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51화 (51/100)

<51화> 희멀건 한 게 뭐가 멋있다고.

2018.06.26.

“탕약?”

연우가 되묻자 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탕약 그릇을 들었다.

“언니 이제 아이도 갖고 그러려면 몸보신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너도 참…….”

휘타와 나의 아이.

어렴풋이 아주 짧게 아이를 떠올려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늘 당장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 고민했기에 그와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꿈꿔본 적이 없었다.

서우의 말에 갑작스럽게 그려보는 앞날.

크게 바라는 것이 없다. 소박하게 살아도 좋다. 조금 힘들어도 좋다.

가끔은 그와 말다툼을 하고 화해하며 소소한 일상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거기에 아이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처럼 곡을 만들어 아이에게 들려주고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함께 나이 먹어가며 산다면 더없이 좋은 인생이리라.

연우는 동생이 내민 탕약 그릇을 받았다.

저만 먹기 미안해 머뭇거리자 엄마가 어서 먹으라 손짓했다.

“마셔. 나나 네 아빠도 먹었어. 그건 네 거야.”

“아, 드셨어요? 근데 서우 넌 이걸 어떻게 준비했니?”

“성안에 의원이 있다고 해서 물어봤지.”

사교성이 좋기로 유명했지만, 성에 온 지 하루 만에 의원을 찾아가 약을 부탁하다니.

이럴 땐 동생이 부러운 연우였다.

연우가 탕약이 담긴 그릇을 입에 댔다.

진한 고동색의 약에서 쓴 냄새가 올라와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색과 냄새만큼 맛도 썼다.

마지막 몇 모금은 남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서우의 정성을 생각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셨다.

다 먹고 난 뒤, 서우가 연우의 입속으로 사탕을 넣어줬다.

이건 또 어디서 구했는지. 입안에 남아있는 약의 쓴맛이 달콤함으로 지워졌다.

“이제 내가 아침마다 꼬박꼬박 준비해 올게.”

“안 그래도 돼. 고생하잖아.”

“에이, 언니를 위하는 일인데 뭘. 언니 덕분에 이렇게 좋고 안전한 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나도 뭔가를 해야지.”

“알았어. 고마워. 근데 여기서 지내는 건 당분간만 가능할지도 몰라.”

“그것도 어디야.”

서우의 밝은 웃음에 연우도 같이 웃었다. 옆에 있는 엄마도 오랜만에 웃음을 지어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

오늘처럼 평화로운 하루가 계속될 듯한 기분이 든다.

*

효조가 보이지 않는다.

수색하는 인원을 늘려도 지하계가 워낙 방대한 탓이었다.

게다가 효조가 완전히 숨기로 마음먹었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우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했다.

반대로 백 일이라는 한정된 날짜에 다가갈수록 휘타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물론 연우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밖에 나가고 싶어요.”

휘타에게 기분전환이 필요할 거 같아서 연우가 먼저 제안했다.

“어딜 가고 싶습니까?”

“시장이요.”

세 번째 삶을 살면서 사림과 가봤던 시장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유타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고.

휘타가 좋다며 함께 외출했다. 늘 그들의 곁을 지키는 소호와 사림이 멀찍이서 뒤따랐다.

마음 편하게 시장을 구경하기 위해서 연우는 전모의 너울을 내렸고, 휘타는 삿갓을 푹 눌러썼다.

연우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어도 휘타는 지하계의 유명인사였으니까.

세상의 지배자가 바뀌는 큰일이 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시장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쁘게 움직였다.

얼핏 보기에 예전보다 활기차다는 느낌도 받았다.

휘타가 장신구를 벌여놓고 파는 좌판 앞으로 연우를 이끌었다.

“골라보세요.”

그의 말에 연우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싱그러운 옥색을 띠고 있는 가락지에 눈이 가서 가리키자 상인이 손가락에 끼워보라 한다.

“당신이 해줘요.”

연우가 손을 내밀자 휘타가 그녀의 검지에 가락지를 끼워줬다.

하늘을 향해 손을 쫙 펴는 연우.

“조금 무거운 거 같기도 하고…….”

무거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상인이 거들었다.

“아유, 가락지는 두껍고 묵직해야 맛이죠. 아무나 어울리는 색이 아닌데 워낙 손이 하얗고 예뻐서 정말 잘 어울립니다.”

“그런가요? 어떠세요? 서방…… 님?”

휘타의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며 연우 나름대로 마음먹고 준비한 호칭.

여보와 서방님 중 고민하다 서방님으로 결정했다.

혼자서 조용히 불러보며 연습할 때는 몰랐다.

서방님. 이 단어가 이렇게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지.

