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46화 (46/100)

<46화> 빗속에서도 좋을 거 같아요.

2018.06.08.

연우와 휘타가 증발했다.

둘이 외출하더니 그 길로 사라졌다고 들었다.

동시에 반역을 꾀하던 무리가 해체되었다는 정보가 효조에게 입수되었다.

예측해보건대 휘타는 반역을 포기하고 연우와 도망을 갔다.

안타깝다. 휘타를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반역이라는 좋은 명분도 있었다.

그런데 사라지다니. 그것도 연우와 함께.

휘타가 도망가리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놈의 성격상 능구렁이처럼 굴며 붙어있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효조는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기다리기 힘들어졌다. 시시각각 피가 말랐다.

반역 무리는 차차 처리해도 되지만 연우는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고작 며칠 행방불명 된 것뿐인데 앞으로 영영 못 볼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연우의 입에서 제 이름이 불리길 원했고.

연우가 직접 연주하는 무제를 듣길 원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를 위해서.

머지않아 곧 가질 수 있다 생각했다. 기대감으로 가득하였건만.

손에 넣기 바로 전에 이런 일이 벌어져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쌓였다.

지하계를 뒤지라 명령했지만, 워낙 땅덩이가 큰지라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나 효조에게 땅이 큰 건 이유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연우가 멀어지는 듯해서 불안했다.

그는 사람을 보낼 때마다 하루 만에 찾아오라 명령을 했고 못 찾으면 죽은 목숨이었다.

사람을 여럿 보내건 조금 보내건,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칼을 휘둘렀다. 그래서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광기가 점점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지켜보고 있던 신하 중 하나가 조언했다.

“성밖에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반역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들을 풀어 찾도록 하면 훨씬 빠를 듯합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던가.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일부만 풀어도 된다.

효조는 즉시 휘타와 연우를 찾는 데 병사들을 이용하라 명했다.

“사흘 시간을 준다. 살고 싶으면 사흘 안에 찾아와.”

기간만 늘어나고 변함이 없었다. 같은 이유로 벌써 무고한 목숨을 셋이나 잃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누구 하나 효조에게 시간이 부족하다, 더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마음에서는 반대해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목을 꺼내놓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효조의 곁을 지키고 있는 설홍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고 다 볼 작정이었다.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제 안위를 보장받았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크게 상관없었다.

휘타도 나쁘지는 않다. 몰래 챙겨둔 재산으로 남은 평생 잘 먹고 잘살 수 있으니까.

물론 효조가 지배자의 자리에 올라가는 게 그녀에겐 훨씬 좋았다.

풍요로운 생활은 효조 없이도 가능하지만, 그가 가진 권력은 오직 그에게서만 편승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이 자신의 발아래서 떠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비유를 맞추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이란 걸 알아도 듣고 있다 보면 즐거웠다.

그런 면에서 연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 역시 이젠 별 상관없다.

자신은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얻어먹을 게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말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휘타와 어딘가에 꼭꼭 숨어 다시 마주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

새벽에 일어나 눈을 뜨니 빗소리가 들렸다.

연우가 다시 눈을 감으며 휘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러면 힘든데.”

머리 위에서 그가 말했다.

“안 주무셨어요?”

잠결에 말이 느린 연우와 달리 휘타의 발음이 분명해서 물었다.

“오랫동안 이 시간에 활동하다 보니 도통 잠이 오지 않는군요.”

“……피곤하지 ……않아요?”

아무리 활동하는 시간이라지만 그는 피곤해야 했다. 그게 정상이다.

게다가 이젠 사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더욱.

그는 다정하게 또 부드럽게 연우를 안았다.

몸의 이곳저곳을 간지럽히고 매만져주며 그녀를 웃게 했다.

하지만 꽤 긴 시간이라 이렇게 멀쩡하면 안 된다.

“피곤하다뇨. 날 뭐로 보고.”

그러면서 휘타가 연우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안…… 지쳐요?”

눈을 감은 채로 묻는 그녀의 턱을 휘타가 위로 들어 올렸다.

“손꼽아 기다린 날인데 지치면 말이 안 되지요.”

쫍. 짧은 입맞춤에 연우가 눈을 살짝 떴다.

“전 지쳤어요.”

“압니다. 자요.”

휘타가 손으로 연우의 눈을 감겨줬다. 그러고는 또 입을 맞췄다. 조금 전보다 길었다.

“지쳤다니까요.”

“안다니까 그러네. 지친 그대는 계속 자고, 멀쩡한 나는 계속.”

다음 말을 듣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이 됐다.

