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하지만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서 자신이 경비병들에게 끌려갈 때조차 오로지 알폰스만을 걱정하던 클로에였다.
그녀는 쓰러진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다쳤을까 봐 걱정한 사람은 오로지 알폰스뿐이었다.
‘말도 안 돼…….’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그 공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렇게나 절실하게 kjmdml체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은 이렇게까지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알폰스.”
클로에는 어찌나 놀랐는지 알폰스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평소 그녀가 다른 귀부인들과 대화를 나누러 갈 때마다 아쉬움을 느꼈던 알폰스는 이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픽 웃으며 클로에의 허리를 더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단 한 번도 남이 해 주는 걱정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거슬리고, 거추장스럽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느꼈다.
클로에, 그녀가 해 주는 걱정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걱정하고,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걱정을 받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심지어는, 아주 한순간이었지만 다친 척을 해 볼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안 그래도 마음 여린 아내를 더 놀라게 만들 수는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귀여운 아내를 가만히 두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몸을 숙여서 클로에의 귀에 속삭였다.
“정 걱정이 되신다면 제대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제대로……라고요?”
“예. 휴게실에서.”
클로에는 그의 소매를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대로 보고 싶어요.”
알폰스는 그런 그녀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며 대답했다.
“바라시는 대로.”
알폰스는 클로에를 이끌고 빈 휴게실 중 한 곳에 들어갔다. 과연 제국의 황궁답게도, 연회장에 딸린 휴게실일 뿐인데도 그 규모가 어지간한 귀족저의 안방과 맞먹었다.
클로에를 먼저 휴게실에 들여보낸 알폰스는 문을 잠갔다.
“알폰스, 어서요.”
클로에가 먼저 소파에 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재촉하는 태도가 늘 차분하고 느긋한 그녀답지 않았다. 하지만 알폰스의 눈에는 그런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는 클로에가 말한 대로 그녀의 곁에 앉았다.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클로에는 애가 닳았다.
“알폰스, 그럼, 상의 먼저…….”
클로에가 말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 보니, 지금 우리 단둘이 있는데 옷을 벗으라니…….’
이상한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로 다친 데가 없는지를 보려고 하는 것뿐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민망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한 의도로 들리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알폰스를 힐끔 보았다.
한데 그는 옷을 벗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까지 띠면서.
클로에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그녀가 왜 벗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알폰스가 말했다.
“안 벗기시는 겁니까?”
“네…… 네에?”
알폰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안 벗겨 주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클로에는 목욕 시중이나 환복 시중을 들어 주는 하녀들이라도 있지만 알폰스는 그런 것도 없었다.
알폰스는 누가 자신의 곁에 밀착해 시중을 드는 것을 무척 귀찮아했다. 그래서 그는 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지위에도 언제나 스스로 옷을 입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옷을 벗겨 달란다.
클로에는 너무 당황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알폰스의 옷을 벗기라고요?”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클로에는 괜히 뛰는 자신의 가슴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알폰스는 너무나 태연하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어디가 다쳤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근육이 다쳤다면 혼자 옷을 벗으면 상처에 무리가 갈 겁니다.”
물론 자신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음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괜히 그런 소리를 했다.
새빨갛던 클로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건 안 돼…….’
알폰스가 다쳤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만일 다쳤는데 스스로 옷을 벗으면 상처가 덧나거나 무리가 갈 것이다.
클로에는 침을 꼴딱 삼켰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외면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상의 먼저 벗겨 드릴게요.”
알폰스의 눈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가 격려의 뜻에서 그녀의 부드럽고 긴 갈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클로에는 구두를 벗고 소파에 올라가 알폰스의 옷을 벗겨 주었다.
먼저 예복 재킷을 벗겨서 테이블 위에 치워 두었다. 그다음은 베스트였다. 남성용 예복 베스트의 매듭 푸는 법을 몰라서 조금 애를 먹었지만 알폰스가 도와주어 어찌어찌 해낼 수 있었다.
그다음은 그의 목을 탄탄히 조이고 있는 타이였다. 클로에는 조심스러운 손으로 그의 타이를 끌렀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옷을 하나하나 벗길 때마다 팔을 들거나 해서 도움을 주었다.
그다음은 와이셔츠였다.
이것만 벗기면 그의 반나체가 드러날 것이다. 클로에는 침을 삼키며 그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가슴이 너무 떨려.’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정말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알폰스인데.
그의 나신을 본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그의 옷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언제나 클로에의 옷을 벗겨 주기만 했지, 그녀의 손에 자신의 옷을 맡긴 적은 없었다.
클로에는 알폰스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단추가 풀려나고, 그의 하얗고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날수록 그녀의 눈은 점점 가늘어졌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셔츠를 완전히 벗길 때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기까지 했다.
“……음, 상의는 다 벗겨 드렸어요.”
그녀가 알폰스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에게 다친 곳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기 위해 벗긴 것이다. 그의 몸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했다.
클로에는 굳게 마음을 먹고 알폰스를 보았다.
‘……!’
이미 몇 번이나 본 몸이지만 클로에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놀랐다.
그의 몸은 정말로 완벽했다. 넓은 어깨와 날렵해 보이는 허리를 포함한 모든 곳에 적당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근육이 탄탄하지만 전혀 과하지 않아 세련되고 근사해 보였다. 군살 없는 새하얀 몸에는 그 어느 곳도 더할 곳, 뺄 곳이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일류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깎아 놓은 조각 같았다.
‘부끄러워서 못 보겠어.’
