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그리고 회의장에 정적이 흘렀다.
아서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준비해 온 모든 논리와 근거는 논파되었다.
클로에는 부정한 이익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불법행위를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공작 부부의 홍차는 진 중독 현상의 완화에 명백할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대책은 아서가 준비해 온 영업 허가료 법안과는 다르게 아무런 부작용도, 시민들의 불만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나 완벽하고 흠결을 찾을 수 없는 방책을 준비해 온 이상 그의 임시방편적인 법안 따위는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내가 졌단 말이야?’
아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공작 부부에게, 또?’
그는 황자였다. 게다가 그는 성실하진 않아도 재능이 있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없었다. 재물도, 명예도, 누군가의 마음도.
하지만 그것도 저 공작 부부를 마주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들의 앞에서 그가 손에 넣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작에게 패배했던 결투 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이 이상의 처참한 패배는 있을 수 없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황자 역시 더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
황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상으로, 바텐베르크 공작, 아니 공작 부부가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에는 아무런 법적, 도의적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대단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어 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없겠지.”
“이의 없습니다.”
“저도 이의 없습니다.”
눈치 빠른 대신들 중 몇 명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한 번 물꼬를 트자 황자의 눈치를 살피던 대신들마저 모두 동의의 뜻을 표했다.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면 공작 부부가 공동으로 연구하고 제안한 홍차의 상용화 안건을 진 사태의 정식 대책으로 채택하고, 이후의 연구는 황실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겠소. 바텐베르크 공작, 그리고 공작부인, 두 사람 모두에게 이 공을 치하하고 싶소.”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렇게나 훌륭한 연구를 평민들이 위화감을 느낄까 봐 비밀리에 진행하다니. 이렇게 사려 깊고 백성의 민심을 널리 살피는 품성은 제국 역사에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오. 또한 제국의 미래를 일궈 나가는 위정자들이라면 그대들을 필히 본받아야 할 것이오.”
다시 없을 최상의 찬사였다. 아직 이곳에서의 일을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듣게 되어 클로에는 무척 놀랐다.
게다가 이곳은 국정 회의장이며, 그녀와 알폰스에게 이러한 극찬을 건네는 이는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이고, 또한 그들의 주변을 많은 수의 위정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렇게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아마 그녀와 같은 경험을 해 보는 사람은 제국을 통틀어도 드물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클로에 그녀 역시 최선을 다했고, 많은 노력과 주의를 기울인 것이었다. 수고를 인정받는 일은 언제나 보람 있는 일이었다.
클로에는 무척이나 부끄러워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녀는 놀란 마음을 숨기고 예의 있게 인사했다.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폐하.”
황제는 특유의 소탈한 얼굴로 껄껄 웃었다.
“영광이란 공작부인과 같은 인재를 얻은 내가 더 영광이지. 공작부인, 부디 앞으로도 그 빛나는 지혜와 재능을 아끼지 말아 주길 바라오. 그대의 재능은 집안일만 돌보기에는 너무나도 아깝지 않소.”
클로에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곁에 있던 알폰스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 역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소 짓는 그의 자상한 눈빛에는 뚜렷한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황제의 찬사 역시 기뻤지만 그의 그러한 눈빛은 못 견디게 기뻤다.
클로에는 절로 흘러넘치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마주 잡아 주었다.
‘언제 봐도 애틋하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까.’
그런 그들의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황제는 곧 짐짓 엄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남아 있는 문제란 단 하나. 바로 황자가 이런 소란을 일으켜 애꿎은 공작가에 먹칠을 하려 했던 이유로군.”
“…….”
“…….”
회의장 안의 훈훈한 공기가 쑥 가라앉았다. 대신들은 모두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당사자만큼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서는 평소의 유들유들하고 넉살 좋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딱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서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까 그가 클로에의 비행을 고발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것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시선이었다.
동정과 연민, 걱정, 제국의 황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감정만이 가득한 시선…….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가 그랬던 이유를 모를 사람은 없었다.
아서는 클로에에게 꽤 끈질기게 구애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클로에의 남편에게 결투 신청을 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가 어찌나 요란하게 굴었는지, 수도의 귀족 중에 아서 황자가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질투에 눈이 멀어 이런 일까지 벌이다니. 뒷수습은 대체 어찌하려고…….’
‘아무리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라고 해도 그렇지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황자 전하도 큰일이 났구만.’
‘공작부인에 대한 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이런 일까지 벌이다니, 젊어서 혈기가 왕성한 것은 알겠는데 정말 추하기 그지없군.’
그래서인지 대신들의 이런 생각이 아서의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서는 셔츠 안쪽에서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잠시 엄한 눈초리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황자, 네가 공작부인의 명예에 공개적으로 누를 끼치려고 했으니, 네 명예가 공개적으로 실추되더라도 불만은 없겠지.”
아서가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예, 이의 없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변명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없습니다.”
황제는 그런 아들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황제, 그는 일찍이 황제 자리에 즉위해, 어진 품성과 지혜로움으로 제국을 국내외로 부강하게 만든 현군이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뛰어난 황제도 자기 자식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아서가 어릴 때에 황후와 사별했던 황제는 어릴 때 어미를 잃은 제 자식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일전에 아서가 공작에게 결투 신청을 해 그를 유폐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황제는 단 한 번도 아서에게 벌을 준 적이 없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 녀석이 이렇게 자란 것은 전부 내 과오이지.’
황제의 노력과 인재들의 도움 덕에 제국이 아무리 부강해지고 발전하더라도 아들의 이러한 실수는 그의 오점으로써 영원히 남을 것이었다.
황제가 무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내 명하겠다. 내 어리석은 아들을 가엾이 여겨, 황자가 차기 황제의 재목으로서 스스로를 갈고닦고 품행을 가다듬기를 충분히 기다렸다. 하지만 내가 사사로운 정에 기대어 책임을 유보하는 동안 황자의 추태는 도를 넘었으며, 급기야 황가의 제일 가까운 우군 중 하나인 바텐베르크 공작가에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치고 황궁의 법도를 어지럽혔다. 황자는 나의 탄신 연회 자리에서 바텐베르크 공작에게 규율에 어긋나는 결투 신청을 해 무례를 끼쳤으며, 급기야는 품행이 단정하고 현명하고 자애로워 제국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는 정숙한 귀부인인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을 무고하게 고발하려 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나는 더 이상 황자의 행실을 두고 볼 수 없으며, 황제로서 이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겠다고 판단 내렸다.”
