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장 (28/39)

28장

뜻밖에도 그녀가 없으므로 인해 달라지는 공기를 체감할 때였다.

클로에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저택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언제나 공기 중에 섞여 있던 맑고, 건강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심지어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알폰스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업무 결재를 받으러 온 집사 키엘이 이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저택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사용인들도 가라앉은 상태고요. 다들 마음이 허전하고 기운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왜 그럴까요? 집사인 저로서는 심려가 커요. 노력하고는 있지만 제 힘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네요.’

그것을 떠올린 알폰스가 픽 하고 콧소리를 냈다. 기가 차 내는 헛웃음 소리였다.

‘키엘 그 눈치 좋은 녀석이 정말로 모르고 말했을 리가 없다. 분명…… 사용인들이 클로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주고 싶었던 거겠지.’

알폰스 그가 느끼기에 자신이 클로에의 빈자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제각기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알폰스는 새삼 체감했다.

그녀는, 정말로 이 저택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알폰스는 가슴 한편이 뭉근하게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중요성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어갈수록 후회 역시 깊어갔다.

‘그때 그녀를 그렇게 대하지 말았었어야 했는데.’

결혼 직후의 일 년 정도의 기간은 두고두고 평생의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녀를 겨우 며칠을 못 본 것만으로 이토록 애간장을 태울 줄 알았더라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녀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그때의 자신은 인간마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며칠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의 자취는 저택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단지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떠오르는 그녀와의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

그러던 그가 멈춘 곳은 바로 클로에의 침실 앞이었다.

“…….”

잠시 고민하던 알폰스는 방문을 열었다.

경첩의 끼익거리는 소리도 없이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하녀들이 열심히 정리해 두었는지 방 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꽃병에는 신선한 꽃이 꽂혀 있었다. 꽃을 매일 바꾸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폰스의 눈에는 그런 것도 쓸데없어 보였다. 아무리 꽃이 예쁘고 침대가 각이 지어 정돈되어 있다 한들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었다.

잘 정돈된 방보다는, 그런 방에 누워 있는 클로에가 보고 싶었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괜히 침대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익숙한 침대였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침대보다는 이 침대 위에서 잠을 자는 날이 많아졌다.

클로에가 없으니 최근 며칠은 계속 자신의 침실에서 잠을 잤다. 분명 자신의 집, 자신의 침실인데 낯설어서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알폰스는 한숨을 쉬었다. 목을 조이고 있는 넥타이를 조금 끌러 몸을 편하게 한 뒤 그는 클로에의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익숙한 침대와 익숙한 촉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온기가, 그녀의 향기가 침구에 묻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

알폰스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당황스러웠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얼굴을 찡그렸다.

단단한 팽창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어디냐면, 그의 몸의 정중앙에서.

자신의 바지춤을 본 알폰스는 탄식처럼 말했다.

“이래서야 혈기왕성한 십 대 어린애와 다를 것이 뭔가.”

아내의 향기가 묻어 있는 아내의 침대에서 발정이라니. 한심해도 이렇게나 한심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그것의 기운을 죽여 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 번 달아오른 음심이란 것이 아내의 이 침대 위에서의 이런저런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차라리 이 방을 나가는 편이 욕구를 잠재우기에는 나을 것 같지만, 이 꼴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그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군.”

그 부위는 거의 매일 풀던 욕구를 며칠 동안 풀지 못했더니 더더욱 기운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꼭, 어떻게 해서든 이것을 풀어 주지 않으면 결코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듯이.

알폰스는 여태껏 혼자서 욕구를 해소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원래 (놀랍게도) 클로에를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성욕이 적은 편이었을뿐더러, 혼자 해소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와 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이성이 많았던 것이다.

알폰스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너무나 그리운 아내의 모습은 꼭 그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클로에는 이 침대에 그와 함께 누워 있었다. 수줍은 듯 뺨을 붉힌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의 등을 감싸고 어여쁜 입술 위에 입을 맞춘다. 그의 손이 점차 그녀의 얼굴 아래쪽을 향한다. 그리고, 그리고…….

한심하다거나 천박하다거나 하는 이성적인 생각들은 달콤한 상상에 떠밀려 잊힌 뒤였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라도 지금은 상상일지언정 그녀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 * *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호텔 발코니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클로에는 생각했다.

‘아마…… 일을 하고 있겠지. 한창 바쁠 시간이니까.’

일에 집중한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클로에는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을 좋아했다. 미간에 약간의 주름을 잡은 채, 시가를 물고 철필로 무언가를 빠르게 휘갈기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근사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를 반갑게 안아 준 뒤, 여행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녀만을 향해 보여 주는 다정한 미소가, 자상한 목소리가 그리웠다. 그리고 그 입맞춤도.

“마님, 차가 준비되었어요.”

클로에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와 로지가 쟁반에 다구 몇 개와 약간의 티 푸드를 받쳐 들고 왔다.

하녀들에게 차 우리는 법을 열심히 가르쳤더니, 이제 그들도 제법 맛있게 우리는 법을 터득했다. 클로에는 그것이 참 대견했다.

“응, 고맙구나.”

클로에가 그들을 향해 미소 지어 주었다. 엘리의 얼굴에 덩달아 행복한 웃음이 번졌다.

테이블 위에 작은 찻자리가 차려졌다. 로지가 그새 꽤 그럴싸해진 동작으로 클로에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클로에는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우물쭈물하는 것 같던 엘리가 말했다.

“저…… 그런데 마님. 이런 걸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응, 뭐가 궁금하니? 뭐든 물어보렴.”

클로에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느긋하게 차를 마셔서 기분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엘리가 물었다.

“아까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그 질문에 순식간에 클로에의 뺨이 붉어졌다.

알폰스의 일하는 모습과 그의 입맞춤을 떠올리고 있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클로에가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

“음, 그건…… 그냥, 이곳에서 트리플 스위트의 분점을 낸다면 가게는 어떻게 꾸미는 게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지.”

