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우리 부모님만큼 나를 애지중지하는 사람.
2018.11.27.
휘타는 연우가 지난 일을 모르고 살았으면 했다.
아주 가끔 기억해주길 바랐지만 지금의 그녀가 좋아 보였다.
평범한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라서일까? 예전보다 훨씬 밝고 당당했다.
사람이 살면서 어찌 좋은 것만 보고 살겠느냐마는 아픔을 겪을 만큼 겪었던 연우이기에 계속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길 바랐다.
떼어놓을 수 없었던 유타와는 완벽하게 또 완벽하지 않게 하나가 됐다.
둘로 나뉘었던 성정이 한 사람의 인격으로 모아졌으나 외모와 음성은 상황에 따라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간혹 외모가 바뀔 때 아주 미세하게 각각의 성격이 나타났고.
효조는.
지난날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
휘타가 효조를 기억해내고 그를 어떻게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곁에 두는 것.
사실 감시의 목적이 컸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효조를 지켜보며 과거의 그가 아님을 깨달았다.
거부감이 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휘타의 모진 말에도 넉살 좋게 굴어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냉정하게 잘라내도 이튿날 찾아와 술 사달라 비비적대고, 사신의 일이 힘들다 넋두리하는 걸 듣다 보니 약간의 측은함도 생겼다.
그래도 연우는 안 된다, 그녀와 만나는 일은 없기를 바랐건만.
결국 연우와 효조는 만나게 되었다.
일이란 것이 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어쩌면 둘이 만나게 되리라 내심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효조와 연우 사이도 운명의 끈으로 연결이 되었다.
탐야의 뜻을 알 수 없으나 동시대에 함께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지 싶었다.
다행히 효조가 눈치가 빨라 연우가 휘타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적당한 거리를 뒀다.
앞으로 세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만 유지된다면 더없이 평화로우리라. 지금처럼.
휘타는 제 무릎에 누워 있는 연우의 속눈썹을 살며시 건드렸다.
파르르 떨던 눈꺼풀이 떠졌다.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뭘요?”
“정말 남자인 친구가 있습니까?”
연우가 벌떡 일어나 마주 앉았다.
“당신이 솔직히 말해봐요.”
“뭘?”
“제게 남자인 친구가 없도록 한 거, 당신이죠?”
연우에게 그런 친구가 없다는 뜻이었다.
휘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크게 젓자 연우가 그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빤히 바라봤다.
“참 이상했단 말이죠. 언젠가부터 아니, 엄마가 저한테 ‘너도 이제 여자야.’라고 말한 그 무렵, 주위 남자들의 코빼기도 안 보였어요. 어릴 적부터 친했던 동네 친구들이 죄다 절 멀리하기 시작했더랬죠.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당신이 그런 거죠?”
“난 아니라니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연우에게 천연덕스럽게 웃어줬다.
연우의 주변을 주의 깊게 살핀 이유는 효조가 때문이었다. 시작이 그랬다.
시간이 지나고 연우가 꽃처럼 성장했을 때 친구라는 이름으로 근처에 있던 남자들의 눈빛이 변하는 게 보여 쫓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무조건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휘타의 기준에 차는 남자라면 그도 흔쾌히 한동안 봐줄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마음에 차는 놈이 있어야지.
괜찮다 싶으면 꼭 하나씩 거슬리는 부분이 드러났다.
‘괜찮은 놈’이 없어서 그랬다.
절대 연우 근처에 남자가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양심이 조금 찔리려 했으나 가볍게 무시했다.
그나저나 겁도 없이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이 은빛의 호랑이를 어쩌지?
수호령으로 변하면 휘타보다 훨씬 크겠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오래전에 보았던 새끼 호랑이 같았다.
고양이로 착각할 만큼 조그맣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새끼 호랑이.
연우는 휘타의 눈에 제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복숭앗빛을 띠고 있는 두 볼.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두 눈.
그리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보드랍고 촉촉한 입술.
이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덮칠 수도 없고.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새끼손가락에 연우의 손가락 끝이 닿았다. 슬쩍 손가락을 건드려봤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이번엔 손가락 사이를 살살 문질렀다.
그녀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내쉬던 숨을 멈췄다. 복숭아를 닮은 볼이 붉어졌다.
사랑스러워 죽겠다.
어디 하나 사랑스럽게 않은 데가 없다.
어디 가지 않고 눈앞에 나타나 줘서 사랑스럽고, 그를 단번에 좋아해 준 것도 사랑스럽고, 속여서 기분 나쁠 만도 하건만 개의치 않아 하는 것도 사랑스럽다.
그냥 연우라는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웠다.
이리 사랑스러운 대상을 보고만 있기가 괴로웠다.
종일 끌어안고 둘이서만 있고 싶은데, 기다림의 시간보다 만남의 시간이 짧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혹여 연우가 놀랄까 염려가 되기도 했고.
