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웃어도 안 봐줄 거예요.
2018.08.28.
“이 손 안 놔?”
손목을 흔드는 단희의 힘은 생각보다 셌다.
하지만 연우는 팔에 힘을 실어 단희의 손목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했나요? 휘타 님 근처에 누가 있으면 이렇게 폭력을 썼어요?”
“내가 쓰든 말든 무슨 상관…….”
“난 상관할 자격, 충분히 있어.”
연우의 서늘한 음성에 단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휘타 님과 밤을 보냈든 보내지 않았든 난 그분의 여인임이 틀림없거든요.”
“웃겨. 누구 마음대로!”
“휘타 님 마음대로지요. 공식적으로 장공 님께 날 소개했으니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단희의 입술이 씰룩였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이미 성안에 돌았다.
성을 드나들며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졌으니 모두가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우가 손목을 놔주자 단희가 제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난 휘타 님의 부인이야. 다들 날 그렇게 불러.”
가슴을 펴고 말하는 단희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연우.
술을 가득 채운 잔을 반쯤 비우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단희에게 물었다.
“알아요. 그래서?”
“그래서라니?”
“다들 당신을 휘타의 부인이라고 부르는 게 뭐. 그걸 휘타 님이 인정하신 적 있나요?”
자신만만했던 단희의 눈이 커지고 창피함에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 고작 그걸로 본인의 위치가 그쯤 된다고 착각했나 보죠?”
“이!”
손을 들어 올렸던 단희는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다시 내렸다.
서슬 퍼런 눈으로 보는 단희에게 연우가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당신이 이러는 거 휘타 님이 모르실 거 같아요? 그가 모를 거라 생각해요? 그럼 당신은 그에 대해 모르는 거예요.”
단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 동안 연우를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회장을 가로질러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가만히 단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연우가 남은 술을 마시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 척하고 있었으나 단희가 수호령으로 변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서 솔직히 무서웠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다스리느라 혼났다.
다만, 사람이 많은 장소라 수호령으로 변해서 연우를 공격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사림이 지켜보고 있기도 했고.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적막이 흘렀다.
기생들이 연우의 눈치를 봤다.
괜히 분위기를 망친듯해 미안해진 연우가 웃었다. 아주 어색하게.
“나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네. 다들 휘타 님이 오실 때까지 즐기세요.”
그제야 조금씩 삼삼오오 대화하기 시작했다.
혼자 상석에 앉아 있으려니 민망스러워 혼자 술을 따라 홀짝홀짝 마셨다.
그때 구석에 기생 하나가 일어나 연우가 있는 쪽으로 왔다.
연우나 단희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연우 앞에 서서 공손하게 인사하고 앉았다.
“저…… 제가 술 한 잔 올려도 될까요?”
말해놓고 수줍은 듯 연우를 힐끔 봤다.
곤란했다.
취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그만 마시려고 했는데.
거절하면 어린 기생이 민망해할 것 같아서 이번 잔만 마시기로 했다.
“아, 그래요.”
술잔을 내밀자 두 손으로 술병을 잡고 따라줬다.
“고마워요. 나도 따라주고 싶은데…….”
여유분의 잔이 없었다.
연우의 말이 끝나기 전에 기생이 제자리로 달려가 잔을 가지고 다시 달려와 내밀었다.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조심해야죠.”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기생이 얼굴을 옆으로 돌려 술을 마셨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그냥 마주 보고 마셔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런 상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연우였지만 지하계의 신분제를 따라야 해서 꾹 참았다.
기생이 돌아가자 연우가 사림을 향해 손짓했다.
연우 옆으로 온 사림이 작게 박수를 쳤다.
“오~ 역시 아가씨는 멋있으세요.”
“멋있긴.”
“그동안 단희가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데요. 단희를 좋아하지 않은 기생들이 한소리 하고 싶어도 그 별명 때문에 참았거든요. 싫어도 좋은 척하고요. 근데 오늘 아가씨가 딱! 결론을 내려주셨네요.”
“나 때문에 괜히 엄한 데 화풀이하지 않겠지?”
뒤늦게 걱정이 찾아 왔다.
예전에는 몇몇 기생들만 있는 자리였지만, 오늘을 전체 기생들 앞에서 창피를 줬다.
아직 휘타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 단희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는 건 단단히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그럴 수도 있어요. 워낙 뒤가 구린 여자라…….”
사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연우는 별안간 얼굴에 확 퍼지는 열기를 느꼈다.
이제 확실히 취했다.
꼬이는 혀를 가까스로 펴가며 말했다.
“휘타 님은 왜 저런 여자를 곁에 둬서.”
휘타의 그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없으시죠.”
사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한다.
“누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냐.”