클로에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녀의 반응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던 알폰스는, 그녀가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일인가.’
그의 벗은 몸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면서. 아직도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순진해 보였다.
당장 그녀를 눕혀서 더더욱 부끄러운 일들을 해 주고 싶은 욕망을 참는 것이 정말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원래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픽 웃었다.
“얼굴이 많이 붉으십니다, 부인.”
“제, 제가요?!”
“예.”
알폰스가 길고 큰 손을 그녀의 뺨에 대었다. 클로에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설마……. 상태를 살펴보는 일 외의 다른 마음을 품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진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쪽은 이쪽이라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 버렸을 테니까.
한편 클로에는 너무나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 다른 마음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네요.”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렸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예, 압니다. 순진한 부인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요.”
그 말을 듣자 클로에는 가슴속 양심이라는 부위가 강렬하게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알폰스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벗은 팔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클로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폰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붉은 눈동자와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의 매혹적인 눈과 마주치는 그 순간, 클로에는 온몸이 감전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가 속삭였다.
“더 자세히 봐주십시오. 다친 곳이 있나,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클로에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의 손가락에 턱이 붙잡혀,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굴은 물론 귀와 목까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알았어요.”
계속 그의 품에 안겨서 이렇게 눈을 마주 보고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가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알폰스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여러 번 보아 왔지만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자세히 볼수록 단단하고 아름다운 몸이라 감탄만이 나왔다.
‘이런 와중에 몸 감상이나 하고 있다니, 내가 미쳤지.’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어찌 됐든, 아무리 꼼꼼히 살펴보아도 다친 곳은 없었다. 그의 살결은 작은 상처 하나 없이 하얗고 매끈하기만 했다.
그제야 완전히 안심이 되어서 클로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곳이 없네요. 다행이에요.”
그녀가 기쁜 듯이 말했다. 안도하며 웃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알폰스가 마주 웃어 주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걱정했어요…….”
그 순간 클로에는 알폰스의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건 명백한 장난기였다.
“나머지는 안 보시는 겁니까?”
“네? 나머지라뇨?”
“하반신 말입니다.”
상체는 옷을 벗겨서 전부 보았는데 하체는 안 보냐는 얘기다.
순간 클로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빽 소리치듯 말했다.
“정말, 당신도 농담은!”
결국 알폰스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그는 낮은 소리로 웃으면서 클로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몸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기대게 된 클로에가 꼼지락거렸다.
“알폰스, 설마…….”
그의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점점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손길과 욕망에 젖은 눈빛을 앞에 두고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클로에는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알폰스, 여기서는 안 돼요. 이곳은 황궁이고, 지금은 황제 폐하의 탄신 축하 연회가 열리고 있잖아요.”
흔히 연회나 무도회장의 휴게실이 연인 간의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장소로 사용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곳은 황궁이며, 지금은 국가적 행사인 황제의 탄신 축하 연회가 열리고 있다. 보통의 무도회장과 황궁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폰스 역시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의 단호한 거절에 그는 확연히 놀란 것 같았다. 그야 당연했다. 그는 자신의 성적 접촉을 거부당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으니까.
지금 그는 그녀를 갈망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녀의 전부를 손에 넣고, 그녀의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욕망을 그녀에게 강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만 그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역시 자신을 원해야만 했다.
언제나 애를 타게 만드는 쪽도, 갈증을 느끼게 하는 쪽도 그녀였다. 언제나 다른 여자들의 애를 타게 만드는 쪽이었던 알폰스로서는 낯선 감각이었다.
아무리 손에 넣어 보려고 움켜쥐어도 잡힐 듯, 잡힐 듯 끝끝내 완전히는 잡히지 않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그런 점마저 좋았다.
“알겠습니다. 부인께서 그러시다면.”
알폰스는 클로에의 이마와 손등에 한 번씩 입을 맞추었다. 클로에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알폰스.”
그녀는 무척 기쁜 듯이 알폰스를 꼬옥 안아 주었다. 알폰스는 다시 옷을 입고, 클로에와 함께 휴게실에서 나왔다.
* * *
한편, 이날 있었던 알폰스와 아서의 결투는 사교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다른 때도 아닌 황제의 탄신 연회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황자와 공작이 결투를 했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관심은 이 사건의 이유에 쏠렸다. 황자가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모두의 관심과 호기심에 힘입어, 소문은 입과 입을 타고 돌며 점점 살이 붙었다. 아서가 술에 만취해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든가, 알폰스가 아서에게 매우 큰 잘못을 했다든가, 이런저런 소문이 생겨났지만 그중 제일 설득력을 얻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아서와 알폰스, 두 사람이 클로에를 사이에 두고 싸웠다는 소문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생겨난 건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서 황자가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공작부인의 남편인 알폰스 바텐베르크 공작 역시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다. 이런 황자와 공작 사이에 싸움이 났으면 그 원인이 치정일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아서와 알폰스가 클로에를 두고 결투를 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초반에는 클로에가 아서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반짝 고개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클로에가 아서에게 다소 지나칠 정도로 거리를 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던 데다가, 또 알폰스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클로에를 나쁘게 말하는 소문은 금방 잠잠해졌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아예 클로에에게 직접 물어보는 자들도 있었다.
“공작부인, 이번에 황자 전하와 공작 각하께서 결투를 하신 이유가 두 분 모두 공작부인을 연모하셨기 때문이라는데 사실인가요?”
“공작부인께서는 어떤 기분이세요?”
“이번 일은 황자 전하께서 좀 심하셨던 것 같아요. 애초에 공작부인께서는 한 번도 그분께 여지를 드리지 않으셨잖아요.”
