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어떤 미친놈이 어린아이라 생각하는 여자와 입을 맞춥니까.
2018.09.21.
당황한 채 멍하게 서 있는 휘타 앞으로 연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준다.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실이란 것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의 일을 아는 건 소호와 사림뿐이었고, 그것도 자세하지는 않았다.
휘타는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지상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혼비백산하여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도망쳤지만,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보며 울먹였던 그 여자아이가, 작은 손으로 제 머리의 끈을 풀어 상처를 싸매주었던 소녀가 연우란다.
언젠가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보길 원했던 두 사람.
그중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연우.
“그럼 그 남자는 누굽니까?”
“제 아버지요.”
명치를 무언가로 긁어내리는 것처럼 아프다. 기분 좋은 아픔이었다.
내가 그래서 이 사람에게, 이 여자에게 흔들렸던 거였나.
비록 나는 알아보지 못했어도 내 수호령은 알아봤던 건가.
“그래서 전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려왔어요.”
“나를 어찌 알아보고?”
연우가 검지로 제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꿈.”
이제는 연우의 꿈마저도 고마웠다.
휘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부쩍 사랑스러워지는 그녀가 자신을 살렸던 은인이라니.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 그녀라니.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기지 못하겠다.
“이러면 내가 질 수밖에 없잖아.”
결국 그가 지고 만다. 어쩌면 이리될 줄 알고 있었을지도.
“지다니요?”
눈을 깜박이며 되묻는 연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 내기.”
으스러질 듯이 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 그거. 맞아요. 당신이 먼저 안았으니까 졌어요.”
말없이 연우를 안고 있는 휘타의 등을 그녀가 가만가만 토닥여줬다.
가벼운 두드림이 심장까지 둥둥 울리게 하였다.
얼굴을 든 그가 연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때의 나를 살려줘서 고맙다.
지금, 내게로 와준 그대가 고마워.
입술을 옮겨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또 옮겨 입술에 대려는 순간.
연우가 그를 밀어냈다.
“일하러 가셔야죠.”
“짧게만.”
“자신 있어요?”
없다. 그런 거.
한 번 맛을 본 달콤함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얼마나 매혹적인지 너무 잘 알기에,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걸 휘타도 알고 있었다.
“진작 말해줬어야지. 하필 왜 지금 말해줘서 사람 애를 태웁니까?”
“제가 당신 애를 태웠어요?”
“그걸 말이라고.”
“다녀오세요.”
연우가 그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어서 가라 등을 밀었다.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겨 걷던 휘타.
몇 걸음이나 갔을까. 갑자기 홱 돌아서 빠르게 연우에게 다가왔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컸다.
어찌나 저돌적으로 돌진해 오는지 연우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전에 잡히고 말았지만.
“왜…… 흡!”
순식간에 연우의 입술이 먹혔다.
거칠었지만 애정이 담겼다.
짧았지만 그를 느낄 수 있었다.
끈끈한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휘타가 엄지로 연우의 입술을 쓸고 나서 씨익 웃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연우는 뒤돌아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서는 그를 넋 놓고 바라봤다.
*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휘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천 년 같았다.
언제 동이 트나 하늘을 확인해 보고 또 보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휘타와 이리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다.
그의 마음이 경계선에서 넘실대고 있는 건 느꼈지만 그게 오늘 일 줄이야.
붉은 끈에 얽힌 관계가 아슬아슬하게 줄 타고 있던 선을 넘게 만든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걸.
아마도 지금이 적당한 때였으리라 생각한다.
느리게 가는 시간 때문에 지루해진 연우가 밖으로 나왔다.
난간에 걸터앉아 휘타가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봤다.
문득 그가 나가기 전에 나눴던 입맞춤이 떠올라 얼굴이 뜨거웠다.
되게 좋았는데 이상하기도 했다. 입안으로 쑥 들어왔던 감촉이 아직도 느껴졌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계속 입맞춤만 떠올릴 것 같아 머릿속으로 곡을 썼다.
흥얼거리고 있는데 담장에 무언가가 왔다 갔다 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한 연우가 침을 삼켰다.
왜 또 온 걸까.
효조의 머리가 담장 너머로 올라왔다.
연우는 예를 갖추기 위해 일어나 먼저 인사를 했다. 괜히 트집잡힐 수도 있으니.
“괜찮다, 괜찮아.”
“이 시간에 여기는 왜…….”
“잠이 오지 않아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를 지나게 됐구나.”
