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의 50가지 티 레시피 5권
목차
29장
30장
31장
32장
33장
34장
35장
29장
아서가 산뜻한 태도로 말했다.
클로에는 잠시 고민했다. 평소 그녀는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최대한 피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에게 빚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자 아서는 가슴속에 희망의 빛이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역시! 쉽게 넘어올 줄 알았다니까. 클로에는 나를 좋아했었으니까 말이지.’
출발하기 전, 클로에는 엘리에게 방금 있었던 일과 아서 황자와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폰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모습을 본 아서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놈의 알폰스, 알폰스!’
하지만, 뭐. 상관없었다. 곧 클로에는 자신을 좋아하게 될 테니까. 그 재수 없는 공작 놈이 아니라.
아서는 클로에를 수도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녀와 식사를 하며 아서는 자신의 모든 유혹 기술을 아낌없이 써먹었다. 온갖 미사여구와 아부의 말을 총동원하며 그녀를 꼬드기려고 노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여태까지 아서가 마음먹고 유혹한 여성 중 넘어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온갖 작업용 멘트에 클로에는 거의 내내 “네, 네.” 정도의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아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클로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황자 전하를 조금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응?”
“가끔 제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 형태는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황자 전하는 좋은 분이세요.”
이건 진심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오늘 그에게 도움을 받았지 않은가.
아서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그의 행동이 순전히 선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선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저를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 방식에도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회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말은 결국 ‘부담스럽게 만들지 마라’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를 아서가 아니었다. 아까만 해도 그녀를 순식간에 꼬드겨 낼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상대를 노골적으로 유혹하기가 뭐했다.
어버버 하던 아서가 말했다.
“……내,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니 다행이네. 그럼 클로에, 우리 친구라도 하지 않을래?”
“친구라고요?”
“그래, 친구.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친구라도 하자. 응?”
클로에가 악의 없이 말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어떻게 감히 전하의 친우가 될 수 있겠어요.”
“아니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전혀 불경하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 친구 하자, 응?”
한참이나 이어진 회유 끝에 아서는 가까스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었다. 거의 반강제적인 것이었지만 그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친구라도 하자는 약조 이후, 좀 더 대화를 나누면서 아서는 고민했다. 클로에를 어떻게 하면 눈에 안 띄게, 노골적이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유혹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좋아, 빠르게 유혹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 방식을 바꾸자. 천천히, 부드럽게 꼬드기는 거야. 친구로 시작해서 서서히 친밀감을 쌓은 뒤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거지.’
아서는 생각했다.
‘그래, 이거라면 할 수 있어. 예감이 좋은걸. 이 방법이라면 클로에를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어.’
그렇게 결심한 그는 작업용 멘트 대신 평범한 화젯거리를 꺼냈다. 클로에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그녀와 친해지겠다는 계산이었다.
과연, 평범한 화제가 나오니 클로에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에 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화제가 있었다. 바로 알폰스가 클로에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던 작년의 연회였다.
반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사건에 대한 사교계의 관심을 꺼질 줄을 몰랐다. 아직도 사람들은 때가 됐다 싶으면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고, 그 사건으로 한참을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심지어 알폰스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는가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각축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때의 연회에는 아서 역시 있었다. 아서는 그 사건을 떠올리면 여전히 화가 치밀었다.
“그때 그건 알폰스가 좀 심했지. 클로에 너에게도 민폐잖아. 공개 고백이라니 네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어?”
괜한 심술이 난 아서는 클로에를 걱정해 주는 척하며 말했다.
그러나 클로에의 반응은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런 공개 고백을 당해서(?) 오랜 시간 화제에 오르내리는 것이 소심한 클로에로서도 힘들었을 법한데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요, 전 괜찮았어요.”
아서는 반감이 들었다.
‘대체 왜 그 자식을 이렇게까지 감싸는 거지?’
뱃속에서 알폰스에 대한 적대감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도저히 해소되지가 않았다.
아서는 어떻게든 클로에의 입에서 알폰스에 대한 비난이 나오는 것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클로에의 대답을 유도했다.
“게다가 그 녀석은 무뚝뚝해서 별로 좋은 남자는 아니지. 역시 남자라면 뜨겁고 자상해야 하지 않겠어. 나처럼. 그렇지 않아? 클로에.”
하지만 클로에는 조금도 아서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요, 갈수록 자상해지고 있는걸요. 겉은 그렇게 보여도 사실 속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집착이 너무 심해서 짜증 나지 않아?”
“아니요, 그런 점도 귀엽다고 생각해요.”
뭔가…… 이상했다.
이건 평소 아서가 유부녀와 만날 때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누구에게나 같이 사는 배우자에게 불만 몇 개쯤은 있는 것이 당연했다. 아서가 걱정해 주는 척 운을 띄우면 누구나 그동안 쌓이고 쌓여 왔던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술술 말하고는 했다.
그렇게 함께 배우자를 욕하고 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아서와 상대와의 관계는 부쩍 친근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아서로서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상대에게 있어 ‘힘든 결혼 생활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여태까지 단 한 명의 유부녀에게도 예외가 없었던 이 수법이 클로에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꼭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설마…….’
아서는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설마, 알폰스만 클로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면해 왔던 두려운 진실이 코앞까지 닥쳐와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클로에, 너…… 알폰스를 좋아해?”
클로에는 여태까지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발갛게 물들었다.
아서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클로에는 웃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수줍음과 진심 어린 행복감이 번져 가는 것을 그는 보았다.
“네.”
그녀의 얼굴이 마치 반짝이는 것 같다고 아서는 생각했다.
“정말로 좋아해요.”
그때였다. 갑작스레 식당 특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순간 클로에와 아서의 감정이 교차했다.
“알폰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바로 알폰스였다. 다급하게 온 듯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예의를 중시하는 그가 노크도 없이 남의 특별실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서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알폰스는 누군가를 찾는 듯이 다급하게 눈을 굴렸다. 그런 그의 선명한 붉은 눈동자는 한 곳에서 멎었다.
“부인.”
클로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클로에가 알폰스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는 모습이 아서의 눈에는 몇 배는 느리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 모습을 하나하나 전부 볼 수 있었다. 알폰스를 향해 달려 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그녀의 눈동자가 얼마나 큰 반가움을 담고 있는지,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럽게 웃음 짓는지…….