그녀의 대답에 엘리는 진심으로 감명받은 것 같았다.

“우와…… 마님, 그렇게 깊게 일 생각을 하시다니. 역시 대단하세요……! 정말 멋져요.”

엘리의 진심 어린 찬사가 한 마디씩 나올 때마다 클로에의 뺨이 더 붉어졌다. 순진한 어린애를 속인 것 같은 죄책감은 덤이었다.

클로에의 뺨에 이어 귀까지 붉어지기 시작하자 로지가 킥킥 웃으며 엘리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 이리 와. 가자.”

“네? 하지만 저는…… 마님과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마님께서는 혼자 계실 시간이 필요해. 마님은 사업 구상을 하시느라 바쁘시다고.”

그렇게 말한 로지는 아주 티 나게, 노골적으로 클로에에게 윙크를 했다. 덕분에 클로에는 더 민망해져 버렸다.

엘리는 마님의 사업 구상을 방해하지 말자는 로지의 의견에 쉬이 납득했다. 그들은 곧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하녀들이 떠나자 클로에는 혼자 남았다.

그녀는 티 푸드로 나온 버터 쿠키를 한 입 깨물고, 홍차와 쿠키의 환상적인 조합을 음미하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밀턴케인스에서 마시는 차 맛도 역시 다르구나.’

저번에 휴가지에서 차를 마시고는 차 맛이 달라진 것을 깨달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같은 찻잎을 쓰는데도 지역마다 차 맛이 달라지는 것은 수질 때문이었다.

‘같은 블렌딩이어도 지역마다 맛이 달라지니, 지역마다 판매하는 블렌딩의 레시피를 다르게 하는 것이 좋겠어.’

요즘 그녀가 구상하고 있는 차는 바로 ‘브렉퍼스트’였다.

이름 그대로 브렉퍼스트는 아침에 주로 마시는 차였다. 아침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 마시는 차이니만큼 맛이 진하고 씁쓸한 편이 좋았다.

이러한 브렉퍼스트는 그녀의 전생에서도 제일 유명한 블렌딩 중 하나였다. 그곳에서는 ‘잉글랜드에서 마시는 브랙퍼스트 티’라는 의미에서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라고 자주 불렀다.

하지만 브랙퍼스트는 대표적인 지역마다 레시피가 다른 차의 예시이기도 했다. 그런 각자 다른 레시피마다 아이리쉬 브랙퍼스트, 프렌치 브랙퍼스트 등 다양한 이름이 있기도 했다.

‘브랙퍼스트는 밀크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진해야 하니 아쌈을 많이 넣는 것이 좋겠어. 나머지는 싱할라랑 또…….’

클로에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곧 밀턴케인스 분점을 낼 생각이긴 했으니, 밀턴케인스 브랙퍼스트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제국 최초의 지역 한정 차인 거야.’

차를 다 마신 클로에는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평소 마차에 가지고 다니던 몇 가지의 찻잎으로 블렌딩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그러는 것을 보고 하녀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마님! 몇 날 며칠씩이나 걸려서 오셨는데 쉬시기는커녕 일을 하시다니요?”

“맞아요, 마님. 밀턴케이스는 멋진 도시예요. 시내 구경 같은 건 어떠세요?”

클로에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하녀들은 관광에 좀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 대부분은 수도에서 나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클로에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아까도 차를 마시며 쉬었으니까. 그래, 멀리까지 온 김에 너희들도 바깥 구경을 해야겠지. 오늘 하루만 휴가를 줄게. 긴 시간은 아니지만 마음껏 놀렴.”

“네에?”

하녀들이 전부 깜짝 놀랐다. 여기까지 와서 놀긴커녕 일을 하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래 놓고 하녀에게는 휴가를 주다니?

하녀 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 하지만, 마님! 저희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니나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보통의 귀부인들은 하녀가 없으면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하는 것도 어려워하니까.

하지만 클로에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혼자 씻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하지만, 마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감히 저희만 어찌…….”

로지는 입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은 이미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아 보였다. 클로에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나는 정말 괜찮아. 혹시 모르니 기사들도 두 분 정도 데려가렴. 자, 어서.”

서로 눈치만 보던 세 하녀 중 로지가 제일 먼저 인사를 하고 나갔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님!”

다른 하녀 두 명, 니나와 엘리도 차례로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그들 모두 클로에가 조금쯤 걱정되면서도 기대감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님은 정말 대단하셔, 그렇지?”

“정말 배려심이 넘치셔요. 역시 마님이셔요.”

하녀들은 각자 클로에에 대해 재잘거리며 기사들이 묵고 있는 호텔 별관으로 갔다.

하녀들에게서 사정을 전해 들은 기사들은 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 겨우 밀턴케인스에 오셨는데, 마님이 또 일을 하신다고?’

하녀들과 달리 기사들이 감탄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성실하실 수가 있는 거지?’

몇 날 며칠을 걸려 먼 도시에 겨우 왔다. 쉬거나 관광을 하고 싶어질 만도 한데, 이 공작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일을 보러 어딘가 다녀오시더니, 이젠 또 사업 관련 연구를 하신단다.

재미있는 관광지가 눈앞에 있으면 일보다는 그쪽에 눈이 가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일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걸까? 기사들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린 정말 보통이 아닌 마님을 두었단 말이야.’

어쨌든, 하녀들과 기사 몇 명이 놀러 나간 사이에 클로에는 열심히 블렌딩을 개발했다.

재료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녀가 티룸에 가지고 있는 차에 비해 마차에 싣고 다니는 차의 종류는 몇 개 없었다. 기껏해야 아쌈과 싱할라, 온의 운남 등 제일 대표적이고 유명한 몇 가지가 홍차의 전부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쉬운 것 같기도 했다. 제한된 선택지는 창의력을 자극시킨다. 장소의 변화라는 신선함까지 합쳐져서, 클로에는 아주 즐겁게 일을 했다.

