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
“사장 말이야, 사장. 지금 당장 봐야겠으니까 얼른 나오라고 그래.”
“아, 그, 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전형적인 평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서의 옷차림과 분위기를 보고 그가 고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여기 사장입니다만,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서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그가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네가 진짜 여기 사장이야?”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한 번……. 서류 가져와 봐.”
“네?”
“이게 제대로 된 가게인지 봐야겠으니까 영업 허가증, 부동산 거래 증명서, 신분패…… 다 가져오라고.”
이건 억지였다. 제국법상 사업 허가제 같은 것이 존재하긴 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하는 것도 평민의 거주지에서는 암묵적으로 용인해 주곤 했다.
법이 그렇게 엄격하지 않을뿐더러, 평민들이 얼마나 영세하게 사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민의 거주지에는 당장 오늘 생긴 가게가 일주일 뒤 없어지고 또 다른 가게가 생기는 일이 잦았다. 가게들의 규모도 크지 않아서 딱 한 뼘 크기였고, 파는 물건도 귀족들 기준에서는 아주 싸구려였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 바쁜 평민들이 그때마다 매번 절차도 복잡한 영업 허가를 받으러 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제국에서는 자릿세를 제때 내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진과 같은 특수한 품목이 아니라면 평민 거주지에서의 무허가 불법 영업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
그걸 아서가 모를 리도 없을 텐데 그는 이렇게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거 큰일 났네. 이 가게도 오늘부로 끝인가.’
‘대체 어쩌다 높은 분의 심기를 거슬러서…….’
‘다른 식료품점에서도 홍차를 팔게 되긴 했지만 여기가 제일 쌌는데.’
손님들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알겠습니다.”
사장은 대단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한 뒤 어디론가 갔다가 서류 더미를 들고 왔다. 그가 서류를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영업 허가증이고, 이게 이 가게의 부동산 거래 증명서와 토지 증명서입니다. 아, 이건 싱할라로부터의 정식 수입 증명서와 상단과의 거래 증명서, 싱할라 왕정으로부터 직접 받은 품질 증명서, 거래하는 다원의 증명서, 그리고 이것은 제 신분패입니다.”
아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꺼내 살펴보았다.
그런데 황자인 그가 보기에도 서류들은 모두 적법적인 절차를 밟은 것들이었으며 제국 황실과 싱할라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하다못해 평민들은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수십 장에 달하는 영업 허가증마저 있었다. 아무리 꼬투리를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서의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결국 서류로 트집 잡는 것을 포기했다.
“……네가 사장이라면 새로운 홍차 제조법을 개발한 사람도 너인가?”
“CTC 제조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어떻게 평민 주제에 그런 걸 개발할 수 있었지?”
“저희 아버지가 무역상이셔서 온 가족이 잠시 싱할라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그리고 제 친척 중에서 공학자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사장의 별로 궁금하지 않은 집안 사정 설명이 이어졌다. 아서는 그것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말했다.
“아, 됐어, 됐어. 그 얘긴 알겠어. 홍차를 대량 생산하는 제조법을 개발했다니 대단하네. 하필이면 제국에서 공작부인이 홍차 유행을 일으킨 시점에 말이야. 안 그래?”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말씀이시군요. 그분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요.”
“만난 적이 없다고? 그렇군.”
아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트리플 스위트 같은 귀족을 위한 가게와 달리 이곳은 오로지 한 종류의 품목만 취급했다. 매대마다 싱할라 CTC 홍차라고 쓰여 있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취급하는 홍차는 전부 싱할라산뿐인가?”
“아직은 그렇습니다. 다른 상품들은 천천히 출시할 예정입니다.”
“그럼 싱할라산 아쌈은 언제 나오지?”
“곧 나올 예정입니다.”
사장의 대답을 들은 아서는 모자를 눌러쓰며 몸을 돌렸다.
“뭐, 그럼 난 가 볼 테니 장사 잘 하라고. 앞으로는 조심하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서류도 다 갖춰놓은 사장에게 대체 뭘 조심하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인 사장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서는 홍차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가게에 가득 차 있던 달콤하고 구수한 홍차 향이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로 씻겨 나갔다.
그가 씨근거렸다.
‘뭐, 싱할라산 아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쌈은 클로에가 좋아하는 홍차 중 하나였다. 진한 맛과 구수하고 달큰한 몰트 향의 풍미가 특징인 차였다. 트리플 스위트에서 제일 먼저 취급하기 시작한 홍차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쌈은 싱할라가 아닌 바라트 왕국의 지명이다. 바라트 왕국의 아쌈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쌈 품종의 홍차를 아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CTC를 개발해 낸 놈이 싱할라산 아쌈이 뭐가 이상한 줄도 모른단 말이야? 게다가 싱할라에서 살아 본 적이 있다면서? 웃기지 말라고 그래!’
물론 이 사실을 아서가 알고 있었던 것 역시 클로에 덕분이었다. 그의 차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부가 그녀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거짓이 아니니까.
‘틀림없어. CTC를 개발해 낸 사람은 저 평민 놈이 아니고 클로에야. 왜 다른 사람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CTC를 개발한 공을 평민에게 돌린 채 자신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게를 연 사람도 분명 그녀겠지.’
광장을 가로지르던 그의 발걸음이 멎었다.
‘왜 이 사실을 숨긴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 속아. 애당초 공작부인씩이나 되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저런 한심한 광고지를 붙여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충분히 문제가 될 만한 사안이라고. 세금 문제도 있고, 등록법상의 문제도 있으니까…….’
평민 거주지에서 사업을 할 때 영업 허가를 굳이 받지 않아도 된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으나 그건 사업가 역시 평민일 때의 이야기다.