대신들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황제는 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이러한 죄로, 제국의 제1 황자 아서 카노사르 블라디미어를 무기한의 해외 유배형에 처한다.”
“아니, 폐하!”
“무, 무기한이라고?”
“지금 폐하께서 무기한이라고 하셨습니까?”
대신들이 기겁해서 술렁였다.
물론 이번 일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서가 건드린 상대의 위치를 보나, 건드린 정도를 보나, 다른 사람 같았으면 무력 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황제로서는 상대가 바텐베르크 공작과 공작부인인 것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은 황제의 무척 소중한 우군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정말 드물 정도로 대범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그런 품성 덕에 사태가 더 크게 번지지 않은 것이다.
한편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무기한이라고? 저번 신년 연회에 황제 폐하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이쪽에서 요구한 기간은 5년이었는데…….’
벌로써 아서를 해외로 유배시키는 것은 알폰스와 클로에의 생각이었다. 해외 유배는 클로에의 여리고 동정심 많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도, 알폰스의 연적인 아서를 깨끗하게 치워 버릴 수 있는 좋은 방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년 연회 당시 그들이 요구했던 기간은 5년이었다. 클로에가 생각하기에 5년이면 아서의 제국 유일의 황위 계승자라는 위치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아서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품성을 갈고 닦는 데에 충분한 기간이라고 생각했다.
클로에의 놀란 반응을 눈치챘는지 황제가 말했다.
“공작부인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겠소. 내 아들이 이런 짓을 벌여 공작부인께 큰 폐를 끼쳤는데도 그리 관대하시다니, 과연 공작부인께서는 참으로 자비롭고 품성이 따뜻한 분이시구려.”
“아직 많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사자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내 아들은 이미 공작가에 큰 폐를 끼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심에 눈이 멀어 차마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또 한 번 저질렀소. 옛말에 한 번은 실수일 수 있어도 두 번부터는 의도라고 하지 않았소.”
황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과 공작부인의 자비심에 기대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오. 과인은 그저, 이 어리석고 철모르는 아들 녀석이 벌을 받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지길 바랄 뿐이오.”
“…….”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자이자 하나밖에 없는 친아들을 기약 없이 외국으로 추방하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닐 것이었다.
그간 황제를 여러 차례 만나 오면서 클로에는 그의 품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군이지만 그와 동시에 정이 무척 많고 푸근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클로에는 황제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의 뜻을 이해합니다.”
“공작부인께서는 직접 피해를 입은 입장이신데 어쩜 이리 자애로우시오? 황자가 공작부인의 품성을 반의반만이라도 본받는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요.”
그리고 알폰스는 물론 좋았다.
사실 클로에와 다르게 그는 5년이 짧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인생에서 황자의 존재를 영영 지워 버리고 싶었으나 상대의 지위가 지위이기도 했고, 클로에 역시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클로에의 의견에 따랐던 것이다.
‘그녀에게 누를 끼치려 했던 것은 용서할 수 없지만, 결과는 완벽하군.’
알폰스는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클로에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CTC를 개발하고 평민을 위한 홍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진 중독 현상을 완화시킨 그녀의 공적이 공개적으로 알려졌다.
더군다나 그의 제일 큰 방해물인 황자는 그 어리석음이 만천하에 알려져 큰 망신을 당했으며 기한 없이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은 클로에가 결국 이 소동을 알게 되고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조금이라도 느꼈을 부담과 마음의 무게감이었다. 그것만은 이가 갈릴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그녀가 나타난 것은 반론이 거의 다 이루어져 여론이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섰을 때였다는 것, 그리고 이럴 때의 그녀는 놀랄 정도로 단단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여린 마음속에 숨어 있는, 마치 핵과의 말랑한 과육 속의 단단한 씨앗과 같은 강함이 이렇게나 다행일 수가 없었다.
알폰스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걱정스러운 눈으로 클로에를 살폈다.
원래도 눈치가 좋지만 그녀에 한해서는 더더욱 예민한 눈치를 보이는 그가 보기에는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알폰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는 전혀 충실한 신자가 아니었고, 살면서 신을 찾아본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서의 요구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국정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이런 일이 다 일어나다니…….”
“황자 전하께서 그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을 직접 음해하려 하시다니…….”
“쉿, 말조심하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하여튼 간에 이번 일은 제국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 분명하네.”
“황실 역사상 제일 요란한 치정 사건이군.”
오늘 있었던 놀라운 회의에 대해 수군덕거리며 대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건 그렇고 공작부인께서도 정말 대단하시지. 평민을 위한 홍차라니……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네.”
“더군다나 홍차로 진 중독 현상을 해결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정말이지 공작부인께서는 10명의 사내들보다 뛰어난 인재이시군. 여성이 이런 훌륭한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는…….”
“나는 오늘부터 내 딸에게 경제학과 경영학을 가르칠 걸세. 우리 딸이 아들보다 대단한 가문의 자랑이 될 줄 누가 알겠나?”
모두가 목소리를 죽이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워낙에 놀라운 사건이었고, 모두가 흥분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찬사는 클로에의 귀까지 다 들렸기 때문에 클로에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때 대신들 중 어느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런데 황자 전하께서 무기한의 유배라니, 그럼 황위 계승권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쉿, 말조심 좀 하게…….”
위험한 발언이었다. 괜한 불똥이 튈까 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들은 발걸음에 속도를 붙여 재빠르게 해산했다.
하지만 그것은 클로에가 신경 쓰이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황자 전하께서는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자이신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클로에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가방과 짐을 챙긴 알폰스가 다가왔다. 그가 다정한 손길로 클로에의 허리를 감쌌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부인.”
“알폰스…….”
아까와는 달리 회의장에 있던 사람이 대부분 빠져나간지라 그의 손길은 한층 끈적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클로에가 뺨을 붉혔다.
그때였다.
“흠흠.”
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알폰스는 놀라지는 않았지만 방해받은 것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들을 부른 사람은 황제였다. 대신들은 물론 아서 황자까지 회의장을 빠져나간 이때, 공작 부부와 함께 황제 역시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좀 민망한 듯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듯해 미안하지만……. 바텐베르크 공작, 그리고 공작부인. 잠깐 괜찮겠소?”
