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제국에 비해 한참 남부에 위치해 있는 바라트 왕국은 비교도 할 수 없이 더웠다. 바라트의 차라면 수도 없이 다루어 보았지만, 직접 와 본 것은 처음인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더위를 그리 심하게 타지 않는 그녀인데도 땀이 턱을 타고 흐를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 신기한 것은 알폰스였다. 이렇게 덥고 습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운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물론 그도 평소에 비해 얇은 옷을 입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공작 부부를 수행하는 수행원들, 시녀들, 호위 기사들이 시시각각 죽어 가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특히나 호위 기사들은 갑옷까지 갖춰 입어서 그런지 반경 수 미터 안에만 들어가도 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더군다나 갑옷의 금속 부분은 뙤약볕에 달궈져서 아침 식사로 계란 프라이도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주군과 마님의 안전을 위해 제 한 몸 바치는 기사들은, 슬프게도 일행의 기피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머리 모양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알폰스의 모습은 클로에가 보기에도 신기했다.
‘이런 더위와 습기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다니, 비법이 있다면 알고 싶은걸.’
하지만 안타깝게도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지치지 않는 체력과 자기 관리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더위 속에서 지내야 하나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다즐링 지역은 고도가 높은 곳이었기에 몹시 서늘했다.
다즐링 지역은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마차를 타고 몇 시간을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거의 다 와 갑니다.”
마부의 말에 차양을 걷어 창밖을 내다본 클로에는 감탄을 내뱉었다.
“어머!”
꿈에만 그리던 그곳이었다. 마치 신선이 사는 곳처럼 가득 낀 안개가 신비감을 자아냈다. 아무리 멀리 보아도 끝도 없이 시퍼런 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클로에는 숨을 들이쉬었다. 상쾌한 향이 허파를 가득 채우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마침내 도착한 뒤, 클로에는 알폰스의 단단한 팔에 에스코트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때 등 뒤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클로에의 충실한 하녀, 엘리였다. 엘리는 허둥지둥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손안에서는 두툼한 양모 숄이 휘날리고 있었다.
“공기가 너무 차가워요. 감기 드시겠어요. 이걸 입으셔요.”
클로에는 산 아래 지방의 더운 날씨에 맞춰서 얇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엘리는 클로에에게 숄을 단단히 둘러 주었다.
“따뜻하신가요?”
“응, 훨씬 따뜻하구나. 고마워, 엘리.”
클로에의 말에 엘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뺨을 빨갛게 물들이곤 수줍게 웃는 엘리를 귀엽게 보곤, 클로에는 알폰스와 함께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전에 공작 부부의 다즐링 여행을 가이드하기로 약조한 티에스타 다원의 소유주가 그들을 맞이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길이 험하니 조심하십시오.”
동방 특유의 악센트가 강했지만 꽤 능숙한 제국어 솜씨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다즐링 지역의 토지는 거의 대부분이 경사로였고, 평지라곤 하나도 없었다.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클로에는 오솔길을 따라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어맛!”
조심한다고 했지만 역시나 허약한 그녀가,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채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걷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클로에가 발을 삐끗할 뻔하며 비명을 지르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녀를 가까이서 수행하던 시녀들과 하녀들, 호위 기사는 물론이고 가이드까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님! 괜찮으세요?”
클로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받친 단단한 팔의 주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알폰스.”
그녀의 곁에 있던 알폰스가 호위 기사들보다도 뛰어난 민첩함으로 그녀의 몸을 받쳐 안은 것이었다. 등허리를 따라 그의 단단하고 든든한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별말씀을.”
알폰스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 다정한 빛이 어렸다. 클로에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이제 팔은 풀어 주실래요? 다들 보고 있다구요.”
“역시 이런 지형에서 높은 구두는 무리였나 봅니다. 좀 더 걸으셔야 할 텐데, 이대로 안아 들고 가도 전 상관없습니다만.”
“네? 전 상관있어요!”
클로에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타박했다. 정말이지, 사용인들만 있다면 모를까 이제 막 만난 사람도 있는 자리에서 이게 무슨 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눈치 빠른 하녀 한 명이 굽 낮은 구두를 가져오겠다며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미묘하게 아쉬운 듯한 기색을 띠는 알폰스를 무시한 채 클로에는 구두를 갈아 신었다.
* * *
경사진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 차 공장에 도착했다.
이 다원의 주인이자 이번 여행의 가이드인 다원주가 찻잎의 제조 과정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제일 질 좋은 찻잎을 만들려면, 제조하는 모든 과정에 장인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잔뜩 들어가야 한답니다. 찻잎을 채취하는 일부터, 건조와 유념(*찻잎을 비벼 으깨서 산화를 촉진시키고 찻잎의 모양을 만드는 일), 산화, 분류, 그 모든 일들을 말이지요. 이곳의 장인들은 모두가 바라트에서 제일 향기롭고 값진 찻잎을 생산해 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알폰스로서는, 클로에 덕에 이제 제법 차 애호가로서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것은 맛보는 일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차를 마시고 맛과 향을 느끼는 데 제조 과정을 알 필요까지는 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알폰스는 곁의 클로에를 흘끗 보았다.
그녀의 다정한 녹색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돌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흥미롭고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눈앞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듯이 집중해서 눈에 담고 있었다.
“역시 산화는 다소 짧게 시키는 편이군요. 그편이 퍼스트 플러쉬 특유의 향미를 유지할 수 있으시다고 느끼시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국의 차 전문가이시라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시군요.”
게다가 그녀는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교환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평소의 수줍고 다정한 모습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그녀가 이렇게까지 기뻐하니, 제국에서 바라트까지, 먼 거리를 배를 타고 온 보람이 있었다.
공장의 견학을 마친 뒤, 숙소로 갈 시간이 되었다.
“짐은 일꾼을 시켜 호텔에 전부 맡겨 두었습니다. 자, 이쪽으로…….”
호텔은 이 고지대에 있는 다즐링에서도 맨 꼭대기에 있었다. 공작 부부는 여독을 풀 겸 오늘은 일찌감치 쉬고 다음 날 구경을 이어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아침, 클로에는 일찍 일어났다. 평소 일찍 일어나는 성실한 생활을 해 온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밤늦게까지 파티와 사교 활동을 하곤 하는 제국의 귀족들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숙면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클로에는 놀랄 정도로 일찍 일어났다.
그녀의 기상 시간인 7시 정도면 일반적인 귀족저에서는 사용인들만이 일어나 활동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전생에 회사원이었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알폰스였다.
“잘 잤습니까?”
갓 깨어 눈을 끔뻑이던 클로에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목소리에 미소 지었다. 옆을 돌아보니, 남편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물론이죠. 아주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어떤 꿈입니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당신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알폰스는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가벼운 버드 키스는 어느덧 진득한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의 키스를 기쁘게 받아 주던 클로에도, 그의 입술이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이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를 가볍게 밀어냈다.
“진정하세요. 오늘이 다즐링에서의 첫 번째 아침이라고요.”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간 알폰스는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슬쩍 닦아 주었다.
아직 바깥은 어스름했지만, 클로에는 커튼을 젖혔다.
“와!”
경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즐링에서도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호텔에서는 다즐링과 주변의 다른 산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게다가 그 모든 것들은 눈이 내린 듯 짙은 안개가 쌓여 있었다. 신비로우면서도 몹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알폰스, 이거 좀 보세요. 너무 아름다워요.”
알폰스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말했다.
“이 풍경을 부인과 함께 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룸서비스를 주문해서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자, 다즐링의 호텔 아니랄까 봐 다즐링 홍차가 나왔다. 티 푸드는 소박한 구움 과자와 과일이 전부였으나, 차를 맛본 클로에는 감탄사를 토했다.
“어머! 이렇게 맛있는 다즐링은 처음이에요.”
차를 맛본 알폰스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섬세한 맛과 향이었다. 연한 풀잎의 새초롬한 풀내와 시트러스 계열 과일의 향, 꽃향기가 혀를 휘감았다.
“이곳에서 갓 만든 차라서 그런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발효과정을 거치는 소수의 차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차는 만든 지 얼마 안 됐을수록 맛있으니까요.”
클로에가 눈을 빛냈다.
“차에서 어떤 맛과 향이 느껴지세요? 좋은 다즐링에선 어떤 과일의 향이 난다고 해요. 그게 뭘까요?”
갑작스러운 퀴즈에 알폰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클로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는 차를 다시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달콤하고 산뜻한 향이 목구멍을 넘어 비강으로 빨려 들어와 후각신경을 자극했다.
“음…… 레몬? 아니, 무화과. 으음……. 복숭아?”
항상 모르는 것이 없고 자신만만한 그답지 않게 주저하는 대답이었다. 클로에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대답을 유도했다.
“맞아요, 무화과나 복숭아 같은 향도 있지만……. 그거 있잖아요, 그거. 풋풋하고 달콤하고 싱그러운 과일이요.”
