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완벽한 믿음
2018.01.26.
휘타가 멀쩡한 채로 연회장을 걸어 나와 그를 부축할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의 넓은 어깨 아래로 이어진 커다란 상체를 보면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긴 다리는 또 어떻고.
질질 끄는 것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체구였다.
휘타의 방으로 함께 돌아온 연우는 그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왔다.
옷에 술과 음식 냄새가 배서 싫단다.
“우리 가족은 잘 있는 거죠?”
휘타의 등 뒤에 선 연우가 그의 겉옷을 벗겨주며 물어봤다.
“아주 잘 계십니다.”
“정말 잘 있는 거 맞죠?”
벗은 겉옷을 팔에 걸치며 재차 확인하자 그가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렸다.
“왜요? 내가 잡아먹었을까 봐?”
“보고 싶어서요.”
“며칠만 참으세요. 그대를 장공 님께 먼저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 순서이니.”
짐작하고 있었지만 효조를 맞닥뜨리는 상황을 피할 수는 없는 거였다.
휘타의 밤 시중을 드는 여자가 될 때부터 조용히 살자는 계획은 틀어졌다.
부디 잡고 있는 휘타라는 동아줄이 썩지 않았길 바라는 수밖에.
혹은 효조가 연우를 보고 반하지 않기를 바라거나.
“네. 알겠어요.”
“누군지 안 물어봅니까?”
“뭐를요?”
“됐습니다.”
왜 말을 하다 마는지.
연우는 실수한 것이 있나 되짚어 봤으나 딱히 그런 건 없었다.
”장공 님도 그대가 무서워하는 사내인데 괜찮겠습니까.”
휘타가 겉옷 안에 입고 있던 얇은 옷의 끈을 잡아당기자 앞부분이 벌어졌다.
바지를 입고 있었고, 두 번째 보는 맨몸이었으나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의 옷을 벗겼다.
“휘타 님이 제 옆에 계셔줄 거잖아요.”
갑자기 그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연우가 뒤로 물러섰다.
“벌써 나를 그 정도로 믿습니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듬직해요?”
뒤로 물러난 만큼 그가 연우를 향해 다가섰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기분이 좋은 건가.
몇 걸음 물러나지 않았는데 금세 벽이 닿았다.
등을 통해 느껴지는 차가운 벽.
앞을 막고 있는 휘타의 몸.
그사이에 끼어 있는 연우.
그리고 머리 위에서 울리는 낮은 음성.
“말해보세요. 내가 그렇게 믿음직합니까?”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제게 약속하셨으니까요.”
그의 어깨가 축 처진다. 실망한 기색을 한껏 드러냈다.
“그렇다고 말해주면 안 됩니까. 아~ 생전 처음으로 날 믿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제 이마를 짚으며 과도하게 머리를 흔드는 모습에서 장난스러움이 보였다.
여러 얼굴을 가졌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럴 때는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
“그렇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잖아요.”
“그런 거짓말은 해도 됩니다.”
“거짓말을 왜 해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까? 단 한 번도?”
입에서 ‘없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겨우 막았다.
이곳에 와서 거짓말을 많이 했다. 지금도 휘타를 속이고 있다.
“있어요.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해야죠.”
“거짓말을 잘하는 아가씨였군요.”
그게 아니라.
“잘한다고는 안 했어요.”
“아무튼, 거짓말을 한다는 거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지만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네가 하는 말들이 거짓이란 걸 전부 알고 있다, 라는 눈빛을 보낸다.
연우도 거짓말을 하거나 감추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전부 쏟아내고 싶지만 그것마저 거짓으로 치부될 것이 뻔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고, 그 상황에서 연우가 저도 모르게 실수하는 날이 온다.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그는 끊임없이 연우를 의심하게 되고 ‘지켜준다.’는 약속에 금이 갈 수도 있다.
이럴 땐 정면돌파가 답이다.
“제게 궁금한 게 많죠?”
“이런. 눈치챘군요.”
휘타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의심하는 것도 많죠?”
“많지요.”
그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답했다.
“다 알려줄게요.”
“정말입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기대하게 하지나 말지.”
이번엔 정말 실망한 얼굴이었다.
별안간 연우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직은 부실한 그에 대한 신뢰를 빈틈없이 완성하는 법. 그가 정말 효조에게서 연우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법.
연우는 휘타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호기심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휘타 님을 완벽하게 믿게 되는 날 전부 얘기할게요. 알려드릴게요.”
턱. 연우의 머리 옆으로 휘타의 손바닥이 벽을 짚었다.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상체를 낮췄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사람이 사람을 완벽하게 믿을 수 있나요. 완벽이라니. 그처럼 불완전한 말도 없습니다.”
