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야하기도 하네요.
2018.06.05.
연우가 탐야와 만난 일을 휘타에게 얘기했다.
“백 일이에요.”
“백 일? 겨우 백 일이라니.”
석 달이 조금 넘는 기간. 짧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일 년은 되지 않을까 했다.
다음 사신이 가까이 있다면 모를까 백 일 안에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서둘러야겠습니다. 당장 결정을 내리긴 어렵고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을지 고민해보겠습니다.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남아 있는 불편함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중요한 일을 앞둔 마당에 지나버린 얘기로 전력을 잃으면 안 됐다.
그리고 휘타가 어젯밤에도 말했다. 그가 바라는 건 연우의 행복이라고.
두 번이나 시간을 돌린 것 역시 그녀를 위해서였으리라.
그때는 연우의 마음이 어떤지 몰랐기에 탐야에게 그런 소원을 빌었다고 생각했다.
현재가 중요했다,
세 번째 삶에서 효조가 아닌 휘타를 먼저 만났고, 효조가 아닌 휘타의 부인이 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휘타의 가슴에 번져 있던 검은 빛은 아직도 연우의 눈에 보였다.
사림에게도 보이느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랬다면 진작 말했겠지.
가슴에서 검은빛이 나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벌써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효조를 먼저 처리한 후에 그대가 사신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휘타 없이 다음 사신을 찾는 게 위험하긴 했다.
그가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
백 일이라는 기한을 줬기에 하루라도 아껴야 했다.
사실 휘타에게 지배자의 자리를 제안했던 반역 무리는 해체되지 않았다.
효조에게 낱낱이 고하던 첩자는 휘타가 풀어둔 사람이었다. 일부러 효조가 알게끔 지시했다.
병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효조라고 해도 자신을 반대하는 집단 때문에 긴장했을 것이다.
더불어 분노도 하고 있었겠지. 나름 치밀하게 먼저 덮칠 궁리를 하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갑자기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김이 빠지게 된다.
의심의 눈초리를 갖고 지켜보겠지만, 시간이 흐르며 안심한다.
휘타는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예상했던 시간이 짧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거사 일자를 앞당기자고 했으나 이미 정해진 시간이 있기에 모두 반대했다.
하는 수 없이 휘타는 그들의 수장과 독대했다.
그는 오늘도 가면을 쓰고 앉아 있었다.
“이제 얼굴을 보여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수장은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옆 사람에게 조용히 말하면 그 사람이 휘타에게 전하며 의사소통을 했다.
“나는 자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효조만 처리하면 된다.
누가 그 자리에 올라앉아도 효조보다는 나을 터.
“후에 댁이 앉든 나눠 먹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정을 앞당겨 주십시오.”
“관심이 없다며 관여하는 이유가 뭐요.”
수장이 처음으로 직접 말을 했다.
예상과 달리 남자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벗었다.
상대의 얼굴은 본 휘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
“정말 피안 님이 맞으십니까.”
“의외의 사람이라 놀랐나요?”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예전에는 휘타에게 하대를 했던 피안이었다.
“지금은 그러면 안 되지요. 우리를 이끌어줄 분이 아닙니까.”
피안의 말에 휘타가 손을 저었다.
“싫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 효조만 사라지면 됩니다. 그것뿐이고 이 일에 관여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효조를 직접 처리한다고 했군요.”
반대로 휘타는 피안이 이러는 까닭이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안이라니.
장공이 자리에서 내려가고 효조가 올라간다 해도 피안의 안위가 위험해지지는 않을 텐데.
그녀가 장공의 가장 측근이긴 하나, 워낙 흐름을 보고 사람이라 효조의 눈 밖에 날 리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기회주의자다.
그래서 수호령이 박쥐여야 한다는 야유도 있었다. 또 어떻게 보면 현명하다고 봐야 했다.
절대 이렇게 위험한 일에 나설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장이라니.
