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하지만 클로에는 조금도 기죽지 않은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음 잔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하녀가 다음 잔을 따라 내었다. 바다처럼 파란 찻물이 유리잔 안에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녀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주 작은 은제 저그(Jug)였다.
하녀는 조심스럽게 저그 안에 담긴 것을 찻잔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찻잔 안에서 아롱거리던 푸른빛이 전혀 다른 빛으로 변모한 것은 그와 동시였다.
“……!”
그건 마치 마법 같았다. 투명한 물속에서 잉크가 번지듯 파란빛이 붉게 물들어 갔다. 마침내 찻물이 완전히 물들자, 그것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분홍빛이 되었다.
“이건…… 마법인가요?”
여왕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마법이 아니라 차입니다, 여왕 폐하. 블루 멜로우의 푸른빛은 레몬즙과 만나면 이런 고운 분홍빛을 띤답니다.”
클로에의 전생에서야 레몬즙을 통한 산성 염기성 실험 정도는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졸업하는 것이지만 이곳은 다르다. 단지 레몬즙과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색깔을 바꾸는 액체는 여왕에게조차 생소했다. 차라리 마법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믿기 쉬울 것이다.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여왕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애당초 레몬즙을 넣을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블렌딩인지, 레몬즙의 새콤한 맛이 차와 잘 어우러졌다. 가미된 상큼함에 입안이 개운해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다음 잔도, 그다음 잔도 계속해서 수색이 달라졌다.
블루 멜로우의 파란 수색은 공기와 닿으면 산화하여 점차 녹색을 띤다. 그리고 그 녹색이 된 블루 멜로우에 레몬즙을 넣으면 이번엔 분홍색이 아닌 다홍색을 띤다. 한 가지 차로 온갖 다양한 색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
카타리나 2세는 고민했다.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찻물이 다양한 색상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분명히 아름다웠다. 만일 신기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귀부인들이 본다면 자지러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왕이다. 그것도 대륙의 사파이어와 루비 생산의 80%를 담당하는 플랑드르 왕국의 주인이다. 고작 이 정도 흥밋거리에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흠, 뭐, 재미있었어요. 이 정도면 왕국에 돌아가서 이런 것을 보았다며 자랑할 수준은 되겠는걸요.”
“…….”
“그렇지만 공작부인, 당신은 제국에 차를 유행시킨 장본인이잖아요. 다양한 수색의 차 정도는 저도 몇 번이나 봐 왔어요. 찻물의 색깔 같은 걸로는 충분한 기쁨을 느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여왕은 두 손을 깍지 끼고 도발적으로 말했다.
“저는 공작부인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이 이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공작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왕을 물끄러미 보는 클로에의 눈빛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가 단정히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다음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차를 준비하기에 앞서 클로에는 로네펠트 후작부인에게서 접대 상대의 취향과 상세한 신상 정보를 전해 들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왕국의 여왕. 이제까지 그녀가 고른 차들은 대부분 코와 입으로 즐기는 것이었지만, 상대는 명백하게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래서 클로에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차를 선정했다. 그녀가 제일 먼저 고른 것이 바로 블루 멜로우였다.
“어머! 정말 예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단지 레몬즙을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수색이 바뀌다니…….”
로네펠트 부인은 블루 멜로우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공작부인은 역시 정말 대단해요! 이거라면 확실히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예요.”
사실 로네펠트 부인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실제로 블루 멜로우라면 예쁜 것을 좋아하는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클로에가 다과회 같은 데에서 이것을 선보인다면 큰 화제나 유행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로네펠트 부인과 생각이 달랐다.
‘아니야……. 분명 블루 멜로우는 아주 예쁘고 신기하지만, 이걸로는 충분치 않아. 상대는 보석을 사랑하는 여왕이야. 블루 멜로우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걸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아서요.”
“충분치 않다뇨? 제가 보기에는 완벽해요. 여왕도 여기에 푹 빠질 거라니까요.”
“으음……. 다른 것도 한 번 시도해 보아야겠어요. 미안해요, 로네펠트 부인. 나중에 다시 올게요.”
“어머? 공작부인께서 그러시다면야…….”
로네펠트 부인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클로에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쨌든 그리하여 클로에가 새로 준비해 온 것이, 바로 지금부터 보여 줄 두 번째 차였다.
곧 커다란 유리 숙우와 뜨거운 물 주전자가 준비되었다. 이번에는 차를 미리 우려서 가지고 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작은 비단 상자였다. 상자를 매우 귀중한 물건처럼 조심스레 들고 온 하녀는 그것을 클로에에게 공손히 건넸다.
클로에는 상자를 열어 그것을 카타리나 2세에게 내보였다. 여왕은 고개를 숙여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꼭 보석 상자처럼 생겼지만 안에 든 것은 보석이 아니었다. 안에 든 것은 비단으로 조심스럽게 싸인 조그맣고 둥그런 알이었다.
“이건……?”
여왕의 갈매기처럼 길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클로에가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이건 찻잎입니다, 여왕 폐하.”
“이게 찻잎이라고요?”
“네. 시향해 보세요.”
여왕은 상자를 들어 올려 찻잎의 향을 맡았다. 평소 차를 마시던 사람이라 그런지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과연, 이 조그마한 알은 찻잎이 맞았다. 알에서 향긋한 꽃향기나 달콤한 찻잎의 향이 풍겼다. 자세히 보니 찻잎을 알 모양으로 똘똘 뭉쳐 놓은 것 같았다.
여왕은 다시 상자를 클로에 쪽으로 내밀며 부채를 부쳤다.
“특이한 모양이네요. 이 찻잎이 공작부인이 말한 아름다운 차인가요?”
“그렇습니다.”
클로에는 다시 찻잎 상자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직첩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리 숙우에 뜨거운 물을 반 정도 부었다. 그리고 알처럼 생긴 찻잎을 조심스럽게 물에 빠뜨렸다. 그런 뒤 그 위로 뜨거운 물을 더 부었다.
일반적으로 차를 우릴 때는 찻잎을 먼저 넣고 물을 넣는 상투법(上投法)을 사용한다. 찻잎이 패닝급인 경우처럼 지나치게 여려서 자극에 예민할 경우에는 물을 먼저 넣고 찻잎을 나중에 넣는 하투법(下投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번에 클로에가 사용한 방법처럼 물을 반만 넣고 찻잎을 넣은 뒤 다시 물을 붓는 것은 중투법(中投法)이라고 부른다. 찻잎에 자극을 비교적 덜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숙우에 물을 부은 클로에가 물러났다. 그 순간부터, 여왕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졌다.
“어머!”
알에서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찻물 속에 반쯤 가라앉아 있던 알에서 녹색 잎사귀 같은 것이 뻗어 나왔다. 그러더니 잎사귀 사이에서 하얀 꽃망울이 올라왔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여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숙우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뻗어 올라오던 하얀 꽃망울이 말갛게 피어올랐다. 흰 재스민이었다.
