전에 저택에서 있을 때는 적어도 성인인 하녀들만 건드렸는데!

안토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저택으로 돌아가 그의 자랑인 낯짝이라도 못 쓰게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당장에라도 뛰어가려는 안토니아에게 로레나는 서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번트 씨는, 어린 제 동생을 죽게 만들었어요!”

“……동생을 죽게 했다고?”

“네……. 저는, 저는……. 아가씨까지 그렇게 잃고 싶지, 흑, 않아요. 아가씨는, 아가씨는…….”

“로레나, 천천히, 천천히 이야기해 봐. 포미스 선생님이 로레나의 동생에게 뭘 했는데?”

차마 손댔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스물여덟 살이 아니라 지금 자신은 고작 열두 살이었으니까.

“로레나의 동생을 때렸어? 아니면 목이라도 졸랐어?”

로레나는 그 말에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번트 씨는 저희 마을에 있을 때 늘 정중하셨어요. 오늘 저택에서 한 것처럼요.”

“그럼 동생은 왜……?”

안토니아도 겨우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속으로 포미스를 변태 새끼라고 욕한 건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안토니아는 괜찮으니까 말해 보라는 듯 로레나의 손등을 두드렸다.

한 번 울음을 터트려서일까, 정신이 확 든 듯한 로레나는 조금 주저하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6년 전, 포미스 번트가 그녀의 마을에서 지내던 때의 이야기를 말이다.

“번트 씨는 신전 일을 거들며 아이들에게 종종 셈법이나 글자를 가르쳐주었어요.”

“선생님이었구나.”

“네, 저희처럼 가난한 집 아이들이 그런 걸 배울 기회는 적어 부모님도 적극 저와 동생을 보내곤 하셨어요.”

로레나는 포미스가 마을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회귀 전 세르히 백작저에서 하던 것보다도 더 그는 호인인 척 행동했다.

어린 시절 자신도 그 마을 신전의 도움을 받아 클 수 있었다며 대가 없이 일하고 아이들을 가르쳐 마을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포미스 번트는 괜히 그런 일을 한 게 아니었다.

“저희 마을 뒷산에는 아주 자그마한 샘이 있었어요.”

“샘?”

“네, 입구가 아주 작아서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샘이었어요.”

마을에서는 모두가 아는 아이들만의 놀이터였다. 입구가 워낙 좁으니 무서운 짐승이 들어올 일도 없었고 샘 주변에는 안전한 열매나 꽃들만 자라 어른들도 안심하고 아이들이 놀도록 했다.

너무 익숙한 곳이라서일까, 정작 마을 사람들은 몰랐으나 그 샘 안쪽에는 사실 마석이 자라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로레나의 마을에서 자랐던 포미스는 크고 난 뒤에야 그게 마석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샘에서 마석을 가져올 어린아이가 필요했다.

“하필 그때 막냇동생이 아팠어요.”

“……그럼.”

“번트 씨는 동생에게 막내가 아프지 않을 약을 구해주겠다고 말하며 꾀어냈어요.”

로레나의 동생은 그 말을 믿고 샘에서 피어나는 신기한 보석꽃을 따주었다.

그걸로 끝났다면 로레나도 포미스 번트를 이토록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바보 같게도 동생의 몸에 매일같이 상처가 느는 데도, 그냥 굴렀다고……. 그냥 넘어졌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요.”

로레나는 이른 새벽, 동생이 자리에 없는 걸 알고 깜짝 놀라 찾으러 샘 쪽으로 향했다.

동생은 요즘 들어 아침부터 샘에서 꽃을 따와 아픈 막내의 침대 곁에 놓아주곤 했으니까.

얼른 낫길 바라는 귀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동생은 포미스 번트의 일을 돕고 있던 거였어요! 그자는 일을 끝마쳐야 막내의 약을 구해 준다고 말했고요!”

로레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말렸어야 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자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약을 영영 구하지 못할 거라 한 말에……. 저는, 바보같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 말려도 괜찮다는 동생의 말에, 매일같이 아파 우는 막내의 모습에 로레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로레나는 매일같이 새벽이면 언덕에 올라가 동생이 샘에서 일하는 걸 바라보았다. 넘어질 때면 자신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으나 참고 또 참았다.

그러기를 며칠, 기어코 일이 터졌다.

“갑자기 마수가 나타났어요. 언덕 너머에서 보았지만 그 새카만 형태가 아직도 기억나요, 그리고 그자는…….”

로레나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겨우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제 동생을……. 그 마수에게 떠밀더니, 혼자 도망치더군요.”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로레나는 다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겨우겨우 이야기했다.

“보자마자 저는 달려갔어요, 차라리, 차라리 제가 죽어도 제 동생을 구하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제 발이 너무 느렸어요.”

로레나가 도착했을 때 마수도 포미스도 이미 사라진 뒤였고 핏자국이 튄 동생의 치맛자락만 남아 있었다.

“울면서 내려가 부모님에게도, 마을에도 알렸어요! 그러나 포미스 그자는 이미 떠난 뒤였어요. 신전에도 말해 보았지만…….”

로레나의 몸이 떨렸다. 안토니아는 말하지 않아도 그 뒤 어떻게 일이 흘러갔을지가 빤히 보였다.

‘신전이 몰랐을 리가 없지.’

포미스는 마석 중 일부를 신전에 주었을 것이다. 물론 신전에서는 마석을 불경한 것 취급한다지만 그게 돈이 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마물까지 나타났다고 했으니.

‘아마 포미스가 달아나는 걸 눈감아 준 것도 신전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로레나의 이야기를 들은 신전이 그를 얌전히 놔줬을 리가 없었다.

“동생이 그렇게 살리고 싶어 하던 막내도 오래지 않아 눈을 감았어요. 부모님은 신전에 항의하다 밉보여 제대로 된 일도 할 수 없었고요.”

로레나는 자신의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참으로도 아픈 눈으로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안토니아마저 잃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러니까, 아가씨……. 그자를 곁에 두지 마세요! 아니, 제가……. 제가 그자를 제 손으로 죽여버릴래요! 아무도 못 건드리게, 저는 그럴 수 있어요!!”

로레나가 강하게 말했다.

“……그때, 그때 그랬어야 했어요. 저는, 저는 그랬어야 했어요! 바보같이…….”

그 목소리에 안토니아도 분노와 안타까움을 같이 느꼈다. 평소 화 한 번 내지 않는 로레나였기에 더욱.

안토니아는 눈물범벅이 된 로레나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으며 다독였다.

“괜찮아. 로레나.”

“아가씨…….”

“하지만 로레나가 그를 죽일 필요는 없어.”

“복수도, 복수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신가요?”

그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해야지. 나는 복수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할 거야.”

“그럼…….”

“네가 다쳐가면서 그자에게 복수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안토니아는 자신을 믿으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아가씨…….”

로레나는 그 말에 안토니아를 바라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안 돼요! 바올로 님이 아가씨를 해치려고 그자를 보낸 거라면…….”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럴 생각이었다면 밀즈 부인이 있을 때 날 처리하는 게 더 간단했을 테니까.”

로레나는 모르겠지만 밀즈 부인과 포미스는 바올로와의 관계가 달랐다. 포미스는 밀즈 부인만큼 바올로에게 맹목적이지도 않았고 충성스럽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해야 작위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려주진 않았을 테니까.’

회귀 전, 포미스는 안토니아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바올로를 내쫓고 백작가를 손에 넣자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그사이 포미스가 그런 식으로 안토니아를 꾀어냈다는 걸 눈치챈 바올로가 그를 쫓아내 버렸고.

‘로레나의 이야기 덕에 더 확실해졌어.’

포미스 번트는 무엇보다도 돈을 사랑하며 비열한 자라는 게 말이다.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로레나.”

“아니에요, 못 볼 꼴을 보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

로레나의 이야기를 들어서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자의 실체를 더 잘 알게 되어서.

덕분에 그자를 더 미워할 이유가 생겼어.

포미스 번트는 찢어 죽일 변태는 아니었지만 불태워도 속이 시원찮을 나쁜 놈이었다.

안토니아는 포미스를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만나지 못했다면 저런 나쁜 놈을 내 인생, 아니 이 세상에서 치워버릴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안토니아는 로레나의 손을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걱정 많은 큰 언니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 * *

다음 날, 안토니아는 수업을 준비하며 폴리와 로레나에게 특이한 내용을 지시했다.

“최대한 수수하고 불쌍한 차림새를 해야겠어.”

“수수하고 불쌍한 차림새라니, 예전처럼요?!”

콧노래까지 부르며 안토니아의 옷장을 열었던 폴리가 펄쩍 뛰며 물었다.

“응.”

“어째서요? 기껏 이렇게 예쁘고 아가씨께 잘 어울리게 꾸며드릴 수 있게 되었는데!”

폴리는 싫다는 얼굴로 옷장을 바라보았다.

안토니아는 지난달, 밀즈 부인을 내쫓으며 자신의 수수한 드레스나 구두 중 일부는 남겨둔 참이었다.

‘원래는 작은아버지를 눈속임하려고 둔 거였지만.’

편지로 드레스며 구두를 여러 벌 맞췄다고 듣는 것과 실제로 그 드레스나 구두를 보는 건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폴리도 어제 들었잖아? 포미스 선생님이 로레나의 동생에게 한 짓을 말이야.”