“풋풋……. ……풋사과?”
“그보다는 좀 더 즙이 많고 달달하고 상큼한……. 작은 열매가 잔뜩 달려 있는 과일이요.”
“포도 말입니까?”
“그래요! 포도 중에 풋풋한 건 뭘까요?”
“머스캣(Muscat)?”
“정답!”
클로에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알폰스는 이건 자신이 맞춘 것이 아니고 클로에가 떠다 먹여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여우니 상관없지.’
“질 좋은 다즐링에서는 머스캣 향이 난대요. 이 다즐링에선 정말로 머스캣 향이 나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알알이 단단한 열매가 한 송이 가득 주렁주렁 열린,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청포도를요……. 차를 한 번 다시 드셔 보세요.”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클로에가 종알댔다.
클로에의 말에 따라 알폰스가 차를 입에 머금었다.
“……!”
정말 그랬다. 이 상큼하고 풋풋한 풀내와 달콤하고 화려한 과일의 향이 마치 여름에 먹은 청포도의 향처럼 느껴졌다.
알폰스는 클로에만큼 차의 전문가는 아니기에 처음 마실 때는 머스캣의 향을 구분해 내지 못했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그 향이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 같았다.
그가 놀란 얼굴을 하자 클로에가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당신도 이제 어디 가서 차 좀 마셔 본 사람으로 빠지지 않겠는걸요.”
“스승을 잘 만난 덕에.”
“어머, 알폰스가 그런 겸손한 말도 할 줄 알았어요?”
“부인의 앞에서 차에 대한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만용일 겁니다.”
오만에 가까운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그였으나 때론 깔끔하게 인정할 줄도 알았다. 그런 점이 더 멋있고 자신감 있어 보여서, 클로에는 살풋 웃었다.
“어쨌든, 이런 아름다운 정경에 아름다운 차라니……. 멋진 티타임이에요.”
클로에는 행복한 듯 말하며 알폰스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꼭 끌어당겼다.
느긋한 시간을 보낸 뒤 두 사람은 숙소에서 나왔다. 안타깝게도 다음 일정인, 옆 도시 시킴 관광이 조금 지연되었다. 약간의 교통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상단의 대형 마차 행렬이 길을 막았고, 알폰스는 해당 상단의 관리인과 협의를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다.
이 잠깐 빈 시간 동안 클로에는 어제 보지 못한 차밭을 보고 싶어 했다.
숙소가 근처이기도 해서, 최소한의 호위 기사와 클로에의 시녀와 하녀들만 동행하기로 했다.
“눈에 띄지 않게 사용인은 최소한으로 데려갔으면 해요. 너무 복작거리면 일하시는 현지인분들에게 방해가 되기도 할 테고요.”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고, 배려심이 많은 클로에다운 의견이었다.
클로에를 무척 존경하고 따르는 하녀들은 그녀와 함께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특히 엘리가 그랬다.
“차밭이 전부 경사로에 있네요! 정말 신기해요, 마님. 다즐링은 원래 이런 곳인가요?”
“응, 그렇단다. 다즐링의 지형은 험준해서 평지에 있는 차밭은 하나도 없고, 전부 이렇게 경사져 있단다.”
주변은 엷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으나, 햇빛은 꽤 따가웠다. 로지가 클로에를 위해 양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차나무 농사를 짓는 것도 힘들 것 같아요. 좋은 차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로지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차를 마실 때는 일하시는 분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자.”
마침 저만치 오십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한 여인이 경사로에 위태하게 발을 걸친 채 차나무 잎을 수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머나!”
발을 헛디딘 것인지, 아니면 안개로 눅눅한 토양 때문인지……. 공작 부부와 사용인들의 눈앞에서 일하던 여인이 우당탕 미끄러져 넘어졌다.
차나무 잎을 잔뜩 따 담았던 소쿠리는 경사를 따라 멀리까지 굴러가 버렸다.
“저, 저걸 어째?”
“너무 아프겠다!”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심하게 넘어졌는지 여인은 잘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입을 연 사람은 클로에였다.
“제이콥, 호텔로 가서 의사나, 의사가 없으면 응급용 의약품이라도 가져다줄래요? 로지, 니나, 엘리. 너희는 저기 떨어진 소쿠리와 찻잎들을 주워 주겠니?”
“네!”
“예!”
기사들이 먼저 호텔을 향해 뛰어갔고, 잠시 얼을 빼고 있던 하녀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가이드와 함께 조심스럽게 다가간 클로에가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차밭에 나동그라졌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은 생각보다 앳되어 보였다. 아무리 많이 봐 주어도 스물 언저리였다.
“아…….”
일꾼이 민망한 듯, 고마운 듯 어설프게 웃었다.
바라트어를 할 줄 몰랐기에 제국어로 물었지만, 상황 탓일까,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한 클로에의 표정 때문일까, 질문을 이해한 듯이 일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트 현지인인 가이드가 대신 일꾼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괜찮답니다. 그냥 조금 긁힌 것뿐이라는데요.”
“괜찮긴요. 다리에서 피가 흐르는걸요. 잘 치료하지 않으면 덧나겠어요.”
그때 기사들이 돌아왔다. 기사들은 가죽으로 겉을 감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아마 구급상자인 모양이었다.
“의사는 없고 대신 치료 약을 받아 왔습니다.”
“잘했어요. 수고 많으셨어요.”
클로에는 시녀, 록우드 부인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록우드 부인은 조심스럽게 일꾼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흙먼지가 잔뜩 묻은 환부를 깨끗하게 씻고 연고를 발라 준 뒤 붕대로 마무리했다. 무척 능숙한 솜씨였다.
붕대를 거의 다 감았을 때쯤에는 찻잎을 주우러 간 하녀들이 돌아왔다.
“마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어요!”
“찻잎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주워 왔어요.”
상처를 치료해 주고, 떨어뜨리기 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태가 된 소쿠리를 안겨 주자 일꾼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클로에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감사해서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답니다.”
가이드가 일꾼의 말을 통역했다.
클로에가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갚기는요. 원래 사람은 서로 돕고 사는 거잖아요. 오늘도 일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다고 전해 주세요.”
가이드는 놀란 얼굴로 클로에를 보았다. 그는 평민이었으나 다즐링의 다원 하나의 소유주였고 이 지역에서는 내로라할 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원의 허드렛일꾼에게 이런 정성을 쏟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체 누가 한낱 일꾼이 넘어져서 다친 일에 이렇게까지 해 준단 말인가?
‘그런데 제국의 귀족, 그것도 공작씩이나 되는 신분의 소유자가 이렇게까지?’
가이드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클로에를 보았다.
제국인은 다 저런 걸까? 아니, 그럴 리가. 가이드가 여태까지 만나 본 다른 제국인 귀족들은 저렇지 않았다. 모두가 바라트의 귀족만큼이나 아랫사람을 냉대했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귀족씩이나 되어서 고작 일꾼이 다친 일을 이렇게 신경을 써 준단 말이야?’
한편 이런 반응이 익숙한 클로에의 하녀들은 우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로에 본인보다도 자기들이 훨씬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하녀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이런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는 처음 보시겠죠?’ 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차밭은 볼 만큼 본 듯하니 우리는 이만 방해되지 않도록 자리를 비워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이만하면 알폰스도 합의가 끝났을 거예요.”
클로에는 일꾼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사용인들을 데리고 호텔로 돌아갔다. 각자의 할 일이 끝난 뒤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그런데 호텔로 가던 도중,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처음 보는 현지인 남자였다. 높은 신분인지 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수행인도 몇 명 달고 있었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 때문에 다소 나이 들어 보이긴 했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삼십 대 초중반 정도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제국에서 오셨습니까?”
남자가 제국어로 말을 걸었다. 어조에는 강한 바라트식 억양이 실려 있었으나, 그것만 빼면 놀라울 정도로 유창했다.
갑작스러운 낯선 이의 접근에 클로에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그러셨군요. 제국인이 이 지역에 방문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놀랐습니다. 만일 미리 언질을 해 주셨으면 환대해드렸을 텐데요.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아미타브 칸이라고 합니다.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이 작은 지역의 주인입니다.”
다즐링의 영주인 모양이었다.
다즐링의 영주가 바라트식 예절인 듯 두 손을 세운 채로 포개며 인사했다. 클로에 역시 조심스레 치마폭을 양옆으로 잡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다즐링의 영주께서 제게 어쩐 일로?”
“하하…… 아, 그게 말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사실은 숙녀분께서 차밭에서 베푸셨던 선행을 보았습니다.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갑자기 영주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쑥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 제국의 귀족이신 듯한데, 하잘것없는 일꾼 한 명을 온 정성을 다해 신경을 써 주시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즘 시대에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의 자애로움과 자비였습니다. 어, 그러니까 제 말은…….”
“네.”