잠깐이지만 알폰스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잊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덕분엔가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블렌딩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됐다. 제국 최초의 브랙퍼스트 티야.’

클로에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블렌딩 찻잎을 바라보았다.

‘밀턴케인스 브랙퍼스트.’

그녀는 그것을 밀턴케인스의 물에 우려서 맛을 보았다.

그 맛은…… 훌륭했다. 아쌈이 주재료로 들어간 브랙퍼스트에서는 달큰한 몰트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풍부한 몰트 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끝 맛이 아주 매력적인 차였다.

게다가 이 차는 밀턴케인스 특유의 수질과 만났을 때 특히나 빛을 발했다.

‘수도로 돌아가면 이 맛이 안 날 테니, 여기에 있는 동안 많이 마셔 두자.’

클로에는 차를 버터 쿠키와 함께 음미하며 행복하게 생각했다.

‘어서 밀턴케인스에서 분점을 내야겠는걸. 다음에는 꼭 알폰스랑 함께 와서 천천히 분점 준비를 해야겠어.’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밀턴케인스에서의 두 번째 날이자, 수도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돼.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고작 1박 2일 있다가 가다니?”

말 안장에 올라타며 제이콥이 투덜댔다.

“나는 아직 시내 구경도 못 했는데.”

“조용히 좀 해. 어제 마님께서 하루 종일 일하셨다는 얘기도 못 들었어?”

기사 톰슨이 핀잔을 주었다. 제이콥이 한숨을 쉬었다.

“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마님의 하녀들이랑 발트, 카인 녀석은 어제 시내에 가서 놀았다는데.”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네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어.”

“하여간에 이건 말도 안 돼! 마님께서도 참, 아무리 바쁘셔도 하루만 더 쉬다가 가시지…….”

하지만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이렇게까지 출발을 서두르는 이유 말이다.

말의 고삐를 잡으며 제이콥이 큭큭 웃었다.

‘하여간에 주군이 부러워 죽겠다니까. 마님같이 미인인데 착하고 능력도 있는 멋진 여자의 사랑을 받는 기분 나도 한 번 느껴 보고 싶다. 아, 나는 언제쯤에나 장가를 가 볼는지…….’

그렇게 말을 달려, 다시 5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알폰스 역시 오늘이 클로에가 오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지금 어디쯤 왔다고 주기적으로 전보를 보내 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떠난 뒤로 매일 날짜를 세고 있었던지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바닥나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인내란 귀족의 첫 번째 덕목이라고 친부가 그렇게나 엄격하게 가르쳤었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친부의 가르침은 다 헛것이었던 모양이다.

알폰스는 자기 집에 있을 때에도 당장 외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반듯한 차림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아침부터 신경을 써서 옷을 골랐다. 이렇게나 옷에 정성을 다해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차림새는 거의 행사나 파티에 나가도 될 정도가 되었다.

‘……좀 과했나.’

자기가 보기에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보다 더 편한 차림은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에게 보이기에는 너무 남루해 보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알폰스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려다가 그만두었다. 반듯하게 맨 넥타이가 흐트러지는 것이 싫었다.

그는 벽시계를 흘끗 보았다. 아직 4시였다. 그의 귀여운 아내는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서 온다고 했으니, 아직 몇 시간 정도 남은 셈이다.

알폰스는 거의 꽁지까지 타들어 간 시가를 재떨이 위에 올려 두고 새 시가를 꺼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가 끝을 자른 뒤 불을 붙였다. 시가를 문 채 집무실에서 나온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어야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층을 내려가다 문득 발걸음이 멈춰 섰다.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발을 잡아챈 것 같았다.

다름이 아니고…… 이 층에는 아내의 침실이 있었다. 그리고 왠지 그곳에 가고 싶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녀의 침실에는 아내가 없는 사이에 몇 번 가 봤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위안이 되는 건 잠깐뿐이고 오히려 더 깊은 그리움이 찾아오곤 했다.

어차피 몇 시간만 더 있으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의 향기가 묻어 있는 침대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그녀가 온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그때 전부 해소하면 된다.

그보다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어서 바람을 쐬어서 평소의 상태를 되찾고 집무실에 돌아가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그래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그 외의 그가 할 행동은 없는데. 그런데 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의 방문이 눈앞에 있는지.

알폰스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번이나 봐서 지겨울 정도인 방문이 눈앞에 있었다.

정말로 비이성적인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것은 자신답지 않다는 걸 안다. 필히, 단 몇 시간이라도 더 일찍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망상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이 문을 열면 그 뒤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을까.

아내가 이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요 열흘간 몇 번이나 상상했던 것처럼 침대에 누워 수줍은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가녀린 몸을 끌어안고 입 맞춰 줄 텐데. 얼굴은 물론 몸까지 구석구석 입 맞추곤 그 귀에 속삭여 줄 텐데. 지금까지 그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암만 이 마음을 잠재워 보려고 애써도 아무 소용도 없었음을,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보고 싶은 마음만 커져 갔음을 가르쳐 줄 텐데…….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다. 하지만 정말로, 진심으로, 이 상상이 현실이기를 바랐다. 기적이든 신이든 뭐든 좋으니까.

알폰스는 제국인치고는 신실한 신자가 아니다. 신의 축복이나 변덕 따위를 기대해 본 적도 없다.

그리고 그럴 만큼이나 그에게는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

알폰스는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것을 당겨 문을 열었다.

마침내 아내의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꽃으로 치장된, 깔끔하고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아름다운 방.

하지만 그곳에 클로에는 없었다.

