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오늘 내 것에 손을 댔다지?
2018.02.27.
연주가 끝나고 어떻게 자리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휘타가 말했던 대로 그의 방에서 단둘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금(琴)을 켰다.
연주하는 내내 맞은편에 비스듬히 앉아 감상하는 그를 떠올렸다.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박수 소리가 들려 황급히 인사만 하고 휘타의 곁으로 얼른 돌아왔다.
“아주 잘했습니다.”
그가 칭찬해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무사히 연주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이제 연회가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휘타가 미리 말해줬던 것처럼 술을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열 명 안짝이었다.
효조는 곁에 있는 설홍이나 신하들과 얘기를 나누느라 연우를 따로 부르지 않았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아직 취하기 전이었지만, 술기운이 올라와 조금씩 더워졌다. 답답하기도 했고.
“춥지는 않습니까?”
그가 제 옷을 벗어주려 하자 연우가 손을 저었다.
“이젠 더워요.”
아까는 오한을 느낀 건 이상하게 보는 남자 때문이었다.
허락을 받고 밖으로 나오는 연우의 뒤를 사림이 따라왔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아 군데군데 불이 밝혀졌다.
곧 칠흑과 같은 밤이 찾아온다.
지하계는 달이 뜨지 않아 불이 없다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연우가 정원의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마음 같아선 겉옷 하나라도 벗고 싶은데,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럴 수 없었다.
안에 있을 땐 몰랐는데 머리가 조금 어지럽고 옷이 무거워 앉는 쪽을 택했다.
“더워.”
손부채질을 하자 사림도 같이 손으로 부채질을 해줬다.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괜찮으세요?”
“술 마셔서 그러는 거니까 조금만 바람 쐬다 가면 될 거야.”
“큰일은 끝났으니 마음 편히 있으셔요.”
바람이 불어왔지만, 습기를 머금은 텁텁한 바람은 더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간절했다.
한때는 효조만 없으면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살 만하니 바라는 것들이 하나둘 생긴다.
어이없어 혼자 웃는 연우.
“안녕하십니까!”
사림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다.
어른거리는 불빛 사이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연우를 보더니 탐탁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연우가 서둘러 일어났다.
장공의 부인인 피안이었다.
“네 주제를 알아야지. 그 자리가 어디라고 앉아 있는 게냐.”
표정처럼 음성에도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사람을 주눅이 들게 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수없이 앉았던 의자였다. 물론 지난 삶에서.
효조의 부인이었기에 앉을 수 있는 자리.
지금은 신분이 다른데 버릇처럼 앉고 말았다.
“사람들이 네게 머리를 조아리니 뭐라도 된 것 같으냐. 네가 휘타의 여인으로 참석했어도 하녀인 건 변함이 없다. 늘 머릿속에 새기고 살지 않으면 네 삶이 편치 못해.”
“명심하겠습니다.”
피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우를 훑어보고 돌아섰다.
반듯하게 허리를 세운 피안의 뒷모습이 눈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연우도 허리를 폈다.
“참 이상하죠?”
사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피안 님 말이에요. 혼내는 거 같은데 혼내지 않는 거 같은?”
“응. 나도 그런 기분이 드네.”
전의 삶에서 피안은 아랫사람들에게 쌀쌀맞기로 유명했다. 그에 반해 지체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겐 여기 붙었다가 저기에도 붙는 기회주의자라고 들었다.
그래도 연우는 피안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잘 몰라도 쓰러진 남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유일한 부인이었다.
피안이 기회주의자가 된 건 삭막한 성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장공의 다른 부인들이 그랬듯이 그의 곁을 떠났을 것이다.
여전히 따뜻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어투였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연우를 위하는 조언이었다.
사림의 말대로 혼이 났는데 혼나지 않은 듯했다.
“들어가자.”
“벌써요?”
“응.”
더 있어 봤자 사람들과 마주치기나 하지 편히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사림은 연회장 밖에서 기다리고 연우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연우의 등장을 알고 쳐다봤지만 이내 다시 대화를 나눴다.