재스민과 녹색의 잎사귀 틈바구니에서 노란 금잔화, 붉은 천일홍 역시 차례차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찻물 속에서 그 크기를 넓이며 만개한 꽃은 마침내 숙우의 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마치 씨앗에서 꽃이 자라나는 모습을 단시간에 압축해서 본 것만 같았다. 신부의 부케처럼 만개한 꽃망울로 가득 찬 숙우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이 모습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보고 있던 여왕은 뒤늦게 깨달았다. 숙우를 가득 채운 하얗고 노랗고 빨간 꽃과 파란 잎은 낯익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건 마치…….
“플랑드르의 국기…….”
여왕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숙우 안의 꽃들은 플랑드르의 국기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빨간 루비와 파란 사파이어, 그리고 순결과 영광을 뜻하는 국기였다.
카타리나 2세는 자신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놀랍고 신기했던 탓이다.
그녀는 도로 의자에 앉으며 부채로 입을 가렸다. 그러는 동안 하녀가 숙우에 우러난 차를 여왕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온의 공예화차라는 것입니다. 녹차와 다양한 꽃으로 만든 것으로, 보셨다시피 뜨거운 물 속에서 꽃이 피어나는 차입니다. 여왕 폐하를 위해 플랑드르의 국기 형태로 제작하도록 특별 주문을 넣었습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만큼 맛과 향 역시 뛰어나도록 신경을 썼답니다.”
여왕은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접었다. 그리고 찻잔을 입에 대었다. 과연 클로에의 말대로였다. 고소한 녹차의 맛과 함께 향긋한 재스민과 금잔화, 천일홍의 향이 코끝을 감돌았다.
클로에가 손짓하자, 하녀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비단으로 싸여 있는 고급스러운 상자이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컸다.
하녀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찻잎으로 된 알이 10개가 들어 있었다.
“이 플랑드르의 국기 형태의 공예화차는 여왕 폐하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이 차가 폐하의 즐거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 때부터 딸랑이보다 보석을 먼저 가지고 놀았던 카타리나 2세의 미감을 만족시키는 것은 흔치 않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녀의 미감을 만족시키고자 다양한 선물을 바쳤다. 특히 플랑드르의 여왕이라는 이유로 온갖 아름답다는 차도 많이 받았다.
수색이 아름다운 차, 찻잎이 아름다운 차, 온갖 것을 보아 왔지만, 설마하니…… ‘물속에서 피어나는 차’ 같은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물속에서 피어나는 루비처럼 붉은 천일홍을 보았을 때 카타리나 2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손에 넣고 싶었다.
이 차는 도저히 어떻게 트집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맛있기까지 했다.
카타리나 2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
상대의 뜻밖의 반응에 클로에가 의아해했다. 클로에의 얼굴을 보며 여왕은 내내 펼치고 있던 부채를 드르륵 접었다.
“과연…… 공작부인이시로군요. 이곳에서 익히 들어 왔던 당신의 평판이 헛된 것이 아니라서 기뻐요.”
‘무슨 의미지?’
클로에는 상대의 반응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칭찬을 들은 것 같으니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여왕 폐하.”
여왕이 클로에의 특별한 선물에 만족했음을 깨달은 로네펠트 부인이 후작을 향해 눈짓했다. 후작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얼굴에 싱글벙글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차를 대접한 뒤, 카타리나 2세와 로네펠트 후작 사이의 긴 대화가 이어졌다.
카타리나 2세는 놀라울 정도로 기분파였다. 여왕과 대화를 나누는 후작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클로에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웠어요, 공작부인. 다 공작부인의 덕택이에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로네펠트 부인과 클로에는 응접실에 물러나 있었다. 로네펠트 부인이 진심으로 기쁜 듯이 말했다.
자신의 좋은 친구인 로네펠트 부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클로에는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뭘요. 저야말로 로네펠트 부인의 덕에 특별한 경험을 했어요.”
“공작부인은 정말 겸손하시다니까!”
클로에는 좀 더 앉아서 로네펠트 부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이후의 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로네펠트 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포옹을 한 뒤 후작저를 떠났다.
그런데 현관으로 나가는 복도를 걷던 도중이었다.
“공작부인.”
명백히 자신을 부르는 말에 클로에는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왕 폐하.”
클로에는 놀란 마음을 감추고 예를 갖추었다.
분명 후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할 카타리나 2세가 거기 있었다.
붉고 진한 연지를 바른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까 식당에서는 내내 앉아 있던 모습만 보았는데,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화려한 차림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공작부인이 떠난다기에, 후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나왔어요. 잠시 괜찮을까요?”
클로에는 고민했다. 갈 곳이 있긴 했지만 여왕의 말도 못 들어 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폐하.”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클로에는 상대가 어떤 용건이 있기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플랑드르 왕실에 차를 공급해 달라는 건가? 아니야, 플랑드르는 옛날부터 차를 마셨으니 좋은 차 관련 사업체가 많을 텐데…….’
그러나 마침내 여왕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클로에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나를 위해 일해 보지 않겠어요?”
“네……?”
클로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여왕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맑고 단호했다.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업가인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나의 원석 사업을 관리해 줄 좋은 기업인이 필요해요. 아니면, 당신에게 더 욕심이 있다면, 우리 왕국의 정무를 도울 수도 있겠죠. 뛰어난 사업가가 정치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니까요.”
카타리나 2세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제국에서 여성이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우리 왕국의, 내 아래에서라면 가능해요. 계약금으로 최상품의 사파이어를 생산해내는 광산을 3개 드리죠. 물론 연봉은 별개로 지급하겠어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최상품의 사파이어를 생산하는 광산 3개를 준다니, 그것이 클로에의 온전한 개인 자금이 된다니……. 솔직히 말해 지금의 트리플 스위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입일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클로에는 얼떨떨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무척 영광입니다만, 폐하. 어째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유? 이유라.”
여왕은 특유의 다소 거만해 보이는, 하지만 매력적인 얼굴로 클로에를 보았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높은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겸손함과 예의가 있지만, 그렇다고 유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저토록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인상에도 여왕의 기세에 조금도 눌리지 않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제국에서 제일 이름 높은 여성 사업가라고 했던가.’
혹자는 그녀의 수완과 차에 대한 지식만을 놓고 그렇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장 겉으로 드러나기 쉬운 부분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카타리나 2세의 눈에 띈 것은 그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태도였다. 강한 기세의 상대에게도 전혀 눌리지 않는 강인함. 자신의 사업적 능력에 대한 자부심.
제국의 여성에게서는 정말이지 드문 인물이었다.
“나에게는 취미가 있어요. 아름다운 것들을 모으는 거죠.”
여왕이 난데없는 말을 했다. 당황할 만도 했지만 클로에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나는 당신처럼 반짝이는 보석 같은 인재를 찾고 있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예정이에요. 이것이 내 인생의 즐거움이자 존재 이유니까요.”