알폰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은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건지. 잠깐이나마 허무맹랑한 믿음을 가졌던 자신을 향해 실소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이런 충동적인 행동을 한 번쯤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알폰스 바텐베르크였다. 자신의 이성과 냉철함, 인내심에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는 자신이 이런 우스운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바보 같았음을 깨달은 지금에도, 바보 같은 일을 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보다 방에 아내가 없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었다.

알폰스는 곧 깨달았다. 그를 붙잡는 이 감정의 이름은 미련이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던, 언제까지나 남의 일일 줄로만 알았던 감정을 자신이 느끼게 될 때가 오다니.

과거 자신과 교제하던 여성들이 이별을 고하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을 볼 때만 해도 그 자신은 평생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자신의 꼴은 이게 뭔가. 평생은커녕 고작 열흘 만나지 못한 것으로 이렇게나 구질구질한 꼴을 보일 줄이야.

‘이만하면 됐다.’

알폰스는 방문을 닫았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우스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만하고 돌아가자. 정원에서 산책을 조금 한 뒤, 맑은 정신으로 일을 하자.

가슴과 달리 머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발을 붙잡아 놓으려는 듯한 미련이라는 감정을 억누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알폰스는 순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분명 그리움이 지나친 탓에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다르게 가슴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부인.”

그의 눈앞에 있는 건 클로에였다.

챙이 넓은 모자와 외출복을 착용한 클로에는 지쳐 보이는 기색에도 싱그럽게 웃었다. 그녀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알폰스!”

알폰스는 가까스로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은 시가를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데나 던져 버렸다. (분명 마루에는 구멍이 뚫리겠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단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클로에가 숨이 막혀 옴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은 그는 그대로 그녀를 벽에 밀쳐 놓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단 일 초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다급한 동작이었지만 그녀의 뺨을 감싼 손만은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길고 깊게 이어진 정열적인 입맞춤이 끝난 후, 클로에는 조금 가쁜 숨과 달아오른 뺨을 하고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를 그리워하고 만나기만을 기다린 사람은 알폰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그와의 재회를 바라고 있었다.

클로에는 자신의 뺨을 감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이 크고 단단한 손을 다시 한 번 잡기를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는지. 그녀가 행복하게 웃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알폰스.”

알폰스는 그녀의 입술 위에 다시 길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번이나 이어진 입맞춤 끝에 클로에의 호흡은 많이 흐트러져 있었지만 알폰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양팔과 벽 사이에 가둔 자신의 아내를 너무나 소중한 것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아마 일찍 와서 좋다는 말일 것이라고 클로에는 어림짐작했다.

그만큼이나 상대의 눈빛은 반가움과 애정을 담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너무나 행복했다.

“네. 빨리 왔죠?”

“전보를 보내셨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요.”

“그냥…… 알폰스를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알폰스가 놀라는 모습은 정말로 흔치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내가 한없이 귀여워 보여 알폰스는 자신의 감정을 실감했다.

그는 아내를 가두고 있던 팔을 내려 그녀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후 하고 숨을 내쉬며 그가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대었다.

단지 그녀가 있으므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던 공기 중에 밝고 투명한 에너지가 차올랐다.

아까만 해도 조금도 안정이 되지 않았던 자신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알폰스는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그녀 없이 지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음부터 그녀가 또 출장을 나간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따라가리라.

그가 그렇게 결심하던 그때였다. 자신의 소매가 당겨지는 듯한 감각에 알폰스가 눈을 떴다.

클로에가 그의 소매를 당기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한 채 그녀가 말했다.

“저, 저기, 알폰스…….”

“예.”

의아해하는 그의 눈앞에서 잠시 주저하던 클로에가 말했다.

“음, 아직 저녁 식사 시간은 멀었죠……?”

알폰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랬다. 아직 겨우 오후 4시였고 석찬까지는 몇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던 그 순간 그는 아내의 말의 속뜻을 깨달았다.

그야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원래부터 눈치가 좋기도 했고, 클로에에 관한 한 더더욱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놓고 있었으니까.

알폰스는 먼저 아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의 아내는 수줍음이 굉장히 많았다. 그와의 육체적 관계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사실은 좋아했지만) 먼저 요구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런 식으로나마 직접 말을 꺼내다니.

‘저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입가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이 여자는 뭐를 위해 이렇게까지 귀여운 거지?

사실 굳이 그녀가 먼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그도 계속 그걸 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무수한 경험에 의하자면 클로에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굳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먼저 말을 꺼낸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도 그를 원한 게 분명하다고 알폰스는 생각했다.

가슴 가득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는 흐뭇함을 느끼며 아내를 안아 들었다.

“꺄악!”

갑자기 들어 올려진 클로에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말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지.’

알폰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면모 역시 그녀의 귀여운 점이었다. 그는 분홍색이 된 아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녀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 * *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날 석찬에 참석하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을뿐더러 클로에가 요통과 피로를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여독과 과로(?)에 의한 피로가 겹쳐서 그녀는 식사 생각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알폰스가 열심히 달랬기에 조금만 먹고 자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간단한 요깃거리만을 침실에서 먹기로 했다.

마님 귀환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요리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호화로운 석찬은 결국 사용인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사용인들 사이에서 클로에에 대한 인망이 다시 한 번 올랐다.

그리고 정성 들여 만찬을 준비했던 요리장이 울었다는 소문이 전해지는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

“주인님, 마님. 요기하실 거리를 가져왔습니다.”

너무 피로했던 클로에는 배고픔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었지만, 막상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눈앞에서 보니 다시 식욕이 동했다.

여행지에서 먹었던 것들도 전부 괜찮았지만, 집밥만큼이나 맛있는 것은 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에가 스푼을 들었다.

뜨거운 수프를 조심스레 입 안에 떠 넣는 그녀의 모습을 알폰스는 귀엽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클로에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네, 정말로요. 역시 우리 집에서 먹는 밥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알폰스가 자상하게 말했다.

“많이 드십시오.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때 식사를 거르면 안 됩니다.”

