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외전)
목차
1장
2장
3장
4장
1장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었다. 날씨에 맞추어 얇은 차림을 한 클로에가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고마워요.”
클로에는 이런 사소한 도움조차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인사하자 직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닙니다, 공작부인.”
가게의 안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재잘댔다.
“공작부인은 역시 다정하시다니까.”
“두말하면 입 아프지.”
자신 소유의 가게, 트리플 스위트를 운영하기 시작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는 직원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일자리가 필요한 젊은이들에게 그녀 소유의 가게는 제일 선망 받는 직장이었다. 급료가 높은 것은 물론, 계절마다 충분한 휴가가 주어졌다. 병가는 당연한 일이었다.
“브라운, 오랜만의 출근이네요. 아이와 산모는 건강한가요?”
사무실로 들어가던 클로에가 직원들 중 한 사람한테 말을 걸었다. 직원이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산파가 애도, 애 엄마도 정말 건강하다고 하더군요. 다 공작부인께서 신경 써 주신 덕택입니다.”
“건강하다니 정말 잘됐어요. 저는 해 드린 것이 없는걸요.”
“해 주신 것이 없으시다니요? 출산휴가도 챙겨 주시고, 임신 선물도 많이 보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아내의 몸조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클로에 특유의 꼼꼼하고 다정한 심성은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가장 낮은 직급의 직원조차 놓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신경을 썼다.
클로에는 수줍음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아이와 산모의 안부에 대한 인사말을 몇 마디 더 나눈 뒤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서는 여진이 직원 몇 명에게 바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클로에를 보고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공작부인. 좋은 오후입니다.”
“좋은 오후예요, 여진.”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여진은 잠시 서류철을 뒤적이다가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혹시 피로하신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클로에가 얼른 웃어 보였다.
“조금이요. 요즘 따라 약간 피곤하네요.”
“지난주에 큰 건을 해결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헬베티아 공국으로의 수출 건 말입니다…….”
여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런가 봐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언제나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클로에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 그녀가 타고난 허약한 체질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여진 역시 종종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런 걱정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서 클로에는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일도 줄였는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럼 하려던 일 진행할까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여진이 서류철을 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서신에서 보셨겠지만, 이번에 티룸에서 출시할 여름 한정 신메뉴의 후보를 총 여섯 가지로 추렸습니다. 지금 공작부인의 앞에 놓여 있는 티 푸드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작부인께서 직접 시식해 보신 뒤 의견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메뉴는, 초콜릿퍼지 치즈케이크와 호두 당밀타르트, 그리고…….”
클로에는 자신의 앞을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레이스 접시 여섯 개와, 각각의 접시마다 담겨 있는 디저트들이 있었다. 요리의 시각적인 아름다움 역시 중요시하는 귀족들의 취향에 따라 정성 들여 플레이팅 되어있었다.
과연, 누가 봐도 감탄사가 나올 만큼 사랑스러운 간식들이었다. 초콜릿퍼지에는 먹음직스러운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새하얀 크렘당쥬는 붉은 라즈베리 퓌레로 장식되어 있었다.
클로에는 차를 좋아하지만 차와 함께하면 눈도 혀도 즐거울 만한 달콤한 디저트들도 정말 좋아했다.
그런 그녀에게 신메뉴 시식회는 언제나 행복한 일이었다. 시식을 할 때마다 그녀는 ‘그럼, 사양하지 않고…….’ 라고 말하며 빛나는 눈으로 포크를 집어 들곤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 번의 예외도 없이.
“…….”
그렇기에 이번 같은 일은 모두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런 훌륭한 디저트를 보고도 클로에는 기쁜 듯이 눈을 빛내지 않았다. 심지어 곧바로 포크를 집어 들지도 않았다.
여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부인?”
클로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못 드시는 식재료라도?”
“아뇨, 그건 아니에요. 다만, 으음……. 여름 메뉴치고는 전체적으로 너무 무거운 구성이 아닐까 싶어서요.”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초콜릿과 치즈, 당밀이라니 여름치고는 너무 묵직한 기색이 있지요.”
“네. 저는 좀 더 산뜻하고 상큼한 제철 과일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살구나 자두 같은…….”
여진은 살구와 자두 이야기를 하는 클로에의 입가에 아까만 해도 보이지 않던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 살구와 자두를 저렇게 좋아하셨던가?’
여진은 그런 생각을 언뜻 한 뒤 곧 머릿속 한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그녀가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여름 한정 메뉴의 후보군은 새로 뽑아 보는 것이 좋겠네요. 하지만, 이 메뉴들도 정말 훌륭하니 한번 시식해 보시지요. 여름 한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출시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아, 무, 물론이에요.”
클로에는 그제야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여섯 가지 메뉴 중 가장 가까이 있던 초콜릿퍼지 치즈케이크를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여진이 호언장담한 대로였다. 굉장히 달콤하고 부드러웠으며,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쓴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쩐지 너무 달았다. 게다가 너무 느끼했다. 그것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우웁!”
클로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벌떡 일어나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공작부인!”
여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클로에를 걱정한 직원 몇 명과, 클로에의 하녀가 부리나케 그녀를 쫓아갔다.
* * *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의 임신 소식은 대단히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소식은 사교계는 물론이고 수도 내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공작부인과 ‘그’ 공작, 그리고 그들 사이의 뜨겁고 드라마틱한 로맨스는 수도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혼인한 지 몇 년이 되도록 변치 않는 대단한 금슬은 어찌나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관심을 사는지, 제국 내에서는 사이가 좋은 부부를 보면 ‘꼭 공작 부부 같다’ ‘공작 부부처럼 사랑한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사이가 좋은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정말 천사처럼 사랑스러울 텐데요.”
“공작 부부의 미모와 지성을 이어받는다면 정말 대단한 인재가 나올 텐데 말이에요.”
물론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작 부부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이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발표했을 때 결론이 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공작부인의 태도 역시 그랬다.
제국인들은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이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지금의 생활과 내 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내 노력과 관계없이 얻지 못하는 것에 미련을 가지지 않을 거야.’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도 당당하고, 공작 역시 그녀의 편이니 아무도 감히 그녀를 탓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사람들은 더더욱 놀라워하고, 축하할 수밖에 없었다.
저택 상주 의사 샨탈이 클로에의 진찰 결과를 알렸다. 그녀의 진단은 임신 4주였다.
마님의 임신 소식에 제일 먼저 반응한 자는 물론 저택 내의 사용인들이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마님!”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클로에는 언제나 저택 내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안주인이었다. 진단을 받은 당일부터 축하 인사와 선물이 끊이지를 않았다.
심지어 바텐베르크 기사단에서까지 단체로 축하 인사를 올 정도였다. 저택 본관에 올 일이 거의 없는 기사들이 1층 홀에 도열해서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클로에는 너무나 감동해 말을 잇기 어려워했다.
이 일은 저택 내 사용인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는데, 특히 어린 하녀들이 무척이나 좋아했다.
기쁜 소식은 발도 없는데 천 리를 갔다. 귀족들도 앞다투어 축하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클로에와 제일 친한 귀부인들 역시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 것은 물론이었다.
“정말 잘됐어요, 어쩜 좋아요?”
“울지 마세요, 포트넘 부인.”
흐느끼던 포트넘 부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냈다.
“제가 뭐랬어요, 다 잘될 거라고 했잖아요. 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면 바텐베르크 부인처럼 좋은 사람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시는 게 당연해요. 아마 앞으로 여덟 명 정도 더 낳으실 거예요.”
함께 기뻐해 주는 친구의 마음이 무척 고마웠지만, 클로에는 내심 아홉 남매를 낳아 기르는 것은 너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누구보다 기쁜 사람들은 당사자였다.
의사에게서 임신 진단을 받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축하 선물과 인사를 받은 뒤에도 클로에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이의 아이를 갖다니.’
며칠 내내 이렇게 구름 위에 동동 떠 있는 기분인 것을 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이 내심 아이를 원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녀는 슬쩍 자기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요 며칠 사이에 자신의 배를 몇 번이나 만져 보았는지 모른다.
벌써부터 배 속에서 아기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태아는 겨우 콩알만 할 것이고, 손발도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때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클로에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번졌다.
“알폰스.”
손가락이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훑었다. 한없이 다정한 그의 손길이 좋아서 클로에는 참지 못한 웃음을 흘렸다.
알폰스는 몇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그녀의 티 없고 해사한 웃는 얼굴을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한때 한없이 냉혹하기만 했던 그의 붉은 눈동자는 그녀를 향할 때마다 몰라볼 정도로 부드러운 빛을 내고는 했다.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클로에는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럼요. 얼마나 좋은데요.”
“그건…….”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상체를 끌어당기며 자신의 몸을 돌렸다. 클로에가 알폰스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자세는 곧 알폰스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아이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배를 감싸 쥐고 있던 그녀의 가녀린 손 위로 그의 손이 덮였다.
“저 때문입니까?”
‘못 말리겠어, 정말.’
클로에는 쿡쿡 웃음을 삼켰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그가 이런 유치한 질투를 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가 얼마나 냉철하고 엄격한 정치가인지는 클로에 역시 지난 몇 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냉정했고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그에게 있어서 ‘장난기’나 ‘유치함’ 따위는 이 세상에서 제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아이한테 이렇게 유치하게 굴다니.
‘가신들은 이런 걸 본다면 다 기절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장난스러운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뺨에 무언가가 닿았던 것이다. 알폰스의 손길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눈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이렇게 유치하게 굴 때마다 가끔은 장난을 쳐서 그를 애타게 만들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기분도 좋겠다, 이번만큼은 특별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기로 했다.
“물론 아기 때문도 있지만……. 알폰스가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제일 좋죠.”
“정말입니까?”
“그럼요.”
클로에는 상체를 조금 뻗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당신과 함께 있어서 정말 기뻐요.”
그러고는 은근슬쩍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석상처럼 단단한 입가가 허물어졌다. 클로에는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대답과 입맞춤이 무척 만족스러웠는지 그가 표정을 완전히 정돈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알폰스가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을 구경하는 것은 클로에의 큰 즐거움이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입술 위에 화답의 입맞춤을 해 준 뒤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다만 워낙 연약하고 작은 존재인지라, 건강만이 걱정입니다.”
“아기 말이에요?”
“아니요, 부인을 말하는 겁니다.”
그의 어조는 진지했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클로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뭐가 작아요?”
클로에는 말라서 그렇지, 키는 충분히 평균 이상이었다. 손가락도 긴 편이라 포트넘 부인이나 로네펠트 부인과 손을 대보면 언제나 손끝이 삐죽 나오고는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무안해하거나 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꿋꿋하게 주장했다.
“임신과 출산은 인체에 큰 무리가 가는 일입니다.”
클로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걱정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녀의 몸은 선천적으로 허약했다. 건강관리에 힘쓰고 있기에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평균 미만이었다. 임신에도 몇 년이 걸려서 겨우 성공했을 정도가 아닌가.
알폰스 또한 그녀의 임신 소식을 그녀의 입에서 처음 전해 들었을 때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기쁘긴 했지만 그것은 임신 자체가 기쁘다기보다는 그녀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기쁜 쪽에 가까웠다.
