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22화 (22/100)

<22화> 내 몸이 그녀만 찾아.

2018.03.16.

“무슨 방도를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사림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하다.

“방도라는 게 없으니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휘타도 예상하였다.

유타가 이미 연우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현사를 직접 처리한 일도 있었으니까.

그래. 너도 보고 싶었을 거야. 욕심이 났을 거야.

유타가 연우를 찾아왔다는 게 놀랍기는 하나, 조금 더 지켜봐도 되는 일이었다.

다만 휘타가 유타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간혹 이럴 때가 있기에 당장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경목에게 미리 말해둬. 유타를 보면 즉각 보고하라고.”

“네. 전하겠습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듣지 못했다더냐.”

“거리가 있어서 어려웠답니다. 그리고 이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뭘 망설여? 나한테 말하려고 꺼낸 거 아니야.”

소호가 경목이 저희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내용을 휘타에게 상세히 전했다.

단희가 연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다.

유타의 일로 얼굴이 굳어졌던 휘타가 풀어졌다.

마지막 연우가 단희에게 걸레를 던졌다는 말을 들었을 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단희 그것이 곱다, 곱다 해줬더니 어디까지 올라야 하는지 모르는가 보구나.”

“어찌할까요?”

“뭘 어찌해요! 당장 성에서 내쫓아요!”

휘타가 답하기 전에 사림이 언성을 높였다. 씩씩대고 있는 게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다.

사림은 도가 넘는다 싶을 정도로 연우를 끔찍이 아꼈다.

온순해 보여도 절대 온순한 사람이 아니라 단희의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연우도 의외였다. 하긴 의외일 것도 없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약하지 않았다.

아니 약할지 몰라도 물렁거리지 않는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단희의 뒤통수에 걸레를 던졌다니.

늘 치장에 온 신경을 쓰고 사는 단희에겐 치명타였을 것이다.

“우선은 둬. 아가씨가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우선은 두다니요! 아가씨가 그 앙칼진 기생을 어찌 이깁니까?”

“사림아, 넌 나보다 아가씨에 대해 잘 모르고 있구나. 그러니 그만해.”

쫑알거리며 반박하다가도 어느 시점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잘 알기에 사림은 그만한다. 비록 입이 댓발 나왔지만.

“그럼, 아가씨와 관계를 서두르시던가요.”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아가씨도 제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느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연우의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정도면 많이 좋아지기는 했다.

“아가씨 신분이라도 올려주세요. 그래야 기생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죠.”

“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아가씨 신분이 높아지면 편할 거 같아?”

성안의 가장 아랫사람이 되기에 인사를 하라며 여기저기서 불러들일 것이다.

장공의 부인이 몇이고, 그 밑 효조의 부인이 몇인데.

게다가 인사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위계질서를 세우기 위해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꼬투리 잡을 수 있다.

이곳의 여자들 세계가 그랬다.

하나뿐인 남편이 어떤 여자에게 눈이 돌아갈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 버려져 뒷방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선 힘을 키워야 했기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세력을 만들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다.

연우가 휘타의 부인이 되면 아니, 소실이라도 된다면 그녀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방에서 손을 뻗을 건 불 보듯 뻔했다.

한 세력 안에서도 서로 눈치를 보며 싸움이 일어나기 부지기수였다.

그 안으로 연우를 집어넣으라고? 안 될 말이다.

그녀가 나름 잘 헤쳐나가겠지만,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곳에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기생을 상대하는 게 훨씬 편하리라.

그리고 사실 말만 하녀에 가까웠다.

“아가씨에겐 지금이 좋을 거야. 예법을 익히거나 그에 맞는 행동을 할 필요도 없잖느냐.”

게다가 걸레를 던질 수도 있고.

하고 싶다면 100장이라도 가능하다.

연우가 단희에게 걸레를 날리는 장면이 그려져 또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나오세요?”

“재밌잖아.”

연우를 만난 후로 자연스럽게 웃는 날이 많아졌다.

진심으로 웃게 된다.

*

휘타의 방.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혼자였다.

침상을 정리하고 일어난 연우는 유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걸 알면 휘타가 화낼 거야.

자신이 다녀갔음을 휘타가 몰랐으면 하는 뜻이었다.

유타가 왔다는 걸 정말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고민하던 연우는 휘타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유타와 이렇다 할 사건이 있지도 않았고, 그러잖아도 좋지 않은 형제 사이를 더 나쁘게 만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밖에서 사림이 들어왔다.

