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목구멍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깡마른 소녀는 거울을 보며 입을 한껏 벌렸다.
‘얼른, 얼른 말할 수 있어야 해.’
안 그랬다가는 다 놓치고 말 것이다.
부모님의 유품도, 자신의 재산도 작위도 모두!
거울을 보며 소녀, 안토니아 세르히는 필사적으로 목을 쥐어짰다.
2년 가까이 쓰지 않았던 목소리는 제 뜻대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답답했다.
‘하필 돌아와도 이때로 돌아올 게 뭐람.’
안토니아는 거울을 보며 투덜거렸다. 12살의 안토니아 세르히 백작 영애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덕분에 일주일 전, 자신이 죽어 16년 전으로 돌아왔단 것에 슬퍼할 여유도 사라져버렸다.
* * *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안토니아 세르히는 28살이었다.
제멋대로인 남편과 결혼해 10년이나 비위 맞추고 홀로 가문을 지탱하며 살았다.
설마 바람기에 항의한 걸로 남편 손에 죽는 끝을 맞이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말이다.
다시 눈 떴을 때는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 줄로만 알았다.
설마 저런 어이없는 이유로 정말 죽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시야에 비친 방이 확연히 달랐다. 우중충한 태피스트리와 곳곳에 놓인 유품들.
모두 하나같이 어릴 적 쓰던 방의 풍경과 똑같았다.
안토니아는 놀라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나타난 건 10년 전, 쫓겨난 시중하녀 도라였다.
‘도라?’
안토니아는 두 번째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뱉으려던 말은 소리가 되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산산이 흩어져버렸으니까.
입술도 버석하게 말라 부자연스레 움직였으나, 목소리는 아예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안토니아의 모습을 보며 도라가 멍청하다는 듯 피식 비웃었다.
“물 달라는 거지요? 제가 계속 말했잖아요, 물은 늘 여기에 둘 테니 알아서 좀 드시라고.”
도라는 투덜거리며 안토니아의 앞에 컵과 주전자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말 못하는 것뿐이지 다른 데는 다 멀쩡하잖아요?”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안토니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이제 볼일 끝났지요? 제발 저 좀 쉬게 해 주세요, 매번 왔다 갔다 하려니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도라는 짜증을 팍 내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안토니아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 집 하녀가 저렇게 군단 말인가.
‘저 정도로 건방졌었다고?’
현실감 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는 곧 정신 차리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꿈, 꿈일 거야.’
애초에 도라는 10년 전에 쫓겨났고, 만약 돌아왔다고 해도 저렇게 앳된 모습일 리가 없었다.
저 모습은 아무리 잘 봐줘 봐야 열네다섯 가량이지 않은가.
안토니아는 물을 마셔 건조한 목을 축이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자기가 자는 사이 어디 얻어맞기라도 한 걸까.
‘어제 몇 마디 따졌다고 날 두들겨 때리고 나쁜 장난을 친 게 분명해.’
고약한 남편에 대해 그런 쪽으로 확고한 신뢰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거울 앞에 선 순간 안토니아는 비명을 질렀다.
“……!”
비록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막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한 백금발이 어깨를 넘어 내려와 있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것인지 마르고 수척한 티가 났으나 물빛 눈은 영롱했다.
피부가 우윳빛으로 뽀얗고 두 뺨 위로는 옅게나마 붉은 기도 돌았다.
‘나도 어리잖아……?’
매일같이 뼈 빠지게 일하느라 피로에 찌든 스물여덟 살의 모습이 아니었다.
눈 밑도 퀭하지 않고 습관처럼 찌푸리던 미간의 주름도 보이지 않았다.
키도 평소보다 한 뼘 반쯤은 더 작게 느껴졌다.
아니,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정말 작았다. 어떻게 봐도 지금 거울에 비친 건.
‘어릴 때 나라고?! 그것도……. 가장.’
자신이 가장 답답하게 살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바쁘게 하루하루 사느라 묻어뒀던 나쁜 옛 기억들이 확 튀어 올랐다.
어린 시절, 안토니아는 평범한 귀족 영애답게 애지중지 사랑받으며 자랐다.
특히나 세르히 백작 부부는 느지막이 얻은 아이를 더 귀하게 대했다.
그런 부모님을 겨우 열 살에 마차 사고로 동시에 잃었으니 상처가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이때야!’
차라리 돌려줄 거면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때로 돌려주지. 정말 현실이라면 너무나도 잔인했다.
아마도 열두 살쯤, 하필 한참 상실감에 빠져 말도 못하고 모두 다 내려놓은 채 세월만 흘려보내던 때였다.
‘……이걸 인생 한번 기구하다고 해야 하나.’
안토니아는 거울을 꽉 붙잡았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한기가 꿈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정말로 남편 손에 죽은 게 인생의 끝이 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나……. 정말로 죽었던 거구나.’
한숨이 폭 나왔다. 당황이 잦아들자 설움과 분노, 원망 같은 감정이 복잡하게 그 자리를 메웠다.
지난 삶, 스물여덟의 나이로 죽기까지 그녀는 뭐 하나 제 뜻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이용당했고, 늘 빼앗겼으며, 제 것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릴 때는 말을 잃어 작은아버지에게 모두 빼앗겼으며, 커서는 남편과 시댁에 모두 빼앗겼다.
솔직히 괴롭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었다.
‘안 울어. 왜 울어!’
울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안토니아는 습관처럼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했다.
정말 자신이 12살의 안토니아 세르히였다면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남의 편에게 죽어 돌아왔더니 또 힘들었을 때냐면서 말이다.
‘남편이 날 죽인 것도, 뭐…….’
생각보다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애초에 사랑한 것도, 제 뜻대로 한 결혼도 아니었으니까.
분명 큰일이었다. 남편에게 죽었다니 억울하고 분통해서 통곡할 일이었다.
그러나 말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약했던 어린 날의 자신으로 줄곧 살았다면, 진흙탕 같던 이전 삶에서 스물여덟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작 그딴 놈에 대한 원망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돌아온 거라면 더더욱.
제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으니까.
‘똑같은 인생을 또 반복하려고? 그렇게 되면 내가 바보인 거지.’
안토니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어려진 몸 탓일까, 울렁거리며 뜨거워지려는 콧잔등을 애써 식혔다.
터트리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했으나 하나가, 딱 하나의 생각이 자신을 지탱했다.
‘돌아온 거라면 두 번은 그렇게 안 살아, 못 살아!’
지난 삶, 자신이 뭔가 해 보려 했을 땐 이미 모든 게 제 손안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과 몸은 어려졌으나 머리는 온갖 일을 다 겪은 스물여덟의 안토니아였다.
‘모두 다 되찾을 수 있어.’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것들에게 다 갚아줄 수도 있어.’
자신을 이용하고 닥닥 긁어 상처만 주던 모든 사람에게.
절망을 깊숙이 묻어버리며 안토니아는 앞을 보았다.
거울 속 소녀의 표정엔 미동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 * *
“아휴, 저도 너어무 불쌍하지 않아요? 벌써 열두 살이면 알아서 좀 챙겨서 지내실 것이지.”
도라는 안토니아의 옷들을 건성으로 정리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시중하녀 도라는 안토니아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시건방졌다.
그녀는 불러도 제때 오지 않기 일쑤였으며, 낮잠도 멋대로 자곤 했다.
‘내가 말도 못하고 표정도 없으니 아무도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안토니아는 지난 2주간 열심히 목소리 내는 연습을 하며 저택 상황을 파악했다.
사실 그녀는 회귀 사실을 받아들이며 걱정도 했다.
이미 저택이 자신이 손 쓸 수 없는 무렵이면 어떡하나 하고.
그러나 다행히 아직 그 도둑놈 같던 작은아버지가 저택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때였다.
가정부나 도라를 포함한 몇몇은 작은아버지의 손을 잡았으나 아직은 선대 백작 부부 시절 하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앞으로 서너 달만 지나면 다 사라질 사람들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 못 한 데다, 작은아버지가 사제를 데려와 내가 회복할 수 없다고 선고까지 해버렸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선고를 듣고 반년쯤 지났을 때 조금씩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다 늦어버렸다.
저택 안에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작은아버지는 후견인으로서 지위를 완전히 가져갔고.’
순진했던 안토니아는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여든 먹은 노부호에게 시집 보낼 것이라며 툭하면 협박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결혼해버리는 게 나았을 텐데.’
작은아버지가 말한 노부호는 자신이 열여덟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니까.
심지어 아이도 없어 오히려 움직이기 편했을 것이다.
‘그래, 그건 대비책으로 두자.’
안토니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레이스를 뜨며 결정했다.
어릴 때야 결혼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었다지만, 자신은 10년이나 결혼 생활하고 남편 손에 죽은 사람이었다.
비슷한 또래, 그것도 짜증 나는 남의 편 만나 고생할 바에야 차라리 일찍 죽는 부호가 훨씬 나았다.
“어머, 아가씨. 그거 저 주시려고 뜨는 거예요?”
안토니아가 착실하게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도라는 안토니아가 뜨는 레이스를 보며 말했다.
눈에 물욕이 그득했다.
‘쟤는 매번 이상한 소리를 하네.’
말할 줄 모른다고 자기 멋대로 안토니아의 물건을 가져가곤 했다.
안토니아는 등 돌려 거부 의사를 단호하게 밝혔다.
하지만 도라는.
휙-
너무도 안하무인이라서.
안토니아가 정성스레 떠서 놓아둔 레이스를 멋대로 채어가 버렸다.
“감사해요, 아가씨. 이런 건 저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해야 빛을 발한다고요? 역~시 아가씨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소리로 킥킥 웃어댄 도라는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진짜, 저게……!’
안토니아는 억울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생각해 보면 도라는 계속 저랬었다.
도라가 쾅, 닫고 나가버린 문을 보며 안토니아는 예전을 떠올렸다.
‘레이스만이 아니었지, 걸핏하면 내 드레스며 물건도 가져가고.’
그걸 저택 하인들에게 자랑하고 다니기까지!
물론 저택 하인들도 처음엔 의아하게 여겼다.
‘정말로 아가씨가 주신 거야? 네가 멋대로 가져온 게 아니라?’
다만 도라는 너무도 영악하고 뻔뻔해서.
‘지금 절,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니, 의심이 아니라-’
‘그럼 아가씨를 의심하신다는 거잖아요! 제가 아가씨께 얼마나 지극정성인데!’
‘아니, 아니. 도라. 무슨 그런 소리를!’
‘다들 아가씨가 말 한 마디 안 한다고 너무 하신 것 아니에요? 아가씨가 얼마나 다정한 분이신데!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요!’
그렇게 울고불고 연기를 하며 정작 정당하게 지적한 사람들을 나쁜 사람 만들기 일쑤였다.
분명 그런 도라를 의심한 사람도 있었지만.
‘마틴이라거나.’
안토니아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거의 방 안에서만 지낼 때, 주방장 마틴이 으슥한 새벽에 찾아와 물었다.
‘아가씨, 솔직하게 답해 주십시오.’
그때도 말 못하던 안토니아는 겨우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정말로 도라에게 아가씨의 물건을 내어주시는 겁니까?’
걱정 가득한 마틴의 물음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긴 그런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결과 돌아온 건.
‘흥, 그 시끄러운 주방장 마틴은 해고되었답니다! 어디 감히 저랑 아가씨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던지.’
‘……?’
안토니아는 도라의 말에 의아하게 되돌아봤었다.
‘아가씨는 말도 못하는데 그자가 제가 도둑질을 했다고 몰고 가지 뭐에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
‘아시지요, 아가씨? 이렇~게 귀찮은 아가씨를 모실 만한 착한 애는 저밖에 없다고요. 아, 그러니까 이 반지는 수고비로 가져갈게요?’
안토니아는 그날 너무도 충격을 받아 도라가 반지를 가져가는 걸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제게 진심을 다했던 마틴이 쫓겨나다니.
자신이 거기서 고개를 끄덕였으면 되었던 걸까.
그날 홀로 베개를 적시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원망했다.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자기 편이 되어줄 사람도 못 지키고!
그래서 안토니아는 함부로 움직이는 것 대신 우선은 체력을 키우는 쪽을 택했다.
‘나는 다 기억해.’
아직 부모님이 계실 때, 하인들이 자신을 얼마나 귀여워했는지를.
‘아이고, 예쁜 돌이면 아가씨가 가지셔야지요. 이걸 절 주셔요?’
‘응! 난 마틴 좋으니까!’
‘저는요, 저는요?’
‘부주방장 거두 있어!’
어린아이가 가져온 돌멩이를 다들 너무도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겨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 것을 모두 지킬 생각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안토니아는 보석함을 열어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노크도 없이 불쑥 방에 들어온 도라는 그걸 보고 눈을 반짝였다.
“어머, 아가씨 제게 주시려고 보석을 고르시고 있는 거예요?”
‘무슨 헛소리지, 이건 다 어머니가 내게 주신 건데.’
이럴 땐 말이 안 나오고, 표정 변화도 없는 게 아쉬웠다.
물론 도라는 제 표정이 구겨져도 눈치 못 챈 척 굴겠지만.
안토니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재빨리 늘어놓은 보석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빠르게 도라가 팔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가씨의 마음 잘 받을게요, 매번 이렇게 챙겨주시니 그래서 제가 버티는 거죠.”
‘아니야!’
안토니아는 마음속으로 크게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리는 아주 조그맣게 새어 나오고 끝이었다.
“역시, 제 거란 의미시죠? 아, 또 가서 다른 분들께 아가씨의 다정함을 알려야겠어요.”
도라는 깔깔거리며 그대로 방 밖으로 나섰다.
안토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유품은 많지도 않은데…….’
그러나 도라의 발은 빨랐고 자신의 다리는 너무 허약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도라가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걸까.
안토니아가 도라를 따라잡았을 때는 이미 복도에서 한창 자랑하던 중이었다.
“이거 봐, 아가씨께서 이렇게 마님 유품도 줬다니까.”
“진짜? 하긴 너 아가씨께 잘하긴 했으니까.”
“그럼~.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아가씨의 시중을 드는 걸, 이렇게 상냥하신데 내가 어떻게 소홀하겠어.”
도라가 그렇게 말하며 목소리 높여 웃었다.
어린 사용인들은 그걸 보고 부러워했으나 요리장을 비롯해 나이 든 사용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라를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그때, 누군가가 안토니아가 온 걸 눈치챘다.
“헉, 아가씨가 여기까지 내려오시다니!”
“아가씨, 도라를 찾으신 거예요?”
“저희가 너무 오래 붙잡아뒀나 봐요.”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도라를 찾은 건 맞지만 원하는 건 도라가 아니라 팔찌였으니까.
안토니아는 손을 뻗어 도라의 손을 꽉 잡았다.
“아, 아가씨?”
레이스도, 다른 보석도 얼마든지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회귀까지 해서 또, 또 어머니의 물건을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안토니아는 필사적으로 목에 힘주며 입을 열었다.
“내 거야.”
아주 짧았으나 또렷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있는 힘껏 소리친 것이었으나 남들의 평소 목소리 크기보다도 작았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복도가 적막에 휩싸였다.
먼저 반응한 건 저택에서 오래 일한 하인들이었다.
“아가씨, 지금 말씀하신 거예요……?”
“주신께 감사 올려야겠어요, 제 생전에 아가씨의 목소릴 다시 들을 수 있게 되다니!”
그들은 안토니아를 보며 마치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안토니아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내 거야, 돌려줘.”
도라가 가진 어머니의 유품.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번 잃을 줄 알고?’
안토니아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제야 안토니아가 말했다는 데 집중했던 하인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하인들의 시선이 도라에게로 향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었다.
“아가씨가 줬다고 하지 않았어?”
“세상에! 거짓말한 거니, 도라?”
도라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설마 안토니아가 말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평소 시키지 않던 말도 잘만 늘어놓던 도라의 입이 조용했다.
