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토끼가 아니라 여우였어.
2018.03.09.
지하계의 밤에 대해선 연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신이 있다는 말은 처음이었고, 사신의 신부 역시도 몰랐다.
“사신의 신부는 왜 찾는 걸까요?”
“사신을 죽인 자가 사신의 힘을 가진다는 말이 있죠. 사신이 낮에는 힘이 약해지는데, 그때도 밤의 힘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신부가 한다고 합니다. 사신의 힘을 갖기 위해서는 신부도 없어야겠죠.”
휘타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그의 말 전부다 ‘가정’이지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말끝은 ‘그렇다고 한다.’는 추측으로 끝났다.
“확인된 진실은 없고 소문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현사도 믿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먹이처럼 봤던 이유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도 소문으로만 무성한 사신의 신부를 찾고 있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렇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을 듣고 믿지 않다가도 많은 사람이 ‘그렇다더라’ 하면 진실이 되고 맙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게 떠도는 이야기라면 더욱.”
연우도 겪어봐서 안다. 슬럼프를 겪는 기간 내내 잊을 만하면 올라왔던 기사(記事).
병원에서 치료하는 기간에 의문의 남자가 매일 와서 간호했다는 둥, 퇴원한 후엔 그 남자와 헤어져 슬럼프에 빠졌다는 둥, 동거한다는 둥 말들이 쏟아졌다.
물론 사람들이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계속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나오니 믿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하며, 지속적으로 말이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라며 점차 기정사실이 됐다.
사진 한 장도 없는데 말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기 지쳤고, 그때부터 진짜 연우의 슬럼프가 시작됐다.
“그럼 전 이제 사신의 신부가 된 건가요?”
연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또 뜬소문의 주인공이 됐다.
“알아본 바로 아직 사신의 신부에 대한 이야기는 퍼지지 않은 듯합니다.”
“만약 퍼지게 되면 저 위험한 거죠?”
그녀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겨우 효조에게서 벗어났다 싶으니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다시 주어진 세 번째 삶에서 효조가 아닌 휘타를 만나 제법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탐야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려고 했는데, 사라지고 만다.
왜 또 이런 소용돌이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지.
머리가 아팠다. 정말 탐야를 만나고 따지고 싶다.
아직 무슨 일이 난 건 아니지만, 현사가 알고 있는 이상 소문이 나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혹 그대에게 예지의 능력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이 사태가 벌어질 걸 알고 내게 지켜달라고 요청했나 싶어서.”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오로지 효조를 피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그녀였기에 이런 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
사신이라든지 사신의 신부라든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될수록 성 밖에 나가지 마세요.”
휘타가 주의를 줬다.
그녀가 성 밖에 나갈 일은 거의 없었지만.
“가족을 만나러 가긴 가야 하는데…….”
“그럴 땐 꼭 호위무사와 동행하세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의 거래가 완성되지 않았어도 그대를 지키는 건 내 몫입니다.”
침울해진 연우의 얼굴을 본 휘타가 부드럽게 웃었다.
여자깨나 울렸을 저 얼굴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는데 조금씩 더해지고 있다.
그의 말을 믿는다.
지금까지의 그는 연우가 믿을 수 있게 해줬으니까.
그가 곁에 있어서, 그의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얼굴의 생긴 그림자를 거둔 연우가 대야에 있는 걸레를 들어 짰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로 미리 염려하지 말자. 그가 지켜준다잖아.
탁탁 걸레를 털며 휘타에게 물었다.
“청소할 건데 거기 계실 거예요?”
“우리 진지한 대화를 하는 중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청소한다고 나서는 연우를 보며 휘타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리고 연회에 가지 않는 대신 놀아주기로 해놓고 모른 척하기입니까?”
“할 일 먼저 해야죠. 잠깐만 나가 계세요.”
연우가 휘타의 등을 떠밀었다.
밖으로 나온 그가 닫힌 문을 본 후, 팔짱을 꼈다.
아까 그녀가 연회에 가지 말라고 한 건 질투가 맞았다.
그게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단번에 응해줬건만 대가가 이거라니.
내가 청소만도 못한 존재였나.
