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99화 (99/100)

<99화> 보통의 날들 1

2018.12.11.

연우가 성으로 사촌 언니를 불렀다.

다흔이 잠든 조카를 침상에 눕히고 아이가 깨지 않게 조용히 물었다.

“갑자기 나를 왜 불렀어? 급한 일이 뭐야?”

혼례를 치른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 연우가 보자며 사람을 보냈다.

시기가 좀 이르긴 했어도 성에 초대하려 사람을 보냈나 싶었다.

하지만 ‘급하다.’라는 말이 걸려 다흔도 서둘러 들어왔다.

“언니, 차부터 마셔.”

그러잖아도 목이 탄 다흔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앗, 뜨거워!”

생각 없이 호로록 마셨다가 혀를 데었다.

“괜찮아?”

“어. 어. 나는 괜찮아. 넌 무슨 일 때문에 그래?”

“저기……”

연우가 무릎 위에 놓은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과자가 담긴 접시를 다흔 앞으로 밀었다.

과자보다는 연우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지만, 머뭇거리는 동생을 위해 과자 하나를 입어 넣었다.

“언니, 내가 남녀 사이를 책으로 배웠잖아.”

“그랬지. 그래서?”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해.”

발그레진 연우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천천히 해도 되니까 마음 정리하고 말해.”

보아하니 남편과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신혼 초에는 이런저런 고민이 생기기 마련이고, 다흔도 겪은 일이라 연우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과자를 몇 개나 집어 먹었을까.

한참 후.

연우가 입을 열었다.

“첫날 밤 이후로 날 멀리하셔.”

다흔의 입안에서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멈췄다.

“그럼 그 이후로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

이상했다.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시달릴 시기인데 첫날 밤 지나서 멀리한다니.

“손도 잘 안 잡아주시고.”

“손도?”

닿는 거 자체를 멀리한다는 거였다.

“왜, 왜?”

기가 막힌 다흔이 말을 더듬거렸다.

“얘, 지금은 남편이 눈에 불을 켜고 정신없이 달려들 때야.”

그럴 때 손도 안 잡아?

저리 사랑스러운 아이를 왜 닿기 싫어하는데? 본인 아내를 왜 멀리하는데?

좋다고, 사랑한다고 애가 닳았던 사람이 혼인하니까 변했나.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걸 연우가 겪게 될 줄이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서운함에 그렁그렁한 연우의 눈물을 보자 더 화가 치밀었다.

“연우야, 제부 불러.”

이 상황에서는 저보다 신분이 높은 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왜 이런 일로 애를 울리고 그러는 거야.

“언니, 잠깐만. 진정해.”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는 다흔을 연우가 말렸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랬네.”

다흔이 식은 차를 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냉정해지자 다짐한 뒤 다시 연우에게 묻는다.

“제부랑 이야기는 해봤고?”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

“왜 못 하니. 너희 부부잖아. 서로 모르는 게 좋은 일도 있지만, 대부분 둘만의 문제는 감추고 속에 쌓아두면 오히려 커져.”

“직접 물어봐?”

“응. 직접 대놓고. 이런 거에는 여자, 남자 없다.”

연우는 검지로 탁자를 딱딱 짚어가며 설명하는 다흔의 말에 공감했다.

휘타에게 묻지 못한 건 다흔이 말한 ‘남자, 여자’라는 틀에 갇혀 있어서 그랬다.

여자가 어떻게 그런 걸 말해, 싶어서.

“그런데 연우야, 혹시 제부…….”

“응?”

“아니다. 아니야.”

말을 하려던 다흔이 손을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연우가 뭐냐고 더 물어보려는데 조카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

일을 보고 나오던 휘타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다흔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어쩐 일이십니까.”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휘타와 다르게 다흔의 표정이 냉랭했다.

자주 본 건 아니지만 볼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연우가 불러서요.”

“더 놀다 가시지요. 날이 어두워지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집에 일찍 들어가야죠.”

다흔이 단칼에 거절했다. 분명히 뭔가가 있다.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 말하고 있으나 표정은 어서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다흔이 주위를 둘러보며 헛기침을 했다.

가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입을 쩝쩝대다 조용히 낮은 음성으로, 아주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듯 휘타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유타 님. 혹시…… 그쪽에 문제 있으신 거 아니죠?”

“네? 그쪽에 문제라니요? 그쪽이 뭡니까?”

다흔이 이걸 어째, 하더니.

난 모르겠다, 하고 말을 쏟아냈다. 여전히 소곤소곤 작게.

다흔의 말을 들은 휘타의 표정 변화가 뚜렷하게 보였다.

아주 살짝 구겨졌던 미간에 주름이 생기더니 그가 대뜸 큰 소리로 외쳤다.

