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48화 (48/100)

<48화> 죽은 이를 위한 곡.

2018.06.15.

효조가 연우를 끌고 들어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는 연우의 손을 놓고 바닥에 앉혔다.

뒤따라온 사림이 연우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쾅 문을 닫는 효조.

연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몸을 낮추고 엎드리다시피 했다.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 어머니야. 너와 아주 닮지 않았느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연우의 얼굴을 그가 들어 올려줬다.

위패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

초상화 속 여자를 자세히 보던 연우의 이맛살이 옅게 찌푸려졌다.

저 여자가 나와 닮았다고?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는 눈, 코, 입의 개수만 같을 뿐 연우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효조가 강조했던 눈도 다르다.

그의 어머니는 경멸하는 눈이 아니라 슬퍼 보였다.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효조는 나와 조금도 닮지 않은 제 어머니를 닮았다고 착각했던 건가?

연우를 사랑하게 됐다는 시발점이 그거였는데.

차라리 닮았더라면 이처럼 허무하지나 않지.

그래. 그에게 정상적인 생각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는 미치지 않았던가.

“닮았지?”

그가 물음에 연우가 힘없이 답했다.

“네. 닮았네요.”

“어머니는 갖지 못했지만 넌 갖겠어.”

놀랍지도 않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어머니를 향한 비뚤어진 사랑이 그를 미치게 했구나라고 대충 짐작만 했다.

하지만 그가 불쌍하거나 안쓰럽지 않다.

어렵게 자랐다고 모두가 효조처럼 굴지 않으니까.

그와 달리 바르게 사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믿는다.

“해서.”

효조의 눈이 번뜩였다.

“휘타를 없앨 거야. 그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

연우는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겨우 가라앉힌 공포가 다시 엄습해 왔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녀석에게 그간 쌓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그가 성으로 돌아오면 네 마음이 바뀌지 않겠느냐. 너는 이 효조만을 원해야 한다.”

음산한 웃음소리에 사지가 부들거린다.

‘너는 이 효조만을 원해야 한다.’

과거에도 같은 말을 했고 연우는 이렇게 답해줬다.

‘저는 효조 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가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효조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고, 그래서 조금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강요하는 듯한 말에 기다려달라는 뜻이었는데.

참 순진했었다.

그 대답이 효조를 더 날뛰게 할 줄 꿈에도 몰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연우에 대한 집착이 광기로 나타났던 시작.

연우는 지금도 그에게 똑같이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효조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연우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실컷 웃어. 내일이면 모두 끝이 날 테니.

*

마당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휘타.

연우와 함께 지냈던 집이 아닌 주로 피안을 만났던 장소였다.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이 없는 거로 보아 연우에게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

피안이 효조 주변 곳곳에 사람을 심어두어 시간마다 보고를 해줬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안함에 일을 그르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연우가 바라는 일을 망치는 거였다.

“이젠 말씀해주십시오.”

뒤에서 말없이 있던 소호가 다가왔다.

“뭘?”

“계획 있으시잖아요. 효조를 어찌 처리하실 작정입니까?”

“죽기 살기로?”

“휘타 님.”

소호의 얼굴이 굳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하긴 농담할 때가 아니긴 했다.

“틀린 말이 아니야. 너도 알잖느냐. 내가 효조에게서 살아남으려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

“저도 돕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네 수호령은 어려서 안 돼.”

“인간인 채로 싸우겠습니다.”

“인간도 힘들어. 그리고 너까지 성안에서 모습을 숨기며 들어가긴 힘들지. 효조가 연우에게 얼이 빠져있긴 해도 아직 경계를 풀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휘타 혼자서 효조를 맡게 되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많은 수가 움직이면 노출되게 마련이고, 어느 쪽이 먼저 노출되느냐에 따라 승패가 기울어진다.

특히 이쪽은 더욱 그러하다.

수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효조에게 계획을 들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넌 내가 신경 쓰이지 않게 밖에서 잘 싸워주면 돼. 난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길 거야.”

“휘타 님. 전…….”

그때였다. 하인이 다가오고 있어 소호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휘타에게 인사한 하인이 편지를 잡고 있는 두 손을 내밀었다.

연우였다. 벌써?

내일 만나기로 한 장소를 연우가 정해서 알려주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소식이 왔다.

그녀가 말한 장소는 효조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린 방이었다.

시간도 정해졌다.

내일이면 연우가 효조를 그곳으로 인도하게 된다. 휘타는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가서 기다리면 되고.

그가 잘 모르는 곳이라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았다. 연우가 보낼 신호에 대한 것도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

내 걱정은 하지 마요.