“네.”
“저기…….”
효조가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저기? 연우가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사람을 저렇게 부른 적이 있었나.
“네. 말씀하세요.”
“너 혹시 이거…….”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그의 가슴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서 뭔가를 찾는 것 같더니.
그의 팔이 담장을 가로질러 넘어왔다.
복숭아다.
복숭아를 보자 연우의 몸이 굳었다.
두려움으로 빨리지는 호흡을 조절하려 애썼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신의 눈이 커졌음도 안다.
많고 많은 과일 중에 왜 복숭아란 말인가.
혹시 과거를 기억하는 거야?
효조도 연우가 복숭아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드는 의심이었다.
손이 떨리고 축축해졌다.
하지만 연우는 그가 건네는 걸 거절할 수 없어 아래로 내려가 담장 앞에 섰다.
정말 복숭아가 맞았다.
거리가 있어 잘 못 본 것이길 바랐건만 효조의 손에 들린 건 분명히 복숭아였다.
거절하고 싶었다. 받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까칠한 껍질의 감촉이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만, 그거 꽤 맛있는 거다.”
“잘 먹겠습니다.”
“걷다가 입이 심심하면 먹을까 하고 가져왔는데 먹기가 싫어져서 말이다. 버리기는 아깝고.”
효조의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연우.
알고 가져온 게 아니었다.
괜히 지레 겁먹었다.
“맛있게 먹어라.”
효조가 다시 제 갈 길을 향해 걸었다.
멀어진 걸 확인한 연우가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참았던 숨을 토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나마 효조가 기억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가씨?”
언제 왔는지 사림이 다가와 연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 어.”
“어휴. 식은땀 좀 봐. 어디 편찮으세요?”
사림이 소매로 연우의 이마를 닦아줬다.
“아니야. 괜찮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어? 그건 어디서 나신 거예요?”
연우의 손에 쥐어진 복숭아를 본 사림이 물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나오는 때가 아니라 구하기 힘든 건데.”
그래. 지금은 계절이 아니었다.
“효조 님이 지나가다 주셨어. 산책하는 중에 드시려다 먹기 싫어졌는데 마침 날 만난 거야.”
사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얼굴에 의아함이 담겼다.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사림이 부축해줬다.
연우는 쥐고 있는 복숭아를 잠시 바라보다 방을 향해갔다.
한편 뒤에 연우를 따라가던 사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효조 님은 저 과일 싫어하시는데.”
잠깐 효조 밑에서 일한 적이 있기에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다가 연우의 부름에 냉큼 달려갔다.
*
비록 착각한 거였지만 효조 때문에 혼이 쏙 빠졌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흐른 줄 알았는데, 휘타가 올 시간은 아직이었다.
연우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봤다.
호랑이라고?
스스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긴 했다.
수호령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욕실로 뛰어들어갔고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에 비쳤던 모습.
절대 고양이라고 할 수 없는 외형이었다.
휘타가 소호, 사림과 나눴던 대화 속에 나왔던 호랑이가 딱 들어맞긴 했다.
강해서 좋긴 하다. 단희 같은 여우와는 비교도 안 될 테니까.
맞다. 잊고 있었는데 효조의 수호령이 곰이었다.
그녀의 수호령이 자라면 곰과 붙어볼 만하지 않나.
지금이야 늙어서 힘이 예전과 같지 않지만 호랑이를 수호령으로 두고 있는 장공이 굉장했다고 들었다.
나도 그만큼 강해지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다.
앞으로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나 만약 과거처럼 효조를 상대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기꺼이 그를 상대해주리라.
효조가 지금처럼만 지내준다면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연우가 양손을 들어 오그라뜨렸다.
눈을 치켜뜨고.
“어흥!”
거울 속의 자신에게 바라보며 외쳤다.
“어흥!”
어깨를 들어 올리고 팔도 넓게 펼친 채 더 크게 외쳤다.
제법 무서워 보이는 거 같기도 한데 어설프다.
“전혀 안 무서우려나.”
“네.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어머나!”
난데없이 들리는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봤더니 휘타가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거울 속의 자신 모습에 취해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더군요.”
“인기척을 냈어야죠! 전, 전부 봤어요?”
“보여주니까.”
붉어진 얼굴로 흥분하는 연우와 달리 휘타는 느긋했다.
“보여주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연우가 흘겨봤다.
“그런 눈도 할 줄 아는군요. 오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봅니다.”