병풍 뒤에서 휘타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가 나타났다.
“으억!”
갑작스러운 휘타의 등장에 놀란 사림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뒷문이 있다는 거 잊었나 보구나.”
“놀랬잖아요! 멀쩡한 앞문 놔두고 왜 뒷문으로…… 아얏!”
휘타에게 꿀밤을 맞은 사림이 얼굴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문질렀다.
“네가 이러니까 뒷문으로 들어오는 거지. 주인 뒷말하는 녀석 꼬리 잡으려고.”
“아우, 아퍼.”
“네 자리로 돌아가. 아니 밖으로 나가. 꼴 보기 싫으니.”
“예.”
구시렁거리며 사림이 돌아갔다.
휘타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기생들을 향해 나라가 명했다.
모두가 나가고 연우와 휘타, 단둘만 남았다.
“단희의 성정이 워낙 불같고 포악해 다들 쉬쉬하는데 그대는 나의 여인이라는 것이 든든한 뒷배가 되었나 봅니다.”
휘타가 다 듣고 있었다.
나서서 도와주지 남 일인 것처럼 멀찍이 방관하니 단희가 날뛰지 않는가.
“불같고 포악한 단희를 왜 곁에 두세요?”
이렇게 된 거 단희를 다른 기생들과 똑같이 대하라고 할 참이었다.
취해서 그런지 용기가 생겼다.
휘타가 어떤 목적으로 연회를 여는지 알고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단희는 다르다. 휘타의 부인? 웃기고 있다.
그는 나와 결혼했고 그의 부인은 나야.
물론 아쉽게도 휘타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연우는 그의 여자다. 그럴 자격이 있었다.
“내가 그걸 그대에게 설명해야 합니까.”
“정말 아~무,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요?”
연우가 손을 옆으로 저었다.
“나에 대해 잘 안다면서 그걸 몰랐다니 조금 섭섭합니다.”
그녀 옆에 앉은 휘타가 몸을 연우 쪽으로 돌렸다.
탁자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기대며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저 웃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그의 웃음.
이 와중에 웃는 그에게 반하고 만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된다.
“웃어도 안 봐줄 거예요.”
“봐달라고 안 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잘못한 게 없다니요. 그런 소문이 돌면 바로 잡아야죠. 착각하게 두는 것도 잘못이에요!”
휘타에게 삿대질하는 연우.
정말 취했다. 삿대질이라니.
저도 모르게 하면서 놀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나를 사랑한다면 소문의 여자도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떤 여자가 미쳤다고 사랑하는 남자의 다른 여자를 받아줘요?”
더 따지고 싶었다.
그런데 핑그르르.
하늘이 돈다.
“이 씨, 어지러워.”
연우가 탁자를 짚었다.
“씨? 지금 나 들으라고 그러는 건가?”
“어지러워서 혼자 그런 거예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술술 넘어가길래 독하다는 걸 잊었다.
눈앞의 휘타가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아무래도 이러다가 정신을 잃을 거 같은 연우가 그를 향해 외쳤다.
“제가 쓰러져도 직접 옮겨주지 마세요. 우리는 내기 중이고, 먼저 만진 사람이 지는 거니까요.”
그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확실히 할 건 해야 한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업어주지 않겠다 내가 먼저 말했고.”
맞다. 그랬지.
“쳇.”
연우가 혀를 찼다.
잠시 휘타를 흘겨보다가 탁자 위로 엎드렸다.
그러더니 눈을 감았다.
“이봐요.”
불러도 답이 없었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휘타는 잠든 연우를 보며 탁자 위로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새근새근 잘도 잤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술 향기가 옅게 났다. 미묘하게 다른 향이었다.
‘당신이 이러는 거 휘타 님이 모르실 거 같아요?’
연우의 말대로 기생들 사이에서 부리는 단희의 횡포를 휘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건.
그들의 일에 끼어들 마음이 없었다.
사람들이 부르는 단희의 별명을 정정하지 않은 건 굳이 나서서 그런 일까지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찮기도 했고.
단희가 신부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져왔다.
물론 단희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들이 휘타에게 정보가 되는 줄 몰랐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곁에 두고 지켜봤다.
이제 확실하지 않아도 신부 후보인 연우가 나타났으니 제지를 해야 하는가.
그나저나 이 여자를 어찌한다?
연우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 같다.
직접 옮겨줄 수 있으나 잠들기 전 연우가 했던 말 때문에 그건 제외.
옮겨주고 아니라고 시치미떼면 되지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호야.”
휘타가 소호를 불렀다.
소호에게 연우를 그녀의 방까지 옮기라고 했다.
“제가요? 제가 아가씨를 안아서요?”
소호가 머뭇거렸다.
“안 될 건 뭐야.”
