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별이 싫어요.
2018.11.13.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편인 연우가 손바닥에 차오른 땀을 치마에 닦았다.
한 공간을 둘로 나눈 장막이 그 안에 보이지 않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는 말도 한몫했다.
상대는 연우가 누군지 알 텐데 만약 의도치 않게 실수해서 아빠에게 해가 갈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연우가 말라버린 제 입술을 핥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릴 적, 부모님 몰래 기생에게 아주 잠깐 배웠다.
기생은 배운 시간에 비해 나날이 급속도로 실력이 늘어가는 연우에게 더는 가르칠 게 없다 했다.
전생에 기생이었느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남들 앞에서 연주해본 적이 많지 않았기에 얼마나 잘 켜는지 모르겠지만, 기생이 칭찬했으니 쫓겨날 정도는 아니리라.
마음을 차분히 한 뒤, 손이 움직이는 대로 금을 연주했다.
머릿속에 한가득하였던 걱정이 점차 사라졌다. 제 귀에도 듣기 좋은 가락이 이어진다.
꽤 길었던 연주가 끝나고 장막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꿀꺽. 연우가 다시 올라오는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계속되는 정적에 먼저 말을 꺼내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작은 트집이라도 잡히면 안 된다.
“제법 하는군.”
상대의 말에 연우는 금을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내 휘타에게 말해 둘 터이니 매일 와서 연주하고 가거라. 네 연주에 대한 값은 섭섭지 않게 치러줄 것이니.”
“감사합니다.”
“나가보거라.”
방에서 나온 연우가 밖으로 향하며 제 어깨를 주물렀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긴장해서인지 결린다.
도대체 누구일까.
휘타도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정도면 짐작하기 힘든 위치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긴 상관없다. 연우는 연주만 하고 돈을 받으면 되니까.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휘타가 연우에게 다가왔다.
“주인님께서 대단히 만족하셨습니다.”
“다행이에요.”
“여기.”
그가 건넨 묵직한 주머니가 연우의 손에 들리자 아래로 축 처졌다.
“설마 오늘 연주한 값이에요?”
섭섭지 않게 준다고는 했지만 이건 많아도 너무 많다.
세어보지 않았으나 화실로 만든 목걸이를 사고도 남을 액수일 듯했다.
“열흘 치입니다.”
“그래도 많은데.”
“싫으면 반 떼서 날 주시든가.”
얼른 뒤로 주머니를 감추면서도 소개비를 줘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런 연우의 속을 눈치챘는지 휘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소개한 값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당히 요구하는 그가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반을 주는 건 좀…….
아니지. 휘타가 소개하지 않았다면 절대 손에 쥘 수 없는 돈이니 반을 주는 것이 맞았다.
“반 드리면 되죠?”
연우가 바로 주머니를 열려는 순간.
휘타가 큰소리로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정말 반을 주려고 하는 겁니까?”
“반을 원하셨잖아요.”
“됐습니다. 전 한 끼 식사면 됩니다. 오늘 저녁 어떻습니까.”
오늘 저녁. 먼 하늘을 봤다.
저녁 먹고 집에 가면 너무 늦으려나.
이 소일거리를 하는 동안 다흔의 집에서 조카를 봐주기로 했다는 핑계를 대긴 했는데.
거기서 저녁 먹은 줄로 아시겠지?
“그래요. 오늘 먹죠.”
연우의 답에 휘타가 앞장섰다.
*
꿀꺽. 아까 금을 연주할 때와 달리 이번엔 맛있는 음식 때문에 침이 넘어갔다.
휘타가 데리고 온 곳인데 그의 음식 취향이 연우와 맞았다.
“내가 기름진 음식을 좋아해서 말입니다. 아가씨는 여기가 괜찮습니까”
정신 차리지 않았다면 ‘저도 좋아해요!’라고 외칠 뻔했다.
“괜찮아요.”
가까스로 대답한 연우의 눈이 음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듭시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젓가락으로 냉큼 집어넣었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식감 뒤에 찾아오는 맛.
연우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움직였는지.
정신을 차리고 있자 다짐했건만 어느새 놓아버렸다.
놓아버린 정신이 다시 돌아온 건 연우의 접시 위로 그의 젓가락이 보일 때였다.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연우의 접시에 얹어줬다.