“저, 저는…….”
“돌려줘.”
안토니아는 단호하게 한 번 더 이야기하면서도 조금은 걱정했다.
‘너무 어린애 같지만…….’
어차피 긴 문장은 말할 자신도 없었고,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다.
애초에 어머니의 유품만 돌려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체면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서둘러 걸어온 데다 무리해서 말까지 한 탓에 목이 너무 따갑고 숨이 가빠졌다.
그러자 등 뒤쪽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토닥이며 부축해주는 손길이 있었다.
주방장 마틴이었다.
‘마틴…….’
지난 삶에 너무도 바보같이 보내버렸던 제 편이 내게 있었다.
다정하고 낯익은 그 모습 덕에 용기가 났다. 안토니아는 도라를 향해 돌려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도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이럴 때 말문이 트인 거야! 계속 내가 하는 이야기나 들으면서 방 안에 처박혀 지낼 것이지!’
따박따박 시중들어줘야 하는 것도 귀찮은데.
이렇게 쫓아오기까지 하다니!
그러나 당황은 잠시였다.
‘그래, 겨우 몇 마디 말한 것 가지고.’
도라는 자신 있었다.
‘바보처럼 ‘내 거야.’와 ‘돌려줘.’ 밖에 말 못하잖아? 그리고 내 눈물에 마음 약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도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저는 억울해요!”
‘역시’
너무도 예상대로 움직여서 속으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가씨, 왜 갑자기 그러세요? 저한테 건네셨고 저 주시는 거냐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셨잖아요!”
도라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안토니아는 그 처량한 눈물 연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거든.’
애초에 이래 주지 않으면 곤란하고.
‘내가 갚아줄 게 정말 많거든. 어머니의 유품만 돌려받기엔 너무.’
도라의 열연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개중엔 안토니아가 너무하다는 듯 쳐다보는 자도 있었다.
그럴 정도로 저 촉촉해진 눈가와 슬픈 표정은 정말 진실성이 있었다.
“제가, 제가……. 어제 물잔을 엎었다고 이런 식으로 절 모함하시는 거예요?”
도라는 아예 대놓고 훌쩍거렸다.
“흑, 그래서 제가 아가씨께 무릎 꿇고 사과도 드렸잖아요. 그런데 제, 제게…….”
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후다닥 팔찌를 벗어 손에 올린 뒤 안토니아에게 받치듯 울며 이야기했다.
“돌려 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절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아가씨.”
정말 대단한 연기였다.
‘극단에라도 들어갔다면 대성했을 텐데.’
왜 이런 곳에서 하녀 일을 하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눈가에서 눈물이 참 곱게도 똑똑 떨어졌고 어깨가 떨려 처량해 보였다.
“그동안 아가씨께 열심히 했잖아요, 제가 보기 싫어졌다고 해도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네?”
그 모습에 다른 하인들도 딱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 정도는 상황을 보며 입 다물고 있었으나 몇몇 하인들은 서둘러 도라 편을 들었다.
“아가씨, 도라가 그간 아가씨께 잘했잖아요.”
“맞아요, 오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아가씨는 상냥한 분이시잖아요, 그간 도라가 한 걸 모른 척하시는 건 너무한 거예요.”
안토니아는 조용히 그들과 시선을 맞췄다.
‘다들 작은아버지를 따르는 자들이야.’
저 못마땅한 눈초리.
심지어 안토니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도라 편을 드는 태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모시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도라,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이구나.”
안토니아는 도라가 내민 팔찌를 바로 손에 쥐었다.
예전 삶에서는 영영 잃어버렸던 물건이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시기쯤 도라가 가져간다는 것만 기억해서 부단히 말하려 노력했으니까.
설마하니 이렇게 대놓고 가져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가씨…….”
도라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저, 저를…… 속이신 거예요?”
“내가 널?”
힘 뺄 가치도 없는 너에게?
그러나 도라는 시종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일부러 지금까지 말 못 하는 척…….”
정말 못 들어줄 지경이었다.
짝-!
안토니아는 팔찌를 든 채 그대로 도라의 뺨을 내리쳤다.
크지 않은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열두 살 몸은 너무 마르고 힘이 없었다. 안토니아는 그 사실이 아주 아쉬웠다.
“그랬으면 진작 널 내보냈지.”
“아가씨!”
안토니아에게 항의했던 하인 중 몇이 도라를 감쌌다.
“아무리 도라가 잘못했어도 너무하세요!”
“맞아요, 이렇게 다들 보는 앞에서!”
안토니아는 픽 숨을 내뱉었다. 헛웃음이 되지 못한 숨이었다.
“도라는 단 한 번도 아침에 제시간을 맞춰 온 적이 없어.”
“……네?”
“내가 아파서 이렇게 마른 줄 알아?”
그 말에 주방장 마틴의 눈이 매서워졌다.
“식사도 하루 한 끼 가져다주고, 심지어 내 물건을 멋대로 가져갔어. 나는.”
안토니아는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단번에 이렇게 말했더니 호흡뿐만이 아니라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심지어 발음도 어그러지려 했고.
그래도 단 몇 마디만 하면 됐다.
“나는 단 한 번도 도라에게 뭔갈 준 적 없어.”
“그게 정말입니까, 아가씨?”
곁에서 묻는 마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번에 마틴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못된 것! 네 일도 제대로 하지 않은 주제에, 감히 거짓말에 도둑질까지 해?!”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가씨!”
도라는 그제야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겁먹고 안토니아에게 애원했다.
“제발 쫓아내지 마세요, 아가씨. 이제 다신 안 그럴게요!”
“내가 뭘 믿고?”
안토니아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나가렴. 도라.”
“……네?”
“내 저택에서 나가.”
안토니아의 말에 도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도라는 곁에 있는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위해 애원해달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녀를 외면했다.
“이, 이럴 수는 없어요. 밀즈 부인을, 밀즈 부인을 불러주세요!”
저택 가정부 밀즈 부인을 찾는 모습에 안토니아는 혀를 찼다.
그녀를 부른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 같은가.
“도라, 내 저택이야.”
“……하, 하지만!”
“난 충분히 널 봐줬어.”
“싫어요, 안 나갈 거예요, 나는……! 밀즈 부인!!”
이제 정말 한계였다. 2년가량 말하지 않은 목이 찢어질 듯 따가웠다.
안토니아는 곁에 있는 주방장 마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겨우 입 모양만으로 ‘쫓아내’라고 전할 수 있었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
마틴은 안토니아의 휘청거리는 몸을 꼭 잡아주며 곧장 다른 하인들에게 지시했다.
“당장 저 나쁜 것을 쫓아내! 아가씨의 몸이 더 상하실라!”
“싫어, 싫어……!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아가씨께……, 우으읍!”
도라가 계속 시끄럽게 소리치자 주방에서 오래 생활한 부주방장이 그녀의 입에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려 애썼다.
평소 자신의 앞에서 자신이 가장 잘난 체하며 거들먹거리던 도라는 울며 끝까지 애원하고 또 원망했다.
“우리 아가씨, 그동안 왜 이렇게 마르셨나 했더니…….”
마틴이 안쓰럽다는 듯 안토니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른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가 저희를 보지 않으려 하실 리가 없었는데, 혹시라도 아가씨의 병이 악화할까 도라의 말만 믿었던 저희가 바보였습니다.”
“앞으로 저희가 아가씨를 곁에서 잘 모실게요.”
찔리는지 시선을 외면하는 하인들도 있었으나, 주방 하인 대부분은 따스한 눈길을 보내왔다.
안토니아는 그 온기에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 해결된 건 고작 도라 하나 내쫓은 것 정도인데, 그것보다 더 많은 걸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럼 다음은…….’
생각보다 빨리 도라를 내쫓았으니 빼앗긴 권리를 되찾고자 앞으로 몇 사람 더, 정리해야 했다.
그러나 더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가씨!”
안토니아는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마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안토니아가 눈 떴을 때, 곁에는 주방장 마틴과 가정부 밀즈 부인이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가정부 밀즈 부인은 고상한 체하며 안토니아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았다.
안토니아는 그저 무심한 눈으로 밀즈 부인을 바라보았다.
물빛 눈에 밀즈 부인은 잠시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어린 안토니아가 생각을 모두 읽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밀즈 부인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큰 불만이 있었으니까.
‘아가씨가 멋대로 도라를 내쫓아버려서 내 체면이 우습게 됐어.’
지금까지는 안토니아의 작은아버지가 인정해주어 하인들이 자신을 존중했다.
그런데 하필 독단으로 도라를 내쫓아버리다니, 가정부의 권위에 흠집을 낸 것 아닌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
안토니아의 목소리에 밀즈 부인은 한 번 더 흠칫했다.
그녀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정말 사실이구나 해서.
“제게 상의도 하지 않고 도라를 내쫓으시다니요.”
“하, 어째서 우리 아가씨가 그런 사소한 일을 상의해야 하오?”
마틴은 뜨끈하게 오른 안토니아의 이마를 찬 수건으로 닦아주며 밀즈 부인에게 항의했다.
밀즈 부인은 당연하다는 듯 쓸데없이 도도한 척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상의해야지요! 저는 엄연히 이 저택의 가정부고, 저택 사용인들의 관리는 제-.”
“그럼 그만둬.”
표정 없이 내뱉은 안토니아의 말에 밀즈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네?”
“불만이면 관두라고.”
안토니아는 마틴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밀즈 부인에게 말했다.
“여긴 내 저택이야. 밀즈 부인이 나보다 더 위야?”
“그, 그건 아닙니다만.”
“당신의 불만이 내가 낫는 것보다 중요해?”
“아가씨……!”
밀즈 부인은 순간적으로 열두 살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귀족 영애를 상대하는 기분을 느꼈다.
“몸이 울리는 것 같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요리장에게 칭얼거렸다.
너무 무리해서인지 열이 확 올라 어질어질했다.
마틴은 그 모습에 속상해하며 밀즈 부인에게 외쳤다.
“당장 나가세요!”
“……나가긴 하겠습니다만, 아가씨.”
밀즈 부인은 마뜩잖은 눈으로 안토니아에게 한 마디 한 마디 힘주며 이야기했다.
“아가씨의 후견인, 바올로 님께서 제게 저택 관리를 일임하셨단 건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밀즈 부인은 그렇게 말한 뒤, 문을 세차게 닫으며 방을 나섰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정말 단순하기도 하지.’
어린 애가 아파서 하는 말에 저렇게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 보면 말이다.
덕분에 안심했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밀즈 부인도 자신의 작은 아버지 바올로도 너무 무섭게만 느껴졌으니까.
‘몸이 회복된 뒤에는 툭하면 벌 받곤 해서 그런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유로 지하 창고에 가두곤 했다.
예를 들면 시중하녀 도라가 실수를 해서 한소리라도 하면.
‘아가씨, 도라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모셨는데. 겨우 그런 걸로 화내시는 건가요?’
‘다들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데. 이 배려심도 없는 것 같으니!’
밀즈 부인과 바올로는 안토니아가 너그럽지 못하고 성미가 괴팍하다며 지하 창고에 가뒀다.
짧을 때는 12시간, 길 때는 일주일. 안토니아는 습하고 추운 지하 창고에서 혹시라도 쥐에게 물릴까 무서워하며 견뎌야 했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에는 지하 창고가 진저리나 지하를 싹 정리해 아예 다른 모습으로 바꿔버렸다.
안토니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일단은 체력부터 회복해야 했다. 밀즈 부인이나 바올로는 도라처럼 쉽게 내쫓을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도라도 정말로 내쫓은 건지는 모를 일이지.’
밀즈 부인의 입맛대로 움직여주는 수족을 그리 쉽게 버릴 리가 없을 테니까.
“아가씨, 얼른 주무세요.”
“응…….”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깨어나시면 달콤한 뱅쇼를 준비해둘게요.”
“고마워.”
안토니아는 자신의 이불을 여며주는 마틴의 따뜻한 손길에 스르륵 다시 잠들었다.
경제권이니, 저택 주도권이니 하는 건……. 우선 자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 * *
다시 눈을 뜨고 사흘째, 안토니아는 제 눈앞에 차려진 것들을 보고 감동 중이었다.
‘역시 마틴의 솜씨는 최고야.”
아직 온전치 못한 제 소화기관을 고려해 고기를 잘게 갈아 넣은 리조또를 메인으로 내주었다.
곁들인 코울슬로는 사과로 드레싱을 만들어 새콤했다. 게다가 차는 부드럽고 은은한 단맛이 끝에 남아 속이 편했다.
아침이라 이렇게 간단했고, 점심이나 저녁은 더 대단했다.
안토니아는 지난 사흘간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먹는 입맛에 맞는 식사에 행복감을 느꼈다.
‘매번 다른 사람 입맛만 생각해야 했는데!’
자신을 위해 맞춰진 요리라니. 그것도 매일매일.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 같던 도라나, 전 남편의 하인도 없었다.
도라가 쫓겨난 뒤 마틴은 가정부 밀즈 부인과 대판 싸워 임시로 주방 하인들이 안토니아를 보살피도록 했으니까.
덕분에 백작이던 때처럼 점잔뺄 필요도, 도라나 밀즈 부인 앞에서처럼 마냥 얌전하게 굴지 않아도 되어 더 편했다.
“아가씨, 천천히 드셔요. 그제도 그렇게 드시다가 의사를 불러야 했잖아요.”
“우, 응.”
마틴의 말에 안토니아는 저도 모르게 빨라지던 수저질을 천천히 되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방 하인들은 속으로 속상해했다.
‘그간 도라가 얼마나 우리 아가씨를 굶겼으면……!’
원래 안토니아는 구김 하나 없는 맑고 우아한 꼬마 아가씨였다.
돌아가신 선대 백작 부부의 말을 잘 듣고 하인들에게도 아낌없이 잘 베풀었다.
게다가 차기 백작으로서의 의젓함도 보여 백작저 하인 대부분이 안토니아를 귀여워했었다.
‘그래서 도라가 귀한 걸 받았을 때도 그러려니 했던 건데!’
만에 하나라도 아가씨의 몸이 낫는 데 해가 될까 봐.
다들 보고 싶으면서도 참고, 또 참았다.
아가씨의 슬픔을 더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몇 년이나 굶주린 것 같은 모습이라니.
마틴은 속상함에 눈썹을 찌푸리며 안토니아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뭐든지 해드릴 테니까요.”
“정말?”
“네, 그럼요. 지난 2년간 아가씨가 쪼르르 달려오지 않아서 얼마나 제가 허전했는데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겸연쩍어 수저로 리조또 그릇만 긁적였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었으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랬었지, 그러다 어머니께 혼이 나기도 했고.’
매일 좋아하는 것만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론 아버지는 일주일 째 재료만 바꾼 크림스튜를 드시면서도 허허 웃기만 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그러기 어려웠다.
결혼 전에는 작은아버지 바올로가 말라야 한다며 식단관리를 했고, 결혼 후에도…….
‘전 남편의 식성이 워낙 까다로워서야 말이지.’
그저 배를 채우면 그만이 되었던 안토니아와 달리 전 남편은 입이 고급이었다.
덕분에 안토니아가 매일 고심하던 것 중 하나가 남편의 입맛을 맞춘 식단 구성이었다.
여러 주방장도 못 맞추겠다며 두손 두발 다 들어 도저히 남아나질 않았으니까.
‘역시 한 번 죽은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네. 남의 편도 없고!’
게다가 제 입맛에 꼭 맞춘 마틴의 음식을 또 먹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안토니아는 여전히 뻣뻣한 얼굴 근육을 열심히 움직이려 노력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마틴에게 말했다.
“고마워, 나 진짜로 마틴의 요리가 그리웠어.”
“……아가씨.”
“난 마틴이 해 주는 거면 다 맛있어. 다 날 생각해서 해 주는 거잖아.”
