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내 전부를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내 사랑.
2018.11.30.
연우를 의자에 앉혀두고 휘타가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그가 다시 들어왔고, 이어서 하인이 작은 대야에 들고 따라와 연우의 발 앞에 놔두고 나갔다.
이게 뭔가 묻기 전에 그가 대야 앞에 팔을 걷어붙이고 앉더니 연우의 발뒤꿈치를 잡고 버선을 벗겼다.
발목은 함부로 보이는 곳이 아닌데 휘타니까 마음 편히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발을 씻겨주려는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것밖에 없었다.
갑자기 발은 왜.
“참 작군요. 내 손에 이리 쏙 들어올 줄이야.”
“당신 손이 큰 거예요.”
방긋 웃은 그가 연우의 발을 대야에 담갔다.
천천히 물을 끼얹으며 그녀의 발등을 씻겨주고, 발가락과 그 사이사이도 꼼꼼하게 문질러준다.
발바닥을 가볍게 누르자 간지러워 키득거렸다.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은 휘타가 한 발을 다 씻기고 다른 발로 옮겨졌다.
따뜻한 온도에 피로가 가시고 몸이 노곤해진다.
양발을 다 씻겨주고 마른 천으로 닦아줬다.
보송보송해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동안 휘타가 대야를 옆으로 옮겼다.
“발을 왜 씻겨주시는 거예요? 기분이 좋기는 한데 이유를 알고 싶어요.”
연우가 나른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에게는 이를지 모르겠으나 나는 오래전부터 그대를 내 인생의 반려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반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연우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휘타가 청혼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에게 받을 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발을 씻겨주며 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보통의 청혼처럼 꽃이나 정표를 줄줄 알았다.
하긴 이미 그에게 화실로 만든 팔찌를 받았지.
어쨌든 발을 씻겨주는 건 특별했다.
그리고 같이 들려주는 말 또한 그러했다.
오래전부터 품었던 생각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의 내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놨던 것일까.
그게 무엇이길래 오래도록 날 지켜보게 하였을까.
하지만 그의 반려가 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 주름이 지더라도 당신을 영원히 흔들 수 있는 부분이면 좋겠다.
“평생 내가 이리 그대의 발을 씻겨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
“그대의 특별한 수호령을 감추지 않고 살도록 내가 곁에 있어 주겠습니다.”
“…….”
“거절은 하지 마세요. 나의 특별한 수호령이 슬퍼합니다. 그것도 둘이나.”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진지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허락할 건데.
우리의 특별한 수호령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휘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가락 깍지를 끼고 활짝 웃었다.
당신도 내 답을 알고 있잖아요.
“언제쯤이면 당신의 반려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되도록 빨리 서두르겠습니다.”
연우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휘타는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만날 수 없는 시간 동안 그리움에 사무쳤다.
다시 만났어도 그녀와 사랑하는 일이 맞는 건지 망설였다.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우리에게,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하길 원했던 우리에게 드디어 이런 날이 왔다.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운명처럼 그의 품으로 연우가 들어왔다.
서로를 원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 꿈조차 꾸지 못했건만.
지금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랐다.
지난 삶을 사는 동안 힘들게 사신의 일을 했던 연우가 늘 걸렸다.
당시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와 피곤해하는 그녀를 위해 가끔 발을 따뜻한 물에 씻겨주고는 했는데, 매일 해주지 못해 마음에 남았다.
나이 든 남편의 시중이 그녀 나름대로 불편했기 때문이리라.
연우의 발을 보고 또 한 번 가슴이 쓰렸다.
이 작은 발로 뛰어다니며 힘들었을 텐데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그녀다.
휘타 앞에서 늘 씩씩했던 사람.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지만 해줄 수 있는 건 연우가 그나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해서 이렇게 청혼을 한다.
비록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지만 원 없이 해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제 부부가 되면 오래전의 약속을 지키겠다.
우리의 마지막 날, 같이 눈을 감아줄게.
절대 혼자 보내거나 먼저 가지 않을게.
그대의 마지막을 내가 함께해 줄게.
*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침상에 연우를 앉혀놓고 연우의 얼굴을 보며 휘타가 말했다.
그렇게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
연우가 뚫어버릴 것처럼 바라보는 휘타의 시선을 피해 천정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 여기.”
목덜미를 짚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할 말은 한다.
한 번 시작되면 멈추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연우도 이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기에 회피하지 않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휘타를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 뻔했다.
혼자 있을 때 휘타와 나눴던 시간을 떠올리면 신열이 나는 듯하고 이래도 되나 싶지만 어쩌겠는가. 좋은걸.
