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분명히 아픈 일인데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2018.04.27.
“그대는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습니까.”
“네. 알고 있었어요.”
친분은 없었지만.
연우의 말에 휘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그런 답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제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해도 믿어주실 수 있어요? 허황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생각은 말아주세요. 저 멀쩡해요.”
괜찮다, 무슨 말이든 믿어주겠다고 하며 휘타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행동인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우는 바짝 마른 목이 갈라질 듯해 탁자로 가 남은 차를 마셨다.
휘타도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탁자에 살짝 엉덩이를 걸친 그가 팔짱을 끼며 들을 준비를 했다.
“처음 만난 날, 저더러 지하계가 처음이 아닌 거 같다고 했죠.”
“역시 처음이 아니었군요.”
놀라는 기색이 없다.
표정 관리를 하는 건가. 아니면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놀랄 것도 없다는 건가.
“저는 같은 시간을 세 번째 살고 있어요.”
그의 이마에 옅게 주름이 졌다. 이건 절대 몰랐겠지.
반복되는 시간. 과거가 아닌 과거. 그리고 현재가 아닌 현재.
이걸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사고 때문에 지하계에 와서 혼인하고 1년 정도 살다가 죽었어요. 죽으면 꼭 사고 났던 시간으로 되돌아갔고요. 앞선 두 번의 삶은 거의 비슷하게 흘러갔어요. 세 번째는 전남편이 아닌 당신을 만나면서 바뀌었어요.”
“흠.”
그가 제 턱을 긁었다.
“알아요. 믿기 어렵다는 거. 하지만 사실이에요.”
“그대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닙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단박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연우도 직접 겪지 않았다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는 자신의 말처럼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 하나 되짚어 보고 있으리라.
그를 지켜보다가 연우가 가만히 말했다.
“지하계는 일 년에 한 번, 하늘이 맑아지는 날이 있죠. 효조 님의 생일.”
휘타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림이나 다른 이들에게 들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녀만이 알고 있는 다른 사실 하나.
성안의 중요 인사들만 알고 있는 것.
“근데 효조 님의 진짜 생일이 아니잖아요.”
여태껏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휘타의 눈동자가 커졌다.
효조가 어릴 적에 떼를 써서 생일 바꿨다고 들었다.
특별해지고 싶었던 아들을 위해 장공이 흔쾌히 수락했고.
“과거에 성안에서 살았습니까?”
헙. 연우가 손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중요 인사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했으니 성안에서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거기서 멈추면 다행이지. 신분이 어땠다는 것까지 짐작하게 하는 증거였다.
휘타를 믿게 하고 싶은 욕심이 과했나 보다.
“…… 네.”
“그래서 효조를 알고 있었고?”
“네.”
“그래서 설홍이 내줬던 과제도 하루 만에 해냈군요.”
“네.”
“의심스러웠던 일들이 이제 다 이해가 됩니다.”
의문투성이로 흩어져 있던 연우의 말과 행동들이 짜 맞춘 것처럼 정리되는 휘타였다.
연우의 몸에 낙인 없는 것도.
밤에 조심하라 했을 때, 이미 알고 있던 것도.
장공을 만나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도.
효조를 보고 도망갔다는 일 등.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았던 모든 일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까지.
연우의 말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나, 못 믿을 것도 없다.
연우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더구나 효조의 생일에 관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하계를 움직이는 탐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
신(神)인 탐야가 개입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수호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지하계에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도대체 탐야는 알 수가 없는 신이었다.
연우가 세 번째 같은 삶을 살고 있다니.
문득 연우의 결혼 생활을 떠올리는 그.
과거에서 나를 알고 있었지만, 다른 남자의 부인이었으니 그땐 내 곁에 없었겠군.
지독한 남편에게 모진 학대를 당하는 동안 난 뭘 하고 있었을까.
“과거에 나는 그대에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잘 모르는 사람?”
“우리가 서로 몰랐어요?”
“어…… 저는…….”
연우가 말을 끊으며 머뭇거렸다.
“성에서 일하는 출입 하녀였어요. 전 당신을 알지만, 당신은 절 알 수 없었죠.”
“누구 밑에 있었습니까.”
“아…… 그게…… 설홍 님이요.”
어색하게 웃은 연우가 휘타의 눈을 피했다.
“그럼, 그대의 남편도 이곳에 있겠군요.”
연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말만 들어도 저토록 놀라게 하는 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연우를 끔찍한 세상에 살게 했던 놈이다.
내가 그래서 그대에게 빛이 되었구나.
그놈이 아닌 나를 만나서.
