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오늘은 내가 이기게 될 거야. 아주 많이. 여러 번.
2018.09.28.
연우가 휘타의 가슴을 봤다. 검은 연기가 있다.
그리고 다시 제 가슴. 같은 연기가 그녀의 가슴에도 있었다.
내가 다음 사신이구나.
‘제가 그를 대신해 사신이 되어도 좋아요. 영원히.’
거래는 연우가 했던 말 그대로 이루어졌다.
연우가 지은 죄가 있기에 사신의 조건에 맞았을지도.
허탈하거나 실망하거나 탐야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내건 거래의 조건이었고 탐야는 들어줬을 뿐.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
어렵게 다음 사신을 찾지 않아도 되겠다.
지난 삶에서처럼 다음 사신이 둘일 수도 있으려나.
혹시 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이번엔 연우 자신만이 다음 사신 후보라는 예감이 들었다.
밤마다 휘타가 했던 일을 하고,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 최악은 아니었다.
궁금한 건 있다. 영원히 사신이 되어도 좋다 했으니 보통의 인간이 된 휘타가 죽은 후에도 사신이 되는 건가.
그때 내게도 신부, 혹은 신랑이 있을 걸까.
찾으면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걸까.
물론 휘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저 궁금했다.
탐야를 만났을 때 물어볼걸 그랬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영영 만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보게 된다면 물어보리라.
연우는 자신이 다음 사신인 걸 알게 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휘타에게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꿈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당신과 나는 같은 시간을 네 번째 사는 거라고.
당신이 나를 살리기 위해 매번 시간을 되돌린 거라고.
그래서 이번엔 내가 시간을 돌렸고 사신이 되기로 한 거라고.
이렇게 보니 굉장히 간단한 설명이었다.
듣는 사람에겐 엄청나게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숨길 수는 없었다. 아무리 길어도 백일 후에는 연우가 사신의 일을 해야 했으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어 미루려다 차라리 지금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래도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가능성은 낮지만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듯했다.
“휘타 님. 잠시 효조 님을 뵙고 와도 될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나 보다.
휘타가 못마땅한 음성으로 답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답해줄 겁니까.”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같이 갈까요.”
“아니요. 혼자 가도 돼요. 이제 수호령과 어느 정도 소통이 되는 상황이라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멀리서 보고 오면 돼요.”
휘타가 가면 눈에 띌 수밖에 없고 그러면 효조와 만나 짧게나마 대화를 해야 한다.
효조에게 복숭아를 받은 후로 그와 대면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멀리서만이라. 다녀오면 내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네. 그럴게요. 다 얘기할게요.”
우리에게 있었던 일 모두 얘기할게요.
“사림이라도 데려가십시오.”
절대 혼자는 안 보내줄 기세라 연우는 사림과 함께 휘타의 처소를 나왔다.
멀리서 보면 된다고 하니 사림이 효조가 자주 있는 곳으로 안내해줬다.
그런데 사림이 이끄는 곳이 낯설지가 않다.
설마 사림이가 가는 곳이 거기는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면 따라갔지만 연우가 알고 있는 곳이 맞았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연우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다 멈춰 섰다.
“아가씨?”
따라오지 않는 연우를 사림이 부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장소였다.
눈앞에 보이는 곳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에서 연우가 머물렀던 곳.
효조가 자신의 부인이 된 그녀에게 준 처소였다.
“여기에 효조 님이 자주 계신다고?”
“네. 원래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 분이라 미리 연락을 넣지 않은 이상 만나기 힘든 분인데 얼마 전부터 여기에만 계신다고 들었어요.”
사림의 말대로 효조는 잘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성의 재물을 제 것인 것처럼 갉아먹고, 사람을 괴롭게 하는 일을 즐겼다.
그가 그나마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가 고문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다른 데도 아니고 연우의 처소로 쓰였던 곳에 있단다.
왜 하필 그곳이란 말인가.
의문이 짙어간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의문.
연우는 부디 자신의 갖는 의문이 헛된 것이기를 바랐다.
사림을 따라 담장 아래에 몸을 숨겼다.
사림이 먼저 고개를 들어 효조가 어딨는지 살펴보고 연우에게 손짓했다.
멀지 않은 곳에 효조가 앉아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예전 삶에서 연우의 그네가 있던 나무 아래였다.
아닐 거야.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애써 아닐 거라 부정하며 연우는 효조의 가슴으로 눈길을 옮겼다.
예상하고 왔으나 그의 가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에게 보이는 검은 연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효조는 다음 사신이 아니었다.
기대하지 않아서 실망도 없었다.
“이만 돌아가자.”
그곳에 앉아 있는 효조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 사림을 재촉했다.
돌아가려는 때, 효조가 연우를 봤고 그녀도 봤다.
