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38/39)

3장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이제껏 한 해도 빠짐없이 결혼기념일을 챙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클로에가 지금의 클로에가 되기 전에는 알폰스가 일방적으로 비싸고 마음 없는 선물을 보내는 것이 결혼기념일 기념의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의 클로에가 된 해에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오붓한 데이트를 즐겼다.

하나 알폰스는 알고 있었다. 그가 결혼식을 올린 상대는 지금의 클로에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클로에와 지금의 클로에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만 그만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와 그가 공유하는 둘만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만큼 그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알폰스는 지극한 실용주의자였다. 원래의 그라면, 결혼식은 겉으로 내보이는 관례에 지나지 않는 만큼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그가 사랑하는 클로에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결혼은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중대사인데, 그것을 건너뛰었다는 사실을 그녀도 아쉬워하지는 않을까? 실제로 근사한 결혼식을 동경하는 자는 차고 넘치지 않는가. 이러한 것도 훗날 좋은 추억이 될 텐데.’

낭만이니 뭐니 하는 것을 따지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였다. 추억이라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쇠퇴할 단순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그였다.

10여 년 전, 아니, 몇 년 전의 자신이라면 지금의 이런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클로에, 그녀가 그를 대체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은 것인지.

알폰스는 기억 속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황실의 결혼식과도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성대했으나 진심도, 기쁨도 없었던 그 순간. 그도, 상대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단장한 신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것은 불안과 두려움뿐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녀에게 반지를 건네고, 입을 맞췄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이번에는 머릿속에 다른 모습을 그려 보았다. 눈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그를 향해 웃음 짓는 클로에. 그 이상 아름답고 성스러운 광경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더니, 이번 결혼기념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는 금방 나왔다. 알폰스는 또 한 번의 결혼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식을.

알폰스는 처음엔 대단히 성대한 결혼식을 계획했다.

‘예전에 했던 결혼식처럼 대단히 화려하게, 대규모로 하는 것이 좋겠어. 비단으로 길을 깔고, 수만 송이의 장미로 결혼식장을 장식해야겠군. 많은 이들의 축복과 축하를 받으며, 수도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도록 해야겠다.’

당연히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로에는 그에게 있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귀중한 존재였다. 사랑하지도 않았던 여자와도 그리 성대한 결혼식을 했으니, 클로에가 겪을 결혼식도 그 정도는,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서,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야, 그녀에게 가장 귀중하고 값진 것이 어울린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과연 그녀가 그런 결혼식을 기뻐할까? 지금껏 내가 봐 왔던 그녀라면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곤란해할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랬다. 클로에는 화려한 대규모의 행사를 피곤해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앞에 나서서 주목받기보다는 소중한 사람들 몇 명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아쉽지만 성대한 결혼식은 보류하는 것이 좋겠군.’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는 새로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한편, 알폰스의 계획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클로에는 그녀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해 결혼기념일에는 그이에게 어떤 선물을 하는 것이 좋을까?’

클로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을 좋아했다. 상대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하물며 그 상대가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녀가 언제나와 같은 준비를 하던 도중, 기념일 전날 밤, 알폰스가 말했다.

“내일 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함께 갑시다.”

이제까지 결혼기념일에는 언제나 오붓한 데이트를 해 왔기 때문에 클로에는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녀도 예상을 하고 미리 내일 일정을 비워 놓은 상태였다.

그녀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죠.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운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클로에는 그 말이 내심 신경 쓰였다. 알폰스는 언제나 말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단언한다면 믿어도 좋았다.

‘이번엔 어디를 가려는 걸까? 내가 전에 가고 싶다고 했던 청나라식 레스토랑인가? 아니면 요즘 인기 있는 이베리아의 공연단의 오페라 공연?’

미리 상상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조금쯤은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클로에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왔다는 공연단이나 신장개업한 레스토랑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느지막한 아침 식사를 한 뒤 공작 부부는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목적지가 지난밤 그녀가 예상했던 데이트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클로에가 눈치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차가 수도의 번화가가 아닌 외곽을 향했기 때문이다.

‘어머?’

깜짝 놀란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혹시 마부가 실수로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얼른 마부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나 알폰스는 그저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닌 것 같았다.

클로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도 외곽에 데이트할 만한 장소가 있었던가……?’

그녀가 알기로는 마땅한 장소가 있는 건 아니었기에 더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기념일을 축하할 만한 장소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이니까. 무언가 좋은 생각이 있는 거겠지.’

알폰스는 그녀가 아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준비성이 뛰어나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그를 믿고 걱정하지 않았다.

“도착했나 봅니다.”

곧 마차가 멈추어섰다. 알폰스가 먼저 내린 뒤 클로에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단순한 에스코트임에도 그의 눈빛과 손길에는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추스르며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린 클로에는 감탄하고 말았다.

“어머, 여긴……!”

거대한 성당이었다. 전생에 보아 왔던 평범한 성당들을 여덟 개쯤 합쳐 놓은 것과 맞먹을 정도였다. 높기도 몹시 높아서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끄트머리가 보였다.