클로에는 풉 웃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말. 제가 체력을 소모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였…….”

한데…… 그 말을 하다 보니 다시 민망함이 몰려왔다. 알폰스에게 시도했던 유치한 신호가 자꾸만 기억이 나는 탓이었다.

기세등등하게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자 알폰스는 잠시 의아해했다.

클로에는 정말이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전 남자 친구들과 사귈 때를 포함해서, 그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먼저 요구하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전 남자 친구들과의 경험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어서 더 그랬긴 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내가 미쳤지.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한편 알폰스는 눈치 좋게도 그녀가 무엇을 부끄러워하는지 눈치챘다.

믿을 수 없게도 장난기가 들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장난이란 것을 쳐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에게만은 예외였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부인의 체력을 소진시켜 드려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데 부인께서는 제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지를 잊으신 것 같습니다.”

“으……!”

클로에가 더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가 침대를 뚫고 바닥으로 꺼질 것 같았다.

“제가 그렇게 말한 거, 이, 이상했죠…….”

클로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 그녀는 너무 부끄러워서 시간을 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알폰스는 픽 웃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그는 클로에의 귀를 덮고 있는 긴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 준 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그렇게 적극적인 부인도 좋습니다.”

“……!”

클로에는 그 말에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옆에 있던 베개를 꽉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다시는, 다시는 안 할 거예요.”

“왜 그러십니까? 제가 좋다는데.”

“모, 몰라요!”

그렇게 말하는 클로에는 어느새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알폰스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낮고 울림이 좋은 웃음소리 때문에 그녀는 더더욱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클로에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지만, 알폰스는 그런 그녀마저 한없이 귀엽다는 듯이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알폰스는 클로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베개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자 클로에가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 알폰스. 정말…….”

그 목소리까지 들으니 알폰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내를 위해 하녀들을 향해 눈짓을 했다. 나가라는 신호였다. 하녀들은 순순히 그의 지시에 따랐다. 이제 방에는 단둘뿐이었다. 지금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클로에는 화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폰스는 알고 있었다.

* * *

제국의 황자 아서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바로 여자를 만나는 게 재미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서 황자 하면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바람둥이로 평판이 자자할 정도로 여자 만나기는 그의 제일 중요한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재미있기는커녕, 과거 자신은 왜 그런 쓰잘머리 없는 일에 시간과 성의를 낭비했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일 아서 황자가 더 이상 여자 만나기를 즐기지 않게 되었다고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키지 않아도 억지로 여자들을 만나러 다니긴 했지만 그런 시간마저 눈에 띄는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아서로서는 큰일이었다. 이렇게 큰 즐거움을 잃어버리다니,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아서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저, 황자님…….”

그때였다. 그의 곁에 있던 엘리나가 말을 꺼냈다. 아서가 무덤덤한 눈초리를 돌렸다.

“응?”

엘리나가 주저하다가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고민이라니?”

“최근 황자님의 옥안에서 수심이 느껴져서요. 저……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고민이 있으시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엘리나는 눈치가 좋았고 아서는 평소 그녀의 그 눈치를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아서는 그녀가 자신에게 참견해 오는 것이 귀찮았다.

그가 대답했다.

“내가 고민은 무슨 고민. 그런 거 없어.”

하지만 엘리나로서는 이런 말을 꺼낸 이유가 있었다. 아서가 이상해 보이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몇 주째였다. 함께 있는데도 그가 다른 생각에 깊게 빠지거나, 혹은 엘리나와의 만남을 피하는 날이.

그와 만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오늘도 어렵게 만든 기회였다. 아서를 사랑하는 엘리나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 하지만……! 황자님…….”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은 통하지 않았다. 아서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만. 오늘따라 귀찮게 구네, 엘리나.”

“화, 황자님. 전 그게 아니라…….”

“피곤해서 난 이만 가 볼게.”

아서는 그녀의 변명조차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나는 그런 그를 붙잡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런 일이라는 것을 엘리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서가 걸어 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심지어 다른 때처럼, ‘다음에 보자.’라는 인사조차 해 주지 않았다.

엘리나는 설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것을 힘겹게 참아내었다.

한편, 손턴 자작저를 나서며 아서는 엘리나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공연히 찔려서 애먼 사람에게 성을 낸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왜 남의 일에 참견을 하고 그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아서는 마차를 탄 채 번화가로 향했다.

그의 목적지는 수도 유일의 티 하우스였다. 1층은 잼과 차를 파는 가게, 2층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이루어져 있는 클로에의 티 하우스였다.

여자를 만나는 일 대신 최근 아서가 재미를 붙이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차를 마시는 일.

다양한 맛과 섬세한 향을 지닌 차를 음미하고 맛보는 것도 좋았다. 제국 유일의 황자로 태어나 외국의 산해진미까지 다양하게 접해 보았지만, 이 차라는 것의 향미와 섬세함은 어디에도 느껴 본 적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있네.”

계단을 올라 티 하우스에 들어선 아서가 웃었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클로에가 있었다.

차와 비품 목록을 살펴보고 있던 클로에는 그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서는 멋대로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티 하우스 내부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여성이었다. 애초에, 전형적인 귀족 여성 취향으로 꾸며 놓은 티 하우스에 남자 혼자 오는 손님은 드물었다.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고 느껴졌다. 그는 느긋하게 메뉴판을 들고 오는 클로에를 지켜보았다.

이 티 하우스에는 하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지라 메뉴판에 무슨 차가 있는지 아서는 거의 외우고 있었다.

그는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말했다.

“혹시 새로운 건 없어? 특별 주문을 하고 싶은데.”

“특별 주문이요? 예를 들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클로에의 질문에 아서는 자신의 테이블을 훑어보았다.

티 하우스의 테이블마다 꽃병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의 테이블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테이블 꽃병에 꽂혀 있는 것은 싱싱한 붉은 장미였다.