귀족이 평민을 상대로 사업을 한 전례가 일단 거의 없긴 하지만, 몇 안 되는 전례에 따르면 이런 경우 영업 허가를 제대로 받아야 했다. 귀족이 하는 사업과 평민이 하는 사업은 규모가 다르기도 하고, 평민처럼 생활의 어려움을 감안해 편의를 봐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까 본 영업 허가증에 따르면 허가는 저 바지사장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어. 클로에가 아니지. 이건 명백한 불법 영업이야. 제국의 공작부인이라는 사람이 불법 영업을 하고 있는 거라고.’
아서가 씨근거렸다.
‘그녀가 저지르고 있는 짓을 모두에게 알려야 해. 이건 절대 다른 의도가 있는 행동이 아니야. 제국의 황자로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법행위를 묵인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평민들 사이에서 홍차가 유행해서 진 중독이 잦아들까 봐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는 애꿎은 담벼락을 한 번 걷어찼다. 그가 타고 온 말이 놀라 히히힝 울었다. 그는 황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아서는 자신의 친부인 황제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당장 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부탁했다.
“발표해야 할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모두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에요.”
황제는 황자가 준비하던 진 중독 문제의 해결방법에 대해 발표하려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모양이구나. 장차 제국을 물려받을 너의 지혜는 어느 정도일지 궁금한걸.”
아버지가 기대하는 말에 아서는 양심이 콕콕 찔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며 발표를 준비하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날은 알폰스의 외근이 없는 날이었다. 집에서 해야 할 업무도 거의 없어서 그는 오래간만에 아내와 단둘이 오붓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겠구나 했다.
클로에의 티룸에서 그녀가 직접 우려 준 차를 마시고 있는데 황궁에서 갑작스럽게 서신이 도착했다.
알폰스는 서신을 열어 보았다. 그의 미간에 미미한 금이 가는 것을 본 클로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세요?”
이마에 손가락을 짚고 있던 알폰스가 대답했다.
“긴급회의 호출입니다. 지금 당장 입궁하라는군요.”
“어머.”
알폰스는 모르겠지만 클로에는 조금 안도했다. 그의 눈빛이 친구의 사망 소식이라도 본 것만큼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그녀도, 그도 바쁘지 않고 여유가 있는 날은 흔치 않다.
알폰스는 내심 그녀가 붙잡아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라든가, 오늘은 나랑 있어 주면 안 돼요? 같은 말들.
‘하지만 그러지 않는군.’
그렇게나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의연했다. 결코 어리광을 피우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알고는 있지만 그녀가 붙잡는 말을 꼭 한 번쯤은 들어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네?”
“부인의 곁에 있는 것보다 중요한 업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알폰스가 은근하게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기도 했다. 그는 흠 하나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의 근무 태도는 그 정도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황궁의 정무가들 중 그 정도의 성실함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평소의 성실함을 보나, 위치와 권력을 보나 알폰스가 오늘 하루 정도 결석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클로에 역시 그가 떠나는 것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안 돼요. 긴급회의라고 하잖아요. 알폰스가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서 가세요. 자, 제가 배웅해 드릴 테니까요. 차는 다녀오신 다음에 마저 마시도록 해요.”
어찌나 단호한지 손이라도 베일 것 같았다.
알폰스는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라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녀다운 반응이군.’
알폰스가 속으로 웃었다. 그녀가 붙잡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녀의 그런 강인함도, 단호함도 사랑했다.
그녀가 붙잡는 것을 보는 것은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고 알폰스는 클로에의 말에 따랐다.
그는 외출용 코트를 입고 나갈 채비를 한 뒤 현관으로 나왔다. 배웅해 주겠다는 약속대로 클로에가 그를 따라 나왔다.
“날이 아직 춥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알폰스가 떠나는 것만 보고 들어갈게요.”
아직 겨울이었다. 클로에는 두꺼운 숄을 두르고 나왔지만 알폰스의 눈에는 그것으로 부족해 보였다.
그녀가 배웅해 주는 것은 좋았지만 그녀가 추운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알폰스는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해서 인사를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는 것으로 축약했다.
“별일 아닐 겁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다리고 있겠다는 그 별것 아닌 말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 그가 어디에 있건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집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의욕이 생겼다.
알폰스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참았다. 입을 맞췄다간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다정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자 곧 마차가 출발했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문을 통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기가 쌀쌀한데도 그녀는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현관에 있었다.
회의실로 가려던 아서는 알폰스가 입궐하는 것을 보았다.
연적에게 이런 평가를 내리고 싶진 않지만 아서가 보기에도 알폰스는 썩 흠잡을 데가 없는 남자였다. 얼굴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는 옷매무새부터 완벽했다. 누구에게도 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단정함과 품위. 단지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위엄과 중압감.
바텐베르크 공작이 지나칠 때마다 계급의 고저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옛날엔 좀 재수 없고 자신이랑 안 맞는 타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같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와의 충돌이 많아졌다.
그에게 질투를 느꼈다. 시기심을 느꼈다. 그에게 기가 눌려 그가 조금 두려웠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고 저런 놈을 선택한 건 클로에가 실수한 거야.’
아서는 오늘의 발표를 통해 보여 줄 생각이었다. 공작과 클로에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아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주 오는 알폰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알폰스가 그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가 입도 열지 않고 목례를 했다.
이건 아서 황자 따위는 완전히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다.
아서는 화가 났지만 꾹 눌러 참았다.
‘참자, 참자. 어차피 공작 녀석이 이렇게 잘난 척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야.’
아서가 히죽 웃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일은 잘 되어가고 있어? 그 진 사태에 대한 대책 말이야.”
알폰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직접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가 어떤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서는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저가의 대량 생산 홍차를 개발해 평민들 사이에 퍼뜨리는 것, 그 방법으로 평민들 사이에서 기승을 부리는 진 중독 현상을 완화시키려고 하는 것에 알폰스의 영향이 없을 리 없었다.
