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31화 (31/100)

<31화> 그대를 지키는 방법.

2018.04.17.

다음 날.

연우는 휘타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시중을 들던 사림이 밖에 다녀오더니 누가 연우를 보자 한다고 전했다.

“누가 아가씨를 모시러 왔다고?”

휘타가 되물었다.

“설홍 님의 시녀요. 이제 진정한 성의 여인이 되기로 했으니 혼인 전에 숙지해야 할 것을 친히 알려주신답니다.”

사림이 내키지 않는 듯한 음성으로 답하자 휘타는 기가 찼다.

혼인 소식은 장공에게만 알렸는데 그새 효조의 귀를 거쳐 설홍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혼인 전에 숙지할 것이라.

예상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벌써 연우를 발아래에 두려는 설홍이었다.

“가지 않겠다고 해라.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친히 알려주실 필요 없다는 말도 전하고.”

성안 여자들의 일에 휘타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초대하지 않은 이상 여자들만 있는 자리에 참석도 불가했다.

물론 설홍은 휘타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있지 않은 자리에서 연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막아줄 수 없었다.

“휘타 님.”

연우가 휘타를 부드럽게 불렀다.

“갈게요.”

“힘든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영원히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이번에 가지 않으면 또 부를 거예요. 미루다 괜히 피곤한 일이 생길까 봐 그래요.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다 말씀드릴게요.”

휘타는 자신을 믿어달라며 그의 손을 두드리는 연우에게 더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꼭 말해줘야 합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를 믿어보기로 했다.

“사림을 보내겠습니다. 네가 아가씨를 잘 모셔야 한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 연우가 돌아올 때까지 신경이 곤두서 있을 듯하다.

*

시녀가 설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셨습니다.”

연우가 왔다.

효조가 설홍 앞에서 연우를 노리고 있다는 걸 감추지 않았다.

예전엔 본인이 모르는 상태에서 연우를 찾았다면, 지금은 대놓고 연우를 원하고 있었다.

휘타에게 빼앗아 오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런 효조 때문에 짜증이 한가득하였는데, 마침 연우가 휘타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 얼마나 반겼는지 모른다.

그 소식에 효조가 성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나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평온했다.

효조는 본인이 원한다면 유부녀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도 휘타의 부인인데.

설마 하는 설홍이었다.

그녀가 오늘 연우를 부른 이유는 자신이 이 성의 안주인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효조나 고위 신하들이 부인을 맞이하면 빼먹지 않는 절차였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철저하게 알려주는 자리.

오늘은 다른 때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장공의 부인들도 초대해 연우에게 평소보다 더 어려운 과제를 내주려고 한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아껴뒀던 장신구로 치장했다.

범접할 수 없는 화려함으로 무장하고 상석에 앉아 있으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모두를 발밑에 두는 기분은 짜릿했다. 이래서 사내들이 권력에 맛을 들이는구나, 하고 이해했다.

사실 연우에게는 사적인 감정도 있었다.

효조가 이 정도로 욕심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러다 말겠지 했지만 그만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만에 하나 효조가 휘타에게서 연우를 빼앗아 부인의 자리에 앉힐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뒷방 신세가 될 수 없었다.

언젠가 효조의 새로운 부인 중에 하나가 설홍에게 물었다.

효조를 사랑하느냐고.

물론 그렇다 답해줬다.

하지만 속으로 코웃음 치는 설홍이었다.

살육을 즐기는 그 미친 인간을 누가 사랑하겠는가.

제 어미에게도 버려졌던 인간.

해서 제 어미를 버렸던 인간이다.

효조 옆에서 살아남으려면 납작해질 정도로 엎드려 기어야 한다.

그렇게 살다 보니 설홍은 그가 주는 풍요에 길들어졌다.

풍요뿐만이 아니다. 지하계 최고 자리에 앉은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놓을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버려. 어떻게 놓아.

이미 주어진 자리에서 버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효조 입안의 사탕처럼 굴면 만사가 형통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상념에서 빠져나오는 설홍.

