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고양이가 맞아?
2018.09.18.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욕실에 온 휘타.
연우와의 일을 떠올리지 말자 생각했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내 욕정도 제어 못 하는 짐승도 아니고.
따라 들어온 하녀가 젖은 옷을 벗겨주려고 하자 나가라 하고 스스로 벗었다.
옷을 하나씩 벗던 휘타의 손이 멈췄다.
불현듯 화가 치밀어 손에 들고 있는 옷을 바닥에 던졌다.
“아니, 그럴 거면서 왜.”
도중에 그만둘 거면서 시험은 왜 하자고 한 건지.
아니다. 그녀도 자신에게 수호령이 생겼다는 걸 깜박 잊고 있었으리라.
그가 다시 천천히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차분해지며 화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얼마 후 휘타가 눈을 번쩍 떴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문득문득 솟구치는 감정에 그가 중얼거렸다.
“요물이야.”
고양이가 요물이었나? 그건 모르겠다.
연우가 원래 요물이었거나, 수호령 때문에 요물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찌 됐건.
“요물인 건 확실해.”
토끼는 무슨.
절대 토끼는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으려나.
쾅! 쾅!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뜬 휘타가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소호가 휘타를 불렀다.
“휘타 님!”
웬만해선 목청을 높이지 않는 소호의 음성이 크면서도 다급했다.
“들어와.”
욕조 밖으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휘타 님!”
“무슨 일이냐. 너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내고.”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뭐? 사라지다니? 언제? 아니, 사림이 녀석은?”
사림은 연우가 자라고 해서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한참을 자게 되었단다.
일어나서 방과 정원, 복도를 찾아봤는데도 고양이 털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 했다.
휘타가 얼른 옷을 입고 연우의 방으로 갔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 달리는 그였다.
연우의 방으로 가자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사림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리…… 아무리 찾아도 아가씨가 안 보이세요…….”
“별일 없을 게야.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상황이 난감해서 그렇지 큰일은 없을 것이다. 무서워서 구석에 숨어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 너무 작고 어려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방정맞은 소리 말고.”
사림이 복도에서 연우의 옷을 찾았다며 가지고 왔다.
복도라면.
아무래도 휘타가 제 방에서 나가라고 한 후에 수호령으로 변한 모양이었다.
제 탓이었다.
연우가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어야 하는데.
“봤다는 사람이 없어?”
“휘타 님 방의 문지기가 보고 그 뒤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요.”
역시 그랬다.
“나와 함께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수호령이 나타난 모양이군.”
사림이 꽥 소리를 지른다.
“휘타 님 방에서요? 아가씨 방까지 바래다주셨어야죠!”
“나도 알아. 이 녀석아, 넌 안 잤어야지.”
“네. 맞아요.”
언제 소리를 질렀느냐는 듯 사림이 다시 침울해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만 울고 찾아라.”
사림이 평소 고양이가 잘 먹었던 이유식이며, 장난감을 사방에 놔뒀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림에게 별일 없을 거라 안심시켰던 휘타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후각이 예민한 편이라 고양이의 냄새를 찾아봤지만 흔적만 남았을 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하인이든 기생이든 있는 대로 누구든 다 불러. 불러서 입구란 입구를 다 막게 해.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입구를 막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으나 뭐라도 해야 했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니까 조심하고. 동작도 크게 하면 안 된다 하고. 아니다.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라고 해.”
소호가 휘타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휘타의 처소 곳곳에 사람을 배치하고 소수의 인원만이 고양이를 찾았다.
휘타도 연우를 찾아 먼지가 쌓인 구석도 마다치 않고 들여다봤다.
그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작은 구멍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연우야.”
조용히 이름을 부르는 찰나.
“으엣취!”
문 옆을 지키고 있던 하인 하나가 재채기를 크게 했다.
휘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 앞에 섰다.
“재채기는 안 된다.”
“예?”
“재채기하지 마. 참아. 고양이가 나오다가 네 재채기 소리에 다시 숨으면 어쩌려고 그래. 큰 소리 내면 절대 안 된다.”
“예. 예. 그, 참겠습니다.”
더듬거리며 답하는 하인을 두고 휘타가 바닥에 엎드렸다.
구멍 안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들고 하인에게 말했다.
“숨 쉬지 마.”
“예?”
“네 숨소리가 너무 커.”
하인이 얼른 제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구멍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휘타는 별안간 떠오르는 생각에 곁을 지키는 소호를 불러 명했다.
“모두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해.”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나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눈을 감다니요?”
“이 시커먼 사내놈들에게 아가씨의 몸을 보일 수는 없잖아.”