안토니아의 말에 식당 내 하인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들 당장 통곡하지 않기 위해 참는 것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하나에 꽂히면 매일같이 그것만 찾던 아가씨가 뭐든지 다 좋다고 하시다니!’
‘도라도, 밀즈 부인도 우리 귀한 아가씨를 어떻게 보살핀 거야.’
모두들 선대 백작 부부 때부터 있어 안토니아의 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소소한 습관을 잘 알았다.
그러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자신들은 아랫사람이라 밀즈 부인이나 바올로에게서 이 귀여운 아가씨를 탄탄한 방패처럼 지킬 수 없었단 점이 더욱 후회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거리라도 해보는 건데.
마틴은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꾹 참고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래도 제 즐거움은 남겨주세요.”
“즐거움?”
“아가씨께서 먹고 싶다고 하는 걸 만드는 게 제 즐거움이랍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런 게 즐거움이 될 수 있다니, 자신이 전 남편의 식단을 고민할 때는 괴롭기만 했는데.
‘아, 마틴도 식단 짜는 게 고민인 걸 수도 있어.’
그럼 당연히 도와줘야지.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마틴과는 오래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안토니아는 힘내서 짜낸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열심히 생각해 볼게.”
마틴은 그 말에 안토니아가 귀여우면서도 어쩐지 짠하게 느껴졌다.
뭔가 아가씨가 착각한 기분이 들어서 더욱.
* * *
도라를 내쫓고 2주일, 안토니아는 제법 몸을 회복해 저택 정원도 산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저택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오늘도 너무 맛있어.’
전부 자신의 입맛에 맞춰 준비된 요리들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부드러운 부위만을 써 씹기도 편한 촙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깨어난 뒤 열심히 노력해 보았음에도 간신히 옅은 미소를 보일락 말락 한 정도가 최선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죽기 전에도 웃을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지만.’
전 남편이 툭하면 표정 없는 병이라더니,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며 욕하던 게 기억났다.
‘그때는 정말 다 내 탓인 줄 알았는데.’
주변에서 자신을 정성으로 돌봐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웃을 일이 없어 웃지 못했고 화내봐야 바뀌는 게 없어서 기력을 잃었던 거였다.
‘남의 편한테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한 번 죽어볼 만은 했네.’
안토니아는 양 볼 빵빵하게 촙스테이크를 밀어 넣어 씹으며 생각했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 아무도 안 뺏어가요.”
“우응?”
안토니아는 마틴의 말에 그제야 제 양 뺨이 빵빵해졌다는 걸 깨닫고 부지런히 씹었다.
마틴은 옆에서 ‘천천히, 천천히’ 외치며 마치 유리 공예품 다루듯 안토니아를 살폈다.
“깜박했어, 너무 맛있어서…….”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드셔도 괜찮아요. 그러다 또 배가 아프시면 안 되잖아요.”
“응.”
지난 2주간, 안토니아는 2번 정도 배앓이로 의사를 불러야만 했다.
둘 다 서둘러 먹다 체한 탓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입이 호사스러워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식사 속도가 계속 빨라졌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주변이 다 어릴 때 보던 하인들이다 보니.’
어릴 때 버릇이 튀어나왔다. 어리광부리고 정말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굴고 싶어졌다.
예전 삶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이런 호사는 누려보지 못했으니까.
바올로는 누구와 결혼하건 세르히 백작가의 위신에 먹칠하면 안 된다며 순종적이고 우아하며 가녀리기까지 한 아가씨를 만들려고 했다.
‘뭐, 본인이 세르히 백작이 돼서 조카를 잘 키웠단 소리를 들으려고 한 거였지만.’
결론적으로 바올로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암울했던 예전 삶에서도 세르히 백작 위는 안토니아가 가져왔으니까.
뭐,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휘둘리면서 살아야 했다는 건 씁쓸한 사실이지만.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건 내가 지킬 거야.’
그러다 보니 계속 식사 속도가 빨라지는 걸지도 몰랐다. 물론 안토니아도 그게 반쯤 변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안토니아가 점심 식사를 거의 끝낼 무렵, 밀즈 부인이 식당을 찾았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아니……!”
밀즈 부인은 안토니아에게 뭔가 말하려다 놀란 얼굴로 마틴을 향해 외쳤다.
“아니, 또 아가씨께 이런 고기 요리를 드시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지금이 딱 보기 좋게 호리호리한데!”
“헛소리! 아가씨는 한창 크실 때요, 그리고 뭐가 호리호리해요!”
마틴은 여전히 가느다란 안토니아의 팔목을 보며 속상한 얼굴을 했다.
“도라 그 몹쓸 것 때문에 이렇게 뼈밖에 안 남으셨는데.”
“저는 다 아가씨를 위해서!”
“흥, 그런 사람이 도라가 딴짓하는 것도 관리하지 못했나?”
마틴의 말에 밀즈 부인의 코 아래까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라도 말리셔야지요.”
“왜?”
“왜냐니요, 바올로 님이.”
“난 맛있는 거 좋아, 왜 먹으면 안 돼? 그럼 밀즈 부인은 왜 나보다 커?”
안토니아는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밀즈 부인에게 물었다.
“작은아버지는 배도 이만하게 나왔어, 작고 마른 게 정말 좋은 거면 작은아버지는 왜 몸이 커다래?”
어린 안토니아의 눈은 그저 순진했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이 없어서 더 그런 걸까, 밀즈 부인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귀족은 원래 그래야 한다고 해도 바올로가 걸렸고, 자신은 귀족이 아니라 괜찮다고 말하자니 또 자존심이 상했다.
애초에 자신은 성인이라 좀 더 몸집이 있는 것뿐이었다.
‘어쩜 말하니까 더 얄미워 죽겠어!’
말 못 할 때는 도라를 시켜 슬쩍 괴롭히기라도 할 수 있었는데.
그래봐야 뭐라고 항의도 못 했으니까.
너무, 너무 아까웠다.
지금껏 안토니아의 몫으로 준비된 고급 요리는 줄곧 자신과 도라의 몫이었기에.
밀즈 부인이 답을 못한 채 망설이는 사이 안토니아는 남은 고기 조각을 마저 해치웠다.
그러자 주방 하인 중 하나가 당연한 듯 안토니아를 위한 새콤한 셔벗을 가지고 왔다.
“아, 아니. 지금…….”
그러나 밀즈 부인은 말을 삼켰다.
뭐라고 딴지 걸면 바올로와 자신이 안토니아보다 더 몸집이 큰 것에 대해 대답하라고 재촉할 것 같았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모습에 속으로 비웃었다.
밀즈 부인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사람이었다.
뭣보다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았다.
“밀즈 부인, 할 말 있는 것 아니야?”
밀즈 부인은 살았다는 얼굴로 냉큼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아가씨의 시중하녀도 다시 두어야지요.”
“그렇구나. 난 지금도 괜찮은데?”
물론 안토니아도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건 알았다.
주방 하인들도 매일같이 할 일이 많았고 지금은 사실상 초과근무 같은 상태니까.
유일하게 가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곳이 주방이었다.
‘그래서 주방 하인들은 작은아버지에게 넘어가지 않은 거고.’
지금이야 안토니아에 대한 애정으로 버틴다지만, 계속 두다간 분명 불만이 쌓일 것이다.
“그래선 안 되지요, 주방 하인들에겐 주방 하인들의 일이 있으니까요.”
“우린 괜찮습니다. 밀즈 부인.”
“맞아요, 저흰 아가씨를 모시는 게 즐거워요.”
주방 하인들은 곧장 반박했으나, 밀즈 부인은 이번에는 몇 번 헛기침하며 거절했다.
“흠, 흠. 안 될 말입니다. 어느 귀족 아가씨가 주방 하인의 시중을 받는답니까!”
밀즈 부인은 그러며 안토니아에게 몇 가지 명부를 내밀었다.
‘요 며칠 마틴하고 자주 싸우더니, 오늘은 단단히 맘먹고 왔나 보네.’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이 내민 명부를 살폈다.
안토니아와 두세 살 정도 많은 비슷한 또래로 하나같이 밀즈 부인이 수족처럼 부리던 애들이었다.
회귀 전, 여기서 안토니아를 괴롭히지 않거나 물건에 손대지 않은 애들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새로 드레스라도 맞추면 꼭 첫 개시는 저들이 한 뒤에야 제 옷장에 걸어주곤 했다.
덕분에 안토니아는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드레스를 입어야 했고.
“모두 똑똑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애들이랍니다.”
“……정말?”
안토니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밀즈 부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아가씨? 정말이에요.”
“하지만 밀즈 부인은 도라를 데리고 왔을 때도 그렇게 말했잖아.”
“네? 아, 아니. 얘들은 정말 다를 겁니다.”
당황하는 밀즈 부인을 보며 안토니아는 명부를 슥 밀고서 다시 셔벗에 집중했다.
녹아서 물이 되기 전에 사각사각한 식감을 제대로 즐기고 싶었으니까.
“아가씨.”
당연히 밀즈 부인은 안토니아를 재촉하듯 말했다.
‘분명 지금 내 수저를 빼앗고 싶을걸.’
예전엔 실제로 그랬으니까. 지금 얼마나 답답할까.
자기 성질대로 못 해서. 예전에는 안토니아의 편이라곤 하나도 없고 바올로의 강한 비호가 있어 가능했던 거였다.
“음, 꼭 시중하녀 정해야 해?”
“그럼요! 모두 백작가의 체면과 연결되는 일입니다.”
“음…….”
안토니아는 셔벗을 조금 더 먹으며 고민하는 것처럼 굴었다.
명부를 한 번 더 흘끔 보다 정했다는 듯 다 먹은 셔벗 그릇 위에 스푼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난 로레나가 좋아.”
“……네?”
“로레나도 얘네랑 나이도 비슷하고 저택에서 일한 기간도 비슷하잖아.”
“아, 안 될 말입니다. 아가씨.”
“왜?”
안토니아는 다 알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밀즈 부인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예전 삶에서도 로레나는 끝까지 안토니아의 편을 들어준 하녀였으니까.
“그 아이는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입니다. 아가씨를 모시기 위한 일을 배운 적이 없어요.”
“그럼 배우면 되잖아.”
“네……?”
“나도 가르쳐줄 수 있고, 마틴도 알려줄 수 있어! 그렇지?”
안토니아의 말에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제가 틈틈이 가르치면 도라 그것보다 훨씬 쓸만할 겁니다.”
마틴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아니, 주방에서만 일하던 사람이 어떻게-.”
“요즘 내 머리는 마틴이 묶어준 거야. 그리고 드레스도 봐.”
안토니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옷차림을 보였다.
“말라서 허리가 헐렁해서 볼품없었는데 이것도 마틴이 다른 하인을 시켜서 고쳐준 거고, 도라가 있을 때랑 달리 주름도 없어. 심지어 좋은 향기도 나는걸!”
“…….”
“마틴은 원래 어머니의 시중하녀였어! 후작가에서 시중하녀 일을 했던 마틴이 로레나를 가르치면 안 되는 거야?”
“네……?”
“혹시 몰랐어?”
밀즈 부인은 말문이 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고 어쩜 이렇게 티를 내는지.’
안토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가정부라는 자가 백작저 하인들의 이력도 모르니까 말이다.
“밀즈 부인은 가정부잖아, 정말로 몰랐어?”
“그, 그럴 리가요.”
“진짜?”
안토니아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는 듯 부주방장을 가리켰다.
“부주방장도 어머니가 결혼할 때 후작가에서 왔는데, 원래 뭐하던 하녀인지 알아?”
“네……?”
밀즈 부인이 고민에 빠진 게 보였다.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밀즈 부인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하인들 말고는 다 내쫓을 생각이었으니까.
어차피 떠날 사람의 이력 따위 몰라도 된다고 생각한 거겠지.
“모르는구나, 아. 그래서.”
안토니아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순진한 어린아이의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도라가 도둑질할 만한 애라는 것도 몰랐구나!”
주방 하인 중 몇몇에게서 ‘풉’하는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당연히 밀즈 부인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어깨를 떨었다.
“근데 그럼 얘네가 괜찮은 애들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
“그, 그 아이들은 아가씨에게 보낼 아이들이라 열심히 확인했습니다.”
“도라 때는 안 그랬어?”
밀즈 부인은 안토니아의 말에 또 답할 말이 없었다.
안토니아는 피곤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난 이제 자야겠어.”
“그럼요, 아가씨. 의사 선생님이 낮잠을 꼭 챙겨 자라고 했으니까요.”
“그럼 밀즈 부인, 로레나를 보내 줘. 마틴이 가르쳐, 줄 테니까…….”
끝말은 정말 졸려서 점점 흐려졌다.
마틴이 안토니아의 몸을 안아 들자 금세 그 품에 쏙 기대어 눈을 감았다.
‘천천히 말라 죽을 것 같은 기분일 거야, 분명.’
자신의 어린애 말투도 틀림없이 짜증 나 죽으려 하겠지.
밀즈 부인이 분통 터져 할 걸 생각하니 오늘 낮잠은 아주 달 것 같았다.
* * *
가정부용으로 마련된 숙소는 백작저 하인 숙소 중 가장 넓고 호화로웠다.
밀즈 부인은 2년 전 바올로에게 가정부로 임명받은 뒤, 자신만의 개인실을 꾸미는 데 힘썼으니까.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안주인 침실보다도 더 낫다고 자부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 못된 꼬마가!’
말하지 못할 때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만 떠들어댔다.
게다가 하나같이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들이었다.
‘얌전히 내 말이나 들으면 되지!’
마음 같아서는 지하 창고에 가두거나 흠씬 매타작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안 되지, 안 돼.’
고작 이런 걸로 저택을 시끄럽게 만들 순 없었다.
아직 저택 정비가 덜 끝나 내보내야 할 하인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 주방장 마틴 같은 인간 말이지!’
괜히 그런 것들이 밖에 나가 떠들고 다니게 할 순 없었다.
하필 저택 정비가 끝나기도 전에 그 꼬마의 말문이 트여선.
‘바올로 님이 신전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바올로가 저택을 비우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었다.
저택을 완벽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안토니아가 회복 불가능 판정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야 저 시건방진 하인들의 콧대도, 희망도 확 꺾여서 저택을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을 테니까.
회복한다 해도 이미 힘이 없을 테니, 입맛대로 고분고분하게 가르쳐 적당한 곳과 결혼시켜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바올로 님은 도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일주일 전에 이미 편지를 보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밀즈 부인은 분노하며 편지를 써 내려갔다.
안토니아가 얼마나 건방지며 자신이 치욕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을 최대한 가련하게 적어 보냈다.
‘바올로 님만 돌아오시면, 다 갚아줄 거야! 저런 꼬마 따위.’
비록 바올로가 자신에게 그 어떤 약속도 해주지 않았지만 저를 좋아하는 건 분명했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자신을 위한 목걸이도 선물하지 않았던가.
분명 백작 위를 얻고 난 뒤에 청혼하려는 바올로의 깊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백작 부인이 되면 저 꼬마는 비참하게 내쫓아버리고 말 거야!’
밀즈 부인은 미래를 떠올리며 짐짓 우아한 자세로 편지를 밀봉했다.
훗날 바올로와 결혼해 백작 부인이 될 걸 생각하면 미리 습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
* * *
그로부터 사흘 뒤, 안토니아의 시중은 로레나와 주방 하녀 중 괜찮은 애를 골라 들도록 했다.
두 사람 모두 마틴에게서 제대로 가르침 받아 도라와 달리 첫날부터 제대로였다.
“아가씨, 눈을 뜨셔야지요. 너무 늦게까지 주무셔도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로레나는 깨우긴커녕 안토니아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오늘 아침은 주방장님이 토마토와 베이컨을 넣은 링귀니라고…….”
“정말?”
