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특별히 밤으로 쳐줄게요.
2018.10.12.
연우가 자신이 다음 사신이라고 말했을 때, 휘타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말 그대로 척이었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뻔히 아는데, 제 여자가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걸 어떤 남자가 반길까.
괜스레 연우의 걱정만 부가시키는 거 같아 적당히 넘겼지만 마음에 짐처럼 남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혼을 인도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것이다.
게다가 이탈을 하는 사혼이 생긴다면 칼을 휘둘러야 한다.
“걱정하는 거죠?”
그에게 안긴 채로 연우가 물었다.
휘타는 연우가 말하자 그녀의 입김으로 가슴이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어떻게 하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려나.
다음 사신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사신이 되지 않으면 연우가 죽을 수밖에 없으니 선택할 수가 없다.
마냥 보호할 수만도 없다. 휘타가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면 사혼 근처에 가는 것도 어렵다.
그렇다면.
“혹시 검을 다룰 줄 압니까?”
가르쳐야지.
그대가 더 수월하게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아니요.”
“그럼 내일부터 내가 가르쳐주겠습니다.”
“왜요? 아, 사신의 일을 하려면 칼을 쓸 줄 알아야 하죠.”
“사신이 되면 그대에게 칼이 주어지고 그걸로 이탈하는 사혼을 베야 합니다. 그건 사신이 되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칼을 다룰 줄 모르면 힘든 싸움이 되겠지요.”
휘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사신이 죽기도 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쳐요?”
“그럴지도.”
연우가 휘타의 가슴을 밀고 일어나 앉았다.
“오늘부터 배울게요.”
“내일부터 해도 됩니다.”
“백일도 안 되는 날이 남았어요. 그 안에 습득하는 건 힘드니까 하루라도 빨리해야죠.”
“오늘은 내가 피곤해서.”
그 말에 연우가 포기하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저만 생각했어요.”
휘타가 괜찮다며 눈을 감았다.
사실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기억을 되찾은 이상 절대 그냥 둘 수 없는 한 사람.
오늘은 그를 만나야 했다.
*
효조의 처소.
후드득. 효조가 정원의 풀밭에 먹이를 뿌리자 까마귀가 날아와 앉았다.
휘타는 부리로 먹이를 콕콕 찍어 먹는 까마귀를 보며 문에 기댔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휘타가 왔다는 하인의 말에도,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효조는 반응하지 않았다.
“녀석들 살이 통통하게 올랐습니다.”
휘타가 말하자 그제야 효조가 눈을 돌렸다.
“잘 먹이니까.”
“항상 궁금했는데 많고 많은 짐승 중에 왜 까마귀입니까?”
“몰라서 묻느냐. 내 이름이 효조잖아. 까마귀가 까마귀를 챙기는데 이유가 있나?”
효조. 까마귀의 다른 이름.
물론 효조의 이름이 까마귀란 뜻은 아니었다.
“이 성안의 불길한 존재로 불리는 두 까마귀가 잘 맞지 않느냐.”
작은 주머니의 먹이가 다 사라질 때까지 휘타와 효조의 대화가 멈췄다.
풀밭 위로 먹이가 흩뿌려지는 소리, 까마귀의 울음소리만이 정원에 가득했다.
주머니가 비자 효조가 손을 탈탈 털었다.
“나를 찾은 까닭은?”
“혼인하면 저는 성 밖에서 살 것입니다.”
효조가 움찔했지만, 곧바로 ‘그래서?’ 라는 표정을 하고 휘타를 바라봤다.
“연우를 찾지 마십시오.”
“그럴 것이다. 네 여자에게 흥미 없어.”
“성안에서 죽은 듯이 사십시오.”
“네가 죽고 싶은 것이냐.”
정원 내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서로를 노려보며 시간을 보낸 지 얼마나 됐을까.
효조가 먼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하고 가라.”
“한 번만 더 연우를 찾으시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지금 효조의 목숨줄을 끊어놓고 싶다. 예전에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랬다간 일이 커지기 때문에 경고만 할 수밖에 없다.
사림이 효조가 연우를 찾아왔다 말했다.
그가 연우에게 특정 과일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의아하게 여겼다. 또 다른 날에는 눈물을 흘렸단다.
천하의 효조가 연우를 두고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듣고 무슨 일이지 싶었다.
그리고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찾지…… 않을 것이다.”
의외의 답을 들으며 확실해졌다.
효조도 기억하고 있다. 이상한 점은 효조가 옛날의 모습과 다르다는 점.
잔인할 정도로 연우에게 집착했던 효조가 놓는다 말한다.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에 스스로 벌을 내리길 바랐다.
마음에서 수호령으로 변할까, 칼을 꺼낼까 지금도 망설이지만 효조를 벌하는 건 휘타의 몫이 아니었다.
“부디 그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묵례하고 돌아선 휘타.
몇 걸음 걷다가 멈췄다.