“하지만 눈을 감으면 아가씨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겠군. 그럼 보는 즉시 눈을 감으라고 해라. 조금이라도 보면 두 눈을 뽑…… 아무튼 눈을 감고 말로 알리면 되겠네.”
소호는 휘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보는 즉시 눈을 감으라니. 조금이라도 보면 안 된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건가? 이미 본 뒤에 눈을 감은 건데.
소호는 제 주인의 입에서 두 눈을 뽑겠다는 말에 놀랐다.
어지간해선 화도 내지 않을뿐더러 험한 말도 하지 않는 휘타가 동시에 그걸 하고 있었다.
연우 때문에 휘타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
*
휘타가 정원 풀숲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연우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으로 변하는 바람에 어디서 나오지 못한 건 아닌지.
당황스러워 또 울고 있지는 않을지 속이 타들어 갔다.
정원을 뒤지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내렸던 비로 냄새가 다 씻겨져 실내와 달리 고양이의 냄새를 조금도 맡을 수 없었다.
풀숲을 뒤지고 다녀서 옷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걸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설마 밖으로 나간 건가.
허리를 들어 담장을 너머를 보고 있는데 효조가 오고 있었다.
늘 어깨에 메고 다니던 털가죽을 돌돌 말아 들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효조가 들고 있는 털가죽 안에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에.
은빛의 털이 얼핏 보였다.
아니겠지. 효조한테 간 건 아니겠지.
효조가 정원 문 앞에 서서 휘타에게 말했다.
“안에 들어가도 될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내 손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 그러지 못할 텐데.”
효조의 답을 들은 휘타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짐작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휘타가 직접 문을 열었다.
한 걸음 들어온 효조가 휘타의 상태를 보고 비웃었다.
“그리 애타게 찾기 전에 잘 데리고 있었어야지.”
효조가 제 털가죽을 내밀었다. 휘타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그 안에서 얌전히 자는 고양이를 보자 화가 나면서도 안심이 되어 긴장했던 어깨의 힘이 풀렸다.
“감사합니다.”
“내 눈에 띄었길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발견했으면 어쩔 뻔했어.”
휘타는 제 속도 모르고 털 속에 파묻혀 곤히 잠든 고양이를 들었다.
“수호령이 꽤 천방지축인 듯하니 네가 신경을 많이 써야겠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효조의 눈빛이 다정했다.
미친놈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에게서 볼 수 없는 눈빛.
효조가 연우를 보는 눈은 다른 사람을 보는 눈과 다르다.
기분이 나빠진 휘타가 손으로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덮었다. 효조의 시선으로부터 차단하고 싶어서였다.
“잘 데리고 있어. 뺏기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뺏긴다니.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빼앗겠다는 선전포고인가.
선전포고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휘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음성에 날이 섰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휘타가 먼저 몸을 돌려 걸었다.
*
연우는 휘타의 방을 나온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이후에 누군가가 품에 안긴 것까지.
다만 그 누군가가 기억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했는데 떠오를 거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가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대를 옮겼다는 말입니까?”
“네. 그건 확실해요.”
행동이 조심스러웠고 고양이를 부르는 음성이 친근했다.
연우가 강하게 거부했다면 수호령도 도망갔을 텐데, 그녀의 감정이 그렇다 보니 수호령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편안하고 무섭지 않았어요.”
“그대가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거네요.”
“하지만 제가 잘 아는 사람은 한정된 걸요.”
휘타, 사림, 소호.
이 셋뿐이었다.
연우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자 가만히 보고 있던 휘타가 하나 더 접어야 한다고 했다.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누구요?”
“효조.”
“네에? 아니에요. 전 효조 님이 편하지 않아요.”
“안겨서 잘만 자던데 무슨.”
휘타가 혀를 차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전 기억나지 않아요.”
연우도 효조가 발견해 그의 품에 안겨서 왔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그건 연우의 뜻이 아니었다. 고양이의 뜻이었지.
“오늘 그대 때문에 여러 사람이 수고했어요. 아무래도 그대의 방을 옮겨야겠습니다.”
“어디로요?”
“여기.”
휘타의 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연우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였다.
*
며칠 뒤.
휘타와 사림, 소호가 심각한 얼굴로 탁자 위에 앉아 제 몸을 핥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봤다.
“호야, 네 보기엔 어떠냐. 고양이가 맞아?”
“아무리 봐도 고양이라고 하기에는 좀.”
소호가 말을 얼버무렸다.
며칠 사이에 연우의 수호령이 훌쩍 자랐다.
손으로 들어 올릴 때마다 무게가 부쩍 늘어난 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호가 사림을 힐끗 봤다.
