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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73화 (73/100)

<73화> 내기를 또 수정해야겠습니다.

2018.09.11.

연우의 표정이 약간 긴장되긴 했지만, 간간이 웃으며 효조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갑자기 수호령이 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연우에게 수호령이 생겼다는 사실이 비밀은 아니었으나 일찍 소문나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것이 효조라면 더욱.

그저 기분이 그랬다. 효조가 아는 게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연우가 수호령이 되었다가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을 효조가 보게 되는 게 더 문제였다.

연우와 효조가 서 있는 곳은 휘타의 정원 밖이었다.

휘타의 허락이 있지 않은 이상 효조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

무슨 심사인지 늘 제멋대로인 그가 규칙을 지켰다.

휘타는 규칙을 지킨 효조도, 그와 대화를 나누는 연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게 헛기침을 하며 존재를 알리고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흠, 하는 소리를 들은 효조와 연우가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그녀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 물으려다 옆에 있는 효조를 보고 휘타도 제 마음을 다스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휘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일은 무슨. 지나다가 우연히 만났을 뿐이야.”

누굴 바보로 아나. 여긴 절대 효조가 지나다니는 장소가 아니다.

“요즘 연우가 건강이 좋지 않아 밖에 오래 있으면 안 됩니다.”

휘타가 팔로 연우의 어깨를 감싸려다 내렸다. 내기 중이었으니까.

뜻 모를 그의 말에 몇 번 눈을 깜박이던 연우는 곧 수호령 때문임을 이해하고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효조가 허리를 숙여 연우의 얼굴을 살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자세히 보니 안색이 조금 어둡구나. 아프면 아프다고 하지 그랬어. 그것도 모르고 붙잡고 있었으니 내가 미안해지는군.”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천하의 효조가 저런 말을 하다니.

대체 저놈의 속을 알 수가 없다.

“괜찮습니다. 대화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리 생각해주니 고마워. 휘타 네가 잘 보살펴주어라.”

효조가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건 착각인가.

어깨에 걸린 가죽의 털이 흔들거렸다.

휴우. 옆에 있는 연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맞았다.

왜? 전남편이라서? 그래 봤자 꿈이었는데.

맞다. 연우에게 꿈은 꿈이 아니었지.

꿈을 현실로 받아들였기에 현실의 휘타를 좋아하고, 사신의 신부가 되기를 자처했다.

“수호령으로 변하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내가 분명 혼자 외출하는 건 삼가라 했을 텐데요.”

“혼자 아니에요.”

연우가 눈으로 가리킨 쪽을 보자 사림이 손을 흔들었다.

정말 연우의 말대로 혼자가 아니었다.

“아무튼, 효조 님은 아직 그대에게 수호령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아는 건 상관없으나 아직 장공 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상태라 내가 아닌 효조 님의 입을 통해 들어가면 곤란해요.”

“아,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죄송해요. 그런데 이미 절 보시고 부르는데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못 본 척 피해도 됩니다.”

“그건 싫어요.”

연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피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간발의 차로 그녀가 효조를 먼저 봤고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휘타의 말처럼 못 본 척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세 번째 삶을 통해서 경험했다.

효조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도망갔으나 그게 도리어 그를 자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첫 번째 삶에서 연우의 무엇이 그를 자극했는지 모른다.

두 번째는 복수 때문에 스스로 그 구덩이에 들어갔고, 세 번째는 그를 피해 도망가다 들키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연우가 효조의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고 알게 된 건 절대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연우도 모르는 무언가가 그를 착각하게 한 거였다.

무엇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지만, 휘타의 곁에 있는 이상 효조는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해서 무작정 피하고 숨지 않기로 했다.

부딪치면 인사하고, 가볍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

그게 낫겠다 싶었다.

경계는 하되 그의 주변 인물이 되자.

이번 삶에서 효조가 달라졌다 느끼고 있다. 물론 온전히 느낌을 믿지 않는다.

그가 미쳐 있음을 항상 명심하고 있다.

“효조 님을 싫어한다더니 전남편이라 정이라도 남았나 봅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끔찍한 소리를.

연우가 손을 힘차게 내저었다.

“그런 거 없어요.”

“내 귀로 들었습니다. 대화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고 그대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예의상 그런 말도 못 해요?”

“예의 같지 않던데.”

그가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연우가 직접 알려줬다.

“저를 죽도록 괴롭히던 사람이었어요.”

“남편이?”

“네.”

“효조 님이라면 그럴 수 있는 놈…… 한데 왜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됐습니까?”

연우가 피식 웃었다.

