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대를 마중 나왔습니다.
2018.03.30.
현사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같았다.
풀어헤친 머리. 더러운 옷. 초점 없는 눈동자가 딱 미친 사람이었다.
쉴 새 없이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말이 어눌해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지난 연회에서 봤을 때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왜 저리되었는지.
물론 연우는 그가 조금도 안쓰럽다거나 걱정스럽지 않았다.
현사가 연우에게 했던 행동을 보면 평소에도 어찌 다니는지 알 만했기에 그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연우는 바로 옆에 호위무사가 있어 안심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나 현사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그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연우를 쓱 보고 지나친다. 근처에 서 있는 나무를 보는 것처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가. 왜 날 못 알아보는 거지.
그날 그 난리를 쳤으면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현사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부, 분, 명히 여, 여기 어디였는데…….”
두리번거리다 몸을 돌려서 다른 곳을 짚고 또 말한다.
“이, 이 근처…… 어, 어디였는데…….”
연우는 그가 무얼 찾고 있는지 꽤 오랫동안 지켜봤다.
혹시 자신의 가족이 사는 집을 찾나 싶어서였다.
연우더러 사신의 신부라고 했으니 가족을 찾아서 확인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건, 현사가 연우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였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보는 그였다.
이미 몇 번이나 눈을 마주쳤는데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찾기에 바빴다.
호위무사에게 잠깐 기다려달라 말한 연우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서우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서우가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워낙 겁이 많은 아이라 지금의 현사를 보면 알아서 피할 것이다.
연우는 골목을 누비는 현사가 집에서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유타의 속셈을 모르겠다.”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은 휘타가 생각에 잠겼다.
어쩌자고 효조에게 맞선 건지. 여태껏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거의 없는 사람처럼 모습을 감추고 살아왔던 유타가 연우의 등장으로 이런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효조와 맞서는 건 위험했다.
휘타는 효조에게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휘타도 연우 때문에 효조를 신경을 쓰고 있지만, 적당한 선에서 맞춰줘야 했다.
성안에 머물러야 할 때라 웬만하면 효조와 대치하는 상황은 피하는 중이다.
휘타가 정해둔 선을 효조가 아직 넘지 않기도 했고.
한편으론 속이 좀 시원한 것도 있다. 지하계를 쥐고 흔드는 효조가 유타에게 당했다니.
쌓인 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을 효조를 떠올리자 재미있었다.
아마 유타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지하계를 뒤질 텐데.
아무리 뒤져봐라. 유타가 저 스스로 나타나지 않은 이상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걱정이 된다. 유타가 제 존재를 드러내는 간격과 횟수가 급격히 빠르게 늘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휘타는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감았다.
“효조 님은 왜 또 오신 걸까요?”
사림의 말에 감겨 있던 휘타의 눈꺼풀이 살며시 올라갔다. 굳게 다문 입술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왜긴. 설마 그가 날 보러 왔겠느냐.”
“…… 아가씨겠죠.”
유타에 효조까지.
유타야 휘타처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간절한 바람 때문에 그런다지만, 대체 효조는 왜 그러는 걸까.
그저 예쁜 여자라면 다 갖고 싶어 하는 효조의 성질머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모를 찝찝함이 휘타를 붙잡는다.
“그거 알고 계세요?”
“뭘.”
“효조 님께서 무제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서 부르신대요. 하지만 연주하러 효조 님 방에 들어간 사람 중에 살아나온 사람이 없대요.”
“이상할 거 없잖아.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효조가 미친 건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온갖 핑계를 대서 사람을 죽이는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요새 잠잠하더니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아가씨의 연주를 원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가씨의 연주를?”
“효조 님 방에 들어간 사람 중에 무제 연주를 못 한 사람은 없었답니다. 다들 아가씨 못지않게 연주했는데도 효조 님이 같은 곡이 아니라고 하셔서 결국 송장이 돼서 나오는 거죠.”
당연했다.
연우의 연주는 누가 따라 할 수 있는 곡이 아니었다.
그녀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 있다.