“번트 씨를 속이시려고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포미스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작은아버지에게 알릴 텐데 첫 수업 때는 조심해야지.”

폴리는 그 말에 잔뜩 아쉬운 얼굴로 안토니아가 예전에 입던 드레스며 구두를 가지고 왔다.

적당히 낡은 티까지 나서 딱 좋았다.

‘우선은 미끼부터 드리워야지.’

돈을 사랑하는 포미스가 바올로와 손잡는 것보다 이 어리고 순진한 백작 영애를 꾀어내는 데 무게 추를 더 올리도록 말이다.

“그러니까 로레나, 조금만 기다려 줘.”

로레나는 어린 아가씨의 단단한 모습에 염려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 안토니아의 물빛 눈이 반짝였다.

* * *

“안녕하세요, 포미스 선생님.”

안토니아는 서재에 들어서며 예를 갖춰 포미스에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포미스가 금세 흡족한 모습이 되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포미스는 자리에서 일어서 굳이 자리까지 안토니아를 에스코트까지 했다.

‘장갑을 끼고 오길 잘했지.’

포미스는 그게 매너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이상하게 불필요한 접촉이 잦았다.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이 가정교사가 아가씨의 손을 굳이 잡아 이끄는 것도 말이다.

로레나의 이야기도 들었고 자신의 옛일도 있다 보니 당장에라도 그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해, 난 포미스에게서 얻을 게 있으니까.’

그가 알고 있는 바올로의 약점. 그리고 복수를 위한 방심.

안토니아는 그래서 착한 학생의 얼굴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쩐지 제가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어른이요?”

“네! 아버지 말고 다른 분의 에스코트를 받아본 건 처음이거든요!”

안토니아는 잔뜩 들뜬 말투로 말했다.

예상대로 포미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토니아는 앞으로 포미스와 지내며 별것 아닌 거에 아주 크게 반응할 생각이었다.

점차 그가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도록.

“그럼 제가 아가씨의 첫 에스코트 상대로군요. 영광입니다.”

“저도 그래요. 선생님은, 선생님은…….”

“저는요?”

“굉장히 멋진 분이시잖아요.”

안토니아는 수줍게 말꼬리를 늘였다. 포미스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마치 점잖은 신사를 흉내 내는 것처럼.

“평범한 가정교사일 뿐입니다. 아가씨께서 그리 생각해 주시니 좋군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셔요! 선생님은 작은아버지가 절 위해 보내주신 분이니……. 분명히 훌륭한 분일 거예요.”

바올로의 이름이 나올 때는 조금 두려움의 기색을 섞었다. 포미스가 점차 눈치챌 수 있도록.

안토니아는 그날부터 수업을 진행하는 내내 열심히 호들갑 떨고 포미스의 대단한 점을 어떻게든 쥐어짜내 칭찬했다.

“와, 펜을 쥐는 자세가 너무 신기해요, 제 손가락으로는 아무리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데.”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했더니 셈이 쉬웠어요! 처음으로 문제를 제대로 풀어봤어요.”

덕분에 포미스의 콧대가 점차 높아졌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에 속으로 미소 지었다.

미끼가 아주 효과적이었다.

* * *

세르히 백작 저택에 오고 일주일, 포미스 번트는 요즘처럼 답답한 적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재미없을 줄이야.’

저택에 와서 예쁜 하녀들과 놀아보려고 했더니, 가정부 마틴의 단속이 지나치게 엄했다.

하녀들에게 말이라도 좀 걸려고 하면 다들 일이 있다며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그 여자, 처음 봤을 때부터 영 마음에 안 들더라니.’

제 외모에 넘어가지 않는 여자치고 좋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자신이 공들인 미소까지 보였는데도 돌아온 건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찡그린 눈빛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안토니아를 가르치는 게 쉽다는 정도일까.

바올로의 말대로 안토니아는 아주 순진하고 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정 모르고 멍청하다고 하면 될까.

‘아니, 정확히는 애정에 굶주린 꼬마 정도겠지.’

조금만 미소를 지어주면 금방 들뜨는 게 확 보였으니까.

여러모로 편한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에 집중은 잘하고 가르치는 것도 여러 번 말하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제는.

“어머니께서 선생님에게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어요. 선생님 덕분에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하며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를 건네지 않던가. 포미스는 제 입가가 씰룩이는 걸 티 내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그뿐만인가.

“작은아버지가 급료를 지불한다고 선물하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했지만, 너무 감사해서…….”

바올로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는 듯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학생이지.’

바올로는 선대 백작 부부의 유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안토니아가 가진 게 없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아니, 실제로 가진 게 없어 보이긴 했다. 매일같이 아가씨치고는 지나치게 낡은 드레스를 입곤 했으니까.

바올로 세르히가 단속하는 게 틀림 없었다.

‘그런데도 세르히 씨가 그 아가씨에게 선물하지 말라고 굳이 말한 건.’

분명 자신이 안토니아에게 눈독 들이는 걸 막으려던 것이었을 터였다.

‘조금만 마음 주면 없는 거라도 주려고 하는 조카라는 걸 너무 잘 알았겠지. 그리고 내가 그걸 눈치챌 거라는 것도!’

자신의 똑똑함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토니아는 바올로보다도 훨씬 정당한 백작가의 후계자가 아닌가.

이런 속셈을 막으려 했다면 자신만 이 저택에 보내선 안 됐다. 아니, 애초에 자신을 믿은 바올로가 바보였다.

‘몇 달은 영지에 오지 못할 거라고 했지.’

포미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정도 기간이라면 자신이 이 저택을 집어삼키기에 충분했다.

포미스는 펜을 휘리릭 돌리며 정기 보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바올로의 입맛에 맞는 편지를 쓰는 건 포미스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저택에 오고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포미스는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아가씨, 날씨도 많이 쌀쌀해졌는데 왜 그리 추운 차림이십니까?”

“……네?”

포미스의 말에 안토니아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포미스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아가씨를 뵌 지 오래된 건 아닙니다만, 제 하나뿐인 제자가 늘 낡고 수수한 차림새인 게 마음에 걸려서…….”

그는 ‘하나뿐인 제자’와 ‘낡고 수수한’을 강조하며 말했다.

그의 말속에는 묘하게 안토니아를 낮춰보고 동정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안토니아는 부끄러운 듯 포미스의 시선을 피하며 펜만 긁적였다.

“괘, 괜찮아요……. 저는 이런 차림새여도 아, 아무렇지도…….”

“제 마음이 아파 그럽니다.”

“……네?”

“이 나라 어디를 가도 아가씨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애는 없을 겁니다!”

“선생님은 늘 제게 좋은 말만 해주시는 것 같아요.”

“제가 거짓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시는 군요,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은 거의 반 이상 진심이었다. 이런저런 사업으로 나라 곳곳을 돌아다닌 포미스였다.

안토니아는 어딜 가도 사랑스럽다며 한 번쯤 보게 될 외모의 소유자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하녀들이나 입을 법한 수수하고 낡은 옷에 구두도 싸구려임에도 말이다!

‘덕분에 아가씨의 차림새가 지나치게 수수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도 시간이 걸렸지.’

포미스는 장갑으로 덮인 안토니아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심지어 장갑조차도 어울리지 않는 낡고 짙은 색 면장갑이었다.

그러자 소녀의 물빛 눈이 어느새 길들여진 소동물처럼 포미스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에 포미스는 쾌감을 느꼈다. 이 여린 귀족 아가씨가 고작 며칠 새에 제 손아귀에 들어온 것 같아 말이다!

“이걸 보십시오, 아가씨.”

포미스는 준비해온 잡지를 안토니아 앞에 펼쳐 보였다. 수도 귀족들이 많이 본다는 가십 잡지였다.

“이 예쁜 모습을 보십시오. 아가씨도 이런 걸 입고 싶지 않으십니까?”

“…….”

안토니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잡지 사진만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걸 처음 보아 동경에 빠진 아이 같았다.

포미스는 그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 아가씨는 이렇게 화려하고 예쁜 걸 보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서만 지냈으니 더 그렇겠지.’

고작 열두 살 어린아이니 이렇게 화려한 걸 보면 당연히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선생님, 너무……. 너무 예뻐요.”

“그렇지요? 아가씨가 이런 걸 해본다고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제, 제가요?!”

안토니아는 놀란 기색으로 포미스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는……. 그러면 아주 좋겠지만……. 작은아버지가 사치하면 안 된다고, 그럼 다른 마을 사람들이 힘들어진다고 그러신걸요.”

참으로 기특한 발언이었다. 포미스는 저런 어린아이를 다루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가난하건 부자건, 평민이건 귀족이건 말이지.’

그간 다른 마을에서도 선생님인 척 접근하여 어린아이들을 이용한 덕에 뒤탈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게 자신과 바올로 세르히의 차이점이었다.

바올로는 어른들과 상대하다 꼬리를 남기지만 자신은 딱 봐도 뒤탈 없을 어린아이들만 상대했으니까.

‘예전에 재수 없게 꼬마 하나가 죽은 적은 있었지만.’

그래서일까, 그때 판 마석값은 정말 짭짤했다. 입막음용으로 절반을 신전에 넘겨야 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아깝지만.

포미스는 손을 들어 안토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녀들이 똑바로 일하긴 하는지 어린아이의 머리카락은 참 보드라웠다.