그래도.
못 참겠다.
입술이 간지러워 못 참겠다. 마음이 간질거려 못 살겠다.
쪽. 연우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못 참겠다.”
머릿속에 떠도는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도저히 안 되겠어.”
연우의 뒷머리를 잡고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휘타는 잠시 떨어져 연우를 봤다.
말하지 않고 있지만 연우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에 웃음이 어렸다. 허락이다.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휘타의 입술이 덮쳤다.
힘에 밀려 연우가 뒤로 넘어가려 하자 그의 팔이 감싸 안았다.
조금 전처럼 입술만 대는 것이 아니었다.
연우는 태어나 처음으로 생각이라는 것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도, 기분도 처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입안으로 이물질이 파고드는데 싫지 않았다.
아까 휘타가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을 때처럼 온몸이 간지러웠다.
움츠러들었다가 펴졌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연우의 손가락이 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쥐었다.
끊임없이 진입하고 또 진입하더니 이제 유영한다.
귓가를 울리는 끈적이는 소리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숨이 찼지만 그를 밀어낼 생각조차 못 했다.
두 사람이 잠시 떨어졌다.
가슴을 들썩이며 밭은 숨을 내쉬는 연우와 달리 휘타는 얄미울 정도로 차분했다.
느른하게 내리뜬 눈꺼풀 아래도 보이는 금색의 눈동자가 위험해 보였다.
조용한 가운데 연우의 숨소리만 들렸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거 같은데.
뭐라고 말하기 전 다시 둘의 입술이 붙었다.
이번에는 휘타에게 모든 걸 빼앗기는 것 같았다.
연우를 집어삼킬 듯 흡입하여 묵직하게 연우를 눌렀다.
점점 몸이 뒤로 젖혀지고 등이 바닥에 닿자 놔주는 휘타.
그는 이제야 숨이 차오르는 모양이었다.
후우, 하고 호흡을 고르더니.
연우의 몸 위로 쓰러졌다.
“미치겠다.”
휘타가 연우의 머리를 제 가슴에 안았다.
“보내기 싫어.”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제법 여유롭게 내쉬는 숨과 달리 심장이 내달렸다.
이 남자의 심장. 나 때문에 이러는 거구나.
나만 떨리는 줄 알았는데 휘타도 떨고 있었다.
연우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문득 집에 가기 싫어졌다.
연우의 집 앞.
문을 열기 전 연우가 제 입술을 더듬거리며 만졌다.
아무래도 입술이 부은 거 같다.
휘타가 그녀를 보내기 싫다 말한 뒤, 얼마나 더 입술을 맞대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 바래다주면서도 중간, 중간 몇 번이나 멈췄던지.
나무 뒤로, 담벼락 뒤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막혔던 물꼬가 터진 사람처럼 휘타는 계속 연우의 입술을 탐했다.
혼인하기 전에 이래도 되나 몰라.
걱정되긴 했지만, 솔직히 휘타의 입술은 좋았다.
중독성이 있으면서도 매번 호기심을 일깨운다. 지나치다 싶게 했으면서도 충족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기도 했다.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
연우가 제 뺨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왠지 휘타의 타액이 남아있는 것 같은 입술을 손등으로 쓱쓱 문지르고 들어갔다.
*
며칠이 지나도록 연우는 아직 아빠나 엄마에게 휘타와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매일 밖에서 그를 만나느라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그날도 휘타를 만나기 위해 나가려는 연우를 엄마가 불러 앉혔다.
“연우 너, 좋아한다는 사람 데리고 와봐. 엄마도 보고 싶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 연우가 실토했다.
“엄마. 그게…… 유타 님이야.”
엄마가 펄쩍 뛰었다.
“응? 누구?”
“유타 님.”
“아니라고 하지 않았니? 다른 남자 좋아한다며!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둘이 언제 그렇게 된 거야?”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워 간단하게 그렇게 됐다고만 했다.
“어머! 웬일이야. 네 아빠는 알고 있어?”
“글쎄.”
다른 말이 없었으니 모르지 않을까.
휘타가 따로 만나서 말을 꺼냈으려나.
되도록 혼인날을 일찍 잡고 싶다고 했던 그라서 어쩌면 미리 말을 했을지도.
“여보!”
엄마가 문을 열고 복도를 향해 크게 외쳤다.
평소에 집안에서 소리 크게 내면 안 된다고 가르친 엄마였는데 오늘은 예외인가 보다.
“여보오!”
서재에 있던 아빠가 연속되는 부름에 인상을 찌푸리고 나왔다.
“무슨 일이길래 집이 떠나라 찾는 거야?”
“여보, 여보! 당신 알고 있었어요? 연우가 좋아하는 남자가 유타 님이래요!”
“알고 있었지. 그럼.”
“왜 저한테 알려주지 않았어요.”