클로에가 대답했다.
“즉…… 저더러 폐하의 컬렉션이 되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거예요. 나는 당신이 내 것이 되어 주었으면 해요.”
클로에는 고민의 여지 없이 말했다.
“무척이나 영광이지만, 폐하.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뭐, 뭐라고요?”
순간 여왕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여왕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대체 왜죠? 좋아하는 차라면 플랑드르에서 접하기가 제국에서보다 쉬울 거예요. 게다가, 당신은 이런 제국에서 만족하나요? 제국에서 여성은 정치도 할 수 없고 상속도 받을 수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사업가라도 불가피하게 끊임없이 편견과 맞닥뜨리게 될 거예요. 하지만 플랑드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이 카타리나 2세의 아래에서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공작령과는 별개의 자신만의 영지를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고요?”
클로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분명 이곳에서 사업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일을 하고 싶어요.”
클로에가 미소 지었다.
“더 어렵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살고 싶어요. 저는 제 일이 좋아요.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아요. 분명 폐하께서 제안하신 일들도 매우 훌륭하고 보람 있는 일들이겠지만, 저는 차에 대한 일을 할 때야말로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어요.”
여왕은 반쯤 벌리고 있던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그녀는 뒤늦게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고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원래의 거만한 얼굴로 돌아간 그녀가 말했다.
“정 그렇다면, 알겠어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할게요.”
“감사합니다, 여왕 폐하.”
여왕이 아쉬움을 숨기며 말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 *
이 일을 계기로 클로에에 대한 소문은 제국뿐만이 아닌, 국외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식은 익히 들었소, 공작.”
황제와 일부의 가신들만이 모인 만찬 자리였다.
“공작부인이 플랑드르의 여왕에게서 전속 고용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오?”
“저도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여왕이 정말이지 막대한 계약 조건을 제시했다고 하던데요.”
그 자리에는 알폰스 역시 참석해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고기를 썰던 알폰스가 대답했다.
“전부 사실입니다.”
“역시! 과연 공작부인이시로군.”
“제국 최초의 은독수리 훈장을 받은 여성이시니까요.”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그러한 대단한 일을 하실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가신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공작부인도 대단하시지만, 바텐베르크 공작 역시 정말 훌륭하십니다. 안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용인하시다니요? 매우 배려심이 깊고 훌륭한 부군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저 같으면 결코 그렇게 봐주지 못할 겁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국에서 여성들은 얌전히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것이 미덕이었다.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은 기껏해야 춤과 악기 연주, 신부 수업 정도가 전부인 이곳에서는 여성이 바깥일에 지나치게 참견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하겠다고 하면 제일 먼저 말리는 사람이 남편인 것이 보통이었다.
고기를 자르던 알폰스의 손이 멈췄다. 그의 미간에 가는 주름이 졌다.
“제가 아내를 ‘봐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은 그녀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저는 아내의 지혜로움과 재능이 자랑스럽습니다.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매진하는 것이 막아야 할 일입니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공작부인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실언을 했나 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황제가 끼어들었다.
“좌우지간 공작부인께서 플랑드르의 여왕의 제안을 거절해서 다행이오. 하마터면 나로서도 제국의 인재를 하나 잃을 뻔했지 않소. 공작부인은 훌륭한 사업가일뿐더러 귀부인들의 귀감이고, 나의 훌륭한 거래 상대이기도 하니, 플랑드르에 빼앗기기는 아깝지.”
황제의 말에 가신들이 “옳으신 말씀입니다.”라면서 맞장구를 쳤다.
소탈하게 껄껄 웃던 황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공작부인이 플랑드르로 떠나 버리면 공작도 함께 갈 것이 아니오? 인재를 한 번에 두 명이나 잃어버리는 건 큰 국가적 손실이지.”
“하하하, 폐하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었습니다.”
황제의 말이 재미있는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는지 가신들이 하하 웃었다.
알폰스는 구태여 그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할 뿐이었다.
황제는 보는 눈이 예리했다.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쌓여 온 안목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깊게 관찰하고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알았다.
알폰스가 그를 내심 고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좌우간 클로에가 여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플랑드르로 떠났다면 알폰스는 한 점 미련 없이 제국에서의 정치를 그만두고 이사라도 갔을 것이다. 그가 인생의 절반을 정무에 바쳤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클로에는 플랑드르로 가는 대신 자신의 일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그녀는 제국의 제2의 수도 밀턴케인스에 트리플 스위트의 2호점을 개점했다.
수도에서 새로운 유행이 태어날 때마다 그것이 밀턴케인스에 닿는 데에는 약 몇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클로에는 밀턴케인스에서 차라는 새로운 문화와 트리플 스위트에 대한 소문이 충분히 돌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고른 시기는 적당했다. 트리플 스위트 2호점은 개점하자마자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판매량 역시 호조를 올리고 있었다.
처음 수도에서 차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다른 사교계의 유행들이 익히 그렇듯 이 유행 역시 금방 꺼지고 말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1년이 넘는 장기적 유행이 지속되고 있었다. 유행과 관계없이 차에 깊게 심취한 사람들 역시 많았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이것은 클로에의 사업 수완 덕택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꺼지지 않게 제때제때 신선하고 훌륭한 제품을 선보여 유행이 식을 틈이 없는 것이다.
여전히 클로에가 무언가 하나를 선보일 때마다 그것은 사교계에서 큰 화제가 되곤 했다.
클로에가 제국에서 퍼뜨린 차 문화는 단순한 유행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애프터눈 티타임과 코르셋 등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수도는 물론이고, 수도에 있던 귀족이 영지로 내려가서 차 문화를 퍼뜨리거나 수도 주변의 귀족들이 수도까지 찾아와 차를 사 가는 등 차 문화는 수도 밖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실상 수도권의 귀족들과 부유층에게는 차가 일상이 되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게다가 지속적인 찻잎 값의 하락과 세분화로 인해 중산층 사이에서도 차 문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물론 스트레이트 티(straight tea. 아무것도 섞지 않고 마시는 차)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더 대중적인 것은 밀크티였다. 특히 아침잠을 깨우기 위해서나 애프터눈 티타임에 공복을 달래기 위해 밀크티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밀크티는 당연히 홍차에 우유를 넣어야지.”
“아니야, 우유에 홍차를 넣는 게 진짜야!”
밀크티가 일상화되어가면서, 우유를 먼저 넣느냐, 홍차를 먼저 넣느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홍차에 우유를 넣어야만 우유를 넣는 양을 조절하기 쉽다고. 비율이 딱 맞는 맛있는 밀크티를 만들려면 홍차에 우유를 넣어야 해!”
“뜨거운 홍차를 먼저 부으면 잔이 깨지기 쉬워. 차가운 우유를 먼저 넣고 홍차를 넣어야 적당한 온도가 되어서 잔이 상하지 않아!”
사교모임의 자리에서도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주제는 사람들의 뜨거운 감자이자 좋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 논쟁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심지어는 이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들마저 생길 정도였다.
