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2018.08.21.
휘타가 제 소매를 붙잡으며 우는 연우의 손을 잡아서 떼려고 했다.
“제발…… 가지 마…….”
하지만 그녀의 애달픈 부름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사랑했던 휘타 때문에 우는 모양이었다.
“꿈속의 휘타라는 남자는 그대를 많이 사랑했다고 하지 않았나.”
사랑한다던 남자가 그녀를 버린 듯했다.
문득 연우가 측은해졌다.
남녀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말이다.
내가 꿈속의 휘타이길 기대하지 않는 편이 그녀에게 좋을 텐데.
휘타는 연우를 사랑해줄 수 없었다. 그건 확실했다.
지금까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었고, 여자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할 처지가 되지 않았다.
그가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은 신뢰에서 그쳤다.
그것도 단둘, 소호와 사림뿐이었고.
차라리 연우가 그와 밤을 보내기를 거부한다면 그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것이다.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안을 생각이 추호도 없는 그라서 이보다 더 다정하게 대했을지도.
연우가 그에 대해 알고 있어 편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좋아한다며 다가오는 여자는 꺼리는 그였다.
연우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셨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 반,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망설이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연우의 얼굴에 곧 닿기 전, 다시 거둔다.
희망을 주는 건 그녀에게 또 다른 고문이 될 테니.
그는 꿈속에서까지 애타게 부를 정도로 사랑한 남자를 대신해줄 수 없었다.
도리어 무관심이 도와주는 길이리라.
대신 만약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겠다.
부귀영화를 원하면 그걸 줄 것이고, 자유를 원한다면 자유를 줄 것이다.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면 그 역시 허락해줄 테니 마음만 바라지 말길.
연우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휘타.
문을 열고 나가려다 뒤돌아봤다.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
아침 식사 시간에 연우가 퉁퉁 부은 얼굴로 등장했다.
어째서 부었는지 알고 있어서 휘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고운 차림으로 들어와 인사를 한 연우가 앉아 휘타를 빤히 보며 물었다.
“혹시 새벽에 휘타 님께서 저 옮겨주셨어요?”
사실대로 말할까 하다 관뒀다. 오해하면 안 되니까.
“아니요.”
“그럼 누가 해준 거지?”
연우가 중얼거리며 제 목을 긁적였다.
“스스로 들어가고선 잊은 거 아닙니까?”
“그랬을까요. 하긴 휘타 님이 절 옮겨주셨을 리가 없죠. 내기 중이라 옮겨주신 거면 먼저 손댔으니 지게 되는 거잖아요.”
아차. 잊고 있던 건 연우가 아니라 그였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죠. 어서 들어요.”
그가 숟가락을 들며 말하자 연우도 숟가락을 든다.
설마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눈치를 보니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여 안심했다.
“그대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숨기지 않고 다 말하겠습니다.”
“뭘요?”
동그랗게 뜬 연우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
그래. 저렇게 기대를 하게 될까 봐 미리 말해준다.
“내가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지만, 마음에 없는 여인을 안을 만큼 급한 건 아닙니다. 그대가 아무리 날 좋아한다고 하나 나는 아직 아니니까요.”
“아…….”
연우가 작게 탄식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기다릴 수 있어요.”
“그렇다고 내가 그대를 여자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하게 될 거란 기대는 접었으면 합니다. 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가 가장 중요해서.”
“네. 그렇게 하세요.”
반응이 왜 이러지.
연우가 바로 답했다. 그것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운하지 않습니까?”
“제가 서운해야 하는 건가요? 왜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며 의아해하고 있다.
아니 꿈속에서 서럽게 울 정도로 좋아한다며. 사랑한다며.
“나는…….”
당황한 휘타가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자 연우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어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절 사랑해달라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 말을 했던가.
휘타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도와주겠다는데 그렇게 싫어하면 없던 오기도 생기게 마련이에요. 날 사랑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기 얘기를 하면서 연우가 못을 박았다.
날 사랑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날 사랑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휘타는 연우의 말을 곱씹어봤다.
이미 그녀는 결론을 지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휘타 혼자서 새벽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썩 좋은 기분이 아니다.
아마도 그건 꿈꾸며 우는 연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 탓이라 여겼다.