“네, 물론이죠.”
클로에가 먼저 대답했다. 알폰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보기 좋게 그은 얼굴이 무거운 기색을 띠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염치가 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아까 황자가 했던 말 말이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알폰스는 황제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눈치챘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고발이 사실이 아니라면 황자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발언 말씀이십니까.”
“……황자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클로에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서의 그 발언은 회의 초반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듣지 못했다.
황제는 대단히 괴로운 얼굴을 했다. 주름이 있어도 나이에 비해 몹시 건강해 보였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20년 정도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정말 경솔한 발언이었지. 하나뿐인 황위 계승자라는 놈이 그렇게나 아둔하고 생각이 짧을 줄 누가 알았겠소.”
“…….”
“공작, 공작부인. 이번에 황자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고 있소. 유배가 아니고 당장 황자 직위를 박탈시켜도, 지하 감옥에 투옥시켜도 그 녀석은 할 말이 없을 것이오.”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과인이, 아니 내가, 황제가 아닌 한 명의 아버지로서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겠소. 황자의 그 무책임한 발언은 못 들은 것으로 해 줄 수 있겠소? 그렇게나 어리석디어리석은 망나니 같은 아들이지만 나는 도저히 그 녀석을 포기할 수가 없소. 차라리 아들의 죄를 내가 물어 황위를 내려놓으라면 내려놓겠소. 하지만 아들 녀석은……. 참으로 수치를 모르는 간청이지만 나는 그 녀석이 언젠가는 정신을 차리고 사람 구실, 황자 구실을 하길 기대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다오.”
황제의 진솔한 말에 클로에는 마음이 아파 왔다.
‘황제 폐하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은 좋은 분이신데, 어째서 이런 분 아래에서 황자 전하 같은 분이 태어났을까.’
클로에는 새삼 좋은 부모 밑에서 꼭 좋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만일 나와 알폰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아이의 교육은 정말 신경을 많이 써야겠어. 반드시 현명하고 속이 깊은 아이로 길러 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클로에가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희는 황제 폐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 역시 황자 전하께서 잘못을 뉘우치고 성숙해지셔서 폐하의 뒤를 잇는 훌륭한 성군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답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알폰스는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 예상은 했지만 정말 무른 사람이군.’
솔직히 그로서는 유배가 아니고 황자가 탄 배를 뱃길에 침몰시키는 편이 더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착하고 여린 마음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그는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쨌든 알폰스의 그런 속마음은 알 수 없는 황제로서는 큰 감동을 받은 듯했다. 그의 소탈하고 자상하지만 황제라는 지위에 어울릴 정도로 위엄 있던 얼굴이 거의 울 것처럼 변했다.
“정말이지 공작부인께서는……. 그대의 이러한 은혜와 공덕을 나, 조지 왈트발 메르세데스 블라디미어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오. 맹세하건대 제국과 황실은 언제까지나 바텐베르크 공작가를 보위하고 지지하는 데에 아무것도 아끼지 않을 것이오.”
황제는 가슴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 내며 말했다.
“그대들은 이 나의 인생에 있어 언제까지나 최대의 우군이자 최고로 신뢰하는 벗일지니, 행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좋소. 언제라도 이 내가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도우리다. 이는 내 이름에 걸고 하는 맹세이니 믿어도 좋소.”
“영광입니다, 폐하.”
“영광입니다.”
클로에가 부끄러움과 송구함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알폰스 역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으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지나가고 있었다.
‘황제는 한 번 뱉은 말에는 책임을 지는 자다. 황실에 큰 빚을 지운 것은 언제고 공작가와 그녀에게 이익이 되겠지. 나쁘지 않은 거래다.’
그가 겉으로 보기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모를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기 전에는 황자는 제국에 발길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가 도저히 그 헛된 마음을 거두지 못하거나, 끝끝내 경솔한 언행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를 완전히 처리하는 것은 그때가 되어도 상관없겠지.’
그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위험한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황제와 클로에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황자 전하를 보내실 유배지는 정하셨나요?”
“생각을 해 보았는데, 온이 어떨까 싶소. 황자를 외국의 어느 국가에 거주하게 하는 일은 큰 외교적 신뢰를 나타내는 일이지. 오랜 시간 동방과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바로 얼마 전부터 외교 관계에 빛이 보이고 있던 참이지 않겠소. 이 기회에 온과의 외교도 더더욱 돈독하게 하고, 황자가 동방의 이국적이고 훌륭한 문화를 배워 온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훌륭한 선택이세요. 동방의 문화와 철학, 사상은 정말 배울 점이 많죠. 분명 황자 전하의 정신 수양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제국의 문화만이 세계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는데, 동방의 문화 역시 훌륭하고 본받을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역시 전부 공작부인의 덕택이 아니겠소. 공작부인은 정말 여러모로 제국과 황실의 은인이시오.”
“부끄럽습니다. 저는 아직 여러모로 배움이 부족한걸요.”
클로에가 겸손하게 말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는 자기 아들이 그녀의 반의반의 반만큼이라도 현명하고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웠으면 자신은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몇 번이나 연거푸 반복했고, 그 말은 클로에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 * *
한편 아서는 황자 궁에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는 길에 십수 명이나 되는 근위 기사가 따라붙었다. 아서가 자신의 방에 들어간 이후로도 근위 기사들은 그의 방문과 창문 앞을 빽빽하게 지키고 섰다.
그들은 자신들이 황자를 특별히 보호하라는 황제의 명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아서는 바보가 아니었다.
‘내가 또 행패를 부리거나 도망을 칠까 봐서 감시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행패를 부리거나 도망을 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도 없었다.
변명할 여지 없이 완벽한 패배. 완벽한 망신. 완벽한 실책……. 그의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자존심은 맥없이 짜부라졌다.
‘내일이면 수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져 있겠지. 아서 황자가 짝사랑과 질투에 눈이 멀어 공작부인과 공작을 음해하려 했다고. 하지만 그는 멍청하고 경솔하게 군 탓에 공작 부부의 상대도 되지 않고 패배했고, 황제의 격노를 사서 해외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는 걸로……. 그리고 공작 부부는 황자의 음해에도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한 데다 진 문제의 훌륭한 해결책을 찾아낸 공로를 높이 칭송받을 것이고.’