‘마누라 잘 만나서 어울리지 않게 제법 귀여운 대책을 마련하셨구먼.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거든? 내가 준비한 영업 허가료 법안이 통과되는 걸 손가락 빨면서 구경이나 하라지.’
“거 잘됐네. 공작이 무슨 대책을 마련했는지 나도 궁금해지는데.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이야.”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알폰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서는 정말로 짜증이 났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나 무시당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는 황자였다. 제국의 유일한 황자이자 미래의 제국의 주인이었다. 물론 아직 황태자 책봉은 받지 못했지만 황제의 슬하에 자식은 자신뿐이니 황위는 자신이 물려받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그는 미모와 재능, 문무, 모든 방면에서 탁월했다.
그런 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망나니 황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안하무인으로 다녀도 그러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어려워하거나 숭배하거나 사랑했다.
그런데 이 공작 부부만은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을 이렇게까지 짓밟는 존재는 이 세상에 이 부부밖에 없을 것이었다.
‘용서 못 해. 기필코 쓴맛을 보여 주고 말 거야.’
아서는 몸을 돌렸다.
“뭐, 마음대로 해. 그건 그렇고 공작은 이번 회의 왜 하는 건지 모르지? 이번 회의는 내가 소집한 거야.”
내내 무관심하던 알폰스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나와 아내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게 황자였군.’
알폰스의 침묵을 당황이나 뭐 그런 걸로 이해한 아서가 말했다.
“내가 뭘 발표할지 궁금하지? 뭐. 지켜보라고.”
아서가 등을 돌린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아마 공작도 관심이 있는 주제일 테니까.”
라고 말하고는 올 때와 같은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회의실에 들어가 버렸다.
알폰스는 생각했다.
‘내가 관심이 있을 만한 주제……?’
물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그의 귀여운 아내 클로에였다.
하지만 황자가 그녀에 대해 발표할 리는 없었다. 아까 황자가 물어본 것도 그렇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진 사태와 관련된 것일 확률이 높았다.
‘별로 상관없지만.’
알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조금도 아서에게 경쟁심을 느끼거나 그를 견제하지 않았다.
아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채 알폰스는 회의실에 입장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알폰스는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수의 인원이 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자, 주목. 오늘 귀공들을 호출한 이유는 황자가 발표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오. 황자가 자신의 지혜로 진 사태의 해결 방안을 찾은 듯하니 경청하고 소견을 말해 주길 바라오.”
황제가 말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아서에게 쏠렸다.
모두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서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잠시 작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정정하겠습니다. 제가 회의를 소집한 것은 진 사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발표하려는 것은 제가 찾은 해결 방안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고위 귀족 사이에서 일어난 묵인할 수 없는 범법 행위입니다.”
순간 회의실에 모여 있던 관료들이 술렁였다. 아서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저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의 비행에 대해 폭로하고자 합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아니,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 말입니까?”
아서의 예상대로 회의실 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대신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공작부인께서 비행이라니 무슨…….”
“무슨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공작부인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훌륭한 품행과 재능으로 제국 귀부인들의 귀감이라는 평판까지 듣고 계신데요.”
보통의 경우 황자의 말에 함부로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그가 건드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공작부인이었다. 그리고 그 공작부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아서는 황자였고 성실하진 않지만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많은 대신들이 어려워했다.
하지만 바텐베르크 공작은 더했다. 황제의 공신이라곤 하나, 그의 권력은 황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더군다나 자비가 없는 냉정하고 오만한 성격, 황제가 크게 신임할 정도의 정치적 재능, 아서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실무 경험과 공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폰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난리가 났는데 황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용, 조용!”
평소의 소탈하고 인자한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친 듯이 술렁이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황자!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알기는 아는 것이냐?”
황제는 무척이나 놀라고 화가 난 것 같았다.
“당연히 근거를 갖춘,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이겠지? 네가 바로 얼마 전에도 공작가에 누를 끼쳐 중벌을 받았다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네가 한 번만 더 공작가의 명예에 해를 끼쳤다가는 그때는 제국의 황제로서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친부의 노성을 한두 번 들어 온 것은 아니었지만 아서는 이번이 제일 화가 났다.
‘아바마마는 왜 매번 공작 부부의 편만 드시는 거지? 아바마마의 아들은 난데. 그놈의 공작 부부가 그렇게나 중요해? 아들보다 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서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증거도 있고 책임도 질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 황자 자리를 걸어도 좋아요.”
“뭐라고!”
“아니,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제국의 황자가 자신의 자리까지 걸다니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분명 제국 역사에 남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실 한쪽에서는 서기가 사람들의 말을 빠짐없이 받아 적느라고 용을 쓰고 있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서는 생각했다.
‘흥, 어떠냐. 이렇게까지 했는데 공작 네가 날 무시할 수 있을까?’
아서는 클로에만 관련된 일이면 알폰스가 얼마나 유난을 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말을 조금 잘못하거나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제국의 황자에게 살의를 내뿜던 일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이번도 그럴 것이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화를 내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그녀를 건드렸으니.
알폰스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서는 그런 기대감을 품은 채 알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뭐, 좋습니다.”
아서의 눈에 들어온 알폰스는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살기를 내뿜거나, 진홍색 눈빛이 격노로 불타오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제 아내가 어떤 비행을 저질렀는지 저 역시 궁금합니다.”
깍지 낀 두 손은 차분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그의 냉랭한 얼굴에 정말 드물게도, 아니 회의실에서는 이제껏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서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그를 가소로워하고 있는 얼굴이다.
자신의 여자와 자신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듯한, 아니, 오히려 이쪽의 패망을 완벽하게 예상하고 있다는 듯한…….