“휘타 님, 오늘도 연회 가세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까?”
“네.”
연우가 휘타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옷 입는 거 도와드려도 될까요?”
“사림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거절하던 그때 말없이 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사림이 손뼉을 쳤다.
“아! 저 오늘 굉장히 급한 일이 있습니다!”
“네가 급한 일이 있어 봤자지.”
“어머! 제가 얼마나 성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아가씨께서 도와주세요.”
사림이 뻔히 보이는 연기를 하며 계속 시간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휘타가 부리는 아랫사람이었지만 사림이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이길 재간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기어이 도망갈 사림이다.
“알았다.”
그는 사림을 노려본 후에 연우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또 있어요.”
“뭡니까.”
“연회에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대를?”
“네.”
“어떤 자리인지 아는 듯한데,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전혀요.”
“그래요. 그럽시다.”
기생들 틈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해졌다.
연우가 있어 일상이 재미있어진 건 틀림없었다.
*
“이건 휘타 님 몸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에요.”
연우가 얇은 속옷을 들고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휘타는 어지간하면 흔들리지 않았고, 늘 미소를 지으며 평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이번 삶에서 그는 좀 달라졌다.
연우에게 하는 존댓말이 변하지 않았지만, 퉁명스러웠다. 투덜거리는 거 같기도 했다.
물론 연우는 그런 휘타에게 서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휘타가 달라졌다 하여도 휘타인 건 맞았다.
오히려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 좋기도 했다. 그가 귀엽기도 했고.
지금은 유타가 분리된 상황이 아니라서 그의 성격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만 해본다.
연우가 혼자서 키득이자 휘타가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뭐가 그리 즐겁습니까.”
“다요. 휘타 님과 함께 있으니 다 좋아요.”
휘타가 눈을 내려 연우를 보자 방긋 웃어준다.
밝은 곳에서 보는 그녀는 참으로 맑은 얼굴을 가졌다.
그 맑은 얼굴로 환하게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치 이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휘타는 괜히 죄짓는 기분이 들어 연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맞은편의 벽만 응시한 채로 살갗을 스치는 연우의 손길을 느꼈다.
손끝이 어깨를 스치고 가슴을 지나 허리에서 멈췄다.
안쪽의 끈을 찾기 위해 옷 안으로 연우의 손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정성스레 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손길이었다.
살과 살이 스칠 때마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서 연우가 들을 수 없게 호흡을 조절했다.
연우가 겉옷을 가져와 펼쳤다.
“휘타 님은 절 만나서 기쁘지 않으세요?”
“내가 왜 기뻐해야 합니까.”
그가 소매에 양팔을 넣으며 답했다.
“신부를 찾았으니까요.”
“확실하지 않은 일에 설레발을 칠 필요는 없죠. 그대가 정말 신부가 맞으면 그때 기뻐해도 충분합니다.”
“저 사신의 신부 맞아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요.”
“맞다니까…….”
연우가 입술을 삐죽이며 허리끈을 들었다. 휘타에게 둘러주고 깔끔하게 매듭을 지었다.
마음에 드는 귀걸이를 가리키기 전에 연우가 ‘이거죠?’ 하고 물었다.
또 팔찌 몇 개를 고르자 왼쪽, 오른쪽 알아서 분리해 채워줬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런 것도 꿈에서 해본 겁니까?”
“네.”
“또 뭘 해봤나요.”
“음. 그건 연회에서 보여드릴게요.”
연회에 참석한다는 이유가 그거였군.
매일 똑같은 연회가 지겨웠는데 연우가 참석하는 것으로 모자라 뭔가를 보여준단다.
오늘은 볼 만하겠다.
“연회에 가기 전에 장공 님께 찾아뵐 예정입니다. 사림을 보낼 테니 그대도 제대로 갖춰 입어요.”
“사림이는 아까 바쁘다고…….”
“지금쯤이면 안 바쁠 겁니다.”
휘타가 연우의 도움을 받아 옷을 다 입었을 시간이란 걸 사림은 이미 계산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연우가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내일도 제가 도와드리면 안 될까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보니 사림이나 다른 하녀들보다 연우가 편하긴 했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원하는 장신구를 알아서 척척 골라냈다. 신기하기도 했고.