“숙녀분의 아름다움과, 외양보다도 더 아름다운 마음씨에 무척이나 감동해 반해 버렸습니다. 마침 제가 아직 혼처를 찾지 못했는데, 숙녀분께서 그 자리를 받아 주시어 다즐링의 모든 여성들의 귀감이 되어 주신다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제가 작은 지역의 영주일 뿐이지만, 이래 봬도 사업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듣는답니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차를 생산해 내는 이 지역의 잠재력과 제 사업능력이 합쳐지면 수도권 영주들이 부럽지 않게 될 일도 시간문제입니다.”
클로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 남자의 용건은 청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처음 본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클로에는 그만 풋 웃고 말았다.
“아니, 어째서 웃으십니까?”
“영주님, 죄송하지만 그 요청은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어, 어째서입니까? 역시 외국인 남편은 좀 그러신가요?”
“그런 문제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그중 특히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때였다.
클로에의 어깨에 단단한 살결이 감겨왔다. 익숙한 감각이었기에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도록 냉랭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내 여자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예의와 격식을 중시 여기는 알폰스는 평소에는 주로 신분을 밝히는 말로 말문을 트곤 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혹은 ‘바텐베르크 공작입니다만, 제 안사람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같은 것이 좀 더 그다운 말이었다.
그런데 ‘내 여자’라니. 이렇게나 사적인 말투라니. 언제나 귀족적인 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식 없는 어휘 선정이었다.
어지간히 급하기는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클로에는 웃음을 삼켰다.
알폰스는 그 넓고 단단한 어깨로 불청객을 향해 다가가 섰다. 클로에를 보호하는 듯 뒤로 숨긴 모습이었다.
“어머나!”
“각하!”
“공작님!”
뒤편에서 클로에의 수행인들이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즐링의 영주, 아미타브 칸은 기겁했다. 그도 작지 않은 지역을 다스려온 영주로서 어디 가서 뒤처지는 담력과 기는 아니건만, 눈앞의 외국인은 묘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존재 자체의 위압감만으로도 장사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했다.
영주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식은땀만 흘리자 클로에가 알폰스를 달랬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분도 그냥 잘 모르셔서 그랬을 뿐인걸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제야 알폰스는 적의를 거뒀다. 영주는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내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지?”
위압감은 거두었지만 여전히 붉은 눈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는 채였다.
알폰스는 길을 막고 있는 상단과의 협의를 처리하고 약속 장소인 숙소에서 클로에를 기다렸지만, 그녀가 오지 않아 직접 마중 나왔던 차였다.
그런데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의 곁에 웬 낯선 사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다가오면서 언뜻 들린 말은 어떻게 생각해도 그녀를 유혹하는 듯한 말이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타인에게 먼저 적의를 보이는 일이 드물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 클로에는 그의 영역 중 제일 내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아미타브 칸은,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던 위압감은 사라졌으나 그때 느낀 두려움의 기억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영주로서의 자존심이고 뭐고 그는 곧장 머리를 숙였다.
“아이고,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숙녀분께서 이미 결혼을 하신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혼자 계시기에 독신이신 줄 알고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해하셨을 수도 있죠. 괜찮아요. 그렇죠, 알폰스?”
“…….”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어차피 그가 클로에의 말을 거스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그의 침묵을 동의의 뜻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미타브 칸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곤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소개 드리겠습니다. 다즐링의 영주, 아미타브 칸이라고 합니다. 방금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한 알폰스에게 클로에가 눈치를 주었다. 그제야 알폰스가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제국의 공작이오.”
* * *
“제국의…… 공작이시라고요?!”
아미타브 칸은 깜짝 놀랐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바텐베르크…….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국에서 대단한 위세를 가지고 있는 대귀족가였던가요…….”
눈앞의 이방인들이 제국의 귀족인 줄은 알았으나 그렇게까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알폰스는 고개를 까딱했다.
“이 먼 나라에까지 바텐베르크의 소문이 퍼져 있었던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은 제가 개인적인 이유로 제국에 관심이 많답니다. 그래서 제국어도 배웠고요.”
칸이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제가 외국의 귀하신 분들을 두고 몰라뵈었습니다. 제가 여러모로 결례를 범하기도 했고, 또 사실은 이 산속의 작은 지역에 제국의 귀족께서 방문하신 것은 처음이기도 해서, 이 지역의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귀하게 대접해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작은 성의이니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알폰스로서는 눈앞의 바라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해를 했다고 한들 잠시나마 클로에를 마음에 두고 청혼까지 한 남자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때 작은 손길이 그의 소매를 끌었다. 클로에였다.
“대접을 해 주시겠다는데, 설마 거절하진 않으실 거죠? 외국인인걸요.”
클로에가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외국의 귀족이 대접을 하겠다고 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긴 해도 외교적 결례였다.
물론 ‘그’ 제국의 ‘그’ 바텐베르크 공작가가 바라트의 작은 지역 영주에게 작은 결례를 저질러 봤자 상대가 뭘 어쩌겠냐마는…….
알폰스는 클로에를 보았다. 그녀의 맑고 고운 올리브빛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알폰스는 끙 하는 소리를 입속으로 삼켰다.
“오늘 저녁 시간대라면 좋습니다.”
“오늘 저녁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저녁 여섯 시경에 이 호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미타브 칸과 공작 부부는 그렇게 헤어졌다.
알폰스가 상단과 훌륭한 협의를 한 모양인지 길을 막는 마차는 하나도 없었다. 공작 부부는 예정되어 있던 근처 도시이자 유명한 홍차 재배지인 시킴을 관광하고 돌아왔다.
“마침 저녁에 별다른 일정이 없었는데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몰라요.”
클로에가 긍정적으로 말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호텔 로비로 나가니, 칸이 보낸 시종과 마차가 공작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의 바텐베르크 공작, 그리고 공작부인이시군요. 영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부디 이쪽으로…….”
그리하여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공작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고풍스럽고 바라트 문화 특유의 멋이 있는 지붕이 둥근 저택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칸이 저택의 문 앞까지 마중 나왔다.
칸은 공작 부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는 상아로 된 장식품이 많았으며, 의자가 없는 좌식 식탁에는 자줏빛 비단 방석이 깔려 있었다.
클로에는 오래간만에 보는 좌식 구조가 반가웠다. 벌써 몇 년이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제국은 모든 곳이 입식 문화였고, 동방풍 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라트의 호텔들 역시 외국인 관광객을 염두에 뒀기 때문인지 대체적으로 입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자, 이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댁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히들 계십시오.”
클로에는 알폰스를 보았다. 알폰스가 좌석을 보고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알폰스는 바닥에 앉는 게 익숙하지 않겠구나. 바닥에 앉을 일이 거의 없었을 테니……. 그렇다곤 해도 설마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겠지?’
아무리 입식 문화권에서 산다고 해도 살다 보면 한두 번쯤 바닥에 털썩 앉을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런데 왠지 클로에는 그라면 한 번도 바닥에 앉아 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히도 깔끔을 떠는 그가 아닌가.
그리고 클로에 본인은 몰랐지만.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알폰스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닥에 앉아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알폰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방석에 앉는 법을 터득한 듯했다. 클로에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칸이 감탄했다.
“아니, 두 분 다 쉽게 앉으셨군요. 놀랐습니다. 서방에서 오신 분들은 종종 어떻게 앉는지 몰라 헤매곤 하시거든요.”
“저와 그이가 동방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클로에가 대답했다.
곧 하인들이 요리를 내왔다. 긴 식탁 위에 다양한 요리들이 차려졌다. 바라트식 화덕인 탄두리에서 구운 새끼 양과 거위, 카레, 400g을 채취하는 데에 오만 송이의 꽃을 따야 한다는 사프란이 듬뿍 들어간 비리야니, 꿀에 절인 과일들과 심지어 놀랍게도 민물 가재와 공작새구이가 저녁 식사를 장식했다.
“입에 맞으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부디 마음껏 드십시오.”
칸이 권했다.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성스럽게 준비한 것이 느껴지는 요리들이었다.
그러나 알폰스의 입에는 맞지 않았다. 향신료가 너무 강하고 매웠던 탓이었다. 심지어 맵지 않은 요리들은 너무 달기까지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알폰스는 원래 미식에 관심이 없고, 식사는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묵묵히 허기만 채웠다.
놀라운 것은 클로에 쪽이었다.
“정말 맛있네요!”
클로에가 감탄했다.
그녀는 하인들이 권하는 나이프와 포크도 거절하고 (맨손 식사가 익숙지 않은 서방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정통 바라트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꽤 눈에 띄었는데 심지어 그녀는 무척 맛있게 식사를 했다. 이 맵고 향신료가 가득 들어간 요리가 그녀의 입맛엔 맞는 듯했다.
“정말이신가요? 혹시 맵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칸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약간 매콤하긴 하지만 입맛이 돌 정도예요. 정말 맛있고 풍미가 좋아요. 이국적이고 신선한 요리네요.”