그는 자손에 욕심이 없었다. 가문과 영지라면 노후에 믿을 만한 가신을 양자로 들여 물려주면 그만이다.
그녀가 그의 곁에 있고, 그녀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해하고, 그녀가 그를 사랑했다. 그로서는 더 이상 빼고 더할 것도 없이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원래도 그렇게 변화를 추구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그에게 아이는 곧 다가올 더 큰 행복에 대한 기대보다는 예상치 못한 변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클로에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알폰스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요.”
그녀의 손을 덮은 그의 손 위에, 그녀가 다른 손을 또다시 포개었다.
“언제나 저를 세상에서 제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알폰스, 당신인걸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좋았다.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임신에 대해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그녀는 그의 집무실에서 미처 치우지 않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책을 발견했다. 여러 권을 읽었는지 그녀가 집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책은 매번 달라지곤 했다. 게다가 각각의 책마다 열심히 읽은 듯한 밑줄과 메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가신의 아내로부터 그가 기혼자 가신에게 자문을 구하러 다닌다는 소식마저 들었다.
그의 그런 진지한 태도가 얼마나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임신은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으나 그녀 혼자만이 겪는 일이 아니라는 믿음은 큰 안정을 주었다.
“저 정말 건강 관리 열심히 할게요. 일도 줄이고, 무리하지 않고, 운동도 할 테니까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클로에가 부드럽게 말했다.
“저도 물론 지금도 여기서 무언가를 더 바라도 될까 싶을 정도로 행복하지만……. 그래도 아기는 분명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줄 거예요. 우리의 관계를 더 가깝고, 단단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나중에는 알폰스도 아기가 생겨서 정말 잘됐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알폰스는 생각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타입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떠한 변화도 달가워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어찌할 수 없다면 대비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삶에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그녀였다. 어느 날 그의 삶에 발을 들인 그녀를 언제나처럼 의심과 경계 어린 눈초리로 지켜보던 때가 있었다. 지금 와서는 우스울 정도로 옛날의 일이었다.
욕망도, 목적도 없던 그의 삶을 뒤바꿔 준 그녀, 그녀와 그녀가 불러일으킨 변화들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그리고 아이 역시 그녀가 가져온 변화였다.
알폰스는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자신보다도 그녀를 믿었다.
그녀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변화라면 신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 왔듯이.
알폰스는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정말입니다. 어느 때고 부인 자신을 우선하셔야 합니다. 아이가 아니라.”
“그럼요.”
클로에가 까르르 웃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 * *
물론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해로즈 부인이 클로에를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
“그 트리플 스위트의 소유주가 홍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다니 말이에요.”
그랬다. 임신을 하면 큰 문제가 있었는데, 홍차를 마시기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홍차의 성분이 태아에게 해를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클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클로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차 애호가였다. 사실은 중독자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녀는 차를 즐기기 시작한 뒤로 내내 차통의 찻잎을 떨어지게 두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제국에 오게 된 뒤 상황 파악을 하고 환경에 적응하던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어느 때고 곁에 차를 두었다.
심지어는 여행을 가거나, 외국으로 출장을 갈 때도 최소한의 차와 다구는 상비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런데, 앞으로 차를 마시지 못할 기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 달이라니.
제국 사람들에게 차를 소개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던 그녀가, 계급의 고저를 불문하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향긋한 차를 즐길 수 있게 만든 그녀가 정작 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다니.
새 생명에 대한 놀람과 기쁨이 잦아들자 현실적인 슬픔이 찾아왔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허브 티를 드시면 되는걸요.”
로네펠트 부인이 위로해 주었다.
“맞아요, 공작부인. 제가 얼마 전에 외국 사는 친척 덕에 정말 맛있는 레몬그라스 차를 구했어요. 함께 티타임을 가져요.”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시지 못하게 된 것은 차나무의 잎을 사용해 제조한 차뿐, 그 외의 재료로 만든 허브 티나 인퓨전은 마실 수 있었다.
실제로 포트넘 부인이 임신해서 홍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허브 티를 선물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주변인들의 위로해 주려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클로에가 웃었다.
“그래요. 다음에 한번 허브 티만을 다양하게 마셔 보는 티타임을 가지는 것도 즐겁겠어요.”
“공작부인께서는 또 새로운 차를 가져오셔서 저희를 놀라게 해 주시겠죠? 정말 기대되네요.”
귀부인들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하나 머리와 마음이 언제나 똑같이 노는 것은 아니었다.
“이 맛이 아니야.”
티룸에서 혼자만의 티타임을 가지던 클로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물론 허브 티도 맛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 맛이 아니야.”
허브 티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했다. 재료가 차나무 잎에 국한되지 않는 만큼 정말 다양한 성질과 다양한 맛과 향을 자랑했다.
그 하나하나마다 각자의 개성과 매력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카모마일이나 루이보스처럼 밀크티를 만들 수 있어 제법 그럴싸하게 홍차로 하는 티타임을 흉내낼 수 있는 종류도 있었다.
하지만 차를 정말 좋아하는 클로에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허브 티들이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것처럼 차나무로 만든 잎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는 맛있는 차가 그렇게나 많은데. 그 차들을 어떠한 것도 마실 수 없다니…….
클로에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부풀지 않고 납작한 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배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아가야, 엄마 힘낼게.”
배 속의 아기는 여전히 콩알만 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클로에는 왠지 아기가 화답하듯 꼬물거리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꼭 아기에게 위로를 받은 것만 같아서 그녀는 기운이 났다.
‘하지만…… 중요한 목표가 생겼어.’
클로에는 결심했다.
‘카페인을 제거한 차를 개발해 낼 거야. 임신이나 수유 중인 여성들도 차를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도록…….’
실제로 그녀의 전생의 세계에는 디카페인(decaffeinated) 차가 다양한 브랜드에서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카페인을 제거한 차는 카페인을 마실 수 없는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클로에는 출산 뒤 제일 먼저 디카페인 차 개발에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결심을 한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준비하고 신경 써야 할 것이 태산이군.’
알폰스는 물론 클로에가 걱정이었다. 그녀를 누구보다 믿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의 건강과 안위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허약해서 늘 걱정이었던 그녀가 심지어 홑몸이 아니게 되기까지 하다니.
임신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에 큰 무리가 가는 일이다. 그녀를 위해 임신 관련 책을 읽어 가며 공부하자 걱정되는 부분이 더욱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쯤 되니 안 그래도 허약한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 그의 자식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이런 생각은 옳지 않아.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지 않은가.’
알폰스는 고개를 휙휙 젓고는, 미세한 크기에 혼자서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태아에게 무용한 분노를 품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까.
그는 태아에게 분노의 마음을 품는 대신, 좀 더 생산적이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일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그는 클로에를 설득해서 그녀를 돕는 사용인의 숫자를 늘렸다.
기존에 그녀를 수행하는 그녀의 전속 하녀는 겨우 세 명이었다. 엘리, 니나, 로지가 그들이었다. 심지어 직속 시녀는 아예 록우드 자작 부인 한 명뿐이었다.
대륙에서 제일 위대한 국가인 제국의, 제국에서도 제일 이름 높은 가문인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안주인에게 전속 사용인 네 명은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물론 그들이 떠맡은 임무에 비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대적으로 그랬다. 예컨대 윈체스터 공작부인은 시녀만 네 명, 하녀는 스무 명 넘게 이끌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알폰스는 몇 번이나 클로에에게 하녀의 숫자를 늘리라고 설득한 바 있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에 응하지 않았다.
‘전 정말 괜찮아요, 알폰스. 제게는 여진도 있고, 전속 하녀가 아니라도 제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은걸요. 게다가 지금의 시녀와 하녀들이 워낙 일을 잘해 주어서 저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알폰스가 멈칫했다. 그는 배려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오로지 클로에만을 상대할 때만은 자신의 말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듯 클로에가 웃었다.
‘다른 사람들 시선은 상관없어요. 데리고 다니는 하녀의 숫자가 몇 명이냐로 저를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지나치게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거야말로 거추장스럽고 멋쩍은걸요. 너무 눈에 띄니까요.’
물론 클로에, 그녀 역시 한때는 타인의 시선을 대단히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타인의 부탁도 단 한 번도 제대로 거절하지 못했고, 결국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습관은 전생의 세계에 버리고 오기로 결심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말에 감탄했다.
누구보다 마음 약하고 여린 그녀의 부드러운 겉껍질 속에 감싸진 단단하고 튼튼한 알맹이가 드러나는 이런 순간을 좋아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또 존경할 만한 사람인지.
알폰스는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었다.
‘부인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때는 그녀의 뜻에 따랐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임신을 한 그녀를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알폰스는 다시 한 번 클로에에게 시녀와 하녀를 증원하는 일을 제안했다.
클로에는 물론 처음에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알폰스가 조금 더 설득하자 어느새 그녀 또한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점점 배가 부르고 몸이 무거워지겠지. 게다가 아기를 낳으면 낳은 대로 신경 쓸 일이 많아질 거고. 지금의 하녀들과 록우드 부인에게 과도한 일거리를 떠넘길 수는 없어.’
결국 그녀는 고민 끝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그제야 알폰스의 근심 어린 눈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눈매를 곱게 접으며, 클로에의 코끝에 입 맞췄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사람이 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부인. 킴브렐 남작가의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마님. 엘리자베스 캔들러입니다. 리즈라고 불러 주십시오.”
“사라 조던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님.”
시녀 1명과 하녀 2명. 모두 합쳐서 시녀 2명과 하녀 5명이었다.
여전히 윈체스터 공작부인에 비하면 턱도 없이 부족한 숫자였지만, 클로에는 차고도 넘친다고 생각했다.
“잘 부탁해요. 나도, 기존의 사람들도 편히 생각해 주길 바라요. 적응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려워하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요.”
그녀가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신입 하녀 사라는 생각했다.
‘내가 과연 공작부인씩이나 되시는 분을 잘 모실 수 있을까?’
물론 사라 역시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그녀가 낮은 사람에게도 친절하며,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직장에 워낙 만족하고 있어서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고는 아무도 이직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소문은 수도에도 아주 자자했다.
그래서 바텐베르크 공작가는 많은 수의 전문 하녀, 하인들의 선망의 직장이었다. 문제는 아무도 이직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일자리가 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몇 년 만에 공작부인의 전속 하녀를 증원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쟁률은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채용 희망자의 줄이 공작저의 홀에 가득 차다 못해 공작저 정원부터 대문 밖까지 이어졌다. 사라 역시 그 어떠한 곳에서도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면접과 검토를 도맡아 한 공작부인의 시녀와 하녀들이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우다가 전원 녹초가 되어 공작부인이 한 사람만 빼고 전원 휴가를 줬다는 말마저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은 사람들이었다. 사라의 경력이 조금만 모자랐어도 이곳에 일자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어. 내가 설마 공작부인을 모시게 될 줄은……. 그것도 그 유명한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신걸.’
그녀는 조심스럽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새로운 마님을 흘끗 보았다.
‘그런데……. 공작부인이라고 하기에 까다로우실 줄 알았는데.’