“문제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전혀요!”

휘타를 배려하느라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일부러 작게 말했는데.

다흔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휘타는 할 수 있는 한 목청껏 소리를 높였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 그리했다. 연우가 오해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연우의 오해는 대화로 풀면 될 문제였으나, 다흔의 오해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이런 건 당장, 이 자리에서 풀어줘야 한다.

“아니, 뭐 없다면 다행이고요.”

다흔이 미소를 지었다.

억지 미소인 걸 보니 다흔은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더 설명하려다 핑계만 늘어놓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뒀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말로 설명한다는 것도 웃기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아무튼, 저는 건강한 사내입니다.”

“네. 네.”

성의 없는 대답을 들은 휘타가 그 길로 곧장 연우에게 갔다.

연우가 여느 때처럼 휘타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조금 전에 다흔 언니가 다녀갔어요.”

“오다가 뵈었습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말이 없어진 채로 있는 분위기가 어색해 연우가 차를 따랐다.

여전히 말없이 차만 마시는 휘타.

연우는 다흔과 나눴던 얘기를 언제쯤 꺼낼지 눈치를 보며 접시에 있는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이 사탕이 다 녹아 없어지긴 전에 얘기해야 한다 다짐했다.

입안에서 굴러가며 먹은 사탕의 반 이상이 사라졌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연우는 다흔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직접 대놓고 묻는다.

휘타와 거리를 두고 싶은 연우는 침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가까이 있으면 왠지 말을 제대로 못 할 거 같아서.

“휘타 님.”

“네.”

“……왜 첫날밤이 지나고 나서는 절 안아주지 않으세요?”

말하고 나자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잠깐이었고 그가 뭐라고 답할지 궁금해졌다.

혼인하기 전에는 이런저런 요구사항이나 질문을 조심스럽게 말하곤 했는데 이상하게 혼인 뒤에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긴 이번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연우 옆에 앉은 휘타가 손을 잡아줬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고 그런 거였는데 자세히 얘기하지 않아 이리되었나 봅니다.”

“이유가 뭔가요?”

“그게…….”

그가 웃으며 제 이마를 긁적였다.

“첫날밤을 보내고 그대가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제가 힘들어…… 해요?”

연우가 곰곰이 그날의 상황을 떠올려봤다.

뭘 힘들어했다는 거지?

천천히 되짚어 보다가 스쳐 가는 게 있어 눈을 감았다.

그날 밤, 휘타는 조심스럽게 연우를 대했다.

움직임 하나하나 섬세했다. 연우의 반응을 보며 괴로워하지 않는지 살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입을 맞추고 사랑해줬다.

열에 들뜬 시간이 지나고 곧바로 잠들 만큼 피곤하긴 했다.

그래도 그건 혼례를 치르느라, 불편한 옷을 입고 신경 쓰느라 피로가 누적되어 그런 거였지 첫날밤을 치러서만은 아니었다.

“당연, 당연히 힘들죠.”

물론 첫날밤 자체가 조금 힘들긴 했다.

“처음이었으니까요.”

휘타에게 처음을 줬으니 따라오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휘타라서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거였고, 그에게 줄 수 있어서 기쁜 순간이었다.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네. 짧으셨어요. 그렇다고 내리 일주일 가까이 그리 보내는 게 어딨어요?”

연우의 입술이 비죽 나왔다.

별별 상상을 했더랬다.

다른 여자가 생겼나?

막상 혼인하니 자신이 싫어졌나? 하는 상상.

그럴 리가 없다 믿으면서도 떠오르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난 그대에게 쉴 기간을 주고 싶어서 그랬던 겁니다.”

휘타가 연우를 끌어안았다.

“치. 낮에 충분히 쉬거든요.”

“미안해. 미안해요. 이건 전부 내 잘못이야.”

“매일 안아줘도 부족할 때인데.”

연우가 다흔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순화시켜 말했다.

“그렇죠?”

휘타가 되물었다.

“그래요.”

사과하는 동안 등을 두드려주던 휘타가 별안간 연우의 두 볼을 잡고 마구 입맞춤을 해댔다.

쪽쪽 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휘타의 이름을 부를 틈도 없이 계속 이어져 연우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갑자기…… 흐읍!”

진한 입맞춤으로 변했다.

둘이 같이 움직여서인지 사탕이 급속도로 녹아 새끼손톱만큼 작아졌다.

“달아.”

“사탕 때문에…….”

연우가 혀에 사탕을 올려 내밀어 보여줬다. 그러자 휘타가 냉큼 핥아 삼킨다.

“제가 먹던 거예요.”

“압니다. 그래서 더 달지 않습니까.”