이 일에 대해 사교계 전체가 얼마나 수군거릴지 뻔했다.
일전에 그가 알폰스를 상대로 결투 신청을 했던 일도 대단히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공작부인에 대한 열정을 감당하지 못한 아서 황자가 공작을 상대로 경솔하고 무례한 언행을 했으나, 큰 망신만 당하고 물러났다고 말이다.
아서 황자의 평판은 옛날부터 대단했다. 그는 비록 망나니에다 안하무인격으로 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동경했다.
그는 성실하지는 않아도 영리하고 재능이 빛났다.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검사 중 하나이자, 제국 유일의 황위 계승권자였다. 게다가 사람, 특히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굉장히 잘생긴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이런 그에게 거만함, 방자함은 흠이 아니라 또 하나의 매력으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는 언제나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영향력에 있어서 태풍의 눈이었다. 여자들은 그에게 눈길 한번 받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했으며, 남자들 역시 그에게 줄 한번 잘 대어 보려고 온갖 애를 썼다.
‘공작 부부만 쏙 빼놓고 말이지.’
하지만 공작 부부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서 황자와 함께 또 다른 영향력의 태풍의 눈이었던 알폰스 바텐베르크와, 한때는 사교계의 웃음거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새로운 별이 된 클로에만은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클로에는 단 한 순간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내 평판도 이제 끝이군.’
클로에가 과거에 아서 황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아서 황자는 그런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소문을 낸 사람이 바로 아서, 그가 아니었던가.
그랬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매달리고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늘어지다 못해 이런 대형 사고까지, 그것도 연달아 두 번이나 쳤으니.
사교계의 호사가들은 이런 재미있는 씹을 거리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사교계에서 제일 우습고, 멍청하고, 한심하고, 구차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당장 내일부터 달라질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생각하면 괴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클로에에 대한 후회였다.
그녀를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차라리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사교계의 광대 취급을 받더라도, 세계의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모두가 그를 우습고 한심하게 여기더라도 그녀의 마음 하나만 얻을 수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다.
하나하나 애타고 간절한 후회로 남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던 그때에 그녀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고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았더라면. 그녀의 마음을 좀 더 진지하게 대하고 그녀를 존중했더라면. 그녀의 사랑스러운 점, 존경할 만한 점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찾아냈더라면.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어 외롭고 쓸쓸하고 기댈 곳 없었을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어 주었더라면. 그녀의 방패가 되고 검이 되어 무수한 악의와 험담 사이에서 그녀를 지켜 주었더라면.
그녀를 웃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그녀를 잘 대해 주었더라면……. 소중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공작이 아니라 내가 되었을까. 그녀의 성씨는 공작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되었을까.’
백번 해 봤자 아무런 소용없는 헛된 생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간절해도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전부가 눈을 돌리면 비눗방울처럼 깨어질 백일몽 같은 망상이다.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것도, 그녀의 마음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도, 그녀를 비웃었던 것도,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자신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만했던 것도, 그녀의 감정을 믿고 그녀를 함부로 대했던 것도…….
전부 자신이 아니었던가.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감이 뼈에 사무치고 가슴을 찢었다. 몸도 혼도 전부 갈라져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그녀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중한 존재처럼 그녀를 아끼고 존중해야 했는데…….
하지만 그 무수한 기회를 놓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의 마음속에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추태를 벌인 사람 역시 바로 그였다.
사랑하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지는 못할망정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그녀에게 이런 폐를 끼치려고 했다니……. 그녀의 명예에 흠집을 내려고 그토록 애를 썼다니…….
죽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이렇게까지 교만하고 우둔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 있을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미래에, 삶에, 평생에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끝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 * *
클로에는 자신이 CTC 홍차의 개발자이며, CTC 홍차를 처음 판매하기 시작한 것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CTC 홍차의 상용화와 진 중독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 개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평민들 입장에서는 편하게 여기던 홍차 가게의 사장이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을 거야.’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좋은 일은 이름을 밝히는 순간 퇴색되어 버리고 마는 거니까……. CTC 홍차를 개발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밝히면 분명 내 명성은 오르겠지. 높은 작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의 생활에 신경을 쓰는 공작부인 같은 명목으로 말이야.’
‘하지만 내가 진 중독 문제와 평민을 위한 홍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나 자신의 이름을 높이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는 평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나 자신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아. 홍차를 평민들 사이에서 상용화시킨 사람이 나라고 내 이름을 밝히는 순간, 좋은 뜻에서 이 일을 시작했던 내 의도도 빛이 바래고 말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되도록 비밀로 하자. 영원히 비밀에 부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오래 말이야.’
하지만 진실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밝혀지게 되고 말았다.
모두 그녀의 흠을 하나라도 잡으려고 애를 쓴 아서 황자의 덕분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CTC 홍차와 공작부인의 비밀이 국정 회의가 있었던 바로 다음 날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을 들었어요? 요즘 평민들 사이에서 홍차가 유행하고 있대요. 평민들도 사서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홍차가 개발이 되었다나 봐요.”
“어머, 그것참 신기하네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을까요?”
“자세한 원리는 저도 모르지만, 그 저렴한 홍차의 개발자가 바로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시래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라고요? 그분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실 만도 하죠. 차에 관한 한 제국 최고의 전문가이시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공작부인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평민들을 위한 홍차를 개발하시다니…….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공작부인께서는 정말 자애로운 분이시네요.”
“정말이지 귀족의 모범 같은 분이에요.”
혹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민들 사이에서 저가의 홍차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개발자가 설마 공작부인이셨을 줄은…….”
“사실 제국 내에 그런 게 가능할 사람이라면 그분밖에는 없기는 하지. 이번에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졌을걸.”
“금전적인 이득을 위해서라면 평민을 위한 홍차를 만들기보다는, 하시던 대로 귀족들을 위한 사업에 집중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알고는 있었지만, 공작부인께서는 금전적 이익보다는 제국민들의 삶에 더더욱 신경을 쓰시는군.”
“평민들 사이에서 홍차가 상용화되면서 진 중독 문제도 해소되고 있다고 들었네. 정말 대단한 분이시지.”
