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아이가 있었습니까?
2018.11.16.
잠깐 본 효조의 인상은 유쾌했다.
흥얼흥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휘타가 노려봤지만, 싫어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친구분이세요?”
“친구라고 하기에는 멀고, 지인이라고 하기에는 가깝고. 애매한 관계죠.”
효조는 휘타를 친근하게 바라보던데 휘타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이제 돌아갑시다. 더 늦어지면 움직이기 힘듭니다.”
곧 사혼이 들어오는 시간이다.
“저 혼자 가도 돼요.”
휘타가 연우를 바래다주고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사혼이 들어왔을 시간이 되기에 거절했다.
“내가 알아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 마음이 불편해요. 폐 끼치기 싫어요.”
솔직히 휘타가 바래다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곳에서 집까지.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휘타와 보내는 시간을 내심 기다렸기 때문에 아쉽기도 했다.
그렇다고 휘타더러 위험을 감수하라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는 내가 참으면 된다.
휘타가 더 말하려고 하자 연우가 먼저 말했다.
“내일도 있잖아요. 내일 바래다주세요. 잘 먹었으니 운동 삼아 빠른 걸음으로 갈게요.”
완곡한 거절에 할 말이 없어졌는지 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문 앞까지만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약간 취기가 돌았다.
걷기 불편하거나 속이 울렁이지 않고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대문까지 가는 동안 손님들이 휘타와 함께 걷는 연우를 힐끔거렸다.
아까 술 마실 때 옆에 있던 남자들도 귀한 댁 자제 같은 냄새를 풍기더니 손님들 대부분이 그런 듯했다.
어쩐 일인지 곁눈질로 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대놓고 연우를 직시하지 못했다.
저들끼리 속닥거리다가도 금세 아닌 척 술을 마셨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떠들썩한 잔치지만 누군가에게 통제를 당하는 듯했다.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대체 휘타의 주인은 누구고 뭘 하는 사람일까.
대놓고 물어볼 수 없어 다른 질문을 하였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주인께서 기분이 아주 좋은 날?”
“기분 좋으시면 잔치를 하세요?”
“아뇨. 오늘이 처음입니다.”
처음이라면 아주 기분 좋은 정도가 아니라 날아갈 정도인가 보다.
장막 너머로 대화했을 땐 대단히 차분하고 차가운 듯했는데.
그런 사람이 무슨 일로 기분이 좋은 건지도 궁금했지만 쓸데없는 관심 같아서 생각을 지웠다.
천천히 걸었는데도 어느새 대문 앞이었다.
“내일 또 만나요.”
‘안녕히 계세요.’를 싫어하는 휘타를 위해 하는 인사였다.
옅게 미소를 지은 그가 하늘을 향해 길게 숨을 뱉었다.
“아쉬운 건가.”
연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내 속마음을 어떻게 안 거야. 눈에 보일 정도로 티가 났던 건가?
“그냥 보내기가 싫네.”
“네에?”
“아가씨를 이리 보내기가 싫다고 했습니다.”
연우의 마음을 들킨 게 아니라 그가 제 마음을 비친 것이다.
비죽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당황스러운 한편 기분이 좋았으나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연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들어가세요. 전 이만.”
“뭐야. 나만 보내기 싫은 겁니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저도 싫어요, 라고 말하려다 안에서 얼굴을 내밀고 이쪽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남에게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놀란 연우가 그대로 돌아 내달렸다.
“내일 봬요!”
“조심히 가십시오.”
등 뒤로 휘타의 외침이 들렸지만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해서 그의 표정이 굳어져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지 못했다.
*
“어떡해.”
걸음을 멈춘 연우가 제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심장이 쿵쿵 난리가 났다.
연우는 그제야 휘타를 향한 제 마음의 변화를 눈치챘다.
그가 좋아지고 있었다.
휘타도 그녀를 좋아하는 거 같았다.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가 분명히 말했다.
그냥 보내기가 싫다고. 자기만 그러는 거냐고.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온몸이 간질거리고 심장이 너무 뛰어대서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날 좋아하는 거 맞겠지?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니겠지?
착각이 아님을 확인받고 싶은 연우가 사촌 언니인 다흔네로 발길을 옮겼다.