모른 척할 수가 없어 묵례하고 고개를 들자 뛰어오는 효조가 보였다.
쏜살같이 뛰어와 숨을 헐떡였다.
“어쩐 일이냐.”
“산책…….”
사림이 연우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제가 가꾸는 꽃밭에 꽃이 많이 피어서 구경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랬구나.”
기운이 빠진 얼굴로 효조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지 마. 당신이 그러면 나는 두려워진다.
“그럼 쉬십시오. 가보겠습니다!”
사람이 연우의 소매를 당기며 가려고 하자 효조가 붙잡았다.
“잠깐만!”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연우는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을 유지했다.
“말씀하세요.”
“여기…… 여기가…… 아니다. 가봐라.”
연우는 인사를 하고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효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가 전의 삶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모르는 척할 것이다.
빨리 사신이 되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생겼다.
*
휘타가 일을 하러 가는 시간이 되어 얘기는 아침으로 미뤘다.
다녀올 동안 그가 잠을 자두라 해서 누웠다.
일하는 그를 두고 혼자만 자는 게 내키지 않았으나 자두는 편이 좋을 듯했다.
잠이 영 오지 않을 것 같더니 지난밤에 못 자고, 오늘 하루를 그의 품에서 보내느라 잠깐 눈을 붙인 탓에 졸음이 쏟아졌다.
눈을 떴을 땐, 그녀 앞에 휘타가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연우가 놀라 일어나며 물었다.
“더 자도 됩니다.”
“다 잤어요. 되게 깊이 잠들었나 봐요.”
길어야 삼십 분 정도 잔 기분이었다.
대신 몸이 가뿐해서 머리도 맑았다.
“내가 졸리니 같이 누웁시다.”
“거짓말.”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있으면서 졸린단다.
누가 속을 모를 줄 알고.
“정정하지요. 졸린 게 아니라 피곤합니다. 눕고 싶다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연우 옆으로 눕더니 그녀의 팔을 당겨 품에 안았다.
혼자 효조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마음은 안 된다였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허락을 바라는 단호한 눈빛에 뭔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보냈다.
또 하나. 연우가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다.
“자, 어디 들어볼까요. 효조 님은 왜 만나러…… 아니죠. 왜 보러 간 겁니까.”
“다음 사신인가 싶어서요.”
“다음 사신?”
어쩌면 그가 짐작하는 것보다 연우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막연하게 사신의 신부가 하는 일을 알고 있던 그와 달리 그녀의 입에서 다음 사신이라는 구체적인 말이 나왔다.
“사신의 신부가 되면 다음 사신을 백일 안에 찾아야 해요.”
방법도 알고 있네.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연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묻는다.
“백일 안에 찾지 못하면?”
“죽어요.”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이 멈칫했다.
“죽어? 그대는 그걸 알면서 내 신부가 된 겁니까?”
가슴속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가 되길 선택했다면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사신을 찾으면 안 죽어요.”
“못 찾으면!”
“찾아요. 찾았고요.”
“그게 효조입니까?”
버럭 했던 휘타는 음성을 누그러뜨렸다.
“확인하러 갔는데 아니었어요.”
“그럼 찾은 게 아니잖습니까!”
다시 언성이 높아진다. 잠잠해졌던 심장이 다시 달음박질했다.
“찾았어요. 그가 아닐 뿐이죠.”
“그게 누굽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러다가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그건 마지막에 알려드릴게요.”
이 와중에 그건 또 나중에 알려준다고 한다. 조급한 그와 달리 연우는 평온했다.
“그나저나 다음 사신이 왜 효조일 거라 생각했는지 궁금하군요.”
연우가 한숨을 쉬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술을 떼었다.
“예전에는 효조 님이 다음 사신이었거든요.”
꿈이 아니라 예전.
“예전이라면.”
“당신은 기억 못 하고 있지만 우리는 같은 시간을 네 번째 살고 있어요. 전 꿈속에서 휘타 님을 만난 게 아니고, 실제로 만났어요. 사림이도 소호도, 장공 님이나 단희도요. 참 탐야도 만났네요.”
연우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휘타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가 그토록 만나길 원했던 탐야를 연우가 만났다고 한다.
지하계의 사람이 아닌 지상의 사람이.
“당신이 믿지 않을 거 같아서 꿈이라고 했던 거예요.”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이라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연우가 알고 있던 것들이 진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도 모르고 있는 사신의 신부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은가.
“두 번은 당신이 저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어요.”
“내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만.”
“당신은 저를 살리기 위해 탐야와 거래를 했고 직접 시간을 되돌린 건 탐야였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미 탐야를 만난 적이 있는 휘타였다.
왜일까. 놀랍지가 않다. 터무니없는 얘기라서 그러는 걸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은 건 아닌데 혼란스러웠다.
