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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87화 (87/100)

<87화> 이게 마지막일 거야.

2018.10.30.

의자에 기대앉아 있는 효조.

장공이 머물렀던 백륜당의 주인이 바뀌었고, 바뀐 주인인 효조도 이제 자리를 물려줘야 할 때가 되었다.

휘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효조였지만, 얼굴에 병색이 짙었다.

연우는 그간 휘타를 통해 효조가 많이 아프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 몰랐다.

한때 연우를 가장 두렵게 했던 존재가 이리 변한 모습을 보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의자에 기대고 있던 효조가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그것도 힘든지 그의 입에서 연신 끙끙대는 소리가 나왔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던 효조에게도 이런 날이 온다.

이래서 시간이라는 게 슬픈 거구나.

사람은 절대 거스를 수 없는 것.

효조도 다르지 않았다.

그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맞은 그가 측은했다.

효조가 멀찍이 서 있는 연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곳에 오며 절대 일정 거리 이상은 효조와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소리를 내는 것도 힘들어하는 그를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섰다.

“오랜만이네.”

효조의 말에 연우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연우를 마주한 그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써서 연우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다 그녀를 위한 일이 아닐 듯해 관뒀다.

연우는 자신이 사신임을 감추지 않았다.

사신의 힘을 노리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알아낼 것이라며 차라리 공개하는 편이 덜 위험하다는 뜻을 알려왔다.

그런 연유로 성안에서 보호받기를 거부했고 일이 있을 땐 연우가 아닌 휘타가 대신 오곤 하였다.

그래서 서로 마주한 지 정말 오랜만이었다.

효조가 연우를 보지 않기 위해 참아왔던 시간은 괴로웠다.

제 잘못임을 알면서도 연우를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

사람의 본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마음으로 연우를 찾아간 적이 여러 번이었고, 억지로 그녀를 납치해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연우가 당했던 고통이 떠올라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돌이켜 보니 참 잘했다 싶다.

연우를 향한 사랑, 미움, 원망, 기대.

몇 년 전부터 그 마음들이 모두 뒤엉켜 그리움만 남았다.

그리고 고마움도.

“여전히 곱구나.”

메마른 눈빛으로 연우가 답했다.

“절 왜 찾으신 건가요.”

어제 본 것처럼 여전히 곱고, 여전히 차갑다.

“한번 봤으면 해서.”

한없이 냉랭할 것만 같았던 연우의 눈빛이 변했으나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있고.”

“하세요.”

효조는 그리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잠 못 이룬 밤이 얼마였던가.

눈물로 지새운 밤이 얼마였던가.

미친 사람처럼 헤맨 밤이 얼마였던가.

내게는 이리도 아팠던 마음이 너에게는 끔찍한 집착이란 것을 알기에 매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어떤 마음인지 말할 수가 없다.

너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마음에 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람.

해서 눈을 감을 때까지 혼자만 알고 삼켜야 하는 사람.

그래도 보고 싶었다.

한 번만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눴으면 했다.

그날을 계속 미뤄왔고 오늘이 되었다.

연우를 보기로 작정한 며칠 전부터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두려움보다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그녀를 앞에 두고 떨리는 가슴을 다른 말로 대신한다.

“고마웠다.”

연우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너 때문에, 뒤늦게나마 내가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됐거든.”

그전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 않았다.

아버지인 장공의 목숨을 제 손으로 해하지 않았고, 더불어 다른 사람의 목숨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효조가 착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연우에게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디서든 그녀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심했다.

사실 마음이 변한 것도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서둘러 그 자리에 올라가서 무엇하리 싶었다. 사람을 상대로 화를 푼다고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고.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잊으려 노력하고 대신 안쓰럽게 여겼다.

초상화만 보면 주체할 수 없이 들끓었던 무언가가 어느 날부터 이해로 바뀌었다.

당신이라고 좋았겠습니까. 어머니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지요.

초상화를 앞에 두고 명복을 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연우가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친놈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살며 나이를 먹었다면 그것에 맞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연우로 인해 깨달았고 배웠다.

효조의 삶 자체가 변했다.

그 고마움을 연우에게 표현하고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고 짧게 답한다.

끝까지 차갑구나, 넌.