고전적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는 성당은 벽면마다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조각으로 가득했다. 건축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는 클로에조차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동이 느껴졌다.

“성 마이노스 성당이군요!”

클로에의 말에 알폰스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름답고 위용 넘치는 성당에 직접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들어 본 적은 있었다. 무려 이백 년이나 되는 역사를 가진 곳으로, 무척 높은 문화적, 예술적 가치가 있기에 황실이 직접 보호하는 문화유적지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유명한 이곳은 언제나 많은 수의 관광객으로 북적인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클로에가 마차를 타고 와서 이곳에 들어오는 동안 그녀는 다른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분명 알폰스가 무슨 수를 썼겠구나.’

눈치가 좋은 클로에가 생각했다. 공작가는 대대로 황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부도 권력도 황실에 비해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문화유적지를 하루 빌리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성당 안에 들어섰다. 자신들 외의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안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강녕하셨습니까, 공작부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작부인.”

“당신들은……!”

클로에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수도 내에서 이름 높은 드레스 디자이너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었다.

문화유적지인 성당에 드레스 디자이너라니? 영문을 알 수 없는 조합에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하나 그는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그것이 그의 설명의 전부였다.

클로에는 더 알쏭달쏭해졌다. 하지만, 그는 즐거운 듯 보였고, 심지어 그의 얼굴에서 미미한 기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클로에는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로 했다.

클로에는 디자이너들과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을 따라갔다. 성당 안쪽의 작은 방에 들어가자, 꼭 분장실 같은 장소가 나왔다. 성당에 분장실이 있을 리가 없으니 이번 일을 위해 준비한 것일 거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정성스럽게 준비한 모양인걸.’

자리에 앉아 전문가들의 손에 몸을 맡기며 클로에는 생각했다.

공작부인으로서 오랜 시간과 공이 들어가는 단장에 익숙해진 클로에였으나 이번은 특히나 이상했다.

“역시 오늘 같은 날은 다이아몬드겠죠? 이 근사한 목걸이를 봐 주세요, 공작부인. 이 다이아몬드는 시에나산인데, 시에나에서 났던 다이아몬드들 중 최고의 크기로 기록에 올랐답니다. 오늘을 위해 공작님께서 특별히 구하신 거예요.”

“정말 아름답네요. 이 광채를 봐 주세요, 공작부인. 공작부인의 목선에 딱일 것 같아요…….”

“역시 피부가 하야셔서 이런 은은하고 산뜻한 색상이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이런 화장은 어떠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오늘 같은 날’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역시 결혼기념일을 뜻하는 걸까?

하나 수상쩍음이 절정에 달한 것은 디자이너들이 드레스를 가져왔을 때였다.

온갖 화려하고 값비싼 드레스들을 보아 왔기에 어지간한 화려함에는 놀라지 않게 된 클로에조차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새하얀 드레스였다. 수백 개는 족히 될 것 같은 작은 진주 알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평범한 조명 아래에서도 눈부시게 빛났다. 드레스가 어찌나 반짝이는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당의 바닥이 누렇게 보일 정도였다.

더군다나 길고 하늘하늘한 뒷단 때문에 네 명이나 되는 일꾼들이 짊어지고 들어와야만 했다. 들고 다니기는 힘들어도, 저걸 입고 걷는다면 분명 긴 치맛단이 은하수처럼 바닥을 수놓을 것이다.

말문을 잃은 채로 아름다운 드레스의 자태를 지켜보던 클로에가 겨우 말했다.

“이건…… 웨딩드레스가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이번엔 디자이너들이 놀랐다.

“네, 맞아요. 공작님께서는 공작부인과 작은 결혼식을 다시 한 번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작은 결혼식이라고요?”

“네. 설마 모르셨던 건가요?”

그동안 이상하게 여겨졌던 그 모든 것들의 퍼즐이 맞추어졌다.

클로에는 깨달았다. 알폰스는 이번 결혼기념일 이벤트로, ‘리마인드 웨딩’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그와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구나.’

물론 그와 결혼한 기억은 있었다. 그녀가 이 세계에 오면서, 이전의 클로에의 기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전의 클로에가 알폰스와 결혼식을 올릴 때의 기억은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그 추억은 그저 남의 것일 뿐이었다. 알폰스와 결혼식을 올린 사람은 자신이 아닌, 이전의 클로에였다.

‘설마 그런 내 입장을 신경 써 준 걸까? 나에게도 그와의 결혼의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가슴이 울렁였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통해 넘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섬세할까?’

“공작부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클로에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것을 느끼고 손부채질을 했다.

“설마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아니오, 그럴 리가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런 아름다운 드레스라니……. 무척 세련되고 섬세하군요. 고생 많았어요.”

“어머나, 아니에요. 호호호. 이 아이가 공작부인의 기쁨이 될 것을 생각하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답니다.”

