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37/39)

2장

꼬마 숙녀와 귀부인이 함께 회랑을 걸어가고 있었다.

대여섯 살은 되었을까? 작고 귀여운 꼬마 숙녀는 연령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다소곳하게 걸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는 두꺼운 책을 꼭 쥔 채였다.

소녀의 발걸음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녀의 구불거리는 화사한 금발이 찰랑였다. 아이답지 않은 몸가짐에도 불구하고 차갑거나 냉정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눈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원스럽게 큰 둥그스름한 눈매, 그리고 다정한 빛을 띤 진녹색 눈동자. 누가 봐도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감탄이 나올 만한 아이였다.

“훌륭하십니다, 아가씨. 정말 숙녀로서 흠잡으실 데가 없군요.”

소녀의 곁에서 함께 걷던 귀부인이 칭찬했다. 소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다 선생님 덕분이죠.”

“그런 겸손함까지……. 바텐베르크라는 이름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십니다. 아직 여섯 살밖에 되지 않으셨는데 어쩜 이렇게 훌륭하실까요? 각하와 공작부인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소녀가 수줍게 웃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있었다. 일순간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줄곧 차분하게 걷던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머니!”

드레스 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뛰어나가 소녀가 끌어안은 사람은 클로에였다. 아이는 어찌나 작은지 새틴 재질의 치맛자락에 폭하고 감싸질 정도였다.

클로에가 웃었다.

“에바, 오늘의 수업은 재미있었니?”

“네! 오늘은 세계사를 배웠어요. 적도의 열대지방이랑 또…… 동방의 많은 나라들에 대해서요.”

에바가 귀엽게 재잘댔다. 또래에 비해서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영락없이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자랑하는 어린아이였다.

“벌써 외국의 역사를? 우리 딸 정말 똑똑하네.”

“헤헤. 다 캐슬턴 선생님 덕분인걸요.”

“언제나 수고가 많아요, 캐슬턴 남작 부인. 에바가 그러기를 재미있고 꼼꼼하게 잘 지도해 주신다고 들었어요. 교양이 탁월하시다면서요.”

“과찬이십니다, 공작부인. 저의 모자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공녀께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시는 건 전부 공녀께서 영특하신 덕입니다.”

그때 단단하고 안정감 있는 온기가 클로에의 어깨를 감쌌다. 클로에는 누군지 돌아보지도 않았는데도 그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클로에를 끌어안고 있던 에바가 반가운 듯 외쳤다.

“아버지!”

그저 아내와 딸을 보러 왔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남작 부인은 그 위압감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하나 단 두 사람, 에바와 클로에만은 그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예. 예상보다 일이 금방 끝났기에.”

두 사람은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알폰스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남작 부인에게 말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오늘은 일찍 귀가해도 좋습니다. 오늘 공녀의 수업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아버지 말씀 들었지? 에바. 오늘은 파티가 있는 날이니 새로 단장하자. 옷도 갈아입고.”

“네! 어머니, 오늘 케이시와 마리아도 올까요?”

“네 친구들 말이지? 물론이지.”

에바는 또래의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들뜬 것 같았다. 클로에는 시녀에게 에바를 단장시키도록 지시한 뒤, 알폰스와 저택의 후원(後園)으로 향했다. 오늘의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가든파티는 소수의 절친한 사람들만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 클로에가 준비한 가든파티는 조금 달랐다. 공작가의 가신들을 치하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에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손님들마다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에 감탄했다.

“어쩜, 이렇게 커다란 후원은 처음 봐요.”

“저길 보세요, 작약으로 장식된 조형물이 있어요. 저 정도면 족히 수천 송이는 되겠는데요?”

“수도 한복판에 이렇게 거대한 저택이라니……. 과연 바텐베르크 공작가예요.”

“수도의 저택이 이 정도라면, 영지의 공작 성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요?”