방글거리며 다시 입을 맞췄다. 그의 힘에 밀려 몸이 뒤로 넘어가 침상에 눕혀졌다.

입술만 집요하게 탐하던 휘타의 입술이 연우의 뺨을 지나 귓불로 옮겨진다.

턱선을 따라 촘촘히 입을 맞추고 목으로 내려갔다.

그의 손이 벌어진 상의 틈으로 들어왔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연우의 심장이 자리 잡은 곳.

그곳에 머물렀다가 다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이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연우의 목에서 작은 신음이 터졌다.

문득 연우도 휘타의 심장이 있는 자리를 만져보고 싶어 그가 했던 것처럼 상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

만져본 적이 있다.

여자처럼 매끈한 피부지만 탄탄한 근육이 있어 손가락으로 눌러봐도 들어가지 않을 듯했다.

손바닥을 살며시 댔다.

휘타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횟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미친 듯이.

이러는 와중에도 고르게 숨을 쉬는 휘타가 신기했다.

첫날밤, 연우는 환락에 빠져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경험을 했다.

그동안에도 휘타는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는 변함이 없었다.

저만 애타는 거 같아 괜스레 심술이 났다.

손바닥을 댄 채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탁. 숨을 크게 들이마신 휘타가 연우의 손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뭐하는 겁니까.”

어느 때보다 낮은 음성과 세상의 그 어떤 무엇보다 퇴폐적인 눈빛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휘타가 반응을 하는 것이다.

어쩐지 뿌듯하다.

“항상 저만 애타 하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날 애태우고 싶었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성을 놓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 할 텐데.”

“왜 이성을 붙들고 있는 건데요.”

나는 다 놓고 있잖아.

당신도 다 놔야지.

“이 아가씨가 뭘 모르네.”

“저도 알아요.”

휘타가 고개를 젖히고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뚝 끊어지더니 연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대고 말했다.

“내가 그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길 바라나?”

“네.”

나 때문에 당신의 혼이 쏙 빠졌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좋아서, 날 갖는 게 미칠 거 같아서, 나와 사랑을 나누는 기쁨이 커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면 좋겠다.

“그럼 나와 약속을 해줘.”

“할게요.”

무슨 약속이든 다 해줄 수 있다.

“하나. 울지 않기.”

여기서 울지 않기가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지만 알겠노라 했다.

“둘.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기.”

그건 어렵지 않았다.

“그럴게요.”

“셋. 애원해도 봐주지 않을 테니 원망하지 말기”

애원할 일이 뭐가 있을까, 또 원망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휘타에게 원망할 일이 없으니 그것 역시 알겠노라 약속한다.

연우에게 확답을 받은 휘타가 제 옷을 먼저 벗어 던졌다.

*

“저…… 흐흑.”

연우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흘러내리자 휘타가 부드럽게 핥아 마셨다.

“울지 않기로 했잖아.”

“나…… 나오는 걸 어쩌라는…… 흑.”

이런 의미의 눈물을 말하는 거였구나.

난데없이 ‘울지 않기’를 말하길래 뚝뚝 눈물을 흘리거나 또는 엉엉 우는 걸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어떤 책에서 봤던 여자가 떠올랐다.

왜 우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젠 확실히 알겠다.

아주 좋으면, 견딜 수 없이 좋으면 눈물이 흐르는 거였다.

그 후로 휘타와 약속했던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배웠다.

휘타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줬다. 약속했기에 되도록 끝까지 지키려고도 했다.

하지만.

입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짧은 신음을 내뱉다 결국 애원하고 마는 연우였다.

견딜 수 없는 쾌락이란 게 있었다.

그는 몸을 비틀며 애원하는 연우를 봐주지 않았다.

휘타가 손가락을 입에 대주며 물라고 해서 고개를 저었다.

연우는 휘타의 몸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아서 계속 거절했으나 어느 순간 그를 아프게 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괜찮아. 괜찮아.”

휘타가 연우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이며 달래줬다. 그것마저도 자극되어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휘타의 품에서 연우는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말조심하자.

그가 완전히 다른 남자가 되었고 말로만 듣던 늑대의 본성을 발견했다.

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확인한 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간 휘타가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알게 되었다.

꽤 괴로웠을 텐데.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아주 가끔, 어쩌다 한 번은 허락해줄까.

고민하는 연우의 이마에 휘타의 입술이 느껴져 얼굴을 들자 방긋 웃는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처형에게 꼭 말해줘요.”

다흔 언니에게? 뭘?

“난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지나쳐서 문제라고. 알겠습니까?”

“무슨 문제인데요?”

“그냥 그렇게 말하면 처형이 알아들을 겁니다.”

휘타가 연우를 꽉 안아줬다.

그 바람에 연우는 의기양양한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