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늑대가 나를 부르면-18화 (18/100)

<18화> 내겐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2018.03.02.

정체 모를 남자가 들고 있는 크고 기다란 칼이 흙바닥을 긁어 먼지가 일어났다.

현사는 뒷골이 서늘해져 숨을 죽였다.

까만 밤하늘 앞에 서 있는 유타의 전신이 야광구처럼 빛이 났다.

현사는 유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자기 것을 건드렸다고?

“사람을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유타는 입을 다문 채로 현사를 빤히 보기만 했다.

유타의 눈빛이 하도 살벌해 마주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현사가 아래로 눈을 내리깔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오해하셨, 으윽!”

칼끝이 현사의 목을 겨눴다.

“왜, 왜 이래요!”

“아까 말했잖아. 네가 내 것을 건드렸다고.”

“난 아니라니까!”

“이리 멍청해서야. 생각이란 걸 좀 하지.”

목을 겨눴던 칼이 이젠 머리를 툭툭 쳤다.

“오늘 댁을 처음 봤단 말입니다!”

“연우.”

유타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는 순간 현사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연우는 휘타의 여자가 아니었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일어나지 않았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가.”

다시 칼끝이 목으로 돌아온다. 이번엔 그저 대는 것이 아니라 누른다.

날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따끔했다.

“살, 살려주세요. 모르고 그랬어요.”

현사는 이제야 분위기가 파악된다.

아니라고 우겨봤자 자신의 목에 칼을 누르고 있는 남자의 생각을 돌릴 순 없다.

자존심이 상해도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너 같은 것들은 기회를 줘봤자 반성이라는 걸 안 할 텐데.”

현사가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아프고 기온이 낮아져 움직이기 힘들더니 목숨에 위협을 받자 굼뜨던 동작이 날래게 변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손을 모으고 빌었다.

가면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유타가 뿜어내는 냉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주위의 기온을 내려갈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

“살려주세요!”

푹. 살을 더 파고드는 칼.

“으아악!”

죽었구나.

현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시 눈이 떠진다.

목에 칼이 박혀 있는데 아프지 않았다. 손을 대보니 피가 흐르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남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칼이 이 정도로 파고들었으면 죽는 게 맞다.

“이런. 내가 잠시 잊고 있었네.”

피식, 웃은 유타가 남자의 목에서 칼을 빼냈다.

기분 나쁜 느낌이 났지만, 칼이 빠져나갔고 목은 상처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 칼은 산 사람을 죽일 수 없는데 말이야.”

산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대신.”

유타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검은 물체가 날아와 유타의 곁을 맴돌았다.

“이 녀석에게 너를 부탁하지.”

유타의 근처에 있던 검은 물체가 현사에게로 갔다.

“끔찍한 고통을 느낄 거야. 차라리 내 칼에 죽었기를 바라게 될 거야. 운이 좋으면 네 목숨은 붙어 있겠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날들이 계속되겠지.”

그제야 현사는 유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산 사람은 죽일 수 없는 칼.

밤을 떠도는 영혼의 주인.

“제, 제발! 살려줘요!”

유타가 사신이었다. 연우는 사신의 신부가 맞았고.

휘타인 줄 알고 만만하게 생각했건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확인을 제대로 할걸.

모르면 가만히나 있을걸, 왜 그랬을까.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이미 사혼에게 먹힌 뒤였다.

현사가 연우를 먹으려다 도리어 먹힌 꼴이 되었다.

*

아침.

새소리가 들렸다. 햇살을 기대하며 눈을 떴지만, 언제나 그랬듯 창밖은 회색빛이었다.

오늘은 더 누워 있고 싶다.

연우가 이불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어제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늦잠을 자다니.”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얼른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휘타가 옆으로 누워 연우를 보고 있다.

“여기서 주무셨어요?”

“매일 여기서 잤는데 뭘 새삼스럽게.”

항상 연우가 먼저 자고 늦게 일어났다.

그사이에 휘타가 옆에 누웠는지 알 수 없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같은 이불 안에서 그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도 자다가 일어났을 텐데.

말끔했다. 흐트러짐이 없다.

문득 연우는 제 얼굴이 어떠할지 상상했다.

눈곱이 꼈을지 모른다. 베개에 눌려 얼굴에 주름이 새겨졌을 수도 있고.

침은 흘리지 않았을까. 화들짝 놀란 연우가 휘타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일어나자마자 내 얼굴을 보는 게 그리 놀랄 일입니까?”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그대의 얼굴이 엉망일까 봐?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휘타가 연우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확인하지 않은 상태로 보이기 싫은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어쩔 수 없이 내린 연우의 눈동자가 다른 곳을 봤다.