‘이 머리카락을 잘라다 팔아도 돈이 제법 될 텐데.’

포미스는 군침을 삼키며 안토니아에게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옷 한두 벌 정도야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가씨.”

“네……?”

“가지고 싶으시지요?”

포미스의 물음에 안토니아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작은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럼 말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네?!”

어린 소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진단 소리를 들은 것처럼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좋아, 역시 좋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니. 바올로는 참 멍청했다.

이런 아이에게는 채찍질보다도 당근이 더 잘 통하는 법인데.

“세르히 씨에게 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가씨와 저, 둘 다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 하지만…….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주신께서도 이런 귀여운 거짓말은 용서하실 거랍니다. 무엇보다 세르히 씨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그렇게 꾸민걸요?”

“네, 분명 아가씨의 귀여운 모습을 보면 세르히 씨도 만족하실 겁니다. 구입했다고 하지 않으면 더욱요.”

어린아이가 갈등하는 게 보였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부추기면 아이는 첫 거짓말에 눈을 뜰 것이다.

포미스는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안토니아에게 속삭였다.

“거짓말이 무조건 나쁜 게 아니에요, 가끔은 도움이 될 때도 있지요.”

“……정말로 작은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

“네, 아가씨. 저를 믿으시지요? 제가 나쁜 사람 같아 보이시나요?”

안토니아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좋은 분이에요! 제게 늘 잘해 주시는걸요!”

“그러니 아가씨 절 믿어주세요, 전 절대로 아가씨가 아플 일은 하지 않을 거랍니다.”

“…….”

안토니아가 또 망설였다. 아이는 몇 번이고 포미스와 잡지, 그리고 자신의 낡은 차림새를 보더니 결심한 듯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의상실 마담을 불러 볼래요. 저도……. 한 번쯤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선생님께도 선물해드릴래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 아가씨는 애정에 굶주려 잘해주는 사람에 익숙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덤이 생길 줄은 알았어, 고급 정장을 가질 수 있겠구나!’

포미스는 기쁜 얼굴로 안토니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아가씨. 제가 딱 어울리는 것으로 함께 골라드리지요!”

전신에 소름이 확 올랐다. 포미스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아가씨가 나쁜 짓에 발 들였단 사실에 진한 만족감을 느꼈다.

* * *

방에 들어서자마자 안토니아는 장갑과 머리 리본부터 휙 벗었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보닛이라도 쓸까 봐.”

“보닛이요?”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곧 폴리가 대야에 물을 받아 가지고 왔다.

미온수에 손을 담그니 좀 살 것 같았다. 포미스와의 수업은 고작 열흘이었는데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고역이었다.

‘예전처럼 마냥 참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선가.’

가끔 포미스가 제 손을 두드리거나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쳐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랬다가는 기껏 참으며 세워놓은 계획이 다 허사가 될 거라 견디긴 했지만.

“의상실 마담 마기나를 불러 줘.”

“드디어 번트 씨가 드레스를 사자고 그러셨어요?”

“응.”

예상보다는 오래 걸렸지만. 돈에 환장한 자이니 좀 더 빨리 반응이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둔하게 반응했다.

‘어릴 때 기억이라 아무래도 더 대단하게 느껴진 걸지도.’

열 살 무렵부터 일부러 방치당해 자라 순진한 아이에게 선생님이라며 나타났던 그는 참으로 교묘하고 아는 게 많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게다가 표정이 드러나지 않으니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표정 없는 게 실이 될 거라 생각했더니, 오히려 반대일 줄이야.

아무튼 모자라 보이는 척하며 포미스에게 과한 선물을 한 보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에 눈을 돌려줬으니까.

“조금만 더 그를 대단한 사람 취급해주면 틀림없이 완전히 안심할 거야.”

“아가씨는 정말로 대단하셔요, 번트 씨가 이렇게 잘 걸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자신도 회귀 전 기억이 없었다면 이토록 그가 쉽게 넘어올 거라곤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귀 전에 나한테 그런 식으로 작은아버지를 배신하자고 제안해주지 않았다면 말이야.’

포미스 번트는 바올로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안토니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이번에 영지에 온 것도 한탕할 만한 냄새를 맡고 온 게 분명했다.

‘작은아버지의 약점을 하나 더 캐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을 테고.’

이상하게 포미스 번트는 바올로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바올로가 자신은 절대 될 수 없는 귀족작위를 가지고 거들먹거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안토니아는 서랍을 열어 고급 편지지를 꺼냈다. 허영심 많은 바올로를 위한 것이었다.

“이제 나머지는 마담 마기나가 잘해줬길 바라야겠지.”

“마담을 정말로 믿어도 괜찮을까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담 마기나가 괜히 그런 말을 흘린 건 아닐 터였다.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구분하니 부디 아가씨께서 앞으로도 안심하고 저희 의상실을 이용해주시면 좋겠어요.”

실제로 밀즈 부인 때도 안토니아에게 유리하게만 소문이 났었다. 그래서 한 번 그녀에게 걸어보기로 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느는 건 좋은 일이고.’

그게 저택 바깥의 사람이라면 더욱.

‘만약 꽝이었다면 조금 실망은 하겠지만.’

포미스를 방심시키려고 굳이 낡은 드레스를 입어가며 괜히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한 게 아니니까.

안토니아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편지지 위로 또박또박 바르면서도 조금은 어린아이다운 글씨가 쓰여졌다.

고작 2년, 바올로는 신뢰할 사람을 그리 많이 만들지 못했다.

그나마 만든 밀즈 부인도 재산이 아까워 스스로 내치고 어쩔 수 없이 포미스를 보냈을 것이다.

분명 그의 편지만으로는 분명 안심하지 못할 테니 더없이 ‘순진하고 착한’ 조카의 편지가 필요했다.

안토니아는 익숙하게 상냥하고 다정한 말들로 편지를 채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의상실 마담 마기나는 엔트런스 홀에 발을 들이며 감격스러운 얼굴로 안토니아에게 달려왔다.

겨우 몇 주 전에 봤음에도 정말로 몇 년 만에 보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이야, 실망하진 않아도 되겠어.’

안토니아가 원하는 대로 딱 움직여주었다. 마기나는 안토니아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뵈지 못한 사이에 이렇게 크시다니……. 얼른 새로 치수를 재어 아가씨께 꼭 맞는 옷을 드리고 싶어 손이 절로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마담, 와줘서 고마워.”

안토니아도 장단을 맞추며 수줍게 반응했다. 그러자 옆에서 파수꾼처럼 지키던 포미스는.

“흠, 흠. 당신이 안토니아 아가씨의 옷을 담당할 마담 마기나로군요.”

그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마기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포미스 번트라고 합니다. 아가씨의 가정교사를 맡고 있습니다. 흠.”

마기나의 모습을 슬쩍 훑어본 그는 까탈스러운 상사 같은 얼굴로 말했다.

“흠, 당신이 저희 아가씨의 품위에 걸맞은 드레스를 부디 만들 수 있길 바랍니다.”

안토니아와 마기나 모두 포미스의 그런 행태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틀림없이 안토니아의 앞에서 자신의 안목의 뛰어남을 자랑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마기나는 어처구니없음을 참고서 포미스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께서 입으실 드레스이니 최선을 다해야지요. 번트 씨도 부디 도와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아가씨와…….”

포미스는 그렇게 말하며 안토니아에게 그윽하고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좋은 드레스를 골라드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렇지요?”

“네, 선생님. 저는 선생님만 믿어요!”

안토니아는 착실하고 맹목적으로 포미스를 바라보았다.

순진하게만 보이는 어린아이의 답에 그의 눈 속에 확신의 욕망이 깃들었다.

* * *

드레스 카탈로그를 보는 내내 포미스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마치 안토니아가 이제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거라는 듯 말이다.

그는 마기나가 안토니아를 위해 준비한 드레스 디자인 다섯 가지 중 무려 네 가지나 퇴짜를 놓았다.

“마담은 본인의 일에 책임감이 없으신가요? 요즘 트렌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포미스는 마기나를 완전히 만만하게 본 것인지 한껏 콧대를 높이며 이야기했다.

“서, 선생님. 저는 예뻐 보여요, 마담에게 너무…….”

“아가씨의 상냥한 마음을 이렇게 쓰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가씨의 가정교사인 제가 악역을 맡아드릴 테니까요.”

안토니아가 말리려 들어도 그는 다 그녀를 위한 거라며 멈추지 않았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럴 때마다 새삼 감격한 얼굴을 해 그를 부추겼고 말이다.

‘고작 잡지 몇 번 들여다본 걸로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굴다니.’

참 거짓말이나 사기 같은 걸 빼놓고는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딱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괜찮다고 한 하나의 드레스도.

“레이스를 바꾸는 게 좋겠어요, 이 모양은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굳이 꼬투리를 잡으며 괜찮다고 마기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가 짚은 레이스 문양은 이미 두어 달 전에 유행이 끝난 거였다.

하지만 마기나는 과연 프로였다. 그녀는 그 가당찮은 지적에도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고서 응대했다.

“역시 아가씨의 가정교사분의 안목은 다르시군요. 잘 참고하여 드레스를 만들겠어요.”

“흠, 흠. 마담? 오늘 제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졌다 해도 부디 좋게 받아들여 주십시오. 모두 아가씨와 마담을 위한 것이니까요.”