그녀의 간절한 눈에는 처량함과 안쓰러움이 섞여 있다.
그게 마냥 안타깝기보다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세상 약한 존재가 되어 온갖 소원을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더니.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여태껏 제 손 위에서 노니는 연우를 보고 있었다면 이젠 휘타가 그녀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이다. 쥐락펴락한다.
“토끼가 아니라 여우였어.”
그가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여우라니 토끼보다 좋네요.”
언제 왔는지 사림이 곁에서 말했다.
“특히 고양잇과가 아닌 갯과여서 더 좋고요.”
“연회에 못 가게 하더니 청소한다고 내쫓았다. 네가 안에 들어가서 그만하라고 해.”
하고 싶대서 하라고 했지만, 안 해도 되는 걸 굳이 한다고 우기는 이유를 모르겠다.
“휘타 님 말씀도 안 들으시는 분이 제 말을 듣겠어요?”
그렇지.
내 말을 안 들었는데 사림의 말을 듣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상할 것이다.
별수 있겠는가. 꼼짝없이 밖에서 청소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
서랍장을 닦던 연우는 살짝 삐져나와 있는 붉은 끈의 끝자락을 발견했다.
본 적이 있는 끈이었다.
저번에 봤을 땐 곱게 접어져 있었던 끈이 이리되었다는 건, 누군가 만진 것이 틀림없었다.
휘타의 방에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그들 모두 휘타가 물건의 위치를 옮기면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을 터.
그들이 손대지 않았을 테니 휘타가 만졌을 것이다.
그가 꺼냈다가 다시 넣으면서 걸린 듯했다.
연우는 서랍을 조금 열어 붉은 끈을 안으로 넣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천 조각에 불과한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서랍을 완전히 열어 다시 확인했다.
여전히 낡았고 더러웠다. 그러나 누가 봐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 궁금했지만 그쯤에서 접었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청소를 마친 연우가 덜한 부분이 없는지 방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휘타가 벽에 기대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만 버리고 올게요.”
물과 걸레가 대야를 슬쩍 들어 보였다.
“아가씨! 제가 버릴게요.”
“괜찮아.”
사림이 대신 버려준다는 말을 거절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만큼 힘든 일이 아니었다. 먼 거리도 아니었고.
더러운 물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물을 버릴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찰랑대는 물을 보며 조심스럽게 가던 그녀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음으로 까르륵대는 웃음. 기생들이다.
뒤에 있어 다행이었다. 그들에게 나쁜 감정은 없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리네요.”
바로 등 뒤. 언제 온 건지 단희가 연우의 귀에 대고 가만히 말했다.
시장에서의 일도 그렇고, 단희가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졌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무시하는 게 수다.
상관하지 않고 앞으로 걷자 이번엔 단희가 연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뒤에는 다른 기생들이 연우를 에워쌌다.
“뭐하는 짓인가요?”
“그저 대화하자는 건데 아가씨는 별로인가 봐요?”
단희가 연우의 팔을 툭 쳤다. 대야에 든 물이 조금 흘러넘쳤다.
“할 이야기 없어요. 비켜요.”
막고 있는 그들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틈을 주지 않았다.
“아가씨라 불러주니 정말 지체 높은 아가씨가 된 줄 아나. 고작 하녀 주제에.”
연우 스스로 아가씨가 되었다고 생각한 적 없다.
휘타가 주는 넉넉함을 누리고 있으나 그녀는 원한 적이 없었다.
원했던 건 단지 보호였다. 그걸 원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거고.
“고작 하녀에게 왜 불안함을 느끼나요.”
연우는 저를 노려보는 단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뭐, 뭐?”
“그 쪽에게 불안, 걱정, 두려움이 보여요. 질투가 가장 크네요.”
“이게 뭐라는 거야!”
연우의 뺨을 내리치기 위해 올라갔던 단희의 손이 다른 기생에게 잡혔다.
휘타가 알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였다.
“이거 안 놔?”
단희가 몸부림을 쳤다.
“휘타 님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그래!”
목소리를 낮춘 기생 하나가 단희의 다른 팔을 잡았다.
