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장 (33/39)

33장

아서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이번 일을 멋지게 해결해서 모두에게 보여 줄 거야. 나의 능력을, 그리고 내가 더 이상 클로에에게 얽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가 클로에에게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그녀에게 이만저만 적극적으로 구애한 것이 아닌 데다가, 그녀의 남편과 결투까지 벌였으니까.

‘클로에, 그까짓 게 대체 뭐라고!’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황자 궁의 정원에 도착한 그는 분풀이할 것이 필요했다. 그는 바닥의 돌멩이를 찼다. 돌멩이는 멀리 날아가서 풀숲에 떨어졌다.

한편, 알폰스에게서 회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키넌 자작이 더 심하게 다치지 않아서,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죄인들에게 반역죄를 물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클로에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것을 본 알폰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더더욱 좋은 일은 따로 있었다.

“그들이 반역죄를 물지 않도록 알폰스가 많이 힘써 주신 거죠? 정말 고마워요.”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알폰스를 끌어안았다. 알폰스는 얼른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떼고 그녀의 등을 쓸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많은 조사와 업무를 한 보람이 있었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은 클로에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진 중독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군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텐데요…….”

그녀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흘렀다.

알폰스는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마음을 써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역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알폰스의 영역을 존중했다. 그래서 그의 일인 정무에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는 언제나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알폰스의 일을 침범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런 그녀가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정치는 그녀의 일이 아님에도 그녀의 여리고 선량한 마음이 그녀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알폰스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부인. 제가 최선을 다해 힘쓰겠습니다.”

클로에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그의 자상한 마음을 느꼈다. 그것이 기쁘고 고마워서 그녀가 미소 지었다.

“네, 저는 알폰스를 믿어요.”

세상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믿는다는 말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또 큰 응원이 되는지. 알폰스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다 타들어 가는 시가를 재떨이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오늘 마실 차는 어떤 것입니까?”

“아, 오늘 마실 차는 아쌈이에요. 다만 이제까지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제조법으로 만든 아쌈이죠.”

“새로운 제조법…… 입니까?”

“네. 찻잎의 형태가 독특해서 보여 드리려고 찻잎도 가져왔어요.”

그녀가 간장 종지만 한 조그마한 트레이를 내밀었다. 과거 알폰스에게 시향을 시킬 때 사용하던 그것이었다.

알폰스의 눈에 들어온 그 찻잎은…… 정말로 특이했다.

그가 여태까지 보아 왔던 홍차 잎은 다양했다. 찻잎의 크기가 크고, 찻잎 하나하나의 형태가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고, 아주 잘게 부수어 가루에 가깝게 만든 형태도 있었다.

하지만 이 찻잎은 그중 어느 것과도 달랐다.

알폰스는 약간의 찻잎을 검지와 엄지로 집었다. 그것은 검고, 형태가 매우 작아 찻잎이라기보다는 흙처럼 보였다.

다만 단순히 찻잎을 가루처럼 분쇄한 패닝(fannings)과 다른 것은 이 찻잎은 아주 작을뿐더러, 돌돌 말려 있다는 점이었다.

“찻잎이 돌돌 말려 있군요. 찻잎이 동글게 말려 있는 모양이 꼭 철관음 같습니다.”

“맞아요, 철관음도 찻잎이 구슬처럼 돌돌 말려 있었죠. 차이점은 철관음은 손톱만큼 크고, 이건 모래알만큼 작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지만요.”

클로에가 기쁜 듯이 손뼉을 짝 쳤다.

“이런 과립 형태의 찻잎은 CTC라고 해요. 부수기(crushing), 찢기(tearing), 둥글게 말기(curling)의 줄임말이죠. 찻잎을 부수고 찢고 말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어요.”

그녀는 알폰스의 찻잔에 홍차를 따라 내었다.

찻물은 굉장히 진했다. 수색은 새까맣고 액체의 밀도 역시 높아 보였다.

“보시다시피 찻잎의 크기가 작아 물과 만나는 표면적이 넓고, 찻잎을 부수고 찢어서 의도적으로 훼손시켜 제다(*차나무에서 딴 잎을 이용하여 차로 만듦)했기 때문에 찻물이 매우 빨리, 진하게 잘 우러나는 것이 특징이에요.”

“그렇습니까.”

알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무심코 찻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 그에게 클로에가 손을 내저었다.

“어머, 아직 드시지 마세요. CTC 찻잎으로 우린 차는 너무 거칠고 진해서 스트레이트(*아무것도 섞지 않은 차)로 마시기는 힘들어요.”

찻잎은 예민해서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금방 쓰고 떫은 성분을 내보내고 만다. 그런데 그런 찻잎을 부수고 찢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쓰고 떫겠는가.

알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클로에가 그를 따라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CTC를 마시는 제일 좋은 법은 역시 밀크티예요.”

그녀는 밀크저그를 들어 알폰스의 잔에 우유를 조금 따랐다. 그러고는 슈가볼에서 각설탕 하나를 집게로 집어 그의 잔에 넣었다.

“알폰스는 단 거 싫어하니까 하나만 넣을게요.”

그녀는 자신의 잔에는 각설탕을 두 개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자신의 잔을 들어 한 모금 맛을 본 그녀가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맛있다. 이제 드셔 보세요.”

그녀의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알폰스는 뒤늦게 자신의 잔을 티스푼으로 저었다. 그러고는 한 모금 맛을 보았다.

밀크티에는 정말로 특별한 매력이 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홍차의 달콤한 향과 혀를 감싸는 우유의 부드러운 촉감. 구수한 몰트 향과 쓴맛을 누르고 미각을 자극하는 은은한 단맛…….

‘그녀의 차는 꼭 마법 같군. 단맛이 이렇게 좋게 느껴질 수 있다니…….’

알폰스는 단맛을 정말 싫어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주는 차에서 나는 단 향과 단맛은 어쩐지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감각마저 둔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미각과 후각을 잃더라도 그녀가 곁에 있다면 세상은 달콤하고 향기로우리라.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클로에가 기대 어린 얼굴로 물었다.

“무척 진하고 맛있죠?”

그런 그녀가 귀엽고, 또 이 밀크티가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알폰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 매우 맛이 좋습니다.”

“다행이에요! CTC는 밀크티 만들 때 정말 좋아요. 향이 섬세하지 않고 거칠지만 대신 맛이 진하고 뚜렷해서 밀크티에 아주 잘 어울려요. 진한 밀크티를 만들기에 이 이상 좋은 것은 없을 거예요.”

“이제까지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제조법이라고 하셨는데, 부인께서 개발하신 겁니까?”

“아, 네……. 전생의 세계에 존재했던 CTC 공법을 참고했지만요.”

클로에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세계에는 CTC 공법이 존재하지 않아서 이곳에서 이걸 시도해 본 사람은 제가 처음이에요. 원래 기계 공정을 사용하는 제다법이지만, 이곳에는 CTC 제다 설비가 없어서 수작업으로 소량만 만들어 보았어요.”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개발하신 건 좋은 밀크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그것도 있지만요……. 대량 생산을 하고 싶어서요.”

“대량 생산……?”

“네. CTC 제다법은 찻잎의 대량 생산에 아주 적합한 방식이에요. 제작 과정 중 손이 많이 가지 않고, 비교적 저품질의 원료를 사용하더라도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전통적 제다법에 비해 제조 시간이 훨씬 짧고 실패율이 낮거든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녀의 전생에서 CTC 제다법은 홍차의 대중화의 일등 공신이었다.