“물론입니다. 번트 씨. 이제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겠어요?”

“네?”

“아가씨가 많이 자라셔서 치수를 새로 재야 하거든요.”

“앗, 하지만 저도…….”

포미스는 잊은 게 있지 않냐는 얼굴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조용히 카탈로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급 정장이라도 한 벌 맞춰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참 꿈도 큰 사람이었다.

‘그래도 생색 정도는 내야 하니까.’

안토니아는 카탈로그에서 루비가 박힌 커프스단추와 넥타이핀을 짚었다.

“마담, 오늘 시간까지 내어 고생한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

안토니아는 쑥스러우면서도 묘한 기대감이 담긴 말투로 포미스에게 말했다.

“어떠세요, 선생님? 제가 비록 선생님만큼 잘 고르진 못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것들이 예쁜 것 같아서요…….”

우물쭈물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안토니아의 모습에 포미스의 입가와 눈가가 씰룩였다.

뭔가 불만스러운 듯하면서도 차마 내뱉지 못하는 얼굴이 보기에 참 재밌었다.

그는 결국 한숨을 토해내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아가 짚은 것들도 꽤 고가의 물품이었으니까.

“아가씨께서 저를 이렇게 생각해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나쁘지 않아요, 이 루비가 조금 질이 떨어져 보이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포미스는 자신이 한발 물러선다는 듯한 태도로 답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아가씨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지요, 이것도 여기에서는 가장 비싼 것을 골라주신 것 아닙니까.”

그는 마치 의상실의 격이 떨어진다는 듯한 얼굴로 마기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기나는 그 말에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대꾸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만큼 카탈로그에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좋은 루비를 쓸 수 있도록 해보지요.”

포미스는 그 말에야 납득한다는 듯 정중하게 허리를 조금 숙여 인사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그럼, 아가씨. 제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물론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마치 안토니아의 제일가는 보호자이자 측근인 것 같은 태도였다.

“정말로 아가씨가 말씀하신 대로군요.”

“미안해, 마담.”

“아가씨가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요, 이렇게 상등품의 루비도 별로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요.”

아무리 미리 부탁했다지만 충분히 기분 나쁠 상황에도 마기나는 그저 재밌다는 듯 미소로 답했다.

그녀는 응접실 주변을 모두 자신의 직원들이 지키도록 한 뒤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사이 조금 자라신 것 같네요!”

“정말?”

“네, 전보다 살도 좀 붙고 건강해지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디자인에서 프릴과 레이스를 좀 줄여도 괜찮을 것 같아요.”

“마담에게 맡길게.”

안토니아의 말에 마기나가 작게 웃었다.

“번트 씨와 달리 아가씨의 신뢰에는 제 어깨가 으쓱해지네요. 아가씨의 안목은 진짜니까요.”

“마담도 참……. 그보다 부탁한 건 알아봤어?”

안토니아는 단순히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마기나를 부른 게 아니었다.

마기나는 백작령에서 활동하는 정보상과도 연이 닿아 있었으니까, 괜히 백작령의 소문이 모두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아니었다.

‘아니, 연만 닿아 있는 게 아니라 정보상에 소속되어 있는 걸지도 모르지.’

드러내놓고 정보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도 꽤 있었으니까.

마기나는 안토니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레나의 복수,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포미스를 조사해야만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바올로가 알아챌 가능성이 있어 정보상과 직접 접촉하기엔 조심스러웠으니까.

“다행이야, 아직까지는 꼬리가 잡힌 적 없는 것 같아 걱정했거든.”

그 말에 마기나가 픽 비웃었다.

“정말 위험할 때는 이름을 숨긴 모양입니다만, 차림새나 외모를 바꿀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걸요. 정보상이 못 알아낼 정도는 아니지요.”

마기나는 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안토니아에게 건넸다.

“자세한 건 아가씨께서 보시는 게 낫겠지요.”

“고마워, 마담.”

“별말씀을요, 백작 부인의 은혜에 비하면 별것 아니랍니다.”

“어머니의 은혜……?”

안토니아는 놀란 눈으로 마기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니까.

“백작 부인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나 보군요, 어쩐지…….”

마기나가 겸연쩍은 듯 목을 가다듬었다.

“십수 년 전, 제가 아가씨보다 조금 어렸을 때였을까요. 저와 가족들은 굶주리고 쫓기듯 백작령에 왔었답니다.”

“정말……?”

지금껏 본 마기나는 늘 당당하고 화려하기만 해서 그런 과거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네, 그러던 중 백작 부인께서 제 바느질 실력을 마음에 들어 하시며 후원을 해주셨답니다.”

“어머니가…….”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의상실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지도, 이루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 아가씨.”

마담은 안토니아에게 멋진 미소로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백작 부인께서는 그때 아가씨를 가지고 계신 덕에 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까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렇게 할게. 아니 그래 줘야 해.”

“물론입니다.”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회귀 전에는 제대로 몰랐던 어머니가 남겨준 신뢰란 유산이었다.

* * *

마기나가 떠난 뒤 안토니아는 포미스에게 들려 감사 인사를 우선 전했다.

자신이 포미스에게 온전한 신뢰를 주고 있다고 확신하도록 해야 했으니까.

포미스는 아주 흡족해하며 애써 겸손을 떨었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이런 도움은 너무 사소한 것이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저는 늘 아가씨 편이라는 걸 꼭 기억해주십시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쑥스러운 듯 조심조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애정이 마치 처음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역겨운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안토니아는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정보상은 아주 상세하게 포미스의 행적을 정리해두었다.

로레나의 마을에 대해서도 그녀가 알던 것 이상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재빠르게 내용물을 훑은 안토니아는 그중 세 곳에 따로 표시했다.

모두 포미스를 처리해줄 확실한 곳들이었다.

첫 번째는 인접한 자작령의 신전이었고, 두 번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백작가였다.

이 두 곳 모두 포미스에게 가진 원한이 커 보였다. 지금껏 찾지 못했던 것은 단순히 시간 문제로 1~2년 안에 그의 행적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상은 기재해두었다.

‘그래서 회귀 전에 그렇게 백작령으로 쫓겨온 모양이네.’

이 두 곳 모두 확실하게 포미스를 처리할 만했다.

포미스는 첫 신전에서 감언이설로 신관들을 구슬려 오래된 고서와 신이 내려 주었다는 신물을 훔쳐다 팔아넘겼다.

당연히 신관들은 길길이 날뛰며 포미스를 이단심문자에게 넘겨 재판정에 세우겠다고 하고 있었다.

‘최소 영구 유배, 심하면 화형까지 가겠지.’

훔친 것들을 이미 팔아넘겨 찾을 수도 없을 테니까.

두 번째 백작가에서는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을 속여 가문의 보물 중 하나인 커다란 오색빛의 마석을 훔친 모양이었다.

그 과정에서 후계자인 아들은 보물을 지키기 위한 장치에 당해 한쪽 다리를 영영 쓸 수 없게 되었고 말이다.

‘평민이 귀족을 해친 데다 도둑질까지 했으니 이것도 최소 수십 년의 유배겠지만, 백작가의 분노를 샀으니 교수형 이상을 당할 가능성이 크겠지.’

하지만 이 둘 모두 제도적인 범위 내에 있었다.

물론 법적으로 해결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로 로레나의 마음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로레나의 동생이 법에 의해 죽음에 이른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포미스도 똑같이 누구에게도 도움 청하지 못하고, 빌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그런 무력함을 맛보아야 하지 않을까.

안토니아는 표시한 세 곳 중 마지막 한 군데를 손으로 짚었다.

“로레나, 여길 봐.”

“……이건.”

“포미스가 마지막을 맞이하기에 딱 좋아 보이지 않아?”

로레나가 잠시 어깨를 떨었다. 평범한 사람은 접할 일도 없을 만한 곳이었으니까.

두려워한다고 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요.”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로레나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죄의식이라곤 없었다. 오직 사명감만이 그녀의 눈을 구성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로 부탁드려요, 아가씨. 포미스 그자가 그렇게 죽는다면……!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로레나의 눈이 붉어졌다. 안토니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모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레나, 그다음 말은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해도 괜찮아.”

“……감사해요, 아가씨.”

“그 말도.”

안토니아는 포미스에 관한 다른 정보들을 모두 읽은 뒤 세 번째 장소와 필요한 것만 빼고 모두 태워버리라고 했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는 하나의 목표만 있는 게 좋았으니까.

* * *

포미스 번트는 불쾌해하며 위스키를 따랐다. 그나마 몰래 지하창고에 내려가 이 비싼 위스키라도 털어온 게 위안이었다.

“끄윽, 마시지 말고 그냥 팔 걸 그랬나.”

맑은 주홍빛의 빛깔을 보던 포미스는 이내 자신이 가져온 다섯 병가량의 위스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많은데 뭐 어때, 저것들을 다 팔면…….”

머릿속으로 빠르게 단위가 올라갔다. 어릴 적부터 돈 계산 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으니까.

‘200골드, 200골드는 하겠네!’

절로 입가가 히죽거렸다. 제국 중앙부에 위치한 영지도 아니라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뜻밖의 수확이었다.

“역시 괜히 유서 깊은 백작가가 아니지, 여기서 무려…….”

비싸다고 소문난 위스키 중 몇 가지를 보게 될 줄이야.