물론 가끔은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귀부인이 평민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은 품위 없고 정숙하지 못한 일이다’라든가 ‘홍차 가게에서 사용하는 광고 문구가 지나치게 천박하다’ 같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체적으로 클로에의 뛰어난 성과를 질투하거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클로에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끄는 일과 평민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오히려 클로에의 개방적인 가치관에 감화되는 사람들마저 생길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와 공작가의 위세와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은 이미 대단했기 때문에, 이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울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의견은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 소식 들으셨나요? 지난 국정 회의에서 황자 전하께서 공작부인을 무고하게 음해하려고 하셨다면서요?”
“물론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작부인과 그 부군이신 공작 각하께서는 대단히 현명하고 자비롭게 대처하셨다고 하더군요.”
“황자 전하께서는 그 일로 황제 폐하의 큰 노여움을 사서 결국 장기간의 유배를 가게 되셨다던데요.”
“황자 전하께서 그러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무리 공작부인을 연모하시더라도 그렇지, 설마 사랑하는 사람을 상대로 그런 행동을 하시다니요. 저도 어릴 적엔 그분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번 일은 정말 실망스러웠어요.”
“수도의 귀족 여성들 중 한때나마 그분을 마음에 담아 보지 않은 여인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공작부인께서 혼전에는 황자 전하를 사모하셨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설마 두 분의 상황이 이렇게나 뒤바뀔 줄이야…….”
“예정된 수순이죠. 황자 전하께서는 그때 당시에 공작부인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더군다나 이제는 공작부인의 곁에 훨씬 멋지고, 위엄 있고, 능력도 뛰어난 데다 공작부인을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겨 주시는 공작 각하가 계시잖아요? 제가 공작부인이었어도 황자 전하께는 눈길도 드리지 않았을 거예요.”
“맞아요. 수도에는 공작 각하께서 공작부인을 얼마나 아껴 주시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걸요.”
아서의 예상대로 국정 회의에서의 그의 추태는 사교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황자의 매력을 동경하던 사람,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 그의 경박한 행실은 좋게 보지 않아도 타고난 영리함과 재능만은 인정하던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아무리 좋게 봐 주려고 해도, 아서가 이번에 저지른 행동은 도저히 변호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성실하고 언제나 모범적인 품행을 보이는 정숙한 귀부인을 무고하게 모욕했다. 그것도 과거 자신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던 상대에게 사랑에 빠져, 시기심과 질투를 견디지 못하고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그 아서 황자가 이렇게 추하고 구차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실망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더군다나 황자를 상대로 공작부인과 공작이 보인 현명하고 품위 있지만 자비로운 대처가 비교되어 더더욱 그랬다.
“황자 전하께는 정말 실망이에요. 어쩜 그렇게 품위 없는 일을 하셨는지. 그것도 그 공작가를 상대로…….”
“공작가는 황실의 오랜 우군이었으니 황제 폐하께서 노여워하실 만도 하죠.”
“워낙 겸양이 부족하고 과시적인 분이셔서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솔직히 그 훌륭한 황제 폐하의 슬하에 어떻게 이런 분이 나왔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그에 대한 평판이 어찌나 나빠졌는지, 그가 한동안 제국을 떠나 있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일 정도였다.
어찌 됐든 이번 사건으로 사교계에서 클로에와 알폰스에 대한 평판은 더욱 오르고, 아서에 대한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귀족들보다는 훨씬 뒤늦게, 느린 속도였지만 CTC 홍차의 비밀은 평민들 사이에서도 퍼져 나갔다.
“자네들 그 소식 들었나? 우리가 요즘 마시는 저렴한 홍차를 개발한 사람이 사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었다네. 게다가 스미스의 홍차 가게의 사장도 사실 스미스가 아니라 공작부인이었다더군!”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가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맞아.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분께서 뭐가 아쉬워서 평민들을 위한 홍차 같은 것을 만들겠나?”
“거참 속고만 살았나. 내 말이 맞다니까! 지금 다들 이 이야기로 야단이야. 곧 신문사에서 이 소문에 대한 기사도 낸다고 하던데!”
“하긴, 생각해 보면 저렴한 홍차 같은 대단한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러고 보니 공작부인께서는 우리 같은 아랫사람들에게 굉장히 다정하고 친절한 분이시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네. 우리 옆집 사는 아주머니의 딸이 공작가의 부엌 하녀라고 하던데, 휴가를 내서 집에 올 때마다 공작부인에 대한 칭찬만 한다더군. 자기는 죽을 때까지 공작가에 뼈를 묻을 거라던데.”
“아, 나도 그 얘기는 들었네. 바텐베르크 공작가나 그 가문의 가게에서는 일을 다른 귀족가와 다르게 일이 힘들지 않고, 급료도 잘 쳐준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아니, 그런 귀부인이 있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닐세. 그 아주머니 딸이 하는 말이 글쎄, 공작부인께서 하인들 숙소도 신경 써 주시고 옷까지 두툼하게 지어 주셨다고 하네!”
“그러고 보니 괴혈병의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도 바로 공작부인 아니었나? 덕분에 뱃사람인 제프도 오랜 항해가 무섭지 않다고 좋아하던데.”
“생각해 보니 마부인 내 사돈의 팔촌도 공작부인에 대한 칭찬을…….”
차와 사업에 대한 클로에의 업적은 평민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그런 쪽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공작가에 대한 평판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클로에가 평소 계급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모두 진심으로 대한 덕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일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제국은 계급제가 매우 강한 곳이었다. 귀족들은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같은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클로에의 행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수밖에 없었다.
서민들을 위한 저가의 홍차를 개발한 사람이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라는 소문은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이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무리 아랫것들에게 친절한 분이라고 해도 그렇지, 설마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분께서 그렇게까지 할까?’
‘공작부인씩이나 되어서 뭐가 아쉬워서 평민들에게 홍차를 판단 말이야?’
이런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수도의 평민들이 즐겨 읽는 가십성 주간지에서 이에 관한 특종 기사를 낸 것이 바로 이때쯤이었다.
<특종! 공작부인, CTC 홍차를 개발하다.