CTC 제다법의 개발은 찻잎의 제조 시간을 줄이고 품질을 균일화하여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했다. 심지어 빠르고 진하게 우러나니 소비하기도 편했다.

그 결과 CTC 제다법은 홍차의 가격을 대폭 낮추고 더 많은 사람들이 홍차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겪은 전생의 세계에서, 전 세계에서 제조되는 홍차의 절반은 바로 이 CTC 공법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수줍게 말했다.

“CTC 공법을 상용화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홍차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밀크티로 아침잠을 깨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알폰스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건…… 정말 좋은 발상입니다. CTC 공법이 당장 상용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클로에가 대답했다.

“역시 설비 문제예요. 대량 생산을 하려면 찻잎을 부수고 찢고 둥글게 말아 줄 CTC 기계가 필요한데 이곳에는 그게 없으니까요. 그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원리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기계 쪽은 잘 몰라서…….”

클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직접 개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기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일 년 넘게 고민하고 있어요.”

알폰스의 머릿속에서 파편에 불과했던 생각의 조각이 차곡차곡 짜 맞추어졌다.

제국의 부족한 음료 문화와 고질적인 빈민 문제. 저렴하고 건강에 해로운 진에 중독되어 가는 시민들.

‘알코올이 없고 영양가가 있으며 가격이 저렴한 음료가 진의 대체재로써 널리 공급된다면 자연히 진의 소비량은 줄어들겠지. 알코올의 과다 섭취로 인한 건강과 범죄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제국의 모든 시민들은 귀족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생겨난 유행이나 문화는 하나도 빠짐없이 시민들 사이에서도 퍼져 나갔다.

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클로에가 저가의 차를 출시하기가 무섭게 차 문화가 수도의 시민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지금은 수도의 중산층들 대부분이 차를 즐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격과 공급의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의 관심과 지지도를 얻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허무맹랑한 발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발한 방법이라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전부 그녀의 덕이었다. 알폰스는 새삼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그의 시선을 느낀 클로에가 눈을 깜빡였다.

홍차의 대량 생산의 가능성을 보여 준 사람도, CTC 공법의 존재를 가르쳐 준 사람도 전부 그녀였다.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차를 이렇게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그녀의 노력과 능력 덕이었다.

‘그녀의 잠재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지?’

알폰스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녀가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것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도, 그녀의 현명함과 지혜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

한편 클로에는 영문을 몰랐다. 알폰스가 갑작스레 자신을 강렬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그러다가 갑자기 혼자 픽 웃음을 짓는 이유도.

“......?”

클로에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딱히 묻은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알폰스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알폰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알폰스…….”

“부인, 당신은 저뿐만 아니라 이 제국 전체의 선물이자 기적입니다.”

“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의 입술 위로 알폰스가 입술을 덮었다.

클로에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부드러운 손과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으음…….”

그의 손길이 너무나 다정해서, 그리고 또 사랑스러워서 클로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알폰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가볍게 들려 올라갔다.

그는 한 손으로는 클로에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잠시 후 입술과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클로에의 젖은 입술에서는 가쁜 숨이 새어 나왔고, 그녀의 눈빛은 몽롱한 빛을 띠었다.

“알폰스…….”

그렇게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그녀가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흐트러진 모습.

그런 그녀를 보는 알폰스의 가슴속은 뜨거운 감정으로 울렁였다. 그의 안에서 갈망과 소유욕이 들끓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아내가 된 것은 제 생에 다시없을 기적입니다.”

“저, 저도예요, 알폰스.”

“당신이 세계마저 뛰어넘어 제게 온 것은 분명 이유가 있는 필연이겠지요. 그러니 다시는 놓아드리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당신은 그 누구도 아닌 저의 것이니까…….”

클로에가 과거에 아서 황자를 사랑했다는 오해는 풀렸다. 아서 황자를 사랑했던 것은 과거의 클로에지 지금의 클로에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질투와 클로에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서 황자는 여전히 그의 아내를 원하고 있었고, 어느 날 다른 세계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아내는 나타날 때처럼 난데없이 사라질까 봐 두렵다. 아무리 세게 쥐어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거품처럼, 그를 놀리듯 덧없이.

이 감정의 불균형에서 언제나 더 갈구하고, 더 애태우는 사람은 그일 것이라는 것을 알폰스는 알고 있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되새기듯 힘을 주어 말했다.

그때였다.

“그 누구에게도 가지 않아요.”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알폰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전 당신의 곁에 있어요. 세계를 뛰어넘어서 겨우 당신을 찾았으니까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예요. 저를 영원히 놓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당신의 곁에 있고 싶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클로에의 뺨은 능금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 영원히 알폰스의 것이에요.”

주저하던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물론 알폰스도 제 거고요.”

알폰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같은 사람은 전 대륙뿐만 아니라 다른 그 어떤 세계를 뒤져도 없을 것이다.

모든 세계를 통틀어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그녀를 만나 평생의 인연을 맺다니, 그에게 이 이상의 행운이 있을 수 있을까.

알폰스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칫하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하지만 진심 어린 갈망과 열정을 담아.

그는 그녀를 조심스레 소파 위에 눕혔다. 클로에의 타래 같은 밤색 머리카락이 소파 팔걸이 위로 흩어졌다.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데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알폰스의 이성은 거기서 끊겼다.

알폰스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갰다. 그의 혀는 열린 그녀의 입으로 파고들어 가 평소보다 다소 거칠게 그 안을 탐했다.

“으응, 응…….”

클로에의 숨은 금방 가빠졌다. 그는 진득하게 입 안을 휘젓고 다닐뿐더러, 아래로는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몸에 금방 열기가 돌았다.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클로에는 달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볼 수밖엔 없었다.

“알폰스…….”

클로에가 팔로 그의 목을 감은 채 속삭였다. 그 달뜬 뺨과 흩어진 밤색의 머리칼, 내리깐 눈은 알폰스의 눈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미색으로 보였다.

그리 오랜 시간을 갈고닦아 온 인내심도 다 헛것이었다. 지금 당장 그녀를 갖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알폰스는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그러고는 벗겨 내린 옷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하얗고 둥근 어깨를 입에 물었다.

“아, 으음…….”

어깨 위에 붉은 흔적이 차례차례 새겨졌다. 클로에가 눈을 흘겼다.

“이런 곳에, 으응, 흔적을 만들면…….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는 어떻게 입어요?”

“입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녀의 척추를 따라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쇄골 위에 흔적을 만들어 내던 알폰스가 말했다.

“그런 옷은…… 너무 야하지 않습니까. 배우자가 있는 귀부인의 복장으로선.”

“말도 안 돼요. 으응…… 아이참, 그런 데는, 아, 흔적 남기지, 말라니까…….”

클로에의 귓불을 장난스레 깨문 알폰스가 속삭였다.

“하지만, 부인께서도 제게 흔적을 만들지 않으십니까. 제 등에는 지금도 부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 말에 클로에가 움찔 놀랐다.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요즘 따라 흥분하면 저도 모르게 그의 등을 할퀴고는 했다.

게다가 이것은―알폰스 본인은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다. 클로에는 꽤 미안함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습관을 고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

클로에는 더 이상 쇄골에 새롭게 생겨나는 붉은 흔적들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알폰스는 만족스러운 듯 나지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애를 먹게 만드는 그가 남기는 흔적과 달리, 그녀의 흔적은 알폰스의 생활에 별다른 불편함을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폰스는 홀로 씻으며 거울을 볼 때마다 등판의 붉은 선들을 제법 흐뭇한 눈치로 바라보곤 했다.

“앗, 흐으으. 으응…….”