저것들에 비하면 자신이 홀짝이는 이 위스키는 고작 1골드도 되지 않는 것이니 저렴한 축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어, 이런 걸 먹어줘야지. 그러게. 끅.”

포미스는 다시 위스키를 따랐다. 어느새 취기가 확 올라 손이 조금씩 흔들렸다.

“고작 커프스단추에 넥타이핀이 뭐야, 어? 이렇게 비싼 걸 줄줄이 가지고 있으면서.”

새삼 바올로도 짠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 지하에 이렇게 돈 될 것들이 그득한데 뭐하러 고작 몇 골드에 달달 떠냔 말이다.

“흥, 그래, 이건 그냥 기분 풀이야. 우리이, 아가씨는 내가 마셨다고 해도 분명히 잘했다고 할걸!”

오늘 그런 사소한 선물을 한 건 틀림없이 뭘 몰라서가 분명했다.

‘그래, 지금껏 늘 소박하게만 살았잖아.’

게다가 그 망할 놈의 바올로가 얼마나 단속해댔겠는가.

포미스는 위스키를 신나게 들이키며 키득거렸다. 그래, 절대로 안토니아는 자신을 우습게 보고 그런 게 아닐 터였다.

그 순수한 물빛 눈, 맹목적인 눈. 표정이라곤 거의 없는 아가씨라지만 그 눈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애들을 얼마나 많이 다뤄봤는데.’

포미스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 와중에 지하창고에서 가져온 술병을 숨기는 것만큼은 잊지 않고서.

* * *

마담 마기나가 협력해준 덕에 얻은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정말 껍데기만 멀쩡한 놈이었다니.’

다름 아닌 정보 문서에 포미스가 아는 바올로의 약점이 있었으니까.

‘좀 대단한 거였으면 좋았을걸.’

기껏해야 몇 년 전 어떤 남작과 염문설이 나돌았고, 그녀를 유혹해 보석 몇 가지를 얻어냈다는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 남작의 부군은 아내에게 반쯤 버림받고 바올로에게 복수의 날을 세우고 있다는 그런 정보였다.

‘트라체스 대공을 움직이는 것보다도 더 애매하네.’

남작 부군이라는 자도 멀끔한 외모로 아내를 유혹해 결혼까지 한 모양이었으니까.

아내에게 버림받은 것도 단순히 바올로 때문이 아니라 제 얼굴만 믿고 젊은 여성에게 치근덕거리다 걸려서가 더 커 보였다.

‘꼭 이렇게 자기 잘못은 안 보고 남 탓만 하는 것들이 있어.’

안토니아는 혀를 차며 종이를 곱게 접어 보관했다. 언젠가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가씨, 마차 준비가 다 되었어요.”

“그래. 포미스의 기색은?”

“또 몇 가지를 닥닥 캐묻던 걸요, 어떤 마차를 쓰는지, 몇 마리의 말이 끌도록 할 것인지. 내부에 쿠션은 충분한지, 아휴.”

폴리는 고개를 내두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까탈스러운 귀족 나리도 번트 씨보다는 모시기가 쉬울 거예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들은 걸로 하나하나 비교해대거든요.”

폴리는 입을 쭈욱 내밀며 이야기했다.

마기나와 만난 이후 포미스는 안토니아에게 좀 까탈스럽게 굴었다.

고급 정장이 아니라 고작 커프스단추와 넥타이핀만을 선물하기로 한 게 어지간히도 섭섭한 모양이었다.

‘흠, 흠. 아가씨께서 선물하신다고 한 커프스단추에 어울리는 재킷이 없는 것 같지 뭡니까.’

‘그럴 리가요……!’

어떻게든 안토니아의 입에서 고급 정장, 아니 하다못해 구성품 중 몇 가지라도 사주길 바라며 유도하는 말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대꾸했다.

‘선생님처럼 멋진 분은 무얼 걸쳐도 다 잘 어울리실 거예요,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가지고 계신 것 중 고동색 실크 햇은 어지간한 신사분은 쓸 수 없다고요.’

‘크흠, 흠. 무,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백작가의 가정교사라고 하면 좀 더 격식 있고-.’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적에 그러신 적이 있어요. 기품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요. 물론…….’

안토니아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슬프고 위축된 기색을 보였다.

‘저는 아직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기품도 단련하지 못해 선생님이 제 낡은 드레스를 보며 안쓰러워하셨지만요…….’

‘하, 하, 그, 그건…….’

포미스는 안토니아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며 망설였다.

여기서 그래도 옷이 중요하다고 하면 자신의 기품이 없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안토니아에게 재킷을 얻어낼 구실이 없어지니까.

그러나 그는 참 물질적인 것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아가씨, 하지만 좋은 옷을 좋은 사람이 입으면 더욱 빛이 나는 법이랍니다. 아가씨께서 주신 커프스단추며, 넥타이……. 그리 귀한 것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싶은 이 선생님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겁니까.’

‘선생님……. 그, 그럼…….’

안토니아는 포미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종이에 펜을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의상실 마담을 또 부르려고 해도……. 작은아버지가…….’

‘여전히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일주일이 지났지만 세르히 씨가 아가씨를 혼내는 편지는 없지 않습니까!’

‘미,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냥 심장이 너무 콩닥콩닥 뛰어서…….’

안토니아는 그렇게 변명하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그럼요, 선생님. 같이 외출하는 건 어때요?’

‘외출……말입니까?’

‘혹시라도 저택에 있는 하인 중 누군가가 작은아버지에게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의상실에 직접 가 물건을 맞추자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것도 저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선생님이 제 첫 나들이에 함께해 주신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안토니아의 모습에 포미스는 한 톨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꺼워했다. 안토니아가 작은아버지인 바올로보다도 가정교사인 자신을 더 의지한다고 확신했으니까.

‘그러지요, 앞으로 아가씨께서 하는 모든 일을 제가 도울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안토니아는 그 기대감에 찬 모습을 떠올리며 조소가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폴리도 마틴도, 저택 하인들 다들 고생이 많았지.”

“괜찮아요! 오늘, 합.”

폴리는 자신의 입을 가리더니 조용히 소곤거렸다.

“오늘 가벼운 외출을 나가는 거라고 아는 건 번트 씨 뿐인걸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정보도 충분히 흘려두었다.

자신이 포미스를 주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새카맣고 뜨거운 암흑 속으로 안내하는 것만 남아 있었다.

안토니아는 짙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리샤르?”

채비를 마치고 내려왔더니 리샤르가 저택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제가 아가씨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응?”

듣지 못한 이야기에 배웅하러 나온 마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안토니아에게 속삭였다.

“아가씨의 외출인데 호위 하나 없어서 말이 되겠습니까. 드비 경에게 부탁드리고 싶었지만…….”

“죄송하게도 스승님이 다른 임무를 맡은 차여서요.”

리샤르는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미소를 보였다. 몇 주 만에 봐서일까, 어쩐지 다시 한번 아름다운 외모에 속으로 감탄하게 되었다.

“아니야, 리샤르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부족한 솜씨지만 열심히 지켜줄게요.”

남들 앞이라 리샤르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존대로 그렇게 말하며 맨 장총을 으쓱 들어 보였다.

‘저 안에는 수면탄뿐이겠지만.’

그래도 여차할 때는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오늘 갈 곳이 녹록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리샤르, 그간 잘 지냈어? 중간중간 하인들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마차며 이런저런 채비에 참견해서일까, 포미스 번트의 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 리샤르의 안부를 물었다.

“물론이에요, 저는-.”

그러나 리샤르가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기도 전에 포미스가 거창한 몸짓으로 나와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가씨. 저와 같은 신사는 준비에 시간이 원래 좀 걸리는 법이지요, 부디 양해해주십시오.”

안토니아가 괜찮다며 의례적으로 돌려줄 말까지 뺏어가며 말이다.

안토니아는 리샤르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했다. 아름다운 소년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르히 백작가는 제법 넉넉한 귀족 가문이었다.

포미스에게 시달릴 하인들을 위해 안토니아는 가장 큰 마차를 꺼내 오도록 했다.

덕분에 내부에 커다란 카페트에 쿠션까지 여러 개 두고 테이블까지 놓았는데도 자리가 넉넉했다.

안토니아는 포미스와 시선이 닿지 않도록 비스듬히 마주 앉아 폴리에게 레이스 뜨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의상실에 가는 것인데 마차가 한 대 더 있는 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얼핏 행렬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것 같았으나, 포미스의 속내는 다른 것이었다.

마차에 오른 뒤 그는 영 찝찝한 얼굴로 뒤쪽 편, 그러니까 짐마차가 따라오는 방향을 바라보았으니까.

“아가씨 또래의 사내애가 따라오는 것도 그렇고……. 흠, 흠. 저라는 신사도 있는데, 굳이 그렇게 호위까지 붙일 필요가…….”

잠시 스쳐 지나간 것뿐인데도 그는 리샤르를 견제하며 말했다.

‘하긴 옛날에는 나한테 정략결혼을 하자고까지 했었으니.’

안토니아가 리샤르에게 친근하게 말했으니, 혹시 하는 마음이 든 건지도 몰랐다.

물론 안토니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포미스에게 대꾸했다.

“죄, 죄송해요. 선생님.”

“네?”

“제가 첫 나들이다 보니 들떠서, 왠지 의상실만 가는 건……. 너무 아까운 것 같아서요. 아얏!”