싫지만, 익숙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수월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연우가 자신의 이름과 휘타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많은 말이 담겼다.

편지가 그녀인 거 같아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연우가 성에 들어간지 고작 몇 시간이 흘렀는데 몇 년이 된 것처럼 보고 싶었다.

부디 내일 다시 만날 때까지 무사하기를.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날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

연우는 밤을 꼴딱 새웠다.

문을 걸어 잠그고 사림과 함께 있었지만, 혹시 효조가 올지 몰라 잠들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연우를 찾지 않았다.

대신 아침 일찍 설홍이 왔다.

그녀는 사림을 내보낸 뒤 다짜고짜 물었다.

“무슨 속셈이죠?”

설홍은 화를 참고 있는 듯했다.

“어제 효조 님께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효조 님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제가 효조 님을 속인들 설홍 님께 문제 될 것이 있나요?”

“휘타 님이 올까 싶어 그러는 거죠!”

연우가 피식 웃었다. 이미 그에 대해 대비도 해놨으면서 뭐가 걱정인 건지.

“그건 아니지만, 설령 휘타 님이 오신다 해도 그 역시 설홍 님께 문제 될 것이 없지 않나요?”

“미풍처럼 지나갈 일이 아니잖아요. 몸을 피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거였구나.

성안에서 일어날 싸움에 자신이 다칠까 걱정하는 거였다.

“몸을 피해야 할 일은 없을 거예요.”

휘타가 효조를 상대한다.

조용히 지나갈 수 없겠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설홍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별안간 문밖에서 사림이 외쳤다.

“효조 님이 오셨습니다!”

연우에게 알려주기 위한 신호였다.

사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효조가 들어왔다.

그는 먼저 와있는 설홍을 무심하게 보더니 말없이 쓱 지나쳤다.

이런 일에 익숙한 설홍은 아무렇지도 않게 효조에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차 들렀습니다. 막 나가려던 참이니 말씀 나누세요.”

설홍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그러라 하는 효조.

뒷짐을 진 그가 연우의 방을 둘러본다.

“아침은?”

“아직입니다.”

“나도 아직이야. 잠에서 깨자마자 네 연주가 생각나서 왔다.”

“지금 듣기를 원하시나요? 여기는 금(琴)이 없으니 사림에게 구해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다. 아침 먹고 내 방으로 와라.”

그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효조답지 않았다.

바로 들어야겠다, 당장 연주하라.

사납게 명령을 내리는 게 효조다운 모습이건만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하긴 저래도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고문해놓고 미안하다 울면서 빌다가도 갑자기 다시 고문하지 않았던 그이지 않던가.

그러니 방금 전의 모습은 효조다운 거였다.

사림이 준비해 준 아침을 먹었다. 긴장한 데다 잠을 못 잔 탓에 입안이 까끌까끌했으나 억지로 밥을 넘겼다.

효조의 방으로 가자 한가운데에 연우가 앉을 방석과 그 위에 금이 놓였다.

방석 위에 앉아 금을 켜려는 순간.

효조가 말했다.

“원곡으로 연주해줘.”

“네.”

고개를 끄덕이고 연주를 시작했다.

오늘, 그가 듣는 마지막 무제가 될 텐데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어느 때보다 정성껏 연주해주리라.

나보다 더 비통하고 처절하게 네가 무너지는 장면을 그리며 연주한다.

그렇게 연주가 끝나자 효조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시 좋아. 듣고 나면 아쉬워서 큰일이야.”

“원하신다면 계속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연주하려면 네 손가락이 찢어질지도 모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기 전에 그는 죽게 되기에.

“네가 해준다면 나야 좋지. 원하는 것이 있느냐. 날 즐겁게 해준다니 뭐든 들어주마.”

연우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슨 핑계를 대가며 효조를 초상화가 있는 방으로 데려갈까 고민했는데 그가 먼저 물어본다.

“괜찮으시다면.”

“그래. 뭔데 그러느냐. 말해 보아라.”

“효조 님의 어머님 앞에서 연주하고 싶습니다.”

“내 어머니?”

내내 바닥만 보고 있던 연우가 효조의 표정을 보기 위해 슬쩍 눈을 들었다.

거리가 있지만 그가 당황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제발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말이 아니기를 빌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머니 앞에서 연주하고 싶은 것이냐.”

말을 잘해야 한다.

연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뭐?”

“저와 닮으신 분이라 마음이 가기도 하고……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를 닮은 제가 그곳에서 그분을 대신해 효조 님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효조의 반응을 살펴보면 답을 알게 되겠지.

만약 심사가 뒤틀려 칼을 빼 든다면 연우는 물론이고 휘타까지 위험해진다.