눈이 번쩍 뜨였다. 안토니아의 반응에 로레나가 작게 웃었다.
“자, 그럼 얼른 정신 차리고 일어나셔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 생각난 듯 로레나에게 물었다.
“어제 말한 건 잘했어?”
“그럼요, 로토 아저씨께 잘 가져다드렸어요. 밀즈 부인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요.”
“다행이야. 작은아버지께 편지를 보낸 걸 알면 분명 난리가 날 테니까.”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로레나가 가져온 미지근한 세숫물에 손을 담갔다.
어제 보낸 건, 다름 아니라 두 사람을 이간질하고자 보낸 편지였다.
안토니아는 어제 로레나를 시켜 두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중 한 통의 수신인이 다름 아닌 그녀의 작은 아버지 바올로 세르히였다.
지난 2주가량,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을 여러 방법으로 잔뜩 약 올렸다.
안 그래도 안달 나 바올로를 재촉했을 게 분명한 밀즈 부인이었다.
“내가 그냥 편지를 보냈다간 어떻게든 내용을 읽으려고 했을걸.”
“분명히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밀즈 부인은 가정부였으니까.
“평소에 집에 안부 편지 보내는 것도 간섭하거든요.”
“정말?”
“그럼요, 게다가 몰래 보내려고 해도 도라가 알리곤 했으니까요.”
로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세수를 마친 안토니아에게 수건을 건넸다.
적당히 미지근해 딱 좋았다. 수건에서도 이상한 냄새 대신 뽀송뽀송한 향기가 났고.
도라는 매번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수건을 가져다주곤 했으니까.
“로토 아저씨는 입도 무겁고 무뚝뚝해서 밀즈 부인도 상대하기 어려워하지.”
“주방장님도 그래서 식재 구입 때는 꼬박꼬박 운송을 로토 아저씨께 부탁해요.”
곁에서 안토니아의 새 드레스를 준비하던 주방 출신 하녀 폴리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안 그러면 밀즈 부인이 그 놈팡이 같은 자기 아들을 통해서 몇 푼이라도 남겨 먹으려고 들거든요!”
“다들 여러모로 고생이었구나.”
안토니아의 말에 폴리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이제는 아가씨가 있는걸요. 재수 없던 도라도 없어졌고요.”
솔직한 폴리의 말에 안토니아가 작게 웃었다.
로레나는 웃으면서도 조심히 말해야 한다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안토니아는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십수 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렇게 믿을 만한 사람이 제 곁에 있는 것 자체가 말이다.
그러나 기껏해야 저택 내에서도 주방과 제 시중을 드는 단 두 명의 하녀, 마구간지기 로토 아저씨 정도만이 제 편이었다.
아직 저택엔 밀즈 부인이나 바올로를 따르는 하인들이 훨씬 많았다. 대다수는 돈을 벌려고 일하는 만큼 금전에 약한 법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점에 대해 크게 서운해하지 않았다.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라면 오히려 어려울 것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작은아버지와 밀즈 부인 사이를 갈라 경제권을 빼앗아야 해.’
당연히 아직 바올로가 돌아와서는 곤란했다. 좀 더 밀즈 부인을 고립시키고 충분히 이간질한 뒤 나타나길 바랐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순진하고 마음씨 여린 조카딸을 가장해 바올로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작은아버지께’로 시작해 구구절절 얼마나 바올로에게 감사하는지에 대한 감상을 한 장 가득히 적었다.
[작은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의지할 곳 없이 매일 눈물로 지새웠겠지요, 이 저택도 온통 엉망이었을 테고요.]
두 번째 장에는 밀즈 부인이 얼마나 자신에게 정성인지를 고운 말로 적었다.
[밀즈 부인이 어찌나 신경을 많이 써주는지, 세숫물부터 제 식사까지 하나하나 챙겨주어 불편함이라곤 없답니다. 모두 작은아버지가 많이 신경 써주신 덕이에요.]
물론 도라의 거짓말 이야기도 적었다. 조금 시점을 달리해서 말이다.
[밀즈 부인이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몰라요, 친절하고 다정한 밀즈 부인의 호의를 이용하다니, 도라가 너무 나빠요. 밀즈 부인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까 너무 걱정돼요.]
그 외에도 저택에서 자신이 밀즈 부인에게 한 일들을 모두 낱낱이 적되 전부 어디까지나 의지하고 생각한다는 것처럼 보이도록 신경 썼다.
‘작은아버지의 저울이 내게 기울도록 말이야.’
밀즈 부인과 자신의 편지 내용은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자신 또한 내용을 속여 쓸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제게는 십 년간 세르히 백작으로서 쌓아온 경험이 있었다.
편지에 적힌 어조와 전달 방식에 따라 얼마나 다른 인상을 줄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게다가.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쪽에 더 마음이 쏠리는 법이잖아?’
바올로는 저를 이용하고 싶어할 테니, 밀즈 부인에게 올릴 추가 무척 적어질 것이다.
그는 듣기 싫은 말은 흘려듣고 좋은 말에만 반응하는 전형적으로 허영심 많은 타입이었으니까.
‘거기다 작은아버지는 밀즈 부인의 성격을 잘 알지, 그녀가 불평불만이 많다는 것도 말이야.’
무엇보다 오래 공들인 교섭이 끝나갈 텐데, 거래의 성사를 눈앞에 두고 돌아올 리가.
안토니아는 로레나와 폴리에게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로토 아저씨에게는 종종 간식을 가져다주는 게 좋겠어.”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앞으로 편지를 꾸준히 보낼 생각이었다.
철없고 유약하며 똑똑지도 못한 조카딸이 정에 굶주려 정성스러운 편지를 보낸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럴수록 바올로의 발걸음은 더뎌질 테니까.
* * *
정원이 어느덧 가을꽃들로 만개했다.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과시하던 열기도 잦아들어 서늘해질 무렵이었다.
세르히 백작령, 영지 저택 가정부 밀즈 부인은 요즘 매우 불쾌한 나날을 보냈다.
이 저택에서 이름만 주인인 안토니아 아가씨가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다리던 바올로의 답장도 엉망이었다.
‘아직 어려서 철없이 구는 것일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니!’
자신이 얼마나 상세하게 안토니아의 패악질을 써서 보냈는데. 그것도 살짝 과장을 섞어서 말이다.
어떻게 자신에게 그럴 수가 있는가, 바올로만 믿고 저택에서 매일 같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는데 말이다.
밀즈 부인은 분통이 터졌으나 제 나름의 기품과 우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난, 난 곧 귀부인이 될 사람이니까.’
물론 그러다가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백작가 화병 몇 개와 선대 백작 부인이 짜둔 태피스트리를 망가트렸지만.
‘흥,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무서워서라도 어린 하녀의 실수를 물어내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실제로 안토니아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도 괜찮다고 웃어넘겼다.
‘관대한 척하기는!’
도라만큼 만족스럽진 않아도 곁에 있는 아이들은 나름대로 잘 움직여줘서 다행이었다.
밀즈 부인은 크게 심호흡한 뒤 다시 펜을 들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바올로 님께 보낸 편지가 너무 기품 없었던 게 아닐까.’
머지않아 백작 부인이 될 자신과 같은 사람이 감정에 휘둘린 편지를 썼다.
평생 귀족으로 살아온 바올로가 봤을 때, 아랫것들이 흥분하여 크게 부풀린 것처럼 보였던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고상하게 안토니아 그 꼬마의 못된 짓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밀즈 부인은 비싼 돈을 주고 수도에서 구해온 귀족회화 교본과 잡지를 뒤적였다.
이런 것들을 읽다 보면 자신이 벌써 백작 부인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편지 쓰는 것도 잊고 은은한 향의 차와 함께 잡지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밀즈 부인!”
“웬 소란이야, 노크하고 조심히 들어오라고 이르지 않았어!”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밀즈 부인은 잡지에서 본 것처럼 얕게 한숨을 내쉬며 느긋한 움직임으로 책을 덮었다.
“말해 보렴, 무슨 일이야.”
“의, 의상실 마담이 재봉사를 잔뜩 데리고 저택을 방문했어요.”
“……응?”
순간적으로 밀즈 부인은 바올로가 자신을 위해 연말 드레스라도 맞춰주려 하는 깜짝 이벤트인가 생각했다.
“아가씨께서 부르셨대요! 지금 아가씨 방에……!”
“뭐?!”
밀즈 부인은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감히, 나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돈을 쓰겠단 말이야?!’
단숨에 머릿속에서 귀족으로서의 고상함이 날아가 버렸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그간 하녀들만 보내 옷을 맞추셔서 걱정이 많았답니다.”
세르히 백작령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는 마담의 말에 안토니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간 그럴 짬이 나지 않아서, 걱정해줬다니 고마워.”
딱딱한 표정에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분한 말투였다.
백작저 하인들은 그나마 안토니아의 미미한 표정 변화에 익숙해졌다지만 의상실 마담은 아니었다.
그녀는 예전과 달리 굳어진 표정과 빼빼 마른 몸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했다.
‘저 마른 몸도 그렇고……. 아무래도 후견인이라는 친척이 아가씨께 소홀한가 봐.’
마담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티 내지 않으며 데려온 재봉사들에게 카탈로그를 꺼내라고 지시했다.
그 순간.
“아가씨!”
예전에 드나들던 백작저, 아니 마담이 거래하는 다른 하위귀족이나 그 아래 계층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사용인의 고성이 들렸다.
이윽고 방문이 벌컥 열리며 밀즈 부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제게 말씀도 않고 재봉사를 부르신 겁니까! 제 허락을 구하셨어야지요!”
금세 의상실 마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천지 어느 귀족 아가씨가 가정부에게 허락을 구하고 드레스를 맞춘단 말인가.
마담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지난 2년간 아무도 제대로 듣지 못한 백작가 사정을 자신이 들을 기회였으니까.
* * *
예상대로 쳐들어온 밀즈 부인을 보며 안토니아는 속으로 흡족해했다. 어쩜 이렇게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줄까.
“허락?”
안토니아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얼굴로 밀즈 부인에게 물었다.
의상실 마담의 호기심 가득한 눈을 보니 얼마 후 영지 내 소문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마담은 영지 내 소문난 소식통으로 그녀에게 들어간 이야기는 아무리 늦어도 사흘 안에 퍼지곤 했으니까.
“바올로 님께서 제게 아가씨와 저택 관리를 맡기셨어요, 거기에는 재산 관리도 포함되어 있고요!”
밀즈 부인은 아까워죽겠다는 듯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이렇게 언질도 주지 않고 큰돈을 쓰시면 저택 예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단 말입니다.”
그녀의 말투에서 안토니아에 대한 존중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와 비난만 가득했다.
안토니아는 속으로 웃었다. 지금쯤 마담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후견인을 잘못 만나 핍박받는 아가씨가 되었을 터다.
당연히 밀즈 부인은 누가 봐도 주제 모르는 나쁜 하인일 테고.
안토니아는 차분하되 조금은 초조한 기색으로 밀즈 부인을 보며 이야기했다.
“밀즈 부인의 말은 알겠어. 하지만…….”
안토니아는 이번에는 조금 속상한 눈빛으로 의상실 마담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밀즈 부인을 향해 말했다.
“진정해, 지금은 외부인이 와 있잖아.”
안토니아는 미안하다는 말투로 마담에게 이야기했다.
“모처럼 시간을 내줬는데 미안해, 잠시 기다려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아가씨. 다른 분도 아니고 아가씨의 드레스인걸요!”
마담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드레스를 판매한 것보다도 더 소득이 큰 얼굴이었다.
“잠시 백작가의 훌륭한 응접실이라도 감상하고 있겠습니다.”
“의상실 마담을 안내해 줘.”
마담은 안토니아를 응원하듯 미소 지으며 방에서 나섰다.
그렇게 되고 나자 밀즈 부인은 한껏 의기양양한 얼굴로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의상실 마담 앞에서 아가씨의 잘못을 인정하긴 싫으셨나 봅니다. 제게 감사하셔야 할 겁니다. 아가씨.”
“무슨 소리야?”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축되어 차분하고 어른스럽던 말투의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어린 소녀는 딱딱한 얼굴로 비난하며 말했다.
“백작저 가정부라는 자가 형편없이 구는 모습을 숨겨준 건데.”
“형편없다니요!”
당연히 밀즈 부인은 펄쩍 뛰며 안토니아에게 말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다고 지금 나한테 저러는 거겠지!’
바올로가 저택을 비우며 신신당부했다.
백작가의 재산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앞으로를 위해 하인들의 급료는 넉넉히 주라고 했으나 안토니아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모든 건 바올로 님의 지시입니다.”
밀즈 부인은 애써 화르륵 타올랐던 흥분을 가라앉혔다.
자신은 당당했으니까.
“아가씨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바올로 님께서는 주의를 기울여 예산을 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치는 좋지 않다고요!”
밀즈 부인은 헛기침해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우아함을 찾으려 애쓰듯 말했다.
“특히 아가씨에 대해서는 제게 친히 알려주시며 아가씨께 계절별로 필요한 예산을 알려주셨고요, 이미 가을용 새 드레스는 가져다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말투에서 힐난이 느껴졌다. 어쩜 저렇게 철없게 구는 걸까 하는 주제넘은 감정이었다.
물론 안토니아는 그저 담담했다.
덕분에 밀즈 부인은 묘한 초조함을 느꼈다. 최근 들어 안토니아가 얌전했단 생각이 들어 더욱 말이다.
“작은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네, 아무리 아가씨가 이 저택의 주인이라고 하신들-”
“밀즈 부인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그럼요!”
밀즈 부인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안토니아에게 돈을 아끼자는 건 바올로와 한 번도 의견이 어긋난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안토니아는 비웃듯 피식 소리를 냈다. 자세히 보니 한쪽 입꼬리도 미미하게 올라간 게 보였다.
“밀즈 부인은 모르나 봐. 정해진 예산도 필요에 따라 늘릴 수도 있는걸, 특히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은.”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 그리고 나아가 제 작은아버지에게 효과적인 말을 알았다.
“아끼는 걸 누가 알았다간 귀족으로서 품위 없다고 말할 텐데.
“…….”
“작은아버지가 그랬을 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안토니아의 태도를 보자 밀즈 부인은 오기가 생겼다.
비쩍 마른 어린애 주제에 저가 제일 잘났다는 그 태도라니!
정말 눈꼴시어서 봐주지 못할 지경이었다.
“정말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바올로 님께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그래?”
그런데 정작 안토니아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린 것 같은 눈치였다.
어린 소녀는 곁에 있던 로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밀즈 부인은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저게 바로 며칠 전 잡지에서 본 귀부인의 몸가짐이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러다 퍼뜩 정신 차렸다. 자신이 지금 누굴 보고 귀부인의 몸가짐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혼자 자존심이 상했다.
그사이 안토니아는 로레나에게 편지를 한 통 받아 펼쳤다.
“밀즈 부인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의상실에서 사람을 불렀다고 했지.”
“네, 아가씨의 잘난 하인 중 누구도 연락하지 않았으니까요.”
“이걸 봐.”
안토니아는 느긋한 몸짓으로 밀즈 부인에게 편지를 건넸다.
“밀즈 부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작은아버지의 편지니까.”
“네?”
밀즈 부인은 그 말에 깜짝 놀라 후다닥 편지를 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바올로가 무엇 하러 안토니아에게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그러나 자신에게 보낸 것과 달리 제대로 된 고급 편지지 위에 적힌 필체는 틀림없는 바올로의 필체였다.
“당연히 작은아버지께는 허락을 구했어, 곧 해가 바뀌는데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다고 말이야.”
“그, 그럴 리가…….”
밀즈 부인은 안토니아의 말대로 원하는 대로 드레스를 맞추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올로가 그럴 리가 없었다. 안토니아에게 투자하는 건 전부 허공에 날리는 돈이라지 않았던가!