“붉은 까마귀는 불길한 새가 아닙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불길한 존재가 되어 검은 까마귀가 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 밖에서 보게 된다면 그때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테니.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휘타야.”
가려는 그를 효조가 불러세웠다.
여느 때와 달리 음성이 부드러웠다.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느니라. 연우가 당했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사랑해도 만날 수 없는 벌.”
휘타의 어깨가 들썩였다.
크크큭, 하던 웃음이 점점 더 커졌다.
“벌?”
휘타가 돌아섰다. 성큼성큼 걸어 효조에게 다가갔다.
“벌이라. 고작 그것이 벌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네. 연우가 당했던 고통을 느끼지만 말고 하나씩 되짚어봐. 네가 연우에게 했던 수많은 짓을 떠올려야지. 채찍에 맞아 찢어진 살갗에 인두를 댔던 놈이 너야.”
효조의 안색이 파랗게 변해갔다.
휘타의 말에 효조는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피부가 찢어지는 고통. 뜨거운 열에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
제 양팔을 끌어안은 효조가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왜. 그건 기억나지 않았어?”
핏기가 가신 효조의 입술이 떨렸다.
“찢어진 살에 소금을 뿌리기도 했잖아.”
“그만. 그만해!”
“듣지도 못하는 주제에 벌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하다니.”
휘타가 한심하게 바라봤다.
“네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건, 절대 벌이 아니다.”
적어도 다리나 팔 하나는 부러지고 나서 그런 말을 했어야 한다.
칼에 한 번 찔리기라도 했으면 이러지 않지.
성안에서 누릴 거 다 누리고 살면서 벌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효조는 결국 변한 게 아니다.
효조는 연우가 겪었던 일의 백분의, 만분의 일도 겪지 않았다.
*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혼례가 치러졌다.
기와지붕의 끝과 끝에 연결된 한지가 바람에 날려 파닥였다.
처마에서는 크기가 다른 풍경이 고운 소리를 냈다.
넓은 풀밭에 개수를 가늠할 수 없는 잔칫상이 놓였고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혼례식에 따로 초대된 사람은 없었다.
신분과 관계없이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휘타와 연우는 따로 식을 올리지 않고 장공의 축사를 받은 후,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눴다.
모르는 사람투성이였으나 모르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도 꽤 좋았다.
잠시 쉬기 위해 외진 곳에 앉았다.
연우가 한숨을 쉬자 휘타가 그녀의 땀을 닦아줬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올 줄 몰랐어요.”
“그 정도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러다 병납니다.”
“어떻게 그래요. 인사하려면 다하든가 안 하려면 다 안 해야지. 차별하는 거 은근 기분 상하게 해요.”
“차별하는 게 아니라 힘드니까 그렇지.”
“하룬데요 뭘.”
좀 힘들면 어떠리.
좋은 날인데.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줄에 매달린 예쁜 한지들. 곱게 울리는 풍경 소리.
맛있는 냄새.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소리.
그날과 같은데 다르다.
바로 두 번째 삶이 끝나던 날.
효조 앞에서 목숨을 끊었던 그날 말이다.
거기다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그것마저 같았다.
“파란 하늘을 보니까 앞으로 뭐든 다 잘될 거 같아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휘타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사신이 되면 우리 사이에 아이를 가질 수 있나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줄 알았건만, 문득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나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그렇구나. 왠지 어려울 거 같아서요.”
“난 그대만 있으면 되는데 그대는 아닌가 봐?”
“그런 건 아니에요.”
“어쨌든 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 궁금하면 우리가 시험해봐도 좋고. 노력하면 혹시 압니까. 탐야가 노력을 가상히 여겨 아이를 줄지?”
휘타가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노력해볼까? 난 지금도 좋은데.”
끈적한 눈길로 연우를 탐한다.
“탐, 탐야가 그런 일도 해요?”
말을 돌리며 슬쩍 그를 밀어내려고 시도했으나 헛수고였다.
“사림이 혼례복을 기가 막히게 만들었단 말이야.”
얇은 천 아래로 연우의 뽀얀 살이 보일락 말락 했다.
휘타의 눈에는 완전히 보이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자극적이었다.
주변 공기가 더워졌다. 무거워졌다.
뭔가에 눌리는 것 같아 연우는 눈길만 슬쩍 피했다.
“바, 밖이에요.”
“내가 무얼 할 줄 알고?”
휘타는 이미 눈으로 연우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파란 하늘. 밝은 햇볕 아래서 연우는 투명하게 빛났다.
머릿속으로 온갖 것들을 상상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뭘 어쩔 마음은 없었다.
내 소중한 각시를 여기서 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놀라서 말을 더듬는 연우의 반응이 귀여워서 그랬다.
내 목숨과 같은 사람. 무엇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사람.
참 많이 돌고 돌아 이 시간이 왔다.
처음부터 정해진 짝처럼, 너는 나고 나는 너뿐인 것처럼, 신이 묶어둔 운명과 같았다.