그녀의 잔뜩 젖은 둔덕으로 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 작고 좁은 길에 파고든 손가락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클로에는 미칠 것 같았다. 허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발가락이 조여들었다.

“아아, 알폰스. 제발…….”

손가락이 어느새 두 개로 늘어났고, 움직임도 한층 빨라지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그의 옷깃을 거머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그 말에 오히려 팔이 빨라졌다. 알폰스의 단단한 팔뚝에 힘줄이 섰다. 그가 손가락 끝을 조금 구부려서 내벽을 긁어 대자 클로에가 허리를 뒤틀었다.

“아아아!”

“제발, 무엇입니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클로에는 젖은 입술을 한 채 알폰스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 속에는 욕정이 들끓고 있었지만, 단호함 역시 빛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정직하게 말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귀부인은 드물 테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그러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발, 저를…….”

클로에가 그의 옷깃을 거머쥔 채, 속삭였다.

“저를, 가져 주세요…….”

이제 되었다. 알폰스가 방금 전까지 그렇게 격렬하게 팔을 흔들었던 것은 장난이었다는 양, 우뚝 멈췄다.

클로에가 눈물이 가득 매달린 순한 올리브빛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폰스는, 그 녹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인내심에 진정한 한계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물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구에 대고 그대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하으으!”

그 묵직한 감각에 클로에가 부들부들 떨었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몸이 기뻐하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환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원하던 것이었다는 것처럼.

알폰스는 그녀의 두 허벅지를 벌려놓은 채, 처음부터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으흑……!”

철썩― 살과 살이 부딪치는 음란한 소리가 여지없이 울려 퍼졌다.

그녀를 가질 때마다 알폰스는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나서야 품에 안는 그녀의 몸은 그의 물건을 녹일 듯이 조여왔다.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가져도 가져도 모자랐다. 알폰스는 그녀가 주는 쾌락에 취해 연신 허리를 놀리면서도, 그녀의 입술을 입에 물었다.

“하아, 하아, 아아!”

클로에는 죽을 것 같았다. 가뜩이나 폐활량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 아래로는 그렇게 사정없이 몰아쳐 오면서 입까지 맞추다니. 그나마 그녀가 숨이 모자랄 때마다 입술을 떼어 숨 쉴 틈을 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얼굴은 물론 목까지 달아오른 채 할딱였다. 그의 거대한 물건이 뱃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있었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몸의 그 어느 부위도 좀처럼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하으, 읏! 흐윽!”

클로에가 힘에 겨워 소파를 긁자, 알폰스가 그녀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둘렀다. 물론 소파가 아까워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자신과 맞닿고 있었으면 했다. 그녀의 몸에서 그 어느 곳도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절정에 올랐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몸속 제일 깊은 곳에 액체를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니 더없는 만족감이 가슴을 채웠다. 알폰스는 기운 없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에 몇 번이나 키스를 퍼부으며, 그는 다정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땀에 흠뻑 젖어 너저분한 머리카락인데도, 마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유리세공품처럼 조심스럽게, 하지만 다정하게 쓸어내리곤 했다.

클로에는 그런 그가 좋았다. 그의 실크처럼 부드러운 손길을 받고 있자면 사랑받고 있다는 실감이 느껴졌다. 클로에는 그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클로에는 뛰어난 사업가였다. 하지만 제국 사회에서의 사회 경험과 그로 인한 인맥은 알폰스를 따라올 수 없었다.

알폰스는 순식간에 적합한 인재들을 섭외했다. 공학자와 물리학자, 마탑의 마법사 등이었다.

“해당 분야에 대해서는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전문가들입니다. 분명 부인께 도움이 될 겁니다.”

그가 말했다.

클로에는 무척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가 알폰스를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이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알폰스는 더없이 흐뭇한 얼굴로 시가 연기를 뱉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부인의 일이자,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클로에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는 진 중독 문제를 CTC 홍차의 상용화로 해결하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클로에는 무척 놀랐고 정말 기뻤다. 많은 사람들이 차를 마셔 주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차가 사람들의 진 중독이라는 괴로움을 덜어 주기까지 한다면 그녀에게 그 이상 보람 있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옛날에 진 중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최선을 다해야 할 일임이 분명했다.

“그래도요. 알폰스는 정말 최고예요.”

두 사람이 오붓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흠흠.”

헛기침 소리였다. 클로에는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알폰스가 섭외해 놓은 여러 명의 학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귀하신 분들을 모셔 놓고 제가 결례를 끼쳤군요…….”

클로에가 얼른 알폰스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들에게 사과했다. 학자들이 허허 웃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저희는 저희의 존재를 잊으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한시가 바쁘니 일을 빠르게 진행하도록 합시다. 안사람이 워낙 다망한 사람인지라.”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알폰스가 미간에 미미한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클로에가 쑥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여기에 그녀 외에도 바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소 무례할 수도 있었던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 중 한 명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요, 각하. 그럼 부인,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제다 기계라는 것의 원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CTC 기계의 원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기계나 공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클로에조차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먼저 찻잎을 잘게 부수기 위해서 주방용 밀대처럼 생긴 둥글고 긴 원통 두 개가 필요해요. 두 개의 원통의 표면에는 톱니 같은 날이 맞물린 채로 돌아가요.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처럼요.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원통 사이에 찻잎을 넣어 분쇄하는 거죠.”

“잘게 부서진 찻잎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드럼 안에 넣어요. 드럼 속에서 회전한 찻잎은 동글게 말려서 과립의 형태를 갖추게 돼요.”

“홍차의 제조 과정 중에는 산화와 위조 등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 많은데, CTC 공법으로 차를 제조하면 그 시간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어요. 잘게 부순 찻잎은 공기와 닿는 면적이 넓어서 산화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거든요.”

학자들은 그녀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며 기록했다.

클로에의 설명이 끝나자 학자들 중 한 사람이 외알 안경을 옷자락에 닦으며 말했다.

“정말 놀랍습니다. 공작부인께서는 홍차의 제조 과정에 대해서도 몹시 잘 아시는군요. 과연 제국 최고의 차 전문가이십니다.”

“어디서 내보이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더군다나 겸손하시기까지.”

다른 학자가 말했다.

“말씀하신 방법대로라면 차의 제조 방법의 혁신을 불러올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빠른 방식으로 값비싼 차를 대량 생산할 수 있다니요. 경제성, 효율성, 상품성, 어느 방면에서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방법을 공작부인께서 고안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클로에는 멈칫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가 고안한 것이 아니고 전생에서 배운 CTC 공법을 설명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아닌 알폰스가 대신 대답을 했다.

“안사람이 직접 고안한 방법입니다.”

“오오오.”

학자들이 감탄했다.

그럴 만도 했다. CTC 공법은 수십 년간 공학을 연구해 온 그들조차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학자들과 클로에는 더 궁금하거나 필요한 점에 대해서 논의했다. 이때에도 클로에는 학자들이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지식과 전문성을 보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사실 그녀가 전생에 받은 고등교육의 덕이 컸지만 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여성일진대 이렇게나 뛰어난 전문성과 지적 소양을 겸비하고 있다니……. 여성들은 선천적으로 학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군. 이런 여성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그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학자도 있었다.

학자들의 호기심이 충족될 때까지 대화를 나눈 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공작 각하와 공작부인께서 의뢰해 주신 대로 연구를 해 보겠습니다.”

“훌륭한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뭘요, 저야말로 정말 좋은 배움이 되었어요. 연구에 대해서는 잘 부탁드립니다.”

클로에가 친절하게 웃었다. 그녀의 친절과 겸손함 덕에 학자들은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몇 주가 지났다.