클로에는 본디 이런 소문이나 가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경우 아서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것이고, 클로에와 알폰스는 휘말렸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클로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오직 한 가지 태도로 일관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이 부분은 제가 말씀을 드려도 좋은 부분이 아닌 것 같군요.”
온갖 호기심과 선의, 악의가 얽혀 있는 질문 공세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클로에는 아서와 알폰스, 둘 중 누구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어느 쪽의 편을 들고 나서든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직 입을 꾹 다물고,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신중함으로 품위를 지킬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황자 전하 때문에 곤욕을 치르셨을 텐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시다니!”
“공작부인은 정말 신의 있는 분이시군요.”
“공작부인이라면 신뢰가 가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신의를 지켜 주실 것 같아요.”
클로에의 일관적인 태도는 많은 사람들의 인상에 깊게 남았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이미지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어찌 됐든, 의도치 않게 다시 한 번 화제의 주인공이 된 덕에 트리플 스위트의 판매량은 한 번 더 급증했다. 수도의 본점은 물론, 밀턴케인스의 2호점의 운영 역시 순조롭게 호조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쯤이었다. 클로에가 성녀에게 보낸 편지에 답신이 온 것이.
클로에는 몹시 긴장하여 성녀가 보낸 답장을 뜯어보았다. 그녀는 성녀에게 개인적인 접견을 요청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 답변은 수락이었다. 성녀를 개인적으로 만나 보는 것은 일국의 군주나 되어야 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제국의 공작부인이라는 지위가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클로에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녀가 이 뿌리 깊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알폰스의 앞에서 당당해질 유일한 방법은 성녀를 만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성녀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한참을 마음 졸이다가 겨우 수락을 받아 냈을 때의 기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알폰스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다시 그를 떠나서, 이번에는 외국까지 가야 한다니…….’
이미 그와 떨어져 있던 경험이 있는 클로에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혼자서 성국을 가겠다고 하면 과연 알폰스가 허락해 줄지도 걱정이었고, 설령 허락을 해 준다고 해도 그가 슬퍼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물론, 자신 역시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열흘 떨어져 있을 때에도 그렇게나 그리웠는데, 이번엔 외국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관광 같은 것을 핑계로 성국까지는 그와 함께 갔다가 살짝 떨어져서 성녀를 만나고 오는 것은 어떨까?’
이런 고민 역시 해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걱정이 많은 그의 성격상 성녀를 만나고 올 정도로 시간을 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의심을 사기가 너무나 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한 번 속이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속이게 되는 것이라 더 꺼려지기도 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클로에는 혼자서 성국에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석찬 시간, 언제나처럼 알폰스와 단둘이 식사를 하며 클로에가 말을 꺼냈다.
“알폰스, 저…….”
알폰스의 붉은 눈동자가 클로에를 응시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빛을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 저 눈을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반복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무래도 성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사업 문제 때문에요.”
클로에는 알폰스가 보일 반응에 대해서 수도 없이 상상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껴 주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입장을 그녀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는 안타까워할지언정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그런 다정함을 클로에는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달라. 그가 화를 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밀턴케인스에 혼자 다녀온 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젠 또 혼자서 성국이라니. 걱정이 많은 그가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제국이다. 전생과 달리 여성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아내란 남편의 소유물이자 권속이다.
알폰스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만, 제국에서 나고 자란 남자이니만큼 아내가 자신의 손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가 담담히 그의 반응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알겠습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알폰스의 얼굴은 뜻밖에도 담담했다. 그는 동요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기분 탓이겠지만, 어쩐지……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 미리 알기라도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왜 가는지에 대해 묻지도 않다니. 놀란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저, 정말요? 그것뿐이에요?”
알폰스가 손에 쥐고 있던 식기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적당히 식사를 끝낸 그가 시가를 꺼내 들며 클로에를 보았다.
“물론입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부인.”
그가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클로에는 너무나 감동했다. 이렇게나 아내의 사정을 잘 이해해 주다니, 이 이상 훌륭한 남편이 또 있을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알폰스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무척 단단하고 어깨가 넓어서 클로에의 팔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요, 알폰스! 이해해 주어 고마워요.”
클로에는 그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이지 최고의 남편이에요. 당신과 결혼해서, 당신의 아내가 되어 기뻐요. 당신을 만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일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알폰스는 가슴속이 묘한 감정으로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그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그녀를 만나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어서 말도 못 하게 기뻤다. 그녀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그녀를 만나게 된 이 기적을 표현하기에는 행운이라는 말로는 모자라다.
‘당신은 내게 과분한 존재야.’
알폰스는 클로에의 몸을 단단한 팔로 감싸 안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 사실에 대해 내심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를 속이는 것은 기꺼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녀를 위해서’ 같은 말로 변명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녀가 혼자 떠나도록 놔둘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추함이고 약함이다.
‘나를 용서해 줘.’
이런 자신과 달리 품 안에 안긴 이 여자는, 얼마나 순수하고 선량하고 한없이 깨끗하기만 한지.
알폰스는 클로에의 가녀린 몸을 오래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에게 갖고 있는 미안함과 죄책감, 사랑을 담아서.
* * *
클로에는 며칠 뒤 성국으로 떠났다.
성국은 외국이긴 하지만 밀턴케인스에 비해 매우 먼 거리는 아니었다. 편도로 5일 정도 걸렸던 밀턴케인스와 달리, 성국에 가는 데에는 편도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알폰스는 지난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수의 기사를 클로에에게 붙여 주었다.