안토니아는 정말 놀란 듯 말하다 레이스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괜찮습니까, 아가씨?”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행히 끝이 뭉툭한 편이라 상처가 나지는 않고 손가락 위로 붉은 자국이 난 정도였다.

안토니아는 겨우 그 정도에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폴리에게 손가락을 내준 뒤 포미스에게 마저 이야기했다.

“아무튼 제가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게 처음이기도 하고……. 또 곧 저녁이잖아요? 무엇보다 의상실에 가는 거니 마차 한 대로는 모자랄 것 같아서요.”

‘한 대로는 모자랄 것 같다’는 말에 포미스의 눈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아 표정이라곤 거의 없는 안토니아와 달리 참으로 다채롭게 물욕이 읽혔다.

“그렇군요, 아가씨께서 다 깊게 생각하고 준비하신 것인데.”

포미스는 즐거워하며 그의 몫으로 준비된 차를 마셨다.

하도 딱 고집하는 브랜드와 산지가 있어 마틴이 투덜거리며 구해다 준 찻잎이었다.

‘도대체 어느 동네 유행인 건지…….’

고급인 걸로 유명했지, 진짜 고급이 아닌 차를 마시며 거들먹거리는 것도 참 재주는 재주였다.

아무튼 포미스의 말대로 나들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과한 준비긴 했다.

‘그냥 로레나를 포미스와 같은 자리에 두고 싶지 않아 그런 거니까.’

지난 3주간, 안토니아는 로레나와 포미스가 함께 있는 일을 되도록 만들지 않으려 했다.

혹시라도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고 그녀의 사정을 안 이상 시중을 들라고 하는 것도 너무한 처사였다.

‘무엇보다 오늘은 결행의 날인데, 마지막에 와서 도망치게 둘 수는 없지.’

왜냐하면 지금부터 가는 길에는-.

콰과광-!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마차에 매인 말들이 제각기 깜짝 놀라 날뛰었으니까.

“도, 도적이 나타났습니다!”

앞에서 마부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포미스는 무언가 찔린 사람처럼 당장에라도 마차 구석 어딘가에라도 숨으려 들었다.

안토니아는 일부러 크게 외치며 포미스에게 말했다.

“서, 선생님! 무서워요! 어, 어떻게 해요?”

“그, 그걸 저에게 물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참 예상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반응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바깥에서 다 듣겠어요, 쉿, 쉿 하세요! 무엇보다.”

포미스는 외투며 쿠션을 제 주변으로 방벽 쌓듯 두르며 이야기했다.

“아가씨는 언젠가 이 백작가의 주인이 되실 분 아닙니까!”

“그, 그렇지만…….”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더 침착하게 구셔야지요!”

그러며 포미스는 안토니아에게 다시 한번 조용히 하라는 듯 ‘쉿’ 표시하며 소곤거렸다.

“돈을, 돈을 내어주면 아마 물러갈 겁니다. 제, 제가 이 마차를 지킬 테니 아가씨께서 협상을 하시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제가요?”

묘하게 담담한 안토니아의 물음에도 포미스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게, 그게 바로 멋진 귀족의 자세입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아주 조금, 예전 삶에서 그에게 배운 것 중 도움받은 게 남아 있어 찝찝하던 감각이 싹 사라졌다.

“그렇게 할게요, 선생님.”

“역시 아가씨는 훌륭한……!”

그러나 안토니아는 포미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활짝 열었다. 아주 화알짝.

“맞아요, 저는 선생님의 말을 아주 잘 듣는 훌륭한 학생이니까요.”

속삭이듯 포미스에게 말한 안토니아는 숨을 한 번 크게 마셔 배에 힘을 꽉 주고 소리쳤다.

“꺄악-! 서, 선생님!! 지, 지금, 저, 저에게 알아서 살아남아 보라고요?!!”

“아, 아가씨. 지금 무슨 짓을……!!”

포미스는 작은 목소리로 비명 지르듯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숨기는 것보다 더 빠르게.

“오랜만이야, 자기?”

적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마차 안으로 풀쩍 뛰어올라 들어섰다.

* * *

포미스 번트는 당황했다. 쿠션, 쿠션이 더 모자란다고 느꼈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창문으로라도 뛰어내려야 할까. 그는 갈등하며 창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절대로 이 자리에 와서는 안 될 인물이 있었으니까.

크지 않은 체구에 옹골차고 단단해 보이는 몸, 화려하면서도 어둠 속에 이상하게도 어둠 속에 잘 섞여들 것 같은 적갈색 머리카락.

포미스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테넌이, 테넌이 어떻게 여기에……?’

동부 암살자 길드장, 적막의 테넌.

불과 몇 달 전까지 자신이 거짓 사랑을 노래하던 상대였다.

“이야, 멋진 마차네. 우리 자기, 신분 상승이라도 했나 봐?”

“테, 테, 테, 테넌……! 어, 어, 어떻게?!”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잿빛 늑대의 모피를 어깨에 두른 테넌은 서늘한 눈으로 포미스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나한테 남기고 간 화약 자국이 밤마다 아주 짜릿짜릿해서 잊을 수가 있어야지.”

테넌은 예리하게 날이 선 단검을 휙휙 돌리듯 던져 받으며 포미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그…….”

당장에라도 저 단검이 제 목에 꽂힐 것만 같았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포미스는 어찌할 바 모르고 쿠션을 쥐어뜯다 안토니아에게 시선을 홱 돌렸다.

그래, 그나마 자신이 살아날 길은 안토니아에게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 그래. 조금 전엔 아가씨도 당황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걸 테니까.’

테넌도 저만큼이나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분명, 안토니아에게 돈만 주면 살아날 수 있다 하면 분명 들어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나 잘 따르지 않았는가!

심지어 포미스가 1골드 가까이 하는 비싼 술을 비웠다고 했을 때도 항의하는 마틴이 도리어 혼났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뭐, 뭐지?! 왜 저런 얼굴이야?!’

안토니아가 지나치게 태연했다. 겁에 질리고도 남을 상황인데 마치 이런 걸 모두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 그러고 보니……. 처음 폭발 소리가 끝난 뒤로는 계속 조용하기만, 조용하기만 하잖아?!’

포미스는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이 기이할 정도의 조용함은…….

‘사냥, 사냥을 할 때의 적막이야.’

그녀가 나타나는 곳에는 소리마저 모두 사라진다고 해 적막의 테넌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였으니까.

불길한 예감에도 의지할 곳은 오로지 안토니아뿐이었다. 포미스는 어떻게든 쿠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애쓰며 안토니아에게 외쳤다.

“아, 아가씨……. 설마, 아가씨가……. 아, 아니시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저 순진한 아가씨가? 그토록 자신을 잘 따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자신의 물음에도 안토니아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워낙 표정 없는 제자긴 했지만 달랐다.

너무, 너무나 달랐다.

아무 표정 없어도 지금까지는 무력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아니지요? 저를……. 설마, 제가 아가씨를 도와드렸는데, 세르히 씨도 속여드렸는데……!”

쥐어짜듯 절규에 가까운 말에 안토니아는 그저 태연하게 답해주었다.

“거짓말과 속임수도 필요하단 걸 가르쳐준 건 선생님이잖아요?”

말문이 턱 막혔다. 포미스의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거짓말, 속임수……. 아가씨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포미스를 보며 안토니아는 픽 웃어 주고 싶었다.

그랬다면 분명 그가 자랑하는 저 멀끔하고 비열한 얼굴이 일그러졌을 테니까.

그러나 아쉬움도 잠시, 손이 일으킨 얕은 바람이 휙 불더니 은빛의 날붙이가 날아갔다.

콰직-!

“어머, 자기.”

“으, 으아아악!”

콱-!

“지금 내 앞에서-”

“테, 테, 테……!”

콰드득-!

“한눈팔 여유가 있어?”

“아, 아아악. 기, 기다려. 테, 테넌-!”

콱-!

“잘한다, 오랜만인데, 잘 피한다. 그치?”

“아아악! 그만, 그, 그, 그만……!”

테넌이 연달아 날린 투척 검에 포미스는 정신 빠지게 몸을 뒤틀기 바빴다.

마차 안이 아니라 광장이었다면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로 환상의 호흡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할 정도의 위치로 던지는 테넌이나, 그걸 죽어라 피하는 포미스나 둘 다 말이다.

마치 동물의 묘기를 선보이는 조련사 같았다.

“자기, 지금 나한테 그만하라고 했어?”

“테, 테, 테넌…….”

포미스는 마치 자신의 생명줄인 것처럼 쿠션을 곁으로 끌어모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발, 제발 말로, 마, 말로……!”

콱!

“으아아악!”

이번에는 포미스가 피하지 못하는 곳으로 날아갔다.

투척 검은 그의 왼쪽 겨드랑이 사이를 지나 포미스를 옷째로 벽에 고정시켰다.

“……허억, 헉.”

포미스는 잔뜩 놀란 얼굴로 테넌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피하느라 남아있던 핏기가 포미스의 얼굴에서 일시에 싹 사라졌다.

“아, 아, 안 돼, 테넌…….”

“뭐가?”

안토니아는 그 말에 테넌 쪽으로 슬쩍 고개를 들었다.