겨울은 깊어가고 새로운 한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클로에와 알폰스는 신년 연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사교 활동을 비교적 좋아하지 않고 집안에서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올해도 작년처럼 단둘이 새해를 맞이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황제가 연회에 참석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 걸까요?”

알폰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클로에가 물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아마 하사한 업무의 중간보고를 원하는 것이겠지요. 키넌 자작 사건으로부터 몇 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군요.”

클로에가 알폰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공작 각하와 공작부인께서도 오셨군요!”

“신년 연회에 오실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공작부인.”

신년 연회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클로에로서는 반가운 얼굴을 여럿 볼 수 있었던 데다가 알폰스의 예복 차림은 정말 멋있었기 때문에 꽤 즐거운 마음으로 연회에 임할 수 있었다.

한편 신년 연회 같은 국가적 행사에 제1 황자가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서는 정말로 이 연회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워낙 노는 것을 좋아해 과거에는 온갖 사교모임이란 모임은 다 참석하고 다니던 그였으나 요즘은 상황이 달랐다.

‘보나 마나 아바마마는 저번에 맡기신 일의 중간보고를 하라고 하실 텐데…….’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친 것 치고는 그 이후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생각만 해도 속이 답답하고 골치가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즐거움이었던 여자에게 둘러싸이는 일도 요즘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요즘은 그가 여자들을 피해 다니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도, 황자인 그는 이번 연회에 반드시 클로에와 알폰스가 참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같이 있는 꼴을 보기라도 하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클로에와 알폰스에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클로에가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황제가 소탈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공작부인께서는 한두 번 뵌 것도 아닌데 왜 여전히 그리 격식을 차리고 그러시오. 귀족 여성들 중 공작부인만큼이나 여러 번 마주한 이가 없다오.”

“부끄럽습니다.”

클로에가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황제의 말이 맞았다. 시녀가 아닌 이상 여성은 귀족이더라도 황제를 개인적으로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여성이 황제를 영접할 일은 흔치 않은 영예였다.

그런데 클로에는 황제와 직접 거래를 하다 보니 그런 영예를 몇 번이나 입게 된 것이다.

“허허, 공작부인께서는 변함없이 겸손하시구려. 두 분 모두 이렇게 연회에 참석해 주어서 자리를 빛내 주어 고맙소. 이번 연회에 공작과 공작부인이 반드시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내 못난 아들 때문이라오.”

“황자 전하……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말에 알폰스가 얼굴을 굳히고 대답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일전에 내 생일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아들 녀석이 공작에게 크나큰 결례를 저지르지 않았소. 그때 아서의 처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했는데, 이후 우리 모두 각자의 일로 바빠서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했지.”

그의 말대로였다. 아서와 알폰스의 결투 사건 직후 클로에가 성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그들은 지금까지 의논을 할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알폰스는 주변을 흘끗 보았다. 입이 무거워 보이는 호위병 몇 명 말고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듣는 귀가 많으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어 고맙구려. 공작부인께서도 지금 괜찮으시겠소?”

“물론입니다, 폐하.”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역시 그녀를 향해 호의적인 웃음을 지었다.

“좋소, 그럼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그들은 잠시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아서에게 어떤 벌을 내리면 좋을지 의논했다.

의논이 끝난 뒤 황제가 말했다.

“아서에게 지금 당장은 맡겨 놓은 업무가 있으니 그것이 끝나면 공작의 의견대로 하도록 하겠소.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다행이구려. 이 정도의 벌로 못난 아들을 용서해 주겠다니 정말로 고맙소, 공작. 그대에게는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다오.”

황제가 아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알폰스야말로 상당히 만족한 상태였다. 이 의논대로라면 그의 제일 신경 쓰이는 눈엣가시를 손색없이 제거해 버릴 수 있을뿐더러 클로에의 여린 마음에도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었다.

알폰스가 차분히 대답했다.

“제 제안을 폐하께서 흔쾌히 받아들이셔서 감읍할 뿐입니다.”

공작 부부와 황제는 소소한 한담을 나누며 휴게실에서 빠져나왔다.

한데 아서가 그 모습을 보았다.

방금 아바마마와 공작 사이에서 자신의 미래가 왔다 갔다 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그는 생각했다.

‘아바마마께서 내가 아니라 공작을 불러서 의견을 들으셨단 말이야?’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클로에였다.

오랜만에 본 클로에는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신년 연회를 위해 특별한 드레스를 입고 곱게 단장한 그녀의 모습에 아서는 넋을 잃었다.

단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전이 되는 것 같았다.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범람하는 감정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이 지나자 당혹스러움이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나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달이 지났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그녀를 잊으려 온갖 수를 다 썼다.

그녀 역시 세상에 많고 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필사적으로 깎아내렸다. 그렇게나 싫어하는 일이나 경연도 오로지 그녀를 잊기 위해 몰두했다.

하지만 그 무수한 노력 중 소용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그는 이제야 깨달아 버렸다.

그런데, 그가 이런 막대한 감정의 망망대해에 던져져 휩쓸리는 동안, 난생처음 마주친 애달픈 사랑에 몸살을 앓는 동안 그녀는 무얼 하고 있었는가.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놈의 공작의 팔에 붙어서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몇 달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아서 황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녀의 삶과 행복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심사가 뒤틀렸다. 아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끔찍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존심이 이렇게나 다친 적도 없었다.

아서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진 판매 허가를 위해서 영업 허가료를 내게 만드는 법안을 고려 중이야.’

‘영업 허가료는 어느 정도인가요?’

‘뭐, 금화 5천 개 정도?’

클로에에게 정향 오렌지 홍차를 얻어 마셨던 날의 기억이다. 그때 아서는 그녀에게 이미 사회 문제가 되고 있던 진 중독 현상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때 당시 아서가 생각해 두었던 해결 방책은 바로 영업 허가료의 부과였다. 진을 판매하려는 사람마다 고액의 허가료를 내게 하면 자연히 진의 판매가 규제될 것이었으니까.

‘금화 5천 개요? 분명 판매 규제는 되겠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진을 매매하던 빈곤층이 불만을 가지기라도 하면요? 그때마다 강압적으로 억누르실 생각인가요?’

그때 그를 저지한 사람이 바로 클로에였다.

‘그 사람들에게 진은 노동과 빈곤의 고됨을 달래주는 삶의 낙일지도 몰라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진을 강제로 빼앗는 방식은 분명 큰 부작용을 부를 거예요.’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머리에 자만하는 아서였으나 그때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때의 그는 이미 그녀에게 빠져 있었을뿐더러,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진에 중독된 이가 많은 지금, 진에 고액의 영업 허가료를 부과하면 반발이 거세지고 밀주와 밀거래가 잦아져 되레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일리가 있다. 하지만…….

‘클로에, 네가 대체 뭘 안다는 거야?’

지금에 와서 아서는 분노에 휩싸여 생각했다.

‘사업에 재주가 있다는 건 알겠지만 정치는 내가 더 잘 알아. 나는 황자야, 장차 이 제국의 주인이 될 몸이라고.’

아서는 몸을 돌려, 자신의 부친과 공작 부부를 등지고 걸었다.

‘이제 그녀의 말 따위는 필요 없어.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할 거야. 시위가 일어나면 반역죄로 진압하면 되고, 밀거래가 기승을 부리면 단속하면 돼. 바텐베르크 따위 알 게 뭐야? 클로에가 누구를 선택하든 내가 눈 하나 까딱할 것 같아?’

“어머, 황자 전하?”

“황자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걷고 있으니, 평소 그를 보고 꺅꺅대는 영애 몇 명이 다가왔다.

