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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93화 (93/100)

<93화> 내가, 연우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2018.11.20.

휘타가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연우.

그 아기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아빠 빨리 오세요.’를 말한 것으로 모자라 저기서 아기의 아빠가 달려오고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연우가 웃으며 황급히 오해하고 말하려는 순간 조카가 오해의 쐐기를 박아버렸다.

“맘마, 맘마~”

얼핏 들으면 엄마로 들리는 발음이다.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저 오…….”

“음. 괜찮습니다.”

‘오해예요.’ 말하기 전에 휘타가 말을 가로막았다.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아가씨의 아이면 난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머. 이게 아닌데.

“그렇지만 혼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정말 혼인한 거 맞습니까.”

빨리 오해를 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휘타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연우가 웃음을 꾹 참으며 그를 보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남편은 못 받아줍니다.”

단호한 어투에 결국 연우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터진 웃음이 멈출 줄 몰랐다.

마침 형부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이 사람은 누구고?”

형부가 조카를 넘겨받아 안으며 묻자 휘타가 연우 앞에 섰다.

“초면에 죄송합니다. 제가 비도덕적 일은 안 하고 싶습니다만…… 도저히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는 남부럽지 않게 키워드리겠습니다. 물론 아무 때나 원하실 때 만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혹 아이를 보내기 싫으시면…….”

휘타는 진지했다. 더 두고 보기만 하는 건 못할 짓이라 연우가 얼른 둘 앞으로 나섰다.

“처제,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연우가 오해라고 말하기 전에 형부의 입에서 ‘처제’가 먼저 나왔다.

그때 휘타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내내 진지하고 심각하던 그의 얼굴이 꽃이 피는 것처럼 미소가 번져갔다.

상황 파악을 한 그가 즉시 공손한 자세로 형부에게 인사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휘타라고 합니다.”

대뜸 내미는 악수와 사과에 형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우를 봤다.

“형부, 제가 아는 분이세요. 아무래도 우리를 오해했나 봐요.”

“우리? 처제와 나를?”

어이없어하는 형부와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휘타 사이에 선 연우.

“진작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형부와 악수를 하고 난 휘타가 말했다.

“계속 말할 기회를 놓쳤어요. 미안해요.”

사실은 그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서 미적거렸다. 물론 이건 연우 혼자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녀는 어서 빨리 휘타를 달래주고자 서둘렀다.

“형부, 이제 저 가볼게요. 언니 시장 가서 금방 올 거라고 했어요.”

“응, 그래. 조심히 돌아가.”

하더니 연우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묻는다.

“저 남자 괜찮은 거지?”

“네.”

“처제한테 집착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또 웃음이 나온다.

그녀가 휘타에게 이만 가자고 하자 그가 형부에게 허리를 숙여 또 인사했다.

“형님,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아, 네네.”

연우가 휘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휘타가 자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을 보내서 단둘이 걷게 되었다.

연우는 조금 전 휘타를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가 그녀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은 했으나 그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땐 마음이 이렇게 변할 거라 짐작도 못 했는데.

그에게 마음이 흔들린 건 찰나였다.

성에서 만난 그의 뒷모습에 왜 그랬는지 이유를 찾아봤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집까지 바래다줄 때마다 나누던 대화와 그가 소개해 준 일자리.

덕분에 그토록 갖고 싶었던 파란 화실의 목걸이를 살 수 있었고 그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서 좋았다.

짧은 시간 그를 만났지만, 앞으로 이보다 더 잘 맞는 남자를 만나길 어려울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심지어 음식 취향까지 맞지 않는가.

연우는 다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너 좋아하는 거 맞네.’

정말 맞는 걸까.

보기에는 그렇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도 좋아하기에 벌어질 수 있을 오해였다.

망설이던 연우가 걸음을 멈췄다.

휘타도 멈춘다.

조금은 느리게 느껴질 연우의 걸음 속도를 맞춰주는 사람.

“저 좋아하시는 거 맞나요?”

살랑. 바람이 불어와 휘타의 긴 머리카락이 연우의 뺨에 닿았다.

부드러운 그의 미소처럼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몰랐다는 듯이 말하면 상처받습니다.”

“말을 해줘야 알죠.”

“행동으로 충분히 말한 듯한데? 꼭 말로 해야 하는 거였습니까.”