“내가 좋아해서 오자 한 건데 어째 아가씨가 더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연우가 들킨 걸 인정하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잘 먹으니 나도 좋군요.”
휘타가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연우는 입속에 있던 음식을 씹어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잘 먹는데 그가 저리 흡족해하는 건 뭐야.
의아하게 생각하는 연우의 접시에 그가 또 음식을 줬다.
“좀 드세요.”
“많이 먹었습니다.”
좋아하는 거라더니 그는 별로 먹지 않고 거의 연우에게 먹었다.
“한데 어제 성에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나 봅니다. 오늘과 차림도 다른 듯하고.”
오늘과 어제 입은 옷은 완전히 다르니 휘타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누굴 만나기로 했어요.”
“누군지 물어봐도 됩니까.”
누군지 밝히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 혼인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요.”
“혼인하면 하는 거지 혼인할지도 모르는 건 또 뭡니까.”
“음. 부모님께서 만나보라고 성화셔서 보기로 한 거라…… 만나보고 좋아지면 혼인하는 거지만 아니면 안 할 거라서요.”
“상대가 거절해도 되는 사람입니까.”
상대라.
그는 지배자의 아들.
지하계의 다음 지배가 될 사람.
이 세계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지만 싫다는 여자와 강제로 혼인하지는 않겠지.
성품이 좋다 하였으니 그런 억지는 부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
“아무리 거절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더라도 싫은 사람과 혼인할 수는 없잖아요. 이해해주겠죠.”
“그렇군요. 이거 더 먹어요.”
어쩐지 휘타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녁을 먹고 헤어지려는데 휘타가 바래다주겠다며 따라왔다.
멀뚱히 걷기만 할 수 없어 연우가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음식 취향이 맞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대화가 잘 통했다.
대부분 휘타가 듣고 연우가 말하는 식이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또 그가 특별히 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닌 듯한데 가끔 말하면 집중하게 된다.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가?
“호신술을 배워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뜸 휘타가 물었다.
“호신술은 왜요?”
아하. 연우는 그에게 묻고 나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이 됐다.
아마 시장에서의 일 때문이리라.
‘제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도록 하시고.’
당시에는 비아냥거린다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연우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알아서 잘 지킬 수 있어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뱉지 않았다.
휘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자신의 수호령에 대해 말할 것 같아서 미리 차단했다.
그냥 제 몸 못 지키는 여자가 되련다.
“그래야겠어요.”
“내가 알려줄까요?”
이런 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반가웠다.
물론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알려주신다면…… 저야…….”
냉큼 그러자 할 수 없어서 뜸을 들였다.
또 가슴이 뛴다.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연우는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 같다. 왜지. 그와 보낼 시간이 기대됐다.
걷다 보니 어느덧 연우의 집 근처.
휘타와 함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이제는 혼자 가도 돼요.”
“이왕 온 거 문 앞까지 가죠.”
“아…… 말씀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엄마나 아빠에게 들킬 수도 있어 거절했다.
두 분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휘타를 본다면.
아아, 복잡해질 상황이 그려져 연우가 황급히 그를 보냈다.
*
휘타의 주인에게 금을 켜준 지 나흘째가 되는 날.
집에 들어선 연우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벌렸다.
늘 조용하던 곳이었다. 사람이 사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잠잠하던 집이었다.
그런 곳이 떠들썩했다.
분주하게 오가는 하인들.
마당 곳곳에 펼쳐진 천막.
그 아래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시는 손님들.
음식 냄새가 진동했고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와 다른 풍경에 연우는 어리둥절한 채 금을 연주해야 하는 방으로 갔다.
휘타의 주인은 밖에서 손님을 맞을 법도 한데, 심복인 휘타가 대신하는지 오늘도 연우를 기다렸다.
연우가 제 할 일을 하려고 금을 다리 위에 올렸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장막 너머로 음성이 들려왔다.
“밖이 시끄럽지?”
“네. 그렇지만 이런 소음도 즐깁니다. 흥겨워져서요.”
“흥겨운 걸 좋아하나?”
“네.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그럼 뭘 싫어하지?”
첫날 몇 번의 대화를 한 뒤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인사를 하고 금을 켜고. 연우가 나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연우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
“아픈 거요. 몸이든 마음이든 아픈 걸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시간이 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싫어하나 보군.”