“용안이 좋지 않으세요. 혹시 근심거리라도 있으시다면 저희에게 말씀해 주시어요.”

“맞아요. 저희는 자나 깨나 황자님 걱정뿐이랍니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아서에게 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서가 소리쳤다.

“시끄러우니까 비켜! 날 좀 내버려 둬!”

“어머, 황자님!”

“황자 전하!”

그들이 손을 뻗었으나 아서는 그 손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씨근거리며 생각했다.

‘두고 봐. 이번에야말로 내가 바텐베르크를 이겨서 클로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줄 거라고!’

* * *

클로에와 알폰스에게 의뢰한 연구가 완성되었다는 편지가 왔다. 그 편지를 받은 클로에는 뛸 듯이 기뻐하며 내일 당장 방문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다음 날 클로에와 알폰스는 약속한 장소에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실에는 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계가 있었다. 그것을 본 클로에가 눈을 빛냈다.

“이것이 그 CTC 제다 기계인가요?”

“그렇습니다, 공작부인.”

학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클로에는 감탄을 연신 내뱉으며 기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머, 여기가 찻잎을 분쇄하는 부분이고 이 통은 찻잎을 마는 데에 쓰는 건가 보네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부인.”

“정말 굉장해요. 제 머릿속에 있던 것과 똑같아요.”

그녀가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익숙했으나 학자들은 내심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쇳덩어리를 보고 저렇게나 좋아하는 공작부인 같은 것은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분이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공작부인도 어지간히 별나시군.’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기계의 동력원은 뭔가요?”

“마나입니다, 공작부인. 하지만 마나의 가격이 비싸다는 한계가 있어서 증기의 힘을 동력으로 하는 CTC 기계도 연구 중에 있습니다.”

“정말 완벽해요!”

클로에가 손뼉을 짝 쳤다.

“이 기계를 시범 가동해 볼 수 있을까요? 이 기계로 만든 차를 마시고 싶어요.”

“그러실 줄 알고 시범 가동을 준비하던 참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 놓은 제다하지 않은 생 찻잎을 기계에 투입했다.

기계가 진동을 일으켰다. 김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며 산화되지 않은 찻잎의 풋풋한 풋내가 피어올랐다.

“제다에는 시간이 걸리니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이죠.”

클로에가 흔쾌히 대답했다. 학자들은 클로에와 알폰스를 응접실로 안내해 기다리게 했다.

클로에는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그들은 다시 연구실로 안내되었다.

일꾼들이 찻잎을 자루에 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짙은 갈색을 띠고 자잘한 과립의 형태를 하고 있는, 클로에 그녀가 알고 있던 CTC 홍차 잎이었다.

“어머!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학자가 트레이에 찻잎을 조금 담아 건네자 클로에는 그것을 감탄하는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동글동글하게 말린 찻잎이 정말 귀엽지 않나요? 알폰스.”

이런 질문을 받은 알폰스는 당황스러웠다. 몇 시간 만에 CTC 찻잎이 제다되는 과정이 신기하고 흥미롭긴 했지만, 찻잎이 귀엽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건가. 아니면 그녀가 특이한 건가.’

심지어 그런 말을 하는 클로에의 얼굴이 농담을 하는 기색이 아니라 정말 진심인 것 같아서 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알폰스는 특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예,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죠? 알폰스도 그렇게 생각하죠?”

클로에가 기뻐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는 학자들은 더 당황스러웠다.

‘그 냉철하기로 유명한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께서…… 찻잎이 귀엽다고 하시는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들 중 대부분이 알폰스를 처음 보긴 했지만, 세간의 소문으로 들어 왔던 그 무자비한 바텐베르크 공작과 찻잎이 귀엽다고 말하는 눈앞의 눈매가 날카로운 미남자는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완성된 CTC 찻잎은 클로에가 요구하는 대로 진하게 우려 뜨겁게 데운 우유와 설탕과 함께 서빙되었다.

클로에는 진한 찻물에 조심스럽게 우유를 따르고 설탕을 섞었다. 그들은 제국 최초의 CTC 밀크티를 맛보았다.

“아니, 이런 맛이…….”

“밀크티에서 이렇게 깊은 맛이…….”

공작부인이 직접 만든 밀크티를 맛보는 호사를 누린 학자들이 감탄했다.

알폰스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클로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따라서 밀크티를 맛본 클로에가 행복한 얼굴로 뺨을 감쌌다.

“어머……! 정말 진하고 맛있어요.”

* * *

첫 CTC 홍차 생산 공장은 싱할라에 세워졌다. 다른 지역과 달리 싱할라는 1년 내내 찻잎을 재배할 수 있기 때문에 겨울에도 홍차를 생산할 수 있었다.

수도의 주택가, 평민들이 모이는 허름한 술집.

“또 진이구만.”

한 공사판 잡역부 하나가 투덜거렸다. 그의 앞에는 진 병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일을 마치고 싼 맛에 마실 만한 음료는 이것밖에 없지. 불평 말고 마시게.”

그의 동료가 대답했다.

“나는 오늘은 마시지 않겠어. 5일 내내 취해서 집에 들어갔더니 우리 마누라가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타박이야.”

“우리 마누라도 술 말고 애들도 함께 먹을 수 있을 만한, 가계에 도움이 되는 걸 사 오라고 야단이야. 하지만 그런 게 세상에 어딨나? 진이 몸에 나쁜 건 알지만 몸에 좋고 맛있는 건 다 비싸고, 싼 것은 죄다 몸에 나쁜 것뿐이니 말일세.”

“그러고 보니 요즘 그런 소문이 있던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인부가 끼어들었다.

“무슨 소문?”

“성 질렌할 광장 앞에서 새로운 홍차 가게가 개업한다는 소문 말일세. 얼마 전 정육점이 사라진 자리에 홍차 가게가 개업한다던데.”

인부들 중 한 명이 팽 하고 코웃음을 쳤다.

“홍차? 그건 높으신 분들께서나 잡수시는 거 아닌가? 그런 비싼 물건을 파는 가게가 천것들 동네에 들어오다니, 언제 망해서 나가게 될지 뻔하구먼.”

“하지만 나는 홍차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해. 자네 말대로 요즘 높으신 분들께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그걸 드시고 계신다잖나.”

“맞아. 듣기로는 홍차라는 건 정말 달콤하고 좋은 냄새가 나고, 우유와 설탕을 넣으면 부드럽고 고소하니 꼴딱꼴딱 넘어가서 아침밥 대신 주린 배를 덥히는 데에도 아주 좋다고 하던데.”

마셔 본 적 없는 환상 속의 음료 홍차를 상상하던 인부들이 침을 삼켰다.

“사실 나도 마셔 보고 싶긴 해. 그게 그렇게 비싸지만 않았어도…….”

“그래도 요즘은 가격이 많이 내렸다던데, 어쩌면 앞으로는 더 내릴지도 모르지. 우리들도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예끼 이 사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홍차는 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거라던데 그걸 우리가 잘도 사 먹을 수 있겠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그들을 향해 어떤 남자가 달려왔다. 그들의 직장 동료 되는 사람이었다.

“자네들 그 소식 들었나? 소문의 홍차 가게가 바로 오늘 개업했다네!”

“마침 그 가게 얘기를 하고 있었던 참인데 벌써 열었나?”

“벌써 열었나? 가 아닐세! 글쎄 그 홍차 가게에서 홍차라는 걸 공짜로 나눠 준다고 하지 않겠나! 선착순 400명 한정으로!”

“뭐? 홍차를 공짜로 나눠 준다고?”