‘어떻게 바올로 님이 내게……. 한마디 말씀도 주지 않으시고.’
밀즈 부인은 마음속에서 서러움이 북받치는 걸 느꼈다.
자신에게는 얌전히 있으라는 답장이나 보냈으면서 안토니아에게는 이토록 부드럽게…….
“더 할 말이 있어, 밀즈 부인?”
하고 싶은 말은 가득했다.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올로가 편들어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어떻게 더 버틸 수 있겠는가.
밀즈 부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꾸역꾸역 말했다.
“……아니요, 제가 아가씨께 잘못 말씀드린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함부로 작은아버지를 모함하지 않았으면 해, 의상실 마담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네.”
밀즈 부인은 그대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방을 나섰다.
마음속 가득히 서러움과 배신감이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바올로가 눈앞에 있으면 원망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밀즈 부인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왜냐하면 책상에 펼쳐진 귀족을 위한 서적들이 보였으니까.
귀족이 되어 고상하게 사는 건 자신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뤄주는 건 오직 바올로뿐이었다.
‘지금만, 지금만 참으면 돼!’
그래, 아직 안토니아의 후견인일뿐 바올로도 백작위를 받은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안토니아에게 그런 편지를 보낸 걸지도 몰랐다.
저 꼬마가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을 망쳐선 안 될 테니까.
* * *
밀즈 부인이 나간 뒤 안토니아와 하녀들은 잠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수십 초 뒤, 밀즈 부인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가 되자 세 사람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가씨는 대단하셔요, 바올로 님이 이렇게 순순히 허락해주시다니요!”
모두 안토니아가 열심히 예쁜 말로 치장해 바올로를 구슬리고 달랜 덕에 기분 좋아진 그가 보낸 답장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에게 공을 돌렸다.
“모두 두 사람 덕이지.”
“저희가 뭘요.”
“두 사람이 열심히 밀즈 부인의 눈을 피해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가능했겠어.”
정말로 두 사람은 온갖 방법을 쓰며 마구간지기에게 편지를 부탁하고, 또 받아와 주었다.
저택 내를 철통 감시하는 밀즈 부인 탓에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심지어 오늘 의상실 마담을 불러온 것 또한 발 빠르게 다녀와 준 폴리 덕이었다.
안토니아의 말에 폴리와 로레나는 수줍은 듯 웃었다.
“수줍은 척하긴, 폴리 네 입꼬리 씰룩거리는 게 다 보이는데?”
안토니아의 말에 폴리는 ‘엣헴’하는 자세로 어깨를 활짝 폈다.
“그야 밀즈 부인이 저런 얼굴인걸! 속이 시원해서 그러지. 로레나, 너도 그러면서.”
폴리는 솔직하게 자신의 업적을 뿌듯해했다.
그 와중에 로레나는 염려하듯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정말 괜찮을까요?”
“뭐가?”
“바올로 님이 돌아오신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저는 아가씨가 혹시라도 다치실까 너무 걱정돼요.”
안토니아는 로레나의 말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은아버지는 너무 걱정하지 마, 생각한 게 있으니까.”
“그럼 다행이에요. 전 아가씨가 다치시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다정한 로레나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바올로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몇 마디 말로 그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간단히 허락했다.
게다가 다른 대비책도 세워 뒀다.
‘밀즈 부인도 몇 번만 더 자극하면 작은아버지에게 매달리지 못할 테니까.’
뭐, 끝까지 희망은 가지려 노력은 하겠지만.
어차피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안토니아는 누구에게도 세르히 백작 위를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보다 얼른 드레스를 맞추러 가야지, 의상실 마담이 아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걸?”
분명 마담은 자신이 듣지 못한 뒷이야기가 궁금해 몸이 달았을 것이다.
‘밀즈 부인의 속도 제대로 뒤집어 놓을 기회고!’
* *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마담.”
“별말씀을요, 이 응접실은 선대 백작 부인의 안목이 녹아 있어 제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황홀해진답니다.”
의상실 마담의 말에 안토니아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부모님의 칭찬을 듣는 건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해도 기뻤으니까.
“카탈로그부터 보시겠어요?”
“응, 2년씩이나 직접 드레스를 고르지 않았더니 요즘은 뭐가 유행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안토니아는 ‘2년씩’과 ‘고르지 않았더니’를 명확히 발음하도록 신경 썼다.
기대대로 의상실 마담은 딱 그 두 단어를 말할 때 눈썹을 살짝 움찔거렸다.
“염려 놓으세요, 제가 혹시 몰라 여러 종류의 디자인을 갖춰왔답니다.”
마담이 손짓하자 곧 재봉사가 다가와 카탈로그들을 내려놓았다.
그때 타이밍 좋게도 밀즈 부인이 응접실 안으로 트레이를 가지고 왔다. 평소라면 다른 사람을 시킬 걸 직접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안토니아는 그녀가 느릿하게 테이블 세팅하는 것에 한 번 시선만 준 뒤, 곧장 카탈로그로 고개를 돌렸다.
마담이 자신할 정도로 카탈로그에는 다양한 디자인이 있었다. 그중에는 앞으로 10년쯤 뒤에 유행할 양식도 있었다.
드레스도 드레스지만 장신구나 모자 같은 것들이 특히 말이다.
‘아쉬워라, 내가 사교계 데뷔를 치른 나이라면 이것들로 영지 수익을 올릴 방법을 찾았을 텐데.’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사치하는 남편을 감당하며 영지를 꾸려나갈 고민만 했더니 그런 생각부터 났다.
하지만 지금은 아쉬워도 잠시 미뤄야 했다. 그럴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드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모두 하나같이 예뻐, 2년 전과는 드레스를 장식하는 스타일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아.”
“그렇답니다. 특히 이 디자인에 붙은 레이스는…….”
마담은 안토니아가 관심 보이는 디자인화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중에서는 수도에서 유명한 귀족들이 입었다거나, 어떻게 유행했는지에 대한 가십거리들도 있었다.
어찌나 입담이 좋은지 이미 아는 이야기인데도 홀린 듯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밀즈 부인조차도 옆에 서서 귀를 쫑긋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담도 정말 아는 게 많아, 이래서 어머니가 종종 마담을 불러 대화를 나누신 거구나.”
“아가씨께서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야 늘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는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 말만큼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로 그보다 더 어린 동생을 줄줄이 데리고 이 영지에 들어왔을 때 선대 백작 부인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후원해주었으니까.
안토니아는 카탈로그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 바라보다 세 가지 드레스를 우선 골랐다.
“실내 드레스는 이 세 벌이 좋은데.”
“역시 아가씨는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마담의 디자인이 훌륭해서 그래, 그리고.”
안토니아는 외출용 드레스 디자인화 아홉 가지 중 두 가지를 따로 골라내었다.
이미 실내 드레스 세 벌만으로도 안색이 확연히 나빠졌던 밀즈 부인이었다. 그나마 안토니아가 두 벌만 골라내자 그녀는 내심 안심했다.
‘그래도 저 꼬마가 제 주제를 아주 조금은 아는구나? 실내 드레스 세 벌에 외출용 드레스 두 벌이면…….’
평범한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하면 적게 고른 것이었다. 물론 안토니아가 고른 거라 그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나.
“이 두 가지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주문할게.”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과 차분한 어조로 뱉는 태연한 말에 밀즈 부인은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외출용 드레스를 일곱 벌이나 맞추겠다고?!’
밀즈 부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머릿속으로 바쁘게 숫자들이 떠돌았다.
저 드레스 한 벌 값이면 최소 어지간한 가족들의 2주 치 식비는 될 터였다. 그런 걸 일곱 벌씩이나 맞추다니.
‘말도 안 돼, 바올로 님이 정말로 그런 걸 허락하실 리가 없어!’
자신이 가정부가 된 뒤, 저 옷의 반값 정도밖에 하지 않는 드레스를 맞추려고 할 때도 눈살을 찌푸렸으니까.
“아가씨, 이 두 벌은 어디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나요? 제가 오랜만이라 심혈을 기울였으니 분명 다 좋다 하실 줄 알았거든요!”
의상실 마담은 전부 다 사지 않는 안토니아를 보며 마치 그게 문제라는 것처럼 굴었다.
밀즈 부인은 정말 속에서 천불이 날 것만 같았다.
벌써 실내 드레스 3벌에 외출용으로 7벌이나 맞췄는데, 그것만으로 모자란다고?!
점점 구겨지는 밀즈 부인의 얼굴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안토니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너무 화려한 것 같아서.”
“화려하다니요, 틀림없이 아가씨의 아름다운 이 백금발과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
안토니아는 담담하게 디자인화만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의 얼굴에서 아련함이 느껴졌다. 안토니아는 손으로 디자인화를 잠시 매만지며 마담에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이런 드레스를 좋아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챙겨 온걸요.”
“그래서 그래, 모처럼 예쁜 드레스를 만들어줘도……. 어머니 생각이 나서 못 입을 것 같아서 그래.”
“아가씨…….”
응접실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장본인인 안토니아는 애써 괜찮다는 듯 담담하려 노력해 더욱.
“괜찮아, 다들 그런 얼굴 하지 말아.”
“정말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가씨께서 오랜만에 맞추는 드레스니 아름다움에만 신경 썼어요.”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른 디자인화에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모자와 신발 등, 갖춰 입을 소품 들이 그려진 것이었다.
“부디 비밀로 해줘,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다 하면 다들 날 미덥지 못하다 여길 거야.”
“미덥지 못하긴요!”
이 광경에 밀즈 부인은 환장할 지경이었지만, 의상실 마담에게는 아니었다.
마담은 아직 어리디어린 아가씨가 부모님의 죽음을 꿋꿋하게 버텨내려 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깊은 슬픔에 오래 앓으셨던 아가씨가……. 이 백작가를 지키려고 저렇게 노력하시다니!’
장하고 대견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저택 내에는 안토니아의 행동을 하나하나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밀즈 부인이 있으니 더 그랬다.
“염려 마세요, 아가씨. 제가 어찌 백작가에 누가 될 만한 일을 하겠어요. 저희 직원들도 다 그럴 거예요!”
마담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재봉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마담.”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자. 아가씨 아직 보실 것이 많답니다.”
마담은 안토니아의 앞에 디자인화를 더욱 의욕 있게 펼쳐 보였다.
응접실 안은 안토니아의 주문이 끝날 때까지 줄곧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단 한 사람, 가정부 밀즈 부인만 빼놓고 말이다.
* * *
‘이 모자 세 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아. 이건 리본만 고쳐 달면 될 것 같은데, 나머지는 전부 주문할게.’
‘신발은 다 괜찮은 것 같아, 원래 신던 것들은 작아져서 신을 수가 없거든. 모두 준비해줘, 아 참. 이것 외에도 실내용 신발과…….’
머릿속에서 안토니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가정부실로 돌아온 밀즈 부인은 띵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미친 꼬마 같으니!’
바올로가 돌아오면 곧 쫓겨날 주제에, 백작가 자산을 아주 물처럼 써?
‘자기 돈 아니라 이거야?’
바올로가 알았다가는 자신에게 분명 뭐라고 할 게 분명했다. 저렇게 사치하는데 막지 않고 뭘 했냐고.
백작가의 재산은 앞으로 우리가 관리할 것이니 쓸데없는 데 쓰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최선을 다했어. 아까운 건 오히려 나라고!’
밀즈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답답한지 가슴만 쾅쾅 쳤다.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중간에 응접실에서 나와버렸는데도 미칠 것만 같았다.
“아이고, 아이고……. 오늘 쓴 돈이면 영지 내에 자그마한 상점은 샀을 텐데!”
갑작스레 돈이 모자라 포기했던 상점가 내 작은 건물이 떠올랐다. 한 층짜리에 아주 작은 건물이었지만 위치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못난 아들에게 거기서 장사라도 하라고 할 셈이었는데, 30실버 가량이 모자라 포기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 안토니아가 산 드레스들 대부분이 10실버는 될 게 분명했다. 10실버면 어지간한 평범한 가정에서는 두어 달은 굶주리지 않을 돈이었다.
‘근데 그런 걸 10벌도 넘게!’
드레스만인가, 모자에 신발에, 중간에 나왔으니 분명히 보석도 잔뜩 샀을 게 분명했다.
밀즈 부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바올로 님도 아신다면 분명……!’
저 꼬마가 저번에는 무슨 말로 바올로를 구슬린 걸지 몰라도 실제 액수를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밀즈 부인은 곧장 테이블 앞으로 가 펜을 쥐었다.
이번에는 바올로에게 술술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고상한 표현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 * *
방으로 돌아온 안토니아는 신난 얼굴로 돌아가는 의상실 마담의 뒷모습을 보았다.
오늘 주문을 잔뜩 받았으니 신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돈보다 더 값진 것을 얻어냈으니까.
“아가씨, 옷장 정리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좋아요! 안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싶어 좀이 쑤셨거든요.”
폴리의 말에 안토니아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로레나는 그런 폴리의 옆구리만 슬쩍 찔렀다.
“앗, 내가 로레나 일을 빼앗았어? 로레나도 하고 싶었구나!”
“아가씨 앞이니 말 좀 가리란 뜻이었어.”
로레나의 말에 폴리는 뺨을 슬쩍 긁적이며 곧장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옷장 속에는 온통 무채색 옷으로 가득했다.
개중 좀 귀여운 파스텔 톤의 옷이 있었으나, 그런 것들은 어디서 흙탕물이 튀겼거나 이상한 물이 들어 있었다.
모두 도라와 다른 하녀들이 먼저 입고 나갔다가 망친 옷들이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대단하셔요. 밀즈 부인이 내내 씩씩거리더라고요!”
“그렇겠지, 내가 돈을 많이 썼다고 생각할 테니까.”
안토니아는 만족스러운 말투로 테이블 앞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자 로레나가 눈치 빠르게 옆에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안토니아의 편지지 보관함이며 펜, 잉크 등도 덤이었다.
“아가씨. 이번에도 본만 보여 주시면 제가 그릴게요!”
폴리는 신나게 옷장에서 낡은 드레스들을 꺼내며 말했다.
“아니, 이제 위조 편지는 없어도 돼.”
몇 번 정도 실제와 위조 편지를 섞어 밀즈 부인을 속였으니 충분했다.
“정말요?!”
로레나와 폴리가 놀란 눈으로 안토니아에게 되물었다.
“응.”
“하지만 아가씨, 의상실에서 주문확인서가 도착하면 분명히…….”
“밀즈 부인이 쪼르르 작은아버지에게 이르겠지?”
“그럼 그 전에 입 막을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요? 로토 아저씨에게 부탁하면 밀즈 부인의 편지 발송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폴리의 말에 안토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봐야 작은아버지가 돌아오면 다 의미 없는 일이잖아.”
“그럼…….”
“당연히 솔직하게 말해야지.”
“네?”
안토니아의 답에 두 사람은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은 느긋한 태도였다.
“걱정하지 마, 이 일이 마무리될 때쯤엔 밀즈 부인은 작은아버지의 이름으로 백작가 예산에 손대지 못하게 될 테니까.”
애초에 모두 그걸 위해 벌인 일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보이려 최선을 다했다. 조금은 움찔거린 입꼬리에 두 사람은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고민했다.
* * *
모처럼 밀즈 부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잡지를 뒤적였다.
의상실 마담이 다녀가고 일주일, 비록 안토니아가 써버릴 돈은 아까웠으나 주문서가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이미 바올로 님에게 그 꼬마가 산 품목은 다 적어 보냈고.’
추가로 주문서에 청구될 금액까지 적어 보내면 아무리 바올로가 너그럽게 굴려 해도 힘들 것이다.
조만간 올 편지, 아니 어쩌면 바올로 본인이 직접 올지도 몰랐다. 그날을 상상하니 속이 절로 시원했다.
