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장 (32/39)

32장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클로에는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이번에는 접견실에서 성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성녀는 깜짝 놀랐다.

“어서 오세요, 공작부인. 그리고…….”

그럴 만도 했다. 클로에의 곁에 처음 보는 사람이 함께 있었으니까.

성녀의 시선을 느낀 클로에가 빙긋 웃었다.

“실례합니다, 성녀님. 이쪽은 제 낭군인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성녀님. 바텐베르크 공작이라고 합니다.”

성녀는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어제 클로에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오지 않았으며 자신을 접견하는 것도 남편 몰래 한 행동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몰라야 할 클로에의 남편이 여기 있다니?

하지만 보아하니 나쁜 상황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 부부가 몹시 사이가 좋아 보이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어떤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성녀는 미루어 짐작했다.

성녀가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공작.”

“실례라는 것은 알지만, 아내가 성녀님을 접견하는 동안 제가 그녀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공작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성녀가 클로에를 보았다. 클로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폰스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성녀의 안내를 받아 접견실 안쪽의 작은 방에 들어갔다.

“이곳은 신탁을 받는 장소입니다. 공작부인께서 요청하셨던 몸의 과거의 주인과의 대화는 이곳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녀가 말하며 클로에와 알폰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신탁실은 대단히 어둡고, 의자 몇 개 정도의 간결한 가구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라면 딱 하나 있었다. 의자들 사이에 떠 있는 커다란 구슬이었다.

사람 머리 크기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구슬은 아무런 받침도, 지지대도 없이 그냥 허공에 떠 있었다. 클로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녀가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전부 되었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클로에가 표정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긴장이 되어 진정되지 않았다. 손에 땀이 찼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어찌할지 모르고 있던 그때였다. 그녀의 레이스 장갑 낀 손 위에 크고 긴 손이 포개어졌다.

클로에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알폰스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가 클로에의 손을 잡더니 깍지를 꼈다. 그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클로에는 가슴속에서 번져 나가는 따뜻함을 느꼈다. 단지 그가 손을 잡아 주었다는 것, 그가 곁에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클로에가 알폰스를 향해 마주 웃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그가 있으니까.’

그때였다. 눈앞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클로에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구슬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떠 있던 수정 구슬이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한 손으로는 알폰스의 손을 꼭 쥔 채 구슬을 바라보았다.

여린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구슬 속에서 드러난 것은…….

“……나.”

클로에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수정 구슬 안에 비치고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생의 자신, 박하정이었다.

수정 구슬 속의 하정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과 노트 몇 권을 펼쳐 놓고 있었는데, 아마 공부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수정 구슬의 뒤에서 성녀가 말을 걸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클로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에.”

수정 구슬 속의 하정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누, 누구……?”

육식 동물 앞에서 겁먹은 초식 동물 같은 그 얼굴이 안쓰러워서 클로에가 말했다.

“클로에, 나야.”

“너, 너가 누군데? 어떻게 나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거야?”

“나야…… 박하정. 네 지금 몸의 옛날 주인이야.”

“……!”

하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쪽에서는 이쪽을 볼 수 없는지 여전히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정이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몸을…… 돌려 달라고 하려고 말을 건 거야?”

“응?”

“이제 겨우…… 익숙해졌는데. 이곳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번에 놀란 쪽은 클로에였다.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정을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이곳, 제국에서의 생활을, 클로에로서의 삶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하니까, 분명 상대 역시 이 삶을 돌려받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상대 역시 새로운 삶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클로에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알폰스의 손을 힘주어 꼬옥 잡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클로에. 내가 네게 말을 건 것은 그 몸을 돌려 달라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애초에 돌아갈 방법도 없다고 하던걸.”

“그게…… 정말이야?”

하정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럼…… 왜 나에게 말을 건 거야? 아니, 어떻게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거야?”

클로에는 지금껏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어느 날 눈을 떠보았더니 클로에의 몸에 들어와 있었던 것부터, 이쪽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지만 상대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연락할 방도를 찾다가 교황청까지 연이 닿았고, 성녀의 도움으로 이렇게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클로에는 잠시 주저했다. 생각을 고르던 그녀가 마침내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은…… 미안하다는 거야.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네 자리와, 삶과, 가족을 빼앗아 가서 정말 미안해. 계속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어. 네가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봐. 네가 나에게 뺏긴 삶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봐. 내게서 돌려받고 싶어 할까 봐…….”

클로에가 씁쓸하게 웃었다.

“계속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이제야 이렇게 말하게 됐네. 내가 겁쟁이라서 이제야 네게 사과를 할 수 있게 됐어. 네 자리를 가져가서, 네 인생을 바꾸어서 미안해, 클로에.”

하정의 얼굴이 굳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허공을 보며 말했다.

“아니야! 나…… 난, 널 원망하지 않아.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오해한 거야.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마. 하정아, 나는……! 난!”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정이 감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난…… 어느 날 갑자기 여기 오게 되어서 너무 놀랐어. 무서웠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게 있는 건 방 하나랑 네가 남겨 놓은 저금뿐이고……. 하지만 나, 있잖아, 곧 익숙해지게 되었어. 네 기억이 남아 있어서 새로운 세상에도 금방 적응했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긴 하지만…… 이미 알겠지만, 나 원래 친구도 소중한 가족도 하나도 없었는걸.”

그녀가 이어 말했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차라리 좋았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어. 이곳에는 나를 괴롭히는 하녀와 하인도 없고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사교계도 없어.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곳에는 학원도 있어서 뭐든지 배울 수 있어. 하정아, 보여?”

하정이 책상 위를 가리켰다. 여전히 책 몇 권과 노트 몇 권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 공부하고 있어. 자격증 시험 준비하고 있어. 나 여전히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잘 못 하고, 눈도 못 마주치지만……. 그래도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생겨서 기뻐. 거기 있을 때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는걸. 뭔가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일인 줄 난 미처 몰랐어.”

하정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정아, 난…… 거기 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해. 이곳에서 나는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 네가 모아 놓은 저금 다 쓰기 전에는 분명 취직도 하고, 내 힘으로 돈도 벌면서 살 수 있겠지. 그러다 보면 소중한 사람도 생길 테고. 있잖아, 나는…….”

클로에는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정이 웃었다.

기억 속에서 웃는 얼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언제나 우울하고, 겁먹고, 주눅 들어 있는 얼굴만 하고 있던 과거의 클로에가 웃었다. 아무런 불안감도, 두려움도 없는 행복한 얼굴로.

“……네게 고마워, 하정아. 내게 새로운 삶을 주어서. 내가 살아 있는 보람을 느끼게 해 주어서.”

“…….”

“사실은 나도 무서웠어. 나는 이렇게 만족하고 있는데, 이곳의 삶이 마음에 들었는데……. 네가 어느 날 나타나서 모든 걸 돌려 달라고 말할까 봐. 내 편이라곤 아무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공작가로 다시 돌아가라고 할까 봐.”

클로에는 깨달았다.

남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클로에, 지금의 하정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정 구슬 속의 하정이 배시시 웃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치? 너랑 내가 같은 생각이라서…….”

“……응.”

클로에 역시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상대에게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행복해서. 네가 그렇게 말해 주어서…….”

하정이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말했다.

“클로에,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

하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물었다.

“응? 어떻게?”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열심히 사는 거야. 너는 그곳에서, 나는 이곳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해서, 새로운 삶을 얻은 것에 감사하면서, 행복해지자. 서로에게 보란 듯이. 비록 이번 이후로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다시 이야기 못 해?”

하정의 얼굴에 슬픈 빛이 스쳐 지나갔다.