글자가 하나씩 동글동글 말려 조용히 그리고 예쁜 소리를 내며 입 밖으로 나온다.

연우의 ‘서방님’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살포시 입술 끝을 늘리며 미소를 짓는다.

“우리 부인의 손에 가락지가 빛을 잃는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휘타는 연우가 끼고 있는 가락지와 다른 반지를 샀다.

‘서방님’이라는 한마디에 그의 기분이 한껏 좋아졌는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둘은 예전에 연우와 사림이 갔던 부침을 먹으러 갔다.

자리 잡고 앉자 얼마 있다가 연우가 좋아하는 부침이 나왔고 소호와 사림도 불러 함께 먹었다.

넷이서 마주 앉아 보내는 시간이 이리도 즐거울 줄 몰랐다.

티격태격하는 소호와 사림을 보는 일도 즐거웠고 유쾌하게 웃는 휘타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시간이었다.

간단히 부침과 술을 먹은 뒤에는 다시 시장을 걸었다.

이번에는 휘타가 머리 장신구를 사서 연우의 머리에 꽂아줬다.

수줍게 웃으며 연우도 그의 머리에 꽂아줬다.

그러잖아도 여자 못지않게 고운 사람인데, 머리 장식 하나 꽂았더니 봄날의 꽃처럼 화사해졌다.

“서방님이 저보다 고우셔서 큰일입니다.”

“왜요. 내가 한눈팔까 봐?”

“그러기만 하세요. 저도 팔 겁니다.”

“협박할 줄도 아시네.”

연우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흘겨보자 그의 입술이 일자로 굳었다.

장난이 심했나.

“미안해요. 장난이었어요.”

사과하자 그가 허리를 숙이고 연우의 귀에 속삭였다.

“화난 게 아닙니다.”

“그럼…….”

“입 맞추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휘타의 속삭임에 연우가 제 얼굴에 손바닥을 댔다.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너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길 망정이지 누가 봤으면 어쩔 뻔했어.

“여기서요?”

이 사람 많은 데서?

연우가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게 유혹하는 눈빛을 왜 보냅니까.”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그랬으면서.”

할 말이 없어 살며시 입술만 깨물었다. 유혹할 마음은 없었지만 도발한 거나 다름없었다.

“성에 갈 때까지 못 참겠습니다.”

“그렇다고 시장 한복판에서 할 순 없잖아요!”

“시장 한복판만 아니면 된다는 거죠?”

연우가 답을 채 하기 전.

별안간 휘타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걸었다.

빠르게 걸어도 항상 우아했던 그가 이번엔 달랐다. 다급했다.

걷다가 갑자기 멈추는 휘타.

“따라오지 마.”

뒤따르는 소호와 사림에게 명령하고 다시 걸었다.

인적이 드문 곳의 담장 아래로 갔다. 주위를 살펴보더니 벽에 연우를 세우고 너울을 들어 올렸다.

팔로 벽을 짚고 서서히 연우를 향해 다가왔다.

탁. 연우의 전모와 휘타의 삿갓이 부딪쳤다.

“이런.”

휘타가 연우의 너울을 잡고 있던 한 손으로 삿갓의 끈을 풀어 던졌다.

투둑. 땅바닥에 떨어진 삿갓이 작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

입술의 화장이 다 지워져 빨갛게 부어올랐다.

너울로 가릴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지만 다음부터 공개된 장소에서는 조심해야겠다 다짐했다.

하긴 휘타가 마음먹으면 어떻게 말리겠는가.

그렇게 싫지도 않았고.

사실 좋았다. 나중엔 못 이기는 척 그의 뜻에 따를까 고민하는 연우였다.

그의 손에 이끌려 뛰듯이 왔을 때는 몰랐는데, 시장 골목의 끝이었다.

어쩐지 눈에 익숙하다 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자 생각이 났다.

또 다른 휘타인 유타와 만났던 곳.

돌이켜보니 유타의 등장은 온통 하얘서 그런지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

지난 생각에 웃음이 짧게 터졌다.

“뭐가 그리 즐겁습니까?”

“아, 여기서 유타 님을 처음 만났어요. 그날이 생각나서요.”

“낯선 사내들이 희롱하고 있는데 나타나서 구해주니 멋있었나 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사내가 나타나서 구해주니 당연히 멋있죠.”

“희멀건 한 게 뭐가 멋있다고.”

휘타의 말투에 심통이 섞였다.

연우가 아까보다 더 길게 웃었다.

“질투하는 거예요?”

“알면서 묻습니까.”

“당신 자신이잖아요.”

자기 자신에게 질투하는 게 어딨어, 하며 연우가 또 웃자 그가 한숨을 쉰다.

“질투가 나는 걸 어쩌겠습니까.”