기사의 숫자가 늘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일전에 밀턴케인스로 떠났을 때와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알폰스가 그녀를 배웅해 주었다. 그들은 오래오래 포옹했고, 입맞춤을 나누었다. 클로에가 탄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알폰스는 계속 지켜보았다.
마차가 공작저를 벗어났다. 공작저가 작아지고, 마침내 사라지자 클로에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담아 고개를 돌렸다.
‘꼭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거야.’
클로에는 생각했다.
‘이전의 클로에와 대화를 나누고, 모든 고민과 죄책감을 해결할 거야. 그의 앞에서 당당한 아내가 될 수 있도록. 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 줄 수 있도록…….’
한편 클로에가 탄 마차가 사라지자 알폰스는 분주해졌다.
“준비해 둔 말을 데려와. 저번에 지시해 둔 대로 미행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진행한다. 발트, 카인! 떠날 준비를 해라.”
“존명!”
그를 따르기로 한 기사 몇 명이 바삐 말을 데리러 갔다.
알폰스는 곧장 나갈 채비를 마쳤다. 준비를 워낙 철저하게 해 뒀기에 특별히 필요한 것은 없었다.
그가 성국에 가 있을 동안 그의 일을 임시로 맡아서 할 키엘에게의 인수인계도 진작 끝내 놓은 상태였다.
알폰스와 그와 동행하는 기사 몇 명은 말에 올라탔다. 미행을 하기에 마차는 적합하지 않았다. 너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다녀오십시오, 각하.”
클로에에게의 비밀 엄수를 위해 사용인 중에서도 알폰스가 그녀를 따라나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키엘이 예의 있게 인사하며 주인을 배웅했다.
알폰스는 믿음직한 집사를 흘끗 내려다보곤 말했다.
“이곳에서의 일은 부탁하지, 키엘.”
“맡겨만 주세요, 각하.”
키엘이 걱정 붙잡아 매라는 듯 밝게 웃었다.
알폰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기사들과 함께 말을 몰았다. 클로에가 탄 마차가 수도를 벗어나기 전에 따라잡아야 했다.
알폰스와 그의 기사들은 클로에가 탄 마차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여행길을 미행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알폰스는 끊임없이 클로에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아내가 너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사람이 아닌가.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쥐면 꺼질 것 같은 그녀가 이런 험한 장기 마차 여행이라니.
‘그새 야윈 것 같은데.’
클로에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알폰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자신의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를 지켜볼 때의 안타까움과 근심이 서린 얼굴은 어디 가고, 본래의 냉철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전심전력으로 호위하라고 전해라. 돈은 얼마나 들어도 상관없으니 제일 좋은 시설에서 그녀를 모셔라. 만일 그녀의 체중이 조금이라도 줄었다간 아무도 용서하지 않겠다.”
그를 따르는 소수의 기사들과 클로에를 호위하는 기사들 사이에서는 기밀 연락이 오가고 있었다.
한편 기사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주군의 여행길이 훨씬 험난한 것 같은데…….’
그들이 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클로에의 여행길보다는 알폰스의 여행길이 훨씬 험난했다.
클로에는 공작가에서 가장 크고 편한 마차를 타고 가고 있지만 알폰스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말 한 필에 몸을 의지한 채 몇 날 며칠을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숙소 역시 그랬다. 클로에는 여행길에서 제일 좋은 숙소에서 묵었지만 알폰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와 같은 숙소를 쓸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클로에보다 덜 좋은 숙소에서 묵었고, 숙소가 한 군데밖에 없을 경우 야영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상황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나 깨나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만 노심초사하니 보는 기사들로선 어이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아무도 차마 마음속의 진심을 주군에게 말할 수 없었다. 주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 기사들은 그냥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알폰스의 걱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그녀의 기분이나 상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심지어 그녀가 갈 앞길에 파발을 보내서 이런저런 일을 미리 해결해 두기까지 했다.
그 결과, 클로에는 가는 길마다 혼잡하거나 막히지 않고 뻥뻥 뚫려 있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숙소에도 빈방이 하나쯤은 꼭 있는 매우 편한 여행을 했다.
“사람이 정말 많길래 빈방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네. 여기서 편하게 묵을 수 있겠어.”
이 행운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마냥 기뻐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성국으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고, 시설도 잘되어 있었다.
그러나 밀턴케인스에 가는 길만큼은 아니었다. 성국으로 가는 길에는 대체적으로 적당한 간격마다 식당이 있었지만, 가끔은 그런 시설을 오랜 시간 볼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었다. 비상식량처럼 챙겨 온 오랜 시간 보관할 수 있는 건조식품이나 기사들이 사냥해 온 사냥감으로 끼니를 때우는 수밖에.
클로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애당초 이런 일을 각오하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게다가 밥을 굶는 일이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가끔 한 끼 정도 굶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보다는, 괜히 자신을 따라 나와 고생을 하는 하녀들과 기사들이 더 걱정되었다.
“엘리, 니나. 배고프지 않니? 육포라도 좀 더 먹으렴.”
“아니에요, 마님! 전 배고프지 않아요. 마님께서도 식사를 제대로 안 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더 먹을 수 있겠어요?”
“엘리의 말이 맞아요. 게다가 마님께서는 건강이 좋지도 않으신데…….”
어린 하녀들의 걱정이 귀여워 클로에는 웃어 버렸다.
“나는 정말 괜찮아. 난 어른이고, 너희들은 아직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이잖니. 아이들이 식사를 꼬박꼬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야.”