하늘이 도와주기를 바랐다. 알 수 없는 효조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방법뿐이다.

당황하던 효조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의 답을 들은 연우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녁에 들려드리면 될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그런데 왜 자꾸 다행이라는 마음보다 불안함이 앞서는지.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한다.

연우가 흐트러지는 자신을 붙잡았다.

*

저녁.

이 작은 방 어딘가에, 아니면 밖의 어딘가에 휘타가 있다.

연우가 초상화를 바라봤다.

효조의 어머니를 보며 문득 저 엄마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되돌릴 수 없는 과거였다.

그러면서 또 한 번 휘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을 느끼는 연우.

탐야를 만날 생각을 어떻게 했으며, 시간을 되돌려달라는 요구는 또 어떻게 했을까.

만약 오늘 일이 잘못되면, 그래서 죽는다면 휘타는 또 시간을 되돌릴까.

어쩌면 신(神)은 항상 그녀의 뜻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그대로 끝낼지도.

만약 그렇게 죽음 맞닥뜨리면 예전과 다르게 빌어야겠다.

다시 휘타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가 사는 세상으로 보내달라고.

그때는 내가 먼저 당신을 사랑하리라.

연우가 제 다리 위에 금을 올렸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심장이 파닥거렸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오히려 심장이 너무 더디게 뛰지 않나 싶을 정도로 느려졌다.

연우는 벽에 기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효조를 봤다.

저리 앉아 있어서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힘이 없어 보였다.

“시작할까요?”

묻자 그가 손짓으로 허락한다.

“오늘은 무제가 아니라 레퀴엠입니다.”

“레…… 뭐?”

“레퀴엠. 다른 말로 진혼곡이라고 합니다.”

효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연우가 어젯밤에 만든 거니까.

죽은 이를 위한 곡.

그의 어머니를 위한, 그리고 곧 세상을 떠날 그를 위한 곡.

효조에게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에 분노하지 말고 제 갈 길을 걷길 바란다.

혼이라도 다시는 나를 찾지 말고, 다음 세상에서 절대 마주치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에 하나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좋은 사람이었으면.

그것이 연우가 원하는 복수였다.

저음으로 시작되는 곡은 전반적으로 부드럽게 연결되어 흘러간다.

눈을 감고 감상하는 효조가 보인다.

연주가 끝나고 휘타가 들어오면 진짜 시작이다.

모든 걸 판가름 지을 한순간.

제발 신께서 휘타의 손을 붙잡아 주기를.

연주가 끝을 향해 달려갔다.

연우도 눈을 감았다. 시간이 조금만 느리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김없이 때는 찾아온다.

팅. 팅. 팅. 있는 힘껏 세 번 줄을 뜯었다.

휘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문을 박차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예의를 갖춰 밀고 들어와 효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미소와 함께 건네는 인사말.

슬며시 눈을 뜬 효조가 휘타를 보고 웃었다.

“넌 왜 돌아왔느냐.”

“밖은 지루해서 말입니다.”

“지루함을 이기고자 들어왔다? 그 대가가 꽤 클 텐데?”

“클지 작은지는 견주어 봐야 알지요.”

“너는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언제나 내 위에 있는 듯한 그 눈, 그 웃음이 정말 싫어.”

“제가 올 줄 아셨나 봅니다.”

효조가 휘타를 보며 피식거리더니 연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니길 바랐다.”

그는 연우의 속임수를 알고 있었다.

“네가 저놈을 버리고 왔다는 말을 내가 믿을 거로 생각했다니. 그래도 아니길 바랐는데.”

잘 속이고 있다 확신했는데 역시 효조는 눈치가 빨랐다.

“믿든 안 믿든 당신은 이 자리에 있습니다. 내가 원했던 대로.”

“그렇지.”

효조가 제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그는 연우가 속이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준 것이다.

생전 처음, 효조에게 고맙다.

“내 뜻이기도 했어. 눈앞에서 연인을 잃고 슬퍼하는 널 보고 싶었거든. 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어떤 맛일까.”

그럼 그렇지. 고맙다는 말 취소한다.

효조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일었다. 그가 자신의 수호령을 부르고 있다.

휘타도 수호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수호령으로 변해 싸우려는 모양이었다.

연우는 휘타에게 걸리적거리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피했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휘타가 밀린다면 어떡할까.

어떻게 도와줄까 고민하는 그녀의 눈에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효조의 가슴이 보였다.

어? 왜!

검은빛이다.

설마 효조가 다음 사신인 거야?

연우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아아, 안 돼. 이건 아니잖아.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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