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나를 좋아하는 거 맞습니까?
2018.08.24.
장공과 대화가 간단하게 끝났다.
밖으로 나온 휘타는 효조와 얘기를 나누는 연우를 발견했고,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안색이 조금 변해있다.
효조가 평소에 비하면 제법 부드러운 눈길로 연우를 보고 있었기에 그녀의 안색이 변할 이유가 없는데.
하긴 대부분의 지하계 사람들이 꺼리는 효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럼 그녀는 효조도 알고 있다는 건가.
꿈에서 효조도 만났다는 거야?
문득 사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가씨는 저를 알고 있었던 분처럼 반갑게 끌어안아 주셨어요.’
당시에는 별 의미 없이 받아들였건만 연우는 사림도 알고 있었다.
대체 뭐야. 어떤 꿈을 꾸었기에 지하계에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지.
그것도 이 성안에서 사는 사람들로만.
연우와 효조는 짧게 얘기를 끝냈고 효조가 먼저 갔다.
그런데 그의 뒷모습을 따라 연우의 시선이 옮겨간다.
그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효조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곁에 다가가는 걸 모를 정도로 연우는 넋이 나가 있었다.
“누굴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
엄마야, 연우가 작게 외치며 몸을 움츠리더니.
“효조 님이요.”
서슴없는 말투였다.
“성안에 보는 눈이 많습니다. 휘타의 여인이 외간 남자를 그리 보고 있으면 좋지 않은 말이 나와요.”
“아, 죄송해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조심할게요.”
아무 생각이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효조 님도 꿈에서 봤습니까.”
“네.”
“그는 그대의 꿈에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머릿속으로 굳이 그런 거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말이 먼저 나오고 말았다.
“음…… 그건 비밀이에요.”
곤란하다며 웃었다.
“나를 좋아하는 거 맞습니까?”
휘타는 자신의 음성이 필요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왜 그걸 확인하세요?”
질문이 엉뚱한 데로 튀었음을 휘타도 인정한다. 후회해도 늦었다.
이 여자 앞에서는 입이 주인의 뜻을 따라주지 않아 짜증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확인하고 싶어서.”
“좋아해도 말하기 싫은 비밀은 있는 법이에요. 너무 많은 걸 알면 다쳐요.”
연우가 팔을 들어 휘타의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러더니 ‘내기 중이었지.’ 하면서 다시 내렸다.
방금 연우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려고 했던 거 같다.
“지금 내 어깨를 두드려주려고 한 겁니까.”
“네.”
“왜?”
“세상을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요.”
휘타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산 그가 평범한 인간인 연우에게 세상을 모르는 거 같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럴 만했다.
뭐라 대꾸하기 전에 연우가 휙 돌아서더니 앞서 걸었다.
기분이 좋은지 그녀의 걸음이 나풀거렸다.
둘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휘타를 지나가며 연우가 했던 말을 따라서 했다.
“휘타 님은 세상을 잘 모르시는 거 같아요.”
“너 이 녀석.”
연우를 만난 지 겨우 이틀째다.
이틀도 안 되는 짧은 동안 그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으로 모자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항상 웃던 분이 짜증을 내시다니.”
키득거린 사림이 쪼르르 연우 옆으로 갔다.
그러게. 이게 다 저 채연우 때문이었다.
*
연회장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진한 분 냄새가 났다.
연우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치장한 기생들이 휘타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다.
간드러진 음성으로 부르는 기생들은 고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모두 연우를 보는 눈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대외적으로 휘타의 여자라고 알려진 연우가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우는 그가 연회를 벌이며 기생들과 일정한 시간을 보내는 까닭을 알고 있어도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데 기생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예전에는 연회에 왔을 때, 휘타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기에 기생들을 보며 조금의 질투도 느끼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도 기생들을 이해하기에 꿈틀거리는 질투심을 살포시 눌렀다.
“오늘은 손님이 계시네요.”
알고 있던 대로 단희가 먼저 나와 휘타에게 팔짱을 꼈다.
끔찍하게 싫어했던 효조도 조금 반가웠는데 단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솔직히 싫었다.
그런 연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휘타가 단희에게 미소를 지었다.
“귀한 분이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오늘도 단희는 여전히 곱구나.”
그가 자연스럽게 팔을 빼내며 단희의 어깨를 감쌌고.
질투하지 않으려고 참고 있는데 저건 좀.
연우는 드러난 단희의 어깨를 잡고 있는 휘타의 손가락을 보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연회장으로 따라 들어갔다.
휘타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단희와 연우가 앉았다.