“어제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어, 조금.”

새벽에 깼다가 잠드는 바람에 늦게 일어났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데,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지.

“휘타 님은 연회에 가셨어요.”

“그래? 그럼 옷은…….”

“제가 도와드렸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 차려입고 가셨습니다. 아가씬 어서 아침부터 드세요.”

휘타가 잘 차려입고 연회에 갔단다.

가라는 사람이 자신이었던 터라 할 말이 없었지만, 사림에게 전해 들으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침이라 간단하게 상이 차려졌다.

숟가락으로 깨작거리자 사림이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

“맛이 없나요?”

“아니. 입맛이 없어.”

“그래도 드셔 보세요. 낮엔 좋아하시는 거로 준비할게요.”

“괜찮아. 늦잠을 자서 그럴 거야.”

걱정스레 바라보는 사림에게 웃어주는 연우.

사림 보라고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었다.

한편.

연회장은 기생들의 웃음과 연주 소리로 가득했다. 연우가 없는 휘타의 옆은 단희가 지켰다.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평소처럼 요사스런 미소를 흘린다. 그의 팔에 가슴을 비비며 눈웃음을 날리고 애교를 피웠다.

휘타에게 달라붙어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음식과 술을 그의 입에 넣어줬다.

단희는 밤까지 그를 붙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아니지. 내일 아침까지 붙잡고 있으리라.

절대 연우가 있는 곳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밤을 기어이 그와 보낼 것이다.

해서 특별히 치장에 정성을 들였다. 남자를 홀린다는 향수도 준비했다.

또 남녀무론하고 욕정을 일으킨다는 미약(媚藥)도 구해서 가져왔다.

저고리 안, 작은 주머니에 넣어뒀다.

그를 취하게 하고, 때를 봐서 자신의 방으로 그를 이끈다면 따라오겠지.

예전에, 그러니까 연우가 오기 훨씬 전.

휘타와 동침할 뻔한 적이 있었다.

잔뜩 취한 그를 침상 위에 눕혔는데 사림과 소호가 찾아와 일이 생겼다며 정신이 없는 휘타를 데려갔다.

오늘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밖에 기생들을 세워둘 계획이었다.

소호도 남자니 기생이 유혹하면 넘어갈 것이고, 사림은 쪽수로 밀어붙이면 된다.

정 안 되면 패물 몇 개 쥐여주던지.

그땐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나 몰라. 기회였는데.

그 뒤로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마침 오늘 그 기회가 왔다.

기분이 좋은지 휘타는 단희가 주는 술을 잘 받아마셨다. 평소보다 잘 웃어주고 단희의 머리도 쓰다듬어준다.

“네게서 좋은 향이 나는구나.”

역시. 어렵게 구한 비싼 향수가 먹혔다.

“휘타 님을 위해 준비했어요.”

지금까지 휘타의 넓은 가슴을 보며 침만 삼켰다.

팔을 붙잡거나 기대는 건 허락이 됐지만, 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건 허락이 안 됐다.

언젠가 그의 가슴에 손이 스친 적이 있다.

어찌나 단단한지 잠깐의 스침으로 두근거리고 그와 보내게 될 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저 품에 안기면 어떤 기분일까. 저 품에서 느끼게 될 환희는 어떨까.

외모, 재력, 성격. 휘타는 모든 게 완벽한 사내였다.

그가 사신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긴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매력이 더해졌다.

검은 늑대가 사신이라니. 얼마나 멋진 조합인가.

연회가 무르익어가자 휘타도 취해갔다.

아직 혀가 꼬이진 않았지만, 몸을 가누기 힘들어 탁자에 기댔다.

단희는 무희의 춤을 감상하며 팔을 휘젓는 휘타를 봤다. 그의 정신이 흐리멍덩해지고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했다. 살며시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미약을 싸고 있는 작은 종이를 만졌다.

앞을 보고 있던 휘타가 단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에게 웃어주었다.

시끌벅적해서 종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단희의 귀에 유독 크게 들렸다.

양심의 귀가 발달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휘타에게 들키지 않으려다 보니 청각이 집중되었을 뿐이다.

종이를 꺼내 엉덩이 밑에 껴뒀다. 이번엔 휘타의 술잔을 몰래 아래로 내려야 한다.

위에서 넣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무희 하나가 휘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자 그가 잡으며 일어섰다.