“하.”
아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클로에는 아서가 그녀를 폭력배에게서 구해 주었을 때보다도 몇 배나 더 반가워하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알폰스 바텐베르크라는 자를.
클로에는 알폰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알폰스 역시 그런 그녀의 등을 팔로 휘감았다.
“제가 보낸 전언을 듣고 오신 거예요?”
그녀가 행복하게 눈을 휘었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에게 속삭였다.
“예.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바로.”
이곳 식당으로 출발하기 전 엘리를 통해 알폰스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알폰스의 눈동자에 클로에가 가득 담겼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했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기사도 없이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폭력적인 공갈범과 마주치지를 않나, 누가 구해 주긴 했지만 그 상대가 다른 자도 아니고 아서 황자이질 않나.
알폰스는 클로에 몰래 시선을 옮겼다. 저만치에 앉아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서 황자를 향해서였다.
화가 났다. 클로에와 단둘이 있었던 자가 다른 남자였더라도 화가 날 텐데 하물며 저 아서 황자다.
클로에가 과거에 아서를 좋아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서와 몇 번이나 마찰을 빚었던 알폰스는 그를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방금 클로에에게 보였던 부드러운 눈빛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시선으로 그가 아서를 노려보았다.
‘구해 준 것을 핑계로 아내를 어떻게든 해 볼 심산이었겠지. 저치가 아무 의도 없이 아내를 도와주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알폰스가 말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마침 식사도 끝난 참이었어요. 돌아갈 채비를 할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클로에는 아서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살펴 주신 덕에 오늘 매우 즐거웠습니다, 전하.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친구’에게 건네기에는 지나치게 예의 바른 인사였다.
아서는 무척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가지 말고 조금만 더 있으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저쪽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알폰스 때문이었다.
결국 아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
“아, 아니야. 그럼 들어가 봐, 클로에. 다음에 보자.”
하지만 클로에는 그의 다시 보자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아서와는 대조적으로, 몸을 돌려 나가는 클로에의 발걸음에는 단 한 점의 미련도 없었다.
알폰스와 함께 식당을 나선 클로에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알폰스는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혹시 그 황자 놈이 아내에게 허튼짓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황자와…… 아니, 황자 전하와 함께 있으면서 무슨 일은 없었습니까?”
클로에의 착한 마음씨를 배려해 호칭을 수정하며 알폰스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가 대답했다.
“음, 별일 없었어요. 그냥 식사하면서 잡담을 했을 뿐이에요. 아! 황자 전하께서 친우가 되어 달라고 하셨어요.”
“친우…… 말입니까?”
알폰스는 뜨거운 무언가를 삼킨 것 같았다.
친우라니, 그자가 정말로 순수한 의미의 친구를 원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필히 클로에와 가까워지려는 수작이었겠지.
“그래서 수락하셨습니까?”
“네.”
클로에가 정직하게 대답했다.
알폰스는 골치가 아팠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순수하고 마음 약한 아내가 누군가가 친구가 되어 달라고 다가왔을 때 거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순수함과 선함 역시 사랑했지만 이럴 때만은 그녀의 순수함이 곤란했다.
알폰스는 옆 좌석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자는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낌새가 좋지 않습니다.”
“낌새가 좋지 않다고요……?”
알폰스는 잠시 고민했다. 이 말이 아내의 순수한 마음에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자가 부인을 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부인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클로에는 알폰스가 걱정을 하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자신이 충격받을까 봐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놀랍기는 해도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클로에는 바보가 아니다. 무엇보다 전생에는 연애 경험도 있었으니만큼 그 정도의 촉은 있었다.
클로에는 아서가 자신을 진심으로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꼬드기고 싶어 하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이 알폰스의 말로 확신이 된 것이다.
“그랬군요. 그럼 다시는 황자 전하와 독대하지 않을게요. 걱정시켜 드려 죄송해요.”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클로에가 자신의 말에 조금도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자 알폰스는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세상 누구보다도 그를 믿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눈치가 좋은 알폰스는 그것을 금방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태도에서 강한 애정과 신뢰가 묻어났다.
걱정으로 굳어 있던 알폰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믿어 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정말 완벽한 아내다. 이 이상 훌륭한 반려를 내가 찾을 수 있을까.’
그는 클로에의 어깨를 끌어당겨 그녀의 이마에 몇 번이나 입 맞췄다. 클로에가 행복한 듯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부인의 개인 경호를 강화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과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는 것은 결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알폰스의 말이 맞아요. 호위받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 안전에 소홀했어요. 죄송해요.”
물론 클로에에게는 호위기사가 따로 있었지만 그녀는 외출할 때 툭하면 기사를 떼어 놓고 나가곤 했다. 자유롭게 외출했던 전생의 기억이 있던 그녀는 번거로운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부터는 호위를 귀찮아하지 말고 안전에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알폰스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는 클로에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부인께서 죄송해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가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알폰스는 좀 더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되도록 그녀가 늘 자신의 시야 안에 있었으면 했다. 언제든지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 쪽에서도 호위를 붙여 놓는 것이 좋겠군. 그녀가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게.’
황자를 비롯한 엄한 놈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알폰스는 클로에에 대한 보호(감시)의 의지를 다졌다.
다음 날이었다. 클로에는 오랜만에 공작저에서의 작은 애프터눈 티타임을 준비했다. 손님은 제일 친한 귀부인들을 위주로 세 명만 불렀다.
이번의 손님들은 포트넘 부인과 로네펠트 부인, 타임 부인이었다.
클로에의 제일 친한 친구이기도 한 포트넘 부인은 어느새 만삭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한때는 포트넘 부인이 임신을 한 것이 부럽기도 했는데.’
클로에는 생각했다.
결혼 뒤 2년이나 임신을 못 했다는 사실 때문에 좋은 아내가 아니라고 비난을 받자 클로에는 임신을 한 포트넘 부인이 부러워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녀가 임신을 할 수 없든, 할 수 있든 알폰스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그녀를 감싸기 위해 그는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것조차 감수하고 자신의 마음을 밝혔으니까…….