단아한 차림의 연우가 들어왔다.

한껏 꾸미고 올 줄 알았던 설홍의 예상에서 벗어났다.

다들 차려입은 탓에 연우가 초라해 보여야 정상인데 도리어 눈에 띄었다.

“안녕하십니까, 채연우입니다.”

“어서 오세요. 아직 혼인 전이라 그런가요? 차림이 이 자리에 맞지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연우는 변명하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어찌하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는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연우는 줄기가 곧은 잡초 같았다.

야생화가 더 맞으려나.

바람이 불어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꽃.

그것이 눈에 거슬렸다.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스렸다.

그저 느낌이다. 겨우 이런 거로 휘타를 적으로 둘 순 없었다.

“이제 하녀가 아니니 성의 여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자 불렀습니다. 워낙 많아서 조금씩 배워나가야 할 거예요. 오늘은 가장 기본적인 걸 알려주려고 합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모두 거친 과정이지요.”

설홍이 안에 있는 여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인사시켰다.

장공의 부인과 효조의 부인, 고위 신하들의 부인까지 도합 10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었다.

“앞으로 함께 지낼 사람들이니 이름을 모두 외워오세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네.”

연우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 많다고, 어렵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네,’라 답했다.

그래서 설홍은 조건을 하나 더 제시했다.

“내일 이 시간까지 숙지해오세요.”

내일까지 머리 좀 아파봐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 더 붙은 조건에도 연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보도록 하죠. 지금 계신 분들도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연우에게 확실히 알려줄 계획이었다. 망신을 당하면 저 꼿꼿한 자세도 풀어지겠지.

“참, 성의 여인들 사이에서는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성안의 여인으로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회초리가 준비됩니다. 치마를 걷고 종아리를 맞지요. 과제를 못 해도 마찬가지니 혹 내일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오해하지 마세요. 전통에 따르는 것뿐이랍니다.”

내내 표정 변화가 없던 연우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못 외우면 그만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긴 회초리가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사람들 앞에서 종아리를 맞는 건 수치이다. 거기다 발목을 보이는 것은 더한 수치였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거리가 하나 생겼다.

효조도 부르면 재미있을 거 같다. 은근슬쩍 그의 마음을 떠볼 수도 있고.

고민할 것도 없이 그를 초대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연우의 뒷모습이 내일을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되는 설홍이었다.

*

“오늘은 연회에 가세요.”

설홍에게 다녀온 연우가 휘타에게 말했다.

연회를 가라니.

“연회에 가라니요? 진심입니까?”

휘타가 자신의 음성에 탐탁지 않은 기분을 실었다.

다른 여자들과 즐기는 게 연회다. 그녀도 알 텐데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설홍 님이 과제를 내주셨어요. 못 하면 회초리를 맞는다고 하니까 놀 시간이 없어요. 당신이랑 못 놀아요.”

“회초리라고 했습니까.”

성안 여자들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체벌이라고 들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울 수 없어서 만들어놓은 규칙.

그와는 먼 얘기라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연우에게도 미칠 줄이야.

“나설 생각 마세요.”

연우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정말 연회에 가라는 건가?”

휘타가 재차 물었다.

“네. 놀아드릴 수 없다니까요.”

“그렇다고 연회에 가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합니까?”

옆에서 방해 말고 조용히 있어 달라거나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연회라니. 다른 여자와 술을 마시며 즐기는 자리에 가라고 하다니.

곰곰이 생각하던 휘타가 팔짱을 꼈다.

“이제 날 가졌다 이거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들이 바글거리는 연회에 가라고 할 리가 없다. 얼마 전까지 질투하던 그녀이지 않았던가.

필기도구를 준비해 탁자에 펼치던 연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도리어 그대가 내게 목줄을 채운 듯한 기분입니다.”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깐요.”

연우는 휘타의 손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히고, 그의 앞에 앉았다.

“사림이에게 들었어요. 당신이 연회에 참석하는 이유. 제가 사신의 신부인지 정확하지 않다면서요. 기생들은 가장 다양한 정보를 가져다주고요.”