이때다. 재빠르게 휘타의 술잔을 잡아 아래로 내리고, 주변을 둘러 본 뒤 종이를 펼쳤다.

연한 분홍빛의 가루를 술잔에 쏟는 순간.

“내 잔에 무엇을 담고 있는 것이냐.”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

단희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만 돌렸다.

그의 미소는 변함이 없었지만 냉기가 흘렀다.

거의 매일 봐왔던 얼굴이 맞는데, 낯설었다.

“기, 기력을 보충해준다는 약입니다.”

“날 위해 준비했나 보구나. 한데 왜 몰래 넣는 것이야.”

휘타가 단희의 손에 들려 있는 술잔을 빼앗았다.

그의 움직임이 민첩했다. 취해서 휘청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남아 있는 약간의 술에 젖어 있는 가루를 본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력을 보충해 준다는 약의 색이 이리 고운 건 처음 보구나.”

“맛, 맛이 좋도록 과일이 들어가서…….”

눈을 내리깔아서 약을 보는 그의 시선이 예리하다.

술잔에서 단희에게로 옮겨가는 눈이 차가웠다.

단희는 점점 짙어지는 휘타의 눈동자를 보며 그가 눈치챘음을 직감했다.

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지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갈 것인지 망설였다.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연회장 안에 있는 기생들이 모두 듣고 뒤에서 수군대겠지. 약을 이용해서 휘타를 유혹하려 했다고. 얼마나 자신이 없었으면 약을 썼겠냐고.

‘휘타의 부인’이라 불렸던 별명은 사라지고 지금 앉아 있는 휘타의 옆자리에 대한 정당성도 차츰 사라지게 되겠지.

연우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다른 기생들이 넘볼 것이다.

그래서 단희는 후자를 택했다. 그 약은 기력 회복에 좋은 약이라 스스로 세뇌했다.

사실 그에게 ‘설마 이 많은 기생 앞에서 망신을 주진 않겠지.’ 하는 약간의 믿음도 있었다.

“흠. 그래? 나 혼자 먹기엔 양이 많구나. 남은 건 나눠 먹어야겠다.”

휘타가 단희 옆에 있는 종이를 집었다. 안에는 절반가량의 약이 남아 있었다.

“단희가 특별히 기력 회복에 좋다는 약을 구했다는데, 같이 먹을…….”

휙! 단희가 휘타의 손에 들린 약 종이를 낚아챘다.

기생이 이 약을 먹게 된다면 어떤 약인지 알게 된다. 제대로 망신당하기 좋았다.

다 아시면서. 어떤 마음으로 이걸 준비했고, 어떤 마음으로 먹일 생각까지 했는지 휘타 님은 다 아시면서.

단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연우는 안아줬으면서 자신에겐 왜 모질게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연우가 나타나기 전의 그였더라면 이런 일은 귀엽게 봐줬을 텐데.

원망의 화살이 연우에게로 돌아섰다.

“왜. 다른 애들 주려니까 아까워? 나 혼자 먹을까?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마.”

휘타가 단희의 손에 들린 약을 빼앗아 술잔에 쏟더니 위에 술을 붓고 입에 털어 넣었다.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단희도 그를 보며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단희의 뜻을 받아주었다.

상체를 숙여 단희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곧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했다.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단희가 눈을 감았다.

아, 기다림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 꿈에서도 할 수 없었던 그와 입맞춤을 하게 됐다.

하지만 입술이 닿지 않았다.

대신.

“단희야, 난 네 고운 얼굴을 좋아한단다.”

들려오는 그의 음성에 눈을 떴다.

“해서 네 고운 얼굴을 오랫동안 보고 싶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너의 훌륭한 연주도 오래 듣고 싶다.”

“…….”

“앞으로 조심하거라.”

조심? 뭘?

“그 고운 얼굴에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또.”

단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훌륭한 연주를 하는 손가락이 모두 멀쩡하도록.”

그가 경고하고 있다.

몰래 미약을 넣으려고 했으니 화날 만도 하다 이해하지만, 신체를 해하겠다는 위협은 너무했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거야? 얼굴에 상처 내고 손가락을 부러뜨릴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거야?

“넌 기생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네 처지를 망각하지 마라. 그간 들은 얘기가 많지만, 널 봐온 세월이 있어 봐주고 있어.”