“놀리지 마세요.”
“이리 와요.”
휘타가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자 허리를 끌어당겨 바짝 붙어 앉힌다. 골반과 옆구리, 어깨가 그의 몸과 밀착되었다.
확실히 그가 달라졌다.
그때, 휘타가 잘게 떨었다.
추운 건가 싶었는데 웃음을 참고 있었다.
크크큭, 하다가 흠흠 거리며 참는다.
하지만 곁눈질로 연우를 슬쩍 보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정원까지 들릴 정도였다.
“어흥이라니.”
“호랑이가 어흥 하고 우니까 그렇죠. 그게 그렇게 웃겼어요?”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휘타가 손을 내저었다.
“너무 귀엽잖아.”
후우, 한숨을 쉬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둘러대지 마세요. 귀여운데 왜 웃어요?”
“난 그런 사람인가 봅니다. 내 생전에 이렇게 귀여운 생물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새초롬하던 연우의 얼굴이 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칭찬은 당황스러워요.”
좋아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당황스럽다 한다. 그마저도 휘타의 눈에는 귀여웠다.
진정한 그가 연우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니. 아주 예쁩니다. 그날 소녀의 얼굴이 이랬구나, 하고 보는 중입니다.”
“혹시 제가 귀엽다는 게…… 어렸던 저를 떠올리고 그러는…….”
“아닌데. 그런 거 전혀 아닌데.”
휘타가 연우의 턱을 살며시 잡았다.
“어떤 미친놈이 어린아이라 생각하는 여자와 입을 맞춥니까.”
“아, 아니라니 다행이에요.”
별안간 그의 음성이 낮아지고 눈빛이 돌변했다.
으르렁거리는 늑대의 음성. 먹이를 앞에 둔 늑대의 눈빛.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까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그의 눈 하나를 가렸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다면 그런 말, 못 합니다.”
연우는 점점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다가올수록 목이 죄어오는 기분.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아닌 참을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호기롭게 휘타를 유혹한 적이 있는 그녀였지만 막상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습니까.”
“뭘요.”
“지금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걸 꼭 말로 설명하지 않으셔도…….”
“아니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나. 우리 사이에.”
“그…… 럼요?”
휘타의 시선이 연우의 상의로 옮겨갔다.
기다란 검지가 상의의 여밈 부분 사이에 걸쳐졌다.
연우가 숨을 내쉴 때, 들이마실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따라 움직였다.
긴장해서인지 유난히 크게 움직인다.
얼마 전이 일 때문인지 휘타가 망설이고 있었다.
연우가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자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대를 원해. 미치도록.
연우는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그의 손목을 아래로 내렸다.
투둑. 상의가 벌어졌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았는데…….”
연우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전 다 자랐어요.”
적막이 흘렀다. 소리 없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내리뜨는 휘타.
제 입술 위에 있는 연우의 손가락을 하나씩 핥았다.
그의 혀가 닿을 때마다 감전된 것처럼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마지막으로 손바닥에 입을 맞춘 그가 눈을 들었다.
짙게 드리워진 속눈썹 사이에서 빛나는 금빛은 눈동자가 이제 봐주지 않겠다 경고했다.
입술이 바짝 말라 혀로 적시자 그가 그만하라 한다.
“내가 해줄 거야.”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휘타가 침상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소호를 불렀다.
“이 시간 이후로 명이 있을 때까지 나를 찾지 마라.”
문을 닫고 다가오는 휘타의 그림자가 연우의 전신을 덮고도 남을 만큼 컸다.
검은 늑대에게 먹히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
미련스럽게 또 왔다.
또 와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연우가 있는 방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휘타의 웃음소리에 효조는 가슴이 아팠다.
모르는 척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었다.
연우가 좋아하는 과일을 내밀었을 때 보았던 그녀의 눈빛.
좋아할 거라 기대하며 왔건만, 순간 스쳐 지나가는 공포를 보았다.
그것을 보며 현실을 깨달았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나는 너에게 그런 대상이었지.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자리, 이만큼이 너와 나의 거리.
지금의 효조는 지난 세 번의 삶을 사는 동안 연우에게 가졌던 마음을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사랑이라 외쳤으나 그녀에게는 사랑이 아니었던 마음.
그녀에게 얼마나 끔찍한 시간이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모든 생을 기억한 채로, 연우가 느꼈던 고통을 간직한 채로 네 번째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탐야가 효조에게 내린 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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