클로에의 인망과 업적이야 유명했으나 어쨌든 귀족은 귀족이었다. 많은 수의 귀족들을 가까이서 접해 본 사라는 귀족들 특유의 까다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어쩐지…….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지? 정말 웃는 얼굴이 따뜻한 분이셔…….’
처음으로 만난 공작부인은, 소문대로 미인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선량하고 맑은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터져나가는 경쟁률과 고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 지원을 한 보람이 있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사라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예의 있게 고개를 숙였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마님을 보며 얼굴을 붉힌 거야?’
지난 몇 년 동안 엘리는 많이 컸다. 자그맣던 키도 훌쩍 한 뼘은 자랐다.
생김새는 몰라볼 정도 변했지만, 엘리의 마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그대로였다.
‘경쟁자가 3명이나 늘다니……. 난 정말 어떻게 해.’
엘리는 너무나 속이 쓰렸다. 그녀는 경쟁자(?)에 대한 경계와 질투를 담은 시선으로 신참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왠지 등골이 시린데……. 감기인가?’
사라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문질렀다.
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마님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나인걸. 절대 지지 않을 거야. 마님의 곁에 제일 오래 있었던 사람은 나니까 말이야.’
하녀와 시녀가 늘어난 덕에 티타임도 더 복작복작해졌다.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클로에이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차는 다른 사람과 함께 마셔야 더 맛이 좋아.’
비록 허브 티뿐인 티타임이지만 클로에는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이 정도로 끝났으면 모든 게 좋았을 텐데.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호위 기사의 숫자도 늘리도록 합시다.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호위 기사를 늘리자는 알폰스의 의견에 이번에도 클로에는 받아들였다. 그의 걱정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팔불출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임산부의 영양 공급은 중요합니다. 부인의 특별한 식단을 위한 상주 요리사와 주방 하녀를 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주 의사를 몇 명 더 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이 일에 적합한 인재의 목록을 작성해 두었습니다.”
“좋은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임산부와 아이의 심신 안정에 좋다고 합니다. 상주 음악가와 상주 화가, 상주 무용가를 들이는 것이…….”
“알폰스!”
이쯤 되니 클로에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클로에는 부담스럽다거나, 이미 공작가에는 사용인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서 더 이상의 증원은 필요 없다거나, 무용 같은 것은 극장에 가서 봐도 충분하다는 말로 그를 설득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알폰스는 그녀에게만은 독단적인 남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반대하는 일에 괜한 고집을 피워 그녀의 속을 썩이는 일은 없었다.
“그렇습니까. 부인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깨가 왠지 모르게 조금 처진 것처럼 보인 것은, 자신의 착각이 아닐 것이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그녀는 결국 그런 남편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 그를 꼬옥 안아 주고 말았다.
곧 입덧을 시작한 클로에는 먹을 수 있는 요리의 종류가 줄어들었다. 특히 고기 냄새와 기름기에 예민해져서, 평소에는 잘 먹던 고기 요리에 손도 대려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식사량이 많은 편이 아닌 데다 마르기까지 해서 그녀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하던 알폰스였는데, 이렇게 되니 그의 걱정이 태산이었다.
알폰스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먹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면서 이렇게 묻고는 했다.
“혹시 드시고 싶으신 것이 없습니까?”
“괜찮아요, 저 배 안 고파요.”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클로에는 고민했다. 사실, 그녀도 먹고 싶은 것이 있기는 있었다.
“요즘은…… 왠지 매운 것이 먹고 싶어요. 칼칼하고…… 시원하고…… 먹으면 속이 확 풀리는 거 있잖아요.”
“예? 속이 확 풀리는 거라고요?”
“네. 매운탕이나, 육개장이나……. 순두부찌개 같은 거요.”
“예?”
드물게 알폰스는 당황했다.
‘속이 확 풀린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그리고 매운 음식이 어떻게 시원할 수가 있지?’
게다가 매운탕은 뭐고, 순두부찌개란 또 뭐란 말인가? 그로서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요리였다.
그가 혼란에 빠진 것과 별개로 클로에는 진지했다.
사실 그녀는 이곳에 온 뒤로 한식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느껴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매운 음식을 잘 먹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매운 음식을 일부러 찾아 먹어 본 적도 없었다.
한데 임신을 하자 난데없이 전생의 세계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머리에 맴도는 것이었다.
‘고기 요리는 됐으니, 매운 국물이나 원 없이 먹어 봤으면…….’
며칠째 입맛이 없어서 차려진 식탁만 보면 기분이 가라앉을 정도였는데. 매운 음식 생각을 하니 신기하게도 간만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낯선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클로에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알폰스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러한 요리들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말이다.
“말씀하신 것들은 전부 구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정말 그래 주실 수 있어요?”
언제는 먹고 싶은 것을 물어봐도 괜찮다고만 하더니, 클로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녀가 그렇게 기뻐해 주기만 한다면 알폰스는 세상 반대편까지 가서라도 그녀가 먹고 싶은 것을 구해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키엘을 통해 요리장에게 식단을 조금 바꿀 것을 지시했다. 늘 먹던 고기 요리는 최소화하거나 기름기가 적은 부위로 바꾸고, 대신 클로에를 위한 매운 요리를 매 끼니 준비하도록 했다.
덕분에 공작가의 요리장은 골머리를 싸맸다. 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매운맛을 즐기지 않았고, 따라서 제국의 요리 중에도 매운 요리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맵지 않은 제국의 요리에 매운 향신료를 추가하는 정도로는 클로에가 만족할 리가 없었다.
“이 요리는 어떠십니까? 포타주 수프에 향신료를 곁들여 맵게 만든 것입니다.”
수프를 입에 떠 넣은 클로에의 얼굴이 아리송해졌다.
“매운 줄 잘 모르겠어요.”
“네? 그럴 리가요. 어마어마하게 매운데요.”
그녀의 말에 요리장은 기겁했다. 이 수프만 해도 매운 요리에 익숙지 않은 제국인들의 입맛에는 무척 매운 요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을 도전해도 클로에는 계속 ‘별로 맵지 않다’는 반응만 보이니, 요리장은 새로운 도전을 해 나갈 수밖에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제국에는 언제나 외국인이 많고, 따라서 외국 문물을 접하는 것도 비교적 쉽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요리장은 돌파구를 외국의 요리에서 찾아냈다.
“합스부르크 왕국식 굴라쉬 수프입니다. 전통적인 방식보다 더 맵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은 클로에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머! 맛있어요. 적당히 매콤해서 입맛이 도는걸요! 고생이 많았어요, 주방장.”
“……정말 감사합니다.”
수많은 시도 끝에 안주인의 인정을 받은 요리장은 감동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의 입맛에 쏙 맞는 매운 요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던가?
한편, 이 시간 부엌에서는.
“매워!”
“누구 물 없어?”
“혀에 감각이 없어!”
저택의 주인이 식사를 한 뒤 남은 요리의 뒤처리는 사용인들의 몫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부엌 하녀들.
그녀들에게는 요리장이 저택의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요리한 음식을 제일 먼저 맛볼 기회가 주어졌다. 비록 남이 먹고 남긴 것뿐이지만 부엌 하녀들은 이 시간을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
하나 저택의 주인의 입맛이 독특한 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을 양동이째로 들이켜던 애슐리가 말했다.
“매워! 이거 사실 요리가 아니라 독극물 아니야?”
다른 부엌 하녀도 거들었다.
“아무리 마님께서 매운 요리를 특별 지시하셨다고 해도 이건 지나치지 않아? 사람이 어떻게 이런 걸 먹을 수 있어?”
“마님께서 괜찮으실까 걱정돼. 이런 무시무시한 것을 드시다니……. 안 그래도 연약한 분이신데.”
현재 공작저에서의 클로에의 인기는 두말하면 입 아플 수준이었지만 부엌 하녀들과 클로에의 유대는 그 사이에서도 각별했다.
부엌 하녀들은 클로에가 외롭던 시기부터 그녀를 지지해 주었고, 클로에가 공작저에서의 영향력과 권력을 되찾는 과정에도 큰 역할을 해 주었으면서, 클로에 역시 그들을 특별히 아껴서 차를 우리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후 트리플 스위트 사업을 진행하면서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에 부엌일의 전문가인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부엌 하녀들은 그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클로에를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했다.
부엌 하녀들이 클로에의 안위를 걱정하던 그때였다. 식당으로 서빙을 다녀온 하녀들이 수레를 끌고 부엌에 돌아왔다.
“재클린, 다녀왔어? 안 그래도 우리 모두 마님을 걱정하던 참이야. 마님께서도 이걸 맛보셨어?”
애슐리가 얼른 달려가서 재클린에게 말을 걸었다.
재클린은 왠지 모르게 조금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가 성급하게 떠들어 댔다.
“뭐라고 하셨어? 우리가 지금 이걸 나눠 먹어 봤는데 진짜 너무 매워서 먹을 수가 없더라. 이 정도면 요리가 아니라 독극물이던걸. 마님께서도 너무 매워서 고생하신 거 아닐지 난 정말 걱정이…….”
“마님께서는……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
“뭐?”
“마님께서 그러시기를…….”
재클린이 명확히 떨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적당히 매콤해서 입맛이 돈다’, 고…….”
“…….”
“…….”
부엌 하녀들은 자신들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적당히 매콤해서 입맛이 돈다’고? 그 말이 방금 자신들이 맛본 그 요리에 대한 감상이 맞단 말인가?
“그…… 그럴 리가 없어. 다른 요리에 대한 감상을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재클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마님께서는 이 수프를 드시고 기뻐하셨어. 매워하시는 기색 하나 없으셨어.”
“세상에…….”
마님에 대한 걱정과 이런 요리를 한 요리장에 대한 불만으로 떠들썩하던 부엌이 단박에 가라앉았다.
모두가 말이 없었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마님께서는 강한 분이시구나……!’
‘예전부터 알고 있기는 했지만, 가녀린 모습 뒤엔 엄청난 강인함을 품고 계신 분이야……!’
쓰나미처럼 부엌 내부를 휩쓸고 지나간 충격이 가시자, 부엌 하녀들이 하나둘 입을 열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마님께서는 정말 멋진 분이야, 그치?”
“맞아. 한때는 다정하기만 하신 줄 알았는데 사실 정말 멋있고 위엄 있는 분이야.”
“나도 그렇게 멋있고 강한 여성이 되고 싶다.”
한편 클로에는 굴라쉬 수프가 꽤 마음에 들어서 정말 오랜만에 두 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당연히 한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새콤한 토마토퓌레의 맛과 매콤한 향신료의 향이 구미를 당겼다.
‘전생에 먹었던 매운 라면이랑 비슷한 것 같아. 아니, 그거보다는 조금 덜 매우려나?’
클로에는 부른 배를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추억에 잠겼다.
알폰스와 요리장의 노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클로에가 말했던 ‘매운탕’이니, ‘골뱅이무침’이니 하는 요리를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과, 그녀의 고향이 이곳의 ‘청’이라는 국가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요리 역시 청의 전통 음식과 흡사하겠지.’
그렇게 추측한 알폰스는 청의 요리와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 * *
청은 작고 먼 나라였다. 온에 비해 그렇게 알려진 곳도 아니었다. 온의 요리를 취급하는 요리점은 몇 년 전부터 수도에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청의 요리를 다루는 곳은 없었다.