“계속 뭐요.”

“그대를 사랑하고.”

잠이 확 달아난 연우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진짜 늑대였어.”

흘기며 바라보자 기분 좋게 웃는 휘타.

“그래서 싫었습니까?”

한쪽 눈을 찌푸리면서 묻는다. 그럴 리가 절대 없다는 걸 확신하면서.

“싫은 건 아니었지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대도 좋았잖아. 내 기억에 그대도 좋아서…… 읍!”

연우가 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자 키득거리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안아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푹 자요. 지쳤다는데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잠 달아나게 해놓고서 푹 자란다.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이미 맑아진 정신 때문에 좀처럼 졸음이 오지 않았다.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바로 앞에 있는 그의 가슴을 봤다.

“그렇게 말똥말똥하게 바라보고 있음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잠이 안 와요.”

끙.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좀 걷겠습니까? 비 맞으며 걷는 거 좋아하잖아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그것도 괜찮은 거 같아 먼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아까는 장대비가 오는 것처럼 소리가 요란하더니 지금은 보슬보슬 내린다.

먼저 나간 연우가 그에게 어서 나오라 했다.

평소보다 기온이 낮아 약간의 한기가 느껴지지만 참을 만했다.

스며드는 비의 감촉을 즐기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 연우의 손을 꽉 쥐었다.

든든했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 그.

말없이 작은 마당을 거닐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 무렵.

“한 번도 안 해봤죠? 이렇게 걷는 거.”

휘타에게 물어봤다. 그가 머리를 천천히 저었다.

“어째서 한 번도 안 해봤을 거라 생각합니까.”

“해봤어요?”

“수도 없이 해봤습니다.”

수도 없이?

“그대가 무슨 생각으로 비를 맞으며 걸을까 궁금해서. 처음에는 그런 이유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걷는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의 정원에서 같이 걷고 싶었습니다만, 그럴 수 없으니 내 정원에서 홀로 거닐며 함께 걷는다 상상했습니다.”

연우가 걸음을 멈췄다.

이 남자는 끊임없이 놀라게 한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저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예요?”

“매일 그리웠던 사람.”

“…….”

“나를 살게 하는 사람. 그리고.”

휘타가 연우 앞에 마주 섰다.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사람.”

사랑도 크기가 다르다.

휘타를 사랑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나는 당신이 날 사랑해준 만큼, 당신을 사랑할 자신이 없다.

매일 그리워하며 사는 게 가능할까.

어떤 한 사람이 세상을 살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사랑해요.”

이 말만으로 충분한 나인데.

그에게는 부족한 말.

“갑작스럽게 고백하면 내가 좀 어려울 거 같습니다.”

“하루에 백번도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사랑해요.”

손을 들어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더 새카맣다.

어둠 속의 선명한 금색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손이 연우의 눈에만 보이는 검은 연기를 뚫고 그의 가슴에 닿았다.

이거 내가 없애줄게요.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다.

“이걸 어찌 생각해야 합니까.”

연우의 생각을 모르는 그가 미소를 지었다.

얼른 손을 뗐지만, 잡히고 말았다.

“어려울 거 같다고 말했음에도 이러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나직한 음성.

순식간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의 알려준 약한 부위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부끄러웠다. 지쳤다고 말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기대하는 그의 얼굴.

생각해 보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감추지 않고 표현했다.

그녀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뒤꿈치를 들어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싱긋 웃어줬다.

조금 놀란 듯한 그가 눈을 내리떴다.

“들어갈까요?”

연우의 신호를 알아들은 그가 말했다.

“아니요.”

그에게 허리를 숙이라 손짓한 다음, 그가 했던 것처럼 귀에 대고 소곤댔다.

“빗속에서도 좋을 거 같아요.”

휘타의 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빛나는 눈동자가 깊고 진해졌다.

“도중에, 못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상관…… 없어요.”

무심결에 그의 팔을 잡았다.

연우의 턱을 잡고 입술을 마주 댔다. 그의 숨이 빗물과 함께 들어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지만, 물기에 자꾸 미끄러졌다.

휘타가 연우를 휘감고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한참 후에 입술을 뗀 그가 엄지로 매끈한 연우의 입술을 쓸었다.

“내가 상관있습니다.”

“…….”

“그대가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그가 연우를 번쩍 안아 들더니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우선 젖은 옷은 밖에서 벗고.”

철퍽. 젖은 옷이 마루에 쌓였다.

*

이튿날.

사림과 소호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연우는 휘타와 함께 점심을 준비했다.