그 말을 들은 인부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진 같은 걸 마시며 노닥대고 있을 때가 아니었군. 난 먼저 가 보겠네!”

“아니 저런 의리 없는 인간을 봤나!”

“잠깐, 나도 데려가야지!”

결국 홍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인부들은 물론, 그들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기거나 홍차를 공짜로 나눠 준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전해 들은 사람들도 우르르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주택가에 새로 개업한 홍차 가게 앞의 줄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여진이 말했다.

“이번에도 공작부인의 혜안이 그대로 적중한 것 같습니다. 서민들의 반응이 아주 좋은데요.”

클로에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호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평민을 상대로 한 마케팅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똑같이 손님을 끌어들여야 할 때도, 귀족이 상대일 때와 평민이 상대일 때의 마케팅 방식은 천지 차이였다. 과시와 허영의 충족을 위한 소비를 하는 귀족과 부유층들이 공짜 마케팅, 덤 마케팅 따위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과시욕을 충족시키는 고급화 전략과 이미지 마케팅이 아주 잘 먹혀들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처럼, 고객층이 평민과 서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소비에 있어 가격을 몹시 중요하게 따졌다. 그들은 똑같은 물건이라면 더 저렴한 쪽을, 심지어 품질이 더 낮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렴한 쪽을 선호했다. 덤이나 무료 같은 것도 무척 좋아했다.

그와 동시에 평민들은 귀족을 동경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새로 유행하는 문화는 몇 달 만에 중산층에게로 퍼졌고, 몇 년에서 몇십 년 만에 서민들 사이로까지 퍼져 나갔다.

평민들의 귀족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과 존경과 질시와 부러움과 경외 등 온갖 것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귀족의 것을 선망했다. 귀족의 가문에서 일을 하거나 해서 주인마님의 손수건 하나라도 받으면 그것을 평생 동안 갖고 다니며 자랑할 정도였다.

이러한 평민들의 사고방식은 귀족들과는 전혀 달랐다. 태어난 배경과 생활 반경이 전혀 다르고 직접 접촉할 일도 많지 않으니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귀족들이 서민을 대상으로 한 사업에 잘 손을 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천하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고객에 대한 몰이해로 망해 나가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로에는 달랐다. 그녀는 날 때부터 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평범한 사람, 서민으로서 더 오래 살아왔다.

‘평민의 삶과 귀족의 삶을 둘 다 경험해 봤다는 사실이 평민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에 도움이 되었어.’

클로에는 생각했다.

그녀가 평민들의 주택가에 가게를 개업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알폰스와 키엘, 가까운 사용인들과 포트넘 부인과 로네펠트 부인 등 특별히 친한 사람 몇 명이 전부였다.

사실 반응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공작부인께서…… 평민의 주택가에 가게를 내신다고요?!”

로네펠트 부인도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황가의 여성들을 제외하면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여성이신걸요. 그런 분께서 굳이 천것들의 마을에서 사업을 하신다니요?”

로네펠트 부인이 몸서리쳤다.

“게다가 그들은 돈이 없으니 그렇게 이득이 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 곳에 가셨다가 공연히 벼룩만 옮으시면 어떻게 해요.”

매우 전형적인 귀족의 반응이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클로에는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몸에 좋고 맛있는 것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굳이 사람을 신분으로 구분하지 않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어머, 공작부인…….”

“저도 금전적 이익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제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침을 따뜻한 밀크티 한 잔으로 시작하게 된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하고 보람 있을 것 같아요.”

클로에의 생각은 여러모로 제국의 공작부인답지 않게 급진적인 데가 있었다. 하지만 로네펠트 부인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보아 와서 익숙해진 상태였고, 그녀의 그런 점을 개성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로네펠트 부인은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공작부인의 말씀이 옳아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아니에요. 후작부인께서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셔서 기쁠 따름이에요.”

클로에의 미소에는 진심과 선의만이 담겨 있었다. 로네펠트 부인은 새삼스럽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로에와 함께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자리였다. 어느덧 수도에는 애프터눈 티타임 때만은 불편한 코르셋을 차지 않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로네펠트 부인이 애프터눈 티타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심지어 한 번 코르셋을 벗기 시작하자 코르셋을 입지 않은 편안한 상태에 익숙해져서, 평소에도 코르셋을 차지 않는 귀부인마저 생겨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건 전부 이 독특하고 다소 괴짜 기질이 있는, 하지만 그런 점이 매력적인 공작부인 덕택이었다.

로네펠트 부인이 후후 웃었다.

“정말……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공작부인은 생각이 정말 깊으세요.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으시면서 언제나 아랫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시다니요. 부인이야말로 공작부인이라는 높은 지위에 걸맞은 분이세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클로에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나 많은 칭찬과 찬사를 들어 놓고도 그녀는 여전히 칭찬에 익숙지 않았다.

“과찬이세요. 전 아직 배움이 많이 부족해요.”

“호호, 또 그러신다. 하여간에 지나치게 겸손하시다니까.”

로네펠트 부인이 익숙한 듯 웃었다.

“공작부인의 새로운 사업을 응원할게요. CTC라고 하셨던가요? 새로운 홍차도 분명 반응이 좋을 거예요. 공작부인이 어떤 분이신데요.”

클로에는 자신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주택가의 새로운 홍차 가게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허, 줄을 서요. 제가 먼저 왔다고요.”

“거기 지금 새치기하는 거야?”

400명에게 무료로 홍차를 나눠 준다는 클로에의 전략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400명을 훌쩍 상회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첫날부터 몰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 소문으로만 듣던 홍차라는 것의 정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렇게 싸단 말이야?”

“홍차라는 건 귀하신 분들만 드실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들의 머릿속에 있던 홍차에 대한 선입견이 산산조각 난 것은 홍차 가게에 들어선 직후였다.

클로에는 귀족과 달리 평민들은 소비에 있어 가격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게의 입구부터 CTC 홍차의 저렴한 가격을 홍보하는 홍보지를 대문짝만하게 붙였다.

―개업 기념 50% 할인. 귀한 분들이 마신다는 홍차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기회.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홍차 한 자루가 단돈 은화 2개!

―할인은 오직 열흘뿐!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그녀의 머릿속에 평민들의 시선을 끌 멋진 카피에 대한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있었다. 사전 조사와 전생의 경험에 의거한 소비자 맞춤 홍보물이 쏟아졌다.

게다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맡을 수 있는 달콤한 향도 한몫했다.

“이 구수하고 달콤한 향은 뭐지?”

“꼭 위스키 담글 때 맡을 수 있는 엿기름 냄새 같은걸.”

“식욕이 당기는 향이야.”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고구마 같기도 하네.”

어떤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설명하려면,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냄새를 맡게 하는 것이 낫다.

엿기름이나 고구마, 호박, 꽃, 과일 등을 닮은 화려하고 선명한 향기. 이것은 진이나 맥주, 우유, 물, 주스 등 그 어떠한 음료와도 다른 것이었다.

이 달콤한 향기는 사람들의 침샘을 자극하고 식욕을 동하게 했다.

CTC는 맛이 진하고 거칠어 스트레이트보다는 밀크티에 적합한 홍차였다. 게다가, 차를 처음 마셔 보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아무것도 섞지 않은 것보다는 우유와 설탕을 섞은 밀크티를 더 좋아했다.

게다가 우유와 설탕을 넣은 밀크티는 영양가와 칼로리도 있어 포만감을 느끼게 하고 끼니를 거른 사람들에게 기력과 움직일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평민을 위한 홍차 가게에서는 품목을 다양화하기보다는 저렴한 CTC 홍차에, 스트레이트보다는 밀크티에 집중하기로 하자.’