전통적으로 서방과 동방 간의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국에서 온도 아니고 청의 전통음식의 요리법을 찾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
단, 몇 년 전이었다면 말이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지난 수년간 클로에와 황실의 무던한 노력으로 서방과 동방은 점점 더 온화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자연히 그 사이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몇 년 전에는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유학이나 일 같은 문제로 수도에 거주하고 있는 청 사람도 제법 있었던 것이다.
알폰스는 제국 내에서 찾을 수 없다면 청 본토에까지 사람을 보낼 마음을 먹고 예산까지 준비해 두었다. 하나 예상외로 어렵지 않게 청 요리에 박식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요리법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에는 식재료를 구비할 차례였다. 이것 역시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동방의 이국적인 문화가 유행하면서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하는 상단이 많았다.
그리하여 알폰스와 그의 충실한 요리장은 기대보다 짧은 시간 내에 청의 요리를 클로에에게 대령할 수 있었다.
“어머!”
클로에는 감격했다. 이 세계에 온 뒤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요리가 눈앞에 있었다.
틀림없었다. 비록 눈에 익은 뚝배기가 아니라 튤립이 그려진 크림색 도자기 수프 접시에 담겨 있긴 했지만…… 이건 분명히 매운탕이었다.
코를 찌르는 매콤한 냄새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새빨간 국물의 그리웠던 자태에 위장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꼭 마법에 걸린 것처럼 스푼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매운탕에서 눈을 떼고 정면의 사람을 마주 보았다.
“알폰스, 이 귀한 걸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정말 고마워요.”
클로에의 기쁜 듯한 얼굴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던 알폰스가 손짓했다.
“식겠습니다. 드시고 이야기 하십시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클로에는 냉큼 매운탕을 한 스푼 떠먹었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야?’
국물은 혀가 델 듯 뜨거웠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전생에는 매운탕 좋아하시는 부장님 덕에 회식 때나 먹어 본 요리인데 뭐가 이렇게 맛있는지. 혀 위에서 고추장의 단맛과 고춧가루의 감칠맛, 생선 살의 고소한 맛까지 하나하나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 맛있다. 어쩜 이렇게 맛있지?’
그래도 한국에서 만든 매운탕이 아니니 맛이 좀 덜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재료를 좋은 것을 써서 그런지 오히려 더 맛있는 것 같았다. 회식 때 먹었던 우럭 매운탕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소고기는 그렇게 입도 대기 싫었는데 생선은 또 어쩜 이렇게 맛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살짝 단단해 씹는 맛이 있지만 씹을 때마다 혀끝에 녹아드는 지방의 맛은 먹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었다.
클로에는 순식간에 매운탕을 두 그릇 비웠다. 이마에 땀이 배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먹었다.
한편,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클로에가 저렇게까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차를 제외한 음식 중에서는 처음인 것 같았다.
입덧으로 식사를 못 하던 아내가 이렇게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은 어쩜 저렇게 귀여운지. 만족감이 가슴속을 가득히 채웠다. 이런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그는 매일 새로운 청의 전통요리를 준비해 바칠 수 있었다.
“알폰스, 알폰스도 드셔야죠.”
클로에가 그렇게 말한 뒤에야 알폰스는 자신이 스푼조차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알폰스는 자신의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매운탕이 다 식어 가고 있었다.
클로에는 만족스러운 듯 의자에 상체를 기댔다. 그녀가 권했다.
“정말, 정말 맛있어요. 알폰스도 분명 마음에 들 거예요. 얼른 드셔 보세요.”
저렇게 예쁜 아내가 권하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사실, 그 역시 그녀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이 요리의 맛이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그럼 기꺼이.”
알폰스는 단정하게 웃으면서 스푼을 들었다. 그가 매운탕 한 스푼을 떠서 입 안에 넣었다.
한편, 이 시간 부엌에서는.
“요리장님은 대체 뭘 만든 거야?”
온 부엌에 매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양파 300개를 한꺼번에 다지기라도 했나? 눈 매워 죽겠어.”
“눈물이 안 멈춰.”
“리사, 여기 수건 받아. 이걸로 얼굴을 싸매고 있으면 낫더라.”
부엌 하녀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일정 거리를 둔 채 매운탕이 가득 든 스튜 냄비를 둘러싸고 그녀들이 수군거렸다.
“대체 뭐야, 저 지옥에서 올라온 용암 수프는?”
“국물이 완전 새빨간데 토마토 퓌레를 넣은 거야?”
“아무리 봐도 토마토 수프 같지는 않은데…….”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 맞아?”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이 냄비에 닿았다. 냄비 안에서는 새빨간 매운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 * *
공작저 내의 그 어떤 사람도 매운탕을 한 스푼 이상 먹지 못했다. 클로에를 제외하고는.
아니, 클로에 다음으로 많이 먹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알폰스였다. 그는 기뻐하는 클로에의 눈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릇을 반 정도 비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배가 부르다고 물리고 말았다.
요리장의 혼신의 힘이 담긴 매운탕은 일종의 벌칙 게임처럼 공작저를 떠돌아다녔다. 그 매운탕을 맛본 사람 모두가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저택을 맴돌았던 것이다.
그 불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키엘뿐이었다. 용암 수프의 악명을 일찌감치 들은 그는 눈치 좋게 매운탕을 피해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저택 내의 사용인들은 새삼스럽게 공작가의 주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느꼈다.
“역시 마님과 주인님은 대단하신 분이야. 정말 존경스러워.”
“원래 존경했지만 더 존경하게 됐어.”
어쨌든 클로에가 무척 좋아했기에 알폰스는 다양한 한식을 꾸준히 공수했다. 그중에서는 매운탕처럼 매운 것도 있었지만 갈비찜처럼 맵지 않은 것도 있었고, 이런 맵지 않은 요리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평이었다.
클로에는 즐겁게 생각했다.
‘한식 요리점을 열어 볼까? 잘될지도 몰라.’
공작가가 동방의 작고 존재감 없는 나라 ‘청’의 요리를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바텐베르크 공작가는 제국에서 황실 다음, 아니 어쩌면 황실과 맞먹을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가문이었고, 공작부인은 사교계를 주름잡는 트렌드세터이기도 했다. 수도의 모든 귀족들이 공작 부부가 무엇을 즐기고 또 장차 무엇을 유행시킬지 궁금해했다.
“이것이 바텐베르크 부부가 요즘 즐기는 요리래요. 사교계에서는 장차 이게 유행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윈체스터 공작부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윈체스터 공작이 반백의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오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매운탕’이란 말이오?”
“네, 바로 그거예요.”
“부인 덕에 귀한 것을 일찍부터 맛볼 수 있게 되었구려. 그 바텐베르크가 즐기는 것이라면 틀림없는 진미이겠지. 아주 기대되는구려.”
윈체스터 공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성급하게 스푼을 들었다. 공작부인 역시 따라서 스푼을 들며 말했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세요.”
“허허, 당신은 걱정도 참……. 어이쿠!”
“무, 무슨 일이세요?”
“아이고, 매워! 아이고!”
윈체스터 공작가에 일어난 작은 소동은 곧 진정되었다. 윈체스터 공작이 채신머리없이 양동이째로 물을 들이켰다는 소문을 남기고 말이다.
“휴우.”
클로에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알폰스가 물었다.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저…… 살이 찐 거 같아요.”
클로에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최근에 너무 열심히 먹었나 봐요. 알폰스가 보기에는 어때요? 저, 아무래도 살찐 거 같죠?”
알폰스가 진중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곰곰이 살피던 그가 대답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살의 질량이 증가하시긴 했습니다.”
“정말요? 알폰스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여요?”
클로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질량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뭐 어떻습니까. 부인의 태내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의 무게만큼 체중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그런데요…….”
클로에가 물끄러미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쏙 들어가 있던 그녀의 배도 조금씩 부풀어 올라, 이젠 겉으로 보기에도 제법 임산부 티가 났다.
“배 말고 다른 데에도 살이 찌는 것 같은걸요.”
클로에가 부끄러운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알폰스가 픽 웃었다.
“저는 부인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 목소리에 푹 빠져 있던 클로에는 그의 손길이 제 허리를 야릇하게 쓸어 올리자 흠칫 놀랐다.
“으음.”
그녀의 귀여운 반응을 즐기던 알폰스가 속삭였다.
“이렇게나 아름답기만 합니다만.”
“알폰스, 당신도 참…….”
“오히려 더 찌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부인이 건강한 편이 좋습니다.”
클로에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정말로 더 쪄도 돼요?”
“부인의 몸인데, 왜 제게 허락을 맡으시는 겁니까.”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살이 아주 많이 쪄도…… 알폰스의 눈에는 예뻐 보일까요?”
“물론입니다. 어느 때라도.”
알폰스가 다정한 눈길로,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오랜 경험으로, 그가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클로에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의 말을 믿었다.
가슴속에 따뜻한 온기가 번지는 것만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래, 알폰스 눈에만 예쁘면 됐지. 내가 무슨 걱정을 했던 걸까?’
그러고 있는데 몸이 달랑 들어 올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머?”
알폰스가 그녀를 안아 들고 걷고 있었다. 어디를 향해서냐면, 당연히 침대를 향해서.
그의 의도를 눈치챈 클로에가 얼굴을 붉혔다. 침대에 곱게 누우며 그녀가 말했다.
“음흉해요, 정말. 아기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요.”
“저번 주에 의사에게 허락도 받지 않았습니까.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괜찮다고.”
“그, 그건 그렇지만…….”
넉 달 동안의 금욕이 길긴 길었던 모양이었다. 의사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폰스는 클로에를 탐했다. 목이 말라 죽기 직전인 사람처럼 그녀에게 목말라 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사실 그가 목말라 하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녀뿐이라는 것이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넉 달의 금욕이 견디기 어려웠던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알폰스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렇지만, 그다음은 뭡니까?”
“……짓궂으시긴.”
클로에가 토라진 듯 말했다.
알폰스는 눈치가 뛰어났다. 게다가 그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는 쿡쿡 낮은 소리로 웃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리하시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사근사근 속삭이는 어조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그리고 지난 넉 달 동안 그녀 역시 그의 온기를 얼마나 바라 왔는지…….
클로에는 팔을 뻗어 그의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의 근육으로 잘 짜여져 단단한 팔뚝이 다리 사이를 훑고 내려왔다. 그의 손가락이 치맛자락 아래로 들어가 속옷을 들추는 것이, 음순을 간지럽히고 음핵을 굴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앗, 아, 알폰스. 흐으윽…….”
넉 달의 금욕은 알폰스에게만 긴 것이 아니었다. 클로에에게도 아주 길었다. 넉 달 만에 그의 온기를, 그가 주는 쾌락을 느끼는 그녀는 눈에 띄게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민감한 입구는 금방 젖어 들었다. 알폰스는 손가락에 애액을 적셔 애무가 더 매끄럽게 되도록 했다. 애액에 젖은 손가락은 비단결처럼 매끄럽게 그녀의 음핵 위를 굴렀다.
“아, 아!”