그런데 웃음이 나왔다.

일관성 있는 태도에 어떤 미련도 갖지 않게 되니 이것도 고맙다.

“이게 마지막일 거야.”

너와 내가 마주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아는 것이 꽤 무서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렇게 이별을 준비할 수 있어서.

“편히 쉬시라는 말씀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래. 나 같은 인간이 편히 쉬면 안 되지. 그만 가봐도 좋다.”

효조는 공손히 인사하고 뒤돌아 걷는 연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인 걸까.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죄일까.

달라진 인연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시대를 살아가길 바랄 뿐.

그러나 넌 그것도 싫겠지.

그걸 알기에 탐야에게 빌 수 없는 효조였다.

*

연우가 효조를 다시 만난 건 깊은 밤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사혼.

연우는 사신.

효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이럴 날이 올 줄 알았다.

도리어 그가 이 길을 지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그는 정현옥이 그랬던 것처럼 여느 사혼과 달리 겉모습이 멀쩡했고 말소리 또한 분명하게 알아들 수 있었다.

다른 사혼이 모두 제 갈 길을 가고 효조가 끝이었다.

“그날이 마지막이 아니었군. 어쩐지 별다른 말이 없더라니. 너는 나와 이리 만날 걸 알고 있었나 보구나.”

잘 알고 있었지.

당신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누가 오겠는가.

다른 사람은 오지 않더라도 당신만큼은 꼭 날 만나야 한다.

“이번 생에 달라졌다 해도 지금까지 효조 님께서 저지른 일이 있으니까요.”

그도 피해갈 수 없었다.

내가, 휘타가, 우리가 그러했듯이.

효조가 다른 삶을 살았다지만 그의 죄를 연우와 휘타가 기억하고, 탐야도 기억한다.

“여기로 가면 이대로 끝인 건가.”

“영원히 당신이 살아가야 할 곳입니다.”

고통만이 있어 다른 삶은 허락되지 않는 곳.

“탐야는 참…… 지독한 양반일세.”

허허. 효조가 씁쓸하게 웃었다.

구덩이를 향해 걷던 그가 자리에 멈춰 연우에게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이제 정말 끝인 게로군. 어찌 보면 내게는 앞으로 살 곳이 편안한 세상일지도 몰라.”

“어째서요?”

궁금해도 묻지 않으려 했으나 마지막이니까.

더는 볼 일이 없을 테니 물었다.

“네가 없잖느냐.”

“…….”

“내게는 네가 있는 세상이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효조가 걸음을 옮겨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진짜 끝이었다.

연우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효조의 부고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를 마주하고, 마지막 길을 보내고 나니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이상했다.

울컥. 가슴에서 울음이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왜 이래.”

머리가 멍해지며 허탈함도 느낀다.

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효조가 안타까워서 이러나.

미운 정이라도 들었던 걸까.

얼마 전에 만난 효조에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이런 날이 머지않았음 또한 알았다.

하지만 그를 보내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인연이 드디어 맺음을 지었다.

지겨웠던 인연의 결말이 이러했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불행한 그의 마지막이 통쾌하기보다 쓸쓸했다.

동시에 또 슬퍼진다.

사신이 되어 불로의 삶을 사는 연우에게 가장 무서운 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별이었다.

사림과 소호를 보낸 뒤, 우습게도 남아 있는 효조가 연우에게 위안이 되었다.

왠지 그가 살아 있으면 휘타는 아직이겠지라는 생각에 말이다.

휘타는 효조가 가고 난 후의 일이라 여기며 버텨왔건만.

효조가 떠나고 말았다.

이제는 휘타를 보낼 일만이 남고 만 것이다.

*

연우가 일하러 나간 시각.

방 안을 둘러 본 휘타가 하인을 불렀다.

손으로 옷을 하나씩 짚어준 뒤.

“모두 태워 없애 버려라.”

“예? 태우라고요?”

“그렇게 해줘. 재도 남기지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하인은 휘타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집안 곳곳에 그의 흔적이 너무 많았다.

이 집의 존재 자체가 그의 흔적이 되겠지만 집은 어찌할 수 없으니 물건이라도 없애야 했다.

슬슬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또 그녀를 혼자 두게 되었다.