클로에는 손끝으로 민물 가재 껍데기를 조심스럽게 벗겨 내서 민트 소스에 쿡 찍어 입에 넣었다. 뽀얗고 보드라운 민물 가재의 식감과 고소함, 민트 소스의 산뜻함이 입 안에 퍼졌다.
칸이 기뻐했다.
“제국인 중에 바라트 요리를 맵지 않다고 하신 분은 공작부인이 처음입니다. 저희도 제국인분들을 대접할 때는 최대한 덜 맵게 만들고는 있지만 기본 레시피가 있다 보니 이게 최대라서요. 다른 분들은 이 정도도 맵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어찌나 기뻤는지 칸은 클로에의 태도와 매운 것도 잘 먹는 입맛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공작부인은 정말 탁월한 미식가이시군요. 게다가 편견 없이 적극적으로 저희 바라트의 문화를 체험하려고 하시는 노력이 무척 감탄스럽습니다.”
“어머, 별거 아니에요.”
클로에는 민망해졌다. 사실 그녀가 매운 것을 잘 먹는 까닭은 전생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전생에 살던 나라는 온갖 매운 요리를 즐겨 먹는 곳이었다.
게다가 바라트의 요리와 비슷한 인도의 요리가 유행하던 중이기도 했다. 알폰스는 바라트의 요리를 난생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지만, 클로에는 전생에 인도 요리를 몇 번 먹어 보았기에 비교적 익숙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으므로 클로에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제가 원래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정말 그러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제국인들 중 제일 매운 요리를 잘 드시는 것 같은데요.”
식사를 마친 뒤, 칸이 물었다.
“바라트의 차 문화는 유명하죠. 바라트 사람들은 다들 이 나라의 차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요즘은 제국에서도 차가 유행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두 분은 차를 좋아하십니까?”
그 질문에 알폰스가 코웃음을 쳤다.
참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그가 코웃음 하나 못 참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재미있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제국인이 다즐링에 방문할 이유가 몇 가지나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알폰스가 비웃음이 역력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칸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했다.
“아…… 하긴 그렇군요. 다즐링은…… 바라트에서 제일 유명한 차 생산지니까요. 죄송합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한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실례를 했네요. 그렇다면 두 분은 이곳이 차 생산지이기 때문에 들르신 거라면, 차를 아주 좋아하시는가 보군요?”
확실히 제국에서 배를 타고 바라트에 내린 뒤,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북부 구석의 산골짜기 도시인 다즐링까지 찾아오는 일은 어지간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칸이 거들먹거리기는 했지만, 알폰스가 그에게 다소 냉소적으로 구는 것이 신경 쓰였던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네, 맞아요. 특히 다즐링 차를 정말 좋아해서 이곳에 왔답니다.”
“정말 귀한 손님들이시군요! 이 산골짜기까지 오실 정도로 차를 사랑하는 제국인이라니요. 요즘 제국에서 갑자기 차가 유행하더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클로에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쑥스러워하는 그녀의 눈에, 옆에서 알폰스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그런 와중에 칸이 말을 이었다.
“하하, 제국에서 차가 유행을 하다니……. 정말 신기하죠? 몇 년 전만 해도 제국인들은 차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들었었는데 말입니다. 듣기로는 어떤 귀족 사업가 덕분이라는데 아마 과장이 섞여 있을 겁니다. 겨우 한 사람이 제국 같은 커다란 나라 전체에 차를 퍼뜨리는 일이 가능할 리 없잖아요?”
“그 귀족 사업가가 젊은 여성이라면 더욱 놀라시겠군요.”
알폰스가 끼어들었다.
“예? 젊은 여성…… 이요?”
칸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알폰스의 돌발행동에 클로에는 혀를 깨물 뻔했다. 그녀는 팔꿈치로 알폰스를 쿡 찔렀다.
“왜 그러십니까?”
알폰스가 속삭였다. 그의 입가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일말의 장난기가 어린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클로에가 칸에게 들리지 않을 소리로 소곤거렸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사실 아닙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굳이 여기서까지 자랑을 해야겠어요?”
알폰스, 그는 더없이 진중하고 조용한 듯하면서도 종종 이렇게 사람 심장 떨어질 만한 돌발행동을 하곤 했다. 그의 그런 행동력이 의지가 될 때도 많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클로에는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열심히 손부채질 했다.
알폰스는 묘한 눈길로 마주 보는가 싶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자랑하는데 장소가 따로 있습니까?”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클로에는 순간 짜릿하고 묘한 감각이 귀로부터 퍼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하하! 제국의 공작께서는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설마요. 제국의 여성들은 정숙하고 가정적이라고 들었는데요.”
이럴 수가. 칸은 생각보다 눈치가 없었다. 그는 화제를 바꾸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알폰스가 오만하게 말했다.
“유감이군요. 한 지역의 주인 되는 자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예?”
“그 소문 속의 사업가를 앞에 두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곤란하게 되었다. 클로에는 부끄러움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그럼 고, 공작님이 설마?”
“젊은 여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에 젊은 여성은 단 한 사람밖에 없을 텐데요.”
어리둥절하던 칸의 얼굴에 점점 경악의 빛이 물들었다.
“그…… 그렇다면 여기 계신 공작부인께서 바로 그?”
그제야 알폰스의 입꼬리가 살짝 호를 그렸다.
클로에는 몹시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알폰스의 말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소문이 과장된 거예요. 입소문이란 게 원래 다 그렇잖아요?”
“사실 공작부인께서 여태까지 보여 주셨던 겸손함을 보면 지금 하신 말씀도 겸양의 일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놀랍습니다. 소문 속의 주인공이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니요……. 차 문화 불모지인 제국에 차를 그토록 성공적으로 소개하다니 이만저만한 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부끄럽군요.”
클로에가 겸손하게 말했다.
“아, 다즐링에 오실 정도로 바라트의 차도 즐기신다면 마침 잘됐습니다. 마침 바라트의 색깔이 아주 잘 드러나는 차를 대접해드릴 생각이었으니까요…….”
칸이 그렇게 말하고 하인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바라트 특유의 색색깔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하인이 조심스레 무언가를 내왔다.
하인이 클로에와 알폰스의 잔에 차를 따랐다. 옅은 갈색을 띠는 탁한 액체가 흙 주전자에서 흘러나왔다. 맑은 홍차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그 액체가 잔에 차오르자, 곧 코를 찌르는 향이 퍼졌다.
두 사람 모두 이것이 무슨 냄샌지 알 수 있었다. 바라트 특유의 향신료 냄새였다.
“바라트의 사람들은 이것을 짜이라고 부릅니다. 높은 사람부터 제일 천한 자까지 모두가 즐겨 마시는 음료지요.”
칸이 다소 자부심이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설탕을 많이 넣어서 아주 맛이 좋을 겁니다. 자,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
주인의 설명을 듣던 알폰스는 잔을 들었다.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제국에서는 클로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접해 주는 차를 맛보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
첫 번째로 느껴진 것은 코와 입 안의 연한 살을 찌른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향신료의 맛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아주 강한 단맛.
‘바라트에서는 설탕을 매우 많이 쓰는가 보군.’
향신료의 맛도 맵고 독하게 느껴졌지만, 무엇보다 알폰스는 단맛을 아주 싫어했다. 그는 예의상 몇 모금만 마시고 슬쩍 잔을 밀어 두었다.
바라트의 전통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맛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그는 클로에의 옆얼굴을 흘끗 보았다.
‘그녀라면 분명 이 차에 대해 알고 있겠지.’
그리고 그의 입맛을 아주 잘 아는 그녀는 분명, 이 짜이라는 차 역시 그의 마음에 쏙 들게끔 우려낼 수 있을 것이었다.
신경 써서 준비해 준 집주인에겐 미안하지만 그녀가 만들어 준 짜이가 마시고 싶었다. 분명 즐거운 시간이 될 터인데.
한편 차를 마신 클로에가 말했다.
“아, 정말 맛있고 현지의 맛이 느껴지는 짜이네요.”
“정말입니까? 그거 정말 기쁘군요.”
칭찬을 들은 칸이 기뻐했다.
“그럼요. 무척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쓴 것이 느껴졌어요. 이 향신료들은 제국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역시 현지에서 느끼는 맛은 색다르네요.”
알폰스 역시 클로에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기분 좋은 듯이 눈을 나른하게 반쯤 감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알폰스는 그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좋은 차를 마셔서 기분이 좋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음……. 짜이에는 마살라라고 부르는 배합 향신료가 들어가죠. 바라트를 대표하는 향신료들을 적당한 비율로 섞은 거예요. 마살라가 배 속을 따뜻하게 해 주어서 기분이 좋네요. 이 맛은…… 아마 계피와 생강이 제일 많이 들어간 것 같고, 카다몸과 후추. 정향도 들어갔네요. 그리고 또……. 아! 알겠어요. 육두구로군요? 짜이 재료로 흔하지 않은 건데, 색다른 레시피예요.”