클로에 역시 안타까웠다. 비록 짧은 순간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유대감이 있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알폰스와 성녀 빼고는) 둘만의 비밀이 있다. 통하는 것도 많을 것이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다른 세계끼리는 서로 소통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사실 나도 너와 이렇게 대화하면 안 되는 건데, 우리가 정말 특이한 경우라서 성녀님께서 편의를 봐주신 거야. 이런 변칙적인 일을 다시 부탁드리기엔 너무 염치가 없지…….”

이렇게 말하는 클로에의 마음도 너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정의 얼굴이 흐려졌다. 한참 대답 없이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응, 알겠어. 아쉽다. 우리, 어쩌면…….”

그러고는 하정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클로에는 마음이 미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하려다 만 뒷말의 내용을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클로에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친구야, 클로에.”

“어, 응?”

“우린 친구야. 그렇지? 비록 다시는 만날 수 없더라도. 두 번 다시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고, 서로의 미래를 응원할 테니까.”

클로에가 정말 따뜻하게 웃었다.

“그렇지?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클로에. 그리고 그럴 거라고 믿어.”

하정의 눈이 흔들렸다. 어 하는 사이에, 당황스럽게도,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울면서 말했다.

“나, 친구 생긴 거 처음이야.”

“뭐……?!”

뜻밖의 말에 클로에가 당황했다. 하정은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책상에 놓여 있던 티슈 상자에서 티슈를 뜯어서 얼굴을 문질렀다.

“나도 그래, 하정아.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말 정말 행복해져서 그 세계의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해. 나도 이 세계의 누구보다 행복할 테니까…….”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응, 그럴게. 잘 지내, 클로에.”

“너도 잘 지내.”

“이제 정말 안녕이야.”

“응, 안녕.”

하정이 티슈에 코를 풀었다. 그녀가 빨개진 눈으로 애써 웃어 보였다. 상대에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지만, 클로에는 손을 들어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수정 구슬에서 빛이 사라졌다. 빛날 때처럼 천천히 점멸한 구슬은 곧 성력을 잃고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평범한 수정 구슬이 되었다.

그것을 보는 클로에는 마음이 너무나 복잡했다.

이전의 클로에, 지금의 하정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아니, 새로운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그녀와도, 저 세계와도 영원히 작별이라는 것은 안타까웠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복잡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조금 기운 빠진 얼굴로 옆자리의 알폰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상하고 따스한 얼굴로. 그 어느 상황에서도 그녀의 편이 되어 줄 것만 같은 눈으로.

“알폰스.”

클로에가 그를 불렀다.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클로에의 어깨를 끌어당겨 감쌌다. 그의 품이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했다.

“대화가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네요.”

알폰스에게 안겨 있던 클로에가 흠칫 놀랐다. 성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성녀의 눈앞에서 알폰스와 포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그의 품에서 나왔다. 클로에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네, 정말 잘 되었어요. 다 성녀님 덕분이에요.”

“아닙니다. 저는 단지 소통의 수단이었을 뿐, 저 세계의 그녀가 행복을 찾은 것은 그녀와 그대의 덕입니다. 그대가 평소 성실하게 살아왔던 것이 분명 그녀에게도 도움이 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녀 역시 많이 노력했을 테고요.”

클로에는 부끄러워졌다.

사실 성녀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클로에가 저 세계에서 성실하게 살아서 다양한 지식과 능력을 습득하고, 저축도 부지런히 하고 집도 구해 놓은 것이 지금의 하정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하정 역시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했고 말이다.

클로에가 낯을 붉히며 물었다.

“저희의 대화를 전부 들으셨나요?”

성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한 반 정도일까요. 두 분 모두 반은 이곳의 언어를, 반은 저곳의 언어를 사용하셔서 알아듣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죠? 공작.”

“예.”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감정이 격양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두 가지 언어를 섞어 쓴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폰스를 정말 사랑하고 그에게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매우 사적인 대화였으므로 그걸 전부 들려 주는 건 부끄러웠다.

클로에는 성녀에게 몇 번이나, 그리고 무척 정중한 태도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성녀 역시 그 인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저야말로, 그대가 빙의자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성녀가 말했다.

“그대의 앞날에 신의 가호와 축복이 깃들기를.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언제까지나 행복하기를.”

클로에는 알폰스와 함께 교황청을 떠나 숙소로 돌아갔다.

“아니, 주군? 어째서 마님과?”

“어머나, 각하께서 여기 어찌……!”

그리고 클로에와 알폰스, 양쪽의 수행인들은 난리가 났다. 알폰스 쪽의 사람들은 상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클로에 쪽의 사람들은 전혀 몰랐기에 더더욱 야단법석이었다.

오랜 시간 묵히고 쌓여 온 죄책감을 훌훌 털어 낸 기분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신이 났다.

‘너무 상쾌해서 날아갈 것 같아.’

게다가 곁에는 알폰스까지.

숙소 방에서 클로에가 그에게 말했다.

“언젠가 저의 비밀을 알폰스가 알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어요.”

알폰스가 창문을 등지고 서서, 그런 그녀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겁니까.”

클로에는 알폰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한 눈으로 말했다.

“다른 그 어느 곳도 아닌, 당신이 있는 이곳에 오게 되어 기쁘다는 것. 전생의 삶에도 후회는 없지만 저는 당신을 만나서 누구보다 행복해졌다는 것.”

알폰스의 눈에 감동의 빛이 일렁였다. 감정 표현이 적은 그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가 클로에의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저야말로, 당신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제 곁에 와 준 것은 기적입니다.”

클로에가 화사하게 웃었다.

“세계도, 시대도 뛰어넘어서 당신을 만나러 제가 왔나 봐요.”

알폰스는 견디지 못하고 그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작은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개려던 찰나…….

“아…… 그런데.”

클로에가 그의 입술 위에 검지를 대었다.

“이번 일은 좀 심했어요. 설마 저를 몰래 따라오실 줄은…….”

“아.”

“저도 비밀을 숨긴 건 잘못했지만, 알폰스도 잘못한 거 알고 있죠?”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이지 그녀는 그렇게나 여린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단호할 때는 한없이 단호하다. 그것마저 그녀의 사랑스러운 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알폰스는 당혹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무척이나. 면목이 없습니다.”

“절 걱정해서 그러신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이 이상 화를 내진 않을게요. 하지만…….”

클로에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한 번만 더 저를 미행하시면 그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땐 정말 각방이에요.”

“가…… 각방……?”

클로에는 보았다. 그의 언제나 냉철하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격렬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을…….

그 모습이 귀여워서 클로에가 괜히 물었다.

“아시겠죠?”

“……예, 물론입니다. 부인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알폰스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이혼당하지 않고 이 정도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잘못 같은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지우개처럼 하얗게 지워진 뒤였다. 그가 그녀에게 이혼을 청구하는 일 따위는 상상 속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일이니.

‘당분간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겠어.’

알폰스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앞으로 한동안은 그녀의 뜻에 무조건 따라야겠다는 판단을.

그제야 만족한 듯, 클로에는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잘했어요.”

그녀가 그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알폰스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렁였다.

정말이지, 이 여자는 어디까지 사랑스러울 작정인 건지.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까지 자신에게 와 주어, 자신의 아내가 된 것은 얼마나 큰 기적인지.

그가 미소 지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 위에 입술을 덮었다.

진하고 뜨거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알폰스는 그대로 그녀의 몸을 가볍게 들고 걸어갔다. 물론 침대를 향해서였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클로에는 숨이 가쁜지 그의 셔츠 자락을 쥐었다.

알폰스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녀린 몸 위로 그의 단단한 몸이 겹쳐졌다.