그때의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때의 일은 무척 놀랍고 부끄럽지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어쨌든 클로에는 친한 친구인 포트넘 부인의 임신 과정을 지켜봐 왔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임신은 늘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임신을 하면 소중한 생명과 함께 수많은 몸의 변화와 부작용이 따라온다. 요즘 포트넘 부인이 고생하고 있는 부종 역시 그중 하나였다.
‘다리가 많이 부어서 괴롭다고 했었지. 내가 준비한 차가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한 클로에는 하녀들을 불러 미리 준비해 둔 차를 가져오게 했다. 이번에 그녀가 준비한 차는 두 종류였다. 바로 홍차와 허브 티였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포트넘 부인을 위한 허브 티를 준비했어요.”
“과연 바텐베르크 부인! 이번에는 어떤 차인지 궁금하네요.”
포트넘 부인이 진심 어린 관심을 내비치며 말했다. 안 그래도 임신한 뒤부터 홍차를 마시지 못하게 된 그녀는 클로에가 추천해 준 다양한 허브 티를 맛보고 있었다.
클로에의 지시에 따라 하녀가 포트넘 부인의 잔에 차를 따라 내었다.
그것은 정말로 독특한 수색이었다. 홍차의 오렌지빛 수색보다도 훨씬 붉은 선명한 적색. 어찌나 붉은지 맑고 투명한 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고혹적인 수색에 귀부인들이 감탄했다.
“어머! 정말 아름다워요.”
“어떻게 이런 수색의 차가 있을 수 있죠? 꼭 피 같아요.”
“이 차는 이름이 뭔가요?”
클로에가 설명했다.
“히비스커스 차예요. 남방 국가에서 자라나는 히비스커스의 꽃을 말려 만든 허브 티예요. 맛과 향, 영양을 위해서 로즈힙과 베리를 추가로 블렌딩해 보았어요.”
“직접 만드신 차였군요!”
히비스커스는 열대 지방의 식물로 그 꽃의 선명한 붉은빛만큼 우려낸 찻물 역시 진한 붉은빛을 띤다.
“히비스커스는 피로 해소와 부종 해소에 효과가 있어서 후기 임산부에게 아주 좋아요. 몸에도 좋고 맛도 좋도록, 포트넘 부인을 위해 특별히 블렌딩해 보았어요.”
클로에가 포트넘 부인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 포트넘 부인은 진심으로 감동한 것 같았다.
“어머…… 바텐베르크 부인. 저를 위해서 차를 만들어 주시다뇨! 정말 감동적이에요.”
“뭘요. 이 차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정말 잘 마실게요. 이렇게 예쁜 색깔의 차는 무슨 맛이 날지 궁금한걸요.”
“입맛에 맞으셔야 할 텐데요.”
히비스커스 차의 선명한 붉은색은 도무지 맛이 상상되지 않았다. 포트넘 부인은 기대감을 품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 결과는…….
‘……!’
흔히 차의 맛은 커피나 주스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연하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히비스커스는 다르다. 히비스커스의 맛은 그 수색만큼이나 강렬하다.
히비스커스 차에서는 몹시 새콤한 맛이 난다. 클로에는 이 새콤한 맛에 적당한 단맛과 영양을 첨가하기 위해 로즈힙과 다양한 베리류를 블렌딩한 것이다.
히비스커스는 이러한 특유의 강렬한 수색과 맛 때문에 온갖 블렌딩 허브 티나 인퓨전에 들어가기도 한다. 특히 새콤달콤한 과일 위주의 블렌딩이라면 정말 예사로 들어간다.
블렌딩 허브 티나 인퓨전을 우렸을 때는 수색이 선명한 붉은빛이 되고, 맛이 새콤하다면 전부 히비스커스가 들어간 블렌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트넘 부인이 기뻐하며 말했다.
“차가 정말 새콤달콤해요. 꼭 향긋한 과일 주스 같아요!”
“저도 한번 마셔 봐도 될까요?”
“저도요!”
그녀의 반응에 호기심이 동한 로네펠트 부인과 타임 부인도 클로에 특제 히비스커스 차를 한 잔씩 맛보았다.
호응은 무척 좋았다.
“홍차도 좋지만, 홍차랑은 다른 매력이 있네요.”
“차에서 이런 새콤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포트넘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빨간색 차의 맛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빨간색의 맛은 새콤달콤하네요.”
샌드위치와 향긋한 차, 달콤한 티 푸드를 즐기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타임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공작부인. 제가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에요. 황자 전하께서 공작부인께 관심이 있으시다는 데 사실인가요?”
“아, 그 소문은 저도 들었어요.”
“저도 궁금했어요. 진짜인가요?”
그렇게 묻는 귀부인들의 눈에는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클로에는 언젠가 이런 질문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상대는 제국의 황자였다. 그런 그가 여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티 하우스에 매일 들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는데 아무런 소문이 나지 않으면 이상하다.
클로에로서는 대답하기가 곤란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아서가 진짜로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는 심증만 있지 확신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남의 마음을 우스갯거리로 삼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 상대가 과거의 클로에의 마음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낸 인물이라 하더라도.
클로에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잘 알더라도, 당사자가 먼저 밝히기 전에 제가 먼저 밝히기는 곤란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사생활이니까요.”
“어머,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공작부인. 괜한 걸 여쭤봤네요. 죄송해요.”
“저도 죄송해요, 공작부인.”
“저도요.”
귀부인들이 차례대로 사과를 했다.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황자 전하의 감정은 잘 모르지만, 제 감정은 확실히 알고 있어요. 만에 하나, 어떠한 신사분이라도 제게 관심을 보여 주신다면 그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가 보답해 드릴 수는 없을 거예요. 저는 혼외 이성 교제를 할 생각이 없거든요.”
클로에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은 알고 있었다. 클로에는 유약한 듯하지만 강단이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곤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황자 전하인데.’
귀부인들이 생각했다.