“아시면 뭐! 위아래도 모르는 기고만장한 하녀 교육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기생의 말에 단희도 약간 걱정이 됐지만, 이대로 멈출 수 없었다.
그랬다간 연우의 기세를 더 올려주는 꼴이 되고 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단희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한 번 정도는 휘타가 넘어가 주리라는 믿음.
휘타는 그녀에게 늘 웃어 주었다.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 그와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그간 쌓인 정이 얼마인데.
겨우 뺨 한 대 쳤기로서니 날 책망하시지 않을 거야.
단희가 연우의 머리라도 때리기 위해 잡힌 팔을 빼내 힘껏 휘둘렀다 다시 잡힌다.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한 다리를 들어 연우를 찼다.
이번엔 맞았다. 연우가 아닌 대야가.
데구르르. 바닥에 나무로 만든 대야가 나뒹굴었다.
물이 쏟아졌고 젖은 걸레가 연우의 손에 들렸다.
그런데 물이 바닥에만 쏟아진 게 아니라 연우의 머리카락과 옷도 적셨다.
구정물을 뒤집어쓴 연우를 보며 흠칫 놀라는 기생들과 달리 단희가 삿대질을 하며 깔깔 웃었다.
“이제야 좀 아가씨 수준과 맞네요.”
젖은 연우를 보며 단희는 속이 시원했다.
내심 때렸다고 휘타에게 혼날 걱정이 들었는데, 이 정도는 가벼웠다.
정확하게 연우를 때린 것도 아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거짓말해도 되고.
“가자.”
옷에 튄 물방울을 털어낸 단희가 돌아섰다.
퍽! 갑자기 무언가가 뒤통수를 강타했다.
단희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서자 연우의 빈손이 보였다.
축축한 머리 뒤를 만지며 바닥을 보니 연우가 들고 있던 걸레가 떨어졌다.
걸레를 던진 거야? 손을 코에 대는 순간 쿰쿰한 냄새가 났다.
“아악!”
단희가 연우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연우는 가만히 노려보기만 한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하는 눈빛으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난 꿈쩍도 안 한다, 는 눈빛으로.
그런 연우의 모습이 단희를 더 악에 받치게 했다.
휘타를 믿고 있으니 저러겠지. 한때 내가 저렇게 당당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연우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연우가 미웠다.
“죽여버릴 거야!”
기생들이 서둘러 발악하는 단희를 붙잡아 이끌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연우가 젖은 상의의 냄새를 맡고 한숨을 쉬었다.
터벅터벅 걸어가 걸레로 바닥에 쏟아진 물을 닦아 대야에 대고 짰다.
단희의 횡포는 참아줄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별안간 욱해서 걸레를 던졌다.
고차원적으로 괴롭히던 설홍에 비해 단희는 귀엽게 봐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했다.
마주칠 때마다 저럴 가능성이 크다. 그때마다 단희와 상대가 되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냥 오늘 참는 것이 나았다. 뭐라 해도 무시가 최고임을 배웠건만.
“내가 부처나 예수가 아니고서야 어렵겠지.”
연우는 구정물을 뒤집어써서 찝찝하면서도 아주 시원했다.
*
“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젖은 채로 돌아오는 연우를 본 사림이 놀라서 물었다.
“물 버리면서 실수했어.”
말이 안 되는 변명이란 걸 알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휘타의 귀에 들어갈 거고 이런 일까지 고자질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도 단희에게 걸레를 던졌으니 피장파장이었고.
아직 밖에 서 있는 휘타의 미간에 엷게 주름이 졌다.
연우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그에게 괜히 눈치가 보여 사림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편으론 그가 다가와 냄새를 맡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어떻게 하셨길래 흠뻑 젖으셨대요?”
“뭐…… 그냥.”
할 말이 없는 연우가 입을 우물거렸다.
“나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할 거 같아.”
“제가 얼른 목욕물 준비할게요. 잠깐만 안에서 기다리세요.”
“아니, 내가 해도 돼. 그리고 젖은 채로 방에 들어가기 싫어.”
휘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사림과 함께 욕실로 향했다.