정원은 시원한 초여름의 바람과 한껏 물오른 초목의 향기로 가득했다. 하인들이 바삐 다니며 손님들의 잔에 음료를 채워 주었으며, 한편에서는 출장 음악가들이 가볍고 경쾌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모두가 파티 요리 전문 셰프가 정성껏 준비한 저녁 만찬을 즐겼다. 만찬에는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운 바비큐와 송아지 안심, 트뤼프 소스를 곁들인 거위 요리와 샴페인, 클로에가 직접 준비했다는 열대과일을 곁들인 티 칵테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찬이 끝나자 파티의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가든파티는 무도회 등의 거창한 행사에 비해 편안한 자리였기에 귀부인들 역시 비교적 편한 모습으로 잔을 하나씩 든 채 카우치에 앉았다.

여성들의 외출을 불편하게 만드는 코르셋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클로에의 활약으로 인해 코르셋은 수년 전부터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귀부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드는 곳은 물론 클로에가 있는 자리였다. 이 가든파티의 주최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런 멋진 파티를 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공작부인.”

“맞아요. 게다가 저희 부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파티는 잘 즐기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럼과 코코넛밀크가 들어갔다는 티 칵테일이 너무 맛있었어요. 혹시 레시피를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신가요?”

“공작부인, 이번에 입으신 이브닝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워요. 크리놀린이나 버슬이 들어 있지 않은 자연스러운 라인이 무척 편안하고 우아해 보이네요. 혹시 어느 부티크에서 맞추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람들은 단순히 그녀의 영향력을 탐내고 두려워하여 그녀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존경받고 사랑받고 있었다.

그것은 공작부인이라는 그녀의 높은 지위 때문일 수도,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선도하는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패션 감각 때문일 수도, 이미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그녀의 사업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은 단지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클로에에게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은…….’

검고 곧은 머리카락을 가진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손에는 샴페인 잔을 쥔 채, 어색한 얼굴로 홀로 동떨어져 있었다.

클로에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리시 백작 부인이었다.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가신 가문 중 하나인 리시 백작가의 새신부라고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기에 혼자 있는 걸까? 그것도 저렇게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그 모습이 못내 신경이 쓰인 클로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귀부인들에게 말했다.

“리시 백작 부인께서는 혼자 계시네요. 번잡한 것이 맞지 않으신 걸까요?”

사교계 가십에 관심이 많은 다이어 백작 부인이 말을 받았다.

“그건 아니실 거예요. 그보다는 다소 수줍음을 타는 분이셔서 그렇지 않나 싶네요.”

“수줍음을 타신다고요?”

“네. 저번에 어느 다과회에서 뵈었는데, 수줍음이 아주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먼저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하시는 분이라고나 할까요. 원래 시골에서 지내시다가 백작님과 혼인해서 수도에 올라오신 지도 몇 주 되지 않으셨으니까 더 그럴 지도요. 아직은 낯선 수도보다 고향이 더 익숙하시겠죠.”

“그렇군요.”

“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분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번에 트리플 스위트에서 발매된 황제 폐하 탄신일 기념 한정 차는 정말 맛있었어요. 제가 트리플 스위트의 어마어마한 팬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던가요?”

다이어 백작 부인이 조잘조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나 클로에는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분…… 이라고요?”

“네. 솔직히 말해서 리시 백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분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공작부인과 다르게 말이죠.”

“맞아요. 그렇게 매력적인 성정을 가지신 분은 아니더라고요.”

다른 귀부인이 거들었다.

“게다가 전에 보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시는 분 같았어요. 그러니까, 삿된 말로 말더듬이라고나 할까요?”

“어머나, 정말요?”

“세상에, 귀족 여성이 우아하지 못하게 말더듬이라니, 저런…….”

“게다가 시골에서 오셔서 그런지 옷차림도 세련되지 못하시고요. 여러모로 공작부인과는 정반대의 품위를 가지신 분이라고나 할까요…….”