숙소의 침대는 클로에가 저택에서 사용하는 침대보다 조금 작았다. 이 근방에서 제일 좋은 숙소를 구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편한 침대가 아니라고 해도 행복했다. 왜냐하면, 알폰스와 함께였으니까.

그에게 어떠한 비밀도, 죄책감도 가지지 않은 지금, 그저 그와 함께 누워서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클로에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아, 알폰스. 으응, 음…….”

클로에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폰스는 능숙하게 클로에의 드레스를 벗기면서 그녀의 가슴 위에 몇 개나 되는 붉은 흔적을 피워 냈다.

클로에는 드레스 주변으로 드러날 만한 곳에 흔적을 만드는 것에 예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흔적은 없어질 만하면 생기고, 생긴 뒤에 그 위에 다시 덮이고 하는 식으로 클로에의 몸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사라질 줄을 몰랐다.

마치 그녀를 애태우듯 가슴 주변에 둥글게 돌아가며 흔적을 남기던 알폰스는, 마침내 그녀의 분홍색 유두를 입에 물었다. 그가 유두를 입술로 부드럽게 문 채 혀끝으로 간질이자 클로에의 입에서는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 흐윽, 으으응……. 알폰스. 알폰스…….”

클로에는 원래 그가 주는 자극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감도가 좋은 것 같았다.

아마 며칠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함께 있을 때는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하니까. 그녀의 가슴부터 배까지 핥아 내려가던 알폰스는 배꼽 주변을 혀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 놀림을 따라 클로에의 숨이 달떠 오르고, 허리가 움찔움찔 떠올랐다.

며칠을 만나지 못하면서 알폰스 그도 그녀를 많이 그리워했다. 멀리서 보기만 하면서 손 한 번 잡아 주지 못하고, 말 한 번 섞지 못하는 상황은 아예 보지 못할 때와는 다른 애타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를 아예 볼 수 없었던 그녀 역시 그가 많이 그리웠을 것이다.

아니면, 그에게 가지고 있던 비밀이 사라지면서, 모든 걱정과 불안이 풀렸기 때문인지도. 그래서 그녀의 마음과 몸이 그에게 남김없이 활짝 열린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민감한 반응이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더더욱 큰 기쁨을 안겨 주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주체할 수 없는 쾌감에 흐드러지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두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허벅지 안쪽의 희고 여린 살을 한껏 빨았다. 허벅지 안쪽에 새겨지는 은밀한 자국들을 만족감과 탐욕이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그는, 마침내 욕정이 뚝뚝 떨어질 듯한 눈으로 클로에의 아랫입술을 살폈다.

잔뜩 상기되어 붉은빛이 도는 그곳은 흥분감에 야살스럽게 떨리고 있었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알폰스의 눈에는 이 이상 먹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냉혈한 그의 짐승적인 욕망을 끌어내는 절경이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더니, 그 아랫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아, 아!”

클로에의 신음이 한층 높아졌다. 그런 반응을 즐기는 것도 알폰스의 큰 기쁨 중 하나였다.

그가 능수능란하게 혀를 놀려 아랫입술의 크고 작은 주름들을 유린하고, 작은 구슬을 혀끝으로 농락하는 동안 클로에는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허리를 뒤틀었다. 발가락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구부러졌다. 몸의 그 어느 곳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멋대로 움찔거렸다.

“아아, 흐으으. 알폰, 스……! 아, 이제 그만. 기, 기분이 너무……!”

하지만 알폰스는 오히려 더 악착같이 그녀의 하반신에 달라붙어 왔다. 그녀의 양 허벅지에 손가락 자국이 남을 정도로 단단히 움켜쥔 그는 거의 무아지경으로 핥고 빨았다.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를 탐하던 그는, 클로에의 제일 여리고 민감한 작은 구슬에 입술을 대고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쾌감 앞에서 클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알폰스는 그녀가 절정에 오르는 것을 종용하는 것 같았다. 클로에의 두 다리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번쩍 올라갔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한 차례의 절정을 느꼈다. 울컥 하고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 아흐, 하아아…….”

클로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알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은 정염으로 불타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다정했다. 그는 젖은 입술로 그녀의 얼굴에 몇 번이나 입 맞추고 속삭였다.

“말해 주십시오.”

“뭐, 를…….”

“사랑한다고 해 주십시오.”

다리 사이의 시트가 폭삭 젖은 것이 느껴졌다. 그가 다급한 손길로 앞섶을 풀고 분신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알폰스는 그녀의 몸 위에 몸을 겹치며, 그것을 천천히 그녀의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 압박감. 입구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느낌. 뱃속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충만감. 이미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느껴 본 감각이지만 클로에는 매번 생경했다. 그리고 매번 행복했다.

그가 자신의 안쪽에 완전히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알폰스는 다시 한 번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뺨에 손을 대며, 그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십시오.”

그의 한없이 다정하지만 애타는 듯한 눈길이, 그녀가 누리고 독점하는 그의 사랑이 신기루가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 눈빛 하나하나, 건네는 말 하나하나가 그의 사랑을 상기시키고, 또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일깨웠다.

클로에는 그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 가슴 속에 이렇게 커다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벅차올라 숨이 막혔다.

그래서 더없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사랑해요, 알폰스.”

그녀가 속삭였다.

“진, 심으로…… 윽, 하아……. 정말…… 사랑해요. 응…….”

알폰스가 허리를 당기더니, 밀어붙였다. 그의 흥분한 움직임을 따라 퍽,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음란한 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의 귀두 끝이 축축한 내벽을 긁어내리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귀두가 안쪽의 액체를 끊임없이 퍼내듯이 긁어냈지만, 클로에의 샘은 그보다도 많은 양의 물을 끊임없이 쏟아 냈다.

알폰스의 결코 지치지 않는 종마 같은 단단한 육체가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그는 몹시 단단했고, 뜨거웠고,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체취와 땀 냄새가 비강을 가득 채워 클로에는 취할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취한 채로, 오로지 서로만을 갈구하며, 두 사람의 몸이 계속해서 섞이고 부딪쳤다.

“아, 아아, 아!”

마침내 클로에가 절정의 오르막길에 올랐다. 끌려가듯 오르는 절정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의 모든 것이 휘발되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몸 안에서 수많은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그 가는 팔로 알폰스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넓은 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알…… 폰스. 아흐아!”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쾌락, 최고의 희열에 다다른 그녀의 몸이 있는 대로 수축했다. 그녀의 질은 알폰스의 물건을 사정없이 쥐어짰다.

그것은 알폰스에게도 충격적인 감각이었다. 고통과 헷갈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쾌감. 그는 아득한 추락감을 느끼면서도, 본능적으로 그녀의 가장 안쪽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클로에의 목덜미를 문 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클로에는 여전히 몸이 떨리는 절정의 여운과, 몸 속 깊은 곳에 퍼져 나가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또 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 온몸으로 그를 받아 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후우.”

알폰스가 한숨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감각이 느껴졌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무겁다고 느낄까 봐 그런지 몸을 얼른 일으켰다. 그는 클로에의 옆에 누우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눈은 한없이 다정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녀는 조용히 알폰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공작 저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것없는 여관의 좁은 침대 위였지만 어쩐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있었으니까. 이제 그와 그녀 사이에는 그 어떠한 비밀도, 죄책감도 없으니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클로에는 그것만으로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어느 곳도 더할 것이나 뺄 곳이 없는 아름다운 얼굴. 한없이 반듯한 콧대와 턱선, 그리고 날카롭지만 그마저 매력적인 눈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진홍빛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클로에는 그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던 것을 들키자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말했다.