휘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주먹을 쥐었다.
“이름.”
“네?”
“남편이요. 어디에 사는 누군지 알려주세요.”
“전 괜찮아요. 이젠 어차피 그 사람을 만날 일도 없고…… 당신을 만났잖아요. 그는 성 밖에 사는데 제가 나갈 일도 없고…….”
연우는 당황하면 말의 두서가 없어진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휘타의 눈에는 그녀가 남편이란 작자를 지키려는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해를 입힐까 이러는 겁니까.”
“아니요!”
연우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강한 부정의 의미로 손까지 휘젓는다.
“당신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지금은 서로 만나지 않을 인연이에요. 굳이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간절하게 휘타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힘을 갖게 되면 대게는 복수를 꿈꿀 텐데 그녀는 다르다.
조금 괴롭힌 것도 아니고 고문까지 당했다면서 왜 저러는지.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 해봤어요. 복수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실패했다는 말이었다.
“나는 해줄 수 있습니다.”
“조금의 연도 맺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평생, 죽을 때까지 서로 모른 채로 살면 돼요.”
연우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나름의 복수도 했고요.”
더 설득해봤자 다툼이 될 뿐, 그녀가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들을 수 없다.
“확인할 게 있습니다. 그가 당신을 죽였습니까?”
“첫 번째는 그랬어요. 두 번째는…….”
연우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리고 또 어색하게 웃는다.
“그게 가장 확실한 복수였어요.”
이번엔 더 밝게.
그 말을 하면서 어찌 웃을 수가 있어.
예전에 연우가 다친 손가락을 보이며 전남편이 자르지 않은 게 어디냐고 하면서도 이런 표정이었다.
분명히 아픈 일인데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말한다.
익숙해져서 안 되는 일에 익숙해진 것만 같아서 콧등이 시큰거렸다.
연우가 말하지 않는다면 직접 알아내야겠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
휘타의 질문은 아침부터 저녁을 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아주 자잘한 것부터 굵직굵직한 것까지 끝이 없었다.
잠깐 말이 없길래 끝나는가 싶더니 주변인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소호를 알고 있었습니까?”
“얼굴만요.”
“사림도?”
“네.”
“내가 사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나요? 아, 그건 몰랐겠군.”
알았다면 연우가 그에게 사신이 맞느냐 확인하지 않았을 테니까.
질문을 던지고 바로 깨달은 그가 답도 했다.
“그러면 유타도 알고 있었습니까?”
“유타 님은 몰랐어요.”
효조의 부인으로 2년을 살았던 연우는 성의 어지간한 유명인사를 다 알고 있었다.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아도 누가 누군지 얼굴은 알아봤다.
물론 모두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한 번은 들었을 법한데.
휘타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처음 알았다.
세 번째 삶이 시작된 후로 정신없이 흘러가서 유타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땐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좀 이상했다.
유타에 관한 정보가 전무하다.
“유타는 워낙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해서 보기 힘들었을 겁니다.”
“네. 그랬나 봐요.”
새벽에만 가끔 나타나는 유타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이상하게 여길 것 없는 문제였다.
*
사흘 뒤 아침.
가장 큰 근심거리였던 효조가 조용히 지내고 있다.
연우는 이대로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길 바랐다.
이만하면, 이렇게만 지낸다면 모든 게 순조로울 것이다.
혼인 날짜가 열흘 뒤로 잡혔다.
너무 이르다며 연우가 미루자고 했지만, 휘타가 열흘 뒤나 한 달 뒤나 똑같다며 고집했고 그녀가 졌다.
“휘타 님은 여유로운 사람인 줄 알았어.”
연우가 머리를 빗겨주는 사림에게 말했다.
“여유로운 분이시죠. 느긋하게 사세요.”
“그런 분이 혼인 날짜도 여유 있게 잡으시면 얼마나 좋아.”
“아가씨가 관련된 일이니 그러시죠.”
유타 때문인가.
그의 말을 전한 탓에 휘타가 혼인을 서두르나 싶기도 했다.
유타는 그 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건 아니었으나 휘타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눈이 떠질 때면, 정원과 연결된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던 유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었다.
어디 아픈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알아서 하겠지 하다가도 사람들과 교류 없이 혼자 살기에 정신이라도 잃으면 어쩌나 싶었다.
“참, 설홍 님께서 요즘 두문불출하고 계시대요. 종아리에 상처가 많이 나서 그럴까요?”
“종아리의 상처보다는 자존심에 상처가 컸을 거야.”
“하긴. 그랬겠네요.”