마음이 급해 달리는데.
큰 덩치를 한 남자가 연우를 가로막았다.
“이게 누구신가.”
“누구세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를 무시하고 옆으로 가려는데 또 막는다.
“왜 이래요?”
“내가 기억나지 않는가 봐?”
“그러니까 누구……!”
기억났다. 시장에서 연우가 잘못 불러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 뻔했던 남자.
연우의 표정을 본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기억난 거야. 그렇지?”
“갈 길 가세요.”
하지만 그날처럼 남자가 연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후회할 일 만들지 마시죠.”
연우의 경고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느낌상 연우를 쉬이 놔줄 거 같지 않았다.
곧 사혼이 들어올 시간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민가가 있지도 않았다.
이 남자 때문에 휘타를 만나게 됐다. 그래서 봐주려고 했건만.
“이게 어디서!”
하며 남자가 두툼한 손을 위로 올렸다.
연우는 움찔하지 않고 수호령을 불렀다.
그녀의 몸에서 은빛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수호령으로 변하려는 순간.
형태가 불분명한 검은 물체가 날아와 남자를 끌고 갔다.
“으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남자가 사라졌다.
흔적도 없어졌지만 연우는 그 검은 물체가 무엇인지 알 듯했다.
사혼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집이든 어디든 한시라도 빨리 몸을 숨겨야 했다.
연우가 방향을 틀어 달리는데 귀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울음 같기도 했고, 웃음 같기도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어도 사혼이 내는 소리란 건 알겠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뒷골이 당겼지만 멈출 수 없어 귀를 막고 달렸다.
달리는 연우 옆으로 검은 물체가 보였다.
수호령을 불러야 하나. 수호령이 사혼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하필 도망간 곳이 막다른 골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벽에 붙은 그녀를 향해 검은 물체가 다가왔다.
얼굴이 없지만 눈과 입이 있는 사혼은 끔찍했다.
어쩔 수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해도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수호령뿐이었다.
또 한 번 수호령을 부르려는 그때.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사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어느 한 공간으로 사라졌다.
어,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모자라 이탈까지 하다니.”
효조였다. 갑자기 등장한 그는 커다란 칼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직감한 연우가 놀란 눈을 깜박였다.
오늘 무슨 날인가. 연속해서 놀랄 일투성이였다.
연우를 보지 못했는지 효조가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라?”
드디어 벽에 기대어 있던 연우를 발견하고 히죽 웃는다.
“사…… 사신이었어요?”
“보시다시피요.”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 한 번씩 이른 시간에 들어올 때가 있어 미리미리 나와 있는데 하마터면 이것들이 일을 칠 뻔했습니다.”
사신이 누구인지 늘 궁금하던 차였다.
만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굳이 찾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외형이 떠올랐다.
무섭게 생겼다더니 틀린 말이었다.
휘타의 주인집에서 볼 때는 지체 높은 집안의 사람 같더니 또 지금은 장난기가 넘친 얼굴을 했다.
다만 그가 들고 있는 칼은 무서웠다. 무게가 꽤 나갈 듯한 칼을 가볍게 들었다.
“덕분에 일을 면했어요.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집으로 가야겠다.
연우가 효조가 있는 쪽으로 가자 그가 뒤로 물러났다.
“제게서 나쁜 냄새가 나서요. 아가씨의 코를 지켜드리기 위함입니다.”
“냄새요?”
코를 킁킁거려봤다.
“나기는 하지만 참을 만해요.”
“참을 만하다고요? 다들 구역질하던데.”
물론 결코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아까 효조와 있을 때는 나지 않던 냄새가 지금은 왜 나는지.
“정말 참을 만해요.”
“이 엄청난 냄새가 참을 만하다면 필시 아가씨 코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의원에게 가보세요.”
“제 코는 건강해요.”
“에헤이~ 아니라니까.”
푸흡! 연우가 웃음 터뜨렸다.
여기서 코에 문제가 있느니 없느니 논하고 있는 것이 웃겼다.
효조도 연우를 따라서 호탕하게 웃었다.
“나중에 의원에게 가볼게요.”
“집까지 함께 가는 게 좋겠습니다.”