“곱기만 합니다. 머리카락이 좀 흐트러졌네요.”

휘타가 손가락으로 얼굴에 붙은 연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게 스치는 손가락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간지럽다.

오늘도 그는 다정하다. 어떻게 하면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지 잘 알고 있다.

경험이 많은 남자라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연우 역시 흔들렸다.

“여자를 잘 아세요.”

“그렇긴 하죠.”

답을 알고 물어본 거였다. 하지만 부정하지 않는 답에 실망이 된다.

“몇이나 되나요?”

이건 묻지 말걸.

이미 입 밖으로 나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머리카락을 만져준 여자 말입니까?”

“…….”

“그걸 어찌 다 기억합니까. 한둘이어야 말이지.”

이 답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연우가 괜스레 심술이 나 몸을 일으켜 앉는데 그가 잡아당겨 다시 눕혔다.

“질투합니까.”

“아니에요.”

“질투하네.”

“아니라니까요.”

“그래요. 아니라고 하고. 내 말이 아직 안 끝났습니다.”

휘타가 연우를 빤히 바라보며 볼에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았다. 볼을 엄지로 매만지며.

“이불 속에 함께 누워본 여자는 그대가 처음입니다.”

처음. 그래.

그가 자신의 방으로 부른 여자도 내가 처음이랬지.

“여자 때문에 물건을 망가뜨린 것도 처음이고.”

효조의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거다.

연우는 현사에게 잡혀 있는 천 안에서 이대로 일을 치르나 싶었다.

천이 찢기고 밝은 빛 사이로 휘타가 나타났을 때, 구원자를 만난 듯했다.

돌이켜 보니 세 번째 삶이 시작되었을 때도, 효조가 아닌 휘타의 등장은 빛이자 구원이었다.

당신이 내게 무얼 바라는지 모르지만.

그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게 우연이겠지만.

내겐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연우는 자신의 앞날이 보였다.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연우를 바라보는 휘타의 눈빛이 뜨거웠다.

이불 속의 온도가 뜨거워지고, 방 안의 공기가 뜨거워진다.

볼을 감싸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도 뜨겁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그를 보고 있기가 부끄러운데 그렇다고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느릿하게 휘타의 얼굴이 다가와 연우의 얼굴을 덮는다.

그의 입술이 닿았다. 입술마저도 뜨거웠다.

연우는 입안을 파고드는 열기에 목이 마르면서도 시원한 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팔을 들어 그의 등을 안았다.

뜨겁다. 안고 있는 그의 등과 맞닿은 가슴이.

온몸이 뜨겁게 달궈진다.

연우의 허리가 낭창 휘어졌다.

창밖이 밝지 않아 다행이었다.

*

“자, 왼쪽 손가락으로는 여기를 이렇게 누르고 오른손으로 쓸어내립니다.”

그림을 가르쳐주겠다고 종이를 펴는 휘타를 말리며 다른 악기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연우는 거의 금(琴)만 만져봐서 새롭게 익힐 수 있는 악기가 많았다.

휘타가 불었던 피리 종류는 아무래도 손가락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져온 악기는 학교 다니며 책에서 봤던 비파와 닮았다. 기타를 쳐봐서 비파를 잡는 것도 연우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휘타는 연우가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비파를 품에 안자 손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녀는 알고 있다고 하려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모르는 척했다.

“이렇게요? 이렇게 잡으면 돼요?”

일부러 어설프게 비파를 잡았다.

“아니, 아니. 반대요. 왼손으로 누르라니까.”

이번에도 모르는 척.

“이렇게?”

“흠.”

휘타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연우 뒤로 가서 자세를 고쳐줬다.

뒤에서 그가 안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귀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 잔잔하게 울리는 음성.

그가 말할 때마다,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연우는 솜털이 일어나는 듯했다.

손등을 덮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의 손에서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살포시 웃음이 난다.

“왼손으로 여길 누르고, 오른손으로 쓸어내리면…….”

디리링.

“이 음을 기억해두세요.”

사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익힐 수 있었지만, 연우는 계속 어렵다고 했다.

얼마나 했을까.

밖에 있던 사람이 연회에 갈 시간이라고 알려왔다.

벌써 그렇게 됐느냐며 연회에 갈 채비를 하려는 휘타에게 물었다.

“오늘도 연회가 있어요?”

“연회는 매일 있다고 봐야죠. 몰랐습니까?”

“알고 있었어요.”

“그럼 왜? 함께 가주려고?”

“제가 거길 왜 가요.”

“입고 갈 옷을 준비해주세요.”