그저 아래를 조금 만져 주었을 뿐인데 허리를 비틀며 신음하는 클로에를 지켜보는 알폰스는 입안이 바싹바싹 탔다. 흐드러지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에 피가 몰려 단단히 팽창했다. 당장 그녀의 안을 비집고 쑤시고 들어가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넉 달 동안 금욕한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넉 달 동안 아무것도 들여보내지 않았던 그녀의 몸을 제대로 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도, 그녀 안에 있는 아기도 다치고 말 것이다.
알폰스는 이를 꾹꾹 악물며 참았다. 그녀의 아름답고도 색정적인 모습도,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도, 그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체향 섞인 입욕제 향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자극적이었지만 그저 견디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다급한 손길로 리본을 끌러 그녀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임신을 한 뒤로 클로에는 코르셋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희고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갓 구운 흰 빵처럼 희고 폭신폭신하며 둥그스름한 가슴과, 그 끝을 이루고 있는 분홍색 선단. 이 역시 무려 넉 달 만에 본 장관이었다. 그동안은 그녀의 벗은 몸을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일부러 그녀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임신했기 때문인지 가슴도, 유륜도 기억 속의 것보다 커져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탐스럽고 보이기도 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가슴을 먹음직스러운 과실처럼 덥썩 입에 물었다. 흰 살을 통째로 빨아들이고, 입술로 유륜을 문지르고, 혀끝으로 유두를 간질였다. 그녀의 하얗게 부푼 가슴 위에 붉은 자국이 생겨났다. 그 모습은 마치, 하얀 캔버스 위에 점점이 그려진 꽃을 연상케 했다.
“앗, 흐으, 아흐읏! 아, 알폰스……. 자극이, 너무 세요…….”
클로에가 몸을 파드득 떨면서 울먹였다. 단지 가슴을 입으로 농락하고, 음핵을 손가락으로 괴롭히는 것만으로도 네 달 동안 금욕을 한 그녀에게는 너무 강렬한 자극으로 느껴졌다.
“좀 더, 부드럽게 해 주세요…….”
알폰스가 정욕과 초조함이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인내심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참아야 한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안 그래도 가녀리고 허약한 몸이었고, 심지어 임신까지 했다. 그는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참을 수 없는 정욕이 뚝뚝 묻어나는 낮은 목소리. 그는 클로에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혀끝으로 축축하게 젖은 음순을 훑었다.
“아, 하으, 아앗!”
음핵도 아닌 음순을 핥아주는 것만으로도 클로에의 허리가 휘었다. 알폰스는 마치 애액으로 젖은 그녀의 성기 전체를 깨끗하게 닦을 듯이 핥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헐떡이며,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언제나 그가 입으로 해 주는 것을 부끄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부드럽게 해 달라는 자신의 요청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부끄러움을 꾹 참았다.
부끄러움을 참으면서도 쾌감에 흐드러지며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얼굴은 알폰스로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질구에 혀를 밀어 넣었다.
“앗, 흐으윽!”
클로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탄성을 토했다. 넉 달 만의 관계로 인해 극히 민감한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알폰스가 혀를 천천히 뺐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하자 특히 더 그랬다.
클로에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알폰스가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던 그녀의 성기는 어느샌가 다시 끈적거리는 애액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가 혀로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허리를 튕기며 우는 소리를 내어야만 했다.
“앗, 하으으, 알, 폰스! 아, 아흐으!”
그녀는 마치 떠밀리듯 절정에 이르렀다. 넉 달 만의 절정이었다. 그녀는 알폰스의 머리를 잡은 채 허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마찬가지로 경련하는 질구가 애액을 울컥울컥 토해내며 그의 혀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알폰스의 혀가 아플 정도로 꽉꽉 조여드는 그녀의 몸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갈구해 왔던 것을 드디어 손에 넣은 환희를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열에 달뜬 얼굴로 헐떡거렸다. 가쁜 숨을 따라 그녀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알폰스는 턱을 온통 적신 그녀의 액체를 손등으로 훔치곤 천천히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클로에는 긴장감을 느꼈다. 드디어 때가 오고 있었다. 지난 넉 달 동안 그렇게나 그리워하고, 바라 왔던 그 순간이.
알폰스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얼굴과 귀에 키스를 퍼부었다. 더없는 사랑스러움과 욕망이 깃든 깊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그가 물었다.
“준비가 된 것 같습니까?”
“아, 아마도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며 클로에가 대답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녀의 눈꺼풀 위에 입 맞추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일 아프다면, 무리가 되는 것 같다면, 어느 때고 말씀하십시오.”
클로에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아랫배가 간질간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방금 전 절정을 느꼈는데도 그랬다.
‘그래, 넉 달 만이니까. 거의 매일을 하다가 넉 달이나 쉬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부끄러움을 억누르고자 그녀가 되뇌었다.
그는 어느샌가 자신의 앞섶을 풀어헤친 채 그 육중한 물건을 드러내고 있었다. 클로에로선, 자신이 읽은 ‘여성인체학’ 서적에 의하면 인체 구조상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저게 자신의 몸을 통과해서 아기한테까지 닿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크기였다.
그녀는 넉 달 만인데 과연 그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묘한 기대감에 휩싸였다. 그의 것이 천천히 그녀의 입구에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크게 쉬십시오.”
그가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속삭였다. 클로에는 그 말대로 했다.
“아흐읏……!”
한순간에, 그 육중한 물건이 단번에 반이나 박혀 들었다. 비록 심호흡을 해서 긴장을 좀 풀기는 했지만, 상당히 뻐근하고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전의 클로에였던 때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쭉 관계를 가져오던 몸이었다. 넉 달 동안이나 그와 관계를 하지 않았던 때는 한 번도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클로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알폰스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쓸었다. 그녀의 이마 위에 입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힘 빼십시오. 긴장 푸시고. 다시 심호흡하고. 그래요, 그렇게…….”
클로에는 최선을 다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어떻게든 힘을 빼려고 노력하니, 그의 것이 천천히 밀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으으응…….”
꽤 뻐근하고,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왔다. 클로에는 그것이 기뻤다. 드디어, 실로 오랜만에, 그를 완전히 품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떠 있었지만, 눈은 기쁨으로 빛났다.
그것이 사랑스러워서 알폰스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덮치듯 그녀의 입술 위에 입술을 겹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허리를 끌어당겨, 있는 힘껏 박아 올렸다.
“흐읏?!”
퍼억, 하고 물기가 가득 어린 음란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잡아먹을 듯 탐욕스럽게 그녀의 입 안을 훑으면서, 허리 역시 멈추지 않았다.
귀두 끝이 주름진 내벽을 긁어내리고, 쫀쫀한 내벽이 그의 것을 모양대로 조이는 쾌감.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아니, 잊은 척하고 있던 그것이었다. 클로에는 단번에 머릿속이 열로 가득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키스하면서는 도저히 모자란 호흡을 채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알폰스는 아쉬운 듯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클로에는 붉어진 얼굴로 그의 품 안에서 할딱였다.
“아, 흐응, 응! 알, 폰스. 아……!”
그 목소리를 듣는 알폰스는 미칠 것만 같았다. 지난 넉 달 동안, 그리고 지금껏 참아 왔던 모든 것이 둑 터지듯 와르르 무너졌다. 도저히 그녀를 탐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의 가녀린 몸을 감싸 안은 채, 허리를 있는 힘껏 움직일 뿐이었다.
탐하고 또 탐하면서도 그녀를 향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키스 대신에 그녀의 얼굴에 마구 입을 맞췄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자신은 이것을 어떻게 넉 달 동안이나 참아왔는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탐스러운 하얀 유방을 큰 손으로 주무르며 그가 속삭였다.
“정말…… 미치겠군요. 절 이렇게 흥분하게 만드는 건…… 없을 겁니다.”
“흐앙, 앗, 아! 하아, 아! 알, 폰스! 너무, 세요! 제발…… 살살!”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자극에 클로에는 죽을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통 새하얗게 불탔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그가 아까 ‘무리가 되는 것 같으면 말하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듯 소리쳤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입술 위에 몇 번이나 입 맞추면서도 허리를 늦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픈 게 아니라면 안 멈춰드립니다. 아니, 못 멈춥니다. 미안합니다. 저도, 이미 한계라서…….”
“흐응, 응, 읏! 그런…… 게, 어딨……! 힉, 으응!”
“하아, 당신은 정말, 민감하고 음란한 몸입니다, 부인. 참을 수가…… 없군요.”
“핫, 흐응, 응, 당…… 신!”
숨 막히도록 과한 자극에 클로에는 몸부림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의 몸을 가졌다.
마침내 클로에가 먼저 파드득 몸을 떨며 절정에 다다랐다. 거의 강제로 끌려가듯 절정에 내던져져 울먹이며 몸부림쳤다. 그녀가 그렇게 절정을 느끼는 동안에도 알폰스는 멈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박아 넣었다. 있는 대로 수축하는 그녀의 질벽은 그에게도 극상의 쾌락을 선사했다. 곧, 알폰스 역시 그녀의 안에 사정했다.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액체가 그녀의 안쪽에 퍼부어졌다.
한 차례의 해일 같은 절정이 휩쓸고 지나간 뒤, 두 사람 모두 헐떡이고 있었다. 특히 안 그래도 체력이 좋지 않은 클로에는 연이은 두 번의 절정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클로에가 손을 들어 그런 그의 입을 막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무리가 되는 것 같으면…… 말하라면서요!”
그런 그녀의 기운 없는 손을 슬쩍 떼어낸 알폰스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픈 게 아니라 자극이 과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걸로는 못 참습니다. 삽입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후에는…….”
“당신 정말!”
클로에가 기운 없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쳤다. 하지만 그런 연약한 손으로 밀쳐보았자 앙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폰스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곤 계속해서 그녀의 뺨과 귀 같은 곳에 입을 맞추었다.
“넉 달 만이라 제가 좀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정말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그런 걸로 할게요. 일단은요.”
그의 키스 세례를 견디지 못한 클로에가 결국 백기를 들자, 알폰스가 눈꼬리를 휘었다. 그녀가 아닌 사람에게는 결코 보여 주지 않는 얼굴이면서도, 매우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한 번 더 허락해 주시는 건.”
클로에는 그제야, 여전히 자신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그의 것이 여전히 크고 단단한 기세를 잃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 다시 일어난 걸까? 클로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 정말 짐승……!”
하지만 알폰스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곱게 휜 눈매 그대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허락은?”
“…….”
클로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속마음을 이해한 듯 낮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알폰스가 말했다.
“이번에도, 아프거나 무리가 되는 것 같다면, 말씀하십시오.”
클로에의 입술 위에 입 맞추곤, 그가 속삭였다.
“단, 너무 좋을 때는 제외하고.”
* * *
무리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임신 중에 홍차를 마시기가 곤란하기에 클로에는 일을 대폭 줄였다. 그녀가 홍차를 마시지 못하니, 새로운 블렌딩의 홍차를 개발하기가 곤란해졌다.
‘그래도 사업이 제법 탄탄해졌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아. 아기가 딱 좋을 때에 와 주어서 다행이야.’
그렇다고 클로에가 차를 덜 마시게 된 것은 아니었다. 허브 티는 무척 많이 마셨다.
“우리 아기는 아마 나중에 차 영재가 될 것 같아요.”