안토니아의 입이 열린 뒤, 그 길지도 않은 기간이 마치 몇 년씩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이 저택은 자신의 세상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이 주인이니 뭐니 해서 아주 열이 올랐다.
“아니지, 아니지. 이렇게 표정에 나오려고 하면 안 되지.”
밀즈 부인은 앞에 놓인 거울을 보며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자 애썼다.
잡지에 따르면 수도 사교계에서는 표정 하나로도 꼬투리를 잡는다고 하지 않는가.
바올로와 결혼하면 신분 상승이니 뭐니 시끄러울 테니 미리 기품을 익혀둬야 했다.
그때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밀즈 부인은 목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고상한 톤으로 답했다.
“들어와.”
“밀즈 부인, 저…….”
“왜, 또 휴가를 달라는 거면 안 된단다. 어제도 나갔다 왔잖니. 너만 벌써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다녀와서 다른 애들이 투덜거린단다.”
말은 잘 듣지만 쟤는 그게 문제라니까.
밀즈 부인은 잡지의 다음 페이지를 팔락 넘겼다. 손끝과 팔 각도까지 신경 쓰면서 말이다.
“그게 아니에요! 어제 휴가를 맞아 상점가에 갔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이상한 소문?”
뒤통수가 싸늘해지는 기분에 밀즈 부인은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시선이 마주친 하녀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게 저희가 아가씨를…….”
“아가씨를 뭐?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얼른 말해!”
“저희가 아가씨를 못살게 군대요……!”
그 말에 밀즈 부인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잡지를 우그러트리며 입을 우악스럽게 벌렸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하층 전체에 다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누가 누굴 괴롭힌다고…….”
얼굴로 열이 몰려 밀즈 부인은 손부채질을 하며 속사포 쏘듯 말을 내뱉었다.
“요즘 내가 아가씨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붙일 수 있니? 주방 하인들이 하도 싸고돌아서 얼굴 뵙기도 어려운데!”
덕분에 저택 내에서 자신의 상황이 아주 엉망이었다. 아직 안토니아에게 잘 보이려 움직이는 사용인은 없었으나 묘하게 눈치 보는 게 느껴졌으니까.
그뿐만인가, 요즘 주방에서 쓰는 식자재 구입 가격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을 정도였다.
‘온갖 고기란 고기는 그것도 고급으로 죄 가져가고, 어디 그것만인가! 생선에 채소, 과일까지 죄다 나는 입에도 한 번 못 대본 상등품으로만 줄줄이…….’
확 짜증이 치밀어 올라 밀즈 부인은 잡지를 거칠게 패대기치며 소리쳤다. 고작 언젠가 떨어져 나갈 군식구 입에 그렇게 투자해야 한다니.
“어디 괴롭힘당하는 분이 요즘처럼 살이 올라붙을 수 있단 말이야! 아가씨 신체 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바올로 님이 그리 신신당부했는데!”
되도록 힘없어 보이고 가련하게, 그래야 적당한 혼처에 시집 보내기 쉽다고 말이다.
기력 없이 방에만 박혀 지내던 때가 나았다. 아니, 안토니아에게는 그게 딱 어울렸다.
밀즈 부인은 분통이 터져 책상을 쾅쾅 두드렸다.
“진정하세요, 밀즈 부인. 다 들리겠어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팩 화풀이 당한 하녀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밀즈 부인은 그 모습에 조금이나마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침착, 침착해야지.’
밀즈 부인은 제 손에 콱 구겨진 잡지를 보며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일에 너무 흥분할 필요 없어. 이번 달 인터뷰가 실린 그 부인도 그러지 않았던가, 자기가 성공할 때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다고.’
이 또한 빛나는 성공을 향한 시련이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녀는 몇 번 헛기침하며 하녀에게 다가오라는 듯 자상하게 손을 내밀었다.
“밀즈 부인…….”
“괜히 네가 겁먹게 했구나. 알다시피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문이잖니.”
“맞아요, 맞아요!”
하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시피 나는 너희 먹고 입는 거에도 아낀 적이 없다. 그런데 설마 아가씨에게 아꼈을까.”
“그럼요, 저는 잘 알죠!”
맞장구치는 하녀를 보며 밀즈 부인은 웃었다. 역시 그간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
자신이 왜 바올로를 따르는가, 그가 멋지고 잘생겨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도 눈이 없는 건 아녔으니까. 그저 바올로가 쥐어다 줄 명예와 돈에 혹한 것이었다.
“동생이 아파서 요즘 새 옷 살 여유도 없다 그랬지?”
“네, 밀즈 부인.”
“어디 마음 아파 내가 보고만 있을 수 있겠니.”
밀즈 부인은 하녀의 손바닥 위에 은화 몇 개를 올려 쥐여주었다.
돈에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꼬마가 이상한 소문으로 내게 흙탕물이라도 튀기려나 본데.’
하는 짓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게 역시 어린애다웠다.
“그러니 겨울용 드레스도 한 벌 맞추렴,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 그리고…….”
자애로운 척 속삭이는 밀즈 부인의 표정 속 진의를 안다는 듯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이렇게 다정한 분인데, 누가 그런 헛소문에 귀 기울이겠어요.”
밀즈 부인은 그 말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올로가 맡긴 주머니가 두둑하여 걱정이라곤 되지 않았다.
* * *
밀즈 부인이 몇몇 사용인들에게 돈 몇 푼 쥐여준 효과는 큰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저택 안에서는 말이다.
“아휴! 너어어무 싫어요!”
간식을 가져온 폴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이야기했다.
“며칠 전만 해도 다들 아가씨가 안쓰럽다며 수군거리더니, 이제는 밀즈 부인이 불쌍하다지 뭐예요!”
“그래?”
안토니아는 그 말에 테이블 앞에 앉으며 웃었다.
“고작 몇 실버에 홀랑 넘어가다니!”
“고작은 아니지.”
안토니아의 말에 폴리는 부루퉁하게 입을 부풀렸다.
“아가씨이!”
“너희 한 달 치 급료가 20실버쯤이잖아, 당연히 몇 실버면 크지.”
“이이잉, 아가씨이!”
곁에서 찡얼거리는 폴리를 보며 로레나가 작게 웃었다.
“아가씨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는 걸 거야, 그렇지요?”
폴리가 가져온 복숭아 타르틀레트와 어울리는 차를 따라내며 로레나가 말했다.
안토니아는 그 말에 답하는 대신 타르틀레트를 한입 물었다.
식감이 살아있도록 만든 복숭아 마멀레이드는 촉촉하고 바삭한 타르트시트 위 크림을 발라 얹어 상큼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음, 맛있어. 어쩜 이렇게 만들 수 있지?”
“아가씨이이이.”
폴리가 곁에서 궁금하다는 듯 안토니아를 재촉했다.
“막 요즘 다른 애들이 아가씨의 나쁜 점을 캐내려고 해요, 휴가만 나갔다 하면 밀즈 부인이 이걸 사줬네, 저걸 사줬네 하면서 떠들고 다니고요.”
“돈을 받았으니 일은 해야지.”
“그래도 이곳 주인은 아가씨인걸요.”
“급료는 밀즈 부인이 지급하고 있으니까.”
폴리는 그 말에 입을 합, 다물었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에 자신의 두 하녀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오히려 나 때문에 두 사람이 급료에서 손해를 보는 것 같아 그게 속이 상하는데.”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주방 하인들 급료는 다 식비니 피복비라고 하면서 20퍼센트씩은 멋대로 떼가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걸 떼더라도 급료는 충분하고요.”
폴리에 이어 로레나도 염려하지 말라는 듯 차분하게 답했다.
안토니아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찬찬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줘, 다음 급료일부터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무엇보다 뭐요?”
두 사람이 일제히 궁금한 눈을 했다.
“어차피 밀즈 부인이 낸 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 영지민 모두에게 돈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걸?”
몇 마디 말로 돌리기엔 밀즈 부인이 지난 2년간 쌓아 올린 명성이 너무도 대단했으니까.
* * *
지난 며칠간 밀즈 부인의 기분은 하늘을 나는 듯했다. 꼴 보기 싫은 주방 사용인들을 제외하곤 다들 제 눈치를 보기 바빴으니까.
‘밀즈 부인, 소매에 달 장식이 필요하다지 않았어요? 제가 만들어봤는데.’
‘제 안마 솜씨가 좋다고 하셨지요?’
‘아가씨도 참 너무하세요, 아직 어리셔서 그런지 저택에서 누가 제일 중요한지도 모르시나 봐요.’
어린 사용인들은 어린 대로, 나이 든 사용인들은 나이 든 대로 자신들의 솜씨를 발휘했다.
덕분에 밀즈 부인은 어느 집 주인마님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으며 며칠을 보냈다.
게다가 어제 마을에 나갔더니, 일자리를 구하는 아이들이나 상인 몇몇도 기분 좋게 아부했다.
‘아시죠, 밀즈 부인? 제가 매번 와인 납품 때도 밀즈 부인용으로 따로 몇 병을 더 챙겼잖아요.’
‘이번 연말에는 백작저에서 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가 있던데, 제가 온실에서 기른 귀한 꽃들이 있거든요.’
‘일손은 필요하지 않으세요? 저희 딸, 아들 손끝이 아주 야무진데.’
마치 자신이 이 백작령 내 많은 걸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이미 좌우하고 있지!’
들인 돈이 얼마인데, 무려 1골드 가까이 여기저기 포섭하느라 쓴 참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한 것도 있으니 그걸 포함하면 2골드 아니, 그 이상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어지간한 사용인의 1년 치 급료 이상이라 손이 좀 떨리긴 했지만 밀즈 부인은 태연하게 굴었다.
‘괜찮아, 바올로 님도 저택 관리에 대해선 날 믿는다고 했으니.’
안토니아에게 그 비싼 드레스들도 사도 좋다고 한 바올로였다.
자신의 평판은 곧 저를 택한 바올로의 명예와도 직결되지 않는가.
어떻게 생각해도 타당한 판단이라고 그녀는 애써 기분 좋은 생각을 했다.
그러니 자신을 향한 나쁜 소문은 가라앉고 안토니아가 자신을 매도한 거짓말쟁이로 소문이 나야 했다.
그 일로 다시 제 좁은 방에 갇혀 부모님이나 그리며 눈물이나 줄줄 흘리면 딱 좋을 것을.
그러나 인생은 늘 자기 뜻대로 이뤄지진 않는 법이었다.
“이, 이게 다 뭐야……?”
밀즈 부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깜박였다.
엔트런스 홀이 많은 양의 외투로 채워졌다.
분주히 움직이는 의상실 직원들의 모습에 제 일을 하던 다른 사용인들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엔트런스 홀 근처를 서성이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당장 일하러 가라고 소리라도 칠 수 있지!’
하필 한창 자애롭고 다정한 밀즈 부인 이미지를 만드는 중 아니었던가.
뒤이어 엔트런스 홀 안으로 의상실 마담이 발을 들였다.
‘지금 그딴 소문을 내놓고 여기가 어디라고 낯도 뻔뻔하게 들어와!’
마음 같아서는 머리채라도 다 뜯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밀즈 부인은 잡지 속 성공했다는 그 렘버트 부인의 이름을 떠올리며 최대한 고상하게 입을 열었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시지요?”
“어머, 물론 주문한 옷을 납품하러 온 것이지요.”
마담은 분주하게 의상실 직원들에게 손으로 지시하며 밀즈 부인에게 대꾸했다.
“이 저택의 주인인 아가씨께서 저택 사용인들을 위한 겨울 외투를 준비해달라고 하시지 뭐예요.”
“네……? 지금 뭐라고.”
밀즈 부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외투를 보았다. 제법 괜찮은 질의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은 솜을 빵빵하게 넣어 두툼하기까지 했다.
‘저, 저게 도대체 몇 벌이야…….’
마담의 말대로 정말 모든 사용인의 외투를 준비한 듯 수십 벌은 족히 되어 보였으니까.
‘그 꼬마가!’
또, 또 백작가의 재산을 멋대로 쓴 게 분명했다.
‘내가 주문확인서도 못 보게 손까지 썼다, 이거지?’
미래의 백작 부인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것도 자신의 재산까지 털어 썼으면서.
밀즈 부인은 머릿속으로 분주히 외투 가격을 셈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1골드 가까이는 사용했을 것만 같았다.
‘아이고, 아이고 아까워!’
자신은 제 평판을 위해서 몇 골드 쓰는 데도 큰마음을 먹어야 했는데, 그 꼬마는 자기 돈 아니라고 멋대로 쓴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해 죽을 것 같았는데.
“역시 아가씨께서는 누구와 달리 참 배포가 크시지 않나요?”
“……누구와?”
“어머, 들렸나요? 우리 직원과 한 소리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비꼬는 소리였다.
그러나 밀즈 부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꾹 참았다. 이럴 때 버럭 화를 내면 며칠간 쓴 돈들이 다 허사가 될 테니까.
밀즈 부인은 어젯밤까지 꼼꼼히 읽은 잡지 속 내용을 떠올리며 고상하게 입을 열었다.
“백작가에 드나드는 의상실 마담이 참 부주의하시군요.”
“호호, 요즘 하도 재밌는 소문이 들려서 말이에요.”
마담의 시선에 밀즈 부인이 꺼림칙하게 눈을 치켜떴다.
“어느 귀족가에서는 주인 아닌 자가 주인 행세를 한다지 뭐에요, 자기가 귀부인인 줄 안다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밀즈 부인의 귀가를 찔렀다.
“심지어 자기 편 안 드는 자들은 괴롭히고 주어진 일도 똑바로 하지 않는다지 뭐에요. 물론 충실한 백작가 가정부인 밀즈 부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요?”
그 경쾌한 목소리가 엔트런스 홀을 가득 채웠다.
밀즈 부인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서성이는 하인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뭐! 난 아니라잖아!’
지레 찔려 하인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물론 저 이죽거리는 마담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지만.
밀즈 부인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대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상실 직원이 모두 끝났다고 마담에게 보고했다.
“그래? 그럼 얼른 돌아가야겠구나, 오늘도 주문이 많이 밀려 있으니.”
마담은 경쾌하게 웃으며 밀즈 부인에게 주문확인서를 건넸다.
“자, 아가씨께 꼭 전달해드리세요.”
“여부가 있겠어요?”
“그렇지요, 빼돌리는 건 교양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니까요.”
의상실 마담은 호호 웃으며 휙 저택에서 몸을 돌렸다.
밀즈 부인은 그 뒷모습을 보며 당장에라도 저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문확인서를 확인한 밀즈 부인의 몸은 아주 솔직하게 움직였다.
다름 아닌 안토니아의 방 쪽으로 말이다.
‘망할 꼬마가!!’
주문확인서에 찍힌 금액이 자그마치 1골드 40실버였으니까!
* * *
“아가씨!!”
단숨에 계단을 올라간 밀즈 부인은 안토니아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기에 안토니아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막 세수를 마친 참이었다.
“제정신이세요?!”
물론 밀즈 부인은 그런 사정 따위 상관도 없다는 듯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지만.
단번에 안토니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뭐 해, 밀즈 부인?”
“네? 뭐하긴요! 아가씨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셔서 이렇게 서둘러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방에 들어와도 좋다고 언제 말했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1골드 40실버라니요!”
“뭐가.”
“조금 전 의상실 마담이 다녀갔습니다. 정말인가요? 아가씨가 진짜로 그 많은 외투를 주문하신 거예요?!”
버럭버럭 지르는 소리에 안토니아는 귀가 따가워 한쪽 귀를 막으며 답했다.
“그게 왜? 이제 겨울이니 당연히 주문해야지.”
“당연히, 당연히라니요!”
밀즈 부인은 성큼성큼 안토니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바올로 님께서 아가씨의 후견인이 되신 뒤로 예산을 헛쓰지 말라고 얼마나 강조하신지 아십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잘못 했다는 거야?”