“저, 사실은…… 알폰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요. 제 전생의 얼굴이요.”

“그건 어째서입니까.”

클로에가 자신의 배 위에 얹고 있던 손을 알폰스가 끌어당겨 쥐었다. 그가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 손길마저 더없이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워 클로에는 더 부끄러워졌다.

“음, 왜냐하면…… 전생의 저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으니까요.”

클로에는 아까 수정 구슬을 통해 보았던 전생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때의 그녀는 특별히 못생기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수수한 외모였다. 길가에 나가면 비슷비슷한 사람을 수십 명은 발견할 수 있고, 그 누구에게도 뚜렷한 인상이나 호감을 주지 못하는 평범한 얼굴.

반면 지금의 얼굴은 누가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알폰스가 워낙 잘생겨서 곁에 있으면 눈에 덜 띄는 감은 있었지만, 그녀 역시 아름답다는 것에는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클로에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아내가 되는 것은 싫었으니까.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생의 얼굴이 아닌, 조금이나마 더 나은 지금의 얼굴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폰스를 만나기 전에 예뻐져서 다행이에요. 그렇죠?”

그녀가 웃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알폰스의 눈에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그녀가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만큼 보기 힘들고 안쓰러운 일도 또 없었다.

그녀와의 오랜 대화를 통해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아내, 클로에는 무척 다정하지만 강단이 있으며, 그의 눈을 똑똑히 보며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줄 알았다. 게다가 지혜롭고, 뛰어난 사업 수완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일을 현명하게 해내고는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도 묘하게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자기 자신을 충분히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에게 있어서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인 그녀가 정작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알폰스의 미간에 잔금이 갔다. 그는 클로에의 손을 잡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어마!”

눈 깜짝할 사이에 그에게 끌려간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알폰스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무척 가까이 밀착된 그의 온기를 느끼며 클로에가 얼굴을 붉혔다.

‘너무 가까워. 심지어 알몸인데…….’

아까는 더한 일도 했으면서 뭐가 새삼 부끄럽냐 싶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랬다.

알폰스가 그녀의 붉어진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물론 부인께선 아름다우십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견주지 못할 만큼. 하지만, 어떠한 모습을 하고 계시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클로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진심일까? 그 얼굴을 자기 눈으로 봤는데도 이렇게 말하다니…….’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여자들이 듣기 좋아할 만한 말을 잘 아시네요. 여자 많이 울려 보셨겠어요.”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알폰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알폰스는 전생의 클로에가 한 연애 경험을 모르기 때문에) 과거 얘기를 시작하면 약점이 잡히는 건 그의 쪽이다.

알폰스가 당황하는 사이 클로에가 생각했다.

‘그이니까…… 아마 진심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속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찾아와도, 심지어 객관적인 미인이 아닌 전생의 얼굴 그대로 왔어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그녀를 마음속에 받아들였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다른 남자라면 몰라도, 이 남자라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갔다.

‘그래도…… 이 얼굴이 되어서 다행이야.’

클로에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그의 눈에 예쁘게 보이는 것이 좋으니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부끄러워하는 동안, 알폰스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그녀의 몸을 돌려서 얼굴을 마주 본 채 끌어안으며 그가 말했다.

“저는.”

“......?”

“저는 부인께서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 주셨으면 합니다. 부인은 귀한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그녀가 의도치 않게 스스로를 비하한 게 분명했다.

그녀도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닌데, 자존감이 낮다 보니 습관이 되어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오고는 했다.

클로에는 그에게 괜한 말을 해서 마음 쓰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또 고마웠다.

그리고…….

‘어쩐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의 말인걸.’

클로에는 알폰스의 몸을 마주 안았다. 그녀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믿고 신뢰하는 그는 무척이나 안정감을 주었다.

클로에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따로따로 와야만 했던 올 때와 달리, 돌아갈 때에는 함께였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한 마차에 탔다. 클로에를 따르던 행렬과 알폰스를 따르던 인원이 합쳐지자 안 그래도 많았던 인원이 더 늘어나 버렸다.

클로에를 따르던 하녀들은 여전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하지만 마님이 설명을 하지 않으시니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우리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이 세계에 그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그뿐이다. 리버우드와 성녀를 제외한다면.

클로에는 그것이 묘하게 기분이 좋고 두근거렸다.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별일이 없었다. 여행길은 순조로웠고, 그들은 마침내 일주일 만에 수도의 저택에 도착했다.

거의 보름 만에 보는 집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녀오셨습니까, 각하. 그리고 마님.”

키엘을 비롯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예의 있게 인사했다.

그동안 헌신적으로 저택을 돌보고 공작 부부의 일을 담당했던 사용인들 덕에, 클로에와 알폰스는 오랜 부재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클로에의 비밀이 밝혀진 뒤에도 일상은,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변한 점이 없었다.

하나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클로에의 제일 친한 친구가 아기를 낳았다는 점이다.

“정말 축하해요, 포트넘 부인.”

“이렇게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클로에가 수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포트넘 부인이 출산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제일 친한 친구가 출산을 했다는데 클로에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포트넘 자작저로 찾아갔다.

포트넘 부인은 아직 누워 있었고, 좀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건강한 것 같았다. 아기 역시 건강했다.

클로에는 아기가 새삼스럽게 너무나 신기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전생에도 친구나 친척의 아기는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결혼이니 출산이니 하는 것은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었다.

“아기가 정말 귀여워요. 어쩜 이렇게 손도, 발도 작은지…….”

클로에가 아기를 신기해하는 것을 보고 포트넘 부인이 웃었다.

“바텐베르크 부인도 분명 조만간 아주 예쁜 아이를 얻을 거예요. 엄마랑 아빠를 반반 닮으면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 말에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알폰스와 자신을 닮은 아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전 괜찮아요. 왜냐하면, 전 아직 제 일을 하는 것이 좋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저를 사랑하거든요. 제가 아이를 낳을 수 있든, 없든.

클로에는 차마 부끄러워서 끝맺지 못한 말을 삼켰다. 그녀가 포트넘 부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포트넘 부인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제국에서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 그리고 후계의 생산을 위한 일이었다. 클로에가 전생에 살던 곳과는 달랐다.

그런데 당장 후계를 생산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다니?

하지만 포트넘 부인은 곧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역시 바텐베르크 부인은 남들과는 생각이 달라. 꼭 제국인 같지 않은 그런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니까. 그리고 그런 점도 그녀의 매력이야.’

그렇게 생각한 포트넘 부인이 웃었다.

“그러셨군요.”

“네. 아, 선물을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기를 위한 선물과 포트넘 부인을 위한 선물을 가져왔어요.”

“어머, 물론이죠!”

클로에가 포트넘 부인을 위해 준비해 온 선물은 홍차였다. 클로에는 포트넘 부인이 임신 기간 동안 얼마나 홍차를 마시고 싶어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위해 꾹 참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전생의 세계에서는 임신 후 수유 기간까지 산모들이 홍차를 마시지 않는다. 홍차의 카페인 성분이 수유를 통해 아기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이었다. 귀부인들은 대부분 직접 수유를 하지 않고 유모를 고용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클로에는 절친한 친구인 포트넘 부인만을 위하여 트리플 스위트에서 판매하지 않는 차를 엄선해 가져오는 정성을 보였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딤불라, 우바…… 어머나 세상에, 누와라 엘리야까지?”

그리고 포트넘 부인은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기뻐했다. 그녀가 별이 쏟아질 것처럼 빛나는 눈으로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클로에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싱할라의 홍차를 좋아하시던 것이 생각나서 준비해 봤어요.”