‘공작, 저 자식이……!’
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공작. 진정하시오. 이곳은 국정 회의장이고 제국의 앞날에 대해 논의하는 곳이지 애꿎은 귀부인의 명예를 공개적으로 실추시키는 곳이 아니란 말이오.”
이런 반응은 황제 역시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그가 대단히 당황하며 만류했다.
“아무래도 황자가 어리석기 그지없어 이런 허무맹랑한 짓을 벌인 것 같은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오늘의 회의는 파하는 것이 좋겠소. 황자의 행실에 대해 나 역시 아비로서 큰 책임을 느끼고 있소. 그러니 부디 그만해 주시오.”
“허무맹랑한 짓이 아닙니다! 저는 꼭 이 자리에서 고발해야겠습니다. 공작부인과 공작이 진 사태의 완화를 빌미로 어떤 일을 했는지 말입니다!”
“황자, 네 이놈!”
황제는 당장이라도 뒷목 잡고 쓰러지고 싶은 것을 정신력과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아들을 노려보다가, 애원하는 눈초리로 알폰스를 보았다.
하지만 알폰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 역시 꼭 이 자리에서 듣고 싶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황자 자리마저 걸고 공론화하시겠다는데 신하된 자로서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작…….”
황제는 거의 울고 싶은 것 같았다.
알폰스는 황제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느낄 만큼 감성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황제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당사자인 공작부인을 이곳에 모시는 것이 좋지 않겠소. 고발을 당한다면 본인이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소.”
이 말은 좀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알폰스는 잠시 고려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의 아내는 마음이 너무나 여렸다. 물론 어떨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단호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가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수십 명의 대신들, 그것도 4~50대의 중년이 주를 이루는 인원 앞에서 그녀가 비난당하고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니. 그런 것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의 품행과 행실은 그녀의 진정한 반려인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게다가 그에겐 자신이 있었다. 이번 일이 그녀의 털끝만큼도 해하지 못하게 만들 자신이. 이번 일의 웃음거리는 오로지 황자뿐인 해프닝으로 만들 자신이.
한편 아서는 속이 뒤집혔다.
‘진정한 반려? 정말 놀고 있구먼. 이거 분명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아서는 큰 소리로 코웃음 쳤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자신감이 회의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공작. 하지만 아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공작부인과 공작이 진 사태의 완화를 빌미로 어떤 일을 했는지’ 고발하겠다고. 공작부인의 비행에는 너 역시 개입되어 있어. 아내 사랑도 좋지만 자신 걱정도 하는 게 좋을걸.”
“황자! 제국의 공작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 경어를 쓰도록 해라!”
안타깝게도 아서와 알폰스 두 사람 다 황제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서가 자료를 뒤적이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어쨌든 하려던 말을 계속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최근 익명의 제보를 통해 평민들 사이에서 홍차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공들도 모두 즐겨 드시는 그 홍차 말입니다.”
“아니, 평민들 사이에서 홍차가 유행한다고?”
“평민들이 홍차를 어떻게?”
“아, 저는 그 소식을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대신들이 술렁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도 몇 명 정도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서는 느긋한 태도로 설명을 계속했다.
“뭐, 평민들이 홍차를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죠. 하지만 평민들이 홍차를 어디서 구했을지가 문제입니다.”
“트리플 스위트는 아닐 테고…….”
“그야 식료품점에서 구입하지 않았겠습니까? 최근에는 홍차를 취급하는 식료품점이 많이 생겼으니까요.”
그 대신의 말은 맞았다. 귀족들 사이에서의 차의 대유행으로 트리플 스위트 말고도 많은 수의 식료품점이 차를 취급하고 있었다.
단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런 식료품점은 어김없이 고급 식료품점이라는 사실이다. 귀족 혹은 부유층만이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상급의 상품만 판매하는 곳.
“물론 그렇습니다. 요즘은 홍차를 판매하지 않는 식료품점이 없다시피 하죠. 일라이자 가의 아이리스 키친, 코르덴 가의 버클리 식료품점 등이 그 예시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런 곳은 고급 식료품점입니다. 가게 자체가 평민들은 이용하기가 어려운 곳이거나, 홍차 상품은 다른 제품에 비해 아주 비싸서 평민들이 구매하기 어렵거나 합니다. 하물며 유행이라니 어불성설이죠.”
“그, 그렇다면 평민들은 대체 홍차를 어떻게…….”
“조사 결과 저는 이 유행의 중심에 질렌할 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렌할 가라면…….”
수도 외곽에 위치한 평민들의 거주지였다. 평민들의 집단 거주지 중 수도에서 제일 큰 곳이라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가 본 적은 없어도 들어는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질렌할 가에 위치한 성 질렌할 광장은 평민들의 상업 지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죠. 저는 이곳에서 공작부인이…….”
아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재능을 남용해 불법 영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대신들은 전부 겁을 먹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공작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황제는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그리고 알폰스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심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서는 속이 비틀렸다. 그가 말을 이었다.
“뭐, 백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낫죠. 이곳을 봐 주십시오.”
아서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니, 이것은……?”
그것은 영상구였다. 일전에 클로에가 아리아나의 흉계를 저지할 때 쓴 적이 있었던 물건이다.
아서는 영상구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투명한 영상구에서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떤 영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거리였다. 단지 촬영된 영상을 보는 것뿐인데 먼지와 오물의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불결한 거리.
촬영 각도를 맞추려는 듯이 화면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어느 한 지점을 잡았다. 영상구에 작은 가게가 비쳐 보였다.
“아니, 저곳은……?”
화면 안에 들어온 가게는 과연 눈에 띄었다.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가게 밖까지 줄이 늘어설 정도였던 것이다.