클로에가 희망 사항을 담아 말했다.
“저, 일도 줄였고 하니 심심해서 차도 많이 마시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서적도 많이 찾아보고……. 이게 다 태교가 되겠죠? 아, 아기도 허브 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특히 제 생각에 우리 아기는 허니부쉬(honeybush)와 민트 종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차들을 마실 때마다 특히 많이 움직이더라고요.”
알폰스는 그녀의 그런 변함없는 열정이 귀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잠깐만요.”
종알종알 얘기하던 클로에가 갑자기 멈칫했다.
즐거운 듯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갑자기 놀란 토끼처럼 주변을 경계하니 알폰스도 놀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서 냄새 안 나요?”
“냄새 말입니까?”
“네. 어쩐지 좋지 않은…… 퀴퀴한 냄새가…….”
클로에가 코를 킁킁거렸다.
알폰스 역시 코에 신경을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그의 코에 느껴지는 냄새라곤 마시고 있던 허니부쉬의 향뿐이었다.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클로에가 주변을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이곳은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그녀의 티룸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런 퀴퀴한 냄새가 날 만한 곳은 없었다.
“대체 어디서…… 아!”
고심하던 클로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가 알폰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디서 냄새가 나는지 알겠어요.”
“그렇습니까? 어딥니까?”
알폰스는 그녀의 다음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답은커녕 그에게로 오종종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의 옷깃에 코를 박았다.
그녀가 말했다.
“역시. 알폰스가 범인이었어요!”
“예?”
클로에가 임신을 한 뒤로 후각에 부쩍 민감해진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설마 자신이 악취의 근원으로 지목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이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거, 분명…… 담배 냄새 같아요.”
알폰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여전히 골초였고, 시가를 매우 많이 피웠다. 하지만 그녀의 건강을 생각해서 최근에는 그녀의 곁에서는 결코 흡연을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담배 냄새가 그렇게 심하게 납니까?”
클로에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던 알폰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사실 골초에게 담배 냄새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측근들은 전부 담배 연기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같은 평가라도 누구의 입에서 나오냐에 따라 느낌은 천차만별이었다.
클로에는 원래 담배 냄새를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담배 냄새를 지적하는 일이 이렇게나 큰 충격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인.”
알폰스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을 뻗자 클로에가 파드득 놀랐다.
“다가오지 말아 줄래요? 입덧이 간신히 끝났는데, 다시 시작될 것 같아요.”
“아니, 그런…….”
알폰스가 황망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하다니, 이건 예사 큰일이 아니었다.
“각하, 지시하셨던 보고서입니다.”
“수고했다, 키엘.”
키엘은 바로 인사하고 나가지 않고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각하,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뭔가.”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알폰스의 미간에 잔금이 갔다. 그는 자존심이 세지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키엘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물론 그는 눈치가 매우 빨랐고, 주인의 의중을 잘 읽는 집사였지만 이번 일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티가 났던 것이다. 멀찍이서 보는 하녀들조차 주인님께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걱정할 정도였다.
알폰스는 몹시 진중한 태도로 물었다.
“키엘, 하나만 물어보지.”
“네, 기꺼이.”
“내게서 냄새나나?”
“네에에?”
키엘은 깜짝 놀랐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말이란 말인가. 그는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황공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
알폰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키엘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고민 같은 것으로 괴로워 보였다. 알폰스 그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은 몇 년 만이라 키엘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담배 냄새가 난다고 하더군.”
눈치가 빠른 키엘은 이 말만 듣고도 앞뒤 사정을 대강 눈치챘다.
‘마님께서 담배 냄새가 난다고 하셔서 주인님께서 의기소침해지신 거구나!’
키엘은 조심스럽게 위로의 언사를 건넸다.
“임신을 하면 간혹 후각이 예민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일시적인 현상이니 아마 마님께서도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제 코에는 각하의 담배 냄새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임신의 증상이며,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알폰스 역시 알고 있었다. 향수 등으로 냄새를 차단하고 있기에 어지간한 사람들에게는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그의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녀가…… 냄새를 해결하기 전에는 다가오지 말라고 하더군.”
키엘은 단숨에 깨달았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는 해도 이 증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의 경험으로 키엘은 그것이 알폰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공작가의 평화를 위해서…… 집사인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해!’
이미 담배 냄새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냄새를 없애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의 증상을 막을 방법도, 냄새를 막을 방법도 없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각하, 그런 일이 있으셨다면…… 금연을 고려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금연?”
“네. 산모와 장차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금연을 고려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안인 것 같습니다.”
* * *
알폰스는 그것이 나쁘지 않은…… 아니, 훌륭한 방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그날의 티타임 때 클로에에게 운을 띄웠다.
“부인, 제가 금연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말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진심이세요?”
“예.”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는 지난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알폰스가 시가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처음 오게 되었을 때부터, 아니 이전의 클로에가 기억하고 있는 그때보다 훨씬 전부터 그는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피우는 정도가 아니라 골초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흡연 외의 취미랄 것이 없었다.
그는 특별히 즐기는 것이 없었다. 검술 연습이나 승마 등의 단련과, 독서와 예술 감상을 꾸준히 하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건강과 교양을 위해서일 뿐 그것들에 특별한 열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몇 년 전부터 클로에 덕에 즐기게 된 차를 제외하면, 그가 흡연 빼고 취미로써 좋아하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를 끊는다니……. 아니, 솔직히 나야 좋긴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클로에는 담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무엇보다 건강에 해로우니까.
하지만 그녀는 이제껏 알폰스의 흡연 습관에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알폰스가 그녀의 차에 대한 취미를 존중해 주었듯, 그녀 역시 그의 취미를 존중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클로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담배, 무척 좋아하셨잖아요?”
알폰스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자신이 차를 좋아하니, 그만큼 내가 시가를 즐기는 것도 존중하고 싶다는 건가.’
알폰스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는 시가를 썩 즐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클로에가 차를 좋아하는 것만큼은 아니었다.
알폰스는 시가에 클로에가 차를 좋아하는 것만큼의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원래 피웠고, 딱히 끊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해 끊지 않았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의 기호를 존중해 주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씨가 너무나 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져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귀엽다는 듯이 매만졌다.
“습관적으로 피우던 것뿐입니다. 부인께서는 제가 금연을 하는 것이 달갑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당연히 좋죠. 전 알폰스가 언제까지나 건강해서 저와 오래 함께 있어 주셨으면 하는걸요.”
어쩌면 말도 이렇게 하나하나 예쁘게만 하는지. 알폰스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시가가 아무리 좋다 한들 부인과 함께 있는 시간만 하겠습니까.”
클로에는 그제야 걱정하던 기색을 거두었다. 그녀는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활짝 웃었다.
“세상에, 담배를 끊으신다니……. 정말 기뻐요. 잘 생각하셨어요, 알폰스. 저도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그녀가 알폰스를 꽉 껴안았다. 작은 몸과 가는 팔이 안겨 오는 기분은 썩 만족스러웠다. 알폰스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걱정 마십시오. 관성적으로 피워 오던 것뿐이니 끊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어머…….”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물론 알폰스를 믿어요. 그래도 혹시나, 만에 하나 아주 조금이라도 힘드시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배려 있게 말하곤 그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 맞춰 주었다.
그것이 기쁜지 그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알폰스가 다시 입술을 포갰다. 가벼운 버드 키스가 아닌, 더 깊고 뜨거운 입맞춤. 혀와 혀가 얽히고 숨과 숨이 섞였다.
* * *
알폰스의 결심은 진심이었다. 그는 금연 선언을 한 직후부터 곧장 흡연을 끊었다. 미리 사 둔 값비싼 시가도 전부 내다 버렸다.
이제껏 그가 마음먹고 했던 일 중 성공하지 못한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인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였다. 그러니 금연 정도는 일도 아니어야 했다.
“…….”
하지만 금연이 쉽지만은 않음을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알폰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펜을 쥐고 일하느라 뻐근한 손을 힘을 주어 쭈욱 폈다가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집중이 잘되지 않는군.’
일에 몰입하지 못하고 흐름이 깨진 것이 오늘만 벌써 3번째였다. 일을 시작한 지는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집중력이 좋은 그가 이렇게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그는 지난 십여 년간 일하는 도중 입에서 시가를 뗀 적이 없었다. 오랜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금단 증상이라는 것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워낙에 골초였던 그인 만큼 더더욱 그랬다.
“알폰스.”
그의 단단한 품 안에서 꾸물거리던 클로에가 눈을 떴다. 깊은 새벽이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창가에서 흘러들어 오는 달빛이 비쳐 보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알폰스가 미소 지었다.
“제가 방해했나 봅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설마 아직 안 주무신 거예요?”
클로에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알폰스가 자신의 침실을 쓰지 않고 클로에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자게 된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그것은 클로에가 임신을 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임신 때문인지 한층 무거워진 피로감에 정신없이 잠들기 바쁜 클로에는 그가 언제 잠드는지, 애초에 자긴 자는지도 확인하지 못하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던 도중, 우연히 자다 깨었다가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이 늦은 시각까지 잠에 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클로에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스쳐 지나가자 알폰스가 속삭였다.
“잠이 안 오기에.”
“어머, 저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냥 피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클로에는 눈치가 좋은 편이었다. 그가 일주일 전부터 금연을 하고 있다는 것도, 또 대표적인 금단증상 중 불면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알폰스가 걱정하지 말란 뜻에서 한 말이라는 걸 알기에 클로에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이마 위에 입 맞출 뿐이었다.
“얼른 잠드셔야 할 텐데.”
“그럴 겁니다. 어서 주무십시오.”
“하지만…….”
알폰스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매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남편이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도 잠시, 배 속의 아기 때문인지 또 까무룩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다음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알폰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예요, 알폰스.”
일에 집중이 잘되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느라고 가느다란 주름을 잡고 있던 그의 미간이 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은 그녀가 자신의 집무실에 잘 오지 않는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던 차였다.
그녀가 사업을 갓 시작할 때쯤에는 두 사람은 이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사업이 안정권에 들어서고, 그녀가 굳이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수완을 가진 사업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일을 존중하고 되도록 간섭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본 것이다.
그야 좋지만 어쨌든 알폰스는 내심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와 이 집무실에서 도란도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때를. 그녀의 참신하고 반짝이는 생각들에 감탄하고, 그녀의 능력을 발견하던 때의 즐거움을.
업무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함께 있긴 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는 아무리 마셔도 목이 마른 샘과 같았다.
어쨌든 그런 참에 그녀가 집무실에 방문했으니, 이유가 뭐든 간에 반가움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
알폰스가 문을 열자, 그 뒤에서는 그의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방해가 되었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침 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가 클로에를 집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집무실의 휴게 의자에 마주 앉았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알폰스를 응원하러 왔어요. 금연하시느라 힘드시죠?”
뜻밖의 대답에 알폰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응원이라니? 그것도 금연을 응원하러 오다니?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상이 독특한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자기는 아이를 배고 있으면서 금연을 응원하러 오다니.
‘어젯밤에 잠을 못 자는 모습을 보인 게 어지간히 신경 쓰였나 보군.’