아서가 턱을 괴면서 물었다.

“혹시 장미 향이 나는 차는 없어?”

“장미 향이라고요?”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는 잠시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의 곁에는 티 세트를 받쳐 든 직원이 있었다.

아서는 감탄했다. 클로에라면 분명 장미 향이 나는 차도 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클로에는 그의 찻잔에 차를 손수 따라 주었다.

“메뉴판에는 없는 차이지만, 특별히 준비해 보았어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찻잔에 담긴 차의 수색을 보아하니 이것은 홍차가 분명했다. 장미꽃 향이 나는 차라서 그런지, 그 붉은 수색이 꼭 장미꽃처럼 보였다.

아서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에서는 고소한 몰트 향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아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얼 그레이와 같은 가향 차인 것 같았다.

그는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기대감과 함께 찻잔을 입에 대었다.

향수처럼 진한 장미꽃 향이 훅 끼쳐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찻물이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 와 미뢰를 적시고 그 향이 비강을 채웠다. 하지만 장미 향은 그리 진하지 않고 은은해서 향미를 풍부하게 해 주는 정도였다.

홍차 특유의 구수한 몰트 향과 은은한 장미 향과 함께 묘한 향이 느껴졌다. 이제 슬슬 클로에만큼은 아니더라도 차에 짬이 생겼다고 자부하는 아서는 그 향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사과인가? 아닌데. 바나나 같기도 하고…… 으음.’

그 독특한 향은 아무리 집중해도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아마 달콤한 과일 같기는 한데, 정확히 무슨 과일인지 판별해 보려고 하니 어려웠다.

하지만 무슨 향인지 알아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달콤한 과일 향과 은은한 장미 향과 구수한 몰트 향이 뒤섞인 이 향은 너무나 매력적이라 그 자체만으로도 아서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골치 아프게 무슨 향인지 알아맞히려고 씨름하는 것보다는 그저 이 맛과 향을 즐기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찻잔을 반쯤 비운 그가 물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데. 무슨 차야?”

클로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말했다.

“장미와 잭프루트(Jackfruit)를 가향한 홍차예요.”

“잭프루트?”

아서가 물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잭프루트는 동방의 과일 중 하나예요. 두리안과 비슷하게 생긴 아주 거대한 과일인데, 바나나나 망고와 비슷한 부드럽고 새콤달콤한 맛이 나요.”

“두리안은 아는데, 잭프루트는 처음 들어 봐. 역시 넌 차에 대해선 전문가구나.”

“뭘요, 아직 많이 부족한걸요.”

클로에가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차에 대해 칭찬을 듣는 것이 기쁜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서는 그런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꼼짝없이 그녀에게 시선을 붙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킬 것만 같아 아서는 괜히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 꽃 예쁘다. 어디서 났어?”

그가 테이블 위의 붉은 장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클로에의 얼굴이 또 붉어졌다. 그녀가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정말 예쁘죠? 알폰스가…… 아니, 공작님께서 주셨어요.”

그렇게 말하는 클로에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순간 들떠 있던 아서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놈의 알폰스, 알폰스. 지겹지도 않나.’

뱃속이 뒤틀렸다. 누군가가 내장을 비비 꼬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로서는 전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알폰스가 클로에에게 꽃을 주든 말든, 클로에가 알폰스를 이름으로 부르든 말든 아서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화가 났다. 아서는 목구멍으로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삼켰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대답했다.

“그랬어?”

그가 장미를 힐끗 보았다. 아까만 해도 싱그럽고 예쁘게만 보였던 꽃이 이젠 꼴도 보기 싫었다.

장미 향이 나는 홍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만 해도 차를 그렇게 맛있게 마셨는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는 반밖에 비우지 못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이만 가 볼게. 잘 마셨어, 클로에.”

“어머?”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아서는 티 하우스에 한 번 오면 꽤 오래 눌어붙어 있었다.

차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앉아 있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붙여 보려 애쓰기도 했고, 두 번째, 세 번째 주문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 잔을 채 못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다니?

‘아마 바쁘거나 사정이 있겠지.’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러려니 했다. 그만큼이나 그녀에게 아서는 신경 쓸 상대가 아니었다.

아서는 값을 치르고 꼭 쫓기는 사람처럼 티 하우스에서 나왔다.

바람을 쐬니 아까 그의 마음을 점령했던 짜증과 영문 모를 불쾌함도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성이 돌아올수록 오히려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아까 왜 그랬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예민하게 행동해야 할 이유가 있던가?

‘설마, 나는…….’

아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심장은 쿵 쿵 쿵 쿵 빠르게 뛰었다.

‘클로에를 좋아하고 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좋아하는 쪽은 클로에이지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아서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전, 클로에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때의 일을.

그때 클로에가 내비쳤던 감정은, 부끄러워하던 표정과 몸짓은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귀찮고 우습기만 했던 자신 역시 진심이었다.

그러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자신이 클로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서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자신의 무수한 행적과 느꼈던 감정들의 정체를 내심으론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에 바텐베르크를 손에 넣고 싶었다.

그리고, 이 감정은 이제까지 그가 손에 넣었던 무수한 여자들에게 느꼈던 것들과는 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아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아서가 떠난 뒤 엘리나는 한참이나 자신의 집인 자작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마음을 추스르고 자작저를 떠났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바로 클로에의 티 하우스였다.

그곳에 있던 클로에는 엘리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엘리나의 얼굴에서 핏기는 사라져 있었고, 눈은 발갛게 부어 있었다. 클로에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어림짐작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턴 영애,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낯빛이 좋지 않으세요.”

엘리나는 트리플 스위트와 티 하우스의 단골 고객 중 하나였다. 과거 아서와 함께 얼 그레이 아포가토를 먹고 간 다음부터 엘리나는 클로에에게 자주 찾아왔고, 어른스러운 그녀에게 많이 의지하고는 했다.