그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제국에서 아서 황자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알폰스의 혼인 전에는 두 사람의 인기가 비등하거나 알폰스가 약간 더 높은 정도였다. 하지만 혼인 뒤 알폰스가 이성의 모든 종류의 접근을 매몰차게 거절하기 시작하자 연애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의 관심은 아서를 향해 더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아서 황자는 현재 제국에서 최고의 애인감으로 불리는 남자였다. 많은 여성들이 그의 관심 한 번, 눈길 한 번이라도 끌어보고자 애를 썼다. 광장에서는 아서를 남자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연극이 상영되었다. 어린 소녀들은 잘생기고 멋진 황자님과의 사랑을 소망했다.
‘만일 황자 전하가 내게 관심을 가져 주신다면 난 행복해서 날뛸 텐데……. 공작부인은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걸까?’
타임 부인은 생각했다.
공작부인은 자기도 모른다고 대답을 회피했지만 타임 부인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사교계에서 아서 황자가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걸 공작부인이라고 모르지는 않을 테지.’
타임 부인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공작부인을 보았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그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그런 걸까? 각하도 정말 근사한 남자이시니까.’
바텐베르크 공작이 공작부인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네 살짜리 어린애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공작부인이 대단해 보였다. 제국에서 최고로 사랑받고 있는 두 남자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니!
‘정말 부럽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라니.’
그때 로네펠트 부인이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은 정말 대단하세요. 황자 전하 같은 멋진 분 앞에서 그렇게 초연하실 수 있다니요.”
“아니에요. 전하께서 제게 관심이 있으신지도 확실치 않잖아요.”
클로에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때 타임 부인은 보았다. 순간 로네펠트 부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런데, 혹시 공작부인께서 혼외 연애를 하지 않으시려고 하는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네?”
“왜, 그렇잖아요. 공작부인은 미인이고 상냥하신 데다 지적이기까지 하시니까 마음만 먹으면 멋진 남자들을 골라가며 만나실 수 있을 텐데요.”
제국에서 혼외 이성 교제는 전혀 흠이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만큼 로네펠트 부인의 이 질문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공작 각하 이상으로 멋진 남자는 찾을 수 없겠지만요. 아, 혹시 그 때문인가요? 공작 각하 덕분에 눈이 너무 높아지셔서?”
“아니, 그건……. 과찬이세요.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신걸요. 그리고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클로에가 애써 대답했다. 하지만 뺨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후작부인이 또 시작이네.’
타임 부인이 생각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이 순진하고 수줍음이 많은 공작부인을 놀려 먹는 걸 즐긴다는 것은 그들과 친한 사람들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로네펠트 부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럼 뭔가요?”
“그게…….”
“정말 궁금해요. 얼른 말씀해 주세요.”
로네펠트 부인이 재촉했다. 클로에는 이미 뺨을 넘어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사실 로네펠트 부인은 내심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혼외 이성 교제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 말이다.
바텐베르크 공작이 공작부인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널리 공표되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공작부인 역시 공작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클로에와 각별한 관계의 사람들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중 세 명이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이었다. 로네펠트 부인은 워낙 눈치가 빠르고 클로에와 사이가 좋아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이렇게 클로에의 본심을 꼬치꼬치 캐묻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를 놀리기 위해서였다.
‘당황한 공작부인은 정말 귀엽단 말이야.’
로네펠트 부인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클로에의 반응을 기다렸다.
클로에가 마침내 말했다.
“그건…… 저도 공작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결국 말해 버렸다. 친한 귀부인들이니만큼 언젠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로네펠트 부인은 클로에가 더 부끄러워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물었다.
“어머! 그랬군요. 그러시다는 건…… 공작 각하 외의 다른 남자는 생각도 하실 수 없을 정도로 각하를 사모하신다는 건가요?”
“네.”
“정말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그런데 클로에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웃은 것이다.
“네. 정말로요.”
부끄러움을 증명하듯 얼굴은 붉게 물든 그대로였지만 그녀는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티 하나 없이.
그 얼굴만으로도 그녀가 공작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갑자기 포트넘 부인이 꺅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어머, 세상에! 공작 각하와 바텐베르크 부인이 서로를 마음에 두고 계시다니 너무 낭만적이에요. 좀 더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더 듣고 싶어요.”
포트넘 부인이 남의 연애담에 열광하는 십 대 소녀처럼 말했다.
클로에는 몹시 수줍어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녀도 내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클로에가 연애담을 술술 풀고 포트넘 부인이 꺅꺅거리는 와중에 로네펠트 부인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기대한 것은 이런 게 아닌데…….’
분명 공작부인을 놀리려고 시작한 것 같은데 왜 자신이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애프터눈 티타임이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자리를 파하고 다른 귀부인들이 돌아간 뒤까지 남아 있던 로네펠트 부인이 말했다.
“공작부인, 잠깐 괜찮으세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어떤 건가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 바깥사람이 거래처를 접대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공작부인께서 도와주셨으면 해요. 일전에 황실에서 온의 사절단을 접대하는 찻자리를 돌봐 주신 적이 있으시죠? 황실처럼 성대하게 대접할 수는 없지만 되도록 좋은 차를 고르고 싶어서요.”
“그런 일이라면 환영이에요. 얼마든지 도와드려야죠.”
클로에의 흔쾌한 대답에 로네펠트 부인이 웃었다.
“정말 감사해요, 공작부인. 섭섭지 않게 사례할게요.”
“그런데 부군께서 접대하실 거래처는 누구인가요?”
“그게 말이에요……. 바로 플랑드르 왕실이에요.”
“플랑드르라고요?”
“네. 공작부인께서도 플랑드르의 여왕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요?”
클로에가 모를 리가 없었다. 플랑드르는 제국 동쪽에 존재하는 작은 왕국이다. 비록 지형적 규모는 공국에 견줄 정도로 작지만 행정력이 뛰어나며 무엇보다 질 좋은 루비와 사파이어 광산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어 재정적으로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러한 플랑드르 왕국의 군주가 바로 여왕 카타리나 2세였다.
“아시다시피 귀금속 사업을 하는 저희 후작가에서 카타리나 2세는 제일 중요한 거래 상대 중 하나예요. 그녀가 몇 주 뒤에 개인적인 일로 제국에 들른다고 하는데, 그때 그녀를 후작가에 초대해서 대접하려고 해요. 여왕에게 아주 특별하고 좋은 기억을 남겨 주고 싶은데, 공작부인이라면 혜안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클로에는 곰곰이 생각했다.