클로에는 생각했다.
‘꼭 전생에 살았던 나라에서 사람들이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을지 찍어 먹을지를 주제로 싸우던 것 같네.’
어쨌든 이 모든 게 사람들이 차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그녀는 무척 기뻤다.
그러나, 우유 먼저 홍차 먼저 논쟁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았다.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는 첼시 백작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 첼시 백작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였다.
클로에도 알폰스도 사교활동을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니라 꼭 필요한 연회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지만, 첼시 백작은 알폰스의 무척 충실한 가신이기에 축하를 해 주기 위해 참석한 것이다.
“공작 각하와 공작부인께서 제 생일을 축하해 주러 친히 오시다니 무척 기쁩니다. 부디 편히 즐기다가 가시길 바랍니다.”
알폰스가 첼시 백작과 정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클로에는 첼시 백작 부인과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첼시 백작과 첼시 백작 부인 사이에는 혼기가 찬 딸이 하나 있었다. 클로에 역시 백작 영애를 만나 보았는데, 부모를 닮아 예의가 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한데 그 첼시 백작 영애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두 명 있었다. 워시번 소자작과 데니슨 남작이었다.
이 두 남자가 첼시 백작 영애에게 푹 빠져 그녀에게 열렬하게 구애하면서 서로를 견제한다는 사실은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클로에는 첼시 백작 부인과 한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연회장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원래 연회 중에는 들뜬 사람들로 늘 소란스럽기 마련이지만 이번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연회장 한복판에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한 백작 부인과 클로에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백작 부인이 물었다. 연회장 한복판을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아, 백작 부인……. 그게, 따님을 짝사랑하시는 그분들이 말입니다.”
“그분들이군요. 그분들이 무슨 일을 하셨나요?”
“글쎄 결투를 하시겠다고 하지 뭡니까.”
“네에? 지금이요?”
백작 부인과 클로에는 놀라서 인파를 헤치고 들어갔다.
그 한복판에는 아니나 다를까 워시번 소자작과 데니슨 남작이 있었다.
“나는 네가 옛날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 줘서 그 콧대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 주겠다.”
“내가 할 소리다! 너야말로 무섭다고 도망치지나 마라. 연회장에는 검을 들고 들어올 수 없으니, 정원에서 승부를 가리자!”
“원했던 바다.”
그리고 그 곁에는 첼시 백작 영애가 난처한 얼굴로 그들을 말리고 있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에 두 분이 다치시는 건 원치 않아요.”
“영애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건 저자 때문입니다.”
“영애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유에 홍차를 넣어 마신다는 저자의 썩어 빠진 정신머리를 반드시 고쳐 놓겠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클로에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연적인지라 서로를 적대하던 두 사람이 오늘 홍차 먼저, 우유 먼저 논쟁으로 시비가 붙었고, 그걸 계기로 결투를 하기로 한 것이리라.
결투는 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지극히 두 사람들만의 일로 처리되어 다른 사람이 개입할 권한은 없다.
단, 연회나 무도회 등, 사교적인 자리에서 결투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해당 사교 모임을 주최한 집안과 안주인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저 사람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클로에는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첼시 백작 부인과 백작 영애도 매우 난처해하는 걸로 보였다.
클로에는 연회의 주최자가 아닌 자신이 중재에 나서는 것은 권한 밖의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무척 난처해하는 걸 보니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소자작님, 그리고 남작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클로에가 나서서 물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워시번 소자작과 데니슨 남작의 표정에 놀라움과 당황이 드러났다.
“고, 공작부인.”
그들이 클로에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하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까 백작 부인과 백작 영애가 말릴 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바텐베르크라는 가문의 이름은 그들도 두려운 모양이었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신사분들께서 어떤 일 때문에 이렇게 언성을 높이고 계신 건지 듣고 싶네요.”
나긋나긋한 표정과 어조로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묘한 위엄이 있었다. 공작부인이라는 지위에 모자람이 없는 태도였다.
워시번 소자작과 데니슨 남작은 클로에의 눈치를 보더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게 말입니다. 데니슨 남작이 밀크티에는 홍차가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우기지 뭡니까.”
“워시번 소자작이 제가 밀크티에 우유를 먼저 넣는다고 모욕했습니다. 한참을 논쟁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자, 결투로 승부를 가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클로에가 말했다.
“그랬군요. 하지만, 이런 좋은 날에 결투를 벌이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 그 논쟁의 결론을 내어드릴 테니 결투는 그만두시는 거예요.”
“예? 결론을 내어 주신다고요?”
소자작과 남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클로에가 차분하지만 자신감이 느껴지는 태도로 대답했다.
“네.”
소자작과 남작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클로에를 보았다. 그들이 말했다.
“공작부인께서는 차에 대해서 제국 제일의 전문가이시지요. 공작부인이시라면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정한 해답으로 이자의 콧대를 눌러 버릴 수만 있다면 저도 좋습니다.”
클로에는 흠흠 헛기침을 하곤 설명했다.
“우유는 75도 이상의 온도에서 변성하는 성질이 있어요. 그래서 우유를 지나친 온도로 가열한다면 풍미를 해치게 되죠. 즉, 뜨거운 홍차를 먼저 넣고 차가운 우유를 넣는 것보다는, 차가운 우유를 먼저 넣고 뜨거운 홍차를 나중에 넣어서 차가운 온도에서 서서히 올려 나가는 것이 더 좋아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두 남자의 희비가 엇갈렸다. 데니슨 남작의 얼굴에는 승리감이, 워시번 소자작의 얼굴에는 패배감이 떠오른 것이다.
“이겼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수가……. 내가 저자에게 패배하다니.”
하지만 곧 둘 다 클로에의 존재를 깨닫고는 진정을 했다. 그들이 클로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어쨌든 이 싸움의 결론을 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피를 보지 않고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무척 감사드립니다, 공작부인.”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리고, 우유를 먼저 넣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은 이론적인 이야기예요. 실제로 우유와 홍차를 섞으면 미각이 정말 예민하지 않는 이상 변성된 풍미를 느끼기 어려우니까요. 우유가 먼저냐, 홍차가 먼저냐의 문제는 단순히 취향과 습관의 차이일 뿐이랍니다. 그러니 홍차를 먼저 넣는다고 패배했다고 느끼지 않으셔도 좋아요.”
부드럽게 설명하던 그녀의 어조가 갑작스레 단호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요. 바로 두 분께서 겨우 이 정도의 문제로 목숨을 걸 뻔하셨다는 것, 그리고 첼시 백작가의 연회에서 결투를 하실 뻔했다는 거예요. 이것이 예의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은 두 분 다 알고 계시지요?”
얼굴에 희비가 엇갈리던 데니슨 남작과 워시번 소자작의 표정이 같아졌다. 두 사람 모두 당혹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 그게 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저도 면목이 없습니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이번 연회를 준비한 백작부인과 곤욕을 치른 백작 영애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죄, 죄송했습니다. 백작부인, 그리고 백작 영애.”