연우를 의식한 단희가 휘타를 자꾸 제 쪽으로 보게 했다.
마치 혼자만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능청스러워진 줄 알았는데, 이런 일에는 아닌 모양이었다.
휘타에게 마음이 없던 때는 도리어 이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니.
연우가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려 한 순간.
“이런.”
휘타가 술병을 빼앗았다.
“귀한 분께서 자작이라니. 나한테 따라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바쁘신 거 같아서요.”
연우의 음성에 뾰로통했다.
단희 쪽으로 몸을 틀고 있던 그가 연우를 향해 완전히 돌아앉았다.
“화났습니까.”
“아니요.”
뭐가 즐거운지 그가 자꾸 웃었다.
“화났는데 뭘.”
“아니에요. 저 보기와 달리 마음이 넓어요.”
“넓어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타에게 사랑을 달라고 구걸하지 않기로 했고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러는 건 옳지 않았다.
그가 단희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가 과거 단희에게 어떻게 했는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연우는 저를 스스로 달래며 마음을 넓게 쓰기로 했다.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휘타 님을 보필하는 여인들이잖아요. 휘타 님에게 도움을 주는 여인들이기도 하고요. 전 다 이해해요. 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작하면 어때서요. 술맛은 똑같은걸요.”
당신과 함께 있으니까.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
휘타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아 제 잔에 따르는 연우.
전부 마시더니 ‘맛있다!’ 하고 나서 휘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또 제 술잔에 술을 따라 홀딱 마셔버린다.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휘타의 미간이 티 나지 않게 구겨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의 표정 변화를 모르겠지만 연우의 눈에는 보였다.
그는 연우 앞에 놓여있는 술병을 들어서 단희에게 줬다. 그녀를 보지도 않고.
“저쪽으로 치워.”
휘타의 어깨너머로 찡그리는 단희가 보였다.
“이 술이 얼마나 센지 알고 마시는 겁니까.”
“별로 안 세던데요.”
언젠가 마셔봐서 안다.
허. 툭 내뱉은 그의 숨이 소리를 냈다.
그때와 다른 술인가.
“…… 세요?”
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모릅니다. 취해도 업어주지 않을 겁니다. 혼자 알아서 오십시오.”
아직까지 멀쩡했다.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어지럽다거나 속이 울렁이지도 않았다.
안 센데 왜 자꾸 그러지.
술이 사라지자 할 일이 없어진 연우가 안주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튀김류로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둘을 바라보던 단희가 휘타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휘타 님. 요즘 성 밖에서 유행하는 곡이 있는데 들려드릴까요?”
힐끔 본 연우는 상관하지 않고 입안의 음식을 오물오물 씹어 넘겼다.
“저도 듣고 싶어요. 금(琴) 연주를 잘한다고 들었어요.”
단희의 연주가 훌륭한 건 인정하니까.
“어머. 휘타 님께서 그런 말씀도 하셨어요?”
호호, 거리며 단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된 금 앞에 앉았다.
“연인이라는 곡입니다.”
단희가 곡명을 말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연우는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으니 조금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어지러운 듯해 탁자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들으니 정말 좋다.
단희의 연주 자세가 감상을 방해했는데, 눈을 감고 들으니 온전히 듣는 데만 집중을 하게 된다.
애절한 곡이라 단순하게 연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긴 했지만.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눈을 뜬 연우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아마 이곳이 지상이었다면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연주였다.
짝짝짝. 열심히 박수를 치는데 얼굴이 따가웠다.
휘타가 연우를 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
그녀가 입술을 움직여 ‘왜요?’ 하고 물었으나 휘타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너의 금 연주는 최고다. 말해봐. 소원을 들어주마.”
단희가 발그레 물든 제 볼은 손으로 감쌌다.
“됐어요. 매번 주셔서 넘칩니다. 오늘 연주는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한데…….”
“그래. 말해봐.”
“아가씨의 연주를 들어보고 싶어요. 아름다우신 만큼 연주도 잘하실 거 같아서요.”
“아가씨의 연주?”
이럴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회에 참석한다고 했고.
연우가 휘타를 따라 이곳에 온 목적이 이거였다.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휘타가 혹여 기억을 조금이라도 떠올릴까 싶어서, 마음의 변화라도 느낄까 싶어서였다.
그게 안 된다면 위안이라도 받기를 바랐다.
“제가 해봐도 될까요?”
휘타에게 묻자 놀란 눈으로 손을 내밀어 허락했다.
그에게 처음 연주를 들려줬던 그날로 돌아갔다.
