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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98화 (98/100)

<98화> 외전 – 탐야의 선물 2

2018.12.07.

살랑살랑 부채 깃털이 흔들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오늘은 손님이 오려는 모양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와 무거운 기운이 건취현이 서 있는 구름 위를 흔들어 놓았다.

“탐야군.”

근래 가장 많이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올 때마다 입을 다물고 있어 지루했는데, 언젠가부터 말이 많아진 터라 탐야와 대화는 즐거웠다.

이 시간이면 건취현이 그네에 있는 줄 알고 알아서 찾아왔다.

“매일 타는 거 지겹지도 않아?”

“자넨 날 찾아오는 게 지겹지도 않은가.”

대꾸할 말이 없어진 탐야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리자 건취현이 툭 쳤다.

“어때? 자비를 베풀고 지켜보는 것이 생각보다 기분 좋지?”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고. 뭐 나쁘지 않아.”

“내 하나만 물어보세.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야?”

탐야는 오랫동안 자신이 만든 법을 바꾸지 않았다.

바꿀 마음이 없는 것처럼 냉혹하게 보일 정도로 항상 법칙을 지켜왔다.

그랬던 그가 휘타에게는 달랐다.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답해주지 않을 듯해 매번 눈치만 보다 요즘 탐야의 기분이 좋아 보여 때를 기다렸다.

“갑자기 아니야. 그저 서서히 바뀌어 갔을 뿐.”

“그러니까 왜 서서히 바뀌어 갔는지 묻는 걸세. 자네가 만든 법칙은 좀 잔인한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한 건가?”

“잔인하지 않았어. 다만 어떤 이에게는 잔인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 휘타는 아니야. 셋이나 죽였잖아.”

“내 말이 그거야! 사람을 셋이나 죽인 휘타의 부탁을 왜 들어줬느냐는 거.”

잘 흥분하지 않는 건취현인데 이 순간만큼은 목소리가 커졌다.

호기심이 여유로운 그의 성미마저 급하게 만들었다.

“끈질기잖아.”

“응?”

답이 생각보다 간단명료하다.

“휘타가 징그러울 정도로 끈질겨.”

깊은 한숨을 쉰 탐야가 답하더니 그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심정을 쏟아냈다.

“답해주지 않으면 답할 때까지 나를 찾아. 지상의 인간계에도 그런 녀석들이 있나? 어찌나 찾아대고 불러대는지 나중에는 환청이 들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느낌 알아?”

오죽하면 신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고 말하는 건지.

겪어보지 않았지만 건취현은 탐야의 심정이 이해됐다.

지상의 인간계에도 그런 사람이 종종 있으니까.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바람과 소원, 불평과 불만, 한탄과 한숨, 악한 말과 선한 말.

본디 신들은 피조물 앞에 함부로 나서면 안 되기에 그들의 부름을 듣지 않는 척하고 살았다.

그렇지만 휘타처럼 불러대면 안 나설 수가 없었다.

“나도 잘 알지. 인간계는 지하계보다 더해. 그래서 난 어지간하면 들어줘.”

물론 어지간하다는 건 건취현의 기준이었지만.

“또 있어.”

“또 뭐?”

“휘타는 날 믿는 녀석이지. 완벽하진 않으나 내가 들어줄 거라고 믿어. 그 믿음이 날 움직이게 했어.”

건취현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건 네가 휘타의 소원을 매번 들어줬으니 믿는 거지.’라고 답할까 하다 흡족해하고 있는 탐야의 기분을 망치기 싫어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됐건 휘타는 신들 사이에서 무심하기로 유명했던 탐야의 성정이 변화하는 데 일조했다.

태초부터 정해둔 자신의 법칙을 스스로 바꿨다.

그 어떤 자비와 용서가 없었던 탐야.

무서운 신은 아니었다. 법칙대로만 움직여서 문제였지.

“효조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건가?”

아직도 벌을 받는 중인 그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다시 태어날 수야 있겠지만 아직 멀었어.”

“연우의 양부모는?”

“그들에게도 기회는 줄 거야. 하지만 그들 역시 벌이 끝나려면 까마득하게 멀었지.”

“휘타가 큰일을 했군.”

이 얼마나 놀라운 발전인가.

그 악독한 이들에게도 기회라는 것을 준단다.

“그럼 이왕 들어주는 거 휘타의 소원은 더 일찍 들어주지 그랬어. 다섯 번째 삶을 살 때 말이야.”

“정리가 필요했거든.”

“탐야 자네는 너무 정확히 하려 해서 문제야.”

건취현이 웃으며 저 멀리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유중. 내 탐야와 차를 마시고 싶구나.”

고개를 숙이고 다가온 유중이 말없이 차를 준비했다.