“어머…… 바텐베르크 부인. 어쩌면 좋아요? 절 위해 이렇게까지…… 이렇게나 사려 깊고 섬세하시다니……. 전 정말로…….”

포트넘 부인은 감격에 겨워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클로에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안겼다.

포트넘 부인이 너무 강하게 끌어안는 바람에 두 사람의 옷자락이 조금 구겨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포트넘 부인이 행복하게 말했다.

“바텐베르크 부인은 최고예요. 부인만큼 다정한 친구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뭘요, 과찬이 심하세요.”

클로에가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몹시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과거의 클로에, 지금의 하정은 클로에가 첫 친구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생의 그녀에게 친구나 직장 동료는 많았다. 그냥 오다가다 만나거나 식사를 함께할 정도의 사이.

그러나 진심을 터놓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세상에 떨어져도 이전의 세계의 인간관계에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에게는 알폰스가 있었고, 그 외에도 소중한 인연이 아주 많았다. 만일 클로에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발 벗고 도와줄, 그리고 상대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도 클로에 역시 그러할 만한 그런 소중한 사람들.

‘그들 중 많은 숫자가 차로 인해 생겨난 인연이었지. 내가 차를 좋아한다는 것에 감사해.’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새로운 누와라 엘리야를 함께 맛보지 않으실래요? 올해 햇차라서 아주 맛이 좋을 거예요.”

“물론이죠! 제가 우려 올게요. 안 그래도 며칠 동안 누워만 있어서 좀이 쑤시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홍차를 우려 본 지 10달이 넘어서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을까 모르겠네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함께 차를 우려요.”

“좋아요!”

두 사람은 유모에게 아기를 맡긴 뒤, 함께 홍차를 우려 마셨다. 간만의 티파티는 무척 즐거웠다.

* * *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월동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왔다.

그래도 클로에는 작년에 비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작년에 월동 준비를 해 본 경험도 있고, 지난 일 년 동안 공작저의 내사를 보는 일에도 많이 익숙해졌으니까.’

그녀는 작년처럼 월동의 계획을 짰다. 저택의 상태를 면밀히 조사하고, 상인의 현란한 말솜씨와 온갖 종류의 화려한 신제품들 사이에서 월동 용품들을 찬찬히 비교해서 딱 필요한 물품과 자재만을 구입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키엘이나 록우드 부인에게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올해의 월동 준비도 성공적이었다. 저택 본관과 사용인 숙소 할 것 없이 저택의 모든 곳이 따뜻했다.

자신의 노력의 결과물을 보고 클로에는 뿌듯함을 느꼈다.

한편, 이번에 월동 준비를 할 때에는 특별한 물건을 발견했다.

“이 물건은 루스 대공국에서 직수입한 것입니다, 마님. 보십시오, 루스 대공국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돋을새김이 아름답지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온 상인 제레미 맥키가 떠들어댔다.

“숯과 장작을 사용하는 고전적인 물건도, 마탑의 최신 기술로 제작해 마나를 사용하는 물건도 있습니다.”

제레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클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알다마다, 그녀가 전생부터 계속 꿈꾸어 왔던 물건인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서는 돈도 없고 기회도 없어 끝끝내 손에 넣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클로에에게는 취미 생활에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개인 자금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냉큼 사들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클로에는 자신이 오랜 시간 공작저에서 사교 행사를 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저번에 산 그것도 소개할 겸 다과회를 열어 볼까?’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다과회를 준비하고 귀부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클로에가 다과회를 연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 소식 들었어요?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오랜만에 다과회를 연대요.”

“정말요? 저는 초대받지 못했는데…….”

“공작부인이 이번에는 어떤 것을 소개하실지 궁금하네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공작부인이시잖아요.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와 황자 전하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다는 공작부인이요.”

클로에는 몰랐지만, 그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녀가 몇 주 전에 개업한 밀턴케인스의 트리플 스위트 2호점과, 아서와 알폰스 사이의 결투 때문이었다.

게다가 클로에가 다과회에서 소개하는 것은 뭐든 최신 유행이 된다는 인상마저 있었다. 그녀의 다과회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관심의 대상인 공작부인이 오랜만에 개최하는, 무언가 새롭고 신기한 것이 소개될 것이 뻔한 다과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공작부인의 다과회에 저도 정말 가고 싶어요. 초대를 받지 못했는데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공작부인께 초대를 요청하는 편지를 써 보는 것이 어떨까요?”

급기야는 클로에에게 초대를 받지 않았는데 다과회에 참석해도 되는지, 혹은 초대장을 주실 수 있는지 묻는 편지까지 쏟아졌다.

덕분에 가까운 귀부인들만을 모아 소소한 다과회를 열 생각이었던 클로에는 모임의 규모를 대폭 늘려야만 했다.

클로에는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떠들썩하고 사람이 많아 복잡한 사교 모임보다는 친한 사람 몇 명만 모여서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쪽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사람들이 나의 차에 관심을 많이 가져 주고 있다는 뜻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좋지 않은 인상을 품고 있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잘된 일인가. 클로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다과회 당일이었다. 공작저의 응접실에 귀부인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오랜만이에요, 메이어 자작부인.”

“그러게요, 트와이닝 남작부인.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되다니 무척 반갑네요.”

클로에가 손님들을 맞이하러 바삐 돌아다니는 동안 손님들 역시 서로 인사를 했다.

“오늘 공작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보여 주시려는 걸까요?”

“분명 차에 대한 것이겠죠? 무척 기대되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늘 클로에가 선보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였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런데…… 저게 대체 뭘까요?”

다과회 테이블 중앙에 무언가가 있었다. 흰 천으로 덮인 그것은 상당히 커서 높이가 1~1.2m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그것이 바로 공작부인이 이번에 선보이려 하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가구……인 걸까요? 무척 크고 특이하게 생겼네요.”

“공작부인이니까 차와 관련이 있는 물건일 텐데…….”

그러나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모든 참가자가 자리에 착석했다. 하녀들이 티 푸드와 웰컴드링크를 계속해서 채우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클로에가 말했다.

“이번 다과회에 와 주셔서 무척 감사드려요. 저는 다과회의 주최자, 클로에 바텐베르크라고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는 나긋나긋하지만 자신감 있고 또렷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성스럽게 준비했으니 부디 편히 쉬고 즐기다 가신다면 기쁘겠습니다.”

클로에는 다른 귀족들에 비해 인사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의 정체와 오늘 그녀가 내올 차가 궁금해서 안달복달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클로에는 속으로 웃으면서 설명했다.

“오늘은 새로운 다구의 일종을 소개해 드리려 해요. 루스 대공국에서 직수입해 온 것인데, 요즘 같은 날씨에 딱 잘 어울린답니다.”

그녀가 눈짓하자 하녀 한 명이 다가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물건의 천을 벗겼다.

그 밑에서 드러난 것은 무척이나 낯설고 특이한 모양의 것이었다.

아주 거대한 꽃병처럼 생기기도 한 그것은 파랗고, 굉장히 알록달록했으며, 번쩍이는 금장과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뒤덮여 매우 화려했다.

제국의 일반적인 유행과는 다르지만 이국적인 매력이 있었다. 귀부인들 중 몇 명이 감탄을 했다.

“어머, 예뻐라.”

“이것은 사모바르라고 부르는 온열기이자 다구입니다. 루스 대공국에서는 모든 가정마다 하나씩 상비하고 있는 물건이에요.”

클로에가 말했다.

루스 대공국은 서방과 동방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공국이다. 지리적 규모로 따지자면 제국과 맞먹을 정도지만, 토지가 척박하고 기후가 황량해 살기가 어렵다.