영상구를 든 사람이 가게를 향해 움직였다. 요란하고 알록달록한 홍보지가 벽마다 더덕더덕 붙어 있는 벽이 보였다.
“할인? 덤? 허어.”
“정말 전형적인 평민들이 좋아할 만한 홍보 문구로군요.”
대신들이 중얼거렸다. 아서는 상황이 자신의 예상대로 돌아감을 느끼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영상구를 든 사람이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성 질렌할 광장과 골목의 풍경과는 달리 가게의 안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화질이 좋지 않은 영상구로도 선반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깨끗한 가게 내부는 클로에의 남다른 위생 관념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영상구는 선반마다 가득한 CTC 홍차 잎들과 그 가격, 그리고 아서가 사장을 상대로 서류를 내놓으라며 언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영상구 속의 영상은 아서가 다시 가게 밖으로 나오면서 끊겼다.
이 모든 것을 본 대신들은 잠잠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침묵이 자신에 대한 동조라고 여긴 아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 천박한 광고 문구들을 보십시오. ‘홍차 대폭 할인! 세 자루를 사면 한 자루를 덤으로 드립니다!’ 과연 이런 것이 공작부인이 자신의 가게에서 사용하기에 적절한 표현입니까? 제국의 다른 귀족 여성들에게 품위와 격을 보여 주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저런 천박한 홍보지를 붙이다니, 이런 행실은 공작부인으로서 적절치 않습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나이 든 대신 한 명이 주저하며 끼어들었다.
“저로서는 저 가게가 공작부인의 소유의 가게인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정말로 저 가게가 공작부인의 것이 맞단 말입니까? 가게의 간판에는 ‘스미스의 홍차 가게’라고 쓰여 있었고, 영상구 속에서도 스미스라는 남자가 자신이 사장이라며 사업 허가증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아서는 짜증이 났다. 누가 봐도 저 가게는 클로에의 가게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당연히 위장이 아니겠습니까, 헤렌드 자작. 애당초 평민이 그 복잡한 절차를 뚫고 영업 허가증을 발급받았다는 점부터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더군다나 모두가 똑똑히 들으셨을 겁니다. CTC 공법을 개발했다는 스미스라는 평민이 싱할라의 아쌈을 운운하는 것을요. 이게 어디가 이상한 건지 아무도 모르시는 겁니까?”
대신들이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 모두가 홍차를 마시긴 했지만 싱할라니 아쌈이니 하는 복잡한 산지 이름은 외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서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홍차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두 사람뿐일 것이었다.
제국 최고의 홍차 전문가 클로에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 바로 아서 그와…….
“공작, 말씀해 보십시오. 싱할라산 아쌈이라는 말이 왜 이상합니까?”
이것은 유도 신문이었다. 이에 대해 솔직히 대답하는 것은 클로에와 그녀의 남편 알폰스에게 불이익이 된다.
그러니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자신도 잘 모른다는 식으로 거짓 대답을 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상대는 그 공작이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대륙에서 제일 자존심이 강한 자.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으며 구부러질 바에는 부러지는 것을 택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
그리고 대답은 아서의 예상대로였다.
“……아쌈은 바라트 왕국의 지명이지 싱할라의 지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쌈은 바라트의 아쌈 지역에서 나는 아쌈 품종의 홍차를 일컫는 말입니다. 싱할라산 아쌈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아…….”
“그렇게 깊은 뜻이.”
알폰스의 담담한 대답에 대신들이 숨을 내뱉었다.
그는 제국 최고의 차 전문가의 남편이다. 게다가 매일 그녀와 한 번 이상은 티타임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의 사실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서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비틀려 올라갔다.
“모두 공작의 설명을 들으셨겠지요. CTC와 같은 획기적인 홍차 제조법을 개발했으며 싱할라에서 거주하기까지 했다는 자가 싱할라산 아쌈 같은 우습지도 않은 유도 신문에 넘어가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서가 힘을 주어 주장했다.
“그러니까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CTC 공법을 개발한 자는 스미스라는 평민이 아니라 제국 최고의 차 전문가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라는 것. 그리고 스미스의 홍차 가게라는 가게의 실질적 소유자 역시 그녀라는 것!”
“그, 그렇지만 전하……!”
이번에는 또 다른 대신 하나가 끼어들었다.
“화, 황공합니다! 어째서 그 스미스라는 자가 CTC를 개발한 자로 보기에 어려운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척 송구합니다만 여전히 그 가게의 소유자가 공작부인이라는 물증은 없습니다!”
아서는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어째서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가 클로에를 감싸 주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그가 보기에는 명백했다. 그녀가 아니라면 제국에 CTC 같은 획기적인 제조법을 개발할 자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다들 알고 있으면서 그러는 거야. 클로에를 감싸 주기 위해서! 내게 반기를 들기 위해서!’
물론 아서는 아무리 망나니라고 할지언정 바보는 아니었다. 적어도 아무런 물증도 가지고 오지 않고 ‘스미스의 홍차 가게’라는 작은 가게가 공작부인의 것이라고 주장을 펼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물증이 있었다. 그는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자로서의 권력을 이용해 물증과 증인을 구했다.
그가 가방 속에 가지고 온 이것을 보여 주기만 해도 이 자리의 모든 대신들이 납득할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화가 난 그는 그런 쉬운 방법을 택하고 싶지 않았다.
아서가 나직하게 말했다.
“공작.”
그가 난데없이 알폰스를 부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알폰스는 한없이 담담하고 여유로울 뿐이었다.
“예.”
“한 번 네 입으로 말해 봐.”
아서가 다시 하대를 썼다.
“설마 네가 모를 리는 없겠지. 넌 클로에의 남편이고 ‘진정한 반려’니까 말이야. 그녀의 품행과 행실은 네가 제일 잘 알고 있다며? 그런 네가 네 아내 소유의 가게 하나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겠지.”