“네! 그럼 잘하셨다고 제가 박수라도 쳐야 하는지요?”
밀즈 부인은 크게 혀를 차며 허리에 손까지 얹었다.
“아무리 어린 아가씨라지만 숫자는 읽으실 수 있겠지요! 아니면 평생 귀족 아가씨로만 살아서 1골드 40실버가 푼돈으로 보이십니까?!”
“밀즈 부인은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 몇 명인지 몰라?”
“제가 왜 모르겠어요! 당연히……!”
“근데 하인들 겨울 외투에 1골드 40실버가 많다고 지금 그러는 거야?”
안토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곁에 있던 로레나에게 손을 뻗었다.
곧장 로레나가 미지근한 물을 주어 따갑던 목이 좀 가라앉았다.
“밀즈 부인은 그럼 싸구려 겨울 외투를 입고 싶단 소리야?”
“……네?”
“하인들 모두에게 외투를 지급하면서 그것보다 돈을 덜 쓰려면 싸구려 외투밖에 선택지가 없잖아.”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만 수십이 넘었다. 1골드 40실버라고 해 봐야 한 벌당 3실버 남짓이었다.
그 아래가 되면 원단의 질도 솜도 모두 형편없어지기 마련이었다.
“밀즈 부인도 저택에서 일하는 가정부잖아. 아니야?”
맞는 말이지만 밀즈 부인은 그 말을 긍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다른 것들하고 똑같아! 나는 미래에 백작 부인이 될 몸인데.’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택 가정부이지 않은가. 당연히.
“가정부이니 제가 싸구려 외투를 입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되고?”
“한 달 급료만 해도 차이가 납니다. 아가씨, 당연히 지급되는 물품에도 차이가 나야지요!”
“왜?”
“네?”
“왜 그래야 하는데? 추운 건 다 똑같은데 왜?”
“그거야 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 보통 실내에서 난로나 쐬는 밀즈 부인은 싸구려 외투, 아니 없어도 되겠네.”
그 말에 밀즈 부인은 또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저 꼬마는 이상하게 반박 못 할 말로 자신을 괴롭히곤 했으니까.
“아가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이 일을 바올로 님이 아시면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지금까지야 제가 아가씨를 생각해서 숨겼다지만-”
“날 생각해서 숨겼다고?”
“그럼요!”
물론 거짓말이었으나 밀즈 부인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아가 자신과 바올로가 나눈 편지를 몰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지난번 안토니아가 바올로에게 답장을 받았을 때, 저택 하인들에게 엄포한 적이 있었다.
‘가정부인 내가 저택에 들고 나는 걸 몰라서 되겠어? 이걸 어기면 바올로 님께 말씀드려 내쫓을 줄 알아!’
그러니 자신은 안심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어째서 작은아버지가 내가 옷을 몇 벌 주문했는지 다 알고 계신 거야?”
“……네?”
“밀즈 부인, 왜 거짓말해?”
안토니아는 아이답게 동그랗고 순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린애라고 정말로 그런 말에 속을 거라고 생각했어?”
밀즈 부인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거짓말한 걸 들켜서?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억지로 박박 우기기라도 해보지.
그녀의 기분이 엉망이 된 건.
‘내게는 줄곧 답장 한 통 안 보낸 분이……. 저 꼬마에게는 답장을 보냈단 말이야?’
바올로가 자신이 아니라, 안토니아에게만 편지를 보냈단 사실에 느낀 배신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대로 바올로 님만 믿어도 되는 걸까?’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 경고등을 울렸다. 마치 바올로를 저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밀즈 부인은 한껏 처량하고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안토니아에게 물었다.
“바, 바올로 님이……. 아가씨께는 답장을 보내셨습니까?”
* * *
‘참 재밌기도 하지. 정말 작은아버지에게 진심인 것도 아니면서.’
밀즈 부인의 감정은 허영심이었지, 바올로에 대한 뜨거운 사랑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저 표정은 마치 연인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어릴 때는 저 대단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속았는데.’
회귀 전, 밀즈 부인이 어울리지도 않게 아픈 자신을 돌보러 온 적이 있었다.
열일곱쯤이었을까, 분명 수도에 올라가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를 거라며 이야기가 나오던 차였다.
밀즈 부인은 그때도 참 인색하고 질투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안토니아가 데뷔탕트 무도회에 나간다는 사실 자체를 무척이나 시기했다.
당연히 그를 위한 각종 드레스며 보석을 보며 속으로 배 아파했고 말이다.
설사 바올로와 결혼한다 해도 그녀에게는 없을 경험이었으니.
“아가씨, 많이 아프시지요?”
“미, 밀즈 부인……?”
고열에 시달리며 밀즈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머리맡에 따스한 수프와 약 몇 알을 놓았다.
“곧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를 분이 이리 아프셔서 어떻게 해요, 수도에 가서 세르히 백작 영애가 이리 장성했다고 보여주셔야 하는데요.”
어안이 벙벙한 말이었다.
열세 살에 주방 하인들조차 저택을 나가, 그 뒤로 따뜻한 말 한마디 못 들었다. 그래서일까 너무도 쉽게 경계를 풀었다.
“바올로 님이 바쁘셔서 의사를 부른다고 허락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서둘러 약을 사 왔답니다.”
“약……?”
“수프도 같이 가지고 왔으니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아셨지요?”
그렇게 말하는 밀즈 부인은 너무도 가슴 시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토니아의 이불을 여며주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한 가지 정도는 저도 백작 부인께 은혜 갚을 일을 해야지요.”
어머니 이야기에 안토니아는 그대로 의심까지 거뒀다.
설마 그것조차 연기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선대 백작 부인이 오갈 데 없는 밀즈 부인을 하녀로 거둬준 것 또한 사실이었고.
게다가 너무도 아팠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고 아파도 늘 홀로 견뎌야 했던 안토니아였다.
그래서 약이라는 말에 의심 한 톨 하지 않았다.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이 보는 앞에서 수프와 약도 모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안토니아는 정말 죽을 뻔했다.
‘독약은 아니었지만.’
밀즈 부인이 가지고 온 건 약은 약이었다. 고열을 내리는 효과도 있었다.
다만 부작용이 심해 민간이 아니고서는 거의 쓰지 않는 약이었다.
정량 이하를 먹으면 괜찮지만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구토를 유발시켰다.
안토니아는 내도록 토하고 탈수증을 일으켰다.
그때, 바올로를 따라 저택을 방문했던 어린 신관이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안토니아는 그날, 밀즈 부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절대 데뷔탕트 무도회에 나갈 수 없는데, 안토니아가 어떻게 나갈 수 있냐고 생각하며 죽이려 들었으니까.
‘그러니 아무리 내 앞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얼굴을 해도 난 당신을 믿지 않아.’
안토니아는 제 감정을 싹 숨긴 채-사실 여전히 표정이 돌아오지 않기도 했지만-태연하게 답했다.
“응, 작은아버지가 내게만 답장을 보낸 게 이상해?”
“제, 제게는…….”
“밀즈 부인은 못 받았어?”
“…….”
“근데 그게 그렇게 충격받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야? 밀즈 부인은 그냥 가정부잖아.”
어린애처럼 순진한 말투가 하나하나 비수처럼 밀즈 부인을 찔렀다.
밀즈 부인은 이게 아닌데 싶은 당황을 애써 숨기며 한껏 불쌍한 말투로 말했다.
“하, 하지만……. 바올로 님은 제게 저택을 맡기시겠다고.”
“그때는 내가 아팠잖아. 안 그래?”
“…….”
“지금은 내가 안 아프고, 그럼 작은아버지가 조카인 내게 더 힘을 실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밀즈 부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때, 밀즈 부인과 달리 활짝 열린 방문을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응.”
폴리였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편지 두 통을 들고서 안토니아에게로 다가왔다.
편지 봉투 겉봉에는 화려한 문양이 특징적인 바올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침 일찍 편지를 받아왔어요, 바올로 님의 편지에요.”
“전부?”
“앗, 아니요. 한 통만 가져오려 했는데 밀즈 부인이 이곳에 있다고 해서 둘 다 가지고 왔, 엇!”
폴리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밀즈 부인이 편지 한 통을 낚아채 갔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나 안토니아는 잠자코 봐주었다.
‘저 편지는 내가 바라던 내용일 테니까.’
지난 몇 주간, 괜히 바올로에게 수시로 편지를 쓴 게 아니었다. 물론 그건 밀즈 부인도 마찬가지였겠지만.
* * *
밀즈 부인은 허겁지겁 편지를 뜯어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래, 다 거짓말일 거야. 분명히 바올로 님은 바쁘셔서…….’
안토니아에게 제 처량한 모습이 통하지 않는다면 바올로에게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바올로 님은 날 미래의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 줄 분이니까!’
그저 바쁘고, 저를 믿기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애써 위로하던 희망은 당장 첫 장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졌다.
[ 밀즈 부인, 앞으로 저택 예산은 내 조카 안토니아에게 맡기게.]
누가 봐도 명확한 바올로의 필체로 명료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예산을 안토니아에게 맡기라니!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 줄줄이 적힌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언제부터 백작가 재산이 밀즈 부인이 멋대로 손대도 좋은 것이 됐지? 게다가 내 조카를 멋대로 괴롭혔다니 언제 내가 그런 걸 지시했단 말인가!]
문장 하나하나가 자길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바올로 님은 늘 내게 잘하고 있다고만 하셨는데, 날 믿는다고……. 그러셨는데!’
하나하나 자신을 질책하는 소리였다.
손버릇 나쁘고 주제넘은 도라를 안토니아 곁에 붙인 탓에 자신만 나쁜 작은아버지가 되었다며 힐난하는 내용도 있었다.
게다가 더 속 아픈 건.
[어린 안토니아도 날 생각해 하나하나 챙기고, 아끼고 아껴 드레스를 주문한 걸 보았어! 심지어 타지에서 고생하는 내가 걱정된다며 선물까지 챙겨 보냈는데.
밀즈 부인, 당신은 내게 저택 관리를 위임받았으면서 거짓말이나 써서 보내? 어떻게 내 조카 안토니아가 쓰지도 않은 돈을 썼다고 보내는가?
아무리 사람이 오만하고 제 분수를 모른다고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당신 때문에 나는 하나뿐인 조카와 틀어질 뻔했어!]
그 문장에 이르러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아가씨가……. 바올로 님께 선물까지 보냈다고?’
당연히 효과가 좋았을 것이다. 바올로는 눈에 보이는 것에 금방 혹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선물이라고 특별히 말할 정도라면 분명 질 좋고 값비싼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날, 의상실 마담을 불러놓고 그토록 오래 주문을 진행한 것도 내가 질려 나가길 바라서였구나.’
그 뒤 편지도 하나하나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내용이었다.
안토니아는 정말로 단 한 마디도 밀즈 부인을 나쁘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참으로 능숙하게 바올로에게는 존경의 말로, 밀즈 부인에게는 염려의 말을 적은 모양이었다.
잡지에서 읽었던 사교계 회화 팁이 떠올랐다.
‘직접적인 험담은 금물, 칭찬과 걱정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세요.’
읽을 때는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당해보니 알 것 같았다.
밀즈 부인은 그제야 자신이 안토니아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아직 빠져나갈 구석은 있었다.
“아가씨, 바올로 님께 거짓말을 하셨군요.”
다른 건 몰라도 드레스를 아끼고 아껴 주문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겨우 하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쓴 몇 골드에도 이리 화내는 바올로였다.
‘그렇다면 아가씨가 쓴 돈을 속였다는 걸 알면 당연히 다시 날 신임하시겠지!’
그러나 안토니아는 그저 여유로웠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이었으나 마음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진짜 충격은 안토니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왜 작은아버지에게 거짓말했다고 생각해?”
“네, 그럼……?”
“밀즈 부인을 속이는 게 더 간단한데.”
“지금 저를 속이셨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응.”
안토니아는 황망한 얼굴이 된 밀즈 부인을 향해 가볍게 답했다.
밀즈 부인은 뒤쪽에서 탁- 하고 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로레나가 눈치 빠르게 문을 닫아준 탓이었다.
“하긴 내가 속인 것도 아니지, 밀즈 부인이 멋대로 생각한 거니까.”
“네……?”
“작은아버지에게 난 내가 구입한 드레스 양을 속이거나 하진 않았어.”
밀즈 부인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바올로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거기엔 분명히 아끼고 아껴 주문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구입한 건지를 상세하게 적었을 뿐.”
“돈을 쓰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바올로의 ‘아끼고 아껴’는 그 정도는 되어야 나오는 말이었다.
“응.”
안토니아가 상쾌한 말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밀즈 부인은 몰랐겠지, 백작가 가정부라곤 하지만 집안 상황을 전혀 모를 테니까.”
솔직히 말해 안토니아도 평범한 열두 살이었다면 몰랐을 테니까.
설마 돌아가신 어머니가 미리 안토니아의 10년 치 드레스 대금을 결제해놨을 거라곤 말이다.
* * *
회귀 전, 아마도 열여섯 무렵이었을까, 당시 안토니아는 저택 내에서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모두가 당연히 안토니아는 열여덟이 되어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면 적당한 곳과 결혼하여 떠날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세계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바뀌지 않은 우중충한 제 방과 저택 내 일부 공간 정도였다.
식사는 질도 나빠져 안토니아는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마르기만 했다.
드레스는 1년에 겨우 두어 번, 사용인들과 같이 지급되었으며 그것도 제대로 된 새것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밀즈 부인과 도라는 번갈아 가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곤 했다.
덕분에 귀족 영애는 자신이었는데도,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과 도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심지어 하나같이 자신의 취향, 아니 어머니가 좋다고 하던 스타일의 드레스였으니까.
하루는 너무 부러워서 밀즈 부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작은아버지께 나도 새 드레스를 맞춰달라고 하면 안 될까……?’
‘네? 아가씨,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시네요! 백작가 예산이 그리 넉넉한 줄 아세요?’
‘하지만 밀즈 부인이나 도라는…….’
‘참나, 이건 모두 있던 걸 재사용 하는 거라고요! 어디서 사람을 의심하시는 거예요!’
밀즈 부인은 뻔뻔하게도 안토니아를 타박하며 말했다.
진실을 알게 된 건, 결혼 후 세르히 백작 위를 받은 뒤였다.
쫓겨나던 도라가 줄줄 불었으니까.
‘아가씨, 모두 밀즈 부인이 시켜서 한 거예요! 선대 백작 부인 방에서 대금지급 확인서를 찾아서……!’
‘대금 지급 확인서라니?’
‘드, 드레스 말이에요! 선대 백작 부인께서 결제해두신 걸 밀즈 부인이 찾아서 제 것도 사 주신 것뿐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던가.
급하게 의상실을 찾아가 마담을 보자,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선대 백작 부인께서 그러셨어요, 만에 하나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아가씨가 초라한 드레스 입을 일 없게 하고 싶다고 말이에요.’
‘어머니가…….’
‘늘 사용인만 보내셔서 이상하다곤 생각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아가씨의 직인이 찍혀 있는 데다 아프시다고 하니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의상실 마담은 몇 번이고 사죄하며 이야기했다.
* * *
‘그래서 두 사람의 드레스가 그토록 내 취향이었던 거고.’
마담이 매년 자신을 위한 드레스를 디자인했으니까.
다만 슬프게도 그 뒤에도 대금의 덕을 본 건 자신이 아니라 남의 편이었다.
사치스럽게 하도 새 옷을 사대는 통에 어머니의 바람과 정반대로 안토니아는 면피할 정도의 드레스만 입을 수 있었으니까.
다만 밀즈 부인이 그 대금 지급 확인서를 발견하는 건 지금이 아니라, 안토니아가 열다섯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괜히 마담이 내가 모두 괜찮다고 할 거라며 디자인화를 내민 게 아니었지, 물론 밀즈 부인은 그때도 딴생각하느라 제대로 듣지 않았겠지만.”
