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고작 하룻밤
2018.01.12.
“저기.”
연우가 휘타의 옷깃을 슬며시 잡았다.
할 말이 있느냐는 눈빛을 보내는 그를 보다 잡았던 옷깃을 놓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휘타의 마음이 왜 바뀌었는지 몰라도 연우가 그에게 자신을 가지라고 말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 뭐든 주겠다 다짐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바뀌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하룻밤이다. 고작 하룻밤이라고 생각하자.
손톱 끝을 매만지는 연우 옆으로 사림이 다가왔다.
“아가씨, 절 따라오세요.”
연우는 사림과 함께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휘타가 손을 들어 보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색으로 염색하길 원하세요?”
사림의 밝은 음성에 연우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냥 아무 색이나요.”
“휘타 님처럼 검은색으로 해드릴까요?”
방금 만났건만, 사림은 오랫동안 봐왔던 친구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연우가 알던 사림은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낯을 많이 가렸기에 연우와 가까워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었다.
“검은색도 좋아요.”
“붉은색은 어떠세요? 잘 어울리시겠어요.”
사림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설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 삶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두 번째 삶은 연우가 효조에게 복수를 하려다 보니 중반부터 첫 번째 삶과 달라진 점이 조금 있었지만, 적어도 만나게 되는 사람의 순서나 성격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가 다르다. 아주 많이.
옆에서 재잘대는 사림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싶을 때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세요?”
사림이 연우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아, 미안해요.”
“갈색은 어떠하신지 여쭤봤습니다.”
“그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말이죠,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도 편하게 해요. 어차피 저도 휘타 님의 하인로 들어온 거라 그쪽이나 저나 같은 처지거든요.”
우뚝 걸음은 멈춘 사림이 연우 앞에 서서 검지를 들고 좌우로 움직였다. 고개도 같이.
“그건 아니죠!”
사림이 발끈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사림이 아닌 다른 여자가 연출했다면, 연우는 얼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사림이 비록 연우를 기억할 수 없을지라도 연우에게 사림은 예전 그대로였기에 미소를 지어줬다.
“우선 휘타 님께서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르셨습니다. 주인께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분께 제가 어찌 함부로 말을 편하게 합니까?”
그러더니 사람이 두 손으로 제 뺨을 잡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뿐인가요? 휘타 님께서 밤에 방으로 여자를 부른 건 처음입니다.”
사림의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이요?”
휘타가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닌데.
분명 연우는 그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헛소문인데 마음대로 판단했나.
아니 이런저런 걸 다 떠나 처음이라고?
처음이 주는 무게는 상당하다.
휘타의 첫 여자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돌아 조용히 살고자 했던 계획이 틀어질까 걱정이 됐다.
“뭐 여자들 끼고 노는 걸 좋아하시긴 하지요.”
다행히 아주 헛소문은 아니다.
“그래도 밤을 보내길 원하신 건 아가씨가 처음입니다. 또.”
“또? 더 있어요?”
“물론이죠! 하지만 그건…….”
사림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무튼, 아가씨는 휘타 님께 특별한 분이십니다.”
특별한 분. 연우는 조금 안심되었다.
차라리 이게 좋을 수도 있다.
사림의 말대로 휘타에게 특별한 존재라면,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 연우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더라도 그가 잘 지켜내려고 할 것이다.
*
염색이 먹지 않았다. 사림이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검은색을 도포했지만, 빛만 죽었을 뿐 색깔은 그대로였다.
빛이 사라지니 연한 회색처럼 보였다.
갑자기 머리카락 색이 왜 변했나 하는 연우의 궁금증은 금방 사라졌다.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는데 변해버린 머리카락 색쯤은 큰일이 아니었으니까.
사림이 따뜻한 물이 담긴 나무 욕조 안으로 연우를 안내하며 말했다.
“성안에서 키운 꽃잎을 띄웠습니다. 밖에 있는 건 워낙 재가 많이 쌓여서요. 그리고 성안에서 키운 꽃의 향이나 색이 훨씬 좋습니다.”