“그는 미쳤잖아요.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비록 꿈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기묘한 꿈입니다.”

그가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했다.

모두 꿈이 아닌 당신이 겪은 사실이니까.

언젠가는 당신이 나를 보며 기시감을 느낄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그때 전부 말해주면 당신은 믿을까요.

괜찮다. 영원히 믿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함께 지내왔던 지난 추억을 되새기지 못한다 해도.

지금부터 많은 추억을 쌓으면 되기에.

“참, 내기를 또 수정해야겠습니다.”

휘타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하다 촉촉이 젖어드는 연우의 눈을 발견했다.

이 여자는 참으로 눈물이 많다.

여자의 눈물을 좋아하지 않은 그인데 연우의 눈물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어느 부분을요?”

그녀의 눈동자를 적셨던 물기가 금세 말라 없어졌다.

휘타는 못 본 척 말을 이어갔다.

“남들 앞에서는 약간의 스침은 내기에 포함되지 않기.”

“약간의 스침?”

“예를 들자면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에서 내가 내 여인의 어깨도 끌어안지 못하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렇겠네요. 그럼 손을 잡거나 어깨를 끌어안는 것까지?”

“뭐 그 정도면.”

성에 차지 않는 휘타였지만 아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

갑자기 연우가 손뼉을 쳤다.

“연회에 초대받았어요.”

“누가 그대를 초대했다는 겁니까.”

“효조 님이요.”

효조? 왜 계속 효조와 엮이는지.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지 말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함께 가면 되겠군요.”

“휘타 님은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아니 효조를 싫어한다면서.

죽도록 괴롭히던 사람이라면서.

상대가 상대라 거절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한다.

거기까지는 이해하는데 마치 휘타의 이름을 꺼내지 않아 참석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설령 효조가 참석하지 말라고 대놓고 말했어도 같이 가자고 조르는 게 정상일 텐데.

마음과 다르게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혼자 다녀오십시오.”

*

연우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한껏 치장한 거울 속의 여자를 자주 봐왔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촘촘하게 꽂힌 장신구를 빼내 올린 머리를 풀었다.

효조만 있는 연회에 이렇게까지 꾸미고 가고 싶지 않았다.

연우는 휘타가 정말 그녀만 보낼지 몰랐다.

질투하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연회에서 제일 걱정이 되는 일은 바로 현사였다.

정현옥 일당이 없으니 사신의 신부를 먹으면 힘이 생긴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지진 않았을 것이다.

운명이 현사와 어떤 만남을 줄지 걱정되면서도 이 역시 피하지 않기로 했다.

연우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빗어 정리하고 밖으로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사림이 연우의 머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머리가 아까와 다른데요?”

“거추장스러워서 풀었어.”

“그래도 효조 님께서 초대하신 연회인데요. 다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꾸미고 오는 자리입니다.”

“과하게 꾸며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없는걸.”

“네. 알겠습니다.”

사림의 뒤를 따라 연회장으로 갔다.

몇 번이나 갔던 곳이어도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잊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기억했다. 자연스럽게 이쯤에서 모퉁이를 돌아야 하고, 저쪽 정원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녀가 예상했던 길을 따라 사림이 안내하고 있었다.

앞서가던 사림의 연우 옆으로 와서 걸었다.

“아가씨, 요즘 피부에서 빛이 나세요.”

“그래?”

연우가 멋쩍게 제 볼을 쓸었다.

“화장 지워지니 만지진 마시고요. 이래서 어린 수호령이 정말 좋다니까요.”

“딱 그것만 좋은 거 같아.”

옷을 벗은 채로 깨어나는 건 절대 좋지 않았다.

수호령으로 변했을 때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그렇긴 하죠.”

사림이 위로의 미소를 보냈다.

어느새 연회장 문 앞에 섰다.

연우는 심호흡을 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효조가 허튼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휘타가 없지만 혼자서 잘해낼 수 있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받고 적당히 눈치껏 분위기를 맞춰주면 된다.

그런데 만약 수호령으로 변하면 그건 어쩌지.

“사림아, 옆에 있을 거지?”

“그럼요. 전 원래 밖에 있어야 하는데 허락받았습니다.”

휘타가 장공에게 연우의 수호령에 대해 보고했다 들었다.

변하면 사림이 즉시 데리고 나오기로 했어도 걱정이 되긴 했다.

“제발 수호령이 가만히 있어 주면 좋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변해도 다들 겪었던 일이니까 이해할 거예요. 가끔 수호령이 늦게 생긴 분들이 계셔 아주 생소한 일도 아니고요.”