“황자, 공적인 자리다! 공작에게 예우를 갖춰라!”
황제가 분노로 달아오른 얼굴로 호통을 쳤으나 아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어디 한번 네 입으로 말해 봐. 성 질렌할 광장의 스미스의 홍차 가게라는 가게, 네 아내의 것이지. 그렇지?”
대신들은 기함했다.
‘아니, 황자 전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바텐베르크 공작의 자존심과 줏대는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사실을 그대로 말할 리가…….’
‘어떠냐? 공작.’
아서가 금빛 눈동자에 싸늘한 빛을 담은 채 알폰스를 노려보았다.
‘과연 넌 사실대로 대답할 수 있을까?’
그가 사실대로 대답하든 대답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아서에게는 당장이라도 꺼낼 수 있는 물증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알폰스가 거짓을 입에 담는 쪽이 아서에게는 더 이로운 셈이다.
알폰스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아내를 보호하려 거짓말을 했다가는 아서가 당장 진실을 밝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알폰스는 엄숙한 국정 회의장에서 거짓을 고한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콧대도, 옥에 티 하나 없는 체면도 꺾이고 말겠지. 그러니 거짓말을 해, 공작.’
그때 고요를 깨뜨린 것은 모두의 예상을 깬 한 마디였다.
“맞습니다.”
“아니?”
“공작!”
대신들이 술렁였다.
그와 함께 아서의 입꼬리도 비틀렸다.
이것은 예상과는 달랐다. 바텐베르크 공작, 저자라면 분명 자신의 아내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내보다 체면이 더 중요하다 이거지? 이럴 줄 알았어. 평생 동안 진심으로 사랑하네 어쩌네 하더니, 네놈의 진심도 사실 별거 아닐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뭐, 상관없었다. 이것으로 그는 제 무덤을 판 것과 마찬가지다. 아서가 보란 듯이 씩 웃으며 물었다.
“CTC 공법이라는 것을 개발한 사람도 네 아내지?”
“그렇습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아서는 대신들을 향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아까 홍차 가게가 클로에의 소유라는 물증이 없다고 주장한 대신을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불쌍한 대신은 창백한 얼굴로 흠칫 몸을 떨었다.
어찌 됐든 이것으로 성 질렌할 광장의 ‘스미스의 홍차 가게’가 사실 스미스가 아닌 클로에의 소유라는 사실은 증명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도 또 반기를 드는 자가 있었다.
“황자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 역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또 대체 뭐야? 아서의 얼굴이 표정 관리가 어려울 정도로 굳어졌다. 그가 소리를 낸 대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로네펠트 후작. 말해 봐.”
그가 답지 않게 싸늘해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번에 끼어든 자는 바로 로네펠트 후작이었다. 클로에의 제일 친한 친구 중 하나인 로네펠트 후작부인의 남편이자, 카타리나 2세를 접대하는 문제로 클로에에게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다.
황자의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차가운 태도에 로네펠트 후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사라졌다. 그가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문제의 홍차 가게가 공작부인의 소유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뭐?”
“아까 영상구로 본 내용에 의하면 해당 사업체는 법으로 지정된 필수 서류인 사업 허가증과 부동산 거래 증명서는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서류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위생 상태도 좋았으며, 수익 구조와 고용 상태 등 모든 것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홍보 문구가 부적절했다는 이유만으로 문제가 되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로네펠트 후작의 말에 용기를 얻은 다른 대신들이 한 마디씩 얹었다.
“그렇습니다. 저도 홍보 문구를 보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거래 상대가 평민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평민을 상대로 이 정도의 사업 수완을 발휘하실 수 있다는 점에서 공작부인의 존재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제국 역사상 귀족이 평민을 상대로 했던 사업 중 이렇게나 호조를 보인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 아닙니까? 그것도 공작부인이라는 높은 작위에 계신 분께서요.”
“CTC라고 했던가요? 그런 저가의 홍차를 개발해 내신 것이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게다가 그런 대단한 것을 개발하고도 공을 다른 평민에게 돌리시다니요.”
“공을 돌리려고 한 게 아니야! 책임을 회피한 거지!”
급기야 아서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세금이나 뭐 그런 걸 피하려고 그런 거겠지! 안 그래? 공작! 말해 봐, 네 아내는 왜 남의 이름으로 가게를 낸 거야?”
그의 감정적인 태도와 대조적으로 알폰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지금 황자 전하께서 보이고 계신 것과 같은 ‘귀족이 평민의 필요와 수요에 맞춰 사업을 한다’는 일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을 피하기 위해. 둘째, 홍차 가게에서 홍차를 구입하는 평민들이 부담감과 위화감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뭐라고? 거짓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알폰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 아니 저와 아내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서입니다.”
“뭐, 뭐……?! 맡겨진 일이라고?”
아서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클로에가 갑작스레 평민을 위한 홍차 따위를 개발한 이유는 분명, 진 중독 현상 완화를 위해서…….’
그랬다. 애당초 아서가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시작한 것 역시 그 때문이 아닌가.
알폰스의 진 중독 현상 완화 대책을 방해하기 위해서.
“이렇게 된 이상, 조금 이르지만 미리 발표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알폰스는 자신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더미를 꺼냈다.
“황제 폐하. 이것은 일전에 제게 맡기셨던 진 중독 현상 완화 대책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검토 단계만이 남아 있었으니 먼저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공작……. 홍차 가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진 중독 현상이라니? 홍차 가게와 진 중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것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국의 일반 시민들 사이에 퍼진 진 중독 현상의 대책을 강압적인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 중에서 찾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이건 꼭 아서 그와 그의 영업 허가료 법안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알폰스의 말에 아서는 내심 약이 올랐다.