“피안 님일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겠죠. 성안의 사람들이 날 두고 하는 말을 나도 알고 있으니까요.”
피안도 자신에 관한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거 맞잖아요?”
“그럼, 이번엔 제게 붙으신 겁니까?”
표정이 변하지 않던 그녀가 이번엔 웃었다. 금방 사라지고 말았지만.
“아니요. 이번엔 좀 달라요. 장공 님을 저리 만든 놈을 용서하고 싶지 않아서요.”
장공을 저리 만든 놈?
그게 효조라는 건가.
“설마 효조가 장공 님을…….”
“맞아요. 장공께서는 아들에 의해 죽음의 문턱을 다녀오셨어요.”
피안도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란다.
알고 나서 장공에게 말해줬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고 했다.
아들이 당신에게 그럴 리 없다며 한사코 그가 보낸 탕약을 꼬박꼬박 마셨단다.
효조는 연우에게도 독이 든 탕약을 보내 죽이더니 제 아버지에게도 그랬던 거다.
막연하게 장공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만 생각했는데, 효조가 일을 꾸몄으리라 예상치 못했다.
첫 번째 삶에도, 두 번째 삶에도 이번 세 번째 삶에서도 효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장공에게 독을 먹였다.
“복수하시는 겁니까.”
장공을 향한 피안이 마음이 이렇게까지 컸던가.
어린 나이에 시집온 장공의 마지막 부인인 그녀였다.
여태껏 지켜보며 장공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졌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남편이고, 이 세계의 지배자라서 편히 살기 위해 장공 옆에 있는 거로 보였다.
“효조가 하는 짓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라고 하죠. 그나저나 날짜를 얼마나 앞당기길 원하세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효조의 군대가 아직 성 근처에 머물고 있을 텐데요.”
“압니다.”
“알아요? 실패하면 어쩌려고 합니까?”
“실패하지 않습니다.”
할 일을 잃은 군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들었다.
물론 날짜를 미룰수록 기습했을 때 승리할 확률이 높지만.
피안이 휘타를 가만히 바라봤다.
기본적으로 휘타를 신뢰하고 있었으나, 짧은 시간 안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판단하는 중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휘타가 연우 때문에 이런다는 걸 피안도 느꼈다.
그 아이가 그렇게나 소중한 걸까.
사랑이 좋구나. 젊음이 좋구나.
지금 이 순간, 휘타에게 연우보다 소중한 건 없겠지.
그 힘이 얼마나 클지 시험해 볼까나.
피안이 결론을 내렸다.
“나흘만 시간을 주세요.”
“그럼 그 전날 밤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녀가 모은 병력이 효조에 비해 부족했지만 전혀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반역 무리가 효조의 군대를 상대하는 동안, 휘타는 효조를 상대하게 된다.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성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음이었다.
*
마당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연우.
휘타를 기다리며 시간을 이리 보내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밖에 나가 아무 사람이라도 만나 다음 사신을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기도 한데.
지금의 상황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하겠지.
휘타와 상의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검은 빛.
문득 의문이 생겼다. 탐야가 이제 그는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가슴에 그런 게 보이는 걸까.
다음 사신을 찾아야지만 사라지는 건가?
자세히 좀 알려주지. 궁금해서 머리가 복잡하다.
“얼굴에 걱정이 많습니다.”
밖에 다녀온 휘타가 연우의 옆에 앉았다.
“이야기가 잘되었나요?”
“나흘만 시간을 달랍니다.”
“그럼, 나흘 뒤에…….”
모든 일이 시작된다는 말이었다.
그에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또.”
휘타가 연우의 이마에 잡힌 주름을 양 검지로 펴줬다.
“우리는 나흘 동안 재미있게 놀면 됩니다. 걱정은 그때 가서 합시다.”
“태평하세요.”
“내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던 사람이 맞습니까. 혹 어제는 취해서 나온 말이었나요?”
“아니에요.”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데.
맨정신으로 하기 힘들어 일부러 술의 힘을 빌린 거였다.