바쁘게 움직이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주전자와 찻잔이 탁자에 놓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차를 준비한 유중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탐야가 잔을 잡았다.

“예전에 네가 부리던 이가 천운이었나?”

“응. 맞아. 기억하고 있었군.”

천운은 일이 있어 대협곡이란 곳으로 보냈고 그 뒤를 이어 유중이 왔다.

“워낙 시끄러웠던 녀석이라 기억할 수밖에. 한데 유중은 천운과는 많이 달라서 심심하지 않나.”

“묵직해서 좋아.”

유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빈 잔을 보고 따라줬다.

탐야는 유중을 볼 때마다 만나게 해주고 싶은 이가 있었다.

과연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려나. 알아본다면 어떤 얼굴을 하려나.

처음에는 가벼운 호기심이었으나 지금은 왠지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였다.

혼자 생각하던 탐야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마음이 너무 약해졌어.

안 된다, 하면서도 탐야는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신하를 부르고 싶어진다.

건취현이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 한 모금 마셨다.

“탐야, 밖에 있는 그도 들어오라고 해.”

건취현도 알고 있다.

탐야를 모시는 이가 누군지. 이곳에 올 때마다 매번 밖에서 기다리는 이가 누군지.

그도 탐야처럼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니 탐야처럼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러나.

서로가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이름을 꺼내지 않고 있지만 누군지 아는 이.

“각오해. 여기가 대단히 시끄러워질 거야.”

“난 익숙해. 설마 천운처럼 말이 많지 않겠지.”

“만만치 않을걸.”

“만만치 않을 거라니 더 궁금하네.”

탐야가 소리 없이 자신의 신하를 부르자마자 밖에서 총총총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오는지 감탄사도 들려온다.

“와아, 완전 멋져요!”

탐야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세상에! 구름 위에 나무와 꽃이라니! 탐야 님 우리도 이렇게 해놓고 살아요! 우리는 너무 삭막하다고요!”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데 있는 힘껏 외쳐대니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래도 재미있다는 듯 건취현이 바라봤다.

말 많은 신하를 둔 뒤로 탐야가 변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 신하가 시끄럽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니 헛소문이 아니었다.

건취현이 탐야의 말 많은 신하를 탐색하는 동안 탐야가 힐끔 유중을 봤다.

유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못 알아보는 건가.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취현 님!”

“내 진작 허락했어야 하는데 늦어서 미안하다. 사림아.”

그 이름에도 유중은 흔들림이 없었다.

“별말씀을요.”

헤헤, 웃은 사림이 비어있는 잔을 보고 주전자를 잡으려 하자 유중이 나섰다.

“이곳에선 내가 할 일입니다.”

정중했지만 차가웠다.

“아, 죄송해요.”

머쓱해진 사림이 탐야의 뒤에 섰다.

눈동자를 굴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래도 둘은 서로를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 아쉬워진 탐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오늘 온 목적은 이거였다.

“가자.”

“벌써요?”

사림의 눈에 서운함이 가득했다.

“오래 있었어.”

“전 방금 왔습니다.”

“넌 가끔 네 주인이 누군지 잊어서 문제야.”

“죄송합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사람이 조용해졌다.

탐야가 건취현에게 간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돌아섰다.

건취현이 식은 차를 한 모금한 뒤, 사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저 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지?”

저 이. 사림을 말하는 거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왜 아는 척을 하지 않은 것이냐.”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굳이 예전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습니다.”

채유중. 그리고 사림.

연우의 부모였던 이들.

유중은 건취현의 신하가 되었고, 사림은 탐야의 신하가 되었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일까.

사림을 알아보는 유중과 달리 사림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후회하지 않아?”

“어떤 점을 말입니까.”

“전부. 사랑하는 딸과 여인. 앞으로도 함께할 수 없지 않으냐.”

“연우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때는 제 선택을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인간이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세계로 가는 건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신의 계획대로였다.

본래 연우는 사고가 나서 지하계로 가는 것이 아닌 죽을 운명이었고, 그 운명을 바꾼 사람이 바로 죽은 친부 채유중이었다.

휘타가 탐야에게 그랬던 것처럼 유중은 자신을 담보로 걸고 건취현에게 빌었다.

제 딸을 살려달라고. 연우가 현옥의 정체를 알게 해달라고. 그리고 죄 많은 그들을 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유중은 지하계에서 살아가는 연우를 보며 후회가 많았다.

그냥 신의 순리에 맡길걸.

어린 연우를 남겨두고 죽은 것도 미안한데, 자신 때문에 딸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 듯해 가슴을 친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건취현은 지켜보라 했다.

‘선택의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는 것도 아버지인 네가 할 일이다.’