엘리나는 클로에를 동경했다. 어른스럽고, 남자들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지혜롭고 아름다운 그녀를 자신의 친언니처럼 여겼다. 클로에 역시 자신을 잘 따르고 예의 있는 엘리나에게 친근감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클로에는 엘리나를 티 하우스의 특별실로 인도했다. 자리에 앉자 엘리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런 모습으로 찾아와서 죄송해요, 공작부인. 정말 속상한 일이 있었거든요.”

클로에는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의 진심이 담긴 걱정 어린 눈빛에 격려를 받은 엘리나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저…… 황자님께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지만 엘리나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만 듣고도 클로에는 앞뒤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엘리나는 아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클로에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클로에는 내심 눈치채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엘리나는 아서에게 지극정성이었다.

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아서 황자가 손턴 영애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엘리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빨간 눈시울을 하고도 울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공작부인의 앞에서 실례가 될 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던 엘리나는 그 손길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설마 자신의 손을 잡아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너무나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리고 다정한…….

클로에가 말했다.

“울어도 괜찮아요, 손턴 영애. 실례가 될까 봐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마음이 많이 아프시잖아요. 슬픔을 쏟아 버리세요.”

그 다정한 말에 엘리나의 눈시울에서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물을 뚝뚝 떨구던 그녀는 곧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엘리나가 우는 동안 클로에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있어 주었다. 너무 많이 운 엘리나가 딸꾹질을 하자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클로에는 그녀를 걱정하는 자신의 진심이 전해지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엘리나의 울음이 잦아들자 클로에는 손수건을 빌려주었다. 엘리나는 빨갛게 부은 눈으로 애써 웃었다.

“위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공작부인. 그리고 죄송해요.”

“뭘요. 저는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걸요.”

“아니에요. 저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어요. 특히 울어도 된다고 하신 게요……. 다들 울지 말라고, 소리 내어 우는 건 숙녀답지 못하다고만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엘리나의 눈에는 진심 어린 감동과 감사가 담겨 있어서 클로에는 보람을 느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안정에 좋은 차를 드릴게요.”

그녀는 직원을 불러 차를 준비해 올 것을 지시했다.

곧이어 직원이 티 세트를 내왔다. 클로에는 엘리나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트리플 스위트의 팬을 자처하는 엘리나가 보기에 이 차는 홍차가 아니었다. 하얀 찻잔에 차오르는 수색은 홍차의 갈색을 띠는 붉은빛이 아니라 연한 노란빛이었던 것이다.

엘리나가 어떤 차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자 클로에가 말했다.

“이건 라벤더 차예요. 심신의 안정에 좋아요. 손턴 영애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엘리나는 찻잔을 입에 대었다. 라벤더 특유의 화려하고 진한 향기가 훅 풍겨왔다.

게다가, 클로에의 설명 때문인지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엘리나는 진심으로 감동받은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시다니, 감사해서 어떡하죠?”

“그런 건 걱정 마시고 영애의 마음을 잘 추스르세요.”

클로에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엘리나는 라벤더 차를 맛있게 마셨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클로에와 엘리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기분 전환이 될 만한 가벼운 내용의 이야기였다.

클로에의 위로를 받고, 차도 마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었더니 엘리나는 확실히 기분이 좋아졌다. 클로에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음도 물론이다.

‘공작부인은 정말 좋은 분이시구나. 지혜로우신데 마음도 이렇게 따뜻하시다니…….’

엘리나는 아서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아서를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그가 좋은 교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기중심적일뿐더러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엘리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의 곁에 있게만 해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엘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이나 괴롭고 힘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공작부인, 저는 사실 황자님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클로에가 엘리나를 바라보았다. 엘리나의 얼굴에는 괴로움과 결의가 차 있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하지만…… 이제는 황자님을 놓아드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저는 더 이상 황자님을 사랑하지 않을래요. 아마 무척 힘들겠지만…….”

클로에는 그런 엘리나가 무척이나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손턴 영애를 응원해요. 꼭 진짜 행복과 사랑을 찾으시길 바라요.”

“정말 감사해요, 공작부인.”

엘리나는 클로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티 하우스를 떠났다.

* * *

한편, 아서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클로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다른 여자들을 찾았다. 다른 여자들을 탐닉함으로써 클로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그렇게 지내던 그때였다. 엘리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엘리나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요청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서는 평소 교제 상대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을 싫어했고, 따라서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가 원할 때였다.

‘오랜만에 한 번 만나 주지. 저번에 미안했던 일도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한 아서는 그녀의 요청에 응했다.

그런데…… 그들이 만난 자리에서 엘리나가 꺼낸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송구하지만, 이제 이 관계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아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거나, 엘리나의 말을 잘못 해석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미안하지만…… 뭐라고 했어, 엘리나? 내가 잘못 들었는데…….”

“이 관계를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자님.”

엘리나가 말했다.

“황자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지만, 저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이것은 명백한 이별 선언이었다.

아서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얘, 날 좋아하던 게 아니었나?’

그 역시 엘리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사실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느꼈다.

엘리나는 꽤 오래 그를 연모했다. 이 감정의 불균형을 믿고 그녀를 더 성의 없이 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 쪽에서 먼저 이별을 말하다니? 그가 아니라, 그녀의 쪽에서?

물론 그는 황자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강제로 붙잡아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싫다는 사람 강제로 잡아 두는 건 취향이 아닐뿐더러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구질구질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을 연모하던 상대가 자신과의 이별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자신이 쥐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감정의 주도권을 빼앗긴다는 사실을.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차였다’는 사실을.

아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사라졌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말했다.

“그……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황자님.”

“뭘, 당연한 걸 가지고. 잘 지내, 엘리나.”

아서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엘리나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는 갑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있을 수 없는 일들’에 혼란을 느꼈다.