지난달 국정 회의에 참석한 익명의 제보자는 요즘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CTC 홍차의 개발자가 바로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라고 밝혔다. 공작부인이 그 드높은 지위와 부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을 위하여 저렴한 CTC 홍차를 개발한 이유는, 아침을 거르기 일쑤인 노동자들로 하여금 간편하고 저렴하게 밀크티의 영양을 섭취하도록 하고 몸에 나쁜 진의 소비를 줄이게 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이러한 훌륭한 의도와 업적에도 불구하고 공작부인은 공로를 한 평민에게 돌리고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는 점에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공작부인이 자신이 CTC 홍차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숨긴 이유는 평민들의 소비생활에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중략)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바텐베르크 공작은 서민들 사이에서도 홍차가 유행하면서 실제로 진의 소비량이 대폭 감소했으며, 노동자들의 영양 상태가 좋아지고 범죄율이 줄었음을 연구결과로 증명해 냈다.
공작부인은 CTC 제조 시설의 동력원을 마나에서 증기기관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고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 연구가 완성된다면 CTC 홍차의 가격은 더욱더 줄어 빈곤층 역시 매일 아침 홍차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 주간지는 평소 수준이 낮은 가십과 흥미 본위의 뜬소문을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제보자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기사의 내용은 무척 정확했으며, 취재에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즐겨 마시던 홍차의 개발자와 판매자의 정체가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은 평민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정말 저렴한 홍차를 개발한 사람이 공작부인이었단 말이야?”
“게다가 그 이유가 우리 같은 아랫것들의 건강을 걱정해서였다고?”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가난한 평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건 별로 돈이 되는 일도 아닐 텐데…….”
“게다가 이런 대단한 일을 비밀로 하고 공로를 평민에게 돌렸단 말이야?”
CTC의 개발자가 클로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사실상 아서 황자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은 큰 무례였지만 장기적으로는 클로에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클로에가 걱정했던 것이 있었다. 자신이 CTC 홍차의 개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평민들이 홍차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민들이 CTC 홍차를 친근하고 친숙하게 여기길 바랐다. 매일 아침 찾는 우유 한 잔이나 구운 빵 한 조각처럼 그들의 생활에 일부가 되어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를 바랐다.
실제로 일반 시민들에게 공작부인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부분의 경우 평생 만나 볼 일도 없는, 마치 구름 위의 천사처럼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만큼 클로에는 자신의 존재가 평민들에게 위화감으로 느껴질까 봐 우려했던 것이다.
“어떡하지, 전부 알려져 버렸네.”
주간지에 자신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는 사실을 클로에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녀의 충실한 사용인들 중에서도 주간지를 구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클로에는 티 테이블 위에 주간지를 펼쳐 두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국정 회의 사건 이후 온 사교계에 CTC 홍차의 개발자가 그녀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을 때부터 결국 평민들 사이에도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요란하잖아. 나에 대한 특집 기사가 이렇게 길고 자세하다니…….’
주간지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특집 기사에는 그녀가 CTC 홍차의 개발자라는 사실부터 홍차에 대한 토막 상식, 괴혈병의 치료법을 발견하고 온의 사절단과의 접견 자리를 컨설팅해 외교 관계에 도움을 준 일, 현재는 식기로도 널리 쓰이는 본차이나를 개발한 일, 플랑드르의 국왕을 대접하는 일을 도와준 일, 뛰어난 사업적 성과와 지속적으로 차의 가격을 낮춤으로써 서민들의 가계에 도움을 주려 노력했다는 사실들, 그 외의 소소한 미담들과 심지어는 평민들이 좋아할 만한 바텐베르크 공작과의 드라마틱한 로맨스 스토리까지 수십 페이지를 할애해 수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가십지답게 눈에 띄는 자극적인 필체와 알록달록한 그림까지. 평소 높으신 분들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마저 눈이 돌아갈 만한 기사였다.
“어머, 세상에. 공작 각하께서 연회에서 공개적으로 바텐베르크 부인에 대한 사랑을 발표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네요. 이런 걸 어떻게 다 취재했는지 몰라.”
옆에서 주간지를 함께 읽던 포트넘 부인이 감탄했다.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키엘이 그러기를 이 주간지는 평소 5쇄 정도를 발간하는데, 이번 호는 무려 40쇄를 넘게 찍었다나 봐요.”
“너무 걱정 마세요, 바텐베르크 부인. 기사는 전체적으로 아주 좋은 내용이에요. 부인에 대한 칭찬밖에 없는걸요. 게다가 공작 각하와의 사랑 이야기는 분명 소녀들이 아주 좋아할 거예요. 어쩌면 부인과 각하의 이야기가 연극 같은 걸로 제작될지도 모르죠.”
포트넘 부인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포트넘 부인은 나름대로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클로에는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졌다.
포트넘 부인은 무척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타입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교 행사에 빠지지 않으며, 많은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달랐다. 그녀는 눈에 띄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무도회나 다과회 같은 사교 행사에 참석해도 언제나 대화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적당한 자리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들 몇 명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요즘은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아서 문제지만…….’
그녀의 명성이 오르면서 그것도 쉽지 않아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러다 보니 포트넘 부인의 눈에는 이 일이 상당히 좋은 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자신에 대한 기사가 이렇게 거대하게 났다는 것이 무척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참을 수 있어.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하지만 민망한 것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평민들이 느낄 위화감과 부담이었다.
‘사람들이 공작부인이 개발한 것이라고 부담을 느껴서 홍차를 멀리하면 어떻게 하지? 이제 겨우 진의 소비량도 줄기 시작했고, 아직 갈 길이 먼데…….’
그런 클로에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포트넘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클로에의 손을 잡았다.
“어떤 걸 걱정하시는 줄은 알겠지만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바텐베르크 부인. 부인은 정말 좋은 의도로 CTC를 개발하신 거잖아요? 평민들도 분명 부인의 좋은 뜻을 알아줄 거예요.”
“포트넘 부인…….”
포트넘 부인이 호언장담했다.
“세상에 부인과 같은 훌륭하신 공작부인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아랫사람들을 이렇게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귀족을 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진심은 통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 기사가 판매량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내기할 수도 있어요.”
“내기라고요?”
포트넘 부인의 말에 클로에가 웃었다.
‘내기를 하자’ 같은 도박을 암시하는 경박한 표현은 정숙한 귀부인들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척 개방적인 가치관을 가진 클로에는 친한 사람들을 상대로 이 표현을 몇 번 썼다. 그 결과, 그녀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기를 하자는 표현이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친구의 따뜻한 말에 까르르 웃던 클로에가 감사 인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은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네요.”