대접해야 하는 상대가 플랑드르 왕국의 여왕이었다니. 쉽지는 않겠지만 특별한 경험일 것 같았다. 클로에는 타인에게 좋은 차를 대접하는 일을 진심으로 즐겁게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부탁해 온 상대는 클로에가 제일 좋은 친구 중 하나로 여기고 있는 로네펠트 후작부인이었다. 클로에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만나서 거래 상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요. 상대의 취향에 맞춘 좋은 차를 고를 수 있도록이요. 괜찮으시겠죠?”
“물론이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공작부인.”
로네펠트 부인이 활짝 웃으면서 돌아갔다.
* * *
“부인.”
“으음…….”
클로에가 눈을 찡그렸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에서 바로 깨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부인.”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클로에는 마침내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붉은 눈동자였다. 알폰스의 흐트러진 앞머리와 그녀를 걱정스레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들은 함께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맨살 위로 보드라운 시트와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머리맡 방향의 창문에서 따스한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클로에는 그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를 불렀다.
“알폰스…….”
알폰스는 그녀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 깨웠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던 클로에는 아까 꾼 꿈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아직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가끔 꿈속에 과거의 클로에가 나왔다. 자신은 힘들게 살고 있는데 너는 내 자리를 빼앗아서 행복하냐며 고함을 쳤다.
“제가 잠꼬대라도 했나요?”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이 잠결에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닙니다. 다만 괴로워 보이시기에…….”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알폰스가 손끝으로 클로에의 이마를 쓸었다. 그의 손끝에 땀이 묻어났다.
“식은땀도 많이 흘리시고. 무언가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자상하고, 눈빛에는 진심 어린 염려가 묻어나서 클로에는 가슴이 찡해졌다.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클로에는 언제나 그가 고마웠다. 매일 그의 다정함과 사랑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아. 하루라도 빨리 나의 비밀을 말해 주고 싶어.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더라도…….’
클로에는 이전의 클로에가 어떻게 되었을지 아는 것이 두려웠다. 만일 그녀가 잘 지내지 못하고 있거나, 그녀의 자리를 빼앗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마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클로에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알폰스가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술을 포갰다.
알폰스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클로에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그 입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의 혀가 상대의 입술 틈새를 가르고 조심스럽게 침범했다. 곧 진하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클로에가 얼핏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알폰스, 저 사실……. 알폰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알폰스가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나중에 가르쳐드릴게요. 제가 준비가 되면요. 하지만, 너무 놀라시면 안 되니까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해 두세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알폰스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 가벼운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마음의 준비라니…….”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 위로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클로에가 말했다.
“기억해 주세요.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알폰스를 사랑해요. 진심으로, 누구보다도…….”
“저도 그렇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부인을 사랑할 것입니다.”
“만일 제가…… 알폰스가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요?”
알폰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술을 만지는 손을 잡아 그 손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제 눈 앞에 있는 당신만이 바로 제가 사랑하는 그 사람입니다.”
그 말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려오는지.
실제로 그가 클로에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세계의 인간이 아내 몸에 빙의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울 거라고 클로에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안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이 사람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클로에는 생각했다.
그날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클로에는 곧장 편지를 썼다. 물론 성국의 성녀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 편지에는 성녀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클로에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난번 시장에서 불량배를 만난 사건 뒤, 알폰스가 그녀에 대한 보호를 강화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그녀가 성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이 알폰스의 귀에 들어왔다.
그것은 굉장히 의아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제국인은 성국의 성녀와 관계될 일이 없었다.
‘그녀는 무슨 용건으로 성녀에게 편지를 보낸 거지?’
정무를 보는 그조차 성녀는 한 번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알폰스는 클로에가 어떤 이유로 성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설마…….’
그런데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성녀는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성력은 다친 자나 병든 자를 치유해 주는 데에 능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일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었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도.’
혹시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이 그녀가 성녀에게 연락을 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성녀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가 그녀의 건강 때문이라면.
그녀가 어딘가 병이라도 든 것이라면…….
알폰스는 가슴이 두려움으로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생각하니 앞뒤가 착착 맞았다.
그녀의 몸이 약하다는 사실 역시 이 가설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아니야. 만일 그녀가 중병에 걸렸다면 내게 말을 하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저택 상주 의사 샨탈이 이 주에 한 번꼴로 클로에를 진찰하고 있다. 샨탈은 클로에가 건강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만일 내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말하지 않았던 거라면. 샨탈이 찾지 못하는 특이한 병에 걸린 것이라면.’
물론 알폰스가 보기에 클로에가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놀라울 정도의 관심과 주의력을 쏟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아프다면 그가 제일 먼저 알아챘을 것이었다.
‘그래, 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성녀에게 연락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체 왜……?’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알폰스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클로에의 침실로 향했다.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아야겠어.’
그는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도 아내는 그곳에 있었다.
“어머, 알폰스…….”
클로에는 침실에 딸린 개인용 서재에 있었다. 아마 일을 하던 모양이었다.
집중하고 있었는지 책상 위에 온갖 장부와 자료가 펼쳐져 있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반가운 얼굴을 하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폰스는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티룸에 가서 차라도 한잔하실래요?”
클로에는 냉큼 그에게 다가왔다. 이 와중에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알폰스의 입가에 어렴풋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아내의 허리를 팔로 둘렀다.
“그럽시다.”
잠시 후 그들은 티룸에 있었다. 클로에가 손수 우려 준 묵직한 향미의 수선(水仙)은 알폰스의 입맛에 맞았다.
하지만 알폰스는 그 맛을 즐기기보다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감시한 것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겠지.’
그런데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클로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어제 포트넘 부인에게서 아주 놀라운 소식을 들었어요.”
“어떤 소식입니까?”
“제가 전에 포트넘 부인의 에버른에 살고 있는 사촌 동생에 대해 말씀드렸죠? 그 동생이 정말 좋지 않은 남자를 만났다는 모양이에요.”
평소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는 말수가 적은 알폰스보다 클로에가 더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가져와서 그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알폰스는 그러려니 하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를 당황케 만드는 것이었다.