나이 먹고 한동안 손에서 놨던 터라 긴장이 됐다.
마음을 가다듬고 금 위로 손을 얹었다.
“곡명은 무제입니다.”
그에게 들려줬던 무제.
처절하고 슬펐던 원곡 그대로 연주했다.
세 번째 삶이 시작되고 휘타를 만났던 기억으로 들어갔다.
그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받게 되고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인연을 떠올렸다.
그와 보냈던 시간이 연주하는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 가 마음이 뭉클해졌다.
결국, 마무리는 바뀌었다.
휘타가 알아들을 수 없겠지만, 사랑한다고 전했다.
줄을 누르는 손끝마다 그 마음을 가득 담아 연주했다.
눈물이 차올라 연주가 끝날 즈음에는 흘러내리고 말았다.
연우의 연주가 끝나고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짝. 짝. 짝.
휘타의 박수 소리.
천천히 박자를 타던 박수 소리가 빨라지자 다른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연우의 귀에는 오로지 휘타의 박수 소리만 들렸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지가 궁금했다.
“대단합니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들은 그의 음성 중 가장 부드러웠다.
“금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아니지. 그대가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뭐든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군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휘타를 향해 연우가 말하려는 때였다.
소호가 들어와 휘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의 소원은 잠시 후에 듣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일이 있는지 휘타가 소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휘타 없이 기생들과 있게 되는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휘타가 나가자 사림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
자리를 옮기기 위해 연우가 일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걸음을 옮겨 원래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단희가 옆으로 다가왔다.
오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두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아직 밤을 보낸 사이는 아니라면서요?”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제법 큰 목소리였다.
연우가 답하지 않고 휘타 자리에 있는 술병을 가져와 잔에 따랐다.
“그러면서 무슨 휘타 님의 여인이라고. 휘타 님이 누구신데 그럴 리가 없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가 섞였다.
“지상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명심하세요. 그 남자를 독차지할 수 있는 여자는 없어요.”
술을 마신 연우가 고개를 돌려 단희를 봤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구나.
하긴 사람 자체가 달라질 수가 없는 거겠지.
효조에게서 받은 느낌이 살짝 다른 듯해 단희도 그럴 줄 알았건만 역시 아닌 건 아니었다.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단희와 동급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쉰 뒤 다시 술을 마셨다.
아주 불편한 자리가 될 줄 알았는데 여유가 생겼다.
연우는 저쪽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는 사림에게 웃어주기도 했다.
“내 말 안 들려요?”
탁! 술잔을 들고 있는 연우의 손목을 잡자 흘러넘친 술이 그녀의 옷을 적셨다.
“아까워라.”
연우가 단희의 손에서 빠져나와 옷에 묻은 술을 털어냈다.
“날 무시하지 마.”
단희가 이를 갈았다. 그녀는 단순하다.
앞을 생각 못 하는 불같은 성격. 누구나 예측이 가능한 그래서 측은해지는 악녀.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일지 너무 뻔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조심해요.”
연우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후회? 후회는 네가 할걸. 지상에서 기생을 곱게 보지 않는다지? 그래서 네가 날 무시하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면? 휘타 님이 옆에 계시니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그쪽, 예뻐요.”
뜬금없는 말에 단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화내고 있는 단희에게 예쁘단다.
“뭐?”
“예쁘고 금도 잘 켜고. 내가 알기로는 춤과 노래에도 능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뭐!”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에게 목매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쪽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요.”
단희가 대꾸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다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래서 휘타 님을 포기하라? 이 말?”
“안타까워서 그래요.”
“웃기고 있네. 네가 왜 안타까워해. 기분 나쁘게.”
“스스로 불쌍해지지 마요.”
진심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휘타만 바라보며 삶을 보낸다는 게 불쌍했고.
절대 돌아보지 않을 그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가 불쌍했다.
연우 또한 자신을 보지 않을 수도 있는 휘타를 만나기 위해 탐야와 거래까지 해가며 이곳에 왔지만, 그건 그녀가 평생이 걸린다 해도 갚지 못할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희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단희를 좋아하지 않으나 저번처럼 그녀의 삶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연주를 못 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예전에도 같은 말을 해줬건만.
단희는 그때도 지금도 선을 넘고 만다.
“불쌍?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단희의 손이 연우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그걸 본 사림이 막으려고 달렸다.
그런데 늦었다. 다리가 당연히 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연우의 뺨에 닿기 직전 사림이 눈을 감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짝,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슬쩍 눈을 뜬 사림.
단희 손목을 잡고 있는 연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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