“진 중독 현상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홍차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제국민들이 하필이면 진에 지나치게 매료된 까닭은 진을 대체할 만한 마땅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민들을 위한 충분한 식문화와 스트레스 배출구의 부재, 대외 정세 악화로 말미암은 해외 무역의 동결로 인한 물가 상승,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불만과 괴로움의 원인이기도 한 고질적인 빈곤. 이러한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여 값싼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던 일반 시민들이 진에 의존하게 된 겁니다.”
여기까지 말한 알폰스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황제와 대신들은 물론 아서마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알폰스는 말을 이었다.
“그 해결 방안으로서 저는 진의 대체품을 찾았습니다. 평민들의 입맛에 맞고,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주되 건강을 해치거나 범죄와 가난 등 부가적 부작용이 없으며, 영양소 역시 섭취할 수 있는 저렴한 식품.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 제일 적합한 것은 바로 홍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공작부인이 평민을 위한 저렴한 홍차를 개발한 이유가 설마…….”
“그렇습니다.”
알폰스는 손짓으로 황제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가리켰다.
“그리고 보고서의 164페이지부터 제가 독자적으로 진행한 홍차의 시장 규모와 진의 시장 규모, 황립 응급 구호소에 입원한 진 중독자의 비율, 그리고 수도 내 음주 범죄 사건의 횟수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시면, 진 열풍이 처음 불기 시작했던 지난 3년 동안 폭발적으로 상승했던 진 시장 규모가 홍차의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축소되기 시작했으며, 진 중독자의 비율과 음주 범죄 사건의 횟수 역시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평민들의 불만 해소를 담당하는 음료의 위치에서 홍차가 진을 대체하기 시작한 겁니다.”
“아니, 공작. 대체 이런 연구는 다 언제……!”
황제가 황급히 보고서의 164페이지를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알폰스가 말한 대로의 내용이 자세한 그래프와 분석 결과와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알폰스가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시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직 홍차가 평민들의 식문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반년 안에 평민들 사이에서의 홍차의 시장 규모가 현재의 세 배로 증가할 것으로, 그리고 일 년 안에 홍차의 시장 규모가 진의 시장 규모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241페이지의 도표를 참고해 주십시오.”
아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다 거짓말일 것이 분명했다.
자신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는데, 대체 눈앞의 이 남자는 어느새 연구를 여기까지 진행시켰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물론…….”
알폰스가 다시 가방을 뒤져서 서류 꾸러미를 꺼냈다.
“진의 대체품으로 홍차를 제시하는 것은 빠른 대책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근본적 해결책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시민들이 진을 마시기 시작한 원인은 빈곤으로 인한 불만 때문이지 갈증 때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홍차의 보급과 함께 빈곤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새로운 빈민 구호 정책과 세금 정책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대안과 그와 관련된 연구는 이 보고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서류 꾸러미를 황제에게 넘겼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서류의 무게가 더 무거워졌다.
“…….”
“…….”
“…….”
알폰스의 말이 끝났는데도 아무도 쉽게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회의장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그의 말에 압도당한 것만 같았다.
황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니, 공작이라면 분명 훌륭한 대책을 준비해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진 중독 현상의 해결책이 설마 홍차일 줄이야. 누가 그 공작부인의 남편이 아니랄까 봐…….”
“…….”
알폰스는 이렇다 할 변명이나 부연 설명 없이 고개만을 까딱할 뿐이었다.
황제는 반쯤은 기가 차고, 반쯤은 설득당한 얼굴로 허허 헛웃음을 뱉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놀라운 대안이었소, 공작. 홍차라니……. 그렇다면 이 대책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분명 공작부인의 도움을 받았겠군?”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 모든 일은 그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진을 홍차로 대체하겠다는 발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홍차의 공법을 개발한 사람도,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여 주어 평민들 사이에서의 홍차의 시장 점유율을 이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이나 확대할 수 있게 해 준 사람도 모두 그녀이니까요.”
“아니, 공작부인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여자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난 생각도…….”
“바텐베르크 공작의 연구 역시 엄청나지 않습니까…….”
“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말을 아끼고 있던 대신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도 알폰스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던 황제가 말했다.
“과연, 이것은 정말 훌륭한 대책이지만…… 공작과 공작부인,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겠군.”
“…….”
“훌륭하오, 공작. 정말로 훌륭해.”
황제가 허허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공작뿐이 아니지, 공작부인 역시 정말 대단한 일을 해 주셨소. 부부가 각자의 능력과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고야 말았구려.”
“감사합니다.”
알폰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리도 대단한 부부가 있을 수가 있나. 그대들 같은 인재가 우리 제국을 위해 힘써 준다는 것도, 이렇게 재능 있는 두 사람이 부부로서 만나 이런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도 제국의 큰 행운이자 선물이오.”
황제의 찬사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아무도 이견이 없는 것 같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자, 자, 잠깐만요!”
그건 아서였다.
“그, 그걸로 끝입니까? 진 중독이 해결되었으니까 그거면 됐다, 이 말씀이시란 말입니까?”
아서는 창백하게 질린 낯빛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알폰스와 공작 부부를 찬사하며 웃던 황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졌다.
“황자, 나는 너에게 여러 번 실망했다. 너의 아둔함 덕에 나는 도저히 공작 부부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그런데 그런 네가 아직도 할 말이 더 있다는 말이냐?”
“제……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천박한 홍보 문구 같은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공작부인의 영업은 명백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아서가 영상구를 가리켰다.
“아까 보셨다시피 공작부인은 클로에 바텐베르크가 아닌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사업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건 제대로 된 영업 허가가 아닙니다! 명백한 신분 위조라고요!”
“아서, 그만하면 됐다…….”
