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깟 사랑이 뭐라고.
2018.08.07.
휘타가 연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사림이 휘타의 품에서 늘어진 연우를 보고 달려왔다.
사림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었다.
손을 내밀어 연우를 만지려다 뒤로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아니죠, 휘타 님?”
만져서 확인하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잠드신 거죠?”
부정하는 사림을 보고 휘타는 가슴이 조각나는 거 같았다.
휘타도 연우가 잠든 거라고, 얼마 후면 깨어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의 숨이 멈추는 모습을 직접 봤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알고 있다.
“편안하게 보내주자.”
“아아…… 아아…….”
사림이 말을 잇지 못했다.
뒤로 감췄던 손을 다시 내밀어 연우의 얼굴에 댔다.
“우리 마님…… 연우 님…….”
편안하게 보내주자는 휘타의 말 때문인지 사림은 울음을 참으며 물었다.
“힘들지 않으셨죠?”
“응.”
“아프지 않으셨죠?”
“그래.”
사림이 연우의 손을 잡아 제 볼에 비볐다.
“보잘것없는 저를, 이 성안에서 혼자였던 저를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우 님 때문에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 은혜 앞으로도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결국 사림이 울음을 터트렸다.
연우의 작은 손에 얼굴을 묻고 놓지 못한다.
“안녕히…… 돌아와 주세요. 가지 마세요…… 이대로 가지 마세요…… 우리 아가씨 불쌍해서 어떡해.”
“불쌍하게 여기지 마라.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줘.”
휘타가 덤덤하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연우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결정을 내리고 얼마나 아파했을지 알 수 있었다.
제 아버지를 죽이고, 가족인 척 긴 세월 속이며 그녀가 죽을 날만을 기다렸던 사람을 어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다 아는데. 다 알고 있는데. 연우도 어쩔 수 없었음을 모두 이해하는데.
그래도 다른 선택을 해줬더라면.
그게 휘타의 솔직한 진심이었다.
하지만 연우의 선택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무너질 거 같아 가까스로 자신을 타일렀다.
사림에게 하는 이야기는 그가 자신에게 하는 얘기였다.
연우의 손을 놓지 못하는 사림을 소호가 조심스럽게 떼었다.
휘타가 터벅터벅 걸었다.
다리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들고 있는 연우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앞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말라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던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우와 쓰던 방이었다.
연우를 침상 위에 눕혔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더니 정말 자는 것처럼 보였다.
뺨을 쓰다듬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따뜻했다.
‘휘타 님’ 하고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일어나서 ‘잘 잤어요?’ 라고 물어볼 것만 같았다.
“연우야.”
연우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눈을 뜨지 않는다.
“연우야.”
편안하게 보내주자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만, 마음이 어느새 그의 다짐을 배신하고 있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삶의 의미가 사라진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을 해보지만, 가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목에서 턱턱 막힌다.
목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연…….”
겨우 소리를 내어 불러보지만, 말라버린 목이 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답해주지 않는다.
“연…… 우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볼을 마주 댔다.
탐야의 말대로 연우에게 주어진 운명은 빗겨가지 않고 실현되었다.
연우를 지키기만 하면 될 줄 알았건만, 그녀 스스로 그 운명을 선택할 줄 몰랐다.
이런 게 운명인 건가.
시간을 되돌려도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같은 것.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끝내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 전부 내 탓이다.
난 뭘 했던 거지.
넋이 나간 그가 침상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약했기에 지킬 수 없다. 약했던 몸만큼 정신도 그러했다.
연우를 끔찍한 삶 속으로 두 번이나 끌어들였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정현옥을 죽인 탓에 세 번째 삶에서도 그녀가 제 목숨을 놓아버리도록 만들었다.
휘타가 연우를 원망할 게 아니라, 연우가 휘타를 원망했어야 했다.
차라리 내가 연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왜 ‘행복했어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건가.
눈치챘더라면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수많은 가정을 해본다.
그것이 뾰족한 가시가 되어 휘타의 가슴을 헤집어 놓고, 심장을 찔러댔다.
아프다. 죽을 것처럼 아팠다.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가 무심코 본 벽.
거기에 연우가 지어준 옷이 걸렸다.
힘겹게 일어난 그가 다가가 옷을 내렸다. 연우의 향기가 났다.
이걸 만들면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랐다.
그에게 어울리는 옷감을 고르며 즐거워했고, 바늘에 찔린 손가락을 물고 찡그린 적이 있었다.