연회를 방해하지 않고 오갈 수 있도록 벽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따라 걸으며 자리를 향해 갔다.
멀찍이 있는 휘타가 연우를 힐끔 보더니 옆에 있는 단희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저 여잔 언제 왔지?
연우가 주위를 둘러봤다.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신하들 옆에 어느새 기생들이 자리를 잡았다. 효조의 옆도 마찬가지였고.
각각의 자리에 하늘거리는 천으로 장막이 드리워졌다.
얇은 천이라 안팎이 보였지만 그 안에서 은밀한 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휘타의 연회는 오로지 음악과 춤, 술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면 효조의 연회는 공개된 밀회였다.
그나마 오늘은 얌전한 편이다. 장공이 몸져눕고 효조가 지배자의 자리에 올라가면서부터 연회가 난잡해졌다.
연우는 진로를 방해하는 천을 손으로 젖히며 나아갔다.
불쑥.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
아까 연주 전에 인사했던 남자였다. 뱀을 떠올리게 했던.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는 연우의 팔을 잡는다.
“잠시만.”
그에게서 팔을 빼낸 연우가 뒤로 물러섰다.
“뭐하는 거예요?”
“시간을 많이 뺏진 않겠다.”
“할 얘기가 있으시면 휘타 님을 통해서 하세요.”
휘리릭. 남자가 천을 잡아 돌려 작은 공간을 만들어 놓고 연우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 되는데. 이러면 밖에서 보기에 남들처럼 밀회를 나누는 남녀로 보일 것이다.
이 남자는 효조만큼이나 싫다. 기분을 나쁘게 한다.
“휘타 님이 아시면…….”
남자가 나가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잡아 벽에 고정했다.
“그도 단희와 즐기고 있어.”
연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맞다. 옆에 단희가 있었다.
그러나 휘타는 휘타고 연우는 연우였다. 그가 다른 여자와 즐기고 있다고 하여 남자와 즐길 마음을 추호도 없었다.
“전 그쪽과 즐길 마음이 없습니다.”
“네 의사는 중요치 않아. 네가 사신의 신부라며?”
사신의 신부? 처음 듣는 말이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전 아니에요.”
“솔직히 털어놔.”
“이거 놔!”
남자가 소리를 지르려는 연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읍! 비명을 질러도 꽉 막힌 소리가 연우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누구라도 봐줬으면 좋겠는데.
소호가 어디 있지? 그라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소호는 밖에 있겠구나.
효조는 연회에 호위무사의 출입을 금했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연회에 흠뻑 빠져 있어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본다고 한들 술에 취해 정신이 없을 것이다.
“맞지? 너지?”
남자가 연우의 입을 막은 채로 입맛을 다신다.
입을 벌리자 남자의 입안에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침이 보였다.
그가 혀를 내밀어 연우의 목을 핥았다. 으스스 몸이 떨렸다.
끈적하다. 더럽다는 생각보다 공포스러웠다.
아까도 느꼈지만 마치 먹이는 대하는 느낌이었다.
사신의 신부가 무엇이기에 내게 이러는지.
그보다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발버둥을 쳐도 몸을 누르고 있는 남자의 힘이 너무 강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누구도 연우와 남자를 신경 쓰지 않는다.
효조에게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사나 싶었는데, 다른 놈이 훼방을 놓는다.
제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때였다.
부우욱. 쿵!
남자가 잡고 있던 천이 찢어지고, 천이 묶여 있던 기둥이 부서졌다.
*
바람을 쐬고 온다던 연우가 들어오는 걸 확인했다.
휘타는 치근덕거리는 단희에게 적당히 맞춰주며 연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그녀가 연주를 잘 끝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연우의 연주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
그녀는 술이 약한 편은 아니던데, 조금만 마셔도 얼굴에 홍조를 띤다.
그걸 보고 있으면 자꾸 만지고 싶어졌다.
보송보송한 아기 피부 같으면서, 매끈한 과일이 표면 같기도 하다.