“저도 죄송했습니다.”
그들이 쩔쩔매며 첼시 백작부인과 백작 영애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작부인과 백작 영애는 남자들이 진심 어린 기색을 보이자 사과를 받아 주었다.
한편 그들을 둘러싸고 이 모든 소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공작부인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정말이에요, 백작부인과 백작 영애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공작부인의 말씀에는 어찌할 줄을 모르는군요.”
“과연, 공작부인께서는 최고의 전문가세요. 사람을 다루는 기술도 좋으시고요.”
“젊고 여려 보여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강단이 있으시네요.”
한편 알폰스는 첼시 백작과의 대화를 적당한 지점에서 마무리했다.
대화를 마친 뒤 그가 바로 한 일은 바로 클로에를 찾는 것이었다.
‘백작부인과 함께 이쪽으로 간 것 같았는데.’
그가 연회장에 들어선 바로 그때였다. 연회장 한복판에 사람 수십 명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떠한 직감을 느끼고 알폰스는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아내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 일련의 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아니지만 알폰스는 적당히 분위기와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클로에가 두 명의 남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설명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사과까지 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알폰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저런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한없이 다정하고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모습이.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보여 주지 않는 수줍어하는 모습이.
상황이 해결되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해산해 각자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클로에에게 첼시 백작부인과 백작 영애가 다가와서 감사 인사를 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공작부인. 제가 연회의 주최자인데도 능력이 부족해서 공작부인께 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오히려 백작부인의 연회에 제가 개입해서 죄송할 뿐이에요.”
“공작부인께서는 정말 사려가 깊으시군요.”
그때 알폰스가 클로에에게 다가갔다.
“부인.”
“어머, 알폰스.”
클로에는 진심으로 기쁜 듯한 얼굴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헤어진 지 몇십 분밖에는 되지 않았는데도 꼭 하루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들이 서로를 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애틋한 감정이 뚝뚝 떨어졌다. 단지 몇 분만 보고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모습을 본 백작 영애가 말했다.
“두 분이 정말 부러워요. 저도 그런 멋지고,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 줄 수 있는 짝을 만나고 싶어요.”
클로에가 물었다.
“어머, 데니슨 남작님과 워시번 소자작님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오늘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두 분은 제 기분을 배려해 주시기보다는 두 분의 마음만을 강요하시는 편이라서요. 저는 좀 더 배려심이 깊은 분을 만나고 싶어요.”
아까 본 두 남자의 모습을 생각하니 백작 영애의 평가가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았다. 클로에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백작 영애라면 꼭 훌륭하고 배려심이 깊은 분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네, 꼭 공작부인을 본받을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클로에의 칭찬에 백작 영애가 기쁜 듯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클로에와 알폰스는 그 자리를 떠났다. 허리를 다정하게 감싼 그의 손과 따뜻한 눈, 달콤한 말에 정신이 팔려서 클로에는 그가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갑작스레 주변의 풍경이 변한 것은 그들이 홀을 지난 직후였다. 연회가 한창이라 먹고 마시고 떠들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홀과 다르게 그들이 들어선 복도는 적막했다. 마나 등이 아닌 촛불 조명으로 되어 있어 사위가 어스름했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장막이 쳐진 발코니가 있었다. 클로에는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연회나 무도회 중 둘만의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는 장소였다. 과거 아리아나 바넷과 최초로 마주치게 된 곳이기도 했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이유를 짐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공간은 다른 용도로도 흔히 쓰이고는 했다. 특히 연인 간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자주 이뤄지는 곳이었다.
클로에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알폰스를 흘끗거렸지만, 그는 왜 그러냐는 듯 은은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다정한 미소가 어쩐지 얄밉게 느껴져서 클로에는 고개를 숙였다.
알폰스는 그녀를 능숙하게 발코니 중 하나로 이끌었다.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알폰스가 그런 그녀의 뺨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낮은 목소리로 물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그의 모습이 유난히 근사하게 느껴졌다.
“당신도 참……. 이곳은 당신의 가신의 자택이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알폰스는 부끄럽거나 하지 않은 거예요?”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괜한 것을 물었다. 클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관례적으로 파티 중의 발코니나 휴게실은 원래 이런 곳이며, 그것이 무례하거나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흔히 부부가 발코니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고 주로 사용하는 것은 혼외 교제 중의 연인들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역시 마음으로는 너무 부끄럽다. 남의 집 발코니에서 그런 일들을 하다니.
클로에가 얼굴을 붉힌 채 주저하자 알폰스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춰 주었다. 진한 입맞춤이 오고 간 뒤 그가 물었다.
“싫으십니까?”
“부끄러워요.”
클로에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폰스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던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조금 전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그녀의 모습.
하지만 그랬던 그녀에게는 이런 모습도 있다.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흐트러진 모습은 오로지 그에게만 보여 준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알폰스는 그녀를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가녀리고 부드러운 몸이 수줍음으로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너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으시다면 바로 멈추는 겁니다.”
클로에는 바로 깨달았다. 저건 함정이었다. 어떻게든 시작을 해서 그녀의 마음을 녹여 버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이미 저것과 비슷한 것을 그에게 여러 번 당해 봤기에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렇게 잘 아는데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이 턱선을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짜릿한 무언가가 올라와서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붉고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을 거부하기에 그는 너무나 매혹적이었고, 또 사랑스러웠다. 이 유혹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미소 지었다. 그의 길고 큰 손이 클로에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 위에 내려앉았다.
“응, 으음…….”
알폰스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클로에의 입가에선 달콤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너무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몸 또한 이렇게나 솔직해서, 그가 손과 입술을 놀리면 놀리는 대로 정직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런 그녀의 순진함이 오히려 얼마나 유혹적인지, 얼마나 그를 미치게 만드는지 그녀는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알폰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몇 개나 되는 붉은 자국을 만들면서 큰 손으로 그 잘록한 허리를 더듬어 내려갔다.
“아, 으응……. 알폰스…….”
손바닥 전체와 손가락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둥글게 매만지자 클로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의 종류가 달라졌다. 그녀의 목덜미에 애정이 가득 담긴 버드 키스를 몇 번이나 퍼부으며 알폰스는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클로에의 다리 사이에 가 닿았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속옷 위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자, 클로에는 두드러지게 움찔거리며 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아, 알, 폰스……! 으, 으응. 앗…….”
알폰스는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렇게나 단호하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클로에가, 뛰어난 사업가이자 한 가문의 안주인인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은 굉장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알폰스는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기를 숨기지 않으며 그녀의 속옷 위를 애무하던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가락은 끈끈한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별빛 아래에서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늘어지는 긴 실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렇게나 부끄러워하시더니, 벌써 이렇게 되었지 않습니까.”
알폰스는 그녀의 어깨를 더더욱 가깝게 끌어안곤,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 뜨거운 혀로 그 귀를 맛있다는 듯 핥으면서 그가 속삭였다.