그런 건 따라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연우가 아닌 다른 이의 연주를 듣고 같은 곡이 아니라는 핑계와 그런 이유로 칼을 드는 효조는 이상할 것이 없지만, 휘타의 정원으로 또 찾아와 유타와 싸우려 했다는 건 이상하다.
이 이상함이 찝찝함의 원인일까.
“불안하지 않으세요?”
“뭐가.”
“이러다가 아가씨를 효조 님께 뺏기실 수 있어요. 신부 확인은 미루더라도 아가씨와 혼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표면상이지만 아가씨께도 방패가 필요하고요. 휘타 님께서 염려하신 일은 아가씨께서 잘 이겨내실 거예요. 성안 여인들의 싸움은 오래전부터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다 온 아가씨가 그걸 잘 이겨낼 거라고? 넌 참 아가씨에 대한 신뢰가 대단해.”
“아가씨는 지혜로운 분이시니까요.”
휘타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림을 보며 그녀가 한 말을 되새겼다.
불안이라.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아 의자 팔걸이는 손가락으로 딱딱 두드렸다.
불안함은 없다. 효조가 연우를 빼앗으려고 한다면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가씨가 내 아내가 된다 해도 효조가 마음먹으면 뺏으려 들 거야.”
“아, 그러고도 남을 분이죠. 그럼 유타 님은요?”
딱딱. 나무를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유타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유타.
그가 작정하고 연우를 가지려고 한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 섞여 살아가려고 한다면.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몰려와 손에 머리를 기댔다.
“혹시 휘타 님, 아가씨 안 좋아하세요? 그래서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사림의 질문에 휘타가 고개를 휙 들었다.
“좋아한다. 너는 당연한 걸 왜 물어?”
그게 언제부터인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연우가 스며들었다.
어쩌면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빛나는 머리카락 때문이었지만, 그렇게 눈길이 가는 여자는 없었다.
“아이참, 저나 소호 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거 말고요.”
사림이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그래? 내가 너와 소호를 좋아한다고. 난 아가씨만 좋아.”
“그럼 아가씨껜 고백하셨고요?”
고백하지 않았다. 당연한 거라서 할 필요가 없었다.
“그걸 꼭 말해야 아는…….”
아. 휘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말을 해야 하는 거였다.
연우가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기분이 어땠더라.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이 좋아서 미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너무 사랑스러워 그녀의 온몸에 입 맞추고 싶었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 밤, 연우를 너무 갖고 싶었지만, 전남편에 대한 기억으로 아파하는 그녀를 보며 그도 아팠다.
몸에 미약의 기운이 남아 있었어도 연우를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었다.
입 밖으로 나온 그녀의 좋아한다는 말이 어여뻤다.
형태가 있다면 소중히 간직했다가 꺼내보고 싶었다.
볼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얼마나 기쁠지, 얼마나 설렐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따뜻한 기분.
자신은 그걸 경험했으면서 연우에게 느끼게 해줄 생각을 미처 못했다.
그날 밤, 그녀와 수많은 얘기를 나눴건만, 가장 중요한 말을 되돌려주지 못했다.
미련한 놈.
휘타가 자책했다.
어떤 것보다 그게 가장 우선인데.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연우를 만나고 싶었다.
“아가씨는 언제쯤 올까?”
“글쎄요.”
“넌 그런 것도 몰라?”
“엄한 곳에 화풀이하지 마십시오.”
“누가…….”
휘타가 입을 닫았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말로 사림이 녀석을 어찌 이겨.
휘타가 잘못한 경우엔 더욱 어려웠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방 안을 서성이다 문을 열었다. 마중 나가는 길이었다.
*
“아가씨.”
호위무사 하나가 연우를 조심스럽게 부르며 그녀 곁에 섰다.
“낌새가 수상합니다.”
“왜요?”
연우가 주위를 둘러보려고 하자 아무 일도 없는 척하라고 했다.
수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는데, 역시 호위무사는 촉이 다른가 보다.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분위기가 스산하긴 했다.
저녁을 향해가는 시각.
어둠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휘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비가 그렇게 왔어도 바람에 재가 섞였다.
연우가 전모를 고쳐 쓰고 날리는 너울을 단단히 잡았다.
“절대 옆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네.”
