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마.
2018.03.23.
휘타의 가슴이 쿵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심장이 뛰는 거였다.
그의 심장이 힘차게 제 존재를 연우에게 알리고 있었다.
연우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했다.
나 때문에 가슴이 뛰는 걸까. 정말 날 안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내게 다른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걸까.
덩달아 연우의 심장도 세차게 뛰어댄다.
휘타를 발견한 순간부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더니 이제 속도 조절을 전혀 못 한다.
휘타의 가슴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자 그가 더 좋아진다.
어떡해.
시간이 갈수록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 공기를 주입할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부디 서로의 마음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며 휘타의 등을 쓰다듬어주자 그가 연우를 더 힘껏 안았다.
숨이 막히는 거 같지만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휘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연우를 위해 기다려주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다.
이 기다림은 아끼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가 얼마나 그녀를 아끼고 있는지 느끼게 됐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
연우도 휘타의 등을 더 세게 안았다.
“좋아해요.”
준비되지 않은 고백이었다. 하지만 진심을 담은 고백이었다.
휘타가 안고 있는 연우에게서 몸을 뗐다.
“뭐라고 했습니까.”
“좋아한다고요. 제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참지 않으셔도 돼요.”
그가 곤란한 듯이 제 이마를 짚었다.
“이건…….”
둘이 나눴던 거래의 끝이 보였으나 연우는 그게 아쉽다거나 싫지 않았다.
거래의 끝은 그녀가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다.
“오늘 내가 약을 먹었습니다.”
“무슨 약이요?”
“미약. 물론 내가 원해서가 아닌…… 결론만 따지자면 원해서가 맞지만.”
미약이라면 연우도 모르지 않는다.
효조가 먹는 걸 본 적이 있고, 그가 연우에게 먹인 적도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양이 연우에게 통하지 않자 과량을 섭취하게끔 했다.
먹어봤기에 얼마나 무서운 약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연우였다.
일단 먹으면 효조를 끔찍하게 싫어하고 미워하지만, 몸이 내 뜻을 따르지 않고 그를 원하게 된다.
사람을 반 미치게 하는 약이었다.
몸이 정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교미 때의 짐승이 된 것처럼 그 짓을 못 해서 안달이 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데 휘타가 그 독한 약을 먹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기생들 틈에서 참고 왔다는 게 용했다.
그래서 날 안고 싶어서 죽을 거 같다고 했구나.
그래놓고는 다시 기다린다고 말한 그.
보통 자제력으로는 참기 어려울 텐데.
참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연우도 겪어봤다.
어딘지 딱 짚을 수 없는 곳이 바늘로 찌르는 것같이 아프면서도 간지럽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엔 견딜 수가 없어 울부짖게 된다.
당신, 그걸 어떻게 참고 있어요?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그가 안쓰러웠다.
“싫습니다. 정신이 온전할 때, 그대를 안을 것입니다.”
휘타는 연우를 위해서 참는 중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괴로움을 그녀를 위해 억누르고 있다.
“당신은 지금 온전한 정신이에요.”
참을 수 있다는 건 약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
연우가 휘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야 그에게서 괴로움이 보인다.
“정말 괜찮아요.”
발뒤꿈치를 들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휘타가 연우를 와락 안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춘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턱밑에.
쇄골에. 목덜미에.
수없이 자잘한 입맞춤을 해댔다.
연우의 입술을 끈질기게 탐하다가 다시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고, 팔 안쪽 살도 잊지 않았다.
맨살에 부서지는 그의 호흡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앗!”
휘타가 갑자기 연우를 안아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에도 입 맞추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꽤 높은 탁자에 연우를 앉히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섰다.
서로의 입술을 먹어버릴 것처럼 격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의 손이 연우의 뒷머리를 안고 다른 손은 작은 어깨와 등을 만지작거렸다.
연우도 그의 목을 끌어안고 열렬하게 화답해줬다.
그의 손이 치마가 올라가 드러난 무릎으로 옮겨졌다. 매끈한 종아리를 훑다가.
“정말 괜찮겠습니까?”
거친 숨과 함께 묻는다.
말이 필요치 않았다.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줬다.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마.”
갑작스러운 명령에 연우의 눈이 동그랗게 됐다.
“간신히 자제하고 있으니까.”
놀랐던 연우의 눈이 풀어지며 다시 웃자 휘타의 얼굴은 반대로 굳어졌다.
“심술궂은 토끼 같으니라고.”
그가 왜 토끼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으나, 애정이 담뿍 담겼다.
그의 손이 연우의 가슴 위, 단단히 묶여 있는 치마끈 매듭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연우의 손바닥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긴장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휘타는 효조가 아니라 되뇌었다.
효조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이라 자신에게 알려줬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몸이 빳빳하게 경직이 되어갔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효조의 얼굴이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휘타와 처음 보냈던 밤처럼 효조의 그림자가 그녀를 잠식해간다.
왜. 나는 아직도 왜.
휘타를 앞에 두고 왜 효조를.
당황한 연우의 눈이 파르르 떨렸고, 물기가 고였다.