“정말 부끄럽다면 이렇게 흥분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면, 혹시 부끄러울수록 더 흥분하시는 체질입니까?”
“그, 그런 게 아니…… 으응!”
클로에가 그의 품 안에서 파드득 떨었다. 이제 알폰스는 그녀의 귓불을 입으로 애무하며,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다른 손으론 그녀의 속옷 위를 괴롭히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속옷 아래를 파고들었다. 클로에의 까끌까끌한 음모를 넘어, 손가락이 갈라진 둔덕을 더듬었다. 속옷 밖으로도 끈적하게 묻어날 정도였던 액체는 속옷 안쪽에선 그야말로 밖으로 넘쳐 흐를 정도였다.
알폰스는 확신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흥분하고 있었다.
“순진하기만 하신 줄 알았는데, 이런 숨겨진 취향을 갖고 계셨다니……. 의외로군요.”
그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클로에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가린 채로 그의 애무와 더없이 자극적인 말들을 견디고 있었다.
“앗, 흐윽. 당신. 정마알……! 저는, 그런 게……!”
“너무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저는 부인께 어떤 결함이 있든 사랑하기로 맹세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설령…… 숨겨진 성벽이어도 말이지요.”
“아, 흐윽. 알폰스……!”
클로에는 견디다 못해 울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그 순한 올리브빛 눈으로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눈가에는 수치심으로 인한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욕망과 가학심에 위험한 선을 넘을 뻔한 알폰스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아차 했다.
그는 클로에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을 뿐, 그녀를 진심으로 화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알폰스는 얼른 클로에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 위에 몇 번이나 입 맞추며 그녀를 달랬다.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짓궂었습니다.”
마음이 섬세한 그녀이기에 알폰스는 그 강한 자존심도 접어야 할 때가 있었다. 황제에게도 굽히지 않는 그가 이렇게나 쩔쩔매는 상대는 이 세상에 클로에, 그녀 한 사람밖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튼튼한 콩깍지가 씐 탓일까, 알폰스는 자존심이 상하긴커녕 그런 점조차 귀엽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클로에는 마음이 섬세하지만 그 이상으로 다정했다. 알폰스가 진심을 담아 사과하자, 그녀는 더 이상 그것으로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정말 순진하다니까.’
그녀의 둥근 눈매에 다시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며 알폰스는 생각했다. 앞섶은 이미 팽팽할 대로 팽팽해져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잡아먹을 듯 진득하게 혀를 섞으며, 그는 앞섶을 끌러 자신의 분신을 꺼냈다.
“다리를 벌려 보십시오.”
입술을 떼고서 알폰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뚜렷한 흥분감이 실려있었다.
클로에는 그의 말대로 했다. 부끄럽지만, 드레스 자락을 제 손으로 꼭 쥐곤 다리를 조심스럽게 벌렸다.“이, 이렇게요?”
“옳지.”
그녀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 맞추곤 알폰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잠시 그대로 버티십시오.”
클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꼭 그녀가 예상한 대로 되었다.
“흐으윽!”
눈물 섞인 신음과 함께, 크고 묵직한 것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그 크고 굵은 것은 잔뜩 젖은 통로를 벌려 젖히며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클로에는 입술을 악물었다. 입구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팽팽해지는 것이, 파고드는 그의 물건이 잔뜩 달아오른 안쪽을 마찰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알폰스 역시 자신의 분신을 그녀의 따뜻하고 물기 가득한 내벽이 쫀쫀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가져도, 가져도 계속해서 가지고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가 열기와 욕망 어린 한숨을 토했다.
끝까지 들어온 그는 클로에의 코끝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 맞췄다. 그가 속삭였다.
“따뜻하군요.”
가볍게 미소 짓는 그의 입술. 그의 진홍빛 붉은 눈동자. 그의 낮은 목소리…….
클로에는 어쩐지 뱃속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분명 아까 전만 해도 그에게 화를 냈는데, 지금 자신의 몸은 더없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지조가 없다니.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도저히 그에게 진지하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클로에가 그의 말에 흥분하면서 뱃속이 요동치는 것은 알폰스 역시 느꼈다. 안 그래도 쫀득하게 그의 물건을 감아 오던 그녀의 안쪽이 쥐어짜듯 그의 것을 조였다. 더없이 흥분한 질벽이 요동하며 알폰스를 휘감았다.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이라는 듯이.
그녀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알폰스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조여 오는 그녀에게 화답하듯 허리를 당기더니 크게 밀어 넣었다.
“앗, 하아!”
클로에가 놀란 듯이 몸을 떨었다. 그녀가 다시 가녀린 손으로 알폰스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그 손이 좋았다. 그 손이 전해 주는 온기가 좋았다. 알폰스는 진한 만족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하으, 아! 앗, 흐윽. 알, 알폰…… 스……!”
클로에가 헐떡였다. 바닥 위로 후두둑 하고 그녀의 액체가 떨어졌다. 그녀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전신을 강타하는 듯한 쾌감에 다리에 자꾸만 힘이 풀려서 도저히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알폰스는 그녀의 몸을 들어, 난간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탐했다.
서늘한 밤공기와 하얗게 내리는 별빛이 자아내는 고요를 퍽― 퍽― 하는 음란한 소리가 갈랐다.
클로에의 몸이 사정을 재촉하듯 알폰스의 물건을 쥐어짰다. 마치 그의 액체를 원하는 것 같았다. 알폰스는 그 사실에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아흐, 하으, 아……!”
마침내 클로에가 한발 앞서 절정에 올랐다.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몸이 격동적으로 꿈틀거리며 알폰스의 중심을 쥐어 짜내자, 그 역시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안쪽에 모든 것을 쏟아 냈다.
“하아, 하아, 하아…….”
클로에는 난간에 걸터앉아 알폰스에게 기댄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잔잔한 여운이 지나가고, 아직도 아랫배를 채우고 있는 그의 물건이 느껴졌다. 그가 쏟아 낸 따뜻한 액체도.
그리고 뒤늦게 이곳이 알폰스의 가신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클로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별빛 아래에서 빛났다.
귓가에는 알폰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가 괜찮다는 듯이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결국, 또 그가 바라는 대로 되어 버렸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면 바로 멈추겠다’는 그의 말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이건 다 알폰스 때문이야…….’
클로에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생각했다.
그의 달콤한 말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준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외면하려고 노력하면서.
* * *
“그 소문 들었어요?”
첼시 백작저의 연회장 한구석, 삼삼오오 모여 잡담과 가십을 즐기고 있던 영애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요즘, 황자 전하께서 황궁에서 두문불출하신다고 해요. 사교 행사에 참석한 지도 아주 오래되셨다고 하더군요. 이 연회에도 초대를 받으셨지만 거절하셨다고 들었어요.”