그렇게 발그레한 볼을 하고 자리를 찾아오는 연우.
연주하기 전, 포식자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은 동물 같더니 용케 해낸 게 대견스럽고 기특했다.
때론 귀엽기도 하다.
무얼 닮은 거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토끼를 떠올렸다. 흰 토끼.
그녀를 보고 있으니 절로 입가가 늘어졌다.
그런데 잘 오고 있던 연우가 사라졌다.
“휘타 님.”
휘타는 이름 부르며 팔에 감겨오는 단희를 밀었다.
연우를 찾는 금색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기둥 옆. 벽에 말린 천이 보였다. 꿈틀거리는 거로 봐서 안에 사람이 있다.
하나가 아니고 둘. 딱 봐도 남녀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이 됐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관여치 않았을 것이다. 서로가 합의하고 나누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연우라면 사내를 무서워하는 그녀가 스스로 저 안에 들어갔을 리는 없었다.
안을 확인해야 한다. 휘타에겐 모험이었다.
만약 고위 관료 중에 하나라면 난감한 상황이 된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안에 연우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향기가 난다.
어떤 간 큰 자식이 뻔히 내가 있는 앞에서 이런 짓을 하는지.
천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일자로 죽 찢어짐과 동시에 천이 묶여 있던 기둥이 부러졌다.
그리고.
안에는 휘타의 짐작대로 연우가 있었다.
그를 보자 잔뜩 겁먹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연우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이 그녀의 입을 막고, 몸으로 누르고 있다.
“이런.”
휘타가 비릿하게 웃었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 연우가 아무리 아름답기로서니, 알 만한 분께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남자는 효조의 친구이자 말썽 많은 사촌 중의 하나였다. 난봉꾼이라고 불리는 현사였다.
이래서 연우를 되도록 늦게 보이려고 했건만.
아니 미리 보여서 다행인 건가.
효조도 그렇고 이 녀석까지. 당분간 벌레를 차단하느라 고생하겠네.
휘타의 등장에 현사가 제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죄송해서 어쩌나요. 휘타 님의 여인인 줄 몰랐습니다.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은 현사가 자리를 피했다.
아까 얼굴 보고 인사를 했으면서 착각이라.
아마 놈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걸 휘타가 알고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휘타는 연우의 손을 잡고 효조 앞으로 갔다.
“먼저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우리 연우가 많이 놀란 거 같아서요.”
이럴 땐 굳이 제 손을 쓰지 않아도 된다.
오늘 연회는 연우 때문에 효조가 없는 일정을 만들었다. 해서 이 연회는 효조뿐만 아니라 연우도 주인공이었다.
그 주인공이 먼저 자리를 떠야 하는 사건이 생겼다.
연우가 먼저 자리를 뜬다고 아쉬워할 이는 없지만, 당분간 효조의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 회자될 것이다.
효조가 있는 자리에서 여자를 범하려 했던 그의 친구.
남녀 간의 밀회가 가능한 자리였지만, 여자를 범해도 된다는 허락이 있지 않았다.
효조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데리고 가서 위로해주거라.”
효조의 얼굴이 굳어졌다.
효조는 멀어져가는 휘타와 연우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제 친구를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현사가 오자 더 오라며 검지를 까딱였다.
가까이 다가온 친구의 귀에 대고 효조가 속삭였다.
“내 연회를 망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거야.”
그게 누구든.
*
연회장에서 있었던 내용을 들은 사림이 분개했다.
“미친! 어떻게 아가씨에게 그럴 생각을 하죠? 효조 님 믿고 설친다더니 정말이었네요.”
“목소리 낮춰.”
휘타가 주의를 줬다.
“뱀을 수호령으로 가진 사람들은 죄다 이상해요.”
“편견은 가지지 말고. 네가 뱀을 수호령으로 둔 사람들을 다 만나본 건 아니잖아.”
“제가 아는 한은 그렇다는 거죠.”