“궁금하다면서요. 의심하고 있다면서요. 알고 싶으면 해보세요. 제가 휘타 님을 완벽하게 믿을 수 있도록.”
그도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
말없이 가만히 연우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대가 날 완벽하게 믿으면 그대와 밤을 보내는 일도 문제가 없겠군요.”
“그렇겠죠.”
“고려해보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하나, 거래의 크기가 달라서.”
벽에서 손을 뗀 그가 몸을 세우며 심드렁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대에 대한 궁금증이 크긴 합니다만, 그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습니다.”
“제게 잘 보이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그겁니다.”
홱 돌아선 휘타가 거울 앞으로 걸었다. 고려해본다고 했지만, 거절이나 다름없다.
연우는 말을 한 번 더 꺼내볼까 하다가 관뒀다.
그를 잘 몰라도 허술한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세 번째 삶이 시작된 날 알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연우도 그를 따라가 옷 입는 걸 도왔다.
*
완벽한 믿음.
휘타로선 예상치 못했던 제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바윗덩이만 했다면 밤에 까무러치는 모습을 보고 산만큼 커졌다.
오늘, 금을 켜는 실력이 뛰어나 호기심 가득한 산이 두 개가 되었다.
그런데.
-제게 궁금한 게 많죠?
-의심하는 것도 많죠?
뒤이어 오는 제안을 듣는 순간 하늘만큼 높아졌다.
그녀가 그를 완벽하게 믿도록 만들라니. 그 안에 담긴 뜻을 알 듯하면서도 모호해서 쉽게 답을 하지 않았다.
휘타에게 여자를 사로잡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연우에게 완벽한 믿음을 심어줄 수 있다. 비록 진심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그녀를 취해야 하니 진심이든 아니든 믿음을 줘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 밖에서 소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휘타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문이 열리고 소호가 들어와 휘타에게 인사를 하고 연우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방은 저녁이면 완성이 될 듯합니다. 그리고.”
소호가 머뭇거렸다.
“말해.”
“장공 님께서 찾으십니다.”
“찾으실 날짜가 아니지 않나.”
네, 하고 답한 소호의 눈이 연우를 향하자 이유를 간파했다.
“아. 벌써 아신 거야?”
연회까지 동석했으니 장공의 귀에 들어갈 때가 됐다. 좀 늦은 감도 있었다.
휘타는 자신의 겉옷 허리띠를 매고 있는 연우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가서 어떤 반응을 할지 벌써 궁금해진다. 장공을 비롯해 남자인 신하들과 하인들이 바글거릴 텐데 말이다.
*
장공이 있는 백륜당(白輪堂).
이름처럼 거대한 바퀴 모양의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사림이 연우를 부르는 소리에 휘타도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잘 따라오던 연우가 멍한 얼굴로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사림이 연우의 팔을 잡고 흔들자 그제야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린다.
연우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
손수건을 꺼내 연우의 땀을 닦아준 사림이 휘타에서 ‘어떻게 할까요?’ 하는 눈짓을 보냈다.
연우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입이 마르는지 자꾸 침을 삼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셨다 한다.
정말 사내를 무서워하는 건가.
백지장으로 변한 얼굴로 웃어 보인 연우가 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떨리는 모양이었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 네.”
“피할 수 있는 자리면 그리하겠지만, 꼭 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 알아요. 가요.”
연우가 또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걸음을 내디뎠다. 흔들리는 몸이 보기에도 불안하다.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휘타는 그녀를 의심했던 게 미안해졌다. 저리도 무서워하는 걸 너무 멋대로 해석했구나.
그녀의 옆으로 가 팔을 내밀자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봤다.
“힘들어 보입니다. 잡으세요.”
괜찮다, 라는 말이 연우의 입에서 나오려 해서 얼른 그가 먼저 덧붙였다.
“사양하지 마시고.”
“고마워요.”
잠시 망설인 연우가 휘타의 팔을 잡았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 걸 보니 긴장을 많이 했다.
지상에서 온 여자이기도 하나, 휘타의 여자이기에 그녀의 신분을 알려줄 옷으로 갈아 입혔다.
괜히 치렁치렁한 옷을 입혔나 후회됐다.
그러잖아도 걷는 걸음걸음이 무거울 텐데 겹겹이 입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옷이 한몫하고 있었다.
“잠시만.”
걸음을 멈춰 연우의 겉옷 하나를 벗겨주고 머리에 꽂혀 있는 무거운 장식을 빼내 사림에게 줬다.
“좀 더 낫습니까.”
“훨씬 좋아요.”