완성된 옷을 보며 벅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휘타가 옷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초상화라도 그려둘걸.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많이 말해줄걸.
사랑한다고 더 말해줄걸.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옷에 막혀 나오는 그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렇게 사흘 동안, 밤낮이 없이, 남자의 울음이 멈추지 않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
*
“너는 다시 사신의 길을 가게 되었구나.”
탐야가 누워 있는 연우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게 있던 휘타가 피식 웃었다.
“뜻대로 되니 좋으십니까.”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와 그녀의 선택이었다.”
맞는 말이라 휘타는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휘타는 자신을 대신할 사신이 없기에 탐야가 찾아올 줄 알았고, 그를 만나면 할 얘기가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거래를 했다. 잊었더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마지막을 또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연우를 보고 있던 탐야가 휘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에게 거래할 것이 더는 남지 않았을 텐데?”
“있습니다. 다음 삶에서의 제 영혼도 드리겠습니다.”
“너에게 다음 삶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고?”
“없습…… 니까?”
“글쎄.”
탐야가 답을 해주지 않았다.
연우와 다음 생에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이마저도 꿈꾸면 안 되는 것인가.
하긴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약속이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도 모르고, 같은 세계에서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설령 같은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약속이었다.
해서 휘타는 확실한 약속을 하려 한다.
“그럼, 영원한 사신이 되겠습니다.”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하였던 탐야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다음 사신을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휘타가 바닥에 엎드렸다.
이렇게 해서라도 연우에게 진 죄를 갚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연우를 도저히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너무 고달픈 삶을 살았다. 사림의 말했던 대로 이렇게 죽기엔 연우가 너무 불쌍했다.
“지금 네가 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를 아느냐.”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래.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바라는 게 뭔데.”
“연우를 살려주십시오.”
이대로 죽으면 억울했다.
그녀의 인생이 안타깝다.
“어리석구나. 그깟 사랑이 뭐라고.”
‘그깟’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는 게 제가 사는 것이니까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그 거래는 그때를 마지막으로 끝났어.”
휘타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연우를 다시 그 지옥 속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그녀가 살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이었어야 했다.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
“할 수 없다.”
휘타가 단칼에 거절하는 탐야의 다리를 붙잡았다.
“당신이 개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녀는 내게 속하지 않았어.”
“그럼…….”
그때 탐야의 옆에 낯선 얼굴을 한 이가 나타났다.
탐야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밝고 화려했고, 무엇보다 표정이 풍부했다.
그는 하얀 깃털이 달린 부채를 흔들며 연우에게 다가갔다.
“고생이 많았다, 딸아.”
연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이번엔 휘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네가 바라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누구십니까.”
“건취현. 네가 살리고 싶어하는 그녀의 세계를 이끄는 이. 채연우는 내게 속해 있어.”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하면 그녀를 살릴 수 있습니까!”
살랑살랑. 부채의 깃털이 휘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나는 누구와 달라서 네가 바라는 소원에 조건을 걸지 않는다. 내 마음이 동하게 하면 해주는 거지.”
건취현이 탐야를 힐끔 보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살아서는 절대 못 만난다고 해도?”
다음 세상을 약속했던 연우가 떠올랐다.
“다음 삶에서도 안 되는 겁니까.”
건취현이 탐야를 힐끔 봤다.
“글쎄.”
다음 세상을 기약할 수 없는 대신 연우를 살릴 수 있다면.
어쩌면 만나지 않는 편이 그녀에게 더 좋을지도. 그래. 그게 낫겠다.
“다시는 못 만날 거야. 우리에게도 법칙이란 게 있으니까.”
신들의 법칙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았다. 몰라도 된다.
휘타가 원하는 건 연우가 사는 거였다. 그뿐이었다.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녀는 내가 데려가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휘타가 연우를 안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보자.
애달프고 애달픈 나의 연인.
부디 그곳에서 모두 잊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길.
부디 그대의 길에 햇살이 한가득 비추길.
그리고 나와는 만나지 말길.
*
하얀 천장이 보였다.
연우가 눈을 좌우로 굴렸다.
옆으로 병상이 나란히 있었고 그 위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급하게 눈을 돌리자 제 팔에 꽂힌 주삿바늘이 보였고, 호스를 따라간 끝에 링거가 걸렸다.
어떻게 된 거지?
후다닥 급하게 일어나 앉자 저쪽에 있던 간호사가 달려온다.
“채연우 씨!”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채연우 씨 진정하시고…….”