“예…… 예?”
차를 홀짝거리며 말하던 클로에가 잔을 내려놓았다. 어느샌가 잔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범한 백설탕 대신 흑설탕을 쓰셨나 봐요. 특유의 향이 향신료와 잘 어울려요.”
클로에가 잔을 밀어 놓으면서 생긋 웃었다.
입을 다물지조차 못하고 그런 그녀를 멍하니 보고 있던 칸이 감탄했다.
“저, 전부 맞습니다. 계피, 생강, 카다몸, 후추, 정향, 육두구가 들어간 것도 맞고, 백설탕 대신 흑설탕을 쓴 것도 맞아요. 세상에! 대체 어떻게 아신 거죠? 하인에게 들으셨나요?”
“아, 아니요. 차를 좋아하고, 직접 블렌딩도 하다 보니까 블렌딩에 쓰는 재료를 많이 맛보고 배웠어요. 바라트의 향신료들 역시 제 관심사 중의 하나랍니다.”
전생에서부터 다양한 차를 많이 접해 보기는 했지만, 트리플 스위트에서 직접 블렌딩한 차를 내놓기 시작하면서부터 클로에는 블렌딩에 쓰이는 각종 재료들을 더 열심히 연구했다.
티 블렌딩에 쓰이는 허브와 건과일, 향신료 등을 다양하게 구비해서 틈틈이 맛보고 시음 노트를 작성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클로에가 작성한 노트도 벌써 삼십 권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였으니 향신료 몇 가지 구분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클로에는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맙소사! 정말 놀랍습니다. 역시 제국에 차를 유행시키는 업적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군요. 차의 뛰어난 전문가라고 들었는데 소문보다도 더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아하하, 과찬이세요.”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알폰스가 당사자보다 훨씬 더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빛이 반짝였다.
찬사를 쏟아 내던 칸이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그는 다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흠, 흠. 원래는 정말로 환영과 사과의 뜻으로 대접해드리려 했던 것이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네?”
“사실은, 최근 제국에서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고, 실제로 다즐링의 판매량도 많이 늘었기에 저도 제국을 상대로 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답니다. 다원 다즐링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를 세울 생각이지요. 제가 제국어를 배운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러셨군요.”
“한참 준비 중에 있었는데 지금 이 시기에 이리도 차에 대해 잘 아시고, 실제로 제국에서 차 관련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끄신 분을 만났다는 것은 신께서 내려 주신 기회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 사업의 조언가가 되어 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공작부인께서는 저보다 제국의 시장과 문화에 대해 훨씬 잘 아시니 정말 큰 도움이 되어 주실 겁니다.”
“조언가…… 라고요?”
그가 말하는 것은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경영 컨설턴트’였다. 그는 지금 클로에에게 자신의 기업을 컨설팅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예! 그 대가로 매출뿐만 아니라 사업의 운영 관련 지분까지 드리겠습니다. 저 다음가시는 이 기업 최대의 소유주가 되실 겁니다.”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그가 말하는 것은 주식과도 비슷했다. 클로에를 그에 버금가는 최대의 대주주로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 아닌가?
* * *
클로에는 이 세상에 온 뒤로 아직 주식의 개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칸이 처음으로 주식의 개념을 생각해 낸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 첫인상은 조금 어수룩해 보였지만 생각보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맡는 직책에 비해 어마어마한 대가였다. 그만큼이나 상대가 자신의 사업에 클로에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만, 클로에의 입장에서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칸이 기대와 초조함을 담은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제안 감사드려요, 영주님.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다음에 답을 드려도 될까요?”
“아! 물론이지요. 이런 일을 어찌 단번에 결정하시겠습니까? 그럼 이 지역에 계시는 동안 충분히 고민해 보십시오. 마침 저도 준비를 좀 해야 하니까요. 계약서라든가 말이지요…….”
영주와 공작 부부는 함께 차를 마시며 바라트의 관광 소감이나 제국의 차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특하게도 바라트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술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 술은 마시지 않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공작 부부는 숙소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씻으려고 하는데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있었다. 네 명의 젊은 여성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제국의 바텐베르크 공작과 공작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그들이 외국어 억양이 짙은 제국어로 인사했다. 바라트 전통의 마사지 기술을 익힌 전문 안마사들이라고 했다.
“짧지 않은 관광에 피로가 쌓이셨을 것 같기에.”
알폰스가 말했다. 알고 보니 그가 클로에를 위해 부른 것이었다. 언제나 둘이 같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마사지 전문가를 부른 건지 클로에는 알 수가 없었다.
물론 클로에도 마사지를 좋아했다. 열심히 일한 뒤 피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마사지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다만 여태까지는 주로 하녀들에게 마사지를 받았는데, 바라트 전통의 마사지 같은 것은 처음이었다.
일종의 커플 마사지로 두 사람은 같은 방에서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오일 마사지를 받기 위해 속옷만 남기고 옷을 벗었다.
마사지사들이 향유 병을 열었다. 그저 병을 열었을 뿐인데도 몽롱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자, 엎드려 주세요.”
클로에는 시키는 대로 했다. 마사지를 위해 일부러 덥혀 놓은 건지, 조금 따뜻한 정도의 오일이 몸 위로 흘렀다. 오일이 흘러내리면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한 명당 마사지사 두 명이 붙어서 정성스레 마사지했다. 그들은 전문가답게 작은 근육까지 놓치지 않고 정성스레 풀어 내렸다.
“어깨와 목이 많이 뭉치셨네요.”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을 많이 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사지사의 손가락이 목과 승모근, 어깨를 부드럽게 풀어 주자 아픈 듯하면서도 시원했다. 이런 거라면 하루종일 받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시원해라.”
행복에 잠긴 채, 클로에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괜찮으신가요? 아프지는 않으시고요?”
“물론이죠. 아, 정말 좋네요.”
엎드린 클로에는 보지 못했지만 마사지사들의 얼굴에 기쁨과 보람이 스쳤다. 그들의 주 고객인 귀족들은 칭찬을 잘 입에 담지 않았다.
클로에 쪽이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데, 알폰스 쪽이 묘하게 소란스러웠다.
“근육이 정말 굉장하시네요.”
“정말이에요. 밀도가 높고 견고해서 아주 좋은 근육이에요. 모양도 정말 예뻐서 마사지 교본에 나올 것 같아요.”
마사지사들이 알폰스의 몸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빈틈없이 전신을 싸매는 정숙한 정장을 입고 다니지만, 그런 옷을 입어도 어깨가 넓고 탄탄한 체격을 숨길 수 없었다.
옷을 벗고 오일까지 바르니 그의 아름다운 몸이 더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매끄럽고 단단하게 차오른 근육은 그의 기계처럼 완벽한 자기관리 능력을 증명했다. 그렇게 탄탄한 몸인데도 날렵한 선이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사람의 근육을 많이 봐 왔을 텐데도 마사지사들은 그 미려한 모습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토록 찬사가 터져 나오는데도 알폰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예’, ‘그렇습니까’ 정도의 적당히 마사지사들이 무안하지 않을 정도의 대답만 해 주고 있었다. 원래 그는 수다를 전혀 즐기지 않았다. 클로에와 함께 있을 때만이 예외라 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에는 다른 방면에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네. 내가 저런 칭찬을 들었으면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텐데……. 살면서 칭찬을 너무 많이 들어서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까?’
마사지사들의 탄성과 칭찬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런데 칭찬이 거듭 들릴 때마다 클로에는 가슴속에 돌멩이가 하나씩 얹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남편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왜 기분이 안 좋지?’
클로에는 표정관리를 하려 애쓰며 생각했다.
‘내가 질투를 하는 걸까?’
마사지가 끝났다. 마사지사들은 피부에 좋은 오일이기 때문에 씻어 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마침 씻기 전이었기 때문에 목욕을 하기로 했다.
“마사지는 어떠셨습니까?”
알폰스가 물어 왔다. 클로에는 방긋 웃어 보였다.
“정말 좋았어요. 어깨가 결리던 게 싹 사라졌어요. 여행 중에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이것만 받아도 되겠던걸요.”
알폰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사지사들에겐 티끌만큼도 보여 주지 않던 얼굴이었다.
하녀들이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웠다고 알려 왔다. 클로에가 먼저 들어가려고 하는데, 알폰스가 그녀를 불렀다.
“같이하시겠습니까?”
“네?”
클로에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부가 된 게 언젠데,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아직도 이런 일을 부끄러워하곤 했다.
클로에는 붉어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클로에의 취향에 맞춰진 물 온도는 딱 알맞게 따뜻했다. 클로에는 조심스레 목욕가운을 벗고, 발끝부터 물에 들어갔다.