클로에의 칭찬에, 그제야 디자이너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디자이너들의 도움을 받아 클로에는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썼다.

“세상에나……. 어쩜 이렇게나 고우세요?”

“눈처럼 흰 드레스에 면사포까지 두르시니 정말 단아하고 아름다우세요. 꼭 은방울꽃 같아요.”

그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원래도 미인이었지만, 그렇다고 절세미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청순하고 고아한 이미지에 어울리는 흰 드레스를 입고 신부 단장을 한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누구라도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클로에는 거울을 보았다. 이미 몇 년이나 매일 보고 살아온 자신의 얼굴이었기에 다른 사람들만큼 그 미모가 실감 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보기에도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미리 준비한 부케를 들려 주었다. 그것을 받아들자 다시 가슴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그와 결혼식을 올리는 거구나.’

뛰는 심장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클로에는 백합과 리시안셔스로 장식된 부케의 향을 깊게 들이쉬었다. 달콤한 향에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클로에는 안내에 따라 준비실에서 나와 홀로 향했다.

그곳에는 멋들어진 연미복을 차려입은 알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알폰스……. 이런 걸 준비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알폰스의 붉은 눈이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드십니까?”

클로에는 수줍게, 하지만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밝게 웃었다.

“네, 정말로…….”

“마음에 드실 줄 알았습니다.”

그가 대답하며 클로에에게 팔을 내밀었다. 클로에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붉은 융단 길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감미로운 오르간과 현악기 연주가 들려왔다. 성당 내부 여기저기를 장식한 꽃들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연단 앞에 가서 섰다. 그곳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사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유일신의 가호 아래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고, 아끼고, 지킬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신께서도 그대들을 굽어살피실 것입니다.”

사제가 신랑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제국의 결혼식 풍습에 따라 신부에게 반지를 전달하라는 의미였다.

알폰스는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결혼반지였다.

알폰스는 다정한 손길로 클로에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결혼을 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알폰스와. 다른 사람의 기억이 아닌, 자신의 기억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제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에요. 이런 것을 준비해 주어서 고마워요. 하지만 목이 메어 그 어느 것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이 알폰스는 다정히 미소 지었다.

그가 반지를 끼워 주던 손으로 조심스레 클로에의 뒷머리를 받쳤다. 그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곧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올 때 입었던 옷으로 환복을 하고 마차에 올랐다.

목이 메는 감동의 순간이 끝나자 클로에는 아침 새처럼 재잘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하셨어요? 전 꿈에도 몰랐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물론이죠. 마음에 들고말고요.”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의 오만하도록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투에 클로에는 풉 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그의 그런 모습을 사랑하게 된 것도 바로 그녀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때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알폰스가 놓칠 리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게……. 사실은 저도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서 당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당신의 선물을 받고 보니 제 선물이 너무나도 평범하게 느껴져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더 근사한 것을 준비할 걸 그랬는데……. 어쩐지 죄송하네요.”

클로에가 멋쩍게 말했다.

알폰스와 주변 사람들의 다정함 덕에 과거에 비하면 몰라보게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거부당하고 상처 입어 온 자존감이 완벽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특별한 선물을 받은 날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의 선물에 비해 클로에는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 매우 부족하게 느껴졌다.

알폰스는 그런 클로에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귀중하고 고결한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도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부족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평생이 걸려도 좋으니 그녀의 상처를 핥아 주고 감싸 주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상처에 그러해 주었듯이.

알폰스는 그녀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늘 제가 준비한 것은 제게 주어진 부인이라는 선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한 눈빛이 말해 주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제서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제일 하찮고 쓸데없는 선물을 주더라도 그는 기쁘게 지니고 다닐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나 신뢰를 주는 사람이었다.

클로에는 행복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최고의 결혼기념일 선물이었어요. 오늘의 일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잡은 알폰스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어 있었다. 그녀의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다정하게 입 맞춰 주었다.

공작저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클로에의 제일 소중한 친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포트넘 부인, 그리고 백작님. 로네펠트 부인과 후작님도?”

“결혼 축하해요, 공작부인! 그리고 결혼기념일도 축하드려요.”

“두 번째 결혼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에요. 또 한참 깨를 볶으셨겠어요.”

충실한 집사인 키엘도 주인 부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각하. 그리고 마님. 두 번째 결혼식 무척이나 축하드립니다. 각하의 명으로 작은 가든파티를 피로연으로 준비해 두었으니 마음껏 즐겨 주세요.”

“세상에……. 파티 준비는 안주인인 제가 해야 했던 일인데 말이에요.”

“각하께서 마님께는 비밀로 준비하라고 하셨답니다. 전혀 힘들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마님. 참, 피로연 정리 역시 저와 록우드 부인이 할 예정이니 마님께선 일은 전혀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즐기시고 쉬러 가시면 됩니다.”

“수고가 많았어요, 키엘. 언제나 고마워요.”

밤이 되도록 클로에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최고의 결혼기념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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