이래서 취해서 하는 말은 힘을 잃게 되는가 보다.
“그래요. 나흘 동안 신나게 놀아요. 뭐 하고 놀까요? 노는 데는 저보다 당신이 더 일가견이 있으니 따를게요.”
매일같이 연회에 가서 기생이랑 놀았으니 하는 말이었다.
사신의 신부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걸 안다. 그러나 처음 그와 연회에 갔던 날이 잊히지 않았다.
상의는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채로 그의 팔에 매달렸던 기생들.
그녀들에게 자상하게 웃었던 휘타였다.
“지난 일은 책망하는 겁니까?”
“아니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아아, 질투하는군.”
그가 입꼬리를 늘리며 연우의 볼을 툭 건드렸다.
“그렇다면 그대보다 노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의 뜻대로 해주는 겁니다.”
“알겠어요.”
“저기에서 놉시다.”
허공을 가로지른 검지가 가리키는 곳.
두 사람의 방이었다. 단순히 방에서 놀자는 뜻이 아니었다.
“어제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빨갛게 물든 연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갑자기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그와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자연스레 그려져 당황스러웠다.
기절하듯 잠들고, 일어나자마자 탐야를 만나 잠시 잊고 있었다.
“그대가 일찍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얼마나 아쉬웠던지.”
“대낮이에요.”
“대낮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사림…….”
사림을 부르며 벌떡 일어나는데 휘타가 손을 잡아당겨 앉혔다.
“없습니다. 눈치가 워낙 빠른 녀석이라.”
조금 전까지 마당을 쓸고 있는 걸 분명히 봤다. 언제 사라진 거야?
“혹 싫어서 그럽니까.”
휘타의 눈썹이 쳐졌다. 그는 실망한 척 연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연기하는 걸 뻔히 알면서 마음이 약해지는 건 뭐란 말인가.
“그, 그래도 나흘 뒤를 위해…… 체, 체력을 아껴야 해요.”
휘타가 키득키득 웃더니 나중에 크게 소리를 냈다.
“내가 무엇을 할 줄 알고 체력을 아낀다는 겁니까.”
또 당했다.
연우가 홱 일어나 가려고 하자 휘타가 얼른 그녀를 안아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어찌 매번 당합니까.”
그를 흘겨봤다.
“그대는 귀엽습니다.”
아까보다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대는 사랑스럽지요.”
“그 정도만 하세요.”
민망해서 얼굴을 돌렸다.
“왜? 칭찬은 구체적으로 할수록 좋은 법입니다. 내가 없는 말은 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하실 거면 전 일어날래요.”
몸을 일으켰지만 휘타의 힘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시만.”
그가 연우에게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하긴. 피곤하겠지.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나.
연우가 휘타를 안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녀만큼 휘타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날들이었을 텐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터지는 문제에 힘들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사신의 일을 하며 끝이 보이지 않은 길을 달려온 사람.
아무리 휘타가 자신했다고 하나 그도 사람이었다.
나흘 뒤에 벌어질 일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겠지.
토닥토닥.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눈을 뜬 휘타가 고개를 들어 연우를 봤다.
아직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어줬다.
“괜찮아요.”
작은 소리가 예쁜 입술에서 나온다.
그녀의 짧은 한마디.
‘괜찮아요.’에 많은 말이 내포되어 있었다.
힘내요. 우리 잘해낼 수 있어요. 당신을 믿어요. 저를 믿어줘요.
연우는 일 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하늘 같았다.
맑고 푸른 하늘. 눈부신 햇살.
어둠이 찾아와도 세상을 빛나게 하는 별빛.
어쩌다 수많은 별 중의 하나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기적이었고 선물이었다.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눌러 당겨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이 따뜻했다. 하얀 구름의 맛이 이러할까.
연우가 두 팔을 휘타의 목에 둘렀다. 허기진 입맞춤이 이어졌다.