“아, 여기.”
연우가 손가락으로 짚어준 자리를 휘타가 확인하며 짚었다.
움찔.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시작은 여기가 좋겠지요?”
목덜미에 있던 휘타의 손가락이 타고 올라와 입술에 닿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비볐다.
“나날이 예뻐지는 이 아가씨를 어쩌면 좋을까.”
가만히 있으면 차디차게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만은 한없이 따스했다.
나긋나긋 울리는 음성에 얼마나 많은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지.
귓속이 간질거렸다.
“예뻐지는 만큼 예뻐해주면 되죠.”
“그랬다간 그대가 녹아 없어질 겁니다.”
말만 들어도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촙. 휘타의 입술이 연우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고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에도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우가 다급히 물었다.
“왜요?”
“아쉬운가요.”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아쉽다. 무지무지 아쉬웠다.
고민하던 연우가 팔을 휘타의 목에 두르고 당기자 그가 힘없이 끌려왔다.
“솔직히 아쉬워요.”
먼저 입술을 댔다. 왜 오늘은 여기까지래.
다른 날처럼 해주는 게 좋은데.
끊임없이 탐해주는 그가 좋았고, 무언가 참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자신으로 인해 평정을 잃는 휘타를 보면 알 수 없는 희열에 쌓이기도 했다.
그가 연우를 살며시 밀어냈다.
“이러면 더는 자신이 없어집니다.”
“무슨 자신이요?”
되묻는 연우의 귀에 대고 휘타가 나직이 속삭였다.
“안고 싶어져.”
안고 싶다는 말뜻을 알고 있다.
그러나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난감해진 연우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 눈만 깜박였다.
그녀가 알고 있음을 눈치챈 휘타가 다시 속삭였다.
“정 아쉬우면 아주 조금만 허락해주시든가.”
아주 조금?
연우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어려운 일이라 의아했다.
“그게 가능해요?”
“그럼. 당연히 가능하죠. 내가 하는 대로만 따라오면 됩니다.”
연우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은 휘타가 상의의 여밈 부분에 손을 올렸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삼키고 싶은데 소리가 날까 봐 그럴 수 없었다.
단단히 묶여 있는 매듭이 툭 풀어졌다. 드러난 맨살에 그의 손이 닿았다.
“떨고 있네요.”
휘타 말대로 연우는 떨고 있었다.
그가 제 손을 연우에게서 떼었다.
“나중으로 미룹시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요.”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라, 두려워서 떠는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미지의 세계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경험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 때문에 떠는 거였다.
말 그대로 이 순간이 떨리는 거.
다른 사람이 아니라 휘타이기에 그의 작은 스침에도 떨릴 수밖에 없었다.
연우가 멀어지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먼저 이렇게 잡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지만 모르겠다.
어때. 기다리는 사람이, 애타는 사람이 잡을 수도 거지.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왜!”
언성이 올라가는 듯해 얼른 다시 낮췄다.
“왜 멈춰요…….”
“아무래도 내가 참을 수 없을 거 같아서.”
휘타가 자상하게 연우를 안아줬다.
“그대가 소중하니까. 혼인하는 날 마음껏 안아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등을 두드리며 달래줬다.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만 이러는 거예요.”
휘타의 웃음이 맞닿은 가슴의 진동으로 느껴졌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남자에게도 그랬다면 그 남자는 살아남지 못했을걸요.”
“무서운 말씀 마시고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당신은 진짜로 그럴 거 같아요.”
휘타가 또 웃는다. 그는 원래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아무렴 어떠리.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연우도 같이 웃었다.
휘타와 함께하며 하루하루 지날수록 작은 일에도 즐거워하고 웃게 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운명이었다.
*
혼롓날.
“식이 시작하기 전에 유타 님이 널 보고 싶다고 오셨는데, 머리카락 색이 이상해.”
공식 석상에서 늘 하얀 머리카락으로 나타났던 휘타가 검은 머리카락이 되어 나타나니 엄마가 놀랐다.
“얼굴은 유타 님이 맞거든?”
“유타 님 맞아요. 수호령이 둘이라 가능하시대요.”
“그래? 근데 왜 지금까지 계속 저 모습은 안 보여주셨다니?”
“글쎄요.”
휘타가 그랬다. 검은 늑대인 자신을 보여주는 건 부모 외에 연우가 처음이었다고.
가끔 그의 사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걸 알아서 무엇할까 싶어 굳이 묻지 않았다.
“식이 시작하기 전에 신랑이 신부를 보러오네.”