입술에 닿는 그의 입김이 얼려버릴 듯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지금 보고 있는 남자가 그가 맞는가 의구심이 들었다.

여자와 술을 좋아해 탈이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남자.

늘 다정했고 따뜻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곁에 있기만 해도 좋은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잔인한 말을 쏟아내며 협박을 하고 있다.

휘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단희를 바라보다 상체를 바로 세웠다.

“밖에 누구 있느냐!”

휘타의 외침에 소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연회는 여기서 끝내고 당장 아가씨에게 가야겠다.”

일어선 휘타가 단희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많은 양의 약을 먹었어도 네겐 전혀 동하질 않는구나. 내 몸이 그녀만 찾아.”

돌아서는 그의 옷자락이 단희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실제 뺨을 맞은 것처럼 얼굴에 붉은 자국이 생겼으나 그보다 마음에 더 큰 자국을 남겼다.

휘타가 가버렸다.

그가 말했던 그녀, 연우에게 가버렸다.

단희는 휘타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떻게 내게 이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바드득. 입안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

연우가 청소를 끝내고 나니 점심이 훌쩍 넘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이 왔는데, 휘타가 아직이자 마음이 심란했다.

하루 쉬었다가 간 연회라 즐거운가 보네.

따라가볼걸 그랬나. 아니, 가서 뭐하겠어. 괜히 속에서 열만 오르지.

애초에 가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후회해서 뭐하겠어. 이미 그는 가버렸는데.

그렇다고 내일부터 가지 말란 소리도 못 하겠다.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연우가 나타나 말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시끄러웠다.

앉아 있어 봤자 계속 헛생각만 하고 있을 듯해 산책이라도 할 겸 밖으로 나왔다.

휘타의 정원으로 나와 거닐었다.

바스락,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서너 걸음 걷던 연우가 신을 벗고 버선도 벗은 후, 맨발이 되어 풀을 밟았다.

예전에도 아주 가끔, 효조가 부르지 않는 날엔 맨발로 풀을 밟으며 걷곤 하던 것을 상기했다.

그때와 지금은 정말 다르다.

앞으로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꽤 괜찮은 삶이 되겠다.

바스락, 바스락. 제자리를 걸으며 소리를 낸 연우가 앞으로 나아갔다.

성안의 식물은 관리가 되고 있어 재가 거의 쌓이지 않는 편인데, 어제 재가 많이 생기긴 했나 보다. 풀을 밟을 때마다 부드러운 재의 느낌이 났다.

발에 재가 묻어났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정원의 벽을 따라 돌며 담 너머를 보기도 했다.

밖은 전혀 궁금하지 않다. 어쩔 수 없을 땐 나가야 하겠지만, 그 외엔 항상 휘타의 영역 안에만 있을 것이다.

여기만이 그녀가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두려운 상대, 효조가 와도 이곳에서라면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휘타를 처음 만났을 땐 못 미더운 사람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걸까.

휘타가 효조를 제압할 만큼의 힘은 없지만, 성격답게 능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위기 상황을 넘어갔다.

남자들이 힘으로만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휘타를 보며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적이 없다더니 그래서였구나 싶다.

효조에게 유하게 대응하는 휘타를 떠올리자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어쩜 좋아. 나 그가 많이 좋아졌나 봐.

질투하고, 설레어 하고, 같이 있었으면 싶고.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고 뭐겠어.

사랑을 달라는 그의 말에, 사랑 같은 거 기생에게서나 찾길 바랐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마음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그를 믿는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를 믿는다.

이제 슬슬 그가 궁금해하던 것을 알려줘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지하계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전남편이 효조라는 것을.

내가 두 번이나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든 진실을 말해주면 당신은 날 어떤 눈빛으로 볼까. 내가 당신을 믿는 만큼 당신도 나를 믿어줄까.

연우는 두려웠다.

효조처럼 무서워서 두려운 게 아니라 휘타를 잃을까 두렵다.

그의 다정한 말과 따뜻한 눈빛이 그녀를 보지 않을까 그게 두렵다.

걸음을 멈췄다. 바스락대던 소리도 멈췄다.

이젠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재가 묻어 더러워진 발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는 연우.

“맨발로 풀 밟은 걸 여전히 좋아하는군.”

고개를 들자 낮은 담장 너머, 유타의 얼굴, 아니 가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정면을 향해 있지만 분명 연우에게 하는 얘기다.

방금 뭐랬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었나 싶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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