황제가 탄식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아서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그만하면 됐다니요, 제 말을 좀 들어 보시라고요! 왜 아바마마께서는 공작 부부의 말만 귀담아들으신단 말씀이십니까? 이건 불법행위입니다. 공작부인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비행이란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난데없는 목소리가 회의장을 갈랐다.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기겁했다. 그 목소리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은 황궁의 국정 회의장이었고, 제국에서 정치는 남성의 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니만큼, 법적으로 여성의 입장이 금지된 것은 아닐지라도 국정 회의장에서 일꾼을 제외한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어찌 아시고 이런 곳에……?”
그러니만큼 남자들의 중후한 목소리 사이를 울리는 낭랑한 음색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클로에, 네가 어떻게…….”
클로에의 얼굴은 그와 대조적으로 차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러고는 그녀는 대신들에게도 인사하며, 자신이 중요한 회의를 방해한 것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부인.”
알폰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클로에의 어깨를 감쌌다.
격렬한 회의 내내 덤덤함만이 느껴지던 그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 있었다. 그 역시 클로에가 이 순간에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클로에는 그런 남편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얼굴 풀어요, 알폰스.”
그녀의 말에 알폰스는 의식적으로 표정을 정돈했다. 그녀의 말 덕에 그의 얼굴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걱정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이 회의장에서 클로에가 험한 말을 듣거나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 앞에 서는 일뿐이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어깨를 감싼 채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그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에 닿을 때마다 대신들이 흠칫거렸다.
그의 시선이 워낙 매서운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했다. 그 눈빛은 말하자면 하이에나 무리 앞에서 자기 새끼를 두고 경계하는 표범 같았다.
그가 눈으로 하고 있는 말이 ‘내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협박조의 의미라는 것을 모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한편, 내내 넋이 나가 있던 아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크, 크, 클로에…… 네가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여기 국정 회의장인 거 몰라? 관계자가 아니면 못 들어오는 곳이라고.”
클로에가 예의 있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례인 줄은 알고 있었사오나 저는 황제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뭐? 아바마마가?”
아서가 입을 떡 벌렸다. 그가 해명을 요구하듯 자신의 부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공작부인을 호출했다. 비록 공작은 공작부인을 이곳에 모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짐은 공작부인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소. 공작은 공작부인의 신뢰할 만한 반려이지만, 그렇다 해도 언급되는 당사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공작에게는 언질도 하지 않고 아내를 모신 점은 사과드리리다.”
“제게 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시고 제 입장을 이토록 신경 써 주시기까지 하시다니, 저로서는 감읍할 따름입니다.”
클로에의 겸손하고 고운 말씨에 황제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과연 공작부인께선 언제나 공손하시구려.”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말한 클로에가 아서를 보았다.
아서는 그녀의 눈이 얼마나 자상하고 다정한 빛을 띠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여리고 온화한지, 또 그녀가 얼마나 갈등을 싫어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클로에는 아서와 달랐다. 그녀는 평소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친한 소수의 친구들과 차를 나누어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
아서가 이제껏 보아 왔던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그런 모습들이었다. 다정하고 조용하고 소박한 사람.
그랬는데…….
‘클로에의 눈이…… 저렇게 차가웠던가?’
아서는 등골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클로에의 눈빛은 그 어느 때와도 같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렇게나 오랜 시간 자신에게 철벽을 치며 머리털 한 올 만큼의 여지도 남겨 주지 않던 시절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냉정하고 단호한 그 눈은 그녀가 평소의 한없는 부드러움과는 다르게 현재 제국에서 제일 냉철한 사업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게다가 부정 식품 사범을 잡거나 은독수리 훈장을 받는 등 화려한 업적을 이루어 낸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아까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보며 웃어 줄 때의 다정한 눈빛 따위는 거짓말 같았다.
클로에가 차분하게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영업 허가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신 듯하니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부인, 그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알폰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안했으나,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이것은 그녀의 일이었다.
그녀가 뜻을 굽히지 않자 알폰스 역시 더 고집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지적하신 대로 ‘스미스의 홍차 가게’의 영업 허가는 대리 사장 스미스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사업 대표로서의 제 정체를 숨긴 것은 이미 아시겠지만, 평민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 귀족으로서 마주할 편견과 제가 조성하게 될지 모르는 위화감, 그리고 공정하고 정확한 연구를 위해서였습니다.”
그 자리에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황궁의 국정 회의장에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들이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적법한 절차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저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이름을 이용한 정식 영업 허가 절차를 밟으면서도 되도록 홍차 가게의 소유주가 저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말도 안 돼……! 그래서 네가 네 이름으로 정식 영업 허가 절차를 밟았단 말이야? 만일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어! 내가 직접 관련 부서에 내려가서 확인을 했지만 스미스의 홍차 가게의 영업 허가는 분명 스미스의 이름만으로 되어 있었어!”
아서가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설마 나에게 관공청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나는 제국의 황자야. 이 나의 명령을 거스르는 자가 있을 리 없잖아!”
“네가 미래의 제국의 주인일지언정, 지금의 주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황제의 말에 아서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아바마마, 설마?”
하나뿐인 아들의 한심한 모습에 황제가 탄식했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 황자. 홍차 가게의 진짜 영업 허가를 내준 사람이 바로 나란다. 공작부인은 진작에 내게 평민을 위한 홍차 사업의 안건을 가지고 와 영업 허가를 받아 갔다. 위화감 조성 방지를 위해서 평민 대리 사장을 세워 두고 표면적인 영업 허가를 받은 것 역시 그때 이미 전부 이야기가 된 일이다.”
“아니, 그런 일이…….”
“이 일이 네 귀에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그 모든 것이 황자로서의 네 지위를 과신한 너의 오만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