그녀가 힘들어하고 있음을 휘타도 눈치채고 말없이 연우를 안았다.
머리에 입을 맞추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안심하라는 듯. 내가 항상 곁에 있겠다는 듯. 편히 쉬라는 듯.
그의 품이 너무나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
연우가 안정될 때까지 휘타가 기다려줘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후엔 금(琴) 연주곡을 알려주고,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연우를 그려준다더니 하얀 토끼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놓았다.
목에 파란 줄을 감아 놓은 그 부분을 휘타가 콕콕 짚었다.
“이게 뭔 줄 압니까?”
“당신이 준 목걸이요.”
“보기엔 목걸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럼요?”
“내 거라는 표시.”
내 거.
같은 말인데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가 보다.
소름 끼치게 싫어하던 말이 휘타의 입을 통하자 달콤해졌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아직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좋아한다는 고백은 그녀만 했다.
그의 마음을 듣지 못했지만, 혼자만 앞선 감정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만족했다.
적어도 그가 그녀를 아끼고 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침상에 같이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휘타의 품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는 또 자리를 비웠다.
이른 새벽, 텅 빈 방에는 연우 혼자였다.
약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 자리를 피한 건가. 염려스러웠다.
욕실에서 바로 나와 바로 제 방으로 갈걸 그랬나 싶은 연우.
휘타가 워낙 태평한 얼굴로 있어서 괜찮아졌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거라면 함께 있으며 많이 괴로웠을 텐데, 자신이 너무 무뎠나 싶다.
연우는 그가 누웠던 자리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휘타가 어디서 뭐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괜찮을 거 같은데 약이 얼마나 셌길래 이 시간까지 자리를 피해 있는 걸까.
휘타와 한방에서 지내기 불편해하던 그녀가 어느새 같은 침상에서 눕고 일어나는 것이 적응되었다.
옆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이렇게 허전할 줄이야.
뒤척이던 연우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오늘은 밖이 조용했다.
비가 내렸는지 습했다. 공기가 제법 깨끗해져 좋았다.
의자를 가져와 창문 앞에 앉아 오랜만에 좋은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쏴아아! 별안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어찌나 세차게 퍼붓던지 창문 안으로 들쳤다.
점점 더 세차져 하는 수없이 창문을 닫았다. 좋은 공기를 마셔보나 싶었더니 내일로 미뤄야겠다.
창문이 닫히는 순간, 팔 하나가 쑥 들어왔다.
“엄마야!”
까무러치게 놀라는 연우와 다르게 손의 주인은 차분했다.
“잠깐만.”
유타다. 놀란 그녀가 창문을 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가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흠뻑 젖었다. 비를 맞은 모양이었다.
감기에 걸릴지 몰라 걱정되는 한편 다른 걱정이 찾아든다.
이 시간에 유타가 같은 방에 있어 문제였다.
연우가 방 안에서 수건을 찾아 유타에게 건넸다.
비 오는 밖으로 내쫓기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닦고 나가주세요.”
“매몰차네.”
그가 머리부터 닦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가면은 벗지 않았다.
“전 휘타 님의 여자입니다. 여기에 유타 님이 계시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요.”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그가 멈추더니 연우를 바라봤다.
“휘타의 여자?”
“네.”
“누구 마음대로 네가 휘타의 여자래.”
두 개의 구멍으로 보이는 금빛 눈동자에 서릿발이 쳤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말없이 연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닦기 시작하는 유타.
“처음부터라…… 틀린 말은 아니네.”
유타가 몸을 마저 닦았다.
워낙 많이 젖어 닦아봤자 소용없어 보였지만 그는 정성스럽게도 제 몸을 닦는다.
단지 조금 전보다 힘이 없어 보였다.
“휘타 님이 싫어하신다면서 왜 자꾸 오세요?”
“내 마음이야.”
묵묵히 옷의 물기를 닦아낸 그가 연우에게 수건을 던졌다.
“네가 구박하니 가야겠다.”
“구박이 아니라.”
쓸데없는 소문에 휘말리기 싫으니까.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이상한 소문이 나기에 십상이다.
사람들이 물고 뜯기 좋아하는 소재이지 않은가.
“휘타 님 계실 때 오세요.”
“내가 보고 싶은 건 넌데 왜 휘타가 있을 때 와야 하지?”
또 그 말이다. 왜 자꾸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지.
연우가 곰곰이 유타와 만났던 시간을 되짚어봤다.
혹시 자신이 그를 착각하게 만든 적이 있나 싶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 만나지 않았고, 만났던 시간도 짧았다. 상대를 혼란하게 할 행동을 한 적도 없다.
그래도 유타에게 정확하게 말해줘야 한다.
“제가 오해하게끔 한 적이 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전 유타 님 형의 여자입니다. 휘타 님께 오해 사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인지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가면으로 가려져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휘타가 좋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타의 입에서 후우, 하는 짧은 한숨이 나왔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연우에게 돌아왔다.
“이 바보야.”
“…….”
“넌 널…… 윽!”
말을 하던 유타가 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