연우가 욕조 안으로 들어가기 전, 몸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천을 사림이 벗겨줬다.
사림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몸에 천을 두른 채로 욕조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편한 사림이라서 그녀가 하는 대로 뒀다.
천천히 발부터 담그자 적당한 물의 온도와 산뜻한 향으로 긴장이 풀렸다. 땀에 젖어 끈적이던 몸이 개운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데, 달라진 삶에 조금씩 희망이 보인다.
“편안하게 기대셔요.”
연우가 머리를 기댈 수 있게 목 뒤로 푹신한 베개를 사림이 대줬다.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언제 이렇게 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만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거기다 밤엔 휘타와…….
아, 생각하기 싫다.
연우는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벌컥. 별안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번쩍 뜸과 동시에 사림의 외침이 들렸다. 외침치고는 상당히 조용한 편이었지만.
“휘타 님!”
휘타의 이름이 들리자 연우가 허우적거렸다.
몸을 가려야 하는데 가릴 만한 것이 구석에 있는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다.
연우가 욕조에 들어가자 사림이 모두 개어서 넣어놓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두 팔로 얼른 감싸 가슴을 가렸다.
어쩌지. 물이 너무 투명해 가리나 마나다.
수면 아래로 전신이 드러난다. 손을 휘휘 저어 떠다니는 꽃잎을 모아봐도 소용이 없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요?”
연우가 빽 소리를 질렀다.
사림도 입술을 비죽거리며 휘타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게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걸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넌 나가 있어.”
휘타의 눈짓에 사림이 혀를 샐쭉 내민다.
“나가.”
그의 명령에 무거움이 실리자 그제야 사림이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나가기 전에 가릴 것이라도 주고 갔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사림은 자리를 떴다.
사림이 나가고 둘만 있게 되자 휘타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거, 거기! 거기 그대로 멈춰요!”
“오늘 밤에 볼 예정이지 않았습니까. 그때 볼 걸 미리 봐두는 것도 좋을 듯하여 온 건데.”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멈추라고요!”
“멈추지 않고 다가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궁금하군요.”
그가 다시 움직이지 시작했다. 장난삼아 구석으로 쥐를 모는 고양이처럼 느릿하게.
연우가 몸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으나 곧 욕조 모서리에 부딪혔다.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 흔들리는 물소리와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들렸다.
군데군데서 밝히고 있는 작은 불빛이 그에 맞춰 춤을 춘다.
점점 휘타가 가까워졌다. 어디까지 오려고 그러나. 정말 벗은 몸을 다 볼 참인가.
“그대는 앞뒤가 안 맞아.”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연우도 안다.
다 줄 것처럼 굴다가 막상 이런 상황에서 정숙한 여자처럼 구니 하는 말이었다.
“그래요. 나 앞뒤가 안 맞아요. 그러니까 더는 오지 마요!”
휘타가 방향을 틀어 바구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안에 있는 천을 들어 그녀를 향해 던졌다.
물에 젖은 천이 늘어지고 달라붙었지만 연우는 얼른 잡아 급한 대로 몸을 가렸다.
“이제는 된 거 같고.”
보폭이 크게, 그러나 빠르지 않게 그가 걸어온다.
그의 큰 키와 몸집에 연우의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휘타의 손이 연우를 향해 뻗어 나왔다.
정말 여기서 그럴 생각이나 싶다. 천을 꽉 쥐었다.
만약 일이 벌어진다면 그냥…… 받아들이자 체념하는 순간.
커다란 손이 연우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만하면 됐군.”
휘타가 중얼거렸다.
연우는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는 그를 보니 문득 알고 싶어졌다.
“왜 머리카락에서 빛이 나면 안 되는 건가요?”
“드디어 묻고 싶은 게 생겼나 봅니다.”
욕조 난간에 걸터앉은 그가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연우의 다른 머리카락을 잡아서 만진다.
그리고 움직이는 시선.
그의 시선에는 투시 기능이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다 가려졌는데 벗겨진 느낌. 금빛의 눈동자가 무겁게 침잠해 짙은 황갈색을 띤다.