‘……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사람의 눈동자가 예리한 날붙이 같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지금껏 제 인생에서 나쁜 놈들을 많이 보았지만 테넌처럼 잘 벼려진 무기 같은 눈은 처음이었으니까.

주홍빛 눈동자는 꿰뚫듯 안토니아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꼬마 아가씨, 저거랑 아직 더 할 말이 있어?”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왠지 여기서 지나치게 태연해도 안 될 것 같았으니까.

물론 울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쯤은 들통났겠지만.

“그래? 다행이네.”

테넌은 웃으면서 포미스 쪽을 보지도 않고 가벼운 손짓으로 휙 투척 검을 던졌다.

또 한 번 마차 벽이 투척 검에 망가지는 소리와 함께 포미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독점욕이 강해서 내 사냥감을 양보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독점욕?”

“이런, 어린 아가씨에게는 너무 이른 말인가?”

테넌은 잘게 웃더니 다시 포미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저 사냥감은 아가씨가 나한테 넘겨주기로 한 거야, 그렇지?”

“응.”

* * *

테넌은 성큼성큼 포미스에게로 다가갔다.

제법 넓은 마차였는데도 고작 두 걸음 만에 포미스는 그녀와 바짝 마주 보아야만 했다.

“자기, 기분이 어때?”

“테넌, 우, 우리. 마, 말로 하자. 그, 그렇지. 내 얼굴……! 내 얼굴 꽤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응, 딱 멍청해서 이런 사고 칠 줄도 알았지. 자기, 이거 보여?”

테넌이 윗옷을 걷어 옆구리를 보여줬다. 탄탄하게 짜인 근육 사이로 흉한 화상자국이 남아 있었다.

포미스가 도망치며 쏜 총탄의 흔적이었다.

어떤 의미로 그는 참 대단했다. 암살자에게 돈을 보고 접근했다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난 자기가 이렇게 형편없는 학생이라 실망했어. 내가 말했잖아, 죽일 거면 단번에 해야 된다고 했는데.”

“사, 사랑해서……! 사랑해서 그랬, 우으읍.”

테넌은 조잘거리는 포미스의 입에 날 선 단검의 손잡이를 물렸다.

손잡이가 매우 짧아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어디 뺨이 베여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 나도 사랑해서 지금 단번에 안 죽이고 자기에게 마지막 공기도 마시게 해 주는 거야.”

테넌이 키득거리며 한 말에 포미스는 그저 몸만 덜덜 떨었다.

포미스가 도리질조차 칠 수 없는 상황에서 테넌은 화려한 미소로 포미스의 목을 향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주, 주, 죽기 싫어!!’

포미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느껴진 건 목에 가해지는 아픔이 아니었다.

우지끈-! 철퍽!

포미스는 등에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커흑……!”

덕분에 포미스가 물었던 단검도 그대로 그의 뺨 일부를 얕게 베며 굴러나갔다.

“자기는 참 운도 좋아, 그렇지?”

벽 한쪽이 떨어진 마차 위에서 테넌이 풀썩 뛰어내려 포미스가 물었던 단검을 주우며 말했다.

“아니, 운이 나쁜 건가? 제대로 찔려서 죽었으면 지금 고통도 끝이었을 텐데 말이야.”

“테, 테, 테넌. 오, 오해야……! 알잖아, 나는, 나는 테넌뿐이라고, 응? 지, 진짜야!”

“오해? 진짜?”

“으, 응……! 그래서 초, 총도 급소가 아니라……!”

테넌이 그 말에 빙그레 웃었다.

‘사, 살 수 있어!’

포미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테넌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 자길 속인 저 배은망덕한 아가씨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포미스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커, 커흑, 테, 테넌……. 어, 어째서…….”

급작스레 잡힌 턱에 포미스는 놀란 얼굴로 테넌을 향해 물었다.

“포미스 번트, 넌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

강렬한 주홍빛 눈동자 속 어디에도 그를 향한 애정의 기색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게 말 좀 잘 듣지 그랬어, 내가 그랬잖아.”

“……테, 컥.”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평생, 펴-엉-생.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게 길러준다고 그랬었잖아.”

“이, 이젠……. 이젠 다신 안 그럴게, 안 그럴게!!”

“너무 늦었어, 포미스 번트.”

테넌이 단검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그의 셔츠 가슴팍을 확 찢었다.

한줄기 가는 붉은 선과 함께 맨가슴이 단번에 드러났다.

“하지만 자기는 1초라도 더 살고 싶은 모양이니까.”

단검이 가슴팍 살 위로 시리게 닿았다.

포미스는 떨리는 눈으로 도리질 쳤다. 테넌이 무슨 짓을 할지 깨달았으니까.

“가장 느린 방법으로 자기를 천천히 죽여줄게.”

머금었던 미소조차 사라진 완벽한 살수의 얼굴에 포미스는 온몸에서 피가 뽑히는 듯한 절망을 맛보았다.

* * *

‘마차는……. 버려야겠네.’

꺼낼 때부터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으나, 너덜너덜하게 벽 한쪽이 망가진 마차를 보며 안토니아는 혀를 찼다.

크기만 컸지, 오래된 낡은 마차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괜찮으셔요, 아가씨?”

반파된 마차에서 내리는 안토니아를 보며 어느새 달려온 로레나가 물었다.

“응, 난 아무렇지도 않아. 다른 하인들은?”

“다들 도망갔어요, 아……. 로토 아저씨는 남아계시지만요.”

“그래, 예상대로네.”

안토니아는 다행이라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미스 처리에 암살자 테넌을 끌어들이겠다고 생각할 때부터, 안토니아는 또 한 가지를 더 노렸다.

도라를 쫓아내고 밀즈 부인을 쫓아냈다지만 여전히 저택에는 바올로의 끄나풀 몇이 남아 있었다.

오늘 의상실에 간다고 할 때부터 그들을 동행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마차가 습격받으면 분명히 가장 먼저 달아날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소리 질렀고.’

알아서 살아남아 보라고, 그 말로 포미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처럼 꾸몄다.

자신이 계획한 건 모두 다 얻었다. 남은 건.

“로레나, 포미스를 직접 처리하고 싶으면-.”

그 말에 로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충분해요. 아가씨. 그자가 벌벌 떨며 괴로움에 울부짖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으니까요. 무엇보다…….”

로레나는 안토니아를 향해 슬프면서도 다행이라는 듯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그러셨잖아요, 저희 둘째는……. 제가 저런 자 때문에 평생 괴롭길 바라지 않을 거라고요.”

“응……. 잘 생각했어, 로레나.”

암살자 테넌에게 포미스를 넘겨주기로 할 때 안토니아가 로레나에게 한 말이었다.

아무리 복수심이 가득하다 해도 직접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큰 각오가 필요할 것 같았다.

게다가 분명 평생 마음속에 남지 않을까, 안토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야기했었다.

마차로 가로막힌 건너편에서는 여전히 포미스가 벌벌 떨며 테넌에게 애원하고 빌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암살자 테넌은 단번에 죽이지 않고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그를 가지고 놀 모양이었다.

로레나는 이제 되었다는 듯 안토니아를 감싸며 이야기했다.

“……얼른 여길 떠나요, 아가씨.”

“응.”

포미스를 넘겨준 대가로 테넌이 자신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처리한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무엇보다 리샤르도 있으니까.’

너무 태연하게 오래 있으면 분명 저 예쁜 소년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도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었으니까.

안토니아는 긴장된 얼굴로 서둘러 뒤쪽 짐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으아악, 그만, 그마아안! 흑, 흑, 테너언!”

“이제 내 애정 표현까지 거부하네?”

“아악……! 사, 사랑해. 사랑한다고!”

포미스의 목소리에 조금은 안심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안토니아가 짐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어디 가, 꼬마 아가씨?”

“…….”

안토니아는 침묵하며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예리한 날붙이가 자신의 목 바로 아래로 겨눠졌다.

‘……분명히 바로 좀 전까지도 포미스가 앓는 소리가 들렸는데.’

설마, 설마 테넌이 마음을 바꾼 걸까. 그녀도 값나가는 것들을 꽤 좋아한다고 정보상이 준 문서에 적혀있긴 했었으니까.

안토니아는 조심스레 테넌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설마, 암살자의 얼굴을 보고도 몸 성히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암살자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아, 아가씨!”

폴리와 로레나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어찌할 줄 모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자신들이 테넌을 말리다 오히려 안토니아가 다칠 것 같았으니까.

“미안하지만 아가씨, 나도 이게 생업이라서 말이야.”

“…….”

안토니아는 그저 침묵하며 테넌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야기가 다르다거나, 테넌의 정보를 절대 팔지 않겠다거나 협상을 시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듣지 않을 것 같아.’

그녀가 보기에 자신은 그저 재산을 좀 가진 어린 귀족일 뿐일 테니까.

물론 만약을 대비해 그녀가 혹할 만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안토니아는 잠시 그녀의 주홍빛 눈을 보다 결심한 듯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철컹-

“이런.”

“당장 그 손 떼.”

어느새 짐마차 지붕 위에 올라간 리샤르가 완전 근접거리에서 테넌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내가 못 피할 것 같아?”

“응.”

“하, 대단한 자신감이네.”

테넌은 흥미가 돈다는 얼굴로 리샤르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그럼, 어디 해볼-, ?!”

웃으며 리샤르를 보던 테넌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도 경악한 얼굴에 가까웠다.