“정말인가요? 전하께서는 파티를 정말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저도 전하를 뵌 지 꽤 되었어요. 예전에는 제가 가는 곳마다 황자 전하께서 계시고는 했는데.”
황자 아서는 어린 영애들 모두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아서에 대한 걱정이나 나타나지 않는 이유 등에 대해 재잘댔다.
“걱정이네요.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어야 할 텐데요.”
“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 걸까요?”
영애들은 각자 이런저런 가설을 제시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한편, 그들이 그러는 동안에도 아서는 황궁에 있었다.
그는 최근 꼭 필요한 일정만을 소화하고 대부분 시간을 혼자 지내는 중이었다. 그가 황궁에서 나오지 않은 지가 벌써 거의 몇 주 정도가 지났다.
활동적인 그가 난생처음으로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해도 계속 클로에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것뿐이면 나았을 텐데. 머릿속에 클로에가 떠오르면 어김없이 지난번에 보았던 그녀의 행동이 따라오곤 했다. 그녀가 알폰스에게 보였던 시선, 표정, 그리고 그녀의 ‘정말 좋아해요.’라는 말.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 눈빛이 아서 자신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말이 자신을 뜻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계속 그녀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계속 그녀와의 관계에서 우위는 자신이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좋아하는 쪽은 그녀일 것이라고, 자신은 그저 그녀의 머리 위에서 그녀를 저울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 빠져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정신 차리고 보니 그녀에게 온통 흠뻑 빠져 있었다.
몇 년 전, 클로에가 아직 바텐베르크가 아니었던 시절. 그녀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해 올 때의 모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만일 그때 그녀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진심으로 대해 주었더라면 달랐을까. 만일 그때 그녀의 마음을 받아 주었더라면 지금 그녀는 바텐베르크가 아닌 자신의 것이었을까. 후회가 숨이 막힐 정도로 아서의 마음을 옥죄었다.
지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아서는 그럴 수 없었다. 클로에의 알폰스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이나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허망하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일에도, 심지어 그렇게 좋아했던 놀러 다니는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경연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정을 없애 버렸다. 특히나 바텐베르크 공작 부부가 참석할 것 같은 무도회나 연회는 되도록 피했다.
그가 모든 일정을 거부하니, 절친했던 친우들에게서 오는 연락 역시 점차 뜸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서 그는 제국의 황자였고, 클로에와 알폰스는 공작 부부였다.
아서는 대부분의 연회를 피했으나 단 하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국가적 행사인 황제 탄신 축하 연회였다.
황자로서 자신의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서는 어쩔 수 없이 연회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클로에와 알폰스를 만났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언제나와 같아 보였다. 클로에는 아주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고, 알폰스는 그를 향해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서로를 향해 진심 어린 애정이 담긴 시선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단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서는 가슴속이 찢기고 갉아 먹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클로에는 자신에게는 불필요할 정도로 한껏 예의 차린 모습만을 보여 주지, 저렇게 알폰스에게처럼 진심으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이 저 멀리 가 버린 뒤로도 아서의 시선은 그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두 사람을 아예 안 보고 지낼 때에는 차라리 나았는데. 저 두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으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클로에의 저런 웃음을 저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알폰스를 향해 증오심이 솟구쳤다.
“……!”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서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알폰스가 클로에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클로에는 놀라고, 부끄러워했지만 그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줍게 눈을 감으며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아서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빠른 발걸음으로 공작 부부를 향해 다가갔다. 입맞춤 뒤에도 서로에게 푹 빠져 있던 공작 부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자 전하?”
알폰스에게 안겨 있던 클로에가 그의 팔에서 벗어나며 물었다. 아서는 그녀의 의아해하는 얼굴을 흘끗 보았다.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 어쩐지 밉살스러웠다.
아서는 클로에를 무시하고 알폰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알폰스 바텐베르크, 결투다. 나와 정정당당하게 명예를 걸고 겨루자. 설마 겁쟁이처럼 도망치지는 않겠지?”
“네에?”
클로에로서는 완전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알폰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도중에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직 결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피를 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상대는 황자였다. 알폰스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서 황자는 어릴 적부터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들었다. 그런 상대와 목숨을 걸고 하는 검술 싸움이라니, 너무 위험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마 무슨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부디 그 말씀은 재고해 주세요.”
클로에가 아서를 말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오히려 역효과였다. 클로에가 아무리 진심을 담아 말릴수록 아서의 가슴속 불길은 거세져만 갔다.
‘저 공작 자식이 걱정돼서 이러는 거지?’
아서는 이를 부득 갈았다.
알폰스는 걱정하는 클로에를 안심시켰다. 그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만일 알폰스가 다치기라도 하면…….”
원래 알폰스는 남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 만일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화를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신을 걱정하는 아내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가 말했다.
“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겁니다. 3합 만에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아서를 향해 몸을 돌렸다. 클로에에게 보여 준 따스한 미소는 온데간데없는, 한없이 차가운 얼굴이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는 기가 막혔다.
‘뭐? 피 한 방울 안 흘려? 3합 만에 끝내?’
그는 자신의 검술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지만 검술과 사냥만은 꽤 즐겼다. 그의 검술의 재능은 괴물 같다고 평가받을 정도라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반면 알폰스가 검을 쓰는 것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사냥 대회에도 잘 출전하지 않았고, 그의 영지는 국경을 지키는 구역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의 머릿속에서 알폰스는 무관이라기보단 문관에 가까웠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알폰스가 정치적으로 유능하다는 것만은 아서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검술만은 그가 더 자신이 있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결투는 이 자리에서다.”
그가 자신이 서 있는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클로에는 한 번 더 기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황제의 탄신 축하 연회가 한창인 황궁의 연회장에서 결투를 벌인단 말인가?
하다못해 첼시 백작가의 연회에서 난리를 피웠던 소자작과 남작도 연회장이 아닌 정원에서 결투를 하기로 했었는데 말이다.
아서와 알폰스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싸움의 한쪽은 황자이고, 한쪽은 공작인 탓에 아무도 그들을 말리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몇 명의 사람들이 경비병을 불러왔다.
“황자 전하, 이곳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곳은 황궁이고 지금은 황제 폐하의 탄신 축하 연회 중입니다.”
“지금 경비대장 주제에 황자인 나한테 명령하는 거냐? 다 꺼져 버려. 내 앞을 가로막으면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은 전부 내가 지겠다.”
아서가 하도 고집을 피우니 경비병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연회장 한복판이 아니라 정원 같은 데라도 가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아서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것으로는 이길 수 없다면 검술로라도 이겨야겠어. 그리고 공작이 패배하는 순간을 많은 사람들의 눈에 똑똑히 담아 주겠어.’
하지만 제국법상, 경비를 제외한 참가자들은 연회나 무도회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 기사들조차 연회에는 검을 가져가지 않거나 예장용 가검을 착용한다.
물론 지금 아서와 알폰스가 검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서는 등 뒤의 테이블로 손을 뻗어 미트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식기 중 제일 크고 긴 나이프였다.