옆의 호위무사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답했다.
그들의 긴장을 가까이 있는 연우도 느꼈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이때를 기다렸던 거 같다.
그녀의 집에서 성까지 가는 거리는 대부분은 넓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데, 딱 이곳만 한적했다.
사람이 사는 집도 띄엄띄엄 있고, 녹음이 빽빽하게 우거졌다.
연우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갑자기 호위무사들이 자세를 낮췄다.
“많이도 왔군.”
“얼마나 되는 거 같아?”
“스물.”
조용히 나누는 대화에 연우는 몸이 떨렸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아까 봤던 현사일 가능성이 컸다. 그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꾸밀 사람이 없었다.
설마 벌써 우리 집에 들렀다가 온 건 아니겠지? 괜찮겠지? 모두 무사하겠지?
또 저 때문에 가족이 희생을 당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연우를 괴롭혔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웃으며 나오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엄마에게 툴툴대지 말걸.
서우의 부탁에 다정하게 답해줄걸.
아빠의 말에 웃어줄걸.
그게 뭐라고 서운해했던 건지. 아니야. 이런 생각하지 말자. 모두 무사할 거야.
멀지 않은 곳,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풀이 흔들렸다.
잘 모르는 연우가 봐도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숨을 죽인 순간, 안에서 복면을 쓴 사람 여럿이 튀어 올랐다.
“망할. 스물이 아니잖아!”
얼른 눈으로 세기에도 스무 명이 훨씬 넘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호위무사 한 명이 연우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뒤에서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비명도 들려왔다.
이렇게 빨리, 이런 소리를 다시 들을 날이 올 줄 몰랐다.
효조만큼이나 싫은 소리들. 그의 칼 아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그 자리에 연우도 있었다.
연우에게 딴마음을 품었다느니, 연우의 치맛자락을 밟았다느니, 연우에게 눈길을 줬다느니.
말도 안 되는 죄목을 가져다 붙이며 칼을 휘두르는 효조를 봤다.
연우는 자신 때문에 죽어가던 그들의 비명을, 땅에 뿌려진 수많은 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호위무사가 죽게 될 것이다.
아무리 호위무사의 실력이 좋다고 해도 저 많은 수를 당해내기는 힘들었다.
더욱이 상대도 싸움깨나 하는 자들로 구성되었을 테니까.
잔인한 운명을 비켜가는 듯하면서 그 자리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남아 있는 호위무사가 죽을 줄 알면서 살고자 뛰었다.
연우는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달렸다.
여기서 잡힌다면 그녀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그들의 노고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쪽으로!”
연우는 자신을 인도한 호위무사를 따라 앉으며 몸을 숨겼다.
“다들 괜찮으시겠죠?”
걱정되어 물어봤다.
“모두 뛰어납니다.”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어줬다.
연우가 얼핏 보기에 수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휘타의 호위무사들은 만만치 않았다.
일당백까진 아니어도 한 번에 둘 이상을 상대했다.
점점 적들의 숫자가 줄어갔다. 남은 인원과 호위무사의 인원이 비등비등해졌다.
모두 무사하길 기도했다.
조금만 힘을 내줘요, 제발.
그때 복면을 쓴 이들이 칼을 내던졌다.
그들의 몸 위로 각기 다른 색의 빛이 올라오고, 곧이어 호위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되는 거죠?”
“수호령을 부르는 겁니다.”
이 싸움의 끝을 보기 위해서였다.
커다란 빛과 함께 사람의 형제가 사라진 자리에 수호령으로 변한 짐승만 남았다. 모두가 포식자였다.
쉽게 덤비지 않고 서로의 동태만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상대가 먼저 몸을 날렸다. 동시에 목이 물리고 두 마리가 함께 뒹군다. 털에 피가 번졌다.
연우는 차마 더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찢어지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뭐가요?”
갑자기 연우 옆에 있던 호위무사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도우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자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호위무사가 연우를 넘긴 것이다.
“네년이 성 밖에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검은 옷을 입을 단희였다.
그녀가 왜.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하늘이 나를 도왔구나.”
단희가 앙칼지게 웃었다.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 복면을 쓴 자들을 보낸 사람은 현사가 아닌 단희였다.