클로에는 생각했다.

‘귀족을 상대로 하는 트리플 스위트와는 정말 여러모로 다른 전략을 사용해야겠구나.’

그리하여 가게에서 나누어 주는 홍차 역시 밀크티였다.

“이게 뭐죠?”

“꼭 우유 같은데, 색깔이 진하네. 과일 우유인가?”

홍차를 아주 진하게 우리고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어 만든 밀크티는 먹음직스러운 연갈색을 띠고 좋은 향기가 났다.

“홍차로 만든 밀크티랍니다. 드셔 보세요.”

가게 점원이 유약을 바르지 않은 작은 도기 잔에 밀크티를 따라 주었다.

귀하신 분들께서 좋아하신다는 홍차라는 음료가 궁금했던 사람들은 큰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맛이지? 어디에서도 맛본 적이 없는 맛이야!”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데, 입 안에서 좋은 향기가 피어올라!”

“이 추운 날씨에 뱃속이 따뜻하니까 아주 좋은데?”

“이렇게 맛있는 건 먹어 본 적도 없어요!”

“공짜로 나눠 준다는 소식을 듣고 오길 잘했어요…….”

클로에의 예상대로, 밀크티의 반응은 훌륭했다.

차를 처음 마셔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우유의 부드러움과 설탕의 달콤함, 그리고 홍차만의 특별한 매력인 구수하고 달큰한 향. 그리고 뱃속을 덥혀 주는 따뜻함과 든든함…….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게다가 가격도 비싸지 않다니, 훌륭한데요?”

“오늘부터 열흘만 반값 할인이라고? 그렇다면 그냥 갈 수는 없지.”

“이 찻잎, 이만큼 있으면 밀크티를 얼마나 만들 수 있어요?”

클로에의 마케팅과, 열정적인 연구로 말미암아 홍차 가게의 개장일 반응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클로에가 말했다.

“정말 잘됐어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는 것이 좋겠어요. 뒤는 부탁할게요, 여진.”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세요. 들어가십시오, 공작부인.”

“마님, 가게는 안 둘러보시는 건가요? 저렇게 반응이 좋은데…….”

클로에를 따라 나온 하녀 중 한 명인 로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클로에가 로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저 틈에 들어가면 너무 눈에 띌 거야. 내가 이런 차림으로 저 사람들 사이에 끼면 필요 없는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지 않겠니? 그럼 가게를 둘러보는 사람들이 불편하겠지. 난 그들이 내 가게를 동네 시장처럼 편안하고 친숙하게 여기길 바란단다.”

클로에는 누가 봐도 귀부인이었다. 워낙 기사와 하녀를 적게 데리고 다니는 탓에 공작부인으로까지는 안 보이지만 어쨌든 딱 봐도 품격과 교양이 느껴졌다.

매일 하녀들이 관리해 주는 머리카락과 피부, 타고난 미모, 곱게 차려입은 드레스,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열심히 익혀 누가 봐도 흠잡을 수 없는 우아하고 당당한 몸짓과 조곤조곤한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타인으로 하여금 경외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지만 귀족에게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클로에는 알았다.

아무리 가게에 애정이 있고 사람들의 반응이 기쁘더라도 자신 같은 사람이 내가 사장입네 하고 하녀와 기사들을 이끌고 돌아다니면 손님들이 당황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주택가에 홍차 가게를 여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로지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돌았다.

“어쩜……. 마님께선 어떻게 그렇게 속이 깊으실 수가 있죠? 저랑은 생각이 전혀 다르신 것 같아요. 저도 어른이 되면 마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클로에가 웃었다.

“물론이지. 로지는 세상에서 제일 속이 깊고 마음이 따뜻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

“우와, 꼭 그렇게 될래요!”

그들은 여진에게 뒤를 맡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택했다.

CTC 홍차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아니, 오히려 입소문을 타고 매일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

기계를 가동하는 동력원이 마나라는 한계가 있어서 아주 많이 내렸음에도 CTC 홍차는 진에 비하면 비쌌다. 그래서 서민층까지는 감당할 수 있지만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구입하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비싸고 귀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클로에의 평민 대상 마케팅 전략이 빛을 발한 건지, 밀크티가 맛있어서 그러는 건지 뜨거운 반응은 식지 않았다.

이 상황에 대해 여진은 이렇게 분석했다.

“몇 년 동안 이어져 왔던 진 열풍에 사람들도 질려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술은 고달픔을 잊기에 좋은 음료지만 과용하면 건강에도 해롭고 범죄와 사고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그동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진을 마셨던 건 진을 대체할 음료가 없었기 때문인데, 밀크티가 그 틈새를 뚫은 겁니다. 저렴하고 맛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며 괴로운 생각을 없애주고,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배를 채울 수 있지만 전혀 해롭지는 않은 음료라니 이 이상 훌륭한 것을 찾을 순 없겠지요.”

여진의 말을 듣던 클로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밀크티의 장점을 잘 알고 있네요, 여진. 계속 밀크티는 안 마신다고 하더니, 혹시…… 사실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여진은 동방 청나라에서 왔다. 그리고 동방에서는 차에 무언가를 섞는 것은 올바른 다도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선지 여진도 클로에의 사업을 도와주면서도 밀크티만은 한사코 마시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 댔었다.

여진이 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럴 리가요. 저는 차에 우유 같은 것을 넣지 않아요. 그냥 주워들은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아, 그래요?”

클로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진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밀크티를 몰래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클로에는 그녀의 사무실에서 발견된 밀크저그나 슈가볼 따위나 밀크티 자국이 묻은 잔 같은 것을 종종 보아 왔다. 신제품 밀크티를 맛만 본다며 가져가더니 한 병 깨끗하게 비웠다는, 그런 일이 심지어 여러 번이었다는 트리플 스위트 직원의 증언도 있었다.

클로에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될 텐데. 놀리지도 않을 거고…….’

그래도 여진이 부끄러워할까 봐 클로에는 그냥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언젠가는 말해 줄 날이 오겠지.’

몇 주가 지나고 홍차 가게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싱할라에 시범적으로 세운 생산 설비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입소문이 다른 거리까지 나서 멀리서 홍차를 사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수도의 다른 식료품점들에서 납품을 요청하기도 했다.

클로에는 CTC 제다 설비를 늘리기로 결정했다.

제다 설비를 증설하자 찻잎의 공급량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홍차 가게의 수요를 감당하는 것은 물론, 타 식료품점에 납품을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한편, 아서는 자신이 구상하던 진을 판매하기 위해서 고액의 영업 허가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법안을 완성했다.

‘좋아, 이거라면 완벽해. 더는 아무도 멋대로 진을 판매할 수 없게 되겠지. 진을 판매하지 못하게 되면 구입할 수도, 중독될 수도 없을 테고.’

그는 히죽 웃으며 보고서를 챙겼다.

‘바텐베르크는 뭘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해. 이번엔 내가 이겼어. 공작 부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걸.’

그렇게 생각한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자 궁을 떠나 본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본궁에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그 소식은 들었나? 샬롯가의 식료품점에서도 홍차를 판매하기 시작한다더군.”

“네? 샬롯가요? 그곳은 평민들의 거주지가 아닙니까?”

어디선가 들려온 말소리에 아서의 발길이 멈추어 섰다. 홍차라는 말에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요즘은 평민들도 홍차를 마신단 말입니까?”

“아니, 자네가 그걸 아직도 몰랐단 말인가? 최근 초저가의 홍차가 공급되면서 평민들 사이에서의 홍차의 소비량이 늘었네. 그와 함께 홍차와 함께 곁들어 먹는 설탕과 우유의 소비량도 많이 늘었다더군.”