“아, 따뜻해.”
클로에는 어깨까지 물에 담갔다. 시원한 마사지에 이어 온수 목욕이라니……. 이 이상 시원할 수가 없었다. 오래 묵은 피로까지 오일과 뜨거운 물에 녹아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솔직히 뒤에 서 있던 알폰스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서로의 몸을 몇 번이나 보아 왔는데도 나신을 드러내는 건 여전히 쑥스러웠다.
곧 알폰스 역시 목욕가운을 벗고 물에 들어왔다. 넘실거리는 수면이 또 훌쩍 위로 올라왔다. 클로에는 그의 알몸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물 위에 치자꽃 향이 나는 연노랑빛 비눗방울과 말린 꽃잎이 잔뜩 떠다니고 있었기에 수면 아래의 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따끈한 물에 노곤노곤 녹아 가던 클로에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여행 중에 마사지라니, 정말 센스 있었어요.”
클로에가 장난스레 몸을 기울여 알폰스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이 사랑스러움에 알폰스의 얼굴이 풀렸다. 지금의 그의 얼굴을 그의 가신들이나 기사들은 결코 상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여행은 어떠십니까?”
“최고죠! 다즐링 여행은 제 꿈이었어요. 알폰스와 함께하는 다즐링 여행이라니…….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뿐인걸요.”
그녀의 솔직한 말에 알폰스가 픽 웃었다.
“저와 차는 부인에게 있어 동급입니까?”
“물론 알폰스가 좀 더 위에 있어요.”
클로에의 녹색 눈동자가 장난기를 담아 가늘어졌다. 알폰스는 그녀를 귀여운 듯 보다가 물었다.
“오늘의 저녁은 어떠셨습니까?”
“오늘의 저녁이요?”
“예. 영주가 대접했던 만찬 말입니다.”
의외의 질문에 클로에의 눈이 동그래졌다. 클로에는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두드리며 고민했다.
“정성이 가득한 만찬이었어요. 제 입맛에 매우 잘 맞았어요. 저는 바라트 요리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 하지만 알폰스는 그리 즐겁게 드시지 않으셨죠. 입맛에 맞지 않으셨나 봐요?”
식사를 하고, 영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알폰스가 식사하는 모양은 어떻게 관찰했는지 신기했다. 그런 관찰력이 그녀의 뛰어난 배려심과 세심함의 초석일지도 몰랐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향신료가 과한 듯하여.”
“그러실 것 같았어요. 우리 공작님은 담백한 것을 좋아하시죠.”
그때 클로에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마사지와 질투심과 알폰스와의 목욕 때문에 잊고 있었던, 다즐링 영주의 제안이었다.
그녀에게 무척이나 유리한 제안이었다. 상대는 클로에를 굉장히 고평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클로에는 다즐링 차를 무척 좋아했다. 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다즐링의 각종 다원차를 즐기게 된다면, 그 일에 클로에 자신이 무언가 기여를 하게 된다면 그만큼이나 보람 있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제안인데도 불구하고 선뜻 그러자고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마음속 한구석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클로에와 알폰스는 서로의 실력을 존중했다. 그래서 옛날에 함께 알폰스의 집무실에서 일을 했던 뒤로는 서로의 일에 잘 간섭하지 않았다. 그것이 일종의 암묵적 규칙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갈피가 잡히지 않는 판단은 알폰스에게 조언을 구해도 될 것 같았다. 알폰스가 클로에를 신뢰하듯 클로에 역시 그를 무척이나 믿고 있었다.
“그 영주가 제게 제안했던 조언가 일 말인데요, 알폰스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알폰스의 붉은 눈동자가 클로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 눈동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열정, 정욕, 소유욕…….
하지만 그러한 불처럼 뜨거운 감정들과 다른, 잔잔하지만 그 깊이를 채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 또한 있었다. 애정, 신뢰, 그리고 존중.
알폰스는 결코 빈말 같은 것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같은 떠보는 듯한 표현도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말이 없으면 서로를 오해할 정도로 얄팍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그 사안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물론 부인께서 얻게 될 이익을 감안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제가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오로지 감정적인 부분 때문입니다.”
“감정적인…… 부분이요.”
“예. 그자는 부인께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지금이야 그 마음을 접은 것처럼 보여도 혹시 모릅니다. 앞으로 업무를 이유로 자주 접촉한다면 그자의 부인에 대한 호감이 더 강해질지도 모르죠.”
“그렇다는 말씀은.”
“예. 저는 질투가 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클로에는 온몸에 전기라도 통하는 것 같았다. 간신히 안정됐던 심장박동이 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질투’라는 말이 이렇게나 달콤하게 느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어찌할 줄 모르고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꽃잎만 쳐다보고 있던 클로에는 용기를 내서 다시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시야 가득 담기는 그의 붉은 눈동자였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깊은 눈동자에 오직 그녀만을 가득 담으려는 듯이. 단 한 순간의 낭비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저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허리가 찌르르 저려 와서 클로에는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손과 머리카락으로 가리려고 애썼다.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흰 팔에서 도로록 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한 가지 더.”
알폰스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훌쩍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샌가 무릎에 그의 다리가 닿았다. 그 별거 아닌 접촉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 여행 중에는 오직 제게만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은 돌아가서 생각하셔도 됩니다. 이 여행은 부인과 저, 오직 두 명을 위해 준비했던 것이니.”
크고 손가락이 긴 손이 다가와, 어찌할 줄 몰라 하는 클로에의 젖은 머리카락을 감아올렸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클로에는 깨달았다.
‘내가 그 제안이 그리 달갑지 않았던 것은 이 이유 때문이었구나.’
칸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고, 클로에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진심 같았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연애적 호감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앞으로도 단둘이 접점을 만들기에는 떨떠름했다.
그리고, 클로에는 알폰스가 이 여행을 얼마나 정성껏 준비했는지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배를 타면 2주, 국가 간 워프를 이용해도 5일은 소모해야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바라트 왕국에 온 것도 전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은 다 차치하더라도 클로에는 알폰스와 함께 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녀는 일을 사랑하듯 알폰스를 사랑했다. 그동안 일에 많은 시간을 쓴 만큼 오로지 그만을 위한 시간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당신의 말이 옳아요, 알폰스.”
알폰스가 걷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에서, 클로에가 웃었다.
“좋아요. 영주의 제안을 거절할게요.”
금전적 이익 같은 것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알폰스와의 시간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사실 굳이 칸과 함께 사업을 하지 않아도 클로에의 사업은 이미 최고조에 있기도 하고.
알폰스는 이번에도 빈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라든가,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같은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만족스럽게 웃으며, 들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로 그녀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을 뿐이었다.
입술을 뗀 뒤 그가 말했다.
“그렇게 결정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요? 에이, 조금은 신경 쓰고 계셨던 것 같은데.”
클로에가 배시시 웃었다. 저녁 식사 내내 칸에게 다소 냉랭했던 알폰스의 태도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클로에가 쉽게 속아 넘어가 주지 않자 알폰스의 미간에 잔금이 갔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하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디의 공작부인께서는 마사지사에게 질투를 하시던데 말입니다.”
클로에는 불에 덴 듯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보지 않는 것 같아도 제 시선은 언제나 부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그걸 눈치채다니, 정말 대단한 관찰력이었다.
그걸 들키다니, 클로에는 무척 민망해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폰스도 칸을 질투하지 않았던가.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평소 질투가 많은 편이었다. 그에 비하면 클로에는 대단히 양호한 축에 속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을래요. 알폰스도 질투를 하는걸요. 그렇죠? 사랑하는 사이에 그 정도는 이상하지 않아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클로에가 뿌듯한 듯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알폰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소리 내어 웃고는, 귀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클로에의 옆얼굴을 감싼 채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비볐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이 덮어 왔다. 달콤하고 농밀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의 손길이 클로에의 맨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목욕물은 꽤 식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에 열이 올랐다. 맞닿은 그의 입술, 손짓, 살결 하나하나가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응, 으응…….”
그의 양손이 허리를 쓸어내리며 둔부로 내려갔다. 잘록한 허리 아래의 동그란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가 그녀의 귀를 입에 물었다. 맛 좋은 요리를 입에 넣고 핥듯이 그가 귀를 핥고 빨았다.
클로에는 그저 그것만으로도 허리가 너무나 찌릿찌릿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의 몸에 무너지듯 기대자, 알폰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몸을 받쳤다. 그의 크고 단단한 육신은 그녀가 기대도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근육이 단단히 들어찬 그의 몸은 흥분한 그녀를 본 것만으로도 뜨거워져 있었다.
알폰스는 그녀를 단단히 받친 채 손가락을 옮겼다. 그녀의 매끄럽고 뽀얀 허벅지를 더듬다가, 벌써 끈적한 액체로 젖어 들기 시작한 수풀 속을 헤집으며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찾았다.
“앗, 흐읏!”