그게 뭐 어떻다고.
“네. 알겠습니다.”
소호가 조심스럽게 연우의 다리와 등 뒤로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움직임을 느꼈는지 그녀가 작게 신음을 내며 소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놀란 소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딱딱한 자세로 멈췄다.
그리고.
일어나던 휘타의 동작도 멈췄다.
그녀가 자는 중이다.
모르고 저러는 거고, 설령 알고 그런다 해도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래. 나와는 상관이 없다.
휘타가 먼저 나갔다.
*
그날 밤.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끙끙대고 있는데 사림이 숙취에 좋다며 차를 가져왔다.
“속이 울렁거려.”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잠시 후면 잠잠해질 겁니다.”
사림의 말대로 차를 마시고 시간이 지나자 울렁거림이 잦아들었다.
연우는 차를 마신 덕분에 참을 만했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어렴풋이 어제 휘타에게 삿대질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다른 건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삿대질은 확실했다.
“사림아, 나 휘타 님께 실수했어?”
“아뇨.”
“아니야. 한 거 같아.”
“옳은 말씀만 하셨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옳은 말이라면 연회에 대해서 말했을까? 아니면 단희를 멀리하고 했을까?
뭐가 됐든 휘타의 심기를 언짢게 했을 듯하다.
“화내지 않으셔?”
“그럼요.”
사림이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속 풀리는 음식으로 저녁 준비했어요. 휘타 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아가씨께서 더 누워 계시고 싶어하면 나중에 드시라고 하셨어요.”
“아니야. 지금 먹을래.”
실수했나 안 했나 확인이 필요했다.
황급히 휘타의 방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싸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로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말 큰 실수를 한 거 같은 연우는 말할 기회를 노리다가 입을 열었다.
“휘타 님.”
“네.”
다행히 여느 때처럼 대답을 해줬다.
“혹시 제가 어제 실수를 했다면…… 죄송합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무조건 사죄하는 게 좋다.
“기억은 합니까?”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삿대질을 했나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이 맞았다.
정말 삿대질을 했구나.
“죄송해요.”
“술이 독하다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어쩌자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인사불성이래. 그랬으니 삿대질한 것만 어렴풋이 떠오르고 나머지는 까맣게 잊었겠지.
추한 모습을 보였으면 어쩌나.
가까스로 잠잠해진 머리가 걱정에 짓눌려 다시 아파졌다.
“그 정도였어요? 어떡해. 정말 정말 죄송해요.”
연우가 머리를 숙이며 거듭 사과했으나 휘타는 여전히 기분이 나쁜 얼굴이었다.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말이야.”
“제가요? 삿대질 말고 다른 실수도 했어요?”
“삿대질은 약과입니다.”
울상이 지어진다. 삿대질이 약과면 대체 뭐를 했던 걸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요.”
그게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뭔지는 알고?”
“저는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이 안 나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쯧. 혀를 차고 연우를 뚫어지게 보다 시선을 옮겼다.
그가 단단히 화가 났다.
휘타가 연우에게 화를 직접 표현한 적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어 어떻게 그의 화를 풀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지. 지금의 그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에게 나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으니까.
어쩌면 앞으로 이보다 화내는 일이 잦아질 수도 있었다.
술을 멀리했어야 했다. 제 잘못이라 그저 미안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
“제가 어떤 실수를 했나요? 말씀해주시면 고칠게요.”
“취해서 그런 걸 어찌 고칩니까.”
“안 마실게요. 죄송해요.”
“알았습니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계속되는 사과에 휘타도 받아줬다.
그런데 그는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진짜 화난 이유를 말하지 않으니 가슴에 뭔가가 쌓이는 듯했다.
솔직히 삿대질 정도야 웃으며 넘길 수 있어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씨, 한 것도.
단희에 대해 간섭한 것도.
그 외의 것도.
생각이 안 날 만큼 아무 일이 아니었다.
단지 딱 하나가 거슬렸다.
“휘타 님. 그런데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씀해주세요. 알아야 같은 실수를 안 하죠.”
“설마 정신이 멀쩡할 때도 그럽니까?”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하자니 괜히 좀생이가 되는 것 같고, 안 하자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봐 짜증이 났다.
이래도 짜증이고 저래도 짜증이었다.
“됐습니다.”
휘타는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오늘은 입맛이 없어서요. 마저 들어요.”
밖으로 나간 휘타는 문을 닫고 기댔다.
자꾸 소호의 품으로 파고드는 연우의 모습이 그려진다.
머리를 흔들며 잊으라고 해도 선명하게 남았다.
“아무리 취해서 인사불성이 돼도 그렇지 아무 남자한테나…….”
중얼거리던 휘타가 말을 멈췄다.
나 왜 이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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