연우의 머리카락도 휘타의 뺨을 건드렸다.

그가 날리는 연우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았다.

“말을 해줘야 확신을 하죠. 요즘 좋아하는 척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난 아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언제 그런 말 한 적 있느냐고 하면서요.”

“날 그렇게 치졸한 사람으로 봤습니까.”

누가 그렇대요. 당신의 마음을 말해달라는 뜻이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때론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도 필요해요. 특히 처음인 우리의 경우에는 더욱.”

“내가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지 않나.”

거짓말. 그는 부끄러워할 사람이 아니었다.

“부끄러워 말조차 못할 감정이라면 짝사랑만 해야죠.”

휘타가 잡고 있던 연우의 머리카락을 놓고 어깨를 잡았다.

“난 그럴 생각 전혀 없습니다. 짝사랑만 할 생각이었으면 아가씨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지.”

그가 허리를 숙여 연우와 키 높이를 맞췄다.

“그럼 이제부터 말할 테니 잘 들으십시오. 내가, 연우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또박또박 정확하게 끊어 말했다.

“아주, 많이.”

아주 많이. 기대하지 않았던 말.

아주 많이란다. 연우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니 보지 않았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보지 않았을 때부터요?”

“그만큼 많이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제 아가씨 차례입니다. 아가씨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연우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을 듣고, 또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떨렸지만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성에서 그의 뒷모습을 봤던 그날처럼.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당신이 좋았나 보다.

이런저런 이유 없이 무조건, 그냥 당신에게 반했던 거다.

“당신을.”

스스로 듣기에도 떨림이 느껴졌으나 멈추지 않았다

“좋아해요.”

방긋 웃은 휘타가 허리를 세우고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로 확실히 했으니 진도도 확실하게 나가야지요.”

연우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손을 절대 놓을 수 없겠구나.

*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연우는 조심스러웠다.

휘타에 대해 얘기하면 실망할 엄마 때문에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다 결국 있는 그대로 말하는 쪽을 택했다.

“아빠, 엄마.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응? 좋아하는 사람?”

역시. 엄마가 먼저 되물었다.

아빠는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듣고만 있고.

“얼마 전만 해도 그런 말 없었잖니.”

“최근에 생겼어요.”

“내가 널 몰라? 최근이라고 해봤자 며칠 안 되는 거 아니니?”

딸에 대해 빠삭한 엄마라 그런지 날짜 계산도 빨랐다.

“맞아요. 그 며칠 새에 생겼어요.”

“너 성에 들어가야 하는 약속날짜 다시 잡혔어.”

“벌써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취소하는 건 어떨까 고민하던 연우.

지속적으로 만나길 원했던 상대니 전해 듣는 것보다는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 좋겠다.

“성에 갈게요. 가서 그분께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아니, 너는 언제 그런 일을…….”

엄마가 아쉬워했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이라 연우도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이해했다.

“뭐 어쩌겠어. 연우가 그렇다는데.”

이 만남에 시큰둥했던 아빠도 어쩐지 실망한 기색이 보였다.

“그나저나 유타 님께서 실망을 크게 하시겠네.”

유타. 지배자의 아들 이름이 유타였구나.

지배자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아들은 조용히 지냈다. 연우도 관심이 없었고.

해서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이름이 유타였나 보다.

휘타 때문인가? 이름이 익숙하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

평범하게 가려고 했지만 엄마의 성화 때문에 약속이 깨졌던 날 입었던 그대로 차려입었다.

아직도 약간의 기대를 거는 듯한 엄마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실망이 크겠거니 하고 의견을 따랐다.

성으로 들어온 연우는 정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유타를 기다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차가 식어갈 때쯤 그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는 유타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하얀 가면. 기이한 느낌을 줬으나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얼굴에 가면은 왜 쓰신 거예요?”

“볼 한가운데에 뾰루지가 나서.”

뾰루지? 뾰루지 때문에 가면을 쓰고 나오다니.

가면 쓰는 게 더 불편할 거 같은데 유타 개인의 선택이니 달리 뭐라고 하지 않았다.

“좀 걷는 건 어떤가. 보시다시피 뭘 마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이지.”

그렇게 보여요, 라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유타의 목소리를 계속 들을수록 들어본 적이 있는 기분이었다.