“글쎄, 의심이 너무 심해서 사촌 동생의 편지를 전부 감시하거나 했다나 봐요. 가족에게 온 편지도 전부 뜯어서 내용을 확인하고 마음에 안 드는 건 태워 버렸대요. 게다가 몰래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기도 하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닦달을 했대요. 정말 끔찍하죠?”
클로에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헤어졌대요. 부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알폰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귀에 와 박힌 말은 딱 두 문장이었다.
‘사촌 동생의 편지를 전부 감시하거나 했다나 봐요’, 그리고 ‘몰래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기도 하고’.
알폰스는 자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약간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되도록 평정을 가장하며 물었다.
“부인께서는…… 사생활을 중요시하시는 편입니까?”
그 말에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사생활을 침해하는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클로에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 중 한 명은 매일 그녀의 핸드폰과 이메일을 검사했다. 그녀는 그것이 무척 싫었기에 그 이후로 사생활을 침해하는 남자는 최악의 남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알폰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데, 그 면전에 대고 ‘그건 그렇고 제가 당신의 편지를 감시했는데 말입니다…….’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알폰스, 어디 아파요? 얼굴에 핏기가 없어요.”
“예?”
알폰스가 답지 않게 주춤했다. 희고 여린 손이 그의 이마를 덮었다. 클로에가 말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알폰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어맛!”
균형 감각을 잃은 클로에는 알폰스의 무릎 위에 앉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놀라 동그랗게 뜬 올리브빛의 눈동자가 귀여웠다. 그녀의 양 뺨을 손으로 감쌌다. 매끈한 뺨이 손바닥에 눌렸다.
“저야말로 걱정입니다.”
“……?”
“부인이 어딘가 아플까 봐. 아픈데도 말도 못 하고 그럴까 봐…….”
그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를 안타까움이나 걱정스러움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 위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약속해 주십시오.”
“뭐, 뭐를요……?”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하시다면 참지 않으시기로. 반드시 제일 먼저 저에게 말씀해 주시기로…….”
그의 오해와 달리 아픈 데가 없었던 클로에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꼭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만일 알폰스도 어딘가 아프거나 다치면 제게 말씀해 주셔야 돼요. 꼭이요.”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알폰스는 옅게 웃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클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다가온 입술이 입술 위로 겹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혀는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도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탐했다.
입을 맞추는 동안 등을 감싸고 있던 한 손이 조심스레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를 야릇하게 쓰다듬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전류와 같은 무언가가 찌릿하고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아서 클로에는 몸을 떨었다.
“알폰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새어 나온 목소리가 떨렸다. 그 애달픈 목소리는 알폰스에게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는 넓은 테이블 위에 클로에를 눕혔다. 그녀의 앞섶 매듭을 끄르는 손이 다급했다. 손이 매듭을 풀어나가는 동안에도 알폰스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클로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붉은 시선이 클로에의 붉어진 뺨, 내리깔리는 속눈썹, 시선을 피하는 올리브빛 눈동자 위에서 머물렀다. 그녀는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면서도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절로 다리 사이가 뻐근해졌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옷을 벗겨 던졌다. 그러곤 자기 자신 역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조급한 손으로 타이를 끄르자, 실크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클로에의 귀를 간지럽혔다. 클로에는 그것이 묘하게 야하게 느껴졌다.
타이를 끌러 낸 뒤 베스트를 벗어던지곤,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조급한 손가락 끝에서 그의 아름다운 나신이 드러났다.
그는 귀족적으로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육체의 윤곽은 가녀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드라진 근육의 윤곽과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한 선과 새하얀 피부는 그야말로 대리석 조각상을 연상케 했다.
누구라도 아름답다고 생각할 만한 몸이었으나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클로에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요동치고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알폰스는 마침내 하의까지 벗어 던지곤 벌써 천장을 향해 우뚝 선 중심을 드러냈다. 그의 단정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흉악한 크기를 하고 있는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클로에만을 향하고 있었다.
벌써 단단해져 우뚝 서 있는 그것을 본 클로에는 그가 자신을 향해 흥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로에는 그것이 몹시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자신이 사랑하는 알폰스가, 그 또한 자신을 이렇게나 사랑하고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큰 떨림과 만족감을 주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녀가 배시시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이리 오세요. 저를 안아 주세요.”
그 말에 알폰스는 자신의 분신에 더더욱 뜨거운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수줍음이 많고 부끄러움을 타는지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는 그녀는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는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를 마주 안고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입 맞췄다.
“물론입니다.”
그가 속삭였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소중히 대해드리겠습니다.”
* * *
클로에는 알폰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눈을 끔뻑거렸다.
“너무 졸려요.”
피곤할 만도 했다. 그녀는 이른 시간부터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알폰스가 속삭였다.
“주무셔도 됩니다.”
“하지만…… 여긴 침실이 아니잖아요.”
“옮겨 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 하나 번쩍 들어 침실까지 옮겨 놓는 것 정돈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클로에 역시 지난 경험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남편의 탄탄한 팔에 몸을 붙여 오며 그녀가 칭얼댔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주무시고 하셔도 됩니다.”
“으으, 안 되는데…….”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수마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녀는 알폰스의 팔에 이마를 대고 잠이 들고 말았다.
알폰스는 그런 그녀를 보고 픽 웃었다. 그는 클로에가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상황을 충분히 만끽한 뒤,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그는 곤히 잠든 클로에를 침대에 눕혀 주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지만.’
그 역시 할 일은 많았다. 하지만,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
잠시 고민하던 알폰스는 클로에의 옆자리에 살짝 누웠다. 그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이 얼굴은 몇 번을 보았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는 클로에의 자는 얼굴을 보면서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건 진심이었겠지.’
클로에는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아프다면 그에게 제일 먼저 말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믿었다. 그녀가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해도 알폰스는 믿을 것이다.
‘아픈 게 아니라면, 그녀가 성녀에게 연락을 한 이유는 대체 뭐지?’
하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아내가 성녀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 말이다.
그것은 분명 별거 아니거나 사소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일반인의 경우 성녀와 접촉을 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 애당초 사소한 문제로 연락하는 것이 허용될 상대도 아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진심 어린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를 알고 싶었다.