이렇듯 마음을 쓰는 그녀가 무척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아닙니다. 홑몸이 아닌 부인만 하겠습니까.”
알폰스의 눈길은 달콤하도록 다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언제나 클로에를 사랑함과 동시에 존경했다. 몸속에 다른 생명을 품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다른 사람을 살피는 마음 씀씀이와 정성과 노력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절 위해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잠깐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클로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해 웃었지만 알폰스는 농담이 아니었다.
“어떻게 응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역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클로에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나타나 공손히 인사를 했다.
하녀들은 수레에 담긴 티 세트를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세팅한 뒤 다시 인사를 하고 떠났다.
클로에가 직접 알폰스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카페인이 들어 있지 않고, 몸의 긴장을 이완시켜 주는 라벤더 차예요. 숙면을 취하시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갓 우려서 가져온 듯 찻잔에서는 따스한 김이 피어올랐다.
갓 우려서 따끈한 차를 티룸도 아니고 집무실로 가져오느라 클로에가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
‘그냥 나를 티룸으로 부르면 될 것을. 일하는 데 방해하면 안 된다고 그런 거겠지.’
알폰스의 머릿속에 그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겠다고 부산히 움직이는 클로에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다른 뜻으로 이해했는지 클로에가 기쁜 듯 말했다.
“향이 정말 좋죠? 저도 라벤더 차를 무척 좋아해요.”
“예, 물론.”
누가 가져온 차인데 좋지 않겠는가. 그녀의 차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보나,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을 보나.
어느샌가 집무실을 가득 채운 따뜻하고 화사한 라벤더 향을 즐기며 알폰스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오늘만큼은 어쩐지 평소보다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알폰스가 유명한 만큼, 그가 오랜 골초라는 사실 역시 유명했다. 그가 담배를 끊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이 모든 것이 클로에의 도움과 알폰스의 그녀에 대한 사랑 덕이었다.
* * *
클로에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공작가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의 중대사였다. 클로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축하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
포트넘 자작가, 로네펠트 후작가 등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집안은 당연하고, 공작가의 가신들은 물론 공작가와 크고 작은 연관이 있는 집안들, 그리고 제국 황실과 심지어는 플랑드르 왕국의 카타리나 여왕마저 선물을 보냈다.
“황실에서 마님께 보낸 선물을 봤어요? 정말 굉장하던데요.”
“정말이요. 전 태어나서 그런 건 처음 봤어요. 순금으로 된 아기 목마라뇨?”
“플랑드르의 여왕이 보낸 건 어떻고. 루비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아기 옷이라니……. 아마 세상에 존재하는 아기 옷 중 제일 비쌀걸.”
클로에의 인맥이 대단하다 보니 들어오는 선물들의 값어치도 어마어마했다. 출산이 임박해 오면서 선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오는 걸 보며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연신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클로에의 인망의 결과였다.
이런 와중에 알폰스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그녀와 가깝고 또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그였다. 그러니 가장 기억에 남고 근사한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아이를 임신한 그의 아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무엇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알폰스는 언제나 클로에에게 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세상의 전부라도 좋았다.
자신의 애인이나 아내를 값비싼 장신구로 장식하고 데리고 다니는 것을 즐기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알폰스의 마음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그런 남자들이 선물을 하는 이유는 파트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트너를 아름답게 꾸며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트로피로 쓰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알폰스는 그저 클로에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해 준 것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선명히 남을 때마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토록 존귀한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 역시 세상에서 제일 존귀한 것뿐이었다. 하물며 그에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을 준 그녀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제일 훌륭한 것을 준비해야 하는데.’
제국의 황실에서 보낸 순금 목마나 플랑드르의 여왕이 보낸 보석 아기 옷은 물론 제국의 귀족들 대부분은 만져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값비싼 물건이었다. 하지만 황실과도 견줄 정도의 부와 권력을 가진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주인인 알폰스에게는 아니었다.
‘단순히 금전적으로 값비싼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구해 올 수 있다.’
하지만 클로에와 몇 년을 지내는 동안 알폰스가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이 있었다. 그녀를 기쁘게 만드는 선물은 단순히 비싼 걸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수의 선물들 사이에서 제일 그녀의 눈에 띌 만한 선물은 무엇일까.
알폰스는 이 문제로 며칠이나 골머리를 썩였다. 그녀의 취향이라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가까운 가신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
“단장, 임신한 아내에게 제일 좋은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기사단장과의 회의가 끝난 직후, 알폰스가 갑작스레 던진 질문이었다.
공작가의 기사단장은 이미 노년에 접어들고 있었고, 그의 자식을 6명이나 낳은 아내가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 이러한 고민을 경험해 봤을지도 모른다.
주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단장은 깜짝 놀라 고민했다.
“그건……. 으음, 역시 아기 옷이나 장난감이 아니겠습니까? 선물은 역시 실용적인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황실이나 플랑드르의 여왕이 보낸 물건들 역시 아기용품이었다. 게다가, 클로에는 단순한 장식품보다는 실용적인 물건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알폰스는 이 대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기용품 선물은 이미 수백 개가 들어온 상태였다. 더 이상 필요한 물건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중 클로에가 아주 특별히 좋아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키엘, 네 생각은 어떻지?”
주인의 분부를 받들기 위해 회의실 한구석에 서 있던 집사 키엘은 깜짝 놀랐다.
“저…… 말씀이신가요? 아뢰기 황공하오나 저는 임신한 아내는커녕 애인도 없는 몸인지라, 제 소견이 각하께 과연 도움이 될지 어떨지…….”
“그런 건 내가 고민할 테니, 대답해 봐라.”
칼날 같은 알폰스의 말이 키엘의 길어지는 말허리를 딱 잘랐다. 키엘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마님께선 학구열이 뛰어나시니, 육아 경험이 있는 귀부인을 초청해서 육아 수업을 들으시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육아 수업이라니, 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좋은 의견으로 들렸는지 기사단장이 맞장구를 쳤지만 알폰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쁘지 않지만, 임신과 출산에 이어 육아 같은 힘든 일에 아내의 체력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다. 많은 수의 유모와 전속 하녀들을 고용할 예정이니 그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거다.”
“그, 그렇군요…….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역시나, 까다로운 주인이 이 정도로 만족할 리 없었다. 키엘은 고개를 숙였다.
한편 기사단장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주군께서 마님께 애정을 드러내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니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한때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심지어는 기사단장에게 그녀에 대한 일을 보고하지 말라고 했던 적도 있지 않던가.
‘그랬던 주군께서 지금은 마님이 특별하게 느끼실 만한 선물을 찾아 이렇게 고심하시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지.’
기사단장의 주름진 눈가가 온화하게 휘어졌다. 주군인 알폰스를 기사단장은 깊게 존경하고 충성했으나, 연배는 알폰스가 자신보다 훨씬 젊었다.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 주군을 보고 있자면 자신 역시 젊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대단한 한 쌍이라니까.’
한편, 뾰족한 수를 구하지 못한 알폰스는 애가 탔다.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클로에의 산달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단장과 키엘 이후에도 그는 몇 사람의 가신들에게 더 물어보았지만 그들의 대답 역시 아기 옷이나 아기용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클로에의 절친한 친구이자 공작가의 충실한 가신인 포트넘 자작 부부가 초대를 받은 날이었다.
“오늘도 정말 훌륭한 저녁 식사였어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뭘요,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마워요.”
오랜 친구인 클로에와 포트넘 부인이 즐겁게 재잘댔다.
“로날드는 잘 지내고 있나요? 오늘은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쉬워요.”
“호호, 물론이죠. 로날드는 지금 친정에 있어서요. 로날드도 대모님을 보지 못해 많이 슬퍼하더라고요.”
로날드는 포트넘 부인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클로에의 귀여운 대자(代子)이기도 했다.
“다음엔 꼭 얼굴 봤으면 좋겠네요.”
“물론이죠. 다음에 또 만나면 되니까요.”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클로에이니만큼 절친한 친구의 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저희는 바텐베르크 공작가에 언제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윈체스터 공작가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던데…….”
알폰스는 포트넘 자작의 그다지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클로에의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알폰스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포트넘 자작 부인이 있었군.’
알폰스는 생각했다.
‘지금껏 내가 의견을 구한 상대는 전부 사내였으니,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어떨까?’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실제로 경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클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여긴 알폰스는 클로에가 손님들을 위한 차를 준비하러 간 사이에 포트넘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자작 부인, 실례지만 말씀 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포트넘 부인은 깜짝 놀랐다. 알폰스가 그녀에게 따로 말을 건 일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어머나! 물론이지요, 공작님.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안사람을 위한 임신 선물을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경험자이신 자작 부인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포트넘 부인은 새삼 감탄했다.
‘몇 년 만에 거의 처음으로 내게 개인적으로 걸어온 화제가 바텐베르크 부인을 위한 것이라니……. 어쩜 이런 애처가가 있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제국 역사에 남을 만한 다시 없을 애처가였다.
‘정말이지 대단한 한 쌍이라니까. 부러울 정도야.’
포트넘 자작 부부 역시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부부치고는 상당히 사이가 좋은 한 쌍이라는 평을 듣지만 이 공작 부부에 비하면 발끝에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포트넘 부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게 의견을 여쭈시다니 영광이네요. 바텐베르크 부인에게 선물이 정말 많이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그런 와중에 선물을 정하시려니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알폰스는 긍정했다.
“예. 그중 제 선물이 특별히 안사람의 마음에 와닿았으면 하기에.”
“새삼스럽지만 정말 애처가시군요. 저도 아이를 낳았고, 바텐베르크 부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임신 선물도 받아 본 만큼 그때 느낀 것이 있었어요.”
“무엇입니까?”
알폰스의 냉철한 얼굴에 드물게도 관심이 드러났다. 하여간에 클로에와 관련된 것에만 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에 웃음 지으며 포트넘 부인이 설명했다.
“제가 임신을 하자,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선물로 아기 옷과 아기용품을 줬었어요. 심지어 저희 바깥사람도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임신 선물로는 제일 무난하니까요. 그런데 바텐베르크 부인만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랬습니까?”
“네. 그때 바텐베르크 부인이 제게 주었던 건 차였어요. 임신 중에도 마실 수 있는 허브 티였죠.”
알폰스는 깜짝 놀랐다. 당시 공작가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선물 역시 육아용품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친한 친구이다 보니 클로에가 개인적으로 따로 선물을 챙겨 준 모양이었다.
“모두가 임신을 축하한다면서 아기의 안부를 묻고, 아기용품을 선물로 주었는데 오직 한 사람, 바텐베르크 부인만이 제 건강을 염려하고 저를 위한 선물을 주시더군요. 그때 제가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몰라요. 꼭 어머니로서의 저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저 자신을 존중받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감동을 저는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어요.”
“…….”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그녀는 임신 경험도 없었었는데 말이에요. 정말 어찌나 생각이 깊은 분인지!”
알폰스가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 전혀 몰랐습니다.”
“어머, 그러셨군요. 전 남편이신 공작님께는 말씀드리셨을 줄 알았어요. 정말, 이런 다정하고 훌륭한 행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다니……. 보통의 귀족 같았으면 자신이 이렇게 생각이 깊고 현명하다고 이리저리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말이에요. 그런 점마저 참 대단하시죠.”