클로에가 니나와 엘리에게 육포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준비성이 투철한 그녀는 건조식품을 꽤 많이 가져왔기 때문에 양이 넉넉했다.
“마, 마님…….”
클로에의 다정한 말에 하녀들이 감동을 하던 그때였다.
“사냥감을 잡아 왔습니다, 마님!”
마차 밖에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벽 너머로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목소리가 잔뜩 들뜨고 신이 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가 문을 열어 드릴게요, 마님!”
니나가 얼른 마차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린 클로에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어머나!”
클로에와 하녀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냥감의 양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노루, 토끼, 새…… 게다가 멧돼지까지? 이게 다 뭐예요?”
물론 그녀와 함께하는 전체 인원이 꽤 대인원이라 식사량이 많긴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 사냥감은 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기사들이 몹시 뿌듯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귀하신 마님께서 식사를 부실하게 하시면 되겠습니까. 든든하게 드시라고 열심히 잡아 왔습니다.”
“맞습니다. 마님께서 식사를 거르셨다는 말을 주군께서 들으시면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마지막 말은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었으나 클로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알폰스가 굳이 닦달하지 않더라도, 기사들은 클로에를 좋아했다.
클로에는 잘 몰랐지만 그녀는 기사들 사이의 인기인이었다. 그녀는 예쁘고 선량하며, 모두에게 친절한 데다가 차라는 신문물을 기사단에 전파한 공헌이 있었다.
기사들은 그런 그녀를 굶기는 것이 자신들이 굶는 것보다 싫었다. 그래서 더 이 사냥에 열심히 임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그들의 노력이 무척 고맙고 기뻤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저를 호위하는 것도 힘드실 텐데 이렇게 사냥까지……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아유, 아닙니다. 기사가 숙녀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맞습니다, 마님께서 고마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기사들은 클로에의 감사 인사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내심 매우 흐뭇해했다.
‘이렇게나 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하신 마님이 세상에 또 있을까? 게다가 예쁘시기까지. 아, 주군이 부럽다, 부러워.’
이게 기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곧 요리를 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잘 부탁드릴게요.”
기사들은 사냥감을 손질하고 요리하는 것을 도울 일꾼을 이끌고 모닥불을 피우러 갔다.
곧 식사가 준비되었다. 클로에와 그녀를 수행하러 따라온 모든 사람들이 고기 요리를 든든하게 먹었다.
물론 재료와 방식이 제한되어 있어 식당이나 저택에서 먹는 것보다는 조악한 요리였다. 야생동물 특유의 고기 누린내도 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나, 나누어 먹는다는 즐거움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클로에에게는 무척 맛있게 느껴졌다.
“술 마실까, 술? 내가 챙겨 온 브랜디가 있는데.”
“제이콥, 이런 미친놈. 마님을 수행하러 가는 길에 술을 챙겨 왔단 말이야?”
“뭐 어때, 한 잔 정도는. 톰슨 너도 괜히 튕기지 말고 한잔해라. 아, 우리 마님께서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제이콥이 브랜디 병을 치켜들며 클로에를 향해 윙크를 했다. 알폰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상상도 못 할 짓이었다.
클로에는 이 상황이 너무 웃기고 즐겁게 느껴져서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딱 한 잔만…….”
“우와아아아아아.”
“마님, 멋지셔!”
“호탕하시다!”
제이콥이 챙겨 온 술은 많지 않아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나눠 마시니 딱 맛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흥겹고 즐거웠다.
한편, 반쯤 캠프파이어 분위기인 클로에가 있는 쪽과 대조적인, 알폰스가 있는 쪽은…….
클로에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들판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알폰스와 그를 수행하는 소수의 기사들은 그곳에 있었다.
“마님께서 식사를 마치셨습니다, 주군.”
기사 한 명이 망원경으로 클로에 쪽의 상황을 살핀 뒤 알폰스에게 보고했다. 알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뭘 먹었지?”
“음…… 아마 물총새와 노루, 그리고 멧돼지 같습니다.”
순간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알폰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풀어졌다. 그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갔다.
클로에는 꿈에도 몰랐지만 멧돼지는 그가 잡은 것이었다. 안 그래도 마르고 허약한 아내가 굶는다니, 그런 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멧돼지에서 그치지 않고, 곰을 잡아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이 곰을 잡아가면 마님이 이상한 것을 눈치챌 거라면서 말리기에 그러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알폰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표정을 정리하고 원래의 딱딱하고 차가운 얼굴로 돌아갔다. 그가 물었다.
“지금은 뭘 하고 있지?”
“술을 드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이콥이 술을 가져온 모양인데요…….”
“뭐라고? 술?”
알폰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와 함께 자리에 모여 있던 기사들이 눈에 띄게 몸을 흠칫 떨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기사가 조심스레 사실을 고했다.
“예. 제이콥이 자기가 가져온 술을 모두에게 나눠 주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호위 중의 기사는 음주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철칙이다. 술에 취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제국 수도에서 성국까지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으며 안전하고, 제이콥이 나눠 준 술도 취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긴장을 풀고 그가 주는 술을 받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사실을 감안해 줄 알폰스가 아니었다.
‘며칠 나와 떨어져 있었다고 기강이 많이 해이해졌군. 그녀를 호위해야 할 기사들이 이렇게 나태해지다니……. 귀택하면 전부 벌을 줘야겠어. 술을 가져온 제이콥은 더더욱.’