휘타랑 이름이 비슷하여 그의 목소리와 착각하는 건가 싶었는데 휘타는 아니었다.

누구지. 떠오를 거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지난번에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해. 한데 나 지금 그대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하는 듯하군.”

“바쁘신 분이잖아요. 일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번 헛걸음한 탓에 다시 휘타를 만날 수 있었으니 도리어 고마웠다.

유타가 걷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키가 커서 보폭이 연우보다 훨씬 넓을 텐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언제 말을 꺼내는 게 좋으려나.

일찍 얘기하는 편이 좋을 거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나자마자 꺼내는 것도 실례일 거 같아 정하지 못했다.

성에 오기 전에는 바로 말하자 다짐했는데 막상 유타를 만나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은 지금 당장 말하기보다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유타가 어느 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족히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심어졌다.

눈으로 대충 세어 보니 다섯 그루였다.

“이게 복숭아나무라는 것이지.”

“그게 뭔가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과일인데 모르나?”

“네. 성에서만 키우는 귀한 과일인가 봐요?”

“아니. 그건 아니고. 나중에 열매를 보면 그대도 알걸.”

나중에 유타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이 말할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그대의 수호령이 특별하다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차, 실수했다.

특별하지 않다고, 여느 수호령과 비슷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대가 아주 어렸을 적에 만난 적이 있는데.”

“그럼 그때 제가 수호령으로 변했었나요?”

그가 검지로 연우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찌나 귀엽고 예쁘던지. 처음엔 그저 하얀 고양이인 줄 알았지 뭐야.”

연우의 기억에 없었으나 유타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저 하얀 고양이. 어릴 적엔 다들 그렇게 알았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신기했어. 지하계에 그렇게 특별한 수호령이 있을 줄이야. 나만 알고 있으니 걱정하진 말고.”

가면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면 속의 눈도 웃고 있었다.

“그대의 수호령은 정말 특별해. 반짝반짝 빛이 나지.”

연우는 문득 어색했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다고만 느끼며 유타와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가 연우의 수호령이 특별하다 말한다.

변종이라고만 생각했던 수호령이 유타의 한마디에 특별해졌다.

“…… 감사합니다.”

특별하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래. 귀엽고 예쁘다고도 해줬다. 별거 아닌데 마음이 따뜻해진다.

게다가 숨기고 살아야 했던 연우의 사정까지 짐작하고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주고 있었단다.

만약 휘타를 먼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남자에게 마음을 열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지만.

연우는 오늘 이 자리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오늘은 제가 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바빴나?”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리 말하니 긴장이 되네.”

유타가 꽃에 내려앉은 재를 털어냈다.

섬세하게 만지는 손길을 보며 어떻게 말하는 게 그의 마음을 상하게 않을지 고민했다.

이미 집에서 수도 없이 고민하고 연습까지 했지만 쉽지 않았다.

행여 그의 마음이 상할까 걱정이었고, 나아가서 상한 마음으로 인해 아빠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이었다.

그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은 모르거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가 가만히 연우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유타 님과의 만남을 계속 가질 수 없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도 꽤 괜찮은 남자라 놓치면 후회할 텐데?”

“괜찮은 분처럼 생각되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동시에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눈과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좋아하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애정을 쏟고, 집중하는 것이 좋아요. 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재주가 없거든요.”

연우보다 훨씬 지체 높은 사람 앞이라 말하기 어려울 줄 알았다. 아니 어려웠다.

손에 밴 땀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동시에 만나보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내가 실례를 했군. 알겠어. 그대의 마음을 내가 억지로 할 수 없는 거지.”

유타가 예상보다 흔쾌히 받아들여 어리둥절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지금 굉장히 우울한데 환하게 웃지 마.”

“죄송해요.”

“뭘 또 죄송할 것까지야. 그만 가봐. 더 붙잡고 있는 것도 실례지. 난 이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흥겨운 가락이나 들으러 가야겠어.”

연우에게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유타는 연우의 인사도 받지 않고 돌아섰다.

느릿하게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디서 들어본 음성인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다.

기억이 날 거 같은데.

아! 떠올랐다.

장막 뒤의 남자. 연우의 금(琴) 연주를 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휘타가 모시는 주인.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는 연우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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