그녀가 고맙다는 의미로 보인 미소가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
“내게 인사도 시키지 않고 데려가 바로 취한 여인이라니 보고 싶었다.”
장공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허 웃었다.
“제가 급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네가 오죽 급했으면 그랬겠냐.”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디 얼굴을 좀 보자.”
휘타의 옆에 서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장공이 있는 쪽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만 뒀다.
작은 어깨가 부서질 듯이 파들거렸다.
“채연우라 합니다.”
“아, 그래그래. 기억난다. 채 씨에게 큰 딸이 하나 있다고 했지. 닮았나?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네. 다른 뜻은 없다. 내가 나이를 먹어 잘 못 보는 걸 수도 있어. 네 가족에겐 좋은 집과 땅을 줬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휘타랑 잘 지내거라.”
“감사합니다.”
용기가 났는지 연우가 점차 눈을 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장공을 보고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부인을 본다.
그러다 반대편으로 돌아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왜 그러지? 휘타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연우의 시선을 따라 살펴봤다.
장공. 옆에 그의 부인인 피안. 반대쪽에는 효조의 첫째 부인인 설홍.
이렇게 셋이 있다.
안색이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연우의 안색이 돌아온 것이 세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장공이 무섭지 않아서일까.
장공이 콜록대며 기침을 했다. 약해 보이는 노인이라서?
얼마 전부터 장공의 체력이 급속도로 약해졌다. 나이에 비해 건장하던 그가 이제는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피안이 장공의 등을 두드려주고 물을 주자 그의 기침이 겨우 멈췄다.
“요즘 왜 이리 기침이 심해졌나 모르겠어. 하여간 휘타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할 날이 있을 게야. 저 녀석에게 여자가 좀 많아야지. 그래도 너를 많이 아끼는 듯하구나.”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시중을 드는 하녀일 뿐입니다.”
연우의 답에 장공이 다시 허허 웃는다.
그녀의 상관이 없다는 말이, 그저 시중을 드는 하녀일 뿐이라는 말이 휘타의 기분을 묘하게 했다.
선을 긋는 그녀의 깔끔함이 흡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내가 그대를 아낀다잖아.
좀 좋아해주면 안 되나.
여자의 이런 반응에 적응되지 않았다.
*
장공이 휘타와 할 얘기가 있다며 연우를 밖으로 내보냈다.
함께 따라 나온 휘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림에게 조용히 뭐라고 말한다.
휘타가 안으로 들어가자 사림이 다가와 연우에게 말했다.
“아가씨. 혼자 가실 수 있겠어요? 휘타 님 나오시려면 시간이 좀 걸려서 제가 모셔다드리려고 했는데, 휘타 님께서 여기에 꼼짝 말고 있으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억력이 꽤 쓸 만해서 찾아갈 수 있어요.”
“다행이에요. 혹시 가다가 길을 잃은 거 같으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세요.”
사림이 연우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댔다.
“기생들은 안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사림이 들고 있던 자신의 옷과 장신구를 받았다.
사림이 들고 가겠다고 했지만, 그녀에게 일을 주고 싶지 않았다.
올 때보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효조를 만날 거라 각오를 하고 왔는데, 그가 없었다.
이제 장공이 부르지 않는 이상 이곳에 올 일이 없고, 그러면 효조와 만날 일도 없게 된다.
효조가 휘타와 친분이 없었으니 휘타가 지내는 곳에 오지도 않을 테고.
효조를 만나도 상관없다, 당당하자, 라고 다짐했으나 다짐에 그쳤다.
막상 백륜당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을 보자 다짐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준비가 덜 됐다.
연우는 최대한 빨리 백륜당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정원에 막 들어서는 순간.
저 멀리서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연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멀리 있어도, 머리카락만 보여도 그녀는 알아볼 수 있다.
하나로 높이 묶은 머리카락과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붉은 털가죽은 필시 효조다.
장공을 만나러 오는 거였다.
연우가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정원이 시작되는 자리라 낮은 나무밖에 없어 숨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러면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왔던 길을 되돌아 뛰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장소라 어디로 어떻게 가면 되는지 모두 연우의 기억에 저장되어 있었다.
또각거리는 굽 소리가 연우의 마음처럼 다급하게 들려왔다.
조금만 가면 모퉁이가 있다. 거기만 돌아가도 효조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이 달리지 않았는데 숨이 가빴다.
점점 가까워진다. 드디어 모퉁이를 돌아서는 찰나.
“넌 누구냐.”
털썩. 맞은편에서 나타난 상대를 본 연우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기분 나쁘게 날 보고 왜 피하느냐.”
효조였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