방금 자신의 미래의 목숨줄이 왔다 갔다 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제이콥은 톰슨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사들은 클로에가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알폰스가 내내 그녀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충성스러운 기사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군, 좀 더 드십시오. 건조식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요리를 하기 위해 불을 피우면 클로에에게 들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알폰스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건조식품만 먹는 중이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난 됐다.”
그는 식사량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애당초 식탐이나 식욕이 적은 것을 생활을 위하여 의무적으로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건조식품을 많이 먹을 리가 없었다. 그는 딱 허기를 채울 정도만 먹고 더 이상 식량에 손을 대지 않았다.
기사들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마님의 건강에 신경을 쓰시는 만큼 주군 자신의 건강에도 신경을 쓰신다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그 아무도 그 말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 놓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식의 여행이 계속 이어지자 알폰스는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건조식품을 먹거나 잠자리가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클로에 때문이었다.
‘그녀가 밀턴케인스에 갔을 때처럼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군.’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뒤로는 계속 그녀를 곁에 두었다. 그녀가 이 팔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를 끌어안고, 만지고, 시선을 맞추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와 접촉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접촉할 수 있었던 그가 갑자기 그녀에게 접촉하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자신이 따라왔다고, 무슨 일인지 걱정된다고 말하면서 그녀를 꽉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그녀를 가까이서 바라보며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를 멀리서 보고 있자니 그런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알폰스는 참아 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숙소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이었다. 휴식을 푹 취한 클로에와 그녀의 하녀들이 마차에 올라탔다. 기사 톰슨이 그녀들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조심하십시오, 마님.”
“고마워요.”
알폰스는 근처의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맛!”
“마님!”
알폰스가 보는 눈앞에서 클로에가 발을 삐끗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에서 떨어졌다.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부……!”
알폰스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서슬에 커피잔이 거의 엎어질 뻔했다. 그가 숨어 있던 식당에서 뛰쳐나갈 뻔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괜찮으십니까? 마님.”
톰슨이 클로에의 몸을 감싸 안았다. 클로에의 드레스 자락이 펄럭였다. 그녀의 한쪽 발에서 구두가 벗겨져 툭 떨어졌다.
클로에는 놀란 가슴이 여전히 두근거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톰슨.”
“아닙니다. 마님을 지키는 것이 제 일이니까요.”
톰슨은 예의 있는 미소를 지었다.
하녀 엘리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클로에의 벗겨진 구두를 신겨 주었다. 톰슨이 클로에를 땅에 사뿐히 내려 주었다. 클로에는 엘리와 함께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식당 문의 유리창을 통해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알폰스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다, 다행입니다. 마님께서 다치지 않으셔서…….”
알폰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클로에가 넘어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톰슨에게는 징계를 내리도록 하지.”
“옛?!”
너무나 생뚱맞은 말에 기사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
톰슨은 해야 할 일을 했다. 클로에가 넘어지지 않게 도와준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징계라니?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주군의 앞에서 섣불리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들 알폰스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알폰스는 생각했다.
‘너무 오래, 꽉 끌어안고 있었어.’
도와준 건 좋지만 그녀를 너무 깊게 끌어안았다. 같은 남자로서 생각하건대 저건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애초에 클로에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상대로 흑심을 가지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알폰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톰슨이 잘한 일도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의 연약한 아내는 마차에서 떨어져 다쳤을 테니까.
알폰스가 말했다.
“톰슨에게 포상도 주도록 하지.”
“예?”
기사들은 또 한 번 기함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건 대체 무슨 명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기사들은 알폰스를 매우 신뢰하고 존경했다. 바텐베르크 기사단에서 알폰스의 지휘관으로서의 유능함과 냉철한 판단력을 존경하지 않는 기사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군이시니까 분명 이유가 있으시겠지.’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설마 그가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눈이 멀어서 이러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리하여 일주일간의 여행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성국이 보입니다!”
기사들이 소리쳤다. 클로에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성국은 작은 도시국가였다. 하지만 그 작은 도시국가의 영향력은 제국 못지않았다. 이 대륙에서 종교의 힘은 강력했다. 대륙 구석구석까지 성국의 성녀와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국경부터 경비가 장엄했다. 국경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 있었고, 성문마다 성국을 상징하는 하얀 휘장을 걸친 경비병들이 잔뜩 있었다. 딱 봐도 아무에게나 국경을 개방해 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실례합니다, 신분과 성명, 입국 목적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성국의 성녀를 만나는 것은 밀턴케인스의 리버우드를 만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래서 클로에는 가명을 쓰지 않았다.
“클로에 바텐베르크, 제국의 바텐베르크 공작가의 안주인이에요. 저는 성녀님을 접견하러 왔어요.”
클로에는 성녀에게 편지로 받은 입국 허가장을 내밀었다.
클로에의 신분도 있고, 입국 허가장도 있으니만큼 입국은 수월했다. 경비들은 곧 그녀를 향해 고개 숙이며 성문을 열어 주었다.
“유일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클로에와 그녀의 수행원들은 무사히 성국에 입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경비병들은 알폰스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의 앞을 막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클로에를 맞이할 때보다 경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클로에는 공작가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를 타고 왔고, 알폰스는 기사 몇 명만을 대동한 채 말을 타고 왔으니까.
기본적인 지위가 있어야만 입국할 수 있는 성국에 말을 타고 입성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가만히 있어도 귀족적인 티가 나는 알폰스의 옷과 얼굴을 보니 지위가 낮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성국의 경비원들이 경계를 풀기에는 부족했다.
“신분과 성명, 입국 목적을 밝혀 주십시오.”
경비병들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알폰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한 얼굴을 했다. 그가 말을 내뱉었다.