“나도 그대의 머리카락을 보고 흥미가 생겼는데 다른 사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서요.”
“그래서 마음이 바뀌었나요?”
“무슨 마음.”
“날 가지라고 했을 때 거절했잖아요.”
“네. 거절했습니다.”
쪼르륵. 물속에서 나오는 휘타의 손을 타고 물이 흘러내렸다.
제 옷에 손을 닦은 그가 웃음을 흘리며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거절하고 하인을 제안했지요. 내 시중을 드는.”
“그런데 왜 오늘 밤…….”
“아아, 저런. 어떤 시중인지 말하지 않았네요. 그래서 오해하셨습니까.”
그의 말에 연우는 불안해졌다.
“어떤…… 시중인가요?”
“잠자리 시중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취하지 않는다면서요.”
입이 벌어진 연우와 달리 휘타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이젠 서로 알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잘 아는 사이 같은데?”
여리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휘타.
그렇게 들었는데 역시 잘못된 소문이었다.
‘여리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성격’처럼 보이는 거였다.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 동안 연우가 파악한 휘타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울지는 몰라도 ‘여리고 따뜻한’은 아니었다.
후하게 쳐서 따뜻하다고 치자. 그래도 여리진 않다.
능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말을 바꾸고 있는데 어떻게 여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 말이 틀렸습니까?”
휘타가 몸을 숙여 연우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몸을 뒤로 뺐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곧 입술을 닿을 거 같아 눈을 질끈 감았으나,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귓가에서 휘타의 웃음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오늘 밤, 기대합니다.”
작게 속삭이는 사내의 음성이 살아 있는 것처럼 연우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눈을 뜨고 얼른 제 귀를 틀어막은 그녀가 째려보자 방긋 웃은 휘타가 휘파람을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저 인간에 대한 소문을 누가 낸 거야. 하긴 여린 성격의 남자가 술과 여자에 취해 산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막상 휘타와 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진다.
차라리 절 가지라고 했을 때, 그런다고 하지.
싫다 하여 마음을 놓게 하고 이제 와 말을 바꾸면 어쩌자는 건지.
연우가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누굴 탓해. 마음을 놓고 있던 제 탓이었다. 간사한 제 마음이 문제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효조가 사는 이 세계로 다시 돌아와 절박했다.
해서 휘타에게 자신을 팔아 저와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다시 그 상황이 된 거니 말을 바꾼 그를 탓할 필요가 없었다.
연우는 수면 위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머리 위로 쏟으며 간절히 바랐다.
이왕이면 휘타가 그녀와 보낸 밤을 흡족해하기를.
*
머리에 꽃과 온갖 보석으로 만든 장식이 꽂혔다.
화장을 전담하는 하녀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연우의 얼굴에 분을 발랐다. 그래도 전담하는 사람이라 결과물은 흠이 없었다.
사림이 작은 나무 상자를 열어 반짝반짝 빛을 내는 요란한 귀걸이를 꺼내 들었다.
연우의 귀에 걸자 귀걸이가 반사판 작용을 해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연우는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맨몸에 속살이 훤히 비칠 정도로 얇은 옷을 입고, 화려한 수가 놓인 겉옷을 걸쳤다.
이런 옷을 자주 입어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두께가 있어 안에 입은 민망한 옷을 가려줬다.
휘타의 방에 들어가면 벗어야 한대도 잠시 가릴 수 있어 좋았다.
굽이 있는 꽃신을 신고서야 치장이 끝났다.
족히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런 일이 처음이었다면 힘들어했겠지만, 효조의 부인으로 살았기에 치장에 이력이 붙었다.
다른 하녀가 향수를 가져와 연우의 귀 뒤에 바르려고 하자 사림이 말렸다.
“향수는 안 돼.”
“왜? 휘타 님께서는 꽃 향을 좋아하시잖아.”
“암튼 아가씨께는 안 돼.”
하녀가 뭐라 알아들을 수 없게 웅얼거리며 물러났다.
연우의 치장을 도운 하녀들은 사림을 제외하고 다들 하나같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밖으로 나갈 때 문을 쾅쾅 닫는가 하면 연우를 치장하는 손길도 거칠었다.
