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77화 (77/100)

<77화> 소리는 내지 않아야 합니다.

2018.09.25.

순식간에 방 안이 더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연우의 몸이 더워지는 중이었다.

휘타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능숙하게 연우의 옷을 벗겨냈다.

금빛의 눈동자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연우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를 옭아맸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최면에 걸린 것처럼, 약에 취한 것처럼 어지러웠다.

속속히 드러나는 살갗에 그의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처음도 아닌데 떨렸다.

떨려서 뭘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여유롭게 이 일을 치를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했건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숨소리조차 내쉬기 어려울 정도의 적막.

그때 휘타의 손이 멈췄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연우의 볼을 쓸어내렸다.

“용감하던 그대는 어디 갔습니까.”

“전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숨도 못 쉬고 있으면서.”

휘타가 연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긴장을 풀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주는 듯했다.

“진짜 괜찮은데…….”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원래 갖고 싶은 것일수록 공을 들이면 더 즐거운 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신이 된 연우의 몸에 옷을 걸쳐줬다.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밤까지 시간은 아주 넉넉하지요.”

연우가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미소를 잃지 않고 말하는 휘타.

사실 그에게 여유는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일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당장이라도 몸과 머리의 간극을 줄이고 싶었지만,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연우를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원한다는 것을.

결코 욕망 때문이나 사신의 굴레 때문이 아닌, 그녀 자체를 원한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이 마음을 가지고 연우를 안아도 되는지 고민된다.

사랑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하고, 좋아한다 말하기에는 넘치는 감정.

이것이라도 전해주는 게 좋은 걸까.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녀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묻는 건 더욱 싫었다.

휘타가 숨을 골랐다.

“내가…….”

한 박자 쉬었으나 머뭇거림이 아니다.

지금 연우에게 하려는 말에 대한 무게감 때문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해도 절대 가볍지 않기에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간 이 말을 할까 말까 수도 없이 망설였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연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실망하려나.

설령 연우가 실망해서 뒤돌아 이 방을 나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건 연우의 뜻이고, 그녀의 뜻을 존중해줘야 하니까.

한참 동안 휘타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천 년인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사물의 움직임과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마저도 멈춰버렸다.

제발 뭐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조급했지만 인내해야 했다.

“아…….”

마침내 연우의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졌으나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휘타를 보기만 했다.

하지만 곧 대답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물결이 차올라 일렁이더니 금세 흘러넘쳤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에 휘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연우가 손등으로 훔쳐냈다.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당황할 상황이 아니었다.

기생이나 다른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땐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건네줬건만 오늘, 연우의 눈물 앞에서는 허둥지둥하고 말았다.

뒤늦게 손가락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줬다.

“실망했습니까.”

“아니요.”

연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기뻐서요.”

“내가 그댈 좋아한다는 게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쁜 일이었군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잘나가다 무슨 소리인지.

“휘타 님이 절 많이 좋아하신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번엔 휘타의 눈이 커졌다. 또 한 번 당황한다.

“알고 있었다고?”

“네. 모를 수가 없죠.”

“어떻게?”

“티를 내셨잖아요. 그렇게 티를 내시면 모를 수가 없죠. 사림이도 알고 있어요. 휘타 님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거예요.”

사림이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휘타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티를 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감출 필요가 없는 감정이었으나 섣부르게 행동하고 싶지 않아 내내 조심했는데 그게 모두 드러났다니.

“티를 낸 적 없습니다.”

“제가 귀엽다면서요.”

그랬다. 귀여워서 귀엽다고 말했다.

“제가 예쁘다면서요.”

그래. 예쁘다고도 말했다.

“그게 좋아한다는 티를 낸 겁니까?”

“좋아하니까 귀엽고 예쁜 거죠. 혹시 아무한테나 귀엽다, 예쁘다 그러세요?”

“그건 아닙니다.”

간혹 인사치레로 예쁘다 말해주는 경우가 있지만, 이 순간 연우에게는 비밀이었다.

휘타는 머리가 아파 손끝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그럼, 다 알고 있었던 걸 들었을 뿐인데 뭐가 기쁜 겁니까.”

“…… 고백이잖아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연우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당신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거든요.”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언어로 전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말해야겠다고 깨달았을 때는 그 깊이와 무게가 생각했던 것보다 깊고 무거워 주저하게 됐다.