“사림. 네가 먹이를 너무 많이 드려서 이런 거 아니냐?”
“말이 되는 말씀을 하세요. 많이 먹는다고 종이 달라집니까?”
고양잇과인 건 맞았다. 생김새가 딱 그랬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보통 고양이의 성장 속도보다 훨씬 빨랐고, 외형도 조금씩 달랐다.
커다란 발, 날카로워지는 발톱, 매서운 눈매.
소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삵도 아니고…….”
사림이 휘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딱 떠오르는 짐승이 있긴 한데…….”
휘타도 사림처럼 떠오르는 짐승이 있긴 했다.
사실 그가 제일 먼저 고양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만 안 했을 뿐 어떤 짐승인지 예측을 하고 있었다.
휘타가 열심히 앞발을 핥다가 잠이 든 연우의 수호령을 보고 입술을 떼었다.
“호랑이.”
호랑이라는 말에 소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모색이 다르지 않습니까. 모색이야 그럴 수 있다 해도 무늬가 없습니다.”
“모색이나 무늬는 크면 달라질 수도 있다. 어쨌건 고양이는 아니다. 호랑이에 가까워.”
턱을 괸 휘타의 얼굴이 우울해지자 사림이 소호의 소맷자락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왜? 정말 호랑이가 맞는지 더 확인해봐야…… 읍!”
사림이 소호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문을 열고 나왔다.
“사람이!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크게 외치던 사림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뭘?”
“생각해봐요. 휘타 님의 수호령은 늑대인데 아가씨의 수호령이 호랑이면 좀 그렇잖아요.”
“뭐가.”
갑자기 사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지. 아가씨의 수호령이 세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휘타 님!”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가씨의 수호령이 호랑이면 장점이 많습니다.”
“나도 안다.”
휘타의 음성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겁지 않았다.
잠에 취해 있는 연우의 수호령을 안아 들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에 봤던 우울한 표정이 사라지고 없었다.
“고양이면 어떻고 호랑이면 어때. 컸다는 게 중요하지.”
“네? 아…… 네. 뭐.”
“이 정도의 성장이라면 금세 성체가 되겠지?”
“네. 그것도 뭐.”
“이제 그 죽 같은 건 그만 먹이고 고기로 준비해. 이 이빨을 봐. 절대 그런 거 먹을 이빨이 아니야.”
“작게 잘라서 그렇지 고기로 바뀌었어요.”
“그럼 더 큰 거. 그 뭐냐. 소호가 먹는 거. 그런 거 먹어야 할 시기다.”
휘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림은 제 걱정이 쓸데없었음을 깨닫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라면 연우의 수호령은 여느 수호령과 달리 금방 성체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것과 별개로 특별한 수호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간혹 하얀색의 호랑이를 보긴 했지만, 은빛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무늬가 하나도 없는.
밤처럼 새카만 흑빛과 빛처럼 밝은 은빛이라.
정말 천상의 조합이었다. 사림은 연우가 휘타의 신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인간으로 치자면 청소년기였다.
수호령의 영향으로 감정의 변화가 자주 일어나긴 했어도 자신이 수호령으로 변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수호령으로 변하는 것을 아직 연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나, 변화의 조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제일 큰 변화는 휘타와의 관계였다.
이렇다고 말할 일들이 있지는 않았다.
다만 방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한 후부터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그가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비록 침상을 따로 쓰고 있었지만.
그가 흔들리고 있다 말한 뒤부터 연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언제쯤 그에게 꿈이 아님을 말해줄까 시기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연우는 잊고 있었던 그의 붉은 끈을 떠올렸다.
네 번째 삶이 시작된 이후로 본 적이 없지만 그가 분명 갖고 있으리라.
저녁을 먹고 그가 일을 나가기 전 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끈 아직도 갖고 있어요?”
“어떤 끈?”
“당신 수호령이 어렸을 때 지상으로 나간 적 있잖아요. 눈이 내리는 날.”
휘타의 이마에 얇은 주름이 잡혔다.
“그것도 꿈에서 알게 된 겁니까?”
“아니요. 우리, 그날 만났어요.”
휘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당신 그날 다쳤어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떤 남자와 여자아이가 당신을 구하고 상처에 묶어줬던 붉은 끈을 아직도 가지고 있죠? 여자아이의 머리를 묶고 있던 끈.”
“설마.”
휘타에게 기억나지 않은 그 시간을 기억하라 강요하지 않겠다.
“네. 제 거예요.”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오래전부터임을,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말하고 싶었다.
“끈에 우(雨)라고 쓰여 있잖아요.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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