“사림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연우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가 아닐 경우를 대비해야 하잖아요. 당신이 사신의 굴레에서 꼭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연회에 가세요.”

아마 연우는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대는 사신의 신부가 가진 증표를 확인하는 방법이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건가.

내가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야 해.

사림도 생각이 있으니 거기까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진한 눈망울로 보고 있는 연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알려줘야겠다.

그래야 다시는 연회에 가라는 소릴 안 하지.

“사신의 신부가 가진 증표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머리카락이고, 다른 하나는요?”

연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신에게 그 증표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보였다.

“견갑에 문신이 있는데, 문신이 희미할 경우 잠자리를 가지면 정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녀의 얼굴색이 변했다. 역시 연우는 모르고 있는 사항이다.

“그럼 제가 사신의 신부가 아니라면…….”

“네. 다른 여자와 자야 합니다.”

정확하게, 또박또박 말해줬다.

그대가 아닌 다른 여자를 품어야 한다.

“그래서 저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함께 밤을 보내려 했던 이유입니다.”

“그랬던 거네요. 근데 전 착한 여자가 아닌가 봐요.”

“왜?”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휘타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연우에게 이런 대답을 듣고자 했던 게 아닌데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신이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는 건 싫어요.”

휘타가 원했던 답이 바로 이거였다. 다만 뒤에 했던 말이 걸렸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라는 말.

“정말 좋아한다면 당신이 다른 여자와 자는 게 싫더라도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게 맞겠죠. 근데 그러기 싫어요. 못 하겠어요.”

조심스러우면서도 말에 힘이 들어갔다.

휘타가 슬며시 웃었다. 물론 연우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웃음소리가 나올 거 같아 헛기침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우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

“제가 이것밖에 안 되네요.”

정말 많이 미안한 얼굴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연회에 가지 말까요?”

“가세요.”

왜 또 결론이 이렇게 나는 건가.

“방금 다른 여자랑 자는 게 싫다고 해놓고선 연회에 가라는 말입니까.”

연우가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싫어요. 싫은데…… 혹시 모르니까. 가서 정보는 얻어야 할 거 아니에요. 우선 정보는 모아둬야죠. 만약 제가 신부가 아니라면,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요.”

“하. 이거 참.”

그냥 솔직히 말을 할까.

신부의 여부를 떠나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른 여자를 안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녀도 안지 않을 거라고.

그게 내가 그대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휘타는 떠오르는 말들을 지워버렸다.

말해주면 미안할 것이다. 도리어 미안하다는 이유로 그를 다른 여자에게 보낼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럼 연회에 갈 채비나 도와주세요.”

우선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먼저였다.

*

휘타의 허리띠를 두르던 연우가 물었다.

“만약 당신이 사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그 일을 누가 하나요?”

“다음 사신이 나타나겠지요.”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어떻게 사신이 된 건가요?”

허리띠를 묶은 그녀가 또 물었다.

휘타는 자신이 어떻게 사신이 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긴 세월이 지나서 가물가물해질 법도 한데, 또렷이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내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떤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꽤 미인이었었고 차림이 평범했다.

-얘야, 여기 있었구나. 널 찾느라 힘이 들었단다.

힘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피곤한 얼굴이었다.

여자의 손이 그의 심장이 있는 자리를 눌렀다.

-넌 사신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단다. 탐야께서 너로 정하셨어.

그러더니 여자는 자신보다 훨씬 큰 휘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뜻은 아니지만, 어린 너에게 무거운 짐을 줘서 미안하다.

딱하게 바라보던 여자는 할 일을 끝냈는지 돌아서서 걸었다.

서너 걸음 걷던 그녀가 돌아서서 휘타를 보며 읊조렸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조용한 중얼거림이 휘타의 귀에도 들렸다.

당시에는 어려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신의 운명이 뭔지도 몰랐다.

세월이 흐른 지금.

막연하게 깨닫고 있다.

내가 중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구나, 라고.

그렇지 않고선 사신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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