이보다 더 주저했더라면 그대는 어땠으려나.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늦어졌어도 걱정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

“언젠가는 제게 고백했을 테니까요.”

“나에 대한 믿음이 그리 크면 나중에 실망도 큽니다.”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어요.”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눈빛과 말투.

마치 앞날을 알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상황을 받아들인다.

연우가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싸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옷이 스르륵 내려갔다.

잠시 잠잠해졌던 흥분에 다시 불이 붙었다.

“절 실망하게 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당신.”

이어지는 말에 더 커다란 불길이 일어났다.

“그리고 실망하면 어때요. 사람이 살면서 그럴 때도 있어야죠.”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환하게 웃는다.

연우가 웃기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사람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볼에 닿아 있는 연우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그녀가 가진 온기에는 부드러운 감촉이 있다.

휘타는 연우의 손을 잡아 내린 뒤 밀어 눕히며 입술을 포갰다.

알고 있는 느낌이기에 탐이 났다. 이미 경험했기에 더 오래도록 갖고 싶었다.

더불어 한 번도 갖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기대된다.

또 숨을 참는 연우를 위해 입술을 떼자 그녀가 가쁘게 몰아쉬었다.

숨을 못 쉬는 건 연우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호흡하는지 잊어버린 건 휘타도 마찬가지였다.

들썩이는 동그란 어깨에 입술을 대자 연우가 비틀었다.

풋풋한 풀 내음이 나고 단맛이 났다.

어떻게 사람 살에서 이런 맛이 날 수 있지?

휘타가 한 번 더 입술을 대려는 찰나.

“어두웠으면 좋겠어요.”

어느샌가 날이 밝았구나.

해가 뜨지 않아 환한 빛은 아니지만, 방 안의 사물이 정확하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물론 가까이 있는 연우는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였고.

아주 흡족했다.

“잘 보여서 좋은데. 싫습니까.”

“부끄러워서…….”

“나만 보니 괜찮습니다. 대신.”

“…….”

“쉿. 소리는 내지 않아야 합니다. 다들 일하기 위해 깨어난 시각이라.”

맞다, 하더니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귀엽기도 하지. 싫다는 소리를 안 한다.

연우 머리 옆으로 양손을 짚어 상체를 세우자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 내가 상처받습니다.”

“부끄럽다고 했잖아요. 저, 저는 벗고 있는데 당신은 다 입고 있으니까.”

“아아, 이런.”

휘타가 키득키득 웃더니 연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옷에 댔다.

“그대가 직접.”

머뭇거리던 연우가 용기를 내어 그의 허리끈을 풀었다. 옷자락이 연우의 몸 위로 떨어졌다.

연우가 움직일 때마다 옷도 함께 움직이며 살을 간지럽혔다.

안에 입은 얇은 속옷도 마저 벗기기 위해 허리끈에 손을 댔고 휘타는 차분한 표정으로 연우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반대로 연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휘타를 볼 수 없었다.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시선이 목이 탔다.

그의 옷을 완전히 벗겨주기 위해 일어나려고 하자 휘타가 연우의 어깨를 밀어 다시 눕히고 제 옷을 벗어 던졌다.

“더는 기다리기 힘들어서 말입니다.”

커다란 상체에 덮인다.

휘타의 숨이 귓가를 간지럽히며 몸의 굴곡을 따라 그의 손이 그림을 그렸다.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흣. 참아보려 해도 저절로 터지고 말았다.

그가 연우의 얼굴 앞으로 오더니.

“쉿.”

검지를 연우의 입술에 댔다.

“마음대로 안 돼요.”

멋대로 나오고 만다. 예전에도 이랬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어지러워 잘 모르겠다.

“마음대로 안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네.”

“어떻…….”

그가 입을 맞췄다. 입술을 꼭 마주 댄 채로 함께 파도를 탔다.

전혀 모르는 감각처럼 다가온다.

연우의 소리가 휘타의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가 막힌 소리만 들렸지만 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꿈이 아닌데 꿈만 같았다. 해서 더욱 그를 깊게 느끼고 싶었다.

연우가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이제 당신을 힘들게 했던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게요.

남은 삶, 편안하고 행복하길.

*

곤하게 잠든 연우의 머리카락이 약간의 땀에 젖어 있었다.

깨지 않도록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그 자리에 살며시 입술을 대었다.

연우를 많이 좋아하긴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향과 섞인 땀 냄새마저도 좋았다.