간호사가 뭐라고 말하는데 연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의사가 오고 말을 시키는데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그게 알고 싶었다.
*
담당 간호사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전해줬다.
다녀간 형사들이 동승했던 가족 모두 사망하고 연우만 살아남았다고도 했다.
날짜를 확인한 연우는 머리를 무언가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사고일로부터 삼 일이 지났다.
정현옥과 이명우, 서우와 함께 휴가를 즐기러 가는 길에 사고 났던 날.
딱 그날로부터 삼 일이 지났다.
매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눈을 떴는데 이번엔 완전히 달랐다.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시간이 다시 과거로 되돌려졌고.
연우는 또 살아남았다. 혼자만.
그런데 지하계가 아니라 지상이었다.
연우가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간단했다.
안전띠를 매서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세 사람의 보험금을 연우가 받게 되었다.
정현옥이 이명우와 서우 앞으로도 거액의 보험을 들어놓은 탓에 연우가 조사를 받긴 했지만, 이렇다 할 문제가 없어 고스란히 연우 몫이 되었다.
몸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 사고가 났던 곳에 가봤다.
벼랑 끝에 서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봤다.
분명히 여기에서 사고가 났고, 지하계를 갔다.
그곳에서 휘타를 만났고, 사림과 소호도 만났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효조를 만났고, 그곳에서 가족에게 얽힌 비밀도 알게 됐다.
그런데 지금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없었던 일처럼 된 거지?
내가 꿈을 꾼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모든 게 생생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휘타의 금빛 눈.
그녀를 부르던 낮은 음성.
그와 보냈던 수많은 날이 이토록 생생한데 어떻게 꿈일 수가 있어.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휘타가 또 시간을 되돌렸을까.
그렇다면 지하계가 아닌 왜 이곳으로.
혹시 나 때문에? 효조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휘타는 자신이 두 번의 시간을 되돌려 연우가 효조를 만난 걸 후회했다.
자신이 연우를 더 힘들게 만들었고, 두 번째 삶에서 연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자책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차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내가 많이 원망스러웠을 텐데 당신은 이리도 날 사랑하는구나.
휘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미안했다.
그가 말했듯, 연우는 같은 상황이 온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몇 번을 돌아가도 바뀌지 않을 현실이었다.
*
일상을 살아간다.
사람들이 가족을 잃은 그녀를 위로해주고, 살아 돌아온 걸 축하해 준다.
이것이 기사화되어 연우의 이름이 또 한 번 세간에 오르내렸다.
그쯤에 마무리 지은 곡을 넘겨주자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곳곳에서 연우를 찾았다.
연우에게 곡을 받기 위해 줄을 섰고 그래서 예전보다 훨씬 바빠졌다.
그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TV나 라디오를 켜면 연우가 만든 곡이 심심찮게 나왔다.
몇 번 인터뷰을 했더니 거리를 돌아다니다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여러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그녀 주위에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데 일정을 끝내고 텅 빈 집에 가면 싫어하던 술부터 찾아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돌아온 후로 술이 없이 잠들 수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지하계에서 지상으로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지금의 현실도 받아들이는 연우였다.
휘타를 사랑했던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연우는 사랑이 전부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 착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사하기 위해 집을 정리하던 중, 현옥이 쓰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매일 쓰지 않았고 무언가에 감정이 격해진 날마다 썼던 것 같다.
이따금 연우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밉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좋은 부모를 만나 부족한 것 없이 사는 아이가 미웠단다.
돈과는 별개로 아이에게 흐르는 품위를 현옥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듯해 질투도 났다 했다.
고작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기장에는 연우의 어린 시절에 찍은 가족사진이 몇 장 끼워져 있었다.
사진 속 연우의 얼굴이 멀쩡하지 않았다. 단 한 장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난도질 되어 있었다.
이걸 보니 현옥에게 복수한 일이 후회되지 않았다.
이제 현옥은 없었다.
연우의 아버지를 죽이고, 연우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
그리고 일로 인정받고 유명해졌다. 주위에 좋은 사람도 생겼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효조도 당연히 없고.
연우에게 익숙했던 하루가 가고 있었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풍경, 익숙한 냄새, 익숙한 사람…….
익숙한 게 참 좋았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인지 모르겠다.
분명 익숙한데 낯설었다.
어느 순간부터 파란 하늘보다 회색 하늘을, 맑은 공기보다 매캐한 도시의 매연 냄새를 찾았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