“알렉산더 펜들턴.”
“……제국의 알렉산더 펜들턴 백작이십니다.”
알폰스의 기사 중 하나가 부연 설명을 했다.
알폰스는 클로에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는 클로에에게 들킬 가능성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신 중 한 명의 신분을 빌려 오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경비병들이 신분 패와 여행증서, 가문의 증거 등을 요구했다. 물론 알폰스처럼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 그런 걸 준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신분은 완벽히 증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비병들은 알폰스를 곧바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약조는 하고 오신 겁니까? 고위 사제 이상의 입국 허가장이 필요합니다.”
알폰스가 자신의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기사들이 경비병에게 어떤 봉투를 내밀었다. 경비병들은 그것을 꺼내어서 꼼꼼히 검토했다.
한참을 검토한 뒤 경비병들이 경례를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펜들턴 백작님. 입국하셔도 좋습니다. 유일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성문이 열렸다. 알폰스는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성국에 입성했다.
성국에 입국한 클로에는 무척이나 안도했다.
‘딱 좋은 때에 도착해서 다행이야. 여행이 순조로워서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어.’
그 순조로운 여행의 뒤에 누가 있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며 그녀가 생각했다.
클로에는 성녀에게 다음날 찾아가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뒤, 숙소를 잡아 휴식을 취했다.
여독을 조금 푼 클로에는 다음 날 아침, 약속한 시간에 교황청에 찾아갔다. 그녀는 정식 절차를 밟아서 성녀와의 접견 기회를 얻었다.
밀턴케인스에서 리버우드를 만날 때처럼 기사들과 하녀들은 접견실 밖에 떼어 놓았다.
마침내 클로에는 접견실에서 혼자가 되었다. 하얗고 장식이 거의 없는, 하지만 성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접견실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무엇보다 긴장되는 것은 지금부터 그녀가 성녀와 나누게 될 대화였다.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성녀에게 할 말에 대해서는 이미 며칠 동안이나 준비해 두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떨리고 긴장되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자신의 지위를 생각했다. 그녀는 리버우드를 만날 때처럼 되도록 차분하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그녀가 그러고 있는 동안 알폰스는…….
그는 기사 전원을 숙소에 떼어 놓고 왔다. 클로에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자기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유욕 때문이기도, 그녀를 배려하는 뜻이기도 했다.
알폰스는 클로에 몰래 교황청에 들어왔다.
그가 미리 매수해 놓은 신관 몇 명이 그를 신관으로 위장시켜 주었다. 신관의 로브를 입고, 후드를 머리끝까지 눌러쓰자 나름대로 감쪽같았다.
그는 클로에와 성녀가 만나는 접견실 옆방으로 갔다.
“접견실은 완전 방음입니다만, 이 마도구를 사용하시면 옆방의 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사제가 알폰스에게 감청용 마도구를 건넸다.
알폰스 역시 긴장되고 떨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냉정하던 그가 이런 감정을 느껴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불안했다. 그녀의 비밀이 뭔지 너무나 알고 싶었으며,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정말 아픈 것은 아니어야 할 텐데.’
알폰스는 그것만을 바랐다. 그녀의 비밀이 무엇이든 아픈 것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어쨌든 여기까지 온 이상 알아야 했다. 그는 마도구를 이용해 옆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접견실에 얌전히 앉아 있던 클로에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성녀였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고, 희고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신비스러운 사람이라면 확실히 다른 세계와의 소통도 가능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사람은 예의상의 인사를 나누었다. 성녀가 자리에 앉은 뒤, 먼저 입을 열었다.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시군요. 신께서 그대를 제게 인도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를 들어 볼까요.”
클로에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녀님, 사실 저는…….”
그녀는 자신의 모든 비밀을 설명했다. 자신은 빙의자이며, 이곳과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곧 이곳에 적응을 했으며, 소중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기에 밀턴케인스의 전직 신관을 찾아갔다는 것.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의 자리를 빼앗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저는 성녀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으면 해요. 이전의 이 몸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게 해 주세요. 염치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게 남은 희망은 성녀님뿐이에요.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로에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동안 성녀는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다.
설명을 끝낸 클로에는 자신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음고생을 했던 모양이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이 부끄러웠다. 클로에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 냈다.
성녀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이 실례가 될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공작부인. 사실 저는 그대의 사정을 알고 있었답니다.”
“네?”
클로에가 깜짝 놀랐다. 성녀가 말을 이었다.
“공작부인께서는 몇 달 전 제국의 밀턴케인스에 거주하는 전 신관 리버우드에게 상담을 한 적이 있으시지요. 그 이후 리버우드가 부인의 사정에 대해 제게 보고를 올렸습니다. 비밀 엄수는 성직자의 중요한 철칙이지만, 부인께서는 너무나 특이한 경우인지라 철칙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클로에는 리버우드를 만날 때 가명을 사용했지만, 성녀 역시 그것이 가명일 것이라는 추측은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녀의 말을 들으니 클로에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곧 그녀 특유의 능숙한 대처 능력으로 대응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성녀가 말을 이었다.
“리버우드에게 들으셨겠지만 공작부인의 경우는 특별합니다. 우리는 신의 뜻을 받들어 대신 행하는 존재. 그분의 자손들을 굽어살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빙의자와 다른 세계의 주민 역시 신의 자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빙의자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예외 없이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요. 그리고 언제나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공작부인, 그대는 희망입니다. 그대는 빙의자 역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고,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쌓아 올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니 공작부인, 그대가 죄의식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은 우리들이 바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자손들의 행복을 기대하시는 신의 뜻이겠지요.”