신기했다. 어느 날 갑자기 연우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그렇게 기다리고 찾아 헤맸던 신부가 제 발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으로 모자라 그를 사랑한다 했다.

지금껏 지상에서 온 사람에게는 생기지 않았던 수호령이 생겼고 알고 보니 그의 은인이었다.

일부러 짜 맞추려 해도 어렵겠다.

탐야가 보냈나 싶기도 했다.

날 사신으로 만들어 놓고 미안해서 연우를 준 건가.

하지만 곧 웃어 버렸다. 본인이 떠올린 생각이래도 말이 안 됐다.

하긴 연우에게 수호령이 생긴 것도 말이 안 된다.

탐야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그때 연우가 뒤척이며 등을 돌렸다.

이불이 내려가자 견갑에 문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진짜 신부가 맞았다.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이리 확인하니 가슴이 뻐근했다.

팔을 뻗어 연우의 문신에 손을 댔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린 건 사신의 신부가 아니라 그녀인 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살면서 탐야를 원망만 했는데 오늘은 문득 그가 고마워졌다.

“…… 으응.”

연우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미안.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까부터 깨어 있었어요.”

“깨어 있었으면서 돌아누운 겁니까?”

“빤히 보고 있으니까 그랬죠.”

“예뻐서 보고 있었습니다.”

고개만 돌리고 있던 연우가 휘타를 향해 돌았다.

손을 포개 그 위에 기대며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그렇게 예뻐요?”

“예쁘지요.”

휘타도 팔을 세워 머리를 기대고 모로 누웠다.

“당신도 예뻐요.”

“좋은 의미라 여기겠습니다.”

“당분간 사신의 일을 해야겠지만, 곧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이후의 일도 꿈에서 알게 된 겁니까.”

“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연우의 말을 믿었다.

“그럼, 그 후의 일은? 우리는 어떻게 살았나요?”

앞날 같은 거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걸 굳이 알아서 뭐하겠나 싶어서.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고, 나쁜 날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하겠는가.

좋은 날을 미리 알아서 크게 다가올 수 있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았다.

혹여 나쁜 날이 기다리고 있다면 걱정하고 대비하며 세월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연우와의 앞날은 궁금했다.

여느 부부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연우가 미소를 지었다. 언뜻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았으나 짧게 스쳐 지나간 뒤였다.

“행복하게 잘 살 거예요.”

“그거 좋군요.”

“아, 추워.”

몸을 바르르 떨더니 휘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몸을 옹그렸다.

품에 쏙 안기는 연우의 등을 매만지며 휘타도 다짐했다.

그대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기필코 행복하게 해주겠노라 약속할 수 없지만, 어떤 순간이 와도 내 품에서 쉴 수 있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겠다.

그러니 부디 같이, 함께 행복해지자.

*

안개가 자욱한 주변.

그 사이로 나타나는 한 사람.

익숙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기다리기도 했다.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연우가 탐야를 만나는 건 벌써 세 번째였다.

“약속을 상기시켜주러 왔지.”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내가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그는 이제 사신이 아닌 거죠?”

“네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지 않나.”

알고 있다.

연우는 다음 사신을 찾아야 하고, 백일 내에 다음 사신을 찾지 못하면 죽게 된다.

그리고 휘타 역시 사신으로 남게 되고.

“선택은 네가 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날 원망하지 말길 바란다.”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네 번째 삶이 시작되고 탐야에 대한 원망은 사라졌다.

“감사해요. 제 청을 들어주셔서.”

“글쎄. 과연 언제까지 내게 감사할지 모르지.”

안개가 사라짐과 동시에 탐야도 사라졌다.

주위를 보니 휘타의 정원 한가운데였다.

저녁이 다가오는지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다음 사신을 잘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한 번 겪어본 터라 조급함은 없었다.

이번에도 효조일까?

만약 효조라면 망설이지 않고 그를 택할 수 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휘타가 나타났다.

“찾았습니다.”

“잠시 바람 쐬러 나왔어요.”

시작되었구나.

휘타의 가슴에 검은 연기가 보였다.

겉옷을 들고 나온 그가 연우의 어깨에 덮여주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람이 쐬고 싶어도 이런 차림은 곤란합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일 줄 알고……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그가 겉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끈을 여며줬다.

세심하게 묶어주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가 연우의 가슴에 머물고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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