연우가 옷을 가지러 나가자 사림이 들어와 장신구가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휘타 앞에 상자를 열어 보이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이제 연회는 줄여보시는 게 어때요?”

“아직 그럴 때는 아니야.”

연회가 휘타의 체질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그렇게 지내는 것도 일이었다. 그나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버틸 수 있었다.

사신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살 수도 있었으나 그러면 신부를 찾는 일이 어렵다.

또 사람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기에 그들 틈에 끼어서 오랫동안 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장공이 지배자의 자리에 앉으며 성안에서 사는 것을 택한 건데, 나름 힘든 부분이 있긴 했다.

“아가씨가 신부라는 것이 확실하진 않잖아.”

연우가 확실해질 때까지 정보통이 되어주는 기생들과 만남을 계속할 계획이다.

“그렇긴 하죠. 들으셨어요? 어젯밤에 유타 님께서 현사 님을…….”

“알아.”

어찌 내가 그걸 모르겠어.

“혹시 싶어서요. 가끔 모르실 때도 있어서 말씀드려요.”

고개를 끄덕인 휘타는 상자 안에 나란히 꽂아져 있는 팔찌 중에 하나를 꺼내 껴봤다.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넣고 다른 팔찌를 꺼낸다.

팔찌를 보니 갑자기 떠오른다.

“일전에 말한 물건은 준비했고?”

“네. 가장 좋고 예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잘했다.”

사림에게 연우가 화실로 만든 팔찌를 좋아하더란 말을 들어 팔찌와 목걸이를 사두라 명했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나쯤 선물로 주어도 괜찮겠다 싶어서였다.

선명한 푸른색이 연우와 잘 어울릴 거 같다.

흰 토끼 목에 걸린 파란 목걸이.

예쁘겠군.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내가 기분 좋아 보이느냐.”

“방금 웃으셨잖아요.”

“내가?”

“아주 기분 좋아 보이세요.”

사림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기분 좋은 것이 맞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물을 받고 좋아할 연우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좋았다.

“너 그거 아느냐? 아가씨에게 수호령이 생기면 흰 토끼일 거야.”

“흰 토끼요? 에이, 안 되죠. 포식자 수호령이 훨씬 많은데 토끼는 아가씨께 도움이 안 됩니다.”

“하긴. 근데 또 토끼 같지만도 않지.”

질투도 할 줄 알고.

악기를 가르쳐주면서 연우가 부러 모르는 척했다는 것도 눈치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서 ‘이렇게?’ 하는 모습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하마터면 악기고 뭐고 다 던져놓고 또 입을 맞췄을지도.

아침에 한 차례 했던 터라 놀랄까 봐 조심한 건데.

아까 일을 상상하자 아쉬움이 몰려온다.

“그리고 토끼면 절대 안 돼요.”

주먹을 쥔 사람이 힘을 주어 강조했다.

“또 왜?”

“늑대랑 토끼가 말이나 됩니까? 만에 하나 휘타 님 수호령이 통제가 안 되면 어쩌시려고요.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성장한 후로 그런 일은 없었다.”

“만에 하나요.”

“거 참. 생각만 하는 건데 유난을 떠는구나.”

“말이 안 되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렇죠.”

된통 토라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사림.

하여간 가끔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귀걸이를 하나 꺼내 귀에 대며 거울을 보고 있는데 마침 연우가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전 나가보겠습니다.”

여전히 부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갔다.

그리고.

연우 역시도 얼굴에 먹구름이 끼어 있다.

사림이 그러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연우가 왜 그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마음에 드세요?”

그녀가 자신이 골라온 옷을 펼쳐 보였다.

“음.”

“별로예요?”

“네.”

“…… 바꿔올까요?”

“일부러 이걸 가져온 겁니까?”

“일부로라뇨?”

“내게 덜 어울리는 옷으로 골라온 거 아니냐는 겁니다.”

“제가 왜요.”

연우의 말끝이 줄어들었다.

그런 거 맞네.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리는 연우의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참았다.

이러니 내가 토끼라는 거지.

“내가 가지 않았으면 합니까?”

“어딜요.”

오늘 연우의 새로운 면을 자주 본다. 뻔히 보이는 깜찍한 거짓말을 한다.

“연회 말입니다. 내가 가지 않길 바랍니까?”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실 거예요?”

이젠 연우가 솔직하게 말한다.

“그대가 원한다면 기꺼이.”

“…… 가지 마세요.”

큰 눈에 물기가 촉촉한 채로.

세상 더없이 서글픈 눈으로.

가지 말라 애원 아닌 애원을 한다.

그렇게 바라보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고 싶잖아.

마음이 녹아내린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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