보는 눈이 많은 자리였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그나저나 휘타의 부탁을 받고 와준 피안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르지 않는 이상 찾아가면 꺼릴지도 몰라 조심스러웠다.
왠지 피안과는 가까이 지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장공을 만나러 아침 일찍 나선 휘타를 따라갈걸 그랬나.
그랬으면 자연스럽게 피안을 만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휘타 님도 안 계시는데 뭐하실 건가요?”
연우의 머리 손질을 끝낸 사림이 물었다.
휘타는 장공을 만난 후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연회에 가지 않겠다는 그와 일주일에 두 번으로 합의를 봤다.
“그러게. 매일 놀기도 어렵다.”
호강에 겨운 소리였다. 효조 때문에 항상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살았으면서.
연우가 생각을 달리했다.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할 일이 없나 찾아보는 게 좋겠다.
예전처럼 휘타의 방을 청소하고, 금(琴) 연주도 해야지.
외출이 가능하다면 시장에도 가보고 할 텐데 아쉬웠다.
사림을 내보내고 휘타의 방을 정리했다. 더럽지 않아 마른걸레로 먼지만 닦아냈다.
서랍의 손잡이를 닦던 연우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붉은 끈을 떠올렸다.
잠깐 궁금해하고 말았던 그 끈이 오늘따라 궁금했다.
살며시 서랍을 열었다.
어김없이 그 자리에 붉은 끈이 있었다.
여전히 더러웠고 낡았다. 이렇게 넣어둔 걸 보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었다.
꺼내서 보려던 연우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궁금하면 그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주인 허락도 없이 만지는 건 예의가 아니라 얼른 서랍을 닫았다.
그 시각, 장공과 만난 후 연회에 참석한 휘타.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기생들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구석에 앉아 있는 단희가 보였다.
그가 온 걸 알지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벌벌 떨며 눈치를 본다.
쯧.
휘타가 혀를 차고 자리에 가 앉았다.
무희가 나와 춤을 추고, 듣기 좋은 연주를 시작했으나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술을 마셔도 마시는 거 같지 않았다.
유타가 연우 앞에 나타나지 않은 얼마간 평화로웠다.
한데 그 녀석이 말한 내용이 영 찜찜하다.
유타와 만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살면서 서로 마주 볼 일이 거의 없어서 쉽지 않을 줄 알았어도 이 정도일 줄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정확하게 들어야겠다.
뭘 원하는지 알아야겠다.
휘타의 머릿속이 온통 유타로 가득 찼다.
*
그날 밤.
“오늘도 조심하세요.”
연우가 휘타의 옷매무새를 만져주자 그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잠은 푹 자는 게 좋습니다.”
“깊이 잠들면 못 기다리고요, 일찍 눈이 떠지면 기다릴게요.”
“무리하지 마세요.”
휘타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던 연우가 침상에 누웠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연우.
몸도 마음도 편한데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다.
팔을 괴고 옆으로 누운 연우의 정면에 붉은 끈이 있는 서랍장이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은색의 무언가가 보이는데 그녀가 제대로 봤다면 끈이었다.
다가가서 확인하자 붉은 끈이 맞았다.
“이게 왜 밖에 나와 있지?”
누군가가 봤다는 거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휘타밖에 없었다.
오전에 연우가 본 후로 그가 꺼내본 모양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는 가끔 이걸 꺼내보는 거 같았다.
이게 뭐길래.
궁금했다. 흔하다 못해 버려야 할 만큼 낡은 끈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서랍 밖으로 나와 있는 부분을 자세히 살펴봤다.
매끈매끈한 공단으로 만들어졌다.
넓이로 봐서 허리를 묶을 용도는 아니고 머리나 전모에 쓸 장식용이었다.
꺼내서 더 볼까 하던 연우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넣자. 진짜 이건 아니잖아.
똑같은 갈등만 벌써 몇 번째인지.
서랍을 열어 안으려 넣으려던 그녀의 눈에 글자가 보였다.
끝자락에 끈과 비슷한 색상의 실로 수가 놓였다.
헤어져 정확한 글자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한 글자인데.
끈을 들어 불 아래로 가 비춰봤다.
한문이었다.
“우(雨)?”
우가 맞나.
눈에 가까이 대는 순간.
“우가 맞아.”
유타였다.
“이걸 알아요?”
유타에게 붉은 끈을 보이며 연우가 물었다.
“알지. 휘타에게 중요한 물건이야.”
“중요한 물건이요?”
“휘타의 첫사랑이 남긴 물건.”
물어보지 말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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