귀부인들이 호의적이지 못한 감정을 담아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듣고 클로에는 화가 났다. 그들이 클로에에 대해서는 무척 큰 호의와 신뢰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클로에가 단호한 태도로 그들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좋은 날이기에 어지간해선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군요. 여러분은 지금 리시 백작 부인을 불합리한 이유로 모욕하고 있어요. 시골에서 오셨다거나, 말을 더듬으시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인가요? 또,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인데 백작 부인께서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으시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시다니요. 그런 건 잘못된 행동이에요.”

“네?”

“아니, 공작부인. 저희는 그러려던 게…….”

“저,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언제나 다정하고 온화한 태도를 보이던 클로에가 날카롭게 잘못을 지적하자 귀부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클로에 바텐베르크였다. 제국의 단둘밖에 없는 공작부인이자 사교계 제일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며, 제국 안팎으로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아닌가.

그런 그녀가 자신이 주최한 가든파티에서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을 무릅쓰고 직언을 할 정도였으니 귀부인들의 실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했다.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특히 다이어 백작 부인께는 무척 실망스럽네요. 사교계 안팎의 소식을 많이 전달해 주시는 것은 좋지만 타인의 험담은 부디 삼가도록 하세요. 상대가 약자라면 더더욱이요.”

“고, 공작부인……. 정말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아서 실언을 했습니다.”

다이어 백작 부인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한 번은 파티로 인해 들뜨셔서 실수하신 걸로 생각하겠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하시길 바라요.”

“무, 물론이죠. 배려심에 무척 감사드려요.”

클로에는 리시 백작 부인을 흘끗 보았다. 아주 오래전의 자신의 생각이 났다. 또, 친구의 생각도 났다. 다른 세계에 있어 만날 수 없지만 친구로서 서로의 앞날을 빌어 주기로 했던 친구, 클로에.

‘이전의 클로에는 많은 실수를 했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그 아이도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었을지도 몰라.’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리시 백작 부인을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리시 백작 부인. 부군께서는 함께 오셨나요?”

리시 백작 부인은 두 번이나 놀랐다. 첫 번째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공작부인……. 아, 아, 안녕하세요. 머, 멋진 파티를 열어 주셔서 정말 가, 감사드려요. 아, 그, 그이 말씀이시군요……. 죄, 죄송하지만 그이는 오지 못했어요. 자, 잠시 영지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뭘요. 편한 마음으로 참석하시라고 연 파티인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말씨 덕인지 잔뜩 긴장했던 리시 백작 부인은 조금 편안한 얼굴을 했다.

한편 이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귀부인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쩜……. 공작부인께서는 어쩜 저렇게 배려심이 깊으실까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파티를 여는 것만 해도 힘드셨을 텐데 참가자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챙겨 주시다니요.”

“솔직히 공작부인씩이나 되시는 분이 리시 백작 부인을 도와주신다고 도움이 되는 것은 없을 텐데……. 공작부인은 정말 손익을 따지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시는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공작부인은 정말 자애롭고 생각이 깊은 분이시군요. 정말 존경스러워요.”

“지금 황실엔 여성이 없으니, 공작부인께서 제국의 모든 여성들의 귀감이시죠!”

한편 귀부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클로에가 말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이쪽으로 오셔서 함께하시겠어요? 수도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셨다고 들었어요. 백작 부인의 고향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제, 제 이야기를요?”

“아, 곤란하시다면 다른 이야기를 하셔도 괜찮아요. 그저 백작 부인과 말씀을 나누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답니다.”

“아, 아니에요. 전 그저 노, 놀라서 그만……. 얼마든지요, 고, 공작부인. 제 고향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내내 어두침침했던 리시 백작 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클로에는 무척 뿌듯하고 보람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백작 부인을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여러분, 인사하세요. 이쪽은 리시 백작 부인이세요. 리시 백작 부인, 이쪽은 제 파티의 손님이자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가신 가문의 안주인분들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리시 백작 부인.”