“후훗, 뭘요. 바텐베르크 부인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레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귀부인들은 깜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누구지? 이 시간에는 올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클로에는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방에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여진이었다. 그녀는 급히 달려온 것처럼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공작부인, 그리고 자작부인. 바쁘신 와중에 실례합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여진?”
클로에가 걱정스레 물었다. 여진은 평소 빈틈이 없는 성격이었기에 어지간하면 약속이나 연락도 없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났다는 것은 뭔가 다급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클로에는 테이블 위의 홍차를 권했으나 여진은 손을 내저었다. 잠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던 그녀가 말했다.
“‘스미스의 홍차 가게’의 판매량이 엄청나게 뛰었답니다. 지금의 생산량으로는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을 정도라는데요.”
“네?”
클로에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여진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했다.
“아마 주간지에서 공작부인과 홍차 가게에 대한 기사가 나 화제가 된 것이 홍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기사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작부인이 개발해 판매하는 홍차이니까 고객들이 거리감을 느낄 것이라고요.”
“저도 만일 다른 귀족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판매량이 증가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공작부인의 친서민적이고 다정다감한 이미지가 도움이 된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여진의 말은, 이것은 전부 클로에의 평소 행실의 결과라는 뜻이었다.
언제나 아랫사람들을 존중하고 신분이 낮더라도 다정하게 대했던 그녀이기에 주 고객층인 평민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은 것이다.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신분이 낮더라도 사람이니까 인격을 존중하는 것은 전생의 삶을 겪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녀는 보답을 바라거나 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어머…….”
감격한 클로에가 두 손으로 입을 감싸고 웃었다.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여진이 따라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부인. 이 문제로 많이 걱정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이제 고민거리를 덜어 내셨군요.”
“정말 잘됐어요, 바텐베르크 부인!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진심은 통할 거라고 했잖아요.”
포트넘 부인 역시 기뻐하며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사람들은 홍차를 좋아할 거예요. 앞으로도요! 정말 맛있고, 또 바텐베르크 부인이 정말 정성을 다해 만들었으니까요.”
클로에는 친구를 마주 안아 주었다.
자신의 진심을 인정받고, 또 기쁨을 나눌 소중한 친구가 있다니. 이 이상 행복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여진의 분석 외에도, 평민들 사이의 귀족의 문화를 선망하는 분위기나 공작부인에 대한 동경에 힘입어 CTC 홍차의 판매량은 나날이 호조를 보였다.
홍차의 인기에 힘입어 ‘스미스의 홍차 가게’에서는 저가의 본 차이나 다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홍차 가게에서 판매하는 다구는 귀족들이 쓰는 것만큼 고급스럽고 세련되지는 않았다. 투박한 모양에 밋밋한 민무늬로 매우 단순하게 생겼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구색을 갖추고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 다구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클로에는 싱할라의 CTC 생산 설비를 증설했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CTC 생산 설비의 연구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아서 황자의 출항은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그가 출항할 때의 모습은, 제국 유일의 황자이자 유력한 차기 황위 계승자인 데다가 본디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출국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출했다.
그것은 그의 출항이 몹시 불명예스러운 형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황자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다.
이른 새벽, 항구는 아직 한적한 시간. 호위기사와 수행인이 거의 전부인 배웅식에 참석한 사람은 황제와 황자와 가까운 사람 몇 명뿐이었다.
아서는 연로한 아버지가 이 이른 시간에 자신을 배웅하러 나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워낙 연로한 데다가 최근 건강도 좋지 않아서 행사의 참석도 되도록 줄이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들이 가는 길을 직접 배웅하겠다는 고집을 한사코 꺾지 않았다.
온으로 떠나는 배의 돛이 올랐다. 이제 아서가 승선해야 할 때라는 것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건강히 잘 다녀오거라. 네가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
“네가 얼마나 어리석고 치기로 가득했는지 너 자신을 돌아보고 깊이 반성하거라. 다시 만날 때는 지혜롭고 자비롭지만 자신에 대한 겸양을 잃지 않는, 훌륭한 황자가 아닌 훌륭한 인간인 네가 되었으면 한다.”
아서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대답했다.
“예.”
황제는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결국 말없이 팔을 뻗어 든든한 덩치의 아들을 끌어안았다.
아서에게서 팔을 떼어 낸 황제는 소매로 슬쩍 눈가를 찍어 냈다.
“원 나도 참 늙어서 주책이지. 내가 원래는 안 이랬는데, 나이가 드니까 감정이 풍부해져서…….”
“아니에요.”
아서가 대답했다.
그는 걱정과 근심이 많은 아버지를 향해 웃어 주고 싶었으나 얼굴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의 잘생긴 입술이 호를 그리려다 애매한 지점에서 멈춰서 파르르 떨렸다.
“그만하고 가거라. 다들 널 기다리지 않느냐.”
“예. 다녀오겠습니다.”
황제의 채근에 못 이겨서 아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승선하는 그의 등 뒤로 수행인들과 그에게 할당된 호위 기사가 끝도 없는 긴 행렬을 만들었다.
배가 출항했다. 어둑어둑한 하늘의 끄트머리에 떠오르는 붉은 일출을 향해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서는 배의 선단에 서서 항구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이끌고 온 수행인들의 행렬로 그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항구가 거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행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서는 생각했다.
‘이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몰라.’
수도에서 그의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를 동경하고, 선망하고, 말 한 번 붙여 보려고 애쓰던 사람들 중 그의 추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그건 괜찮지.’
그렇게나 남의 시선, 평판을 신경 쓰던 그였는데 한 번 잃고 나니 의외로 별거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이게 자신이 응당 받아야만 할 벌이라고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겪었던 괴로움과 같았다. 아니, 그녀가 겪었던 괴로움의 극히 일부였다. 그가 그렇게나 우습게 여기고 비웃었던 그녀의 지나간 아픔.
아서는 문득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편지를 받아 봤으려나.’
그는 지난 국정 회의 이후로 한 번도 클로에를 만나지 못했다. 알폰스는 황궁 안에서 오며 가며 멀리서 언뜻 봤지만 괴로워서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사과는 만나서 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상대가 자신과의 만남을 전혀 기꺼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서 역시 알고 있었다. 사실 괴로운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그는 자신의 미숙함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경험으로 인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만일 그 얼굴을 마주한다면 또 어떤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될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밤 편지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고작 입에 발린 말 몇 구절로 용서받을 만한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죄책감이라도 덜어 보려고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인 그녀에게 아무런 사과의 말도 하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다.