그는 그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작은 열매를 검지와 중지로 문지르다가, 엄지로 굴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기댄 클로에의 몸이 더더욱 크게 움찔거리며 떨렸다. 그녀는 헐떡이며 알폰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벅지를 따라 액체가 길게 이어지며 흘러내렸다.
“알, 폰스……. 흐으응…….”
클로에가 할딱이자, 더없이 사랑스럽고 욕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던 알폰스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 위를 덮었다. 그녀의 입안을 샅샅이 훑으며 여린 살을 간질이던 그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고 그녀의 목덜미에 붉은 자국을 새겨나가기 시작했다.
한 손으론 가슴을 주무르고, 한 손으로는 음부를 공략하고, 입술로는 목덜미와 쇄골을 탐하는 그의 다방면 공격에 클로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애를 태우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마어마하게 애가 탔다. 클로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알폰스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는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주저하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당신이 갖고 싶어요.”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알폰스는 입가에 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냉정한 모습과 다르게 지금 그는 웃음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진작 말씀하지 그러셨습니까. 저 역시 참고 있었는데.”
“참고…… 계셨다고요?”
“부인의 이런 음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참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중심부에 가져다 대었다. 정말로, 그의 것은 완연히 몸을 일으켜 그 늠름하고 흉악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클로에는 그가 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것을 쓰다듬었다. 알폰스는 픽 웃고는 그녀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것 위에 얹었다.
“흐으윽……!”
천천히, 그녀의 몸이 중력을 따라 내려가며 그의 것이 밀고 들어왔다. 그 거대한 것이,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지 전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클로에는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알폰스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찰방, 찰방 하고 욕조 물이 밖으로 흘러넘쳤다. 그의 움직임은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했지만, 곧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가 참고 있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것 같았다.
“아앗, 흑, 으응, 응……! 아, 앗!”
물이 미친 듯이 일렁이며 욕조 밖으로 쓸려나갔다. 그의 물건이 클로에의 내부를 들쑤시고 지나갈 때마다 질벽에, 그녀의 몸 안쪽에 견딜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알폰스는 그녀의 몸이 선사하는 열락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쥐어짜듯 탐했다. 그녀의 몸이 그의 것을 오밀조밀하게 조이며 탄력 있게 빨아들일 때의 쾌감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와 몸을 섞을 때면, 그녀가 자신이 주는 쾌감에 전율할 때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 또한 더없이 풍성한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부인, 부인…….”
정신없이 그녀의 몸을 탐하며, 그녀의 귀를 깨물며 그가 속삭였다.
“클로에.”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는 드물었다. 클로에는 그의 입술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자, 그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를 듣자 그만 절정에 다다르고 말았다.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조임에, 알폰스 역시 그녀의 안쪽 깊은 곳에 사정했다. 따뜻한 액체가 뱃속에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클로에는 그의 몸에 기댔다.
행위가 끝나자, 욕조에 가득하던 물은 반도 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지친 클로에의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으며 알폰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씻어야 할 것 같군요.”
“아이, 몰라요.”
클로에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숨기고 말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 * *
다음날, 다즐링의 영주에게서 다시 한 번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예정되어 있던 관광을 한 뒤 클로에와 알폰스는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석찬에 나온 요리들은 여전히 맛있었고, 놀랍게도 어제와 같은 재료가 하나도 없었다. 염소와 송어, 사슴, 심지어 낙타 혹으로 만든 요리를 보고 클로에는 이 산골짜기 도시에서 이런 재료를 어떻게 하루 만에 입수했는지 궁금해했다.
영주의 환대 속에서 즐거운 식사를 한 뒤, 차를 마시면서 칸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어제 제가 드렸던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클로에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네,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좋은 제안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어째서죠? 일에 대한 보상이 부족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단지,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도 하고 있는 일들이 있고, 지금도 업무가 많기 때문에 더 이상 늘릴 수가 없을 뿐이에요. 무척 사려 깊은 제안이었지만 지금의 일정으로는 영주님이 제안하신 일까지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차라리 보상이 부족한 문제라면 교섭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없다면야 방법이 없었다.
칸은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로 깊게 탄식했다.
“이럴 수가……. 공작부인과 제가 서로에게 좋은 사업 협력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쉽게 되었군요. 어딜 가서 공작부인만큼이나 차와 제국의 시장 상황에 대한 지식과 수완을 겸비한 전문가를 만나겠습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다른 사람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네, 꼭 좋은 분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영주님의 사업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클로에가 사심 없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시 다음날. 다즐링과 이별을 고할 날이 왔다.
예정된 일정에 따라 공작 부부와 일행들은 오전부터 다른 지방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여행 일정은 차로 유명한 지방 두어 군데를 더 돌아보고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숙소의 직원들과 공작 부부의 수행인들이 7대의 마차에 짐을 차곡차곡 실어 날랐다. 앞으로 몇 시간은 걸릴 마차 여행을 대비해 편안한 실내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는 마지막으로 다즐링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오전 10시인데도 아직도 옅은 안개를 두른 산기슭은 온통 아름다운 진녹색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달콤하고 상쾌한 향과, 시원한 아침 공기……. 이 모든 것을 클로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귀한 손님들 덕에 무척 즐거웠습니다. 또 오십시오. 그때도 최선을 다해 환영해드리겠습니다.”
칸과 그의 수행인들이 공작 부부를 배웅했다.
“저야말로 즐거웠고, 감사했어요.”
“행운을 빕니다.”
알폰스가 여유로운 태도로 인사하고, 클로에를 마차에 태웠다.
“출발합니다!”
선두의 마부가 소리쳤다. 마차의 행렬은 햇살에 밀려나는 안개 속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음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시녀와 하녀들의 마차 안은 떠들썩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다음 여행지의 낭만을 기대하며 재잘거렸다.
“아쌈이라고 들었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잘 몰라요.”
“바닷가였으면 좋겠다.”
활달한 로지가 자신의 희망 사항을 말했다.
“바닷가일 리가 없어요. 아쌈은 바라트에서 제일 유명한 홍차 산지 중 하나인걸요. 바닷가에서는 차나무가 자라지 않아요.”
유난히 클로에를 좋아하고, 그녀의 제일 오랜 수제자인 엘리가 끼어들었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건데 잘난 척하긴…….”
“저, 마님께 바닷가에 들르자고 말씀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마님은 다정하시니까 분명 진지하게 고려해 주실 거예요.”
니나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거 좋다! 다음 여행지에서 한번 여쭤보자.”
“마님의 다정함에 의존해서 마님께 지나친 부담을 드리지 않도록 하렴.”
하녀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록우드 부인이 엄격하게 말했다.
“에이…….”
“하지만 마님도 바다를 좋아하세요.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는걸요.”
“맞아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지나가다가 잠깐 들르는 건 괜찮지 않겠어요?”
“저런…….”
록우드 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호위 기사들의 마차 안.
“좀 비켜, 비좁잖아.”
대형 마차 안에는 겨우 4명밖에 없었는데도 제이콥이 엄살을 피웠다.
“비좁긴 뭐가 비좁다는 거야? 자리가 이렇게 넓은데.”
맞은편의 톰슨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톰슨의 말이 맞다. 주군과 마님께서 특별히 우리 기사들에게 이렇게 좋은 마차를 주시지 않았나?”
카인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
아무도 자신의 말에 호응해 주지 않자 제이콥이 투덜거렸다.
“이게 다 저 자식이 누워서 자서 그렇잖아!”
그의 옆자리에서는 발트가 제 방처럼 드러누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코까지 골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진이라도 온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잖나. 저 녀석을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어제 불침번이 발트였으니.”
“아 진짜……. 코를 막아 버리고 싶네. 야, 톰슨! 넌 불만 없냐? 뭐라고 말 좀 해 봐.”
클로에, 즉 마님의 훌륭함을 의심한 흑역사가 있을 정도로 불만이 많고 사사건건 딴지부터 걸고 보는 성격의 톰슨인지라 당연히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참고로 그 흑역사는 아직도 다른 기사들이 톰슨을 놀릴 때의 18번이었다.)
톰슨은 자기 자리에 얌전히 앉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까지 띤 채였다.
“야, 톰슨! 듣고 있어?”
“어? 아, 미안. 못 들었는데. 이걸 보느라고.”
톰슨이 틈만 나면 들여다보던 펜던트를 꺼내 들어 보였다. 로켓 펜던트는 안에 작은 초상화를 넣을 수 있는 형태였는데, 초상화에는 단아한 젊은 여성의 미소 띤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톰슨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난 결혼할 거야.”
“아, 저 자식 저거, 연애하더니 사람이 완전 바뀌었다니까. 완전 적응 안 돼.”
“그보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는 알고 있나?”
제이콥과 카인이 질색했지만 톰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불만 있으면 너희도 연애해라!”
“시끄러워!”
“누가 하기 싫어서 안 하나? 못 하는 거지…….”