특히 루스 대공국의 겨울의 혹한은 매우 유명했다. 한 번 폭설이 내리면 1m, 2m도 쌓일 정도라고 하니 그 수준을 알 만했다.

그렇게 추운 나라이고, 밖에 나가는 것이 어렵다 보니 루스 대공국은 실내 문화가 많이 발달해 있었다. 특히 생활 공예의 수준이 높아 루스 대공국의 공예품은 제국에서도 이국적인 매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귀부인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루스 대공국의 물건이라서 이렇게 아름다웠군요.”

“이건 어디에 쓰는 다구인가요?”

어떤 부인이 조급하게 묻자, 클로에가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지금부터 보여 드릴게요.”

그녀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하녀들이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사모바르는 두 단으로 되어 있었다. 거대한 꽃병 형태의 몸체와 그 몸체의 위에 얹어져 있는 주전자였다.

하녀들은 사모바르의 몸체 부분을 열고 거대한 물통에 담긴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사모바르 몸체 내부의 가운데에 있는 관처럼 생긴 통에 불을 붙였다.

곧 사모바르에서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귀부인들은 사모바르의 근처로 따끈한 훈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모바르의 내부에서는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도 들렸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사모바르는 열탕기이자 온열 기구예요. 내부에 숯과 장작, 솔방울 등을 넣어 불을 붙이는 연통이 있어서 물을 끓일 수 있어요. 그리고 물을 끓이는 본체 위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클로에가 사모바르 위에 얹어져 있던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찻주전자예요. 사모바르 자체의 열기로 찻주전자를 계속해서 덥히기 때문에 식지 않아요.”

하녀들이 귀부인들의 잔에 차를 조금씩 따라 주었다. 찻주전자에 담겨 있던 차는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진해 보였다. 수색이 까맣고 찰랑이는 모습이 밀도가 높아 보여서 차라기보다는 꼭 에스프레소 같았다.

“사모바르 위의 찻주전자 안에 담겨 있는 차는 원액처럼 아주 진해요. 이 진한 차를 사모바르 안에서 끓고 있는 물과 섞어 농도를 맞추는 거예요.”

클로에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자신의 찻잔을 들어 사모바르 앞으로 가져갔다. 사모바르의 앞부분에는 수도꼭지 같은 밸브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밸브를 밀어 열자 찻잔에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휘 저으면서 그녀가 웃었다.

“루스 공국의 차 문화는 정말 특이하죠? 사모바르는 차를 끓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춥고 건조한 겨울 날씨에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데에도 아주 유용해요. 루스 대공국의 필수품이라고 할 만하죠.”

“어머, 너무 신기해요.”

“스스로 끓는 주전자라니, 정말 신기하네요.”

“차를 끓이면서 집안도 따뜻하게 덥히다니 놀라워요.”

귀부인들이 재잘거렸다.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권했다.

“사모바르를 사용해서 차의 농도를 입맛에 맞게 조절해 보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귀부인들이 자신의 찻잔을 들고 일어났다. 안 그래도 다들 이 새로운 문물을 체험해 보고 싶어 하던 참이었다.

귀부인들이 각자 자신의 찻잔에 입맛에 맞을 정도의 물을 채웠다.

“루스 공국의 방식으로 만든 차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귀부인들 중 누군가가 먼저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던 순간이었다.

클로에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루스 공국의 방식으로 마시는 차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답니다.”

찻잔을 들어 올리던 귀부인들이 멈칫했다. 그들의 시선이 클로에에게로 쏠렸다.

“차를 오래 우리면 찻잎에서 쓴맛을 내는 성분이 함께 우려 나온다는 사실은 다들 아실 거예요. 그렇죠?”

그녀의 말에 귀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찻잎에는 좋은 맛과 향을 내는 성분뿐만 아니라 쓴맛을 내는 성분인 탄닌 역시 함유되어 있다. 이 탄닌은 찻잎을 지나치게 오래 우리거나, 찻잎을 누르고 짜는 등 과도한 자극을 주었을 때 우러나온다.

그러니 차를 적당한 시간과 적당한 방식으로 우리면 탄닌이 우러나지 않아, 진하면서도 전혀 쓰지 않은 맛있는 차를 만들 수 있다.

클로에가 포트넘 부인과 처음 친해졌을 때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제국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국에 차가 많이 알려져 있었으며, 클로에의 티 클래스를 거쳐 간 귀부인들의 수도 많은 만큼 많은 수의 귀족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때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차라는 음료는 쓰고 떫고 맛이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자신이 이곳에 갓 왔을 때를 떠올린 클로에는 새삼 뿌듯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입견과 오해를 풀고 차를 좋아하게 되고, 차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어쨌든 그녀가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루스 공국의 방식으로 우린 차는 물을 타서 농도를 조절해도 쓸 수밖에 없어요. 찻잎의 모든 성분이 우려 나온 탓에 쓴맛도 함께 우러났으니까요.”

루스 공국의 차 만드는 방식은 찻잎을 뜨거운 물에 오랜 시간 담가 놓는 만큼, 맛이 진하고 쓰고 떫었다. 이 쓴맛은 물을 넣어 농도를 조절해도 연해질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루스 공국의 사람들은 차에 단것을 곁들여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혹은 차에 단것을 넣어 먹기도 하죠. 대표적으로 잼 같은 것을요.”

“잼……이라고요?”

귀부인들은 순간 자신들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차에…… 잼이라니? 설탕도 아니고 잼이라니?

물론 과일 퓨레를 넣은 밀크티 같은 것은 트리플 스위트에서도 판매하는 상품이니만큼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밀크티도 아닌 스트레이트 티에 잼을 넣어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귀부인들의 그런 반응을 예상한 듯이 클로에가 빙긋이 웃었다.

“과일을 넣은 아이스티 같은 것은 이미 많이 드셔 보셨을 거예요. 뜨거운 홍차에 과일 잼을 넣어도 홍차 특유의 고소한 향과 과일 향이 어우러지고, 달콤한 맛이 가미되어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맛이 난답니다. 과일 아이스티와는 또 다른 매력이지요.”

만일 옛날 같았으면 클로에가 특이한 레시피를 소개했을 때 바로 시도하려고 하는 사람이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클로에는 차에 관한 한 제국에서 제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언제나 최신 유행을 만들어 내는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은 전부 클로에가 소개하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의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클로에가 소개하는 것을 접해 보겠다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유행에 민감한 귀족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먼저 최신 유행을 접해 보았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였다.

그러니 귀부인들의 반응도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은걸요.”

“특이하고 괜찮을 것 같아요.”

그들의 기대감 어린 반응에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테이블 위에는 달콤한 티 푸드들과 함께 다양한 과일 잼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블루베리 잼, 레드커런트와 라즈베리 잼 등등.

클로에는 그중 마멀레이드 잼을 한 스푼 떠서 자신의 찻잔에 섞으며 말했다.

“자, 들어 보시겠어요?”

귀부인들은 각자의 찻잔에 잼을 넣어 맛을 보았다. 그 맛은…….

“어머……!”

고소하고 달콤한 향의 홍차와 상큼한 과일의 궁합은 익히 증명된 것이다. 차가운 아이스티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뜨거운 티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한 과일의 맛이 입안에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온기와 뒤섞였다. 풍부한 과일의 향이 입 안과 비강을 채웠다.

단맛이 먼저 미각을 자극하면 뒤이어 홍차의 깔끔함이 입 안을 씻는다. 홍차 자체가 진하고 씁쓸해서 잼의 단맛이 물리지 않고 적당히 어우러졌다.

정말이지 독특하고 이국적인 맛. 단지 잼을 넣었을 뿐인데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정말 달콤하고 맛있어요!”