“……너.”

“얌전히 꺼져, 그럼 살려는 줄 테니까.”

“……하, 하하하!”

테넌은 얼척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리샤르와 안토니아를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검을 내렸다.

“자, 도련님. 나도 손 뗐어, 이제 그 흉악한 물건을 내려주겠어?”

테넌의 말에 리샤르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떨어져, 내 아가씨의 안전은 확실해야 하거든.”

“하, 정말, 정말로 대단한 꼬마들이네.”

테넌은 졌다는 듯 손을 들며 천천히 떨어졌다.

포미스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흥미 가득한 눈으로 말이다.

“칼이 목 아래에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가씨나,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는 도련님이나 참.”

테넌은 질린다는 듯 혀를 차며 눈 깜짝할 새에 뒤로 완전히 물러났다.

정말로 날랜 몸짓이라 안토니아조차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박일 정도였다.

리샤르는 총구를 여전히 테넌에게 겨눈 채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얼른 마차에 타, 소백작님.”

“아, 으, 응…….”

안토니아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폴리와 로레나가 타자마자 마차 문이 쾅 닫혔다.

“리, 리샤르는?”

“지붕 위에 있어요.”

“그, 그렇구나.”

안토니아는 그 말에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는 멀쩡하던 심장이 그제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진 숲속을 달리는 마차 속에서 안토니아는 눈가에 힘을 줘야만 했다.

뒤늦게 찾아온 공포를 폴리와 로레나에게 티 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 * *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네.”

세르히 백작가의 마차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넌은 중얼거렸다.

“추적할까요, 길드장님.”

“아니, 아니. 그랬다가는 우리가 뼈도 못 추릴걸.”

“……네?”

얼빠진 얼굴을 한 길드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마차나 태워.”

“네?”

“뒤처리는 완벽하게 해줘야지, 난 이래 봬도 꼬마들에겐 약하다고.”

“아, 네…….”

길드원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투덜거리며 세르히 백작가의 거대한 마차에 불을 놓았다.

활활 불타는 마차를 보며 테넌은 혀를 찼다.

‘그 아가씨는 알려나 모르겠네, 그 꼬마 도련님이 나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걸.’

귀와 머리가 얼얼하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총구를 겨눈 순간 그 도련님은 제 머릿속으로 끔찍한 이미지를 욱여넣었으니까.

순간적으로 테넌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죽는 감각을 맛봐야만 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그 도련님. 이런 데서 호위 기사나 할 실력이 아닌데. 왜 그 아가씨 곁에 있는 거지?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나.’

뭐, 지금 고민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정보상을 탈탈 털어봐야지, 이 녀석을 숨겨준 대가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테넌은 몸을 빙그르 돌려 피투성이가 된 포미스를 바라보았다.

칼 좀 슬쩍 댄 걸로 의식을 잃다니, 참 변변찮았다.

그가 자랑하던 멀끔한 얼굴도 눈물을 뽑아낸 탓에 퉁퉁 부어 있었고.

“아무래도 오늘은 이 시시한 배신자밖에 수확이 없나 봐.”

“그놈을 살려주실 겁니까?”

마차 정리를 끝낸 길드원의 물음에 테넌은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

“그럼-.”

“사흘쯤 신나게 갖고 논 다음에 고통스럽게 죽여줘야지. 가지고 가자.”

“네!”

수분 뒤, 어두운 숲속에는 불타버린 세르히 백작가의 마차 외에는 그 무엇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 * *

“아이고, 아이고 아가씨!”

마차가 백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마틴이 뛰어나와 안토니아를 맞이했다.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던 것이 눈에 보였다.

“가신 지 한참 지났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걱정했답니다.”

“괜찮아, 마틴.”

“역시 제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마틴은 안토니아의 몸을 이리저리 확인하고 난 뒤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녀는 이 계획을 처음부터 그리 달가워하지도 않았으니까. 너무 위험하다고 말이다.

“다른 하인들은요?”

“도망갔어.”

“네?! 괘씸한 것들 같으니!”

마틴은 주먹을 꽉 쥐더니 다 괜찮다는 듯 안토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다들 뺀질거리던 놈들이니까요, 새로 사람을 들이는 게 훨 낫지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꽤 비었으니, 예전에 저택에서 일하다 쫓겨난 사람들도 일부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울면서 백작저를 떠났었으니까.’

그 안타깝던 말들이 귓가에 여전했다. 안토니아는 마틴의 품에서 조심스레 벗어나며 이야기했다.

“마틴 덕이야, 리샤르가 지켜줬어.”

“그것도 다행, 다행입니다!”

“응.”

안토니아는 두 걸음 떨어져있던 리샤르에게 다가가 커프스단추와 넥타이핀을 건넸다.

미리 마기나에게 받아두었다. 처음부터 포미스에게 줄 생각은 없던 물건이었다.

“이걸, 나한테?”

리샤르가 의아한 얼굴로 안토니아가 내민 물건을 보았다.

“오늘은 고마웠어.”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내 목숨을 구해준걸.”

리샤르는 잠시 안토니아의 얼굴을 보며 머뭇거리다 무언가 결심한 듯 그 물건들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소백작님.”

안토니아는 그 말에 농담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여차하면 팔아 써도 돼.”

“소중하게 간직할게. 드비 경에게 빼앗기지 않고.”

“그럼 나중에 그것들을 찬 모습을 보여줘, 리샤르도 3년만 지나면 그런 게 어울릴 것 같아.”

아마도 열다섯쯤일 테니까, 3년 뒤 성인이 되면 분명히 어울릴 것이다.

‘그쯤이면 정식 기사 서임도 받을 테고.’

지금까지 자신 앞에서 보여준 실력만 보면 오히려 지금까지 기사 서임을 받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였지만.

어쩐지 리샤르는 그 말에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그럼 이만 가볼게.”

“응, 아 참. 괜찮으면 조만간 식사에 초대할게!”

“식사? 괜찮겠어?”

안토니아는 그 말에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남들의 의뢰를 받아 생활하는 기사라 그런가 눈치도 빠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았다. 바올로가 돌아오지만 않으면 저택 내부를 알릴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응, 목숨을 구해 줬으니 제대로 보답하고 싶어.”

“……그럼 알았어, 드비 경에게도 말해둘게.”

리샤르는 햇살 같은 미소로 안토니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참 예뻐서 안토니아는 몇 분쯤 감상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이게 뭡니까, 전하?”

“손대지 마.”

“설마 그 아가씨한테 받으신 겁니까?”

돌아온 리샤르의 겉옷과 장총을 받아들면서도 드비는 깔끔한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잽싸게 리샤르의 물건을 정리한 뒤 상자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악! 왜, 왜 때리십니까!”

“손대지 말랬지.”

“아이, 그래도 궁금하잖습니까. 지금까지 대공 전하가 누구한테, 그것도 여성분에게! 선물 같은 거 받은 거 처음이지 않습니까.”

“어린애잖아.”

“에이, 어린애여도 아가씨는 아가씨지 않습니까.”

리샤르는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껏 혹시라도 쓸데없는 소문이라도 돌까 봐 귀족들의 선물이나 호의를 모두 거절한 것도 사실이긴 했으니까.

“그 이유를 잘 알면 넌 입단속이나 잘해.”

“에이, 제가 이렇게 나불거리는 건 전하 앞뿐이라는 걸 잘 아시면서.”

“네 급료 올려주기로 한 거 철회야.”

“아이, 아이잉, 대공 전하!”

“그 꼴 보기 싫어서 정말 철회.”

“그럼 철회를 철회해주실 때까지 하루 종일 이 앞에서 춤추면서 애교부릴 겁니다.”

드비의 말에 리샤르는 눈을 찡그렸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 입 무겁고 실력만 확실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내다 버렸을 것이다.

“아무튼 소백작도 나도 네가 신나 하는 의미로 주고받은 거 아니니 꿈 깨.”

“진짜요? 이거, 이거 커프스단추랑 넥타이핀인데요?”

그사이 잽싸게 상자를 연 드비가 소리쳤다.

“보통 이런 건 좀 뜨뜻한 관계 아니면 잘 안 주지 않습니까!”

“소백작의 목숨값이야.”

“네?!”

그제야 드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리샤르의 몸 곳곳을 확인했다.

“어디, 어디 작은 스친 상처도 없으신 거죠? 그러게 암살자 끌어들인다고 했을 때 제가 간다고 그랬는데!”

“네가 가면 시끄럽게 해결할 거잖아.”

“그래도요! 그렇게 괜찮을 거라고 하시더니! 뭐 있었던 거죠?!”

리샤르는 그 시끄러운 목소리에 질렸다는 듯 혀를 차며 드비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됐으니까, 동부 암살자 길드나 알아봐.”

“헐, 진심이십니까? 지금 소백작님 보호해주겠다고, 그런 위험을?!”

“좀 입 닫고 하라는 것 좀 해라.”

“아니, 아니, 그래도요! 레이디 트라체스께서 알면 제 목을 조르실걸요?!”

“누님이 모르게 하면 되지.”

“아니이, 전하!”

리샤르는 피곤하다는 듯 드비의 외침을 무시하고 욕실로 향했다.

드비의 말대로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인 걸 어떻게 해.’

그에게 안토니아는 위태로워서 그냥 두면 어딘가 부러져 스러질 것만 같은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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