그런 아내가 성녀와 연락을 취한 이유.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고민하던 알폰스는 양심의 통증을 느끼며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사생활을 침해하는 남자를 제일 싫어한다고 했는데.’
이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맞았다. 그것이 그녀에 대한 예의였다.
아마 언젠가는 그녀가 직접 이야기해 줄 터이니,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병이 난 것은 아니더라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성녀를 찾았다는 것은 그녀에게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깊은 고민이나, 어쩌면 병 이상일지도 모르는 무언가.
알폰스는 너무나 알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는 잠든 클로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조금만 더, 부인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해야겠습니다.’
그의 입맞춤을 느낀 클로에가 잠결에 으음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알폰스는 잠든 그녀의 모습을 오랜 시간 지켜보았다.
* * *
“여왕 폐하!”
제국의 동쪽, 플랑드르라는 이름의 작은 왕국의 주인인 카타리나 2세는 햇빛 가리개를 들추고 창밖을 보았다.
“드디어 제국의 수도에 입성했습니다!”
그녀의 수하 중 한 명이 말했다.
카타리나 2세는 시선을 돌렸다. 창밖 멀리에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거리와 길목을 가득가득 메운 사람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화려한 황궁.
카타리나 2세의 입술이 유려한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역시 제국이야. 우리 플랑드르 왕국도 어디 내어놓아 부끄럽지는 않지만, 제국에 비할 바는 못 되는걸.”
그녀는 두 손을 깍지 끼고 그 손 위에 턱을 올려놓은 채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가 황홀한 듯이 말했다.
“제국의 수도는 정말 아름다워. 꼭 보석 같아. 내 컬렉션에 담아 두고 싶을 정도로…….”
“폐하!”
그녀의 수하가 소리쳤다.
“목적지인 로네펠트 후작가가 코앞입니다!”
그녀의 얼굴에 황홀한 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흥 하고 도도한 얼굴로 햇빛 가리개를 도로 닫았다.
카타리나 2세가 이번에 제국의 수도에 찾아온 이유는 정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일정을 알게 된 로네펠트 후작가에서 그녀를 초대했다. 그런고로 카타리나 2세의 수도에서의 첫날 일정은 로네펠트 후작가에서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로네펠트 후작가는 여왕의 행렬을 위해 정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마침내 카타리나 2세가 탄 마차가 저택 현관 앞에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후작과 후작부인, 그리고 후작가의 사용인들이 여왕을 맞이하러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 폐하께서 드십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카타리나 2세가 사뿐히 땅을 밟았다. 그녀의 모습 위로 밝은 햇빛이 쏟아졌다.
“……!”
소문으로만 듣던 여왕을 처음 본 로네펠트 부인과 사용인들은 모두 입을 떡 벌렸다.
카타리나 2세의 화려함은 압도적이었다. 빛나는 보석을 목과 귀, 머리 위, 손, 옷에 치렁치렁 달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손가락에는 몇 개나 되는 알 굵은 반지들을 끼우고 있고, 귀걸이 역시 어찌나 무거워 보이는지 보는 사람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게다가 화려한 보석에 밀리지 않도록 진한 화장과 놀랄 정도로 넓은 크리놀린까지.
오로지 단 한 사람, 사업 문제로 카타리나 2세를 몇 번 접견한 적이 있는 로네펠트 후작만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환영합니다, 폐하.”
로네펠트 후작이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카타리나 2세는 거만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후작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전에도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한층 더 아름다우십니다.”
“오랜만이군요, 로네펠트 후작. 이쪽은 후작부인이신가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영광입니다, 여왕 폐하.”
넋 나갔던 로네펠트 부인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로네펠트 후작 부부는 카타리나 2세를 후작저로 안내했다. 후작 부부를 따라가는 카타리나 2세의 뒤로 여왕의 수행인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바삐 움직이는 후작저의 사용인들과 여왕의 수행인들로 부산스러운 와중에도 그들은 식당에 도착했다.
여왕은 식당을 훑어보았다. 오로지 여왕 그녀만을 위해 값비싼 생화와 장식품들을 아낌없이 사용해 꾸며 놓은 곳이었다.
“…….”
로네펠트 후작은 여왕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아내가 온 정성을 다해 꾸며 놓은 식당이 여왕의 눈에 찰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왕은 이렇다 할 평을 하지 않았다.
흔히 초대를 받은 사람은 저택이나 방에 대해 칭찬을 건네는 것이 관례였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실내를 장식한 안주인의 노고에 대한 성의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 여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후작과 후작부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왕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저희 안사람이 이 식당을 꾸미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답니다. 심미안이 훌륭하신 여왕 폐하께서 만족스러우실지 걱정됩니다.”
카타리나 2세가 대답했다.
“아, 이곳이 후작부인께서 직접 꾸미신 곳이었군요. 후작부인께선 장식품을 고르시는 안목이 좋으시네요.”
“감사합니다.”
로네펠트 부인이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하지만 여왕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뿐이에요. 장식품 하나하나는 아름답지만 조화롭지가 않아요. 이 실내 장식으로 무엇을 의도하셨는지,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아요. 제 기준으로는 좋은 평가를 드리기는 어렵겠어요.”
후작 부부는 순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당연하지만 실내 장식에 대한 평은 칭찬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나 직설적인 평을 들어 본 것은 후작부인으로서도 난생처음이었다.
후작부인의 얼굴이 굳자 후작이 다급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하……하하…… 그러셨군요. 역시 심미안이 탁월하십니다.”
그가 이렇게나 여왕의 앞에서 기를 못 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로네펠트 후작의 귀금속 사업에서 카타리나 2세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거래 상대였다. 그런데 최근 그의 경쟁 사업체에서 여왕의 눈에 들어 특급 루비 광산의 우선 거래권을 따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 놓고 있다가는 특별한 등급의 원석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었다. 사업의 확장을 코앞에 두고 있었던 로네펠트 후작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거래처를 빼앗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여왕의 눈에 들도록 애쓸 수밖에 없었다.
온갖 화려하고 진귀한 재료를 사용해 준비한 석찬이 이어졌다. 후작은 계속해서 여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여전히 감흥이 없어 보였다. 바짝바짝 속이 탔다.