포트넘 부인은 친구 자랑을 마치 자기 자랑하듯이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긴 게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
“어쨌든, 그래서 저도 바텐베르크 부인의 임신 선물을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으로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사정이 그러하시다니 제가 특별히 양보해 드릴게요.”
“예?”
“원래 이런 건 혼자 해야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법이죠. 특별히 부인의 마음에 와닿기를 원하신다면서요?”
알폰스는 정중한 성격이지만 빈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조언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후 감사의 뜻은 확실히 표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이웃끼리는 돕고 사는 거죠. 게다가 바텐베르크 부인은 제 소중한 친우라구요.”
포트넘 부인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때, 클로에가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차에 어울리는 티 푸드를 고르느라고요.”
“어머, 아니에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수레를 밀고 온 하녀들이 부지런히 다구와 티 푸드를 날랐다. 곧 혼자 담배를 피우러 갔던 포트넘 자작도 돌아와서, 네 사람은 즐거운 티타임을 가졌다.
자작 부부가 돌아간 뒤 알폰스는 자작 부인의 조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 영 탐탁지 않게 느껴졌던 까닭을.
아기용품이니, 육아 수업이니 하는 것들 전부가 실용성이 있는 좋은 선물이긴 하지만 그것은 클로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알폰스는 좀 더 클로에, 그녀만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이번 일로 들었던 조언들 중 가장 훌륭한 조언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번 방향성을 정하고 나자 그녀에게 줄 선물을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해서 토끼와 사슴과 여우는 늑대의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어요. 친구가 없다고 생각한 늑대는 정말로 기뻐했답니다.”
똑똑.
조곤조곤 동화책을 읽던 클로에의 목소리를 노크 소리가 끊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슬슬 몸이 무거워져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쉽지 않은 참이었다.
그녀를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고, 하녀들과 시녀는 심부름을 시켜 저택 밖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어쩐지 반가운 손님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들어오세요.”
손님은 아니나 다를까 알폰스였다. 문틀은 무척 높았지만, 그의 키 역시 아주 커서 그 높이를 거의 채울 정도였다.
넓은 어깨와는 대조될 정도로 단정한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또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낮게 울리는 애정이 담긴 그 목소리. 클로에는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녀가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아기한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었어요.”
“아기가 어머니를 닮아서 훌륭한 독서가가 될 겁니다.”
“당신의 아이기도 한걸요. 아주 똑똑한 아이가 될 거예요.”
클로에가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자 알폰스가 얼른 다가와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클로에는 겨우 몇 시간 떨어져 있었던 걸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갑게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알폰스 역시 그녀의 등을 감싸 안고 진하게 입 맞추는 것으로 화답했다.
“오신 김에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몸이 무거우신데 티룸까지 가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녀를 시켜 방에서 차를 마십시다.”
“어머, 당신도 참. 아무리 그래도 집 안인걸요. 그 정도로 힘든 건 아니라고요.”
클로에가 푸스스 웃었다. 하여간에 그의 과보호는 민망할 정도였다.
곧 두 사람은 티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는 하녀를 시켜 우리도록 했다. 물이 끓는 소리, 티룸 안에 가득 차오르는 허브향이 기분 좋았다.
“목련차가 다 떨어져서 새로 샀어요. 향이 정말 좋죠?”
“예, 확실히.”
알폰스는 별다른 용무가 없더라도 종종 업무 중 휴식시간에 그녀를 보러 왔기에 클로에는 이번도 그런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알폰스가 본론을 꺼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드릴 임신 선물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네? 임신 선물이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폰스가 주는 임신 선물이라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보통 임신 선물이라 하면 남남에게만 주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 아기이지만 당신 아기이기도 한데 선물이라니요?”
“임신은 온전히 부인의 몸으로 감당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정말 감사해요.”
클로에는 무척 쑥스러웠지만 그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난 몇 년간의 경험으로 거절한다고 받아들일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일에 일일이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정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 쪽은 제가 아니겠습니까.”
알폰스는 진심이었다. 그 가녀린 몸으로 그의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이, 언제나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 그녀가 태어나서 그의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아마 평생을 갚아나가더라도 다 갚지 못할 정도로.
클로에는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래도 저를 위해 준비해 주셨는데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무튼, 정말 궁금하네요. 우리 아기를 위해 무얼 준비해 주셨는지 말이에요.”
알폰스라면 분명 대단히 귀중하고 훌륭한 것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금껏 수많은 임신 선물을 받은 그녀로서는 그의 것도 비슷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녀보다는 아기를 위한 선물 말이다.
하나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포시타노 해변을 아십니까? 제국 동부에 위치한 곳인데 여름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네? 해변이요?”
포시타노라,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귀부인들이 종종 바캉스를 다녀왔다고 자랑하던 장소였다.
“들어 본 적은 있는 것 같아요. 물이 너무 맑아서 바닥까지 비치고, 바다의 색이 사파이어처럼 맑고 파랗게 빛난다면서요?”
“맞습니다. 공작령에 소속된 곳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 중 하나인데 그곳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클로에는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귀부인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휴양지가 알폰스의 것이라는 사실에서 먼저 놀라야 할까? 아니면 그곳이 이제 그녀의 것이 되었다는 것부터? 아니면…….
“세상에, 그런……. 임신 선물로 해변을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예. 그리고 최근 청의 작은 마을과 별장을 하나 매수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청에 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랬기야 하지만…….”
“그곳 역시 이제 부인의 것입니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시일에 꼭 가도록 합시다. 함께 말입니다.”
그의 다정한 말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목이 멜 것 같았다.
그녀가 아무런 연고 없던 이 나라, 제국에 떨어진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뛰어난 적응력과 많은 노력 덕에 이제는 타고난 제국인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이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십여 년 넘게 지내왔던 전생의 세계가 간혹 향수처럼 그리워지곤 했다.
그럴 때에는 청의 차를 마시며 그리움을 달랬다. 이 대륙의 동방의 국가인 청의 문화는 전생에 살았던 한국과 몹시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이런 부분까지 이해해 줄 수 있는 걸까?’
생각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를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일까?
클로에는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 그를 꼭 끌어안았다.
“어떡하죠? 저 너무 기뻐요.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이런 임신 선물을 받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어요.”
너무 기뻐서 목이 다 메었다. 알폰스는 그녀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냥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닌걸요. 최고예요. 정말 고마워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그래, 그가 원하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 그녀를 기쁘게 만들고, 그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선물을 주기 위해 그가 그렇게나 고민하고 노력했던 것이다.
클로에가 이렇게 기뻐해 준다면 그의 노력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몇 배라도 더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클로에는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알폰스의 뺨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곤 말했다.
“세상에, 임신 선물 하면 보통 아기 물품을 생각할 텐데……. 저를 위한 것을 주시다뇨. 정말 놀랐어요, 알폰스. 당신이 유일한 사람이에요. 저를 위한 선물을 준 사람 말이에요.”
“그랬습니까?”
“네!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알폰스의 머릿속에 포트넘 부인의 조언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뜻밖의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전혀 아쉽지 않게 화답하리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인과 관련된 일이니까 말입니다. 저는 부인과 관련된 일은 하나라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알폰스는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클로에가 까르르 웃었다.
“당신도 참……. 하지만 맞는 말씀이에요. 이번만큼은 인정해 드릴게요.”
“앞으로도 계속 인정하시게 될 겁니다.”
클로에는 후후후 웃더니 이번엔 알폰스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요. 알폰스를 믿어요.”
* * *
클로에의 체질이 허약해서 출산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주치의의 우려와 다르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축복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클로에는 큰일 없이 아이를 낳았다. 첫째 아이는 알폰스를 닮은 금발을 가진 딸이었다.
아이를 낳은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주치의는 산모의 안정과, 산모와 아기의 감염 문제 등으로 병문안을 오는 사람을 엄격하게 제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클로에에게 감사하는 사람과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많은 수의 손님들이 산모의 방에 들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선물이나 편지라도 두고 가고 싶어 했다.
심지어는, 수도의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부인이라는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저렴한 도자기와 공장 생산 홍차를 발명한 클로에는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덕망이 높았다.
부잣집도, 가난한 집도 앞다투어 창가에 연노랑빛 꽃을 올려 두었다. 세라비아라는 이름의 들꽃으로 축하와 축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었다. 그녀의 빠른 쾌유와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축하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산모의 건강한 출산을 기뻐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물론 알폰스였다.
그는 클로에의 허약한 체질을 걱정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예정일 한 달 전부터 제국 최고의 산파는 물론, 응급 의술이 뛰어난 의사들을 저택에 대기시켜 놓기까지 했다.
출산이 무탈했던 탓에, 의사들은 공작저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편히 지내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의뢰비를 받고 돌아갔지만 알폰스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클로에의 무사한 출산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몇 배는 되는 돈도 썼을 것이다.
출산 직후 클로에가 무사한지, 어디 불편하거나 후유증이 있지는 않은지 살피느라 그에게 딸은 뒷전이었다. 클로에가 아이의 얼굴을 보라고 권한 후에야 겨우 생각이 났다.
금색의 배냇머리를 가진 아이는 언뜻 보기에는 그를 닮은 듯했다. 곤히 잠든 얼굴이 귀여울 만도 했지만 그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알폰스를 많이 닮았어요.”
클로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중에 미인이 될 것 같아요. 제국에서 제일가는 미인이 되면 어쩌죠?”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자그마한 인간의 존재에 그녀가 이렇게 기뻐할 줄은 미처 몰랐다.
행여 연약한 그녀의 몸에 부담이 될까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나 행복해하다니 한 번쯤은 해 볼 만한 고생이었다. 물론 그녀가 둘째를 가지고 싶어 한다면 반대할 생각이었지만.
“과연, 그렇습니다.”
그가 클로에의 어깨를 조심스레, 하지만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그때였다. 아기의 굳게 닫혀 있던 눈이 뜨였다.
“어머나!”
클로에가 탄성을 질렀다.
아기의 눈은 따스한 빛의 올리브색이었다. 더군다나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눈을 뜨자 둥글고 부드러운 눈매가 드러났다.
과연, 클로에의 딸이라고 할 만했다.
아기는 눈을 끔뻑이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나 싶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달콤한 잠에 빠지려는 모양이었다.
클로에가 웃었다.
“어쩜……. 정말 사랑스러워요.”
그녀와 함께 아기의 모습을 지켜보던 알폰스는 잠시 말을 잊었다. 아기는 생각보다 그의 아내를 많이 닮아 있었다. 머리 색은 그를 닮았지만, 다정한 눈빛은 그녀의 것이었다.
‘다행이군.’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아기에게 정을 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몸을 끌어당겨 그녀의 뺨에 입 맞추었다. 그러고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렇군요.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그야 당신 딸이니까요.”
지친 모습에도 후후 웃는 아내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알폰스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부인의 딸이라서겠지요.”
과연, 그녀가 하는 일인데 틀릴 리가 없다고 알폰스는 생각했다. 언제나 그에게 행복과 놀라움을 가져다주었던 그녀가 아닌가.
알폰스는 새로운 기쁨을 직감했다. 이 행복은 분명 영원할 것이었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함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