“초저가의 홍차라고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홍차는 전량 수입품이잖습니까.”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 듣기로는 홍차를 저가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제조법이 개발되었다던 것 같은데……. 나라고 초저가의 홍차를 보거나 맛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고급 홍차를 살 수 있는데 뭐하러 평민들이나 마시는 저가의 홍차를 사겠나?”

본궁의 복도 한구석에서 대신과 청년 하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수도에서는 진의 대유행으로 인해 우유의 소비량이 줄었다. 그런데 우유의 소비량이 다시 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진을 덜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들의 대화에 따르면 사람들이 갑작스레 진을 덜 찾게 된 이유는 명백했다. 평민들 사이에서 홍차가 유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유의 자리를 저렴한 진이 대신했듯 홍차가 저렴해지자 홍차가 진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쥔 아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대신과 청년에게 걸어가 말을 걸었다.

“지금 한 이야기 전부 사실이야?”

“아니? 황자 전하?”

“화,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대신과 청년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아서는 그들의 인사에는 대꾸도 제대로 해 주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새로운 제조법으로 만들었다는 저가의 홍차를 처음 판매하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야?”

“송구하지만 그것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전하. 듣기로는 평민의 거주지인 성 질렌할 광장에 생긴 작은 홍차 가게가 시초였다는데, 아마 어떤 평민이 개업한 가게겠지요. 요즘 홍차를 취급하는 가게가 좀 많습니까? 더군다나 귀족들은 평민들을 상대로 사업을 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대신이 말했다.

“그나저나 황자 전하께서 이 일에 관심을 두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평민 거주지의 많고 많은 가게들 중 몇 개일 뿐인데요.”

그는 평민들 사이에서의 홍차의 유행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언제나 있어 왔던 평민 사이의 유행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서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공부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타고난 머리는 좋았다. 더군다나 요 몇 달은 내내 진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으니 생각이 이쪽으로 미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갑작스레 홍차를 저가에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조법이 개발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게 만들 만한 사람은 제국에 한 명밖에 없어.’

게다가 귀족들은 평민 상대로 사업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 그가 알고 있는 그녀는 분명 다른 귀족들과는 달랐다.

‘금화 5천 개요? 분명 판매 규제는 되겠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진을 매매하던 빈곤층이 불만을 가지기라도 하면요? 그때마다 강압적으로 억누르실 생각인가요?’

‘그 사람들에게 진은 노동과 빈곤의 고됨을 달래 주는 삶의 낙일지도 몰라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진을 강제로 빼앗는 방식은 분명 큰 부작용을 부를 거예요.’

그녀는 언제나 다른 귀족들은 관심도 두지 않을 평민들의 고충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괴로움에 공감했으며, 그들을 도와주려 노력했다.

그녀가 자신의 저택의 사용인들이나 가게의 직원들에게도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그로 인해 감동한 사용인들과 직원들은 그녀를 얼마나 존경하고 정성으로 모시는지에 대한 일화들은 귀족저마다 있는 하녀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어떤 귀족들도 신경 쓰지 않는 아랫사람들을 성심성의껏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미담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탄을 자아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거야. 자신이 저가의 홍차를 공급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그녀가 모르고 그랬을 리 없어.’

아서는 생각했다.

황자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굳어지니 대신과 청년은 당황했다. 자기들이 뭐 말실수라도 했나 싶었던 것이다.

“황자 전하, 결례인 줄은 알지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보다 못한 대신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말했다. 아서는 대답 대신 물었다.

“성 질렌할 광장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만…….”

아서는 자기보다 30살은 많아 보이는 대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감사 인사 한마디 없이 몸을 휙 돌렸다.

“별일 아니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마. 하던 얘기 계속해.”

“전하!”

어깨너머에서 대신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서는 무시했다. 그는 다시 황자 궁으로 돌아가서 보고서를 아무렇게나 던진 뒤 외출할 채비를 했다.

그는 가능한 한 수수하게 입고 머리카락과 눈의 색깔이 눈에 띄지 않게 모자를 눌러쓴 뒤 평민들의 거주지로 떠났다.

‘이곳이 성 질렌할 광장인가.’

광장은 수도 중심가에서 떨어져 황궁에서 다소 먼 곳에 있었다. 평민들의 거주지라 그런지 황궁과는 전혀 다르게 골목골목 너저분하고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났다.

‘이런 곳에 그 클로에가, 제국의 공작부인이 가게를 냈단 말이야? 믿을 수 없군.’

아서는 손수건으로 코를 싸맸다.

문제의 홍차 가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에 띄는 입지에 자리를 잡은 데다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가게를 본 아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게는 관리를 열심히 하는지 위생적으로는 깨끗하고 청결했다. 아서의 눈에 띈 것은 벽마다 붙어 있는 알록달록한 홍보지였다.

―홍차 대폭 할인! 귀한 분들이 마신다는 그 음료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기회.

―맛도 좋고 몸에도 좋으며 아침에 잠을 깨워 정신을 맑게 해 줍니다. 아이들에게도 추천!

―세 자루를 사면 한 자루를 덤으로 드립니다!

‘할인? 덤? 장난하는 거야? 이런 천박한 광고 문구는 대체 누가 쓴 거야.’

날 때부터 제국의 황자였던지라 뼛속까지 귀족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아서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말이지 천한 것들이나 환장해서 덤벼들 만한 내용이군. 이런 가게를 정말 클로에가 냈단 말이야? 걔가 아무리 특이하긴 하지만 공작부인인데…….’

한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적이 있었다.

‘홍보를 하는 것은 어떨까요? 신메뉴 출시 기념 재스민 차 50% 할인이라든가…….’

아서가 친구의 요리점인 명해관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는 그곳에서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를 만났다.

그때 클로에는 명해관의 사장에게 재스민 차를 소개시켜 주고 요리점에 재스민 차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제국에 불고 있는 차 열풍의 시초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때 재스민 차의 홍보 방식에 대해 논의하던 중 클로에는 할인 전략을 언급했다.

‘맞아, 걔는 그때도 그랬었지. 사실 그때도 얘는 공작부인이면서 뭐 이런 생각을 다 하나 하긴 했는데…….’

이후 클로에가 벌인 활약과 명해관에서의 재스민 차 판매량 상승이 너무 강렬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원래 사고방식이 이런 사람이었다.

‘하긴 그런 애였으니 지금 이런 홍보지를 붙이는 것도 가능하겠지. 다른 귀족들이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정말 특이하고 유난한 데가 있었다. 제국에서 백작 영애로 태어나 고이고이 키워져 공작부인이 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갑작스레 가슴속이 울렁였다.

‘사실, 그런 점이 그녀의…….’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생각한 아서는 곧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뭐? 그런 여자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 클로에도 별거 아니야. 이런 짓도 다 헛짓이라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생각하고 만 자신에게 화가 난 아서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는 분주하게 상품을 정리하고 있던 직원에게로 갔다.

“네, 손님.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직원이 물으면서 몸을 돌리다가 움찔 놀랐다.

아서는 체격이 상당히 컸을뿐더러, 가능한 한 수수하게 입고 왔다고는 하지만 평소 워낙 화려한 걸 좋아하는지라 이곳에서는 단연 눈에 띄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미 홍차 가게를 찾은 손님들 중 많은 수가 그를 보고 당황하거나 수군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누가 봐도 황자까지는 아니어도 어딘가의 높으신 분이구나 하는 티가 났다.

아서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대표 누구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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