“정말 반가워요.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되셨다면서요? 꼭 뵙고 싶었어요.”

“리시 백작 부인, 우리 저번에 한번 봤죠? 그때 말이에요, 해로즈 백작 부인의 다과회에서…….”

클로에의 비호가 있다 보니, 아까 리시 백작 부인의 소극적인 태도와 말씨를 흉보던 부인들도 그녀에게 호의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귀부인들이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한 그때였다.

“……자, 차가 전부 준비되었어요.”

정원 한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 때문일까, 자리의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와, 멋져요.”

“오늘의 차는 어떤 차인가요?”

귀부인들이 사교를 다지듯이 어린 영애들 역시 자기들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어리면 다섯 살, 많아 봐야 일고여덟 살이나 될 것 같은 영애들 대여섯 명이 가든파티를 위해 한껏 단장한 채 모여 어른의 흉내를 내며 노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나올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이는 단연 에바였다.

“이 차는 목련차예요. 목련의 꽃잎을 말려서 만들었는데, 달콤하고 정말 좋은 향이 난답니다.”

에바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클로에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왜냐하면, 에바가 설명하는 톤이 자신과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그것을 클로에뿐만 아니라 다른 귀부인들 역시 느낀 것 같았다.

“어쩜, 공작 영애는 말도 공작부인처럼 하는군요.”

“저렇게 어린데 어쩜 저렇게 말을 잘할까요? 정말 영특하네요.”

“공작부인의 차에 대한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게 분명해요.”

사랑스럽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한 딸의 칭찬을 받는 건 무척 기쁜 일이었다.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역시 아이는 부모가 하는 일을 따라 하려고 하더라구요. 저와 그이가 티타임을 가지는 것을 보고 차에 관심을 가지더니, 이젠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 낼 수 있게 됐어요.”

딸이 자신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차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클로에는 에바가 물어보는 것마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이런저런 차도 맛보여 주었다.

아직 어린 에바의 건강을 고려해서 카페인이 들어 있는 차는 많이 마시지 못하도록 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에바는 카페인이 없는 허브 티 역시 좋아했다.

에바는 클로에가 가르쳐 주는 것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엄마 흉내를 내고, 티룸에서 놀고, 엄마 아빠와 함께 차를 마시던 에바는 마치 놀이처럼 차에 대해서 배웠다.

그 결과로, 에바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른들도 깜짝 놀랄 만한 차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어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 아이들은 티타임 놀이를 계속했다.

“어머, 차에 대해 정말 잘 아시는군요.”

“뭘요, 보통이랍니다. 자, 차가 식기 전에 어서들 드세요.”

“찻잔이 너무 예뻐요! 꽃이 그려져 있네요.”

“고마워요. 여기 그려져 있는 꽃은 제비꽃과 마리골드예요.”

“이 다구는 뭔가요? 바텐베르크 영애.”

“이것은 스트레이너랍니다. 이렇게 잔에 걸쳐서 찻잎을 걸러낼 때 쓰는 거예요.”

영애들은 어른 같은 말투와 몸짓을 흉내 냈다. 비록 안전을 위해서 뜨거운 물을 다루는 일은 전부 하녀가 도와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딸의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밀어 주려 하는 클로에 덕에, 에바는 자신만의 개인 다구도 갖고 있었다. 어린이용으로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작은 도자기 다구 세트였다.

그것을 처음 받았을 때, 에바가 얼마나 뛸 듯이 기뻐했던지. 그 어떠한 드레스나 장난감을 사 줬을 때도 보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딸을 보고 클로에와 알폰스는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일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영애가 말했다.

“너무너무 예뻐요. 정말 부러워요, 영애. 저도 부모님께 이런 걸 사 달라고 해야겠어요.”

“맞아요. 정말 작고 귀여워요. 어디에서 사셨어요?”

“이건 저희 어머니가 저를 위해 주문 제작해 주신 거예요.”