“당신이 멋있다는 말이니까 질투 안 하셔도 돼요.”

연우의 말에 수긍하는 척 어색하게 웃는 그.

만날 나더러 귀엽다더니 그도 귀여웠다.

유타가 사라진 지, 아니 휘타에게 흡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그리운 추억처럼 떠올랐다.

시간이 흐르며 휘타에게서 유타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인지 조금씩 각자 다른 사람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얼어붙을 듯한 한기를 뿜으면서도 곧 울 것 같았던 눈동자가 떠오른다.

하얀 유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주 약간 아쉽기도 하다.

하얀 늑대는 볼 수 있었는데.

“궁금한 게 있어요.”

“네.”

“원래부터 수호령이 둘이었어요?”

“그랬죠. 다만 유타 때문에 내가 하얀 늑대를 다룰 수 없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후에 효조와 싸울 계획을 세우면서 유타가 내게 흡수되었으니 가능하리라 판단했고. 그대가 봤던 대로 되었습니다.”

“궁금한 게 또 있어요.”

이건 오래전부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질문.

“얼마든지.”

“답하기 곤란하거나 싫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실례가 아닐까 싶어서 미리 말했다.

“뭔지 들어나 봅시다.”

휘타가 연우의 손을 잡았다.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유타 님은 어떻게…….”

“어떻게 태어났느냐? 그게 알고 싶습니까.”

그가 알고 대신해주었다.

사실 묻고 싶은 게 더 많았다.

비록 지난날 그를 모르고 살았지만, 혹 우리 사이에 추억이 있었는지.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다 알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타에 대해서만 들어보면 된다.

유타는 오로지 휘타에게 기억을 전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탐야가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탐야가? 다른 인격이라 휘타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탐야…… 그가 왜요?”

“일종의 배려라고 하더군요.”

“배려라니 뭔가 그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요.”

“어째서?”

“그는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 건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당신을 위해 다른 인격을 만들어줄 만큼의 배려가 있지 않아 보였거든요.”

어디까지나 연우 자신만의 예측이었으나 틀린 말도 아니지 싶다.

휘타의 고개도 기울어졌다.

연우의 말을 들으며 그도 기억이 났다.

탐야는 휘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난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걸 싫어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에 없었던 부모에 대한 기억이 세 번째에 생겼고.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는 유타에 대한 기억도 생겼다.

또 여느 인간보다 오래 살며 겪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은 뭐란 말인가.

사신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나.

이 모든 것이 탐야가 심어준 것들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연우와 대화하며 또 느낀 의아함.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에서 휘타의 수호령은 검은 늑대뿐이었다.

지하계의 누구도 수호령이 둘이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탐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데.

인간의 삶에 개입하기 싫어한다는 탐야가 휘타의 시간을 되돌려준 것으로 모자라 저 많은 것들을 심어주었다고?

휘타를 찾아와 사신임을 알려줬던 그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까지 개입한다는 건 탐야가 했던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걸까.

잊고 있었던 유타의 말이 스친다.

‘네가 꼭 알고 행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 알아.’

휘타가 생각에 잠겼다.

내가 꼭 알고 행해야 할 일.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건 알겠다.

당장 연우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 효조를 찾는 일로 머리가 복잡한데, 이건 또 뭔지.

연우와 관련이 있는 걸까.

뭔지 알아내면 다음 사신인 효조를 찾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걸까.

말이 없어진 휘타를 보며 연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어서.”

탐야는 휘타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거래를 했다.

연우에게 주어진 죽음의 운명도 같이 넘겨줄 만큼 냉정했다.

그런 그가 왜.

기분 나쁜 기운이 그의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

병사가 둥근 기둥처럼 생긴 천을 풀자 썩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인간의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썩은 내가 진동했으나 휘타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걸 어디서 찾았다고?”

“깊은 숲을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서요.”

그러면 다른 천도 펼쳐 보였다.

안에는 찢기고 피로 범벅이 된 옷이 있다.

“효조 님의 옷이 맞습니다. 아무래도 다리만 남겨두고 모두 다른 짐승에게…….”

차마 뒷말을 할 수 없는 신하가 얼버무렸다.

붉은 곰의 회복력이 좋다더니 다 헛소문이었나 보다.

부상을 입고 숨어 있다가 피 냄새를 맡은 짐승에게 변을 당한 것 같았다.

머리 아플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지만, 휘타는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효조가 죽었다.

그건 곧 연우도 죽는다는 뜻이다.

효조 이 새끼.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다.

그리고 망할 탐야.

결국 일을 이렇게 만들다니.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이런 거였나.

꽉 쥔 주먹 위로 파란 핏줄이 도드라졌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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