“혹시 당신이 멀리 보낸 거예요?”

휘타가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눈치껏 피해준 겁니다.”

이제 오지. 불편할 텐데.

기다리고 있는 연우의 마음을 아는 휘타가 한마디 더 했다.

“적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안 올 테니 기다리지 마세요.”

“그럼 어디서 자고 뭘 먹어요?”

“다 준비했겠지요.”

“준비요?”

“사림이 보기와 달리 철두철미한 구석이 있습니다. 해서 내가 좋아하고요.”

연우는 괜히 쫓아낸 거 같아서 미안했다.

그러잖아도 자신 때문에 성 밖으로 나와 고생시키는 거 같았는데, 이 작은 집에서도 나갔다.

“그렇게 안타까운 얼굴을 하면 좋아는 하는 나는 뭐가 됩니까?”

“그게 아니라 밖에 있다니까 걱정돼서 그래요.”

“지하계는 따뜻한 편이라 내리는 재와 비를 피할 천 한 장만 있다면 어디서든 잘 수 있습니다. 소호가 곁에 있어서 위험할 일은 없지요. 사림의 수호령도 만만치 않고.”

그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연우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줬다.

“그대가 이러는 건 도리어 사림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이 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멀쩡한 집 놔두고 밖에서 지내는데 신이 났단다.

돌이켜 보면 사림은 늘 연우가 먼저였다.

사림에겐 앞선 두 번의 삶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꼭 연우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대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이후에도 계속.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 사림을 어떻게 만났는지 떠올렸다.

당시 사림은 설홍의 시녀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른 시녀들에게 맞고 있었다. 정확히 머리채가 잡혀 뜯기고 있었지.

얼핏 보기에 따돌림을 당하는 거 같았는데 사림의 편에 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일방적으로 사림만 당하는 싸움을 연우가 말렸고, 그 후에 사림이 연우의 시녀로 왔다.

다들 연우 밑으로 들어오기를 꺼리는 와중에 사림은 자처했단다.

아마 도와준 일로 그랬지 싶었다.

그때야 그런 이유가 있다지만, 이번엔 왜 그러는 걸까.

휘타에게 소개받을 때부터 친근하게 굴었다. 덕분에 연우가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됐고.

사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연우에게 한결같았다.

휘타 못지않게 고마운 그녀.

“사림이에게도 참 고마워요. 절 안지 얼마나 됐다고…….”

“그것만은 아닐 텐데.”

휘타가 웃었다.

“사림이 그대에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소호도 마찬가지고요.”

“왜요?”

“그들은 나와 함께 사신의 굴레에 묶여 있었습니다. 뭐 사신의 일을 한 건 아니지만.”

함께 묶여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연우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놨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다음 사신을 찾을 때까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운명이었다, 이 말입니다. 영생이라는 게 원하는 사람에게나 좋은 거지 원치 않으면 끔찍하죠.”

“왜 세 사람이 묶여 있죠?”

“그 이유까진 잘 모릅니다.”

휘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을 마셨다.

문득 의아함을 느낀 연우.

“그럼, 이 전에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에서도 당신과 묶여 있었어요?”

“아니요. 이번 삶을 살면서 그리되었습니다.”

잠깐.

뭔가 머릿속이 어지럽게 얽혔다.

그렇다면 앞의 두 삶에서는 얽혀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소호야 원래 휘타의 사람이었다지만, 사림은 효조의 밑에 있었다.

사림의 삶도 세 번째에선 달라졌다는 말인데.

휘타는 계속 사신이었던 걸까. 그럴 거라 짐작만 했지 물어본 적이 없다.

“당신, 첫 번째나 두 번째 삶을 살면서도 사신이었어요?”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 사신이 된 거예요?”

휘타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차마 연우에게 그녀 때문에 탐야와 거래를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은 죄가 커서.”

그를 사신으로 지목했던 여자의 말을 빌렸다.

연우가 더 묻지 않았다.

이 이상 묻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휘타는 연우의 질문을 들으며 문득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일이 궁금해졌다.

이번 생에 시간이 되돌아가면서 없던 유타가 생겼다. 유타야 탐야가 만들었다지만,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도 바뀌었다.

없던 부모가 생겼다. 그것도 탐야가 한 짓인가.

그럼 그를 찾아왔던 여자가 말한.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 말은 뭐지.

탐야와 했던 거래를 기억하기 전까지 여자가 했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그랬구나 하며 운명이라고 여겼건만.

무언가 중요한 걸 비켜간 느낌.

도무지 모르겠는 무언가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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