‘어떻게든 이번에 확실히 여왕의 호감을 사야 하는데.’
그는 계속해서 여왕이 좋아할 만한 화제나 그녀에 대한 칭찬을 입에 담았지만 여왕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여왕이 후작저를 떠나게 된다면 그에게는 더는 기회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공작부인에게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겠군.’
로네펠트 후작이 생각했다.
‘온의 사절단과의 접견도 성공적으로 마무리시킨 그녀라고 하니 이번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꼭…… 그렇기를 바라야지.’
석찬이 끝난 뒤, 후작이 말했다.
“여왕 폐하, 플랑드르 왕국에서는 홍차를 즐겨 마신다고 들어 이번에는 식후주 대신 차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입맛에 맞으셨으면 합니다.”
“차라고요? 흥미롭군요.”
식사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여왕이 관심을 보였다.
“제국에서는 차를 마시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하, 최근 갑작스레 차가 유행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때문이군요?”
“예. 바로 그 제국에 차를 유행시킨 장본인인 클로에 바텐베르크 공작부인이 여왕 폐하를 위한 차를 준비할 것입니다.”
“흐음.”
여왕이 말했다.
“그거 궁금하네요. 어서 준비해 주세요.”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후작이 하녀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렸고, 하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곧 식당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클로에였다.
“플랑드르의 여왕께 인사 올립니다. 폐하께 차를 선보여 드릴 클로에 바텐베르크입니다.”
클로에가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녀는 화려하지 않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드레스의 디자인도 수수했고 장신구 역시 화려하기보다는 단순한, 포인트를 줄 만한 정도의 모양에 그쳤다.
그러나 그 모습이 남루하거나 허름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클로에의 갈색 머리카락과 산뜻하게 잘 어울렸다. 게다가 그녀의 단정한 동작과 어우러져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로네펠트 부인은 깨달았다.
‘왜 공작부인이 수수한 옷을 입겠다고 한 건지 알겠어. 여왕이 화려한데 공작부인마저 밀리지 않도록 화려하게 꾸미고 나갔으면 눈이 아픈 데다 서로가 서로에게 눌려 결국 둘 다 돋보이지 못했겠지……. 하지만 공작부인이 단정한 차림새를 한 덕에 오히려 각자의 매력이 살아났어. 여왕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녀가 여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타리나 2세는…… 웃고 있었다. 무엇을 보여 주고 어떤 요리를 준비해도 감흥이 없던 여왕의 눈에 약간의 흥미가 떠올랐다.
여왕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당신이 바로 그 소문의 공작부인이군요. 수백 년 동안 차를 마시지 않던 제국에서 갑자기 차가 유행이 되었는데, 그게 전부 공작부인의 덕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런 당신이 직접 대접해 주는 차를 마시게 되다니 흥미로운 경험이네요. 하지만…….”
여왕이 유리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클로에는 순간 여왕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먼저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클로에는 저 눈빛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저것은 상대를 시험하는 눈빛이었다. ‘이 세계’는 물론 ‘전생의 세계’에서도 수도 없이 보아 왔던 것이다. 새로 만난 상대를 가늠해 보는,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은 눈빛.
클로에는 담담하게 물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가요?”
여왕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죠.”
“…….”
“홍차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플랑드르 왕국의 여왕이니 다들 제가 홍차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물론 저 역시 홍차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차를 여러 번 마셔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차가 제 마음을 앗아간 적은 없었어요. 그럴 만도 하죠. 아름다운 구석이 없으니까요. 홍차의 수색이 아름답나요? 오렌지빛이나 붉은빛을 띤다고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눈에는 우스워 보일 뿐이에요. 색감도, 내포물도 충분치 않아요. 보석으로 치자면 AAA급은커녕 A급 정도라고나 할까요.”
여왕이 양손을 포개 턱을 괴었다. 그녀의 귀에 무겁게 매달린 보석이 짤랑이면서 빛을 뿜었다.
“그렇다고 찻잎이 아름답나요? 새까맣고 꼬불꼬불 말려 있는 찻잎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와인은 어떻죠? 아름다움을 찾기에는 그 선명한 핏빛 액체와 나무에 탐스럽게 열린 동그란 열매에서 찾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공작부인.”
그렇게 말한 여왕이 시선을 끌어올렸다. 상대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클로에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굳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로네펠트 후작처럼 여왕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과장해서 웃지도 않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여왕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태도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왕은 알 수 있었다. 상대의 담담한 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순종이 아닌 자신감이었다.
‘이런 여자가 제국에……?’
“그렇다면 제가 이제부터 아름다운 차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클로에가 차분히 말했다.
곧 하녀들이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여왕의 앞에 차려진 다구들은 전부 유리로 된 것들이었다. 티팟과 잔은 물론, 스트레이너와 워머와 티스푼까지.
그리고 투명한 티팟 안에 담겨 있는 액체는 바다처럼 새파란 빛깔이었다.
마치 사파이어 같다는 것이 여왕의 첫 번째 감상이었다. 하녀가 투명한 유리잔에 새파란 차를 따랐다. 김과 함께 상큼한 향이 피어올랐다.
“이 차는…….”
“청차입니다, 여왕 폐하. 블루 멜로우(Blue Mellow)를 블렌딩해서 수색에 색상을 입혔습니다.”
클로에가 설명했다.
블루 멜로우는 보라색의 꽃으로 된 허브 티이다. 이것을 우려낸 찻물은 선명하고 새파란 빛을 띤다. 수색이 무척 아름답지만 그 자체로는 맛과 향이 거의 없어, 다른 차에 블렌딩하기도 한다.
‘확실히 수색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지.’
여왕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일단 그녀는 차를 맛보았다. 온의 청차에 블루 멜로우를 블렌딩했다는 차는 청차 특유의 홍차와는 다른 고소함과 부드러움이 있었다. 약간의 가향을 가했는지 새콤달콤한 과일 향이 느껴졌다.
찻잔에서 입술을 뗀 여왕이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향이 좋네요.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여왕의 말의 뒤에 숨겨진 뜻을 이해했다.
로네펠트 후작부인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카타리나 2세와 클로에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