“주문 제작이라고요? 어머나……. 이거랑 똑같은 걸 갖고 싶은데…….”

클로에는 무심코 생각했다.

‘티파티 놀이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어린이용 다구 세트를 정식으로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몰라.’

요즘 어린이들이 종종 티파티 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든 생각이었다. 어린이들이 티파티 놀이를 이렇게나 좋아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차가 정말 맛있어요. 향긋하고 은은해요.”

“고마워요. 차에서 싱그러운 봄의 향이 느껴지실 거예요.”

이 모습을 본 귀부인들은 또 자지러졌다.

“들었어요? ‘싱그러운 봄의 향’이래요. 어휘력도 예사롭지가 않네요.”

“두 살은 더 많은 아이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겠는데요.”

“우리 아들이 공작 영애의 영특함을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요. 우리 아들은 여덟 살인데도 저렇게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는데…….”

“부끄럽네요. 에바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공작님과 공작부인도 독서를 많이 하신다고 들었어요. 역시 영특함도 부모를 닮나 봐요.”

아이들은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역시, 보고 들은 게 있어서일까. 그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잔을 들어 올리는 아이 역시도 에바였다.

“영애, 어쩜 그렇게 찻잔을 예쁘게 들어 올리세요?”

“어렵지 않아요.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자, 한 손으로는 소서를 감싸 쥐듯 쥐고……. 다른 손으로는 잔을 들어 올리는 거예요.”

차 예절을 가르쳐 준 기억은 없는데 어쩜 저렇게 잘 아는 걸까? 자신과 알폰스가 차 마시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에바의 모습이 떠올라서 클로에의 입술이 절로 호를 그렸다.

그런데…….

“이렇게요?”

“네! 잘하셨어요. 그리고 잔을 든 손의 새끼손가락은 꼭 들어야 해요.”

“새끼손가락을 꼭 들어야 한다고요?”

“네. 제일 중요한 부분이에요.”

‘응? 내가 그랬던가?’

클로에는 의아해졌다. 그렇게나 많이 차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사소한 습관이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귀부인들은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부인, 차를 드실 때 꼭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시나 봐요.”

“너무 귀여워요.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니요.”

클로에는 무척 민망해졌다.

“아하하…… 그랬나 봐요. 저도 몰랐던 사실이네요.”

아직 손힘이 부족한 영애들은 새끼손가락만 드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클로에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에바에게 새끼손가락을 드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영애들의 귀여운 놀이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어머?”

“저 아이는?”

바로 바텐베르크의 한 가신 집안의 어린 영랑이었다.

가신 집안들에 대해 놀랄 정도로 박식한 클로에는 그 아이를 알고 있었다. 런스퍼드 후작가의 외동아들 휴이로, 반년 전에 일곱 살 생일을 맞은 아이였다.

“휴이잖아요.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귀부인들이 관심 어린 태도로 수군거렸다.

휴이는 여자아이들이 티파티 놀이를 하고 있는 테이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아주 다가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신경을 끊고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귀부인들이 일곱 살짜리 꼬마애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채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어머, 휴이가 에바를 보고 있네요!”

누군가의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에바를요?”

“네. 에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네요.”

“어머나, 호호호. 휴이가 에바에게 호감이 있는 걸까요?”

아닌 게 아니라, 에바를 바라보는 휴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휴이는 젖살이 포동포동한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입가에 걸린 수줍은 미소도, 우물쭈물하는 태도도 영락없이 짝사랑하는 소년이었다.

예닐곱 살짜리 어린아이들 사이의 염문(?)은 원숙한 귀부인들의 즐거움이 되기에 충분했다.

“어쩜 좋아요, 공작부인. 에바가 정말 인기가 많네요.”

“그럴 만도 하죠. 부모님을 닮아서 아주 예쁜 데다가 착하고 똑똑하니까요.”