신세를 지기 싫지만 조금 전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부탁할게요.”
“가시죠.”
효조가 허리를 숙이며 손으로 반원으로 그렸다. 연우에게 앞장서라는 신호였다.
다시 한 번 느낀다. 효조는 유쾌한 사람이다.
*
다음 날, 다흔의 집.
다흔에게 휘타가 했던 행동과 말을 설명해주자 그녀가 아기를 어르며 말했다.
“그 남자가 너 좋아하는 거 맞네.”
“정말 그럴까?”
턱을 괸 연우가 얼굴을 좌우로 움직였다.
“널 보내기 싫다고 했다면서. 오밤중에 사내가 싫다고 하면 이유는 딱 한 가지지.”
“좋아하니까?”
“잡아먹고 싶어서.”
다흔이 ‘어흥!’ 소리를 내며 깔깔깔 웃었다.
“언니!”
“너 설마 잡아먹는다는 뜻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지?”
나이가 몇인데 그걸 모를까.
연우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뜨거운 얼굴을 식혔다.
“일자리 소개해주고, 직접 집까지 바래다주는데 좋아하니 가능한 거지. 그 주인이란 사람이 시켰다고 가정했을 때 일이니까 그런다 할 수도 있지만 보내기 싫다 했으니 좋아하는 거 맞아. 근데 연우야, 이모가 말하던 그 사람은 만났니?”
“누구?”
“누구긴 누구야. 성에 사는 남자 말이야.”
“맞다.”
지배자의 아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약속이 깨지고 다시 연락이 없어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휘타 때문에 미처 떠올릴 겨를이 없었는지도.
“마음에 둔 남자가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아니지 않아?”
“그렇지.”
“그게 일명 양다리라는 거야. 나도 양다리는 안 걸쳤어.”
형부를 만나 혼인하기 전, 귀여운 외모에 애교가 많았던 다흔은 동네 사내들을 많이 울렸다.
“응.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
연우는 집에 가는 즉시 엄마한테 확실한 거절의 뜻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참, 있잖아. 네가 일한다는 그 집.”
“그 집이 왜?”
“내가 좀 알아봤어.”
“그 집에 대해서 왜? 이상한 곳 아니야.”
“아니, 내가 예전에 얼핏 듣기로는 수백 년 동안 비었다고 들었거든. 근데 네가 거기서 일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 물어봤지.”
수백 년 동안 빈집이라.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오래된 집이란 건 알았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빈집이 그렇게 튼튼할 리가 없었다.
꾸준히 관리하지 않은 이상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었으리라.
“암튼 그 집에 사람이 드나들고 시끌벅적해진 건 최근 일이래.”
다흔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언니. 거기 일하는 사람도 많고, 주인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야. 어제는 크게 잔치도 벌였는걸.”
“그래? 네가 괜찮다면 다행인데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항상 조심해.”
“응. 그럴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상한 점은 떠올리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 비어 있던 집.
집안에서 관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요새 소란스러워진 건 갑자기 쓸 일이 생겨서 그럴 테고.
연우는 크게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다흔이 너무 예민한 거였다.
“시장 좀 다녀올 테니까 잠깐 아기 좀 봐줘. 네 형부 곧 오니까 그때 가도 되고.”
다흔의 부탁으로 조카를 안았다.
자주 본 적이 있는 터라 조카는 연우의 품에서도 방실방실 잘 웃었다.
말문이 트이기 시작해 불분명한 발음이지만 엄마나 아빠 같은 간단한 단어를 쏟아낸다.
“맘마.”
“응. 엄마 금방 올 거야.”
작은 주먹이 연우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참으로 예뻤다.
“우리 아빠 기다리러 갈까?”
아기를 안고 있던 연우가 밖으로 나왔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인사를 했다.
조카와 눈을 맞추고 통하지 않는 대화를 나눈 지 얼마나 됐을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지나간 후, 저 멀리서 형부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다! 아빠 빨리 오세요~”
연우가 조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형부도 연우와 제 딸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간 무리가 멈췄고, 그 속에서 남자가 나와 연우에게 말했다.
“아이가…… 있었습니까?”
휘타가 왜 여기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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