“이번엔 제가 시간을 되돌렸어요.”
“그대도 탐야와 거래를 했고?”
답이 없었다. 침묵은 긍정이다.
잠깐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을 거래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그를 짓눌러 품에 있는 연우를 힘껏 안았다.
“다음 사신은 저예요.”
불안함의 원인이 이거였다.
“안 됩니다.”
“제가 다음 사신으로 절 선택하지 않으면 전 죽어요. 해야 해요.”
차라리 연우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길 바랐다.
그저 바람일 뿐, 여태 연우가 했던 말이 틀린 적이 없었기에 이 또한 수긍해야 하나 보다.
“전 좋아요.”
휘타의 마음과 다르게 연우의 음성이 밝았다.
“힘든 일입니다.”
“알아요.”
“괴로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것도 알아요.”
“위험합니다.”
“알고 있어요. 호랑이를 수호령으로 둬서 그런지 두렵지 않아요.”
연우에게 수호령이 생긴 까닭이 이제야 이해된다.
탐야가 그녀를 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한 모양이다.
“어렵게 생각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못난 사람이 된 듯합니다.”
“제가 다음 사신이 되는 건 이미 정해져 있던 거예요. 자책하지 마세요.”
품에 안긴 연우가 팔을 빼내 휘타를 안아줬다.
휘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세 번째 삶까지 휘타 님에게 받기만 했어요. 늘 보호받기만 했어요. 이제는 제가 당신이 해준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어요.”
“여자가 하기에는 힘든 일이라 그래요.”
“제가 보기와 달리 체력이 아주 좋답니다.”
“잠을 못 자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일 끝내고 돌아오면 당신이 재워줘요.”
틈을 주지 않는 답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만다.
천하의 휘타가 이렇게 되는 날이 오는구나.
“제 말 다 믿어주시는 거예요?”
“다는 아니고.”
“제가 사신이 되면 그땐 다 믿어주시겠네요. 빨리 사신이 되어야겠어요.”
“그건 아니지.”
휘타가 고개를 들어 연우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연우의 말대로 그녀가 다음 사신이라면 백일을 꽉꽉 채울 것이다.
하루라도 그 일을 덜 하게 하고 싶었고, 백일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연우의 수호령도 다 자랄 테니 말이다.
연우에게 사신의 일을 떠넘기게 되어 심란한 기색이 감춰지지 않았다.
촙. 그녀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당신 표정만큼 심각한 일 아니에요.”
다시 초옵.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어떻게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해놓고 그대를 기다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연우가 그것도 좋겠다며 까르르 웃었다.
분명 마음이 무거워질 정도로 심각한 내용인데 연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얼마든지 하십시오. 다 들어줄 테니.”
“저와 혼인해주세요.”
얌전히 연우의 품에 안겨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 방금 뭐라고…….”
“혼인해주세요.”
“채연우! 그걸 왜 네가 해.”
“누가 하는 게 중요한가요?”
중요하다. 난 중요하다고.
“사랑해요. 많이.”
또다시 기습당했다.
“하아. 정말.”
이 사랑스러운 요물을 어떻게 하지.
머지않아 그의 입에서도 연우와 같은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단지 선수를 빼앗겨서 아주 조금 분했다.
“제가 먼저 가로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져줬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지상에서는 그런 말이 있어요. 낮저…… 아무튼 낮에 져주는 남자가 인기가 많아요.”
연우는 한때 TV에서 자주 나왔던 ‘낮저밤이’라는 단어를 말하려다 괜스레 민망해져 낮에 대한 이야기만 해줬다.
하지만 휘타가 놓치지 않고 다음을 묻는다.
“낮에는 져주고 그럼 밤에는?”
“몰라요.”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이고.
“간단하군요. 낮에 져줬는데 밤에도 져줄 리가 없지. 혹 내게 그걸 원합니까? 내가 해드릴까요? 나의 부인?”
사뭇 낮아진 휘타의 음성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상체를 낮춘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끝내 중심을 잃고 누워버렸다.
풀썩. 어젯밤, 아니 어제 아침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려고 한다.
입맞춤할 것처럼 입술이 가까워지다가 비켜나갔다.
연우의 귀에 입술을 살짝 데자 그를 기억하고 있는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오늘은 그대가 소리를 참아야 합니다. 막아주기 싫어졌거든.”
“그래도 밖에 사람이…….”
“난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이기게 될 거야. 아주 많이. 여러 번. 그러니 참는 건 그대가 알아서 해.”
휘타의 입술이 귀 아래 턱으로, 턱을 지나 목으로, 목 아래 쇄골로 내려갔다.
그렇게 계속 아래로 내려가 금을 켜는 것처럼 연우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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