클로에는 무척 민망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겨우 일곱 살인데 이성 친구를 좋아하다니……. 요즘 아이들은 정말 조숙하네. 나는 엄마로서 어떻게 해야 하지? 응원해 줘야 하는 걸까? 아니, 아직 에바의 의사는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그때였다.

휴이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그의 젖살이 포동포동한 얼굴 위로 결심한 듯한 단호한 기색이 비쳤다. 그는 그대로 에바에게 다가갔다.

“어머!”

“뭘 하려는 걸까요?”

귀부인들이 수군거렸다.

티파티 놀이를 하던 여아들이 새로운 손님을 눈치챈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였다.

친구들에게 차에 대해 설명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에바의 소매를 다른 영애가 잡아당겼다. 영애가 에바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자 그제야 에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휴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크고 둥근, 호기심 어린 녹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휴이를 향했다.

멀리서만 지켜보던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휴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까 전에 했던 굳은 결심도 긴장감에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안녕? 에반젤린이지? 나는 휴이 런스퍼드야. 우…… 우리 저번에 봤지? 3월 달에…… 내 생일 파티에 왔었잖아.”

“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 제법인데요. 지난번의 만남을 강조해서 친근감을 주려고 하는군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주 정석적인 대사였어요.”

귀부인들이 흥미 어린 말투로 수군거렸다. 클로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큰 눈을 깜빡이던 에바가 생긋 웃었다.

“응, 맞아! 기억나. 그때 어머니랑 아버지랑 갔었어.”

“기억하는구나! 그때 생일 선물로 주었던 책, 정말 재밌었어. 기사들의 모험 이야기였지, 그치?”

“맞아. 다행이다. 나도 그 책 정말 좋아해. 다 읽으면 어머니께 부탁드려서 다음 권도 보내 줄게.”

“정말? 고마워! 아……. 놀고 있는데 내가 방해했네. 미안해. 저…… 티파티 놀이하는 거 맞지? 혹시 괜찮으면……. 나도 너희의 놀이에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려도 될까?”

귀부인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푸훕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심지어 이번엔 클로에도 함께였다.

일곱 살짜리 영랑은 제법 그럴싸하게 귀족 남성의 예법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클로에는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착하고,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에바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휴이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한가득 차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뻐하던 휴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의 시선은 에바의 얼굴이 아닌 그 너머의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두 발이 땅에 붙어 버린 듯이, 시선도 꼼짝하지도 못하도록 누군가가 묶어 버린 듯이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누가 봐도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거대한 맹수를 코앞에서 만난 것 같았다.

“어머?”

“휴이가 갑자기 왜 저럴까요?”

귀부인들이 의아해했다.

단 한 사람만이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직감했다. 바로 클로에였다.

클로에는 휴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바로…….

‘알폰스!’

그녀의 남편, 알폰스가 저 멀리에 서 있었다. 시선은 영애들의 티 테이블을 향하고 있는 채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휴이를 보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대단히 잘생긴 얼굴을 가진 알폰스 바텐베르크는 그 아름다움에 걸맞은 무게감을 타고났다.

사람들은 그의 눈이 아름답다고 찬송했으나 그와 동시에 두려워했다. 시리도록 냉정한 그 눈빛, 그 붉은 눈동자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겨우 일곱 살짜리 아이를. 그것도 호의적이지 않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으니 아이가 무서워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역시, 이럴 줄 알았다. 클로에는 골치가 아파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의 남편에게로 다가갔다.

“알폰스.”

그녀의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폰스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제야 얼어붙듯 굳어있던 휴이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휴이는 핏기가 채 다 돌아오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 미, 미안해! 나…… 나중에 다시 올게!”

“응? 알았어. 다음에 봐.”

어리둥절해하는 에바를 뒤로하고 휴이는 부리나케 도망치고 말았다.

클로에는 알폰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가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폰스, 어린아이를 괴롭히면 어떻게 해요?”

“괴롭히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봤을 뿐입니다.”