지하계에서는 식이 있는 날, 신랑이 신부를 보러 가는 게 금지는 아니었으나 팔불출이라 소문나기에 딱 좋았다.
휘타가 밖에 있다는 건 그 소문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연우를 보고 싶어한다는 증거였고.
“우리 딸, 사랑받고 있구나. 하긴 유타 님이 먼저 널 좋아하셨다고 했지.”
“엄마 덕분이죠.”
“그래. 그래도 내가 나서서 이만큼…… 흐흑.”
갑자기 엄마가 눈물을 흘렸다.
며칠 전부터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눈물 바람이었던 엄마다.
“조그맣던 애가 벌써 커서……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몰랐어.”
“아이참, 엄마. 누구보다 이 혼인을 바라셨잖아요. 그리고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주 볼 건데 왜 우세요.”
“너도 딸 낳아봐. 그래야 엄마 마음을 이해하지. 나이가 차서 얼른 보내야겠다 싶었는데, 막상 간다니까 마음이 얼마나 허전한 줄 알아? 꼬물꼬물하던 게 언제 저리 컸나 싶기도 하고…… 가서 귀염받고 잘 살까 걱정도 되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잘살게요.”
“그래야지. 어머, 내 정신 좀 봐. 유타 님이 밖에서 기다리신댔는데!”
손수건을 꺼낸 엄마가 얼른 눈물을 닦고 문을 열었다.
휘타를 맞이하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은 조금 전에 울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엄마가 자리를 비켜주어 둘만 남았다.
“역시 이럴 줄 알았습니다. 내 신부는 뭘 입어도 예뻐. 물론 아무것도 안 입었을 때가 가장 예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길 망정이지. 연우가 그를 흘겨봤고 그러다 감탄한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넋 놓고 보고 싶을 정도로 잘생겼다. 어디 그뿐일까.
관능미를 가지고 있어 묘한 기운을 흘린다.
“전 당신이 예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흠. 내가 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장신구를 다 뺄까요? 아니면 옷을 좀 더 차분한 색으로 바꿔입을까?”
“됐어요.”
“그대라 그리하라 하면 당장 하죠.”
“오늘은 날이 날이니까 괜찮아요.”
오늘을 위해 둘이 맞춰 입은 옷인데 휘타가 정말 옷을 갈아입을 듯해 말렸다.
마침 밖에서 두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유타 님. 이제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알았다. 자, 가죠.”
휘타가 내민 손에 연우가 가볍게 얹었다. 살짝 얹어있기만 한 손이 흡족하지 않은지 그가 연우의 손을 꽉 쥐었다.
복잡한 의식은 생략하고 양가 가족만 모여 조용히 올리는 혼례였다.
대신 성에서 지배자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잔치 음식과 기념이 될 만한 소소한 물품을 돌렸다.
모두가 풍족한 혼례였다.
휘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간 연우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목과 팔목에 있는 파란 실처럼 하늘이 파랗다.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
이런 날에 혼례를 할 수 있어 행운이었다.
마치 세상 모두에게서 축복을 받고 앞으로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을 듣는 기분이라고 할까.
저 멀리 연우를 기다리는 가족이 보였다.
엄마는 여전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아빠는 인자한 미소로 딸을 바라봤다.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고 큰 것만으로 감사한데,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혼인을 한다.
비록 수호령 때문에 고민인 시기가 있었지만, 이 또한 축복이리라.
휘타의 말대로 남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수호령이었으니까.
모든 행운과 행복이 자신에게 있는 듯해 지하계의 신인 탐야에게 감사했다.
“행복합니까?”
휘타가 조용히 묻는다.
“네. 돌이켜보면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거 같아요.”
“다행이네. …… 연우야.”
여느 때와 달리 이름을 불러주는 휘타.
“네.”
항상 존대해주던 그가 이름을 불러줬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다정한 음성이 귓가에 다가와 머물렀다.
“연우야.”
“네.”
“연우야.”
“네. 말씀하세요.”
“그냥. 좋아서.”
햇빛에 휘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행복하자.”
“네.”
“행복하게 해줄게.”
“저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같이 행복해져요.”
휘타는 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연우야. 이제 알겠다.
탐야는 너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기회를 줬다.
이번 삶에서는 나의 처음과 끝도 행복하라고.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이 생(生)을 살아오는 동안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심지어 지난날의 기억까지 내게는 행복이었다.
너를 기억하고 너를 바라보는 모든 순간순간이 빛나도록 아름다운 삶이었다.
그러니 연우야.
나의 연우야.
내 전부를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내 사랑아.
마음껏 사랑하자.
저 하늘이 다시 우리를 부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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