계속 구시렁구시렁하는 사림을 두고 휘타는 연우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지 멍하니 걷기만 했다.
남자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혼이 쏙 나갈 만도 하지.
힘없는 그녀의 움직임이 눈에 걸린다.
휘타가 연우의 앞으로 가서 바닥에 앉았다.
“업혀요.”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업히라니까.”
사림이 히죽 웃으며 연우의 팔을 툭 건드렸다.
“모르는 척하고 업히세요. 업히기 전까지 안 일어나실 거예요.”
머뭇거리던 연우가 휘타의 등에 몸을 실었다.
알고 있었지만, 참 가벼운 여자다.
그래도 옷 때문인지 무게감이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연우가 스르르 휘타에 등에 몸을 기댔다.
잠시 후 작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와중에 잠이 들었다.
얼마나 곤했으면,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론 업혀서 잠이 들 정도로 연우에게 편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걸음의 속도를 조절한 사림이 휘타와 연우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림.
까만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오랜만에 예뻐 보였다.
*
깊은 밤.
현사가 담벼락을 짚으며 쩔뚝이다가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벽에 기대고 거친 숨을 쉬다 침을 퉤 뱉었다.
빨간 피가 섞인 침을 몇 번 더 뱉은 그는 소매로 입가를 훔쳐냈다.
낮게 웅얼거리며 욕설을 쏟아냈다.
휘타의 여인을 건드렸다고 효조에게 맞았다.
사실 건드린 것도 아니다. 시도했다가 실패했는데 효조는 별명에 걸맞게 미친놈이 되어 날뛰었다.
누가 보면 제 여자인 줄 알겠다.
최측근이라 그런 일쯤은 그냥 넘어가 줄로 알았다.
따져보니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실컷 두들겨 맞으면서도 사신의 신부에 관해서 입을 다물었다.
효조 녀석도 알고 있는 건가? 그래서 별일도 아닌데 난리 친 거 아냐?
방해꾼은 휘타 하나만으로 벅차건만, 효조까지 가세했다.
휘타가 사신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연우도 사신의 신부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효조를 보니 맞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앞으로 연우라는 여자를 더 꽁꽁 싸맬 텐데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역시 휘타부터 처치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연우에게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냥 바로 잡아먹을걸 그랬다.
“아 씨, 아파 죽겠네.”
효조가 자신의 주먹과 발로 부족해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두들겨 팼다.
두 눈이 퉁퉁 부어 시야를 방해했다.
효조가 현사를 부축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엄포를 놓아 하인들이나 호위무사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성 근처에서는 따라오는 몇몇이 보이더니 이젠 흔적도 없다.
따라오고 있긴 한 거야?
효조가 무서워 제 주인이 아프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이거지?
집에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
마침 효조한테 맞아서 짜증이 나 죽겠는데 그것들한테 분풀이나 해야겠다.
서둘러 일어서려는 찰나.
서늘한 공기가 밀려와 무겁게 가라앉는다.
현사는 뱀을 수호령으로 둔 터라 온도변화에 민감해 기온이 떨어지면 행동이 느려진다.
기온이 낮으면 날쌔게 움직여 도망갈 수 없다.
낮이라면 상관없지만, 지금은 사혼이 돌아다니는 밤이라는 게 문제다.
사신이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으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이봐! 누구 없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이 새끼들. 정말 날 두고 먼저 갔어?”
현사가 무릎을 짚고 힘겹게 일어났다.
정말 일 치르기 전에 얼른 몸을 숨겨야 했다.
“갑자기 왜 추워지고 지랄이야.”
기온이 더 낮아지자 움직임이 굼뜨게 된다.
“내가 그리 만들었는데 불만 있나?”
별안간 들려오는 음성에 현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온통 하얀 차림의 사람이 서 있었다. 흉측한 가면을 쓰고.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언제 온 거야.
침을 꿀꺽 삼켰다.
“뉘, 뉘신데…….”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목을 죄어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 내 것에 손을 댔다지?”
“예에? 전…….”
스르릉. 캄캄한데도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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