맞는 말이었다. 밀즈 부인은 그저 자신의 입술만 잘근잘근 짓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싶어 말이다.
“밀즈 부인은 내가 그렇게 옷을 사면 당연히 작은아버지가 역정을 낼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렇지?”
“…….”
“그러니까 내가 어떤 드레스에 얼마나 썼는지 그렇게 상세하게 썼고 말이야.”
“바올로 님이……. 그런 것까지 다 말씀하셨습니까?”
“응.”
안토니아는 곧장 답했다. 참 불쌍한 사람이었다.
“밀즈 부인은 작은아버지를 여전히 믿어?”
그 물음에 밀즈 부인은 한참을 망설였다.
‘여기서 저 꼬마에게 죄송하다고 빌어?’
갈등했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이 그토록 불쌍하게 굴었는데도 외면했던 꼬마가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건 오로지 바올로뿐이었다.
밀즈 부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안위가 불확실한 이상 안토니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용서해달라고 빌고 싶지 않았다.
‘저 꼬마에게 붙으면 잘해 봐야 가정부야! 하지만 바올로 님은 아니야, 바올로 님의 마음만 돌리면……. 나는 미래에 백작 부인이 될 수 있어!’
바올로가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다지만 아직 미련을 놓긴 일렀다.
그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바올로뿐이었으니까.
안토니아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그럼 그렇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 정도 기회를 준 거야.’
적어도 생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을 기회를.
“그럼 편지를 써 봐.”
“편지를요? 그럼 아가씨만 불리해지실 텐데요? 저는 바올로 님께 다 이야기해 드릴 겁니다.”
“그럼 쓰면 되는 것 아니야? 내가 쓰라고 하는데.”
밀즈 부인은 몇 번째인가 또 말문이 막혔다.
안토니아는 속삭이듯 말했다.
“자신 없으면 안 써도 돼, 그럼 밀즈 부인은 저택에서 내쫓기게 되겠지. 내가 그럴 생각이니까.”
“말도 안 돼요! 바올로 님이 그런 걸 용납할 것 같으신가요! 절 내쫓으란 말은 어디에도-”
“감당은 내가 알아서 해.”
“그, 그럼 왜 그냥 내쫓지 않고 편지를 쓰라고 하시는 거지요?”
“밀즈 부인이 안타까워서.”
“네……?”
밀즈 부인은 놀란 눈으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열두 살 꼬마의 말이니 무시해버리면 될 일인데.
“그냥 내쫓기면 영원히 내 탓이라고 원망할 거잖아, 난 그건 싫어. 내 탓도 아닌걸.”
“그거야 바올로 님은 절 가정부로 만드셨고, 지금도 그저 예산만 아가씨께-”
“그래, 그러니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야. 하지만, 밀즈 부인.”
“네?”
안토니아는 차분한 태도로 서랍에서 오래된 잡지 하나를 꺼냈다.
밀즈 부인이 즐겨 읽는 잡지의 3년 전 발매호였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헤드라인이었다.
‘트라체스 대공가의 보물, 선황후의 목걸이 ‘새벽이슬의 눈물’ 도둑맞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목걸이 사진이 실려 있었다.
마치 바올로가 자신에게 선물한 목걸이와 똑 닮아 있었다.
밀즈 부인은 못 박힌 채 서서 사진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설마와 그저 착각일 거란 생각이.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의 사고를 깨트리듯 입을 열었다.
“이 목걸이는 트라체스 대공가의 보물인 ‘새벽이슬의 눈물’이라고 적혀 있지?”
“……네.”
“한번 편지에 물어봐, 요즘 영지 근처에 매와 검이 그려진 문장이 눈에 보인다고 말이야.”
“그, 그럼…….”
“아마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답할걸?”
밀즈 부인은 저도 모르게 안토니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린 소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통달한 듯한 얼굴로 속삭였다.
“목걸이를 걸고 자주 외출을 하라고 말이야, 그 사람들이 영예를 가져다줄 거라고 덧붙일지도 모르지.”
그 말에 밀즈 부인은 도리질을 쳤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어째서?”
“바올로 님이 저를 팔아넘길 거라는 말씀으로 들려요, 아가씨! 그런 식으로 저와 바올로 님 사이를 모함한다고 통할 줄 아십니까!”
이미 편지로 바올로와 저 사이를 이간질한 안토니아였다. 밀즈 부인은 도리질 치며 부정했다.
‘그냥 닮은 목걸이일 뿐이야, 바올로 님이 저런 위험천만한 장물을 내게 줬을 리가……!’
애초에 바올로가 그런 쪼잔한 도둑질을 했을 리가 없다. 미래에 세르히 백작이 될 사람이지 않은가.
저것과 비슷한 목걸이가 백작가 재산 중에도 몇 개는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제 머릿속을 헤집듯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작은아버지를 의심한다는 거 아니야?”
“네……?”
“오히려 믿으면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어린 소녀의 얼굴은 무표정인데도 이상하게 안타까움과 동정심이 느껴졌다.
밀즈 부인은 자신의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저 꼬마는 늘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았던가.
‘날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다니, 말도 안 돼.’
그러나 그날, 밀즈 부인의 마음은 흔들렸다.
왜냐하면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의 무례를 제대로 지적하지도, 정말로 저택에서 내쫓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내 주었으니까.
* * *
“아가씨, 바로 내쫓으셔도 괜찮은 것 아니에요? 바올로 님이 돌아오시면 아무래도…….”
“괜찮아, 작은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는 끝날 테니까.”
아니, 애초에 밀즈 부인의 편지를 받으면 한동안 저택에 발붙일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트라체스 대공가의 추격자가 백작령까지 따라붙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애초에 백작령을 노리면서도 자주 저택에 있지 못하는 게 대공가에 사기 치고 목걸이까지 훔쳐 달아난 탓에 혹시라도 들킬까 겁내는 거였다.
백작 위를 얻기 전에 도둑에 사기꾼이 되어 버리면 다 허사가 되지 않는가.
안토니아는 부드러운 빵에 잼과 크림을 듬뿍 발라 한입 물었다.
“그래도 왜 굳이 밀즈 부인에게 기회를 주셔요?”
곁에서 차를 따르며 묻는 로레나에게 안토니아는 깜박이며 싫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안 한 걸로 욕먹으면 억울하잖아!”
“헉, 그러신 거예요? 그럼 당장 주방장님께 말씀드릴게요! 주방장님은 악역 완전 잘하시거든요!”
폴리가 곧장 튀어 나갈 듯 일어서며 이야기했다.
안토니아는 곧장 폴리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틴이 괜히 욕먹는 거 나는 싫은데.”
“헉, 아가씨. 그 말 그대로 주방장님께 꼭 해 주세요. 앗, 물론 제가 혼날 때 말이에요!”
“응? 왜?”
“지이인짜 귀여워서 주방장님이 절 용서해 주실 것 같거든요!”
“내가 귀여워?”
“그럼요, 최고로 귀여우시죠! 아가씨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요즘 동생 생긴 것 같아서 얼마나 좋은데요!”
폴리의 말에 안토니아는 재밌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래, 한 번은 구해줄게!”
“한 번이요? 에이, 아가씨. 여러 번 구해 주세요!”
그 말에 로레나가 못 말리겠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언니 노릇 하고 싶으면 여러 번 사고 안 칠 생각을 해, 폴리.”
“에이, 그게 되면 나도 안 그러지!”
“으이구.”
두 사람의 대화에 안토니아는 소리로나마 실컷 웃었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웃어 본 게 얼마 만일까.
여전히 양 뺨은 뜻대로 안 움직여 준다 해도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안 한 걸로 욕먹는 건 싫어.’
어차피 할 거라면.
‘내가 제대로 하고 욕먹을 거야, 아니, 욕할 수도 없게 만들 거야.’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 때문에 식어버린 오믈렛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식었어도 마틴의 요리는 역시 너무 행복한 맛이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넘게 안토니아는 밀즈 부인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저택 하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울까 봐 그러는 걸 거야, 틀림없어.’
일시적으로 바올로가 자신에게 화가 나 예산 운용 권한을 빼앗았다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밀즈 부인은 바올로에게 구구절절하게 편지를 써 보냈다.
솔직히 말해 지금껏 쓴 편지 중 가장 교양있고 우아했으며 바올로에게 애원하는 편지였다.
그러다 보니 안토니아의 거짓말을 넣을 짬이 없었다. 험한 말 없이 쓸 자신이 없었으니까.
안토니아가 말한 내용도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적었다.
‘나는, 나는 바올로 님을 믿어서 쓴 거야.’
밀즈 부인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초조하게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난 편지에는 그토록 답장하지 않던 바올로가 이번에는 거의 곧장 답했다.
하녀가 가져다준 바올로의 편지를 열어본 밀즈 부인은.
“아아악!!! 어떻게, 어떻게 내게!!”
비명을 질렀다.
지난 2년간 바올로는 저택을 자주 비웠다. 수도 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바올로는 늘 거만한 말투로 밀즈 부인의 편지에 답장했다.
그러나 이번 편지는 달랐다.
[내가 그간 밀즈 부인의 고생을 너무도 몰랐던 것 같소.]
잡지 속 귀족 간의 대화처럼 정중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일전 안토니아에게 보냈던 편지처럼 고급 편지지였고, 문장 하나하나에 공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흘려 쓴 글씨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편지에 홀려 바올로에게 반했을 정도로 아주 고상한 편지였다.
그러나.
[오래전, 목걸이의 주인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오. 언젠가 은혜를 갚겠다고 신신당부하더니 나를 그리도 찾나 보오.
그러니 밀즈 부인, 나 대신 그 목걸이를 걸고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소. 언젠가 말하지 않았소. 나의 영예는 그대의 것이고, 그대가 내 미래를 함께 누릴 것이라고.]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만 더 빨리 말해줬다면 속았을지도 몰랐다.
밀즈 부인이 잡지를 읽기 시작한 건 선대 백작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바올로가 왔을 때부터였다.
그전까지는 고작 허드렛일하던 저택 내 흔하디흔한 하녀 중 한 명이었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바올로 님!”
그날, 밀즈 부인은 안토니아에게서 잡지를 받아 와 꼼꼼하게 읽었다.
그 목걸이 사진이 실린 기사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대담하게도 트라체스 대공가에 사기를 치고 목걸이를 훔친 자를 수배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름은 가명이었으나 두리뭉실하게 적힌 인상착의가 틀림없는 바올로였다.
“어떻게 저를, 저를 팔아넘기시려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목걸이를 처음 받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밀즈 부인을 믿는다는 증표야, 날 따르면 앞으로 이런 것쯤 흔하게 갖겠지만!’
‘바올로 님……!’
‘나는 날 따른 사람은 절대 버리지 않아!’
그렇게 말해서 밀즈 부인은 서러운 순간에도 바올로를 믿었다. 제게 아들을 남겨준 전 남편도, 아들도 제게 그런 든든한 말은 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처음부터 날 버리셨군요. 아니……. 내게 준 건 오로지 헛된 꿈이었군요.’
평생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해 감동한 그 말이 지금은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밀즈 부인은 크게 소리 내어 비명 지르듯 울었다.
테이블 위에 잔뜩 쌓여있던 귀족을 위한 교양서며 잡지 모두 다 엎고 던지고 찢어버렸다.
쨍그랑-!
바올로에게 사정하여 샀던 다기 세트도 다 깨버렸다.
이제 와 고상하고 우아한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미래의 백작 부인? 완전 헛꿈이 되었다. 이대로는 사기꾼에 도둑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밀즈 부인은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울었다.
가정부실 근처를 지나가며 다른 사용인들이 힐끔거리는 것조차도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꼬마, 아니……. 아가씨께……. 아가씨께 빌면.’
하지만 안토니아는 자신을 내쫓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정하면 선대 백작 부인을 닮은 그 아이는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줄지도 몰랐다.
‘선대 백작 부인도 그랬으니까, 선대 백작님이 안 된다고 했지만……. 그분은 불쌍하다고 날 받아줬으니까!’
그때 타이밍 좋게도 방 안으로 안토니아가 들어왔다.
“밀즈 부인.”
“아, 아가씨. 제가 멍청하게 속았어요!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저도 다 속은 거예요!”
“…….”
밀즈 부인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안토니아를 바라보았다.
불쌍하거나 애원하는 얼굴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저 꼬마는 저리도 순하고 착한 얼굴이지 않은가!
‘그간 내가 잘못 본 거야, 아가씨가 재수 없고 얄밉다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
밀즈 부인은 멋대로 생각하며 안토니아에게 사정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나쁜 짓은 금세 까먹는 특기가 있었으니까.
“절, 절 여기 둬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세탁물도 잘 정리할 수 있고, 주방에서 잡일꾼으로 써도 할 수 있어요. 아가씨, 제발!”
안토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작은아버지는 이미 다 아셨고, 또……. 밀즈 부인도 이곳에 있기는 체면을 너무 구겼잖아.”
“제, 제 체면이 뭐가 중요해요. 아가씨,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저 좀 살려주세요.”
자신이 대공가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선 안토니아에게 애원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토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떠나.”
“이게 무엇입니까?”
“소개장이야. 마차를 타고 한 달쯤 걸리는 곳에 클루비 자작령이라는 곳이 있어.”
“클루비 자작령이요……?”
“이걸 가지고 가면 그곳에서 가정부로 일할 수 있을 거야.”
“……아가씨, 어째서 제게 이런걸.”
“백작저에서 일한 사람을 어떻게 그냥 내칠 수 있겠어. 살 방도는 마련해줘야지.”
밀즈 부인은 그 말에 울컥했다. 처음부터 차라리 안토니아에게 애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백작령을 떠나 척박한 자작령으로 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래도 이게 어디야.’
목걸이도 이곳에 두고 가면 자신은 자유였다.
더는 저 재수 없는 꼬마나, 배신자 바올로도 보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아가씨!”
밀즈 부인은 겉으로나마 몇 번이고 안토니아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자작령에 가서 새로 시작하면 된다. 혹시 아는가, 거기서 후계자의 눈에 들지.
* * *
밀즈 부인이 떠난 뒤, 폴리는 투덜거리며 이야기했다.
“아가씨는 왜 밀즈 부인에게 마지막에 소개장까지 써주신 거예요?”
“내가 편하려고.”
“네?”
“그냥 내보냈다가 소식이라도 들으면 찝찝하잖아.”
안토니아의 말에 폴리는 대단하다는 얼굴로 손뼉을 쳤다.
“정말 아가씨는 너무 착하셔요, 저라면 나쁜 소식이 들리면 아주 신나서 춤을 출 텐데!”
“어디 아가씨가 너하고 같겠니?”
로레나의 말에 폴리는 그건 그렇지, 하고 시원스럽게 웃었다.
안토니아는 그 모습을 보며 가지런히 정리된 편지지를 만지작거렸다.
클루비 자작령, 회귀 전에도 아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노쇠한 클루비 자작은 성격이 인색하고 괴팍하여 한 번 들어간 하인들은 내도록 일만 하다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후계자는 클루비 자작이 죽고 난 뒤에야 나타나는데 그자는 한술 더 떠 사교계에 소문이 짜하게 돌 정도였다.
‘나중에는 중죄를 지은 죄인들이 감옥 대신 선택해서 갈 정도였지.’
그래서 그곳을 선택했다. 그 어떤 소식도 제 귀에 들려오지 않도록.
자신은 정말 열두 살 그때처럼 순진하지도 착하지도 않았다.
제 삶을 망가트린 사람에게 평탄한 여생을 줄 생각도 없었다.
‘하나씩 내 인생에서 그것들을 지우면 모를까.’
누구도 두 번째 삶을 엉망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아직 그래야 할 사람이 많이 남아 있었다.
편지 쓰기에 열중하던 어린 소녀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