* * *
한편, 제국에서는.
조심스러운 손이 소서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비어 있는 잔 안에는 방금 먹은 찻물의 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트리플 스위트의 밀크티는 최고라니까. 이 향, 이 깊이……. 떫지도 않고 최소한의 단맛으로 최고의 풍미를 이끌어 내는 솜씨는 제국의 어느 티룸도 흉내 내지 못하지.”
공작 부부가 여행을 간 동안 클로에의 사업의 관리는 여진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는 와중 잠시 즐기는 달콤한 휴식 시간이었다.
여진은 작은 수첩을 꺼내 펼쳤다.
그녀의 수첩 안에는 그동안 그녀가 돌아다닌 유명한 밀크티 가게들의 시음기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맛과 향에 대한 묘사, 가격과 용량, 여진의 총평을 별 모양으로 표시해 둔 것까지. 제국 안의 모든 밀크티 애호가들이 탐을 낼 만한 데이터베이스였다.
“트리플 스위트 신제품…… 시나몬 헤이즐넛 밀크티. 만점.”
그때였다.
갑작스레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여진 님! 다름이 아니고 물량 쪽에 문제가 생겨서요. 시나몬 헤이즐넛 밀크티의 공급이 수요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고 있어요…….”
직원이 들이닥치기 직전, 여진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테이블보로 테이블을 덮고는 장부를 확인하는 척했다.
여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들어올 땐 노크를 하라고 몇 번을 말하나?”
“앗, 정말 죄송합니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사과하던 직원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런데, 사무실에서 무슨 냄새 안 나나요? 이건 아마…… 이번 신제품, 시나몬 헤이즐넛 밀크티?”
여진이 손가락으로 불만스러운 듯 장부를 툭툭 쳤다. 그러나 그 손길에 불만 말고도 일말의 불안 역시 담겨 있다는 사실을 직원은 미처 모를 것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밀크티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는데. 동방인들은 우유를 넣은 차는 차로 치지도 않아. 비록 트리플 스위트의 경영을 담당하고는 있지만 나는 서방식 차는 싫어한다고.”
“아, 죄송합니다……. 여전히 입맛이 보수적이시네요.”
“알았으면 빨리 나가 보게. 신제품의 공급이 부족한 문제는 반나절 전에 생산 설비를 확충하기로 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야 여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처음부터 서방의 차가 싫다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어.”
공작 부부가 바라트 여행을 간 동안, 황궁에서는 작은 가든파티가 열렸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귀부인들은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눴다.
“이게 이번 달 트리플 스위트 신제품, 시나몬 헤이즐넛 밀크티예요. 헤이즐넛과 시나몬의 적당한 비율이 환상적이더라고요.”
“어머! 정말 맛있네요. 부드러운 맛의 다른 재료들 사이에서 시나몬이 포인트가 되어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빈자리를 느끼고 있었다. 클로에의 빈자리 말이다.
“역시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안 계시니까 허전하네요.”
“그러게요. 그분의 빈자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분위기가 평소랑 다른 것 같아요.”
활달하거나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부드러운 처세술로 늘 분위기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클로에. 오랜만에 그녀가 없으니 그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포트넘 부인, 로날드는 잘 크고 있나요?”
“물론이죠! 로날드는 이제 문장으로 된 말도 할 줄 안답니다. 로네펠트 부인께선 어떠신가요?”
“당연히 잘 지내죠. 아, 그런데 저희 바깥사람이 좀 골머리를 썩이고 있어요. 플랑드르 왕국의 여왕, 카타리나 2세가 자꾸만 편지를 보내고 있거든요. 공작부인을 자신의 전속으로 들어오게끔 회유해 달라면서요……. 하지만 공작부인의 심지가 그렇게 굳으신데 제 남편이 뭘 어쩌겠어요?”
“맞아요! 게다가 바텐베르크 부인이 플랑드르 왕국으로 가 버리면 저는 외로워서 어떡한단 말인가요? 지금 몇 주 못 보는 것도 힘든데…….”
포트넘 부인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대부분의 귀부인들이 클로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포트넘 부인만큼 그녀를 좋아하는 귀부인은 없었다.
그때였다.
“혹시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여기 계시오?”
낯익은 목소리에 모든 귀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은 치마폭을 감싸 쥐고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허허, 앉으시오, 앉으시오. 잠시 여쭤볼 것이 있어 들른 것뿐이오. 이런, 과인이 숙녀분들의 시간에 훼방을 놓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군.”
“아닙니다, 폐하.”
제국의 황제, 조지 왈트발 메르세데스 블라디미어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귀부인들을 훑어보더니 조금 슬픈 듯한 얼굴을 했다.
“공작부인은 안 계시는군.”
“네, 폐하.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은 아직 여행에서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되었소. 근처에서 차향이 나길래 혹시나 해서 들렀던 것이었으니. 방해하여 미안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오, 숙녀분들.”
“삼가 강녕하십시오.”
황제는 티 테이블에서 떨어져 나와 걸었다. 뒤를 따르던 그의 가신 중 한 사람이 물었다.
“혹시 공작부인에게 긴히 드릴 연통이 있으십니까? 황실 차 공급에 문제라도? 급하신 일이라면 연락용 수정구라도 사용해서 바로 연통을 넣겠습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 단순히 간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니.”
“아…….”
황제가 클로에 바텐베르크를 유난히 아낀다는 사실을 그의 주변인 중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클로에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딸이나 조카를 보는 것 같았다.
애당초 황제가 귀부인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으니,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리도 공작부인을 아끼시니, 역시 황자비는 그분이 되었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가신들 중 하나가 알랑거리는 농담을 했다.
그러나 황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서는 공작부인에게 당치도 않지. 말만으로도 공작부인과 공작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니 그런 소린 농담으로도 말게.”
“죄,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공작부인이 황자비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품어 본 적도 있지. 아서가 철이 없으니 그 녀석의 곁에서 공작부인 같은 지혜로운 여성이 잘 이끌어 주면 어떨까 하고.”
황제의 늙고 주름진 얼굴은 다소 추억에 빠진 듯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헛된 공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아서는 내 생각보다 훨씬 어리석었고, 공작부인의 재능은 고작 내 아들 사람 만드는 일 따위에 낭비할 정도의 것이 아니야. 애초에 다른 여성의 희생으로 내 아들 사람 만들기를 기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거야. 누군가를 희생시켜 가며 키운 황자가 얼마나 국민을 생각하는 군주가 되겠나? 아서, 그 아둔한 녀석은……. 공부하라고 타지까지 보냈으니, 세월이 갈고닦아 주기를 기대해야지.”
그는 아서에게 엄격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으나 그 태도 아래 숨어 있는 깊은 부정(父情)만은 숨길 수 없었다.
잠시 서글픈 눈을 하고 있던 황제는, 곧 평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작 부부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죽고 못 사는데 이 늙은이가 뭘 어쩌겠나?”
* * *
다시 바라트.
마차는 산기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차 안은 고요했다.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 돌아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알폰스의 단단한 어깨에 기댄 채 클로에는 생각했다.
‘벌써 이곳에 온 지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물론, 단순히 시간으로 따지면 전생의 세계에서 지낸 시간이 이곳에서 지낸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가끔 그곳의 편리함이나 음식 같은 것이 그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시간 동안 클로에는 이곳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세상도. 사람들도. 달콤한 차와 일도. 집도. 그리고…….
‘그이도.’
클로에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클로에의 손보다 훨씬 큰, 길고 곧게 뻗은 아름다운 손.
클로에는 이미, 아니, 한참 전부터 이곳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가 없는 삶과 세상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알폰스.”
클로에가 속삭였다.
“사랑해요.”
세상 하나와 맞바꾼다 해도, 아니, 당신이 없는 모든 세상들과 맞바꾼다 해도, 당신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요.
제게 있었던 무수한 가능성들 중, 당신을 만나러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기적을 그 무엇보다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클로에는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부끄러울뿐더러, 어떤 말로 표현해야 자신의 마음이 잘 전해질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마음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알폰스의 손가락이 손가락을 얽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 역시도.”
체온이 낮은 그인데도, 깍지 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어깨를 끌어당겨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엔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의 사랑, 약점, 전부. 그리고 저의 세계.”
그가 한 단어, 한 단어, 이마와 코,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클로에가 그를 만나러 그가 있는 세상에 왔다면, 알폰스의 삶에서 세상이란 그녀뿐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었다.
클로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쩐지 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그녀 안의 이 사랑의 크기를, 그도 알 수 있을 테니까.
클로에는 귀까지 붉힌 채,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 좋지만, 사실 저는 여기를 제일 좋아해요.”
그러고는 입술 위에 입 맞추었다.
그의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그가 클로에의 가냘픈 몸을 끌어안고 혀를 얽었다.
이 행복은 내일도, 모레도. 다음 해에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었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