세월이 흐른다는 것.
싫어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시간이 흐른다.
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야 했다.
잡고 싶다 하여 잡아둘 수 없고 더 빨리 보내고 싶다 하여 보낼 수 없는 시간.
오직 신만이 통제할 수 있는 세월의 흐름이 싫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세월의 흐름 뒤에 찾아오는 이별이 싫다.
“정확하게는 이별이 싫어요.”
“…… 이별은 나도 싫어해.”
대화가 중단되었다.
이대로 끝이 난 건지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 건지 몰라 연우는 다시 장막 너머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지금까지의 삶이 흥겨웠나?”
“네.”
서슴없이 답했다.
모두 좋았다. 친구들과 싸운 적이 있고, 부모님께 혼난 적도 있다.
물론 어릴 때의 일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은 흥겨웠다.
즐거웠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수호령을 감추는 것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 중 하나였고.
“그대의 삶이 흥겨웠다니 나도 흥겨운 기분이 드는군.”
왜 내 삶이 저 사람의 기분을 흥겹게 하는지.
당황한 연우가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장막 너머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작해라.”
집 안에 흐르는 분위기 때문일까.
연우의 기분 때문일까.
그녀의 손이 금 위에서 통통 튀었다. 연주도 그만큼 흥겨웠다.
*
연주를 끝내고 나온 연우가 마당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일이 끝나면 항상 휘타가 기다리고 있다가 바래다줬는데 오늘은 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이 바쁜 건가.
휘타를 찾아다니는 연우를 하녀가 잡았다.
“아가씨도 드시고 가세요.”
“전 괜찮은데…… 혹시 휘타 님 봤어요?”
이 집에서 두 번째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 존칭을 붙여 불러야 했다.
“손님 접대 중이세요.”
역시 그랬구나.
“맛있는 거 많이 준비했으니 그냥 가시지 말고 드세요.”
먹고 있으면 휘타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연우는 못 이기는 척 하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런데 하녀가 앉혀준 자리가 하필 낯선 남자들 틈이었다.
멀끔하게 생긴 남자들 사이에서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이 와중에도 연우는 목을 빼고 혹시 휘타가 지나가지 않는지 살폈다.
“한 잔 받으시지요.”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술병을 들어 올리자 얼떨결에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받았다.
고개를 돌리고 마신 후.
이번에는 남자가 연우에게 제 잔을 내밀었다.
“저도 따라주셔야지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병을 잡아 따라줬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집 주인과 어찌 되는 사이십니까.”
“이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 일! 어떤?”
“금을 연주해요.”
“어쩐지. 안 하던 일을 벌인다 싶었네.”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쯧쯧 혀를 찼다.
“암튼 금 연주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해. 중독 수준이라니까요.”
금(琴) 연주 열흘에 그 정도의 돈을 쓰는 것을 보면 중독이라는 말도 맞을 듯하다.
연우가 잔에 남아 있는 술을 홀짝였다.
“그가 여기로 사람을 불러 연주를 시킨 적은 없는 거로 아는데 아주 잘 켜시나 봅니다.”
휘타의 주인에 대해서 잘 아는 어투였다.
갑자기 궁금증이 증폭한다.
“여기로 오라 한 적이 없다는 말씀은…….”
연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입에서 술술 나왔다.
“금 연주를 밖에서 듣고만 다녔어요. 여기는 아주 소중히 여기는 집이라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게 하지 않던 사람이었거든요. 난데없이 잔치를 벌이길래 뭔 일인가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남자의 말에 따르면 이 집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고, 잔치를 잘 열지도 않는데 연우의 연주 때문에 주인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건가?
제대로 이해했나.
남자가 비워진 연우의 잔을 힐끔 보고 다시 술병을 내밀었다.
연우는 또 받았고.
“아가씨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저는 연…….”
“너 이제 일 보러 가야 할 시간이다.”
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연우가 얼굴을 들었다.
기다리던 휘타였다. 급하게 뛰어온 모양인지 그가 살짝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알아, 인마.”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급해서 먼저 갑니다.”
연우에게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처음에 휘타도 저랬다.
동일한 행동을 하는 두 사람은 친구 같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이름이?”
“연우예요.”
남자가 연우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연우. 예쁜 이름이군요. 나는…….”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효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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