알폰스가 답지 않게 발뺌을 했다. 저런 단정한 얼굴로 이렇게 유치하게 굴다니. 클로에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애가 무서워할 줄 모르고 그러신 건 아닐 텐데요? 왜 어린애를 겁주고 그래요?”

그제야 알폰스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알폰스가 특유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인도 보셨지 않습니까. 저 사내아이가 에바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고 접근했습니다.”

“불순한 의도라니요? 휴이는 겨우 일곱 살이에요!”

“어리니까 더 문제가 되는 겁니다. 에바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성 교제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리단 말입니다.”

알폰스가 고집을 피웠다.

클로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소 알폰스는 에바의 앞에서는 무뚝뚝한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께 예의를 지켜라’ 라거나, ‘바텐베르크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거나 잔소리도 많은 편이었다.

어쩌면, 그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태도가 엄격한 모습밖에 없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알폰스는 에바를 매우 아끼고 있었다. 솔직히 팔불출이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에바가 처음으로 수를 놓은 손수건을 주었을 때에도, 딸에게는 그저 ‘수고가 많았다’ 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지만 뒤에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딸이 수를 놓아준 손수건이라고 보여 주고 다녔다. 그리고 물론 그 손수건은 지금도 그의 가슴주머니 속에 있었다.

클로에는 눈을 가늘게 뜨곤 알폰스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과잉보호하시더니 에바에게도 그러시는군요?”

“필요한 만큼의 보호를 했을 뿐입니다. 에바에게도, 부인께도.”

“어련하시겠어요. 아무튼,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건데, 다시는 에바의 친구를 겁주지 마세요. 한 번만 더 그러셨다가는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놀라울 정도로 세게 나오는 그녀의 태도의 알폰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우스운 듯, 귀여운 듯 웃음기를 띤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신다는 것은?”

클로에는 잠시 자신의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고민했다.

“……각방?”

반쯤은 농담으로 꺼낸 말인데 알폰스의 얼굴에서 웃음기와 여유가 사라졌다.

“으음.”

클로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풉 하고 튀어나오는 웃음을 상대의 기분을 위해 애써 삼키고, 그녀는 남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저의 무서움을 아셨으면 이제 돌아가 보시는 것이 좋겠어요. 어린아이 괴롭히기는 그만하시고요. 저는 파티의 주최자로서 할 일이 많은 몸이라서…….”

“괴롭힌 것이 아닙니다만…….”

“아, 네. 가서 가신들과 하시던 말씀 계속 나누세요, 공작님!”

알폰스는 그제야 인사 삼아 클로에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를 떠났다.

클로에는 휴이의 상태를 챙긴 뒤에 다시 귀부인들에게로 돌아가 파티 주최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파티가 끝난 뒤, 시녀장에게 정원을 정리하는 일을 지휘해 줄 것을 부탁하고 클로에는 에바를 챙기러 갔다.

“에바, 재미있게 놀았니?”

어머니를 닮은 에바의 녹색 눈이 반짝 빛났다. 에바는 쪼르르 달려와서 클로에의 손을 잡았다.

“네!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다들 제 티 세트를 칭찬해 주었어요. 아주 예쁘고 마음에 든대요. 다 어머니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어머니.”

클로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좋다니 엄마도 기쁘구나. 성 아그네스의 축일이 몇 주 남지 않았으니 그때도 다구를 사 줄게. 어떤 것이 좋겠니?”

“정말요? 와! 너무 좋아요! 저, 어머니가 쓰시는 파란색 무늬와 금장 찻잔이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그거랑 똑같은 걸 주세요!”

“어떤 건지 알겠어. 그럼 그것과 같은 디자인으로 네가 쓰기 좋은 크기를 주문할게. 어떠니?”

“정말 기뻐요! 어머니, 사랑해요.”

“나도 우리 딸을 정말 사랑한단다.”

클로에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자, 에바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를 끌어안고 뺨에 키스를 잔뜩 퍼부었다.