“이럴까 봐. 연우야, 이왕 말이 나왔으니 얘기 좀 하자.”
아빠도 엊그제 알게 되었다고 했다. 휘타가 아빠를 찾았고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아랫사람인 아빠에게 과하게 예를 갖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더했단다.
“너와 혼인하고 싶다더구나. 되도록 빨리.”
짝짝짝.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엄마가 일어나 손뼉을 쳤다.
“그가 네게 청혼은 했느냐.”
“아직이요.”
청혼의 ‘ㅊ’도 안 꺼냈다.
“곧 할 생각인가 보군. 한데 정말 네가 유타 님을 좋아하는 게 맞아?”
“네.”
좋아하니 매일 만나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있지요.
차마 이 말은 꺼낼 수 없었다.
“그래. 잘됐네. 그럼 된 거지.”
“어우, 연우야. 엄마는 이제 눈 감아도 원이 없다.”
“거 참.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그만큼 기쁘다는 거죠.”
“당신 속보여.”
“어때요? 사위 삼고 싶어했던 사람이 내 딸을 좋아한다잖아요. 내 딸도 그 사람을 좋아하고.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급기야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람들은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호들갑스럽다 했다. 간혹 속물적인 구석이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누구보다도 엄마의 마음을 안다.
고상하고 기품있는 엄마가 아니어도 딸을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였다.
“엄마, 나 약속 있어. 나가봐야 하는데…….”
엄마에게 후다닥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
“어, 그래. 빨리 가. 어서 가!”
밖으로 나오자 하늘에서 하얀 가루가 쏟아진다.
지상의 눈과 닮았다 하여 설이라 부르는 가루였다.
지상에서 온 사람이 눈은 설보다 더 하얗고 차갑고, 따뜻한 곳에 있으면 녹는다 했다.
설은 따뜻한 지하계의 땅에 살포시 안착해 쌓이니 눈은 아니었다.
재와 다른 이 가루에 대해서 말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탐야가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난 지하계의 식물이 잘 자라도록 거름을 주는 거라고 했다.
연우가 비만큼 좋아하는 설.
설이 쌓인 풍경은 포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손을 내밀어 나풀거리며 내리는 설을 만졌다.
연우의 손에도, 어깨에도, 머리에도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 휘타가 다가와 연우의 머리에 얇은 천을 씌워줬다.
“죄송해요. 부모님과 얘기하느라 늦었어요.”
“늦지 않았습니다. 자.”
휘타가 연우 앞에 앉았다.
“업히세요.”
“괜찮다니까요.”
“항상 내가 양보했으니 오늘은 그대가 져주세요.”
얼마 전부터 휘타가 계속 업어주겠다고 했다. 매번 거절했는데 오늘은 연우가 업히기 전까지 일어서지 않을 기세였다.
하는 수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왜 자꾸 업어 준다고 그러세요. 다리가 불편한 것도 아니고 애도 아닌데.”
“꼭 다리가 불편해야 업어주는 겁니까. 애만 업어주라는 법도 없습니다. 난 그대의 발이 땅에 닿는 게 싫습니다.”
“왜요?”
“아까우니까. 닳아질까 걱정되거든.”
“발이 땅에 닿는다고 닳아지면 세상 사람들이 발이 없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우는 휘타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연우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이라서 다행이었다.
다른 여자에게 이렇게 해준다고 떠올리는 것조차 싫다.
어디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만큼 나를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휘타뿐이겠지.
행복했다.
두 사람이 주로 만나는 장소는 연우가 연주하러 다녔던 집이었다.
안에서 일하는 하인이 많지만, 집 안에 사람이 없다 싶을 정도로 연우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문을 열자마자 효조가 있었다.
휘타와 연우를 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어후. 꼴 보기 싫어. 적당히 해라.”
“나는 네 얼굴이 보기 싫거든.”
“도대체 둘이서 종일 뭐 하고 노는 거야. 나도 알려줘.”
“네가 알아서 뭐하게.”
“나도 해보게.”
“같이 놀 사람은 있고? 가서 잠이나 자.”
오전 시간이라 일을 끝내고 온 효조는 피곤할 텐데 가끔 이렇게 나타나곤 했다.
연우는 내려가서 인사하는 게 예의인 줄 알지만, 전혀 내려줄 뜻이 없는 휘타라 그의 등에 업힌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이렇게 해서 죄송해요. 쉬세요.”
휘타가 연우를 업은 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간 방문을 보던 효조.
에잇, 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문이 열리고 휘타의 얼굴이 쏙 나왔다.
“알려줄게.”
연우와 뭐 하고 노는지 알려준다는 말이었다.
휘타가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물고”
“응?”
“빨고.”
“야!”
“핥고.”
드르륵. 문이 닫혔다.
“와, 저 자식.”
멍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 효조가 중얼거렸다.
“좋겠네.”
씩, 웃고는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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