연우의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신인데 왜 자꾸 그녀에게 잠식당하는 느낌인지 알 수 없다.
휘타가 그녀를 안은 채로 벌떡 일어나 방을 향해 걸었다. 급했다.
조금이라도 자제력을 잃으면 여기서 연우를 안을 것 같아 성큼성큼 걸었다.
어떻게 문을 열고, 닫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연우를 눕혔는지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가 매달려 있었다.
“이런.”
호흡이 조절되지 않았다.
“미안해서 어쩌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연우의 뺨에 입술을 대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에서 여린 숨이 퇴폐적인 소리와 함께 뭉개져 나왔다.
“그대는……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야하기도 하네요.”
아주 살짝 연우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그런 눈으로 보면 참을 수가 없는데.”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핥아줬다.
“참…… 참지 마요.”
하아. 미치겠다.
참지 말라는 것뿐인데.
왜 이리 자극되는 걸까.
“들리지 않습니다.”
휘타는 참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도 또 듣고 싶어 되물었다.
“빨…… 리요.”
“원하신다면.”
한계였다.
연우는 그에게 여유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연우가 원하는 대로, 또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지금, 서로에게 배려는 필요치 않았기에 끝까지 몰아붙였다. 나누는 말도 필요치 않았다.
애타게 찾는 몸짓과 신음이면 충분하다.
휘타는 그녀에게 온몸이 감싸 안긴 기분이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포옹에 안도를 느끼는 반면 애가 탄다.
점점 고지를 향해 올라가며 안도는 초조함으로 변했다.
그는 포식자였다. 그런데 거칠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연우에게 잡아먹히는 기분.
먹히지 않기 위해 날뛰어도 그녀 안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먹히는 쪽도 좋았기에 휘타는 연우에게 자신을 내주었다.
*
“잡아먹히는 듯했습니다.”
휘타가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연우의 목덜미에 쪽, 쪽 입을 맞췄다.
“누가 할 소리를.”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벗어나 연우의 등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반응하지 않으려는데 자꾸 몸이 움찔거려 이불깃을 꽉 쥐는 연우.
“저기 그만…….”
“정말? 정말 그만하면 좋겠습니까.”
이불 위에 있던 그의 손이 안으로 들어와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한숨을 내쉬자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앞으로 내민 그가 연우를 보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해요.”
휘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언제쯤 해주려나 싶었는데, 오늘 듣는군요.”
“제가 사랑한다고 한 적 없어요?”
“내게 말해준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연우와 돌아누워 그를 마주 봤다.
정말 한 적이 없었나.
곰곰이 생각했다. 좋아한다고 말한 건 떠올라도 사랑한다 말한 기억이 없었다.
“미안해요. 말하지 않았지만 사랑하고 있어요.”
얼마나 사랑하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휘타와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은 효조에게 당했던 일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그대의 음성으로 듣고 싶어서.”
“사랑해요. 또 말해 줄 수 있어요. 하루에 열 번, 백 번도.”
연우의 고백에 휘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정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뜨거워지더니.
“이건 그대 탓입니다.”
“뭐가요?”
이불을 들춘 그가 아래로 내려가 머리를 넣고 덮었다.
“어? 잠, 잠깐만요!”
곧 연우의 외침이 짙은 숨소리로 변했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소호가 흙바닥 위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림에게 물었다.
“나흘이요.”
“나흘이나?”
소호의 한숨 소리에 사림이 고개를 들었다.
“놀러 다녀올까요?”
“휘타 님을 두고 어딜 다녀와.”
“그럼 아무 말 말고 계셔요. 제가 특별히 뼈다귀도 챙겨왔잖아요.”
“나 지금 인간이다.”
“어차피 변하면 좋아할 거면서.”
사림이 작게 중얼거리다 다시 그림을 그렸다.
주인을 위해 못 할 것이 없는 소호였지만, 사림과 단둘이 나흘이나 되는 시간을 보낼 일이 막막했다.
이제 겨우 오후를 넘어선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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