연우가 예전처럼 주눅이 들어 있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수호령이 어서어서 자라줬으면.

고양이라 그보다 훨씬 사나운 짐승을 상대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문이 열렸다.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악공들의 연주.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얇은 장막. 맛있는 음식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

두렵기만 했던 이곳을 이제는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다.

연우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머리를 올린 채로 둘걸 후회가 됐다.

풀어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불빛에 반짝거려 사람들이 이목을 더 끌었다.

오래전에는 이 시선이 날카로운 칼처럼 몸에 꽂혔는데.

지금은 즐기기로 했다. 굳이 먼저 위축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연우의 자리에서 효조가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효조의 옆에 설홍이 앉아 무어라 귓속말을 하며 연우를 흘깃 봤다.

연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설홍의 귓속말이 끝나자 효조가 연우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움직일 때마다 겹겹이 입은 치마에서 사락사락 소리가 났다.

연회장이 조용한 것도 아닌데 연우의 귀에 유난히 크게 들렸다.

효조 앞에 앉자 그가 묻는다.

“금(琴)을 아주 잘 켠다지?”

“겨우 들어줄 수 있는 수준입니다.”

“겸손하기는. 내 아내가 대단하다 그러던데? 들어보고 싶다.”

설홍이 금에 대한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아마 기생 중의 한 명에게 들었겠지.

거절해봤자 기어코 들을 효조이기에 연우가 연회장 가운데로 갔다.

시녀가 연우 앞에 금을 놓아준다.

그때처럼 똑같은 상황이 됐다. 하지만 연우가 다르게 바꿀 수 있었다.

줄 위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으로 곡을 떠올렸다.

효조가 좋아했던 무제가 아닌 다른 곡으로.

지상에서 휘타를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만들었던 곡.

오로지 휘타만을 위한 곡이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만이 담겨 있다.

그렇게 이번 생의 시작과 끝은 그로 채우리라.

빛처럼 아름다운 곡이었고 살랑이는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조용해진 공간에 연우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해주는 연주였다.

저도 모르게 턱을 기대고, 눈을 감고 머릿속에 각자의 꿈을 그려보게 되는 연주.

끝이 났어도 다들 한참 동안 여운에 빠져 있어 박수가 나오지 않았다.

제일 먼저 박수를 친 사람은 효조였다.

“역시 겸손이었던 게야.”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꽤 길게 이어진 박수.

다들 기분 좋은 눈으로 연우에게 보내준다. 그것이 연우의 기분 또한 좋게 해주었다.

그녀는 이 연회장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줄 몰랐다.

기분이 살짝 둥실 뜨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순간.

손에서 은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있어서 서둘러 사림을 찾았다.

사림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눈치채고 다가왔다.

“효조 님, 제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정신이 흐릿해지고 있지만 주위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고개를 빼고 연우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들도 보였다.

수호령이 좀 큰 건가.

매번 까무룩 정신을 놓았는데 오늘은 보이고 들리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

“멈춰라.”

달려오는 사림에게 말한 사람은 효조였다.

은빛의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가 동공이 커진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효조 님, 최근 아가씨께 수호령이 생겼어요.”

“나도 알고 있다. 장공 님께 들었느니라.”

효조가 느릿한 걸음으로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신기해. 지상에서 온 사람에게 수호령이라니. 탐야의 축복을 받았군.”

그가 손을 내밀자 고양이가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고양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움찔. 몸을 한 번 떨더니 곧 효조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내가 좋은 게로구나.”

“저 효조 님…….”

사림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서 연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상대는 효조다.

섣불리 말을 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효조가 고양이를 보고 즐거워했다.

“오랜만이야. 이렇게 작은 녀석은.”

“효조 님.”

이번엔 설홍이 제 남편을 불렀다.

“수호령이지만 그래도 다른 남자의 여인입니다. 그리하시면…….”

“휘타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그저 새끼 고양이일 뿐이야. 이렇게 어린 수호령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나. 귀여워서 그래.”

흐뭇하게 고양이를 바라보며 제 손가락을 입에 물렸다.

뭣도 모르는 고양이가 효조의 손가락에 매달리더니 깨물었다.

아아, 아가씨. 어쩌시려고.

사림은 눈을 감고 싶었다.

하긴 이건 연우 탓이 아니다. 무슨 생각이 있겠어.

고양이 눈에는 그저 장난감이다.

그래도 이건.

어찌할지 난감해하는 사림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림은 휘타의 등장에 뛸 뜻이 기뻤다.

“언제 사람으로 돌아올지 모르니 이만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휘타가 웃고 있었지만 그를 오랫동안 보필한 사림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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