사지가 찢기는 고통에 휩싸여도 지켜봤다.

연우의 삶일 반복될 때마다 부디 마지막이 아니길, 때론 마지막이길 기도했다.

그렇게 그 끝에 당도했다.

오래전 인연이었던 사림도 만나게 됐고.

과정은 괴로웠으나 다행히 결과는 행복이었다. 딸이 행복하다면 그도 행복했으니까.

“저는 건취현 님 곁에 있는 지금이 좋습니다.”

“연우는 이제 됐고. 사림, 그녀와의 인연은 바라지 않아?”

“지난 인연입니다. 그리고 한 번이면 족합니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유중이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사림이 나갔던 곳을 잠시 애틋하게 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연우 엄마, 당신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르나, 꼭 행복하길 바라오.

매일 그랬듯이 오늘도 사림의 행복을 비는 유중이었다.

*

“우리도 꽃 심어요.”

사림이 탐야에게 졸랐다.

“관리하기 귀찮다.”

“어차피 제가 하는 거잖아요!”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어라.”

사림의 입술이 꽉 닫혔다.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사림이 탐야의 입 다물라는 명령은 거부할 수 없었다.

얼굴에 불만스러움이 그득했지만, 귀가 좀 편안하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사림이 그의 신하로 오게 된 건 순전히 그녀가 원해서였다.

탐야에게 고마워서라나.

재미있는 성격이라 신하로 들였으나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적적하지 않아 좋긴 했다.

조용히 하라고 명했지만 막상 조용해지면 찾아오는 적막을 견디기 어려웠다.

“차 준비해.”

말을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네!”

신이 난 사림이 크게 외친 후 곧바로 차를 준비했다.

다른 건 몰라도 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드는 사림이었다.

“어떠십니까? 맛이 좋습니까?”

“응. 좋다.”

“그래서 말인데요.”

눈을 감고 음미하던 탐야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또 뭐.”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여.

“차의 찌꺼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마십시오. 제가 직접 버린다고 했잖습니까.”

“차 찌꺼기는 예전부터 내가 버리던 거였다.”

탐야에게는 차의 찌꺼기에 불과하지만 지하계의 땅에는 거름이 되었다.

지하계의 식물이 악조건에서도 무럭무럭 자라주는 이유였다.

그런데 사림은 굳이 그걸 모아 말려 곱게 빻아서 뿌렸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지하계의 식물에 도움이 도는 건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제가 하면 탐야 님도 편하시고 이왕 베푸는 거 예쁘게 해서 주면 좋잖아요. 그러면 지하계 인간들도 탐야 님께 더 감사하고 그걸 보시는 탐야 님도 뿌듯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바른말만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어 차만 마시는 탐야.

“탐야 님 손도 편하고, 감사 찬양도 받고. 일거양득입니다. 이 얼마나 창조자로서 행복한 일인가요. 안 그렇습니까?”

“알았다. 알았어.”

“이제 제게 맡기시는 거죠?”

사림이 기어이 확답을 받으려 했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탐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부터 고민하는 일.

그 일을 행하면 사림에게 맡길 일도 없어진다.

“꽃도 심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사림아.”

“네!”

“저번부터 묻고 싶었다만. 차 찌꺼기를 말리고 빻아서 뿌리려면 정성과 수고가 들어간다. 안 해도 되는 건데 애써 하려는 까닭이 무엇이냐.”

“아…….”

사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극히 사적인 건데 혼내지 않겠다 약속해주십시오.”

“사적이다? 뭔지 들어나 보자. 혼내지 않겠다 약속하마.”

“…… 우, 우리 연우 보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사림의 입에서 나왔다.

“연우?”

“제가 딸에게 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요.”

사림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그 눈물이 머문 입술 끝에 미소가 어렸다.

사림은 연우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아프면서도 나를 웃게 해주는 내 딸의 얼굴에도 웃음이 지어지길 바랐다.

“이곳에서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

“우리 연우가 그거라도 보면서 즐거우라고.”

“…….”

“한 번이라도 더 웃기를 바라서요.”

내 딸이 좋아한다면 그깟 수고로움이 대수일까요.

그 아이가 웃는다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사림이 속으로 하는 얘기가 탐야에게도 들렸다.

어찌 보면 연우는 복이 많이 사람이었다.

탐야는 꽃이나 나무 심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로 하였다.

차의 찌꺼기를 예전처럼 그냥 버리기로 하였다. 아니 말려서 빻는 법을 배워두기로 했다.

탐야의 변화에는 사림의 공도 크니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기에.

어차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 전부터 하던 고민을 끝냈다.

사림은 이제, 탐야 곁을 떠날 때가 되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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