‘나를 좋아하던 클로에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모자라, 나를 좋아하던 엘리나에게 헤어지자는 소리를 듣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혼란스럽고 괴로울수록 그는 더더욱 다른 여자들을 탐했다. 교제 상대가 있을 때도 개의치 않았지만, 교제 상대마저 없어졌으니 이젠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더욱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이제 그에게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일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런 즐거움도, 만족감도 줄 수 없었다.

이렇게 되니 그도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여자는 단 한 사람, 클로에 바텐베르크뿐이라는 것을. 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도,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오로지 그녀뿐이라는 것을.

* * *

자신이 클로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아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괜찮아. 클로에는 이미 한 번 나를 좋아했었잖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시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 수 있어. 알폰스 그 자식이 집착이 좀 심하기는 하지만 내가 클로에와 만나는 건 법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못 되는데 지가 뭘 어쩌겠어.’

클로에를 유혹하기로 결심한 아서는 바로 그 날부터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첫째로, 그는 매일 클로에가 있는 티 하우스에 방문했다. 그리고 거의 진종일 그곳에서 눌어붙어 있었다.

“어머, 황자 전하께서 또 오셨네요.”

아서가 티 하우스에 오는 것을 직원들은 무척 좋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잘생겼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가 매일 방문하자 티 하우스의 매출이 조금 올랐을 정도였다.

한편 클로에는 골치가 아팠다.

‘아서 황자가 가게에 매일 와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정신이 없는걸. 황자가 있으면 직원들도 그에게 정신이 팔려서 불성실해지고…….’

거기다가, 그는 어떻게든 점수를 딸 기회를 얻기 위해 시간 될 때마다 클로에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클로에는 티 하우스에서 출시할 신메뉴의 재료를 손수 확인하기 위해 시장에 들렀다.

그녀의 곁에는 하녀인 니나가 함께였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아야!”

“어머,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신선한 재료에 정신이 팔린 클로에는 실수로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런데 상대의 낌새가 이상했다. 클로에에게 발을 밟힌 남자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꼭 그녀의 모습을 읽어 들이는 것만 같은 그의 눈빛에 클로에는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좋은 옷을 입고 있군. 기사도 없이 하녀 한 명만 데리고 있는 걸 보니 졸부 집 안주인인가 본데, 제법 돈이 되겠어.’

그렇게 생각한 남자가 말했다.

“아이고, 아파라! 이거 어쩔 거야? 댁 때문에 내 발이 부러졌잖아. 치료비를 받아야겠어!”

“네? 뭐라고요?”

클로에는 어이가 없었다. 살짝 밟았을 뿐인데 발이 부러지다니? 그것도 저렇게 크고 튼튼하게 생긴 사람이.

보아하니 그녀가 부유해 보이니까 한 몫 뜯어내려 하는 사기꾼이 분명했다. 그녀가 따졌다.

“방금 그걸로 발이 부러지시다니 말도 안 돼요. 발을 보여 주세요.”

“마, 마님……!”

“뭐? 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이 여자가 누굴 바보로 아나!”

남자가 주먹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놀란 엘리가 끼어들었다.

“안 돼요! 제발 저희 마님을 때리지 말아 주세요.”

“어른들이 대화하는데 어디 쪼그만 게 끼어들어? 이 꼬맹이가 한 대 맞으려고…….”

“히이이익!”

“이봐요!”

남자가 엘리의 멱살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자 클로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이렇게 작고 어리며 착한 아이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니 어쩔 수 없었다. 저자가 원하는 대로 돈을 주고 보내는 수밖에.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뻐억! 하고 강렬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아악!”

남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따라왔다.

클로에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까만 해도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남자는 얼굴을 감싸 쥐고 땅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사람.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는 조금 가무잡잡한 피부.

뒷모습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황자 전하……!”

그리고 클로에에게 등을 지고 있던 아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완전 극적이었어.’

“커헉! 크흑, 쿨럭쿨럭……. 젠장, 이가 부러졌잖아!”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남자가 부러진 이를 뱉어 냈다. 그는 감히 자신의 귀한 이를 부러뜨린 놈팡이가 어떤 놈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올렸다.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감히…….”

그런 그의 눈에 방금 자신에게 한 방 먹인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체격, 가무잡잡한 피부와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황금빛 눈…….

그리고 하류층에 불과한 남자조차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붉은 머리와 금빛 눈, 가무잡잡한 피부는 이 제국의 주인인 황가의 상징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 저, 전하…….”

“어쭈? 이런 놈도 알아보나 보네.”

아서가 입술을 비틀어 끌어올리며 말했다.

“몰라보고 덤비면 제대로 한 방 먹여 주려고 했더니.”

“주,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허리를 마구 숙였다 폈다 하던 남자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아서는 굳이 그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클로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까지 걸쳐져 있었다.

“또 만났네, 클로에.”

너무 고마워하지는 않아도 돼. 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황자 전하……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클로에가 정곡을 찔렀다. 여기서 차마 ‘널 미행하다가 시비가 걸린 것 같아 쫓아왔다’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서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음…… 뭐, 그냥 지나가다가 어쩌다 보니…….”

“그…… 그러셨군요.”

제국의 황자가 지나가다가 평민의 시장에 들를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렇게 치면 공작부인이 시장에 들르는 것도 몹시 희귀한 일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마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그녀는 적당히 넘겨 버렸다.

클로에에게 있어 아서는 결코 호감 가는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부담스럽고 불편한 상대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저와 제 하녀를 구해 주셔서 무척 감읍합니다, 전하.”

“아니야, 이 정도로 뭘.”

겸손을 떨어 놓고 아서가 말했다.

“흠, 정 고맙다면 말이야, 클로에.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내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겠어?”

“네? 부탁이라고 하시면…….”

“날 위해 잠깐만 시간을 내줬으면 해. 어때? 좋은 데 가서 식사나 한 번 하자.”

<다음 권에 계속>

0