“무기를 들어, 공작.”
아서가 잘생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진검이 아닌 식사용 나이프여도 상관없었다. 아서는 그만큼이나 자신의 검술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 아서를 차가운 붉은 눈동자로 노려보던 알폰스는 따라 무기를 집었다.
그런데, 그가 집어 든 것은 칵테일 포크였다. 하다못해 나이프도 아닌, 포크 중에서도 작은 축에 속하는, 겨우 한 뼘밖에 되지 않는 포크.
그 모습을 본 아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대체……! 어디까지 날 무시하는 거냐!’
질투와 증오로 눈이 멀어 있던 아서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결투의 심판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무작정 알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자식!”
아서가 알폰스를 향해 날 선 미트 나이프를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본 클로에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채앵!
정확히 3합 만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아서의 나이프가 날아갔다.
그의 손을 벗어난 나이프는 높이 날아가 저만치의 테이블에 꽂혔다. 테이블에 깊게 박힌 나이프의 몸체가 부르르 떨었다.
아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나이프가 날아간 것도, 상대가 칵테일 포크를 들고 있었다는 것도, 이 모든 일이 단 3합 만에 이루어진 것도, 자신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도.
자신이 연회장 한복판에 드러누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알폰스는 아서의 목 바로 옆에 칵테일 포크를 박아 넣었다.
‘경고 차원에서 약간의 피를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 여린 아내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피를 본다면 여린 아내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알폰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는 얼음처럼 싸늘한 눈으로 황자에게 경고성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클로에에게로 걸어갔다.
“아, 알폰스! 괜찮아요? 다친 데는요?”
클로에가 창백한 얼굴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평소의 차분한 모습은 어디 가고, 걱정과 당황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사실이 사랑스러워 알폰스는 픽 웃고 말았다.
“보시다시피.”
그가 대답했다. 클로에는 혹시나 작은 상처라도 있을까 봐 알폰스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친 곳은커녕,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머리카락이 좀 흐트러지고 예복에 약간의 주름이 생긴 것 말고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이대로 계속 연회에 참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한 클로에는 진심으로 안도한 얼굴로 알폰스를 끌어안았다.
“아,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했어요, 알폰스.”
수줍음이 워낙 많아서 사람들 앞에서의 스킨십을 꺼리는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먼저 끌어안았다. 정말 많이 걱정하고, 많이 안도한 것이 분명했다.
알폰스의 마음속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마음을 졸이게 한 것은 미안했지만, 이런 반응을 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아내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다가 그녀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봤어? 방금 바텐베르크 공작이 황자 전하를 순식간에 제압한 거…….”
“믿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공작 각하라고 해도 황자 전하를 이기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포크가 거의 손잡이까지 바닥에 박혔어요!”
황자의 검술 실력에 비해 알폰스의 실력은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한편 아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반쯤 벌리고 그대로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졌어? 바텐베르크에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나 질투하고 증오하는 공작에게, 클로에를 빼앗아 간 공작에게 검술로마저 패배했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그럴수록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수군거림만 더욱 선명하게 들릴 뿐이었다.
아서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아서!”
다른 곳에 있던 황제가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왔다. 그의 곁에는 십수 명의 경비대원들도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네가 황궁에서 이런 행패를 부려? 그것도 내 생일 연회에서!”
멍한 얼굴로 누워 있던 아서를 경비대원들이 일으켜 주었다.
황제는 아주 노발대발했다. 평소 소탈한 성격의 그가 그렇게 화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황궁에서, 그것도 황제의 탄신 기념 연회에서 결투를 하다니. 그것도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아무리 결투가 존중받는 것이며 귀족들의 권리라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제가 주름진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쳤다.
“여태까지처럼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내가 명을 거둘 때까지 황자 궁에 무기한 연금이다! 정말로 믿을 수가 없구나. 네가 바텐베르크 공작한테 이런 짓을 해!”
“…….”
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아서가 경비대원들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심란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알폰스와 클로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공작. 그리고 공작부인.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라는 게 아둔해서 그대들에게 큰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구려. 어미 없는 것이 가여워서 어릴 적부터 오냐오냐하며 응석을 전부 받아 주었더니, 설마 이렇게까지 망나니가 될 줄이야. 그대들에게는 내가 진심으로 면목이 없소. 전부 내가 부덕한 탓이오.”
황제는 진심으로 미안하고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나이 든 노인이 자식 문제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클로에는 안타깝게 느껴졌다.
‘제국 역사에 손꼽힐 정도의 현군(賢君)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훌륭한 황제도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진 클로에는 순간 상대가 황제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클로에는 황제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클로에가 진심을 담아 위로했다.
“자책하지 마세요, 폐하. 폐하께서 부덕하신 탓이 아닙니다.”
“내 아들의 잘못이니, 잘못 키운 나의 책임이지.”
“부디 그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저도 공작님도 폐하를 원망하지 않아요.”
짙은 그늘이 졌던 황제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부인께서는 정말로 인자하고 자비로우시군. 그대야말로 제국의 귀부인들의 귀감이오. 공작부인이라는 지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구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대와 같은 현명함을 내 아들이 반의반만이라도 닮았더라면 나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 녀석이 부인과 같이 훌륭한 반려를 만나야만 할 텐데…….”
황제의 찬사에 클로에가 무척 부끄러워했다.
그녀의 위로 덕에 황제의 얼굴에서 슬픈 기색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의 황금빛 눈에 엄격한 빛이 서렸다.
황제가 알폰스에게 물었다.
“말해 보시오, 공작. 내 아들이 무례를 끼친 당사자가 그대이니 그대에게 묻겠소. 황자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그대가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내 최대한 그렇게 해드리리다.”
그 말을 들은 알폰스는 클로에를 한 번 보았다. 그녀의 의아한 눈이 알폰스와 마주쳤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있었다. 황자가 다시는 클로에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 클로에와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먼 곳으로 사라져서, 그녀와 그의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것.
알폰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깊게 논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구려. 이번 일은 무척 미안했소, 공작.”
“아닙니다.”
솔직히 황자가 자신에게 나이프를 휘두르는 것은 알폰스에게 화가 날 일이 못 되었다. 황자는 자신에게 털끝만큼도 피해를 주지 못했고, 피해를 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황자가 클로에에게 접근하고 더러운 감정을 품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감정적으로 화가 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황가에 빚을 지우게 되었다는 사실은 만족스러웠다. 이 일을 잘 활용하면 공작가의 큰 이득으로 끌고 갈 수 있을 테니까.
황제는 알폰스와 클로에에게 무척이나 미안해하다가, 이 일에 대해 원망의 말을 담지 않는 그들에게 고마워했다. 황제는 알폰스와 황자의 처분 문제를 추후에 논의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한편, 황자 궁에 감금된 아서는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알폰스를 망신 주고, 그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는커녕 slakpw오히려 자신이 공개적인 망신을 당해 버렸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에의 눈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