사림과 같이 작은 욕조에 더운물을 퍼다 날랐다. 혼자 하겠다는 사림을 달래가며 하다 보니 금방 욕조에 물이 찼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금방 씻고 나갈 거야.”
“그럼 남은 물은 두고 나오세요. 전 아가씨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와서 밖에 두고 점심 준비하러 갈게요.”
“응. 고마워. 알아서 할게.”
연우가 들러붙은 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놨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건 아니지만. 좋은 냄새가 아닌 건 분명했다.
이걸 휘타가 맡았다고 생각하니 창피해졌다.
서둘러 씻고 머리도 감았다.
다른 때엔 사림이 도와줘 머리를 금방 말렸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혼자 하려니 시간이 걸렸다.
수증기로 꽉 찬 욕실 안이 더웠다.
방금 씻었는데 땀이 날 것 같아 머리를 덜 말린 상태로 나왔다.
“어디를 가십니까.”
지루한 얼굴의 휘타가 벽에 기대어 서 있다.
“방이요.”
“그 상태로?”
이 상태가 뭐 어때서? 연우가 제 차림을 확인했다.
예전에 주의를 받은 적이 있는 팔이나 어깨, 발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꽁꽁 싸매고 있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잘못된 게 있나요.”
“안으로 들어가요.”
“더워요.”
그가 주변을 둘러보다 연우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 머리 위에 씌웠다. 나직하고 무거운 한숨이 들려왔다.
“수건을 왜…….”
“젖어 있는 그대의 모습을 다른 녀석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화끈.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완전히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젖은 부분이라곤 머리카락뿐이었다.
휘타가 여느 때처럼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으나, 그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복도를 걸으며 남자 하인들을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들지 말라 명하는 그였다.
휘타는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난 연우를 보면서 기분이 가히 좋지 않았다.
옷이 달라붙어 하얀 속살이 여기저기 드러났다.
가끔 얇디얇은 옷을 입힌 적이 있었는데 앞으론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견갑의 문신은 다른 방법으로 확인하면 된다.
씻으러 간 그녀의 뒤를 밟을 생각은 없었다.
원랜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다 보니 막 씻어 뽀얀 상태로 나오는 연우가 그려졌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말간 얼굴이 되겠지.
그 얼굴이 얼마나 싱그러운지 휘타만이 알고 있다.
그러다 옆에 있는 연우의 방에서 사림의 목소리가 들려 나가봤다. 연우에게 옷만 가져다주고 자신은 점심을 준비하러 간단다.
그럼 연우 혼자 여기까지 온다는 거냐는 질문에 사림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네가 아가씨를 모셔 와야지.”
“거기서 여기까지 천 리 길입니까, 만 리 길입니까? 혼자 오실 수 있어요. 정 걱정되시면 휘타 님께서 가보시던가요.”
결국 휘타가 욕실 앞에 섰다.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온갖 상상을 자극하자 부러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얼마 후, 연우가 나왔다. 아까처럼 속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미소를 지으려던 그의 입매가 굳어졌다.
그녀의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에 눈길이 머물렀다.
머리카락에 매달린 조그마한 물방울이 일 년에 한 번만 볼 수 있는 지하계의 이슬 같았다.
턱 끝에도 물방울이 대롱거렸다.
그는 문득 그녀의 턱 끝에 입술을 대고 싶었다. 그 한 방울에 목을 축이는 느낌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연우의 목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서 풀 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가 이런 느낌이라면 다른 사내들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연우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어씌운 채로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에 들어가자 의자에 앉은 그녀가 제 머리카락을 말렸다.
한데 모아 앞으로 내리고 수건으로 두드린다.
옆에 앉아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바라만 보고 있는데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편으로는 당장이라도 품 안에 가둬두고 싶어 그녀를 안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랐다.
이런.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놀라는 휘타.
금욕적인 생활을 너무 오래 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죄스러웠지만 그녀에게서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휘타는 눈으로 그녀의 정수리부터 입을 맞췄다.
여전히 촉촉한 머리를 지나 동그란 이마.
맑고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붉게 물든 뺨.
말랑하고 달콤했던 입술.
갸름한 턱선.
그리고.
긴 목.
젠장.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우의 목을 보자 현사가 핥았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