단희가 이럴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왜 보냈는지 알겠다. 왜 직접 연우 앞에 나타났는지도 알겠다.
조금 전까지 떨리는 몸이 도리어 차분해졌다.
“그때 일로 이러는 건가요?”
“그때 일? 아, 네년이 내 머리에 걸레를 던진 거? 물론 짜증 나. 그렇다고 이 많은 돈을 쓸 일은 아니었지.”
“그럼 뭣 때문에 이러는데요?”
“몰라서 물어? 너 때문에 변하셨어.”
표독스럽게 눈을 부라리는 단희의 얼굴이 구겨졌다.
예뻤는데, 이제 딴사람이 되었다.
질투에 눈이 먼 여자의 얼굴은 정말 추했다.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악한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못 봐주겠네요.”
“뭘.”
“휘타 님은 나 때문에 변하신 게 아니라 원래 그러신 분이었어요. 그쪽이 그걸 몰랐을 뿐. 아니면.”
“…….”
“그쪽 혼자 착각했거나.”
짜악! 단희의 손이 연우의 뺨을 후려쳤다. 얼마나 힘이 좋은지 연우가 나가떨어졌다.
“착각이라니! 착각이라니! 나만 바라보셨어! 나만 곁에 두셨어!”
고래고래 악을 지른다.
“어떤 자리에서도 내게만 곱다라셨어!”
“…….”
“그랬던 분이 날 협박했어! 너를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리고 날 모욕하셨어.”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지르는 단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우가 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쓰라렸고 뺨이 화끈거리며 얼얼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아픔은 아픈 축에도 못 꼈다.
연우가 지난 두 번의 삶을 살면서 좋아진 게 하나 있다면 맷집이 늘었다는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단희를 바라봤다.
“불쌍한 사람.”
“뭐?”
“날 싫다고 하면 보란 듯이 돌아서요. 미련 가진다고, 노력한다고 내 사람이 되지 않아요.”
“네가 뭘 알아.”
안다. 혼자만 하는 사랑은 말 그대로 혼자서 해야 한다.
그걸 드러내고 똑같이 달라고 요구하는 순간부터, 원치 않는 사랑을 받는 쪽에겐 폭력이 된다.
“고작 그런 일로 자신의 앞날을 망치지 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이 일로 단희의 앞날은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야.”
연우를 노려본 단희의 몸에서 주황색의 빛이 피어났다.
조금 전에 봤던 장면.
단희가 수호령을 부르고 있었다.
저쪽의 싸움은 아직이었다.
이제 연우가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인간이 거대한 수호령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간다고 한들 금방 붙잡히게 될 것이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발버둥을 쳤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결국 운명은 다른 방법으로 연우의 목숨을 가져간다.
방법이 바뀌었을 뿐,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이만하면 괜찮지 싶기도 하다.
효조의 손에 고문당하지 않은 게 어디야.
휘타 때문에 잠시나마 즐거웠다. 얼마 안 되는 기간, 나름 편안하게 보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더는 탐야에게 원망도 구걸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죽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
어느새 단희가 사라진 자리에 집채만 한 여우가 나타나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연우가 눈을 감았다.
내가 이대로 사라지면 가족이 위험할 일은 없을지도 몰라.
이대로 사라지면 효조를 다시는 만날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 이번엔 부디 이대로…….
시간이 다시 되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뭔가를 남겨두고 가는 느낌. 아쉬웠다.
감은 눈앞에 자꾸 휘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칼이.
그의 좋은 향기가.
그의 자상한 미소가.
그의 다정한 음성이.
그의 따뜻한 품이.
휘타가 보고 싶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죽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수 없잖아. 어떻게 버텼는데 이렇게 포기할 수 없잖아.
이제 막 효조에게서 벗어나 휘타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진짜 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대로 죽기는 억울했다.
살 거야. 효조 보란 듯이, 탐야 보란 듯이 살 거야. 살고 말 거야.
연우가 눈을 떴다.
그런데.
감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던 휘타가 앞에 있었다.
진짜 휘타였다.
“늦었습니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그대를 마중 나왔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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