“달지만 쌉쌀해서 물리지 않아요. 홍차의 향과 과일의 맛, 이 조합이 너무 좋네요.”

“진해서 그런지 정말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루스 공국에 잘 어울리는 차로군요.”

그녀들의 반응이 클로에는 진심으로 기뻤다. 다른 사람들이 차를 맛있게 마셔 주는 것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클로에가 웃으면서 말했다.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차는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드세요.”

사모바르와 루스 공국의 홍차를 소개하는 다과회가 끝났다. 모든 손님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루스 공국의 홍차 음용법은 입소문으로 널리 퍼졌다. 특히 트리플 스위트에서 판매하는 잼의 판매량이 확연히 늘었다.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상단을 통해 사모바르를 주문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위가 빨리 찾아왔다. 유리창마다 하얗게 서리가 끼고 마구간에 고드름이 맺혔다.

하지만 공작가는 걱정이 없었다. 클로에가 워낙 월동 준비를 잘해 놓았던 것이다.

“이게 올해 나온 햇아쌈이에요.”

클로에의 티룸 안에도 훈기가 넘쳤다. 벽난로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찻잔에 직접 홍차를 따라 주었다. 알폰스는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 위에 내려놓고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가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좋은 아쌈입니다.”

차를 한 모금 맛본 알폰스가 말했다.

과연, 올해의 아쌈은 정말 맛이 좋았다. 맛은 진하고 고소했고, 혀에 닿는 질감은 실크처럼 매끄러웠다. 아쌈 특유의 몰트 향은 물론이고 향이 정말 풍부해서 견과류와 꽃향기가 느껴졌다.

그의 말에 클로에가 몹시 기뻐했다.

“그렇죠? 밀크티로 만들어도 정말 맛있더라고요.”

클로에는 찻잔을 비우는 알폰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의 변화가 무척 기뻤다. 한때 차를 좋아하기는커녕 입에 대어 본 적도 없었던 그가 아닌가.

그랬는데, 그녀와 함께 매일 차를 마시다 보니 그 역시 차를 좋아하게 되었다. 클로에가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그에게 차에 관한 취향과 안목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한때 ‘어떤 차를 마시겠느냐’는 질문에 ‘아무거나’라고 대답했던 그였다. 이제 그에게도 호불호가 생겼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차를 고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특별히 좋아하는 차와 그렇지 않은 차, 질이 좋은 차와 그렇지 않은 차를 구분하게 되었다.

‘이럴 때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소개하는 보람을 느껴.’

클로에가 흐뭇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차를 소개하고, 대접해 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상대가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은 상대라면 더더욱 그랬다.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클로에는 새삼 생각했다.

‘정말이지 내가 차를 좋아해서 다행이야.’

알폰스는 금방 잔을 비웠다. 클로에가 그의 잔에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흰색의 본차이나 잔 안쪽으로 붉은 수색의 찻물이 차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알폰스가 말했다.

“요즘 수입품의 가격대가 전체적으로 많이 하락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괴혈병의 발병률이 줄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클로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이 화제를 꺼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간접적으로 돌려 말했지만 그것은 그녀에 대한 찬사였다. 클로에는 괴혈병의 예방법을 발견해 은독수리 훈장을 받았다.

요즘 대부분의 장기 항해를 하는 선박들은 필수적으로 로즈힙을 싣고 다니고는 했다. 로즈힙은 부피가 작고 가벼워 보관과 운반이 용이할뿐더러, 섭취도 쉬웠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니까.

이 쉬운 괴혈병 예방법 덕에 괴혈병 사망자가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는 통계마저 있었다.

제국에서 클로에는 많은 수의 선원과 해군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었다.

“전량 수입품인 찻잎의 원가가 많이 내렸어요.”

클로에가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알폰스는 그녀의 붉어진 뺨을 보며 픽 웃었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 거지.’

괴혈병의 예방법을 발견한 것은 어마어마한 업적이다. 많은 생명을 구했을뿐더러, 로즈힙의 거래로 공작가가 큰 이익을 보고 있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의 아내는 여성 최초의 은독수리 훈장 수여라는 영광마저 얻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내가 이런 사람이라며 목에 힘을 주고 턱을 추켜세우고 다녀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언제나 무척 겸손한 그녀의 태도가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알폰스이니만큼 더더욱.

“찻잎의 원가가 하락한 만큼 가게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가격 역시 낮추시지 않았습니까.”

알폰스가 진심 어린 감탄을 담아 말했다. 클로에가 수줍게 대답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즐길 수 있었으면 해서요.”

주요 차 생산국 중 하나인 온과의 외교 관계 상승과 괴혈병의 감소로 인해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무역이 활발해지니 내수가 없고 전량 수입품인 찻잎의 값 역시 많이 하락했다.

더 욕심을 부려 봐도 될 텐데 클로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막대한 이익을 고사하고 찻잎의 원가만큼 상품의 가격 역시 낮추었다.

현재 그녀의 가게에는 다양한 종류의 찻잎이 판매되고 있었다. 무척 값비싼 고급품부터,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비교적 저렴한 상품까지.

그 결과 현재 수도에서는 중산층까지 차 문화가 일상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녀의 차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다.’

늘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알폰스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욕심 없는 경영 방침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계속 호조를 올리고 있고,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는 것은 전부 그녀의 뛰어난 사업 수완 덕분이었다.

알폰스는 언제나 클로에에게 경탄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그녀를 무척 사랑스럽고 귀엽게 여겼지만, 그와 동시에 존경했다. 단지 사랑스러운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그러니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수입품인 차가 이렇게까지 보편화될 수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클로에는 수줍게 웃었다.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그녀의 전생과 달랐다. 운송 수단이 한정되어 있고, 속도 역시 훨씬 느렸다. 그녀의 전생에 비해 무역품이 훨씬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 서민이나 빈곤층은 차를 마시지 못하는걸요. 알폰스, 저는 꿈이 있어요. 평민들까지도 차를 일상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이 말을 들은 알폰스의 머릿속에 문득 든 생각은 ‘불가능하다’였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수입품의 가격은 아무리 하락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차는 내수가 불가능했다. 차나무의 재배 환경이 제국의 기후와 토양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차를 서민까지 일상적으로 마시게 만들다니?

하지만…….

‘사실 이전에는 중산층이 차를 마실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지.’

알폰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온갖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제국에서 차에 관한 한 그녀만 한 인물은 없다고 그는 자신했다.

그는 금방 생각을 바꿨다.

‘그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알폰스는 클로에를 믿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할뿐더러, 그녀의 뛰어난 능력 역시 신뢰했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가능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클로에가 기쁜 듯이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응원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그녀는 알폰스를 한 번 꼬옥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차를 권했다.

“차가 식겠어요. 어서 드세요.”

알폰스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는 찻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차는 조금 식었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 * *

“두 번 다시 허튼짓했다가는 용서하지 않겠다. 행실을 바르게 하고 다녀라. 알았느냐?”

아서가 연금에서 풀려났다. 그는 거의 몇 주 동안 황자 궁에 갇혀 있었다.

원래 두문불출하고 있었긴 했지만 스스로 외출을 줄이는 것과 강제로 연금당한 것은 차원이 달랐다.

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 궁에만 갇혀 있던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중 제일 많이 한 생각은 물론 클로에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녀를 손에 넣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감, 억울함, 공작에 대한 분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심 등으로 얼룩진 몇 주였다.