하지만 잔인하기도 하지.
어쩌자고 그대가 사신이 되었는지.
내 죽음을 지켜볼 그대가, 나는 벌써부터 애달프다.
그런 휘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연우가 발그레해진 볼로 수줍게 웃었다.
앞으로 예쁜 것만 보게 해주고 싶고, 좋은 일만 겪으며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던 바람이 여지없이 어긋나고 만다.
너는 내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본 뒤에 괜찮을까.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연우가 죽어 그를 만나러 왔던 것처럼 죽어서 그녀를 만나러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우처럼 그도 웃었다.
먼 훗날의 일에 오늘을 낭비하지 말자 하며.
그런데 자꾸 가슴이 시큰거렸다.
연우를 안으며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휘타였다.
*
성 밖에 집이 생겼다.
휘타는 이 집을 마련하느라 혼인 날짜를 미룬 거라고 했다.
“집에서 길을 잃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둘이, 아니 함께 나온 사림과 소호까지 해서 넷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큰 집이다.
“성안에서는 잃지 않고 잘 돌아다녔잖습니까. 차차 적응될 것입니다.”
휘타와 함께 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사림이 하인들을 데리고 왔다.
“마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집주인보다 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함께 고개를 숙여 연우도 같이 인사를 했다.
“마님.”
사림이 연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아랫사람입니다.”
“아랫사람이어도 인사는 해야지. 첫 만남에 어떻게 받고만 있어.”
“다음부터는 안 됩니다!”
“알았다.”
대충 머릿수로만 열댓 명은 되어 보였다.
휘타가 가진 재산이 많기는 하나 이들을 다 먹이려면 큰 비용이 들 텐데 걱정이 되었다.
“하인 수가 너무 많아요.”
“많으면 안 됩니까? 그대가 앞으로 사신의 일을 하기 위해선 많아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먹이고 재우고 돈도 줘야 하잖아요.”
“별걱정을 다하시네. 그런 걱정일랑 넣어두십시오. 저들의 자녀가 죽을 때까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연우의 손목을 잡은 휘타가 둘이 쓸 방으로 이끌었다.
오후였으나 창문을 두꺼운 천으로 모두 가려 빛이라고는 먼지만큼도 들어오지 않았다.
방 곳곳에 작은 촛불이 어둠을 밝혔다.
침상 위에 꽃잎이 흩뿌려졌다.
휘타가 연우의 어깨에 두른 겉옷을 살며시 벗겨주더니.
“오늘은 내 계획에 맞춰 차근차근히 할 예정입니다.”
“무슨 계획이요?”
“이를테면 처음은 욕실이고 두 번째는 이 침상 위?”
연우가 두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먼저 그를 유혹할 때도 있지만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휘타 때문에 당혹스럽다.
“왜 그런 거로 계획을 세워요.”
“이런. 난 굉장히 심사숙고해서 세운 겁니다. 끝까지 들어보겠습니까?”
연우가 황급히 휘타의 입을 막았다.
이대로 있다간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욕실에 있는 동안 사림이 술상을 봐둘 것입니다. 가죠.”
연우는 내미는 휘타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방에 연결된 문을 열자 맞은 편에 다른 문이 보인다. 욕실이 바로 옆에 있었다.
“성은 욕실과 방의 거리가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목욕 후에 그대가 지나갈 때마다 따라다니는 눈빛에 짜증이 났거든.”
연우가 지나갈 때마다 따라오는 눈은 없었다.
누가 감히 휘타의 여인을 넘보겠는가.
그래도 연우는 정정하지 않았다. 그의 질투가 그녀를 즐겁게 한다.
욕실 문이 열렸다.
연우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방과 다르게 환한 욕실. 천창에서 빛이 쏟아져 내려 욕조에 담긴 물의 표면이 반짝였다.
“여기가 욕실 맞아요? 너무 밝아요.”
“좋지 않습니까. 오늘은 파란 하늘을 보며 목욕을 하고. 나중에 비가 오면 빗방울과 빗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비 오는 날 맨발로 걷다가 여기서 씻으면 기분이 아주 좋을 거예요.”
연우를 위해 준비된 곳이었다.
뜨거운 물에 의해 내부 온도가 올라갔고 연우도 점점 더워졌다.
그녀의 얼굴을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려도 해봐도 피할 곳이 없었다.
하긴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것도 좀 그렇다.
연우가 용기를 내 스스로 옷을 벗었다.
둘만의 대화이고 사랑의 표현이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감출 필요도 없다.
“지금은 낮이니까 져주셔야 해요.”
연우의 말에 휘타가 유쾌하게 웃었다.
“첫날이라 양보하기 싫은데 말입니다.”
“첫날 아니잖아요.”
“결혼하고 첫날이지.”
피이. 연우가 흘겨보며 욕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특별히 밤으로 쳐줄게요. 이겨주세요.”
부부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매일 행복했다. 매일 사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백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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