“내가 싫은가 봐요.”
“질투가 나서 그럽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사림 말처럼 신경 쓰지 않는다. 질투라면 이골이 났으니까.
돌이켜보면 효조 때문에 많은 것을 겪었다.
효조로 인해 몸이 성할 날이 없기도 했으나, 그의 첫째 부인의 질투도 만만치 않았다.
다만 효조가 워낙 강했기에 그녀의 질투 정도는 웃어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역시 연우에게 큰 타격을 주지 않는다.
연우의 매무새를 꼼꼼히 점검한 사림이 문을 열고 휘타의 방으로 안내했다.
밖에서 줄줄이 서 있는 하녀들이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질투 어린 눈으로 연우를 흘겨봤다.
개중에는 휘타의 놀이 상대인지 연우 못지않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하녀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쟤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좀 반반하게 생긴 것 말곤 별거 없어 보이는데 왜 부르셨대?”
“저희가 어찌 알겠어요.”
한숨 섞인 대답.
그 이후로도 여기저기 묻고 답하는 목소리가 들여왔다.
등 뒤로 수군대는 소리가 멀어지자 사림이 혀를 찼다.
“별거 없으면 휘타 님께서 아가씨를 부르시겠냐? 멍청이들. 쳇.”
“난 괜찮아요.”
그들의 심정도 이해한다.
솔직히 휘타의 겉모습으로만 보자면 한 번쯤 안겨보고 싶은 남자이기도 하다.
거기에 먹고살 걱정까지 없게 해주니 얼마나 갖고 싶을까,
이제나저제나 그를 쟁취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나타난 연우에게 뺏길 판이니 질투가 날 만도 했다.
연우는 단지 살기 위한 기회를 잡는 것일 뿐, 휘타를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복도로 들어섰다.
연우의 신발 굽 소리와 치맛자락이 끌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복도의 끝, 커다란 반원 모양의 문이 보였다.
그 문의 모양과 장식마저도 휘타스러웠다. 지나치게 아름답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인 둘과 호위무사 소호가 연우를 맞이했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휘타가 보였다. 탁자 위의 약한 촛불 하나가 휘타의 그림자를 크게 만들었다.
벽과 창문 위의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연우를 덮칠 것만 같았다.
길고 널따란 침상 위의 휘타가 주춤거리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연우는 그가 참 웃음이 헤픈 남자라 생각했다.
한 걸음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휘타가 일어섰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모습에 연우가 얼른 눈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는 연우가 입은 옷과 같은, 그러니까 겉옷 안에 입은 얇디얇은 천의 긴 옷을 걸치고 있어 그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허리에 겨우 끈 하나만 느슨하게 묶고 있어 어찌 보면 연우의 옷보다 훨씬 야했다.
“이리 부끄러워해서야 밤을 어찌 보내겠습니까. 절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자.
마음을 잡은 연우의 눈길이 다시 휘타에게로 향했다.
두꺼우면서도 긴 목, 반듯하게 그어져 있는 쇄골, 일반 남성보다 훨씬 넓은 어깨, 그리고 손으로 눌러봐도 들어가지 않을 듯한 단단한 가슴.
그녀는 새삼 또 놀랐다. 그동안 휘타를 정말 대충 봤었구나 하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보는 그의 얼굴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휘타가 연우에게 걸어왔다. 바닥을 쓰는 옷자락 소리에 가슴이 쿵쿵거렸다.
더는 그를 보지 못한 연우가 고개를 숙였다.
“귀걸이는 안 된다고 일렀는데, 사림이 잊었나 봅니다.”
검지가 연우의 턱을 들어 올린다. 그녀는 눈앞이 번쩍이는 휘타의 눈동자로 가득해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그대의 탐스러운 귀를 맛보기 불편하니 이건 빼지요.”
그가 빤히 연우를 바라보며 그녀의 귀에 걸려있는 귀걸이를 빼 바닥에 떨어뜨렸다.
툭, 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연우의 귓불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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