성녀는 잠시 고민하듯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대가 이 세상의 모든 빙의자들의 희망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그대가 빙의자라는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길 바랍니다. 그대의 몸의 이전의 주인과의 대화를 준비해 보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와 주시면 될 것 같군요.”
클로에는 너무나 놀랐다. 리버우드도 이전의 세계의 가족들과 연락하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당했다기에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흔쾌히 부탁을 받아 줄 줄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녀는 감격에 가슴이 벅찼다. 클로에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녀님. 이 은혜는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야말로 그대의 존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공작부인.”
베일 아래에서 성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얼굴이 반밖에 보이지 않긴 하지만, 그녀 역시 진심으로 기쁜 것 같았다.
클로에는 몇 번이나 연거푸 감사 인사를 하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한편, 옆방에서 이들의 대화를 전부 들은 알폰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이 알던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는 없었다.
* * *
다음 날이었다. 클로에는 숙소에서 푹 쉬며 여독을 마저 푼 뒤, 아침 일찍 교황청에 찾아왔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녀는 약속 시간보다 약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성녀님께서는 지금 손님을 맞을 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신관의 말에 클로에는 멋쩍어하며 생각했다.
‘내가 너무 오버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이 뛰고 긴장이 되어 진정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숙소에서 얌전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너무 떨려 밤잠마저 설쳤을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미래와 사랑이 걸려 있는 일이었으니까.
신관은 클로에를 응접실로 안내한 뒤, 성녀가 준비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한 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클로에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하고는 응접실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이실까?’
클로에는 생각했다. 아직 한 시간이 되려면 멀었지만 혹시 준비가 일찍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서.
그러나 성녀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밝혀졌다. 문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키가 크고, 사제복의 후드를 머리끝까지 눌러쓴 신관이었다.
클로에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신관은 클로에의 앞에서 그녀를 보았다. 후드에 가려져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몹시 강렬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클로에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어쩐지 낯익은, 그립기까지 한 감각. 이 시선은 설마…….
신관이 후드를 벗었다. 클로에는 도저히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알폰스!”
그녀가 너무나 사랑하는 얼굴, 여행 내내 그리워했던 얼굴.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기도 했다.
클로에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알폰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이 여기 어떻게……?”
알폰스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표정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가 클로에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미간에 금이 생겼다.
그는 클로에에게 걸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클로에가 채 어찌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클로에를 덥석 끌어안았다.
“어째서…….”
그가 클로에의 가녀린 몸을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체온이 높지 않은 그의 품이 이상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져서 클로에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째서 혼자 괴로워하고 계셨습니까. 어째서.”
알폰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클로에의 비밀을 알게 된 알폰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미워지거나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기존의 계획대로 그녀를 지켜보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을 물어보겠다는 생각은 교황청에서 그녀를 마주했을 때 산산이 깨져 버렸다.
어제처럼 신관의 차림을 하고 교황청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졌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알던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그녀의 남모를 아픔이었다. 그동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가 아무도 알지 못할 비밀을 숨기고 끙끙 앓았다는 것. 자신의 것이 아닌 죄책감으로 계속 괴로워했다는 것. 그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는 것…….
그녀의 아픔을, 괴로움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말 못 할 비밀에 홀로 외로운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찢었다.
알폰스는 깨달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녀가 계속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족했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되고 말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비대하게 몸을 불린 이 마음은 그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눈을 멀게 했다.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게 맹목적으로 바라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계속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녀가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서 계속 웃고 있어 주기만 한다면…….
계속 말해 주고 싶었다. 당장 그녀에게로 달려가서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내게 와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당신은 내게 선물이자 축복이었다고.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손을 잡아 주고,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순간이 왔다.
알폰스는 목구멍 밖으로 치밀어 오르는 온갖 감정을 씹어 삼켰다. 그가 클로에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비밀을 엿들어서 죄송합니다. 몰래 따라온 것 또한.”
“알폰스…….”
클로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게다가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그녀의 올리브빛 눈동자가 울렁이며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말했다.
“알폰스, 지금까지 속여서 정말 죄송…….”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알폰스가 클로에의 말을 끊었다.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가 자신의 말을 중간에 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클로에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말문이 막혀 알폰스를 보았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한 음절 한 음절 씹어뱉듯 말했다.
“부인,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클로에의 심장은 멈출 것만 같았다.
뿌리 깊은 죄책감과 그에 대한 미안함, 계속 지니고 있던 그를 향한 죄스러운 감정. 쌓이고 쌓여 하늘 높이 벽을 이루고 있던 감정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둑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작은 금 하나다.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신은 힘들어할 자격조차 없다고 참고 참아 왔던 감정들이 작은 틈새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허물어진 둑 사이로 눈물이 치민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클로에가 울먹이며 말했다.
“알폰스, 사랑해요.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해요. 믿어 주세요…….”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믿습니다.”
알폰스의 크고 긴 손이 클로에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얼굴을 가슴에 부드럽게 묻으며, 알폰스가 속삭였다.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어떠한 경우라도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클로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연회에서 그가 했던 맹세를. 어떠한 경우라도 변함없이 그녀만을 사랑하겠다고…….
눈물이 쏟아져서 클로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알폰스의 앞섶이 젖어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을 했다.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어서 눈 감고도 외울 수 있을 것 같은 말…….
클로에는 숨이 벅찼다. 너무 울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직 그만을 제외하고는.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서 다행이야.’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눈물 맛만 났지만 그래도 클로에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