‘밤늦은 시간에 보냈고, 아직은 이른 시간이니 자고 있겠지. 아마 그녀가 내 편지를 받아 보는 건 한두 시간쯤 뒤가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였다.
“황자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지만…….”
누군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아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종들 중 한 명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황자 전하께 전해드려야 할 서신이 있습니다.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보낸 것입니다.”
“뭐?”
아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시종이 내미는 서신을 받아 들었다.
편지의 겉봉에 쓰여 있는 이름, 그리고 편지 봉투의 입구를 봉하고 있는 인장, 그 모든 것이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아서는 순간 주저했다.
‘내가 이것을 읽어 봐도 될까?’
그녀의 대답이 두려웠다.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을까 봐.
수도에서의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진 지금 그가 제일 두려운 것은 그녀의 말이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시선, 그녀의 평가뿐이었다. 우습게도, 그녀에게 그런 큰 폐를 끼친 지금인데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갈등하던 아서는 결심했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내 죗값이지. 그녀의 진심을 외면해서는 안 돼.’
아서는 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편지 봉투의 밀랍 봉인을 뜯었다. 편지지를 꺼내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펼쳤다.
―아서 카노사르 블라디미어 황자 전하께.
격조하였습니다. 날이 여전히 차가운데 귀체 강녕하신지요?
보내 주신 서신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업무를 하던 중이었기에 늦지 않은 시간에 받아 볼 수 있었습니다.
진심 어린 말씀과 사려 깊은 배려에 무척 감사드립니다. 그때의 일은 대단히 뜻밖이었으나, 황제 폐하와 부군의 배려로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중략)……
이후 다시 만나 뵙는 날에는 피차 웃는 얼굴이었으면 합니다.
그때까지 황자 전하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클로에 바텐베르크 드림.―
아서는 다 읽은 편지지를 추슬렀다. 편지지를 편지 봉투에 넣고 편지 봉투를 품에 갈무리해 넣었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붉은 앞머리를 쓸었다.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머리카락 틈 사이로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착해 빠져서는…….”
과연 이 몇 년의 유배 기간 동안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봄이 되었다. 정원에 도톰하게 깔렸던 흰 눈이 사라지고 파릇파릇한 초목이 돋기 시작했다.
새봄을 맞이하기 위해 공작가도 야단이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부지런히 두꺼운 솜이불을 개어 보관하고 봄 침구와 봄옷을 꺼냈다.
저택의 방마다 커튼과 장식품도 봄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꺼내 새로 배치해 놓았다.
물론 클로에 역시 바빴다. 올봄에 어울리는 차를 연구하고, 트리플 스위트의 본점은 물론 계속해서 개업하는 분점 역시 신경을 써야 했다.
“업무를 분담할 사람을 더 고용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클로에의 이야기를 듣던 알폰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생각해 봐야겠어요. 여진만큼 뛰어난 사람을 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아, 그건 그렇고 이제 곧 올해의 햇 다즐링 퍼스트 플래쉬가 나올 시기예요. 올해의 햇 다즐링이라니……. 작년과는 어떻게 다른 향과 맛을 보여 줄지 기대돼요.”
클로에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귀여웠지만, 차를 마시면서 또 차 마시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알폰스가 문득 물었다.
“오늘 또 플랑드르의 여왕에게서 편지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요. 카타리나 2세께서 또 편지를 보내셨어요.”
“어떤 용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언제나와 똑같아요. 플랑드르를 위해서 일할 생각은 없느냐는 제안이요…….”
클로에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여왕 전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정말 감사하고, 사실 조건도 금전적인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래도 저는 아직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도 마셔 보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차가 무궁무진한걸요.”
그런 그녀의 열정이 변함없이 존경스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알폰스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부인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제가 곁에 있을 겁니다.”
“어머, 우리 공작님께선 어쩜 이렇게 말씀을 듣기 좋게 하실까.”
“부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클로에는 웃으면서도 부끄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알폰스는 픽 웃으면서 그녀의 곁에 가 앉았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으음,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저 요즘은 체력 많이 좋아졌는걸요. 춤 연습을 계속하고 있으니까요.”
클로에가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알폰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가 속삭였다.
“부인의 체력 향상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매일 밤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네……?!”
올리브빛 눈동자가 박힌 클로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알폰스가 말했다.
“체력이 좋아지셔서 다행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정말…… 당신도 참. 엉큼하시기는.”
클로에가 곱게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티룸의 창가로 발을 옮겨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완연한 신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쉬는 것도 좋은데, 사실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알폰스는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그가 말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CTC 사업의 성공적인 안착도 기념하는 겸 해서.”
클로에의 눈이 반가운 듯이 반짝였다.
“여행이요? 좋죠. 저번에 갔던 별장도 정말 좋았어요.”
“그곳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이번에는 바라트 왕국의 다즐링으로 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 다즐링이요?”
“일전에 말씀하셨지 않으셨습니까. 부인께서 제일 여행하고 싶으신 곳이라고.”
그게 벌써 언제 적의 일인지. 클로에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세상에, 그걸 기억하고 계셨다니…….”
그녀의 멍한 얼굴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알폰스는 그녀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부인의 일인데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클로에의 얼굴이 전구라도 켠 듯 밝아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한 얼굴로 알폰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저, 다원에 가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생각만 해도 꿈만 같아요. 일정은 책임지고 비워 놓을게요.”
“무리하지 마십시오.”
“언제 가는 거예요? 세컨드 플래쉬 시즌? 아니, 사실 저는 퍼스트 플래쉬 시즌도 나쁘지 않아요. 아, 어떡하지. 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그러자 알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올렸다. 그의 왼손 검지가 그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 의미를 이해한 클로에가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알폰스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정말 이걸로 되겠어요?”
“아니요, 아무래도 부인께서 뜻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네?”
클로에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알폰스는 여유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며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입맞춤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방금 부인께서 하셨던 것이고, 또 하나는…….”
“……아.”
클로에가 그제야 깨달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굴렸다가, 부끄러운 듯 푸스스 웃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결심한 듯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곧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아까와 같은 짧은 입맞춤이 아니었다.
창문으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열어 둔 창문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완벽한 봄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