행복한 얼굴로 딸의 키스를 받던 클로에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클로에가 물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아까 런스퍼드의 휴이가 네게 말을 거는 걸 봤단다. 휴이랑 무슨 얘기를 했니?”

에바는 아까의 기억을 되살리느라 눈을 굴렸다.

“음……. 저랑 다른 아이들이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자기도 같이하고 싶다고 했었어요. 아마 그 애도 차에 관심이 있나 봐요.”

“그래?”

“네. 근데,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나중에 보자고 그러고 가 버리지 뭐예요……. 갑자기 저랑 놀기 싫어졌던 걸까요?”

클로에는 알폰스를 떠올렸다. 유치하게도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한테 진지하게 굴던 알폰스의 모습.

“에이, 설마. 누가 우리 딸이랑 놀고 싶지 않겠어. 분명 갑자기 배탈이라도 났던 게 아닐까?”

“아, 그런 걸까요? 어쩐지 얼굴이 갑자기 하얘졌었어요. 어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납득되는 이유를 찾은 에바가 기뻐했다. 애먼 휴이를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로 만들어 버린 클로에는 조금쯤 죄책감이 들었으나 곧 털어 버렸다.

“그래, 역시 그랬던 것 같구나. 에바에게 새 친구가 생긴 것 같네. 정말 잘됐어. 안 그러니?”

“에헤헤…….”

“새 친구는 마음에 드니? 어떤 아이인 것 같니?”

딸의 마음을 떠보려는 클로에의 노력이었다. 다행히도 여섯 살배기 딸은 솔직한 답을 주었다.

“으음……. 착한 아이인 것 같아요. 그리고 차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꼭 맛있는 차를 맛보게 해 주고 싶어요.”

“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네. 그리고 곱슬머리가 귀여워요.”

“그래? 그렇구나.”

클로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벌써 시간이 꽤 늦었구나, 에바. 10시에는 뭘 해야 할까?”

“씻고 환복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해요.”

“옳지. 역시 똑똑하구나, 우리 딸. 네 전담 하녀를 불러 줄게. 씻겨 주고 옷을 갈아입혀 줄 거야.”

“알았어요, 어머니.”

에바가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는 그런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다 좋은데, 우리 딸이 잊은 것이 하나 있는 것 같네. 안 그러니?”

“네?”

에바는 어머니를 닮은 눈을 잠시 동그랗게 떴다. 그랬다가, 곧 생각이 났다는 듯이 얼굴이 밝아졌다.

“어머니랑 아버지께 ‘잘 자요 키스’를 해드려야 해요.”

“정답! 자, 이리 온.”

에바는 고사리 같은 팔로 클로에를 폭 끌어안고는, 그녀의 양 뺨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자, 저쪽에 계신 아버지께도 인사드리고. ‘잘 자요 키스’ 도 잊지 말고. 알았지? 잘 자렴, 우리 딸! 내일 보자.”

“내일 봐요, 어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에바는 사랑스럽게 웃고는, 알폰스를 향해 달려갔다. 클로에는 그런 딸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알폰스에게서는 수려한 미모와 영리한 머리, 클로에에게서는 온화하고 순수한 웃음과 차에 대한 애정, 사업적 수완을 물려받은 에반젤린 바텐베르크는 어머니의 뒤를 잇는 훌륭한 티 블렌더로 성장했다.

제국에 차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유행시켰으며 대량생산을 시작했고, 훌륭한 차를 다수 만들어 낸 어머니의 공적을 발판 삼아 에반젤린은 어머니의 사업의 뒤를 이었다.

차와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열정을 지닌 에반젤린은 어머니의 사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확장시키고, 이후 수백 년 동안이나 사랑받는 이름 있는 차를 다수 만들어 내었다.

단순히 음료를 소개하고 생산해 낸 것을 넘어서, 제국 사람들의 식문화와 삶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친 모녀의 업적을 숱한 사람들이 오래오래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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