눈을 떠도 감아도 클로에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녀를 원하는 충동을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생겼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는 정말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래, 클로에가 뭐라고. 사실 걔도 별거 아니야. 좀 예쁘고 차를 잘 우릴 뿐이지. 그깟 여자애 하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속앓이를 해야 해?’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만 해도 걔만큼 바보 같은 애도 또 없었잖아. 분명 요즘도 그런 바보 같은 점이 있을 거야.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야, 그저 올바른 판단을 내린 것뿐이지.’

그야말로 저 포도는 실 거라고 우기는 여우 같았다.

아서는 되도록 클로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예 그쪽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기로 작정했다.

‘내가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에라이, 둘이서 잘 먹고 잘 살든가 마음대로 해라.’

그는 바쁘게 지내려고 애썼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방법으로 클로에를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정확히 그즈음이었다. 그 사건이 터진 것은.

제국 서민들 사이에서의 진 중독 사태는 점점 심화되었다. 진 가게의 숫자는 늘어났고 거리마다 취객들이 싸움을 벌이거나 쓰러져 잠을 잤다. 날이 추워지면서 노상에서 잠들었다가 동사하는 사람도 늘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시비가 붙은 취객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이 자식, 당장 사과하지 못해!”

“네가 죽는지 내가 죽는지 한번 해보자!”

평소 같았으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었을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취객이 개입하거나 말려들어서 싸움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그때 마침 키넌 자작의 마차가 지나갔다.

“이게 웬 소란이냐?”

키넌 자작이 물었다. 그의 마부가 대답했다.

“진에 취한 취객들이 모여서 패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고얀 것들. 천한 것들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앞길을 막느냐? 당장 비키라고 전해라.”

“하, 하지만 나리……. 거나하게 취한 자들이 말을 들을까요? 괜히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뭐라고? 너까지 내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냐? 상놈들이 말을 안 들으면 듣게 만들어야지!”

마부가 채 말리기도 전에 키넌 자작이 마차에서 내렸다. 키넌 자작이 싸우고 있는 취객들에게 소리쳤다.

“네놈들, 내가 누구인 줄은 아느냐? 네놈들이 뭔데 이 키넌 자작의 앞길을 막느냐? 썩 꺼지지 못할까! 얼굴 뻘건 원숭이 같은 놈들이 어디서 행패질이냐, 행패질은! 저녁부터 술에 취해 행패나 피우고 있으니 거지꼴을 못 면하지.”

취객들이 자작을 향해 흉흉한 눈을 돌렸다.

평소 같았으면 자작 나리를 보자마자 냉큼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릴 사람들이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술에 잔뜩 취한 데다가, 싸우느라 잔뜩 흥분한 상태였던 것이다.

“귀족 나리? 귀족 나리께서 납셨어?”

“저 비단옷 좀 봐.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는데 자기들은 비단옷을 입고 사치를 즐겨?”

“우리가 술을 마시고 싶어서 마신 줄 알아? 다른 음료는 다 비싼데 진이 제일 싸서 진만 마시는 기분을 알아?”

“어제도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었어! 따뜻한 아침 식사가 그립다고!”

“뭐, 뭣들 하는 거냐? 다가오지 마라! 건방진 놈들. 누구 안전이라고! 여봐라, 뭣들 하는 거냐! 이 천것들을 당장……!”

취객들이 다가오자 키넌 자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취객들의 손에 잡혀 두들겨 맞고 말았다.

자작은 흠씬 맞았으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충실한 호위 기사들에게 구출되었다.

호위 기사들 덕에 키넌 자작은 죽지 않고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는 등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여파는 굉장했다. 황궁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제국민들의 진 중독 문제가 심화되어 가고 있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귀족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건 명백한 반란죄입니다! 그 죄인들을 반역으로 처벌해서 가족과 친척까지 전부 처형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이 사건은 시민들의 불만과 고통을 뜻하는 증거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폐하.”

황제는 골머리를 싸맸다. 그가 물었다.

“황자, 너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번 일은 지난 80년간 유례없는 폭력 사태일뿐더러 귀족에 대한 하극상입니다. 당연히 죄인들을 엄벌에 처해야죠.”

그의 대답을 들은 황제는 잠시 고민하더니 눈을 돌렸다.

“그렇군. 바텐베르크 공작, 그대는 어떻소?”

‘아바마마는 친아들인 나보다 공작을 더 신뢰하시는 것 같단 말이야.’

아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알폰스가 대답했다.

“이번 일은 단순한 폭력 사태나 하극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진 중독 사태와 수도 시민들의 빈곤 문제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가 막힘없이 설명했다.

“또한,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키넌 자작은 평소 영지민에게 지나친 과세와 수탈을 일삼고, 수도의 일반 시민들에게도 욕설과 매질을 해 시민들의 불만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호오.”

“벌써 거기까지 조사를 하다니, 과연 바텐베르크 공작…….”

황제의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역시 자신의 턱수염을 쓸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공작의 판단은 현명하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옛날에 비해 요즘은 많이 온정적이게 된 것 같구려.”

황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알폰스가 소시민에게 이렇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죄 없는 자를 처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자비로운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로 잰 듯 날카로워 예외를 두지 않았으며,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남김없이 엄벌에 처했다.

알폰스 역시 자신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생각해요. 국민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귀한 사람, 천한 사람이 따로 없었어요.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공작부인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자비롭다. 그런 무른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는 그녀의 무르고 여린 마음마저 사랑했다.

‘그녀라면 분명 이런 것을 원했겠지.’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알폰스가 속으로 픽 웃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가 소탈하게 웃었다.

“하하, 그대 역시 혼인을 한 뒤 많이 부드러워졌나 보오.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면 그럴 만도 하지……. 암.”

“…….”

“그럼 이렇게 결정을 내리지. 죄인들은 귀족에 대한 폭력으로 처벌하되 반란죄는 묻지 않을 것. 그리고 키넌 자작의 행실과 품행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할 것.”

“자비로운 판단이십니다, 폐하.”

아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또 자신의 의견은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저 짜증 나는 공작의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황제의 말이 떨어졌다.

“진 중독 현상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이번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보오. 그러니 진 중독에 대한 구제책을 세우는 것을 더 이상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황제가 알폰스를 보며 물었다.

“그리고 역시 이 일의 적임자는 공작이라고 생각하는데, 공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알폰스가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역시 공작은 믿음직하구려. 그럼 이견은…….”

“이견 있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갑작스레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견이 있는 사람은 바로 황자였던 것이다.

“저는 이 일의 적임자가 저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맡겨 주시죠, 아바마마. 제가 제국의 제1 황자로서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황자 전하께서 웬일로…….”

자리에 모인 가신들이 수군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평소 아서는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황제가 헛기침을 하자 수군거림이 멈추었다. 황제가 아서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네가 해낼 자신이 있느냐? 아서.”

아서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환해졌다. 그가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황제가 말했다.

“그럼 이번 일은 바텐베르크 공작과 아서 황자, 두 사람에게 맡기는 걸로 하지.”

“네?”

“예?”

이것은 알폰스와 아서, 어느 누구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가 껄끄러웠다. 특히나 지난 결투 이후로는 더더욱.

“하, 하지만 아바마마……!”

“그럼 국정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소.”

아서가 무어라 항변하려던 그때였다. 황제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회의의 끝을 선언했다.

가신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황제 역시 회의실을 나갔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알폰스와 아서였다. 아서는 알폰스를 적개심이 담긴 눈으로 노려보았다.

알폰스 역시 그를 보았다. 아서는 그의 눈에도 같은 감정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그저 약간의 귀찮음과 가소로움이 묻어 있을 뿐이었다.

“…….”

알폰스는 그에게 목례를 하고 회의실을 떠났다.

회의실에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인 아서가 중얼거렸다.

“이번만큼은 내가 반드시 이겨 주겠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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