아마 내일 또 연우의 도움을 받을 거 같았다.
*
장공이 있는 백륜당.
네 번째 오는 자리. 장공과 피안, 효조와 설홍이 있었다.
연우는 옆에 있는 휘타를 한 번 보고 다시 그들을 봤다.
예전과 달리 건강해 보이는 장공.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피안.
설홍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효조.
흥미롭게 연우와 휘타를 번갈아 봤다.
이제 확실해졌다. 효조는 연우에게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연우 인생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효조를 보고도 떨지 않고, 경멸의 눈빛을 보내지 않게 됐다.
장공이나 피안을 보듯 효조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용서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연우가 미워하는 효조는 과거의 효조일 뿐이라는 것.
지금의 효조는 연우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워할 필요가 없었고 미워하고 싶지도 않았다.
“휘타야, 말해보아라. 저 아이에게 한눈에 반했느냐.”
“네.”
“하긴 저리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지하계에서도 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장공이 허허 웃으며 묻자 휘타가 쑥스러워했다. 연기였다.
“그렇다고 숨겨놓다니. 놀랐다.”
“죄송합니다.”
장공이 손을 저으며 됐다 하고 연우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을 했다.
“저 녀석이 여자를 좋아해도 숨겨놓지는 않은데 네가 특별한가 보다.”
휘타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는 척한다는 걸 알기에 연우도 장공을 따라 편히 웃었다.
“장공 님.”
피안이 장공의 이름을 불렀다. 나무라는 거였다.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내 말을 잊어라.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채연우입니다.”
“혼자 왔고?”
“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살았습니다.”
네 번째 삶이 시작되고 가족, 아니 정현옥 일당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탐야에게 시간을 돌려달라 애원하며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다.
휘타를 만날 수 있다면 그들까지도 감내하기로 했다.
물론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연락조차 할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삶에서 연우는 혼자였다. 모두가 그대로인데 그들만 빠졌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탐야의 배려라 믿기로 했다.
장공에게 혼자라고 말하는 이 순간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휘타도 어렸을 적부터 혼자였지. 둘이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우가 답하자마자 백륜당 내에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설홍이 그녀답지 않게 깔깔깔 웃다가 피안의 눈치를 보더니 ‘죄송합니다.’ 하며 입을 가렸다.
장공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믿음직해서 좋다. 휘타 넌 잠시 나 좀 보고 가라.”
연우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는 사림에게 휘타는 연회에 늦을 거 같으니 연우와 기다리라고 했다.
툭. 휘타가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사림이 연우의 팔꿈치를 쳤다.
“아가씨, 멋있으십니다.”
“내가?”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륜당 안에서 연우가 했던 대로 따라 한다.
“들었어?”
“밖에까지 들렸습니다.”
“아…….”
당시에는 몰랐는데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왔다.
“이상했어?”
“멋있었다니까요!”
“좋게 봐줘서 고마워.”
연우는 사림을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한 걸음 내딛자 이곳에서 효조를 봤던 게 떠올랐다.
그를 보고 도망갔는데 결국 만나고 말았지.
그리고 운명처럼 그가 또 등장했다.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붉은 털가죽은 그가 확실했다.
두렵지는 않으나 긴장이 되는지 살짝 식은땀이 나는 거 같았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몰라서 한 번 실수한 걸 마음에 둘 만큼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효조의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광기가 가득했던 눈이 달라졌다.
“장공 님 앞에서 맹세한 여인은 네가 처음일 게야. 아주 재미있었어. 네가 맹세를 잘 지키길 바란다. 난 휘타가 영 마음에 들지 않거든. 너한테 푹 빠져서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광기는 없어졌지만 역시 연우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효조는 그 말을 끝으로 제 갈 길을 갔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효조가 달라졌고 연우가 달라졌다지만, 막상 그와의 만남이 이리 끝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효조 님은 되도록 마주치시지 마세요.”
사림이 주의시켰다.
“…… 응.”
효조에게 얽매였던 지난날과 지금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사림에게 대충 답했다.
그때.
연우의 얼굴 옆으로 휘타의 얼굴이 쓱 들어왔다.
“누굴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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