또 혼자 견디라 말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이번만큼은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떠나지 않으려 했는데.

연우에게 아무리 많은 사랑을 줬어도 아쉽고 부족하다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잘해낼 수 있다고 믿어보려 했지만, 홀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 시간을 잘 버티라 말하는 건 오히려 저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부디 날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그가 입던 옷을 태우라 했다.

몇 벌만 남겨두고 마당에 모아 쌓은 옷이 활활 불타올랐다.

금빛의 눈동자에 붉은 불길이 새겨지다 차오르는 눈물에 금방 꺼졌다.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두렵지 않으나 홀로 있을 연우의 삶이 두려웠다.

다음 날 아침.

연우가 휘타의 옷이 거의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

“당신 왜 그래요.”

어떻게 된 거느냐가 아닌 왜 그래요.

연우도 휘타가 무슨 마음으로 옷을 태웠는지 눈치를 챘다.

“다음에는 또 뭐를 없앨 건데요. 그렇게 하면 제 마음이 더 편해질 거라 생각한 거예요?”

화낼 줄 알았는데, 그녀의 음성이 부드러웠다.

“그러지 마요. 이미 한 번 경험했어요. 당신 없는 삶이 슬프겠죠. 힘들기도 하겠죠. 하지만 마냥 그러지만은 않을 거예요.”

“부인.”

“당신이랑 살아온 동안 온통 즐겁기만 하지 않았잖아요. 슬픈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어요. 그래도 당신이 있으니까 그 시간 전부가 행복했어요. 반대로 당신 없는 시간이 슬프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당신과 함께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 시간도 행복하게 살아갈 거예요. 예전에 당신이 그랬잖아요.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길 바란다고. 그러니 내게서 당신을 추억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말아줘요.”

부드럽고 자상하지만, 단호한 마디마디에 휘타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하긴 항상 이랬다. 연우에게 늘 지고 마는 그였으니까.

휘타가 져주는 때도 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가 지게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늘 지지만 기분이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할 말 없게 만드는 연우가 기특하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저의 선택을 존중해주세요. 당신, 그거 잘하잖아요.”

싱긋 웃는 연우.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데 탐야와 할 수 있는 거래가 없다.

사실 또 거래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시간의 흐름과 인간에게 정해진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몇 번의 인생을 살았지만 이보다 좋은 적이 없었다.

탐야도 할 만큼 했으니 만족할 줄도 알아야지.

연우가 마음에 걸리고 아픈 상처로 남아 있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한다.

“내 생각이 짧았소.”

“자책하시지는 마세요. 솔직히 당신이 차분하게 받아들였다면 그거대로 서운했을 거예요. 그래도 옷은 저랑 상의하고 없애지 그랬어요. 아깝게.”

연우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나왔다.

“미안해.”

“미안하면 다시는 이런 일 하지 않기로 약속.”

그러면서 연우가 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에 휘타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매끈매끈한 피부가 닿는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남은 그의 손가락과 달리 고왔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자꾸 유치한 생각이 앞선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의 마지막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은 이렇구나.

겉모습이 뭐가 중요하겠느냐만 그래도 연우의 기억에 멋진 사내로 남고 싶었다.

어차피 외모는 어쩔 수 없으니 생각을 달리하는 휘타.

약속을 꼭 지켜야겠다.

마음 씀씀이라도 멋진 사내로 남아야 하니까 말이다.

*

휘타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비가 오려나.”

손가락 끝에서 축축한 습기가 느껴졌다.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맑은 하늘을 보는 날이라 다들 축제인데, 비가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은 비가 내릴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게 틀렸으면 좋겠다.

이런 날에 비가 오면 다들 실망할 테니.

모두 밖에 나가 오늘은 즐기느라 집안이 텅 비었다.

일을 끝내고 아침에 돌아온 연우는 아직 자는 중이었고, 휘타는 마루 난간에 앉아 파란 하늘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꾸 눈이 감기려 한다.

얼마 전에는 연우를 기다리다 잠든 적도 있었다.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가물거리는 눈꺼풀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하늘이 